국내 네 번째 현존 서양식 건축 횡성 '풍수원성당'
대한일보
용인,이천지역 40여 순교자 유가족들의 피신처
1896년 정규하아우구스티노신부 2대 본당 부임
국내에서 네번째로 오래된 성당을 반증하듯 우뚝 솟아있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1세기 넘게 풍수원성당을 장승처럼 수호하고 있다.
풍수원성당 전경과 재현한 초가집 모습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풍수원성당 탐방
강원네이처로드,기자단초청 2024네이처로드 팸투어
님의 길 묵묵히,
이제 길을 떠납니다.
이제 길을 걷습니다.
천천히,
나를 떠나기 위해 길을 걷고
길을 걸으며 나를 만납니다.
깊게 걷는
묵묵히 걸으며 나를 돌아보고
234Km 천천히 걸으며 사람과 이웃을 돌아봅니다.
깊게 걸으며
네 공소길 15.4km
나를 떠나고 깊게 걸으며
나를 만납니다.
아홉 고개길
23.5km/6시간
하느님이 이끌어 주십니다./천주교 원주교구 순례길
[풍수원(횡성)=권병창 기자] 목가적인 횡성군 서원면 경성로 소재 풍수원성당의 정규하 신부는 과거 1910년 2월9일, 사목 서한을 통해 “"건축을 시작하였던 성당을 준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이 넉넉지 못하여 잘 짓지는 못하였습니다.
성당 축성식은 주교님의 명령에 따라 시일을 정하겠습니다.”
1세기 훨씬 전 당시 정규하 신부는 한국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을 모델로 꿈에도 그리던 풍수원성당을 완공 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네 번째 오래된 서양식 성당으로 바실리카 양식과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의 부분이 결합한 절충형 건축구조의 풍수원 성당은 이후 지어지는 서양식 성당 건축의 모델이 됐다.
게다가 강원도 최초의 본당 성당으로 1888년 조선교구장 뮈텔(Mutel) 주교께서 본당을 설립했다.
초대 주임으로 프랑스 르메르 신부가 부임해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담당했으며, 그 당시 신자 수는 무려 2,000여명이 되었으며 초가집 20여 채를 성당으로 사용했다.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풍수원 성당은 신앙 선조들의 피신처로 여겼다.
최근 강원네이처로드가 마련한 '기자단초청 2024네이처로드 팸투어'는 사료가치가 높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풍수원성당을 둘러볼 값진 기회를 엿보았다.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 유현1길 30에 위치한 풍수원성당의 전경
강원도의 첫 본당 풍수원 교우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복자 신태보 베드로가 용인,이천 지역의 순교자 유가족들 40여 명과 함께 피신처를 찾아 떠돌다가 풍수원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등으로 삶의 터전, 고향을 떠난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두메산골 풍수원으로 모여들어 교우촌은 점차 큰 촌락을 이루었다.
신자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믿음을 지켜나갔다.
성직자도 없이 신자들끼리 80여 년 동안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한 이곳에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1888년 6월 20일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주교에 의해 강원도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됐다.
초대 주임 신부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메르(Le Merre)가 부임해 마침내 신앙의 꽃을 피웠다.
풍수원성당은 1802년 신태보 베드로를 비롯한 40여 명의 신자가 박해를 피해와 자리잡으면서 시작된 신앙 공동체로 기록된다.
박해가 끝난 후, 1888년 본당으로 설정되어 르메르(1858-1928)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했다.
1896년 우리나라 세번째 사제로 서품을 받은 정규하(아우구스티노, 1863~1943) 신부가 2대 본당 신부로 부임, 47년 동안 신자들과 함께 세상의 빛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었다.
풍수원성당 전경과 재현한 초가집 모습
풍수원성당 초입에 세워진 표지석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신앙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한데 이어 여성들의 모임 '안나회'를 만들어 주체적인 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또 고아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농사지을 땅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 성당은 강원도 최초의 성당,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물이며, 1910년 11월 봉헌됐다.
1920년에는 예수의 사랑과 희생을 되새기는 성체현양을 시작했는데, 이 대회는 2023년에 100회를 맞이했다.
풍수원성당은 설립 당시부터 강원 전체와 경기, 충청, 경상 일부지역까지 관할하며 신앙의 뿌리 역할을 했다.
신앙의 모범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신앙의 실천으로 지금도 여전히 교회의 가지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하느님께 닿아 사랑의 물을 길어 올리는 뿌리 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정규하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는 의병을 지원하여, 일제의 침략기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가 풍수원 본당에 부임했을 때는 동학혁명의 실패, 명성황후 시해사건, 아관파천 등으로 전국에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다.
심지어 풍수원에 의병들이 피신해 왔을 때 신자들과 함께 이들에게 침식제공 등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후원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주권을 잃자 정규하 신부는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당'을 개설해 본격적으로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밤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등 인재를 양성했다.
또한 동정녀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을 돌보았다.
정규하 신부가 사용하던 방은 겨울에는 온돌방이 있는 1층에서 생활했고, 여름에는 2층에서 거주했다.
정규하 신부와 당시 중국의 신학생들 모습
정규하신부의 손떼묻은 오르간
한때 풍금이라고 부르는 오르간<사진>과 책상은 정규하 신부가 사용하던 것이다.
이곳에 머물면서 초기 본당 신자들을 위해 직접 흙으로 빚어 십자고상을 만들기도 하고 촛대를 제작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이뿐아니라, 풍수원성당의 의인으로 회자되는 조이분마리아 할머니는 1891년에 태어나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다 9살의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로 보내졌다.
게다가 시어머니의 학대와 구타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고관절 파열로 절름발이가 되어 쫓겨나 전전하다 풍수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남의 애보기와 살림을 거들다 마침내 정규하 신부의 배려로 '안나의 집' 문간채에 살며 소량의 쌀을 지원받게 되자, 고아와 장애인 등 7명을 데리고 산나물을 뜯고 땔감을 손수 장만하면서 공동생활을 꾸려가는 봉사와 희생을 이어갔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된 이후에도 4명의 고아를 돌보고, 반신불수와 중증치매인 등 두 할머니의 밥을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수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6·25전쟁 때는 피난도 가지 않고 성당 성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어둠으로써 성물들을 지켜냈다.
조 할머니는 동네 노인 임종 때마다 며칠씩 밤을 지새며 유족과 함께 하고 돌보기 일쑤였다.
살림이 어려운 집 아이들을 돌봐줌으로써 부모들이 안심하고 농사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고귀한 희생과 봉사를 평생토록 실천하다가 1971년 6월 24일 임종했다.
지금도 풍수원성당 뒷편 십자가의 길에는 조 할머니의 묘소가 안치돼 여전히 신자들의 산 교육장으로 연중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대한일보sky767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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