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우리가 글을 쓰고 저작을 하는 것은 정신생명의 불후를 추구하는 때문입니다. 유협이 문심조룡(文心彫龍)에서 경서에 대해 이르기를 “빼어난 지성과 탁월한 재기를 타고난 성인이 우주 만물의 현상을 관찰하여 그 이치를 깨닫고(마음의 눈으로 보는 경지 임) 이를 전하기 위해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게 소통임)이 경서임으로 비록 성인은 돌아 가셨지만 경서에 담긴 그 마음만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문학 역시 바른 마음이 바르게 전해지도록 애를 써야 하며 "바른 깨달음과 바른 소통" 이게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사문(邪文)이 될 위험이 높다는 말입니다.
평론가들이 문학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하니 글 쓰는 이들이 국어사전에 있는 아름다운 단어란 단어를 다 찾아서 문장에 집어넣어 미문으로 만드는 경향들도 있는데 그건 문장이 아니라 까마귀가 온갖 새들의 깃털을 주어 와서 제 몸에다 붙이고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새라고 뽐내는 것과 같습니다. 깨우치기도 어렵지만 전하기는 백배나 더 어렵습니다. 학식이나 체험이나 관조나 사유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고, 그것을 누대에 까지 효과적으로 전하해지도록 만들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프로베르가 말했다는 실개천의 물(깨달음) 을 모아 그걸 폭포수로 만드는 일이 바로 문학화를 시키는 전(傳)하는 작업의 대(大)공사(工事)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인간의 뇌리에 오래 기억되도록 효과적으로 전하는 기법으로는 크게 직유, 은유, 상징이 있습니다. 직유를 남발하면 반발심을 불러일으켜 흡수가 되질 않고, 상징을 남발하면 전설이나 신화 같은 글이 되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계시록이나 비기서 같은 도참적인 글이 되거나 횡설수설하는 글이 되어 사람들의 영혼을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는 혹세무민의 글이 됩니다. 은유는 은근함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며 젖어 들게 됩니다. (피천득은 은유의 대가 입니다.)
직유을 쓰든 은유를 쓰든 상징을 쓰든 작가의 마음은 늘 바르게 흘러야 합니다.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심(行心)이 바르다는 증거이고, 바른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문심(文心)이 바르게 흐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묘하고 화려한 색깔을 입힌 말에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없다는 말은 문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 됩니다. 문학합네 하다가 영적인 세계에 헛바람이 들면 "바람 든 무"처럼 아무짝에도 쓰지 못하는, 문학하기 이전보다 더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글은 작가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아름다운 꽃밭에서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어울려 예쁜 옷을 입고 함박웃음을 지어 봐도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레벨이 어떠한지 금방 알게 됩니다. 글이 본질이고 나머지는 허깨비이기 때문입니다.
글 이전의 본질은 마음이고 마음 이전의 본질은 영혼(=인간 내면에 깊이 잠재된 무의식)입니다. 영혼(=무의식)의 씻김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머리와 손끝으로만 글을 쓰는 작가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껍데기에다 온 마음을 집중하니 참 글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참 작가가 되려면 기교에다 정신을 팔지 말고 자기 영혼의 상처를 씻어내는 일에 먼저 몰두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슬펐던 이야기,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이야기를 거짓 없이 먼저 써내야 합니다. 혼자서 펑펑 울면서 자기 마음의 응어리를 비워내야 합니다. 그래야 맑은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문학 앞에서 명예, 돈. 인기 그런 것들은 다 헛바람입니다. 글을 통해서 내 영혼이 먼저 구원되지 않으면 천하의 문장도 사마상여의 빈 수레처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다만 혹세무민하는 자들의 농 짓거리일 뿐인 것입니다. 교묘한 언어로는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결코 감동시키지는 못한다는 이 말은 문학에도 꼭 들어맞는 명언입니다. (카페에서도 칭찬의 댓글을 남용하지 마세요! 귀한 자식은 매로 키우고 미운 자식은 밥으로 키운다는 속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