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라는데, 자주 만나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데, 우리는 세 번째 여행을 간다. 첫 번째는 양평에 다녀왔고 두 번째는 삼척에 다녀왔다. 세 번째로 증평 벨포레로 간다. 물론 딸과 사위의 계획 덕분이다. 둘 다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한 덕분이다. 구경할 곳과 먹을 곳등 여행 일정을 짜임새 있게 계획한다. 신경 쓸 일이 없으니, 몸과 마음이 편하다. 양가 부모님의 연배가 비슷하여 살아온 시대 배경 또한 비슷하니 사고방식이 엇비슷하다. 그래도 그럴 수 있지 저래도 저럴 수 있지 수긍할 줄 아는 나이이기도 하다.
외손주의 돌잔치를 장소 관계상 12월 9일에 치뤘지만, 실제 돌은 1월2일이다. 그 날짜에 맞추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계획한 것이다. 돌잔치날 돌잡이를 할 때 그만 손주가 판사봉에 손을 올려놓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안타깝게도 잡지는 않은 것이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잡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안사돈께서 돌잡이를 다시 해보자고 하셨다.
증평. 처음이다. 충북 증평은 역사 시간에 특별하게 배운 기억도 없고 특별하게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증평에 둘러볼만한 곳을 찾아봐도 그렇게 눈에 띄는 곳은 없다. 찾아보니 삼국시대 백제가 축조한 추성산성이 있고 이성계 휘하에서 공을 세운 정후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정후사가 있단다. 2시간이면 도착하니 부담없이 떠난다. 손자의 카시트를 우리 차에 장착하고 딸과 손주와 함께 출발하고 사위는 광명에 사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간다. 증평에서 유명하다는 칼국수집에서 만났다. 만나면 반가운 게 사람이다. 안사돈과 얼싸안고 인사를 나눴다. 만날수록 정답다.
좌구산 자연휴양림으로 갔다. 겨울인지라 나무들은 옷을 벗어 스산했다. 지역이 높아서인지 바람이 차갑고 거셌다. 녹음이 우거진 계절이나 나무들이 물들어가는 가을에 오면 험준한 산세 풍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겠다. 출렁다리가 한참 위쪽에 있고 그곳으로 향하는 계단이 까마득했다. 아기가 있고 우리는 나이를 먹었으니 혹 엘리베이터가 있을까 기대했는데 없다. 우리는 천천히 올라가고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른 외할아버지는 외손자를 안고 뛸 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사랑의 힘이다. 대단해요 대단해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출렁다리는 이 지역 저 지역에 하도 많이 만들어져있어서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다. 바닥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다면 아랫녘이 깊고 깊어 어지러워서 소리를 지르겠지만 그냥 출렁다리였다. 이미 경험한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시들해하기 마련. 사람은 변덕스러운 탓에 새로운 것에만 반응한다. 첫돌을 맞이하는 손주와 사돈네와 딸과 사위와 함께라는게 더 특별하다. 바람이 불어오니 출렁다리가 제법 흔들렸다. 흔들리는 와중에도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었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산세가 험하고 까마득했다. 행복과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가 앉아있는 형상이라서 좌구산이라 이름붙였단다.
벨포레 리조트로 갔다. 벨포레는 리조트와 골프장과 물놀이 시설과 목장과 음식점들과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탈 수 있는 놀이기구를 골고루 갖춰 놓은 유흥지였다. 벨포레는 증평 도안면에 자리하고 있다. 총 부지 면적은 92만평이란다, 그 중 관광단지 면적만 79만평이란다. 도보 이동은 어렵고, 셔틀을 타고 다니게 되어 있단다.
콘도에 도착. 딸네와 우리가 묵을 숙소는 51평. 사돈 두 분의 방은 34평. 넓은 방 두 개와 넓은 거실, 각 방에는 더블침대와 일인용 침대가 있고 화장실이 있었다. 베란다 앞쪽으로 굴곡과 언덕이 많은 골프장이 보이고 범퍼카를 탈 수 있는 넓은 시설이 보였다. 왼쪽으로는 물놀이 시설이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랫녘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있다. 그동안 다녀본 리조트들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다양한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다. 봄과 여름과 가을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듯 하다. 겨울이라 그나마 덜 붐벼서 좋았다.
한정식집 남도예담에서 저녁으로 떡갈비와 보리굴비와 갈비탕을 먹었다. 정갈하고 맛갈스러웠다. 주부는 누가 해 주는 밥이 제일 맛있게 마련. 대접받는 기분이다. 집으로 돌아와 외손주가 잠이 든 후 치킨을 시켜 둘러앉았다. 바깥사돈과 사위는 술을 좋아한다. 남편은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되고 좋은 양주 한 병을 챙겨왔다. 향기가 대단하다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부드럽다나? 과한 칭찬에 남편은 신이났다. 술을 마신만큼 이야기가 풍성해지면서 화기애애해졌다. 특히 바깥 사돈의 언변은 공부를 끊이지 않고 하셔서인가. 탄탄한 이론이 바탕에 깔려있어 어디에 가서 강의를 해도 충분해 보였다. 오대독자의 넘볼 수 없는 자존감이 얼핏얼핏 엿보였다.
다음날 아침은 뷔페에서 조식을 먹었다. 장소가 꽤 넓었는데 사람들이 와글와글거렸다. 아가를 데리고 온 부부들이 많았다. 일인당 30,000원인데 여유로운 사람들 참 많다. 한국이 부자는 부자다. 나는 속으로 사실 아깝다. 아침에 얼마나 먹는다고? 국내에서 놀러 갈 때면 늘 아침밥을 준비해 가서 먹었는데, 뷔페에 가서 먹으니 비싸지만 자유롭고 다채롭고 편했다. 내 몸과 손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크림수프와 요플레와 과일을 듬뿍 먹었다. 두썸플레이스 커피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눴다. 여행은 여유를 즐기는 일. 또한 무엇에서든지 해방되는 일이다. 주부는 주방에서 직장인은 직장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나이 먹은 우리 네 명은 따분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상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목장이 있고 아이들을 위한 양몰이 시간이란다. 양들을 몰아가는 개, 보더폴리가 양들과 벌이는 쇼다. 양을 모는 개를 영상에서야 많이 보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양을 몰아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전후좌우로 쏜살같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뛰어다니며 양을 모는 솜씨에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손주보다 어른들이 더 신이났다. 쇼가 끝난 후 양에게 먹이를 먹이는 시간이 왔고. 사위가 양의 먹이를 두 접시 사왔다. 양몰이 구경값에 양 먹이값까지, 장사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치밀하게 끝까지 계산적이다. 오후에는 회전목마를 비롯해 세 가지를 탔다. 안사돈은 얼마나 씩씩하고 솔직하신지 친구 같이 편하다. 나는 못탔지만 잔디 썰매를 신나게 타셨다. 행글라이더도 타본 경험이 있으시단다.
손주 돌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케익에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며 축하했다. 물론 지난번에 성공하지 못한 돌잡이도 했다. 손주는 어찌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지 한참 들여다보고만 있어서 우리를 궁금함으로 몰아갔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만지다 만 판사봉을 들어 올렸다. 판사봉! 결정권자! 손주가 진짜 판사가 된 듯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손주가 어리기도 하고 잠자는 시간이기도하고 날씨도 춥고, 저녁은 배달해 먹기로 하였다. 숯불구이 바베큐란다. 1월1일. 사실 누구나 쉬고 싶은 날이다. 여행객들을 위해 음식점문을 열어놓았다 해도 일찍 집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8시까지 주문을 받는다고 해서 8시 전에 전화를 했는데. 저런 저런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조금 일찍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1월1일이니까. 사위의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이었다. 이번 여행을 모두가 만족스럽게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구석진 곳에다 데려다 놓고 저녁밥도 안 주는거냐? 바깥사돈이 농조로 한 말씀 하셨다. 여기저기 주변의 먹거리를 다 알아보았지만 없다 없다. 방법이 없다. 어제 시켜 먹은 치킨을 다시 시켰다. 맥주와 함께 먹었다. 맛있게 화기애애하게 잘 먹었다.
1월 2일 아침. 손주 돌날이다. 생애 첫번째 생일 아닌가. 외할머니인 내가 간소하나마 차려주고 싶었다. 미역국과 곰탕과 불고기와 장조림과 김치를 비롯한 밑반찬 서너가지를 준비해 갔다. 하필이면 조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자레인지 하나 뿐이었다. 햇반을 사다가 밥과 국을 전자레인지에 덥혀서 먹어야 했다. 여섯식구가 한꺼번에 먹으려면 열두 번 전지레인지를 돌려야 하므로 두 사람씩 차례로 먹었다. 전날 저녁에 치킨만 먹어서인지 밥이 꿀맛이었다. 바깥사돈은 어찌나 정리정돈을 잘하시는지 밥을 먹고 난 자리가 깨끗하시다. 어제 조식을 먹을 때도 식사가 끝난 뒤 휴지는 휴지대로 빈그릇은 빈그릇대로 포개놓아 깔끔하게 정리하셨다. 일하는 사람들 얼마나 힘들어 내가 조금 움직이면 덜 힘들지 않을까. 나도 실천에 옮겨야겠다.
감사한 여행이다. 양쪽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건강하니 감사한 일이다. 손주가 잘 자라주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온 가족이 모였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계획하고 실행한 딸과 사위가 기특하고 감사하다. 즐겁게 여행을 무사히 끝냈으니 감사하다. 손주 두 돌 때 또 만나요 내 말에 안사돈이 흔쾌히 고개를 끄떡이신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