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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모세, 그리고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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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자크 저, 김정란 역, <람세스>(전 5권, 문학동네, 1997) 47,500원
신왕국 시대 제18왕조가 시작된 후 이집트 종교는 심각한 타락상을 보였다. 종교에서의 윤리적 중요성은 무시되고 미신과 주술이 득세했다. 그 결과 사제들의 세력이 커졌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심장―양심을 상징한다―이 그의 본성을 폭로하는 것을 막게 해준다는 부적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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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제문(祭文)을 팔기도 했는데,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힌 이 제문을 무덤에 묻으면 죽은 자들이 천상계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문을 모아놓은 것이 <사자(死者)의 서(書)>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이집트인의 경전이 아니라 제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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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크나톤의 유일신교에 대한 열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집트 대중은 종래의 다신교 풍습에 끝끝내 집착했고, 사제들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새로운 신의 존재를 반대했다. 궁중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거의 한 세대 동안 이집트는 혼란에 빠졌다. 아크나톤은 처형되었고 종국에는 구질서가 다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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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아톤교 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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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나톤의 시대가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제19왕조의 세 번째 왕 람세스 2세(1279-1213 재위)가 즉위했다. 무려 66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던 그는 여러 명의 왕비와 130명이 넘는 자녀를 둔 절륜한 정력의 사내였다. 그는 당시 오리엔트 세계에서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던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왕과 카데슈 전투에서 당당히 맞서며 팔레스타인을 경영했고, 서쪽으로는 리비아, 남쪽으로는 누비아를 정벌한 세계제국의 군주였다. 그는 전쟁 외에도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이고 이집트 여러 곳에 거대한 자신의 조각상을 많이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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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람세스 2세는 그러한 업적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인물이다.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면서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이집트 왕자로 교육받은 모세는 왕자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노예살이 하던 히브리인을 이끌고 고단한 엑소더스의 길로 들어선 히브리인의 영웅이다. 그 과정에서 모세는 메뚜기, 개구리 등 열 가지 재앙으로 람세스 2세와 치열한 대결을 벌인다. 이 이야기는 1956년 미국 영화감독 세실 B. 드밀에 의해 <십계>로 영화화 되었고(율 브린너, 찰턴 헤스턴 주연), 1998년에는 할리우드에서 <이집트왕자>라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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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과연 그런 인물이었을까?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반박한 인물이 있다. 정신분석학자로 너무나 잘 알려진 지그문트 프로이트―그는 유대인이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아크나톤이 주도한 이집트 종교혁명의 와중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고 말한다. 마치 바울이 그리스도교를 수립하려는 열망에 고무되었던 것처럼, 아톤교를 유지하고자 했던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모세와 유일신교>(1938)에서 프로이트는 바로 그 인물이 모세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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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 또는 아톤교의 성직자였다는 것이다. 유일신교를 낯설고 이질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집트인들에게 실망한 모세는, 당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유대인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해, 자신이 신봉하는 유일신교를 그들이 받아들인다면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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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모세, 호메로스가 한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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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모세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유일신 종교를 택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민족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유대인들은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협상이 성공적일 수 있었다고 한다. 자유의 대가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그의 종교를 자신들의 것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마치 정통 유대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자 사도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유대인 아닌 이방인들에게 가르친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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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모세가 몰락한 아톤교를 재건하려 한 이집트인이었다고 가정한다. 이집트에서 아톤교의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당시 하비루라고 불리던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 가나안에 재건한 종교가 바로 야훼를 섬기는 유일신교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히브리어에서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가 바로 ‘아톤’에서 온 것이며,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는 입이 무거웠다”는 구절은 그가 이집트인이어서 히브리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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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자크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대한 로망으로 꽃피워냈다. 이 작품은 <출애굽기>, <십계>, <이집트왕자>가 전해주는 모세 이야기와는 딴판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을 대폭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주장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모세를 람세스와 절친한 친구 사이로 간주하기는 하되, 처음부터 히브리인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프로이트의 주장과 다르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유일신교인 아톤교 도입을 주도했던 아크나톤의 증손녀, 그리고 그녀를 통해 제18왕조와 아톤교를 재건하려는 오피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가 프로이트의 주장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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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고대 역사에 관심을 갖는 독자라면 깜짝 놀랄만한 장면도 나온다. 저 유명한 트로이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절세미인 헬레네와 그리스 최고의 시인 호메로스가, 전쟁이 끝난 후 바다를 건너 이집트에 와서 람세스의 환대를 받으며 이집트에서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니 기원전 13세기에 살았던 람세스 2세가 호메로스와 만나는 장면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려 5백년의 시차가 벌어진다. 전적으로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허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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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따로 따로 입력된 기원전 13세기의 역사적 현상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흥미로운 지적 경험을 하게 된다. 조각 그림처럼 흩어져 있던 (람세스로 대표되는) 이집트 문명, (모세로 대표되는) 히브리 문명, (호메로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명이 한 자리에 모아지면서, 13세기를 무대로 아프리카 문명, 서남아시아 문명, 유럽 문명이 통합되는 인상적인 장면이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는 것이다. (혹시 작가도 이것을 노렸던 것 아닐까?)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고대사 관련 지식 축적의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