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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한병철(1959~ )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교수자격 획득.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저서 <피로사회>를 통해 독일에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문화비평가로 떠올랐다.」
[한국어판 서문]
오늘날의 피로사회는 시간 자체를 인질로 잡고 있다. 이 사회는 시간을 일에 묶어두고, 시간을 곧 일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일의 시간은 향기가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의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은 없다. 쉬는 시간도 다른 시간이 아니다. 쉬는 시간은 그저 일의 시간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ㄴ느다. 일의 시간은 오늘날 시간 전체를 잠식해 버렸다.
우리는 휴가 때문만 아니라 잠잘 때에도 일의 시간을 데리고 간다. 그래서 우리는 잠 자리가 그토록 편치 못한 것이다.
[역자 해설]
-기다림의 감각-
시간의 향기(2009)는 헤겔, 마르크스, 니체, 프루스트, 하이데거, 베버, 료타르, 한나 아렌트 등 근현대의 주요 작가, 사상가들과의 대결을 통해 진정한 안식을 모르는 현대적 삶에 대한 진단과 근본적 비판을 시도하고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한 한병철의 저서이다. 이 책은 피로사회(2010)의 전작으로서, 두 책은 주제적으로 긴밀한 연속관계에 있다.
한병철은 오늘의 사회가 시간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진단한다. 왜 나는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그토록 바쁘게 지냈지만 어째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나는 주어진 많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오늘날 시간은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 된다. 시간은 균질한 시- 점들로 축소된 현재들의 나열일 뿐이다. 현재는 지속성을 상실하고 순간순간 가볍게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다. 그것은 시간에 무게를 더해주던 의미의 중심, 의미의 중력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무게를 상실한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지만, 사실은 어디로도 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시간은 미래를 향해 진행된다. 그러나 미래에 더 이상 어떤 의미론적 내용도 없는 까닭에, 시간의 진행은 어디론가를 향한 전진이 아니라 단순히 끝없는 현재의 사라짐일 뿐이다.
그러면 왜 의미의 중심이 사라지는가? 세계를 인간의 작위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세계관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은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인간은 행위를 통해 세계를 바꾸어 갈 수 있기에 주체로 정립되고, 이러한 주체됨이 인간에게 지고의 가치를 부여 한다.
활동적 삶은 시간도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주체적 개입을 통해 시간을 단축시킨다. 기차, 자동차, 비행기, 전신, 라디오, 컴퓨터, 인터넷, 디지털화, 이 모든 것이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한 지난날 싸움이었다. 시간에 구속되지 않고 시간에서 자유로움으로써 완전한 주체가 되기 위한 쌍무이었다. 그런데 이 싸움 속에서 전통적인 시간의 리듬, 그리고 그 리듬 위에 형성된 삶에 대한 감각은 파괴된다. 모든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는 ㅇ니간의 막대한 능력이 시간을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만든다. 무엇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줄어드는데 비례하여 시간의 값은 싸지기 때문이다. 그러자 시간의 보복이 시작된다. 무게를 잃어버린 시간은 댐이 무너진 거센 물살처럼 마구 흘러가버린다. 인생도 그 물살에 휩쓸려 가볍게 떠 내려 간다.
사람들은 오늘날 훨씬 더 젊고 건강하게 더 오래 산다. 그러나 살아가는 시간의 무게는 말할 수 없이 가벼워졌다. 사람들이 예전보다 잘 늙지 않지만 훨씬 더 빠르게 나이를 먹어버린다는 역설은 여기서 생겨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삶의 시간의 양적인 증가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리듬이 없는 시간은 고유한 시간의 질을 상실한 채 양화된 시간이다. 그것을 저자는 “향기가 없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서론]
오늘날 닥쳐온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로 규정할 수 없다. 가속화의 시간은 지나가버렸다. 우리가 현재 가속화라고 느끼는 것은 시간 분산의 징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시대가 겪는 시간의 위기는 다양한 시간적 혼란과 착오를 초래하는 반 시간성 때문이다. 오늘의 시간에는 질서를 부여하는 리듬이 없다. 그래서 시간은 혼란에 빠진다. 반 시간성으로 인해 시간은 어지럽게 날아가 버린다. 삶이 가속화 된다는 느낌은 실제로는 방향 없이 날아가 버리는 시간에서 오는 감각이다.
반 시간성은 더 강화된 가속화의 결과가 아니다. 반 시간성을 가져온 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원자화다.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지나간다는 느낌도 시간의 원자화에 기인한 것이다. 시간의 분산은 지속의 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어떤 것도 시간을 늦추지 못한다. 삶은 더 이상 지속을 수립하는 질서의 구조나 좌표 속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동일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도 금세 사라져버리는 덧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이 극단적으로 무상해진다. 삶의 원자화는 원자적 정체성으로 귀착한다. 사람들에겐 자기 자신, 즉 작은 자아 밖에 없다. 인간은 급격하게 공간과 시간을, 세계를, 공동의 삶을 상실해간다. 세계의 결핍은 반시간적 현상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작은 육체로 쪼그라들며, 그 작은 육체를 건강하게 지키려고 악착같이 애쓰게 된다. 그것밖에는 가진게 없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육체의 건강이 세계와 신을 대신한다.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은 그토록 죽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이만 먹을뿐 늙지 않는다.
이 책은 반시간성의 원인과 징후를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추적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질병의 치유 가능성에 대해서도 숙고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종시간성Heterochronien이나 무시간성Uchronien처럼 비범하고 일상적이지 않는 짓고의 장소들을 탐색할 터이지만, 이 연구는 그러한 것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 회고를 통해, 시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이 일상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다른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미래의 전망을 부각시킬 것이다.
이야기의 시간이 사라진 것을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야기의 종언, 역사의 종언이 꼭 시간적 공허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야기의 종언은 신학과 목적론이 없는,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는 삶의 시간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먼저 비타 콘템플라티바 vita contemplativa, 즉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오늘날 닥친 시간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활ㄷ오적 삶vita activa의 절대화와 관계가 있다. 활동적 삶이 절대화되면서 노동은 절대적 명령이 되고 인간은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활동의 과잉이 일상을 지배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사색적 요소, 머무름의 능력은 완전히 실종되고 만다. 그 결과는 세계의 상실, 시간의 상실이다. 이른바 느리게 살기 정략으로는 이러한 시간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 전략은 심지어 본질적인 문제를 은폐하기까지 한다.
필요한 것은 사색적 삶을 되살리는 일이다. 시간 위기는 위기에 봉착한 활ㄷ오적 삶이 사색적 삶을 다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에 비로소 극복될 것이다.
[불- 시un-Zeit]
불시에 끝장난다ver-enden(끝나다 enden에 ver 하는 전철이 결합된 동사verenden은 본래 동물이 죽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철 ver-는 흔히 동사의 의미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부여하며, 따라서 ver-enden은 제대로 되지 못한 끝남을 가리킨다-역자). 제때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불시에 끝날 수밖에 없다.
의미 있는 종결의 형식을 빼앗긴 삶은 불시에 중단될 수 있을 뿐이다. 종결 내지 완결이 불가능해지고 방향도 끝도 없는 전진, 영구적인 미완성과 새로운 시작만이 남아 있는 세계, 즉 살이 하나의 형태로, 하나의 전체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죽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삶의 과정은 불시에 끊어지고 만다.
오늘날의 가속화 역시 끝을 맺고 마무리하는 능력의 전반적인 소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은 그 어디에서도 종결과 완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을 붙들어주는 아무런 시간적 중력도 없기 때문에, 그저 마구 돌진할 뿐이다. 그러니까 가속화는 시간의 댐이 무너진 상황의 가시적 결과인 것이다. 시간의 강물을 조절하고 분절하고 그것에 리듬을 부여하는 댐, 즉 그 멋진 이중의 의미에서 할트Halt가 됨으로써 시간을 붙들고 지체시켜온 시간의 댐은 사라져버렸다.
제때 죽어라.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다. 물론, 제때 산 적이 없는 사람이 어찌 제때 죽을 수 있으랴? 인간은 적절한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적시의 자리를 불시가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시간을 타는 사물들은 예전보다 더 빨리 낡아버린다. 이들은 순식간에 과거의 것으로 전락하고 관심 밖으로 밀려 난다. 현재는 현재적인 것의 끝 부분으로 축소되어버린다. 현재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인식의 힘은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 모두에서 나온다. 이러한 여러 시간 층위의 착종을 통해 비로소 지식은 인식으로 응축된다. 이러한 시간적 응축은 인식과 정보를 가르는 변별점이기도 하다. 정보는 시간적으로 공허하며, 결여적 의미에서 무시간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적 중립성 때문에 정보는 저장해두었다가 임의로 호출할 수 있는 것이다.
충만한 삶은 그저 양적 논리로 정의되지 않는다. 온갖 삶의 가능성들을 실현한다고 자연히 충만한 삶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건들을 단순히 헤아리고 열거한다고 저절로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가 되려면 의미를 빚어내는 특별한 종합이 필요하다. 사건들의 장황한 나열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면 아주 짧은 이야기라도 고도의 서사적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극히 짧은 삶도 충만한 삶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
가속화의 태제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오늘날 삶이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삶이 의미 있게 완결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삶이 분주하고 초조해진 원인이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이 시작하고 삶의 가능성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우왕좌왕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단 하나의 가능성을 완성하고 마무리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을 충만하게 해 줄 어떤 이야기도, 의미를 만들어주는 전체도 없다.
삶은 결코 안식과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오늘날 죽음과 관련하여 언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삶이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삶이란 어느 정도 넓이가 있어야 지속성도 지닐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삶 속에는 세계가 거의 담겨 있지 않다. 이렇게 원자화된 삶은 극단적으로 죽음에 취약해진다.
인생은 더 이상 단계, 완결, 문턱, 과도기 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달려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지만 늙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불시에 끝나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죽는 것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어려워진 것이다.
[향기 없는 시간]
이야기는 시간에 향기를 불어넣는다. 반면 점- 시간은 향기가 없는 시간이다. 시간은 지속성을 지닐 때, 서사적 긴장이나 심층적 긴장을 획득할 때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 시간에서 모든 의미 구조와 심층 구조가 떨어져 나간다면, 시간이 원자화된다면, 평면화되고 희석되고 단축되어 버린다면, 시간의 향기도 사라지고 만다. 시간을 붙드는, 붙들어 제어하는 닻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 시간은 완전성을 잃는다. 받침대에서 분리된 시간은 마구 내달리기 시작한다. 최근 많이 논의 되고 있는 가속화는 생활세계의 다양한 변화를 촉발하는 원천적 과정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문제의 징후 또는 파생적 과정일 뿐이다. 안전성을 잃어버린 원자화된 시간, 붙들어주는 어떤 중력도 없는 시간이 가져온 결과인 것이다. 시간은 내달려 간다. 황급하게 마구 달려간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적 결핍을 만회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런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가속화만으로 받침대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속화는 오히려 기존의 존재 결핍의 상태를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킬 따름이다.
[역사의 속도]
인간이 땅 위에서 빨리 움직일수록 땅은 그만큼 줄어든다.
전자우편은 무공간적이다.
물질은 시간의 흐름을 늦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은 밀도가 큰 물체의 표면에서 더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도 뚜렷한 시간의 분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까닭에 더욱 더 강화된다. 중력의 부재로 인해 사물들은 슬쩍 스쳐 지나갈 뿐이다. 아무것도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아무것도 결정적이지 않다. 아무것도 최종적이지 않다. 어떤 결정적 단락도 생겨나지 않는다. 더 이상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등가의 연결 가능성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즉 더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어떤 일이 완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완결은 구조화된 유기적 시간을 전제한다. 반면 무한한 열린 과정 속에서는 그 무엇과도 완결되지 못한다. 미완성이 항상적 상태가 된다.
[행진의 시대에서 난비亂飛의 시대로]
지그먼트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의 인간은 사막 같은 세계를 헤매고 다니는 순례자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무형의 것에 형태를, 에피소드적인 것에 연속성을 부여하고 파편적인 것에서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낸다. 근대의 순례자는 계획을 향한 삶을 실천한다.
순례자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기는 자기 집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저기를 향해 가는 중이다. 근대에서는 바로 이러한 여기와 저기의 차이가 사라진다. 저기가 아니라 더 나은 여기, 다른 여기를 향해 근대의 인간은 나아간다.
근대는 탈소여와 자유의 시대이다.
근대는 목적 지향적이다. 근대의 걸음걸이는 목표를 향한 행진이다. 유유자적한 태도로 걷는 것,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은 근대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다.
자유롭다Frei, 평화Freide, 친구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ei는 사랑하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 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우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언어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오늘의 삶은 받침대가 없는 까닭에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시간의 분산은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개인의 시간 살림살이에서 짐을 덜어줄 안정적인 사회적 리듬과 박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다양화되는 경향이 개개인을 과도한 부담으로 짓누르고 과민상태로 몰아간다. 따라야 할 시간 규정이 사라진 결과,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상실 상태가 초래된다.
끊임없이 새로 출발해야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옵션, 새로운 버전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삶이 빨라졌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지속성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느낌일 뿐이다.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서사적 논리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과정이 가속화된다면, 그것은 좀처럼 가속화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과거보다 훨씬 더 빨리 간다는 인상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머무를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 지속의 경험이 대담히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정에서 비롯된다. 쫓긴다는 느낌이 놓쳐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는 것도 잘못된 가정이다. 뭔가를 놓쳐버릴 수 있다는 불안과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의 속도를 더 높여보고자 하는 소망은 근대에 발달해온 문화 프로그램의 결과이다. 이 문화 프로그램의 핵심은 세계의 가능성들을 더 빠르게 맛봄으로써 - 다시 말해 체험 속도의 증대를 통해 - 각자의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들고 더 풍부한 체험으로 세워가는 것, 바로 그렇게 해서 좋은 삶을 실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속에 가속화가 약속하는 문화적 희망이 담겨 있다. 그 결과 주체들은 더욱더 빨리 살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더 빨리 살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결국 죽기도 더 빨리 죽고 만다. 삶을 더욱 더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사건들이 빠르게 연달아 일어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것은 싹트지 못한다. 충족과 의미는 양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긴 것과 느린 것이 없이 빠르게 산 삶, 짧고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는 체험들로 이루어진 삶은 체험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 자체 짧은 삶일 뿐이다.
미래의 걸음걸이는 어떤 모습일까? 순례의 시대나 행진의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인간은 짧은 난비의 단계를 넘기고 다시 걷는자Geher로서 땅 위로 돌아갈 것인가? 또는 땅의 무거움, 노동의 무거움을 아예 벗어던지고 가벼운 유영을, 유영하는 듯 느긋한 방랑을, 그러니까 부유하는 시간의 향기를 발견할 것인가?
[현재의 역설]
정념의 위상학 속에는 간격과 문턱이 있다. 간격과 문턱은 망각과 상실, 죽음과 공포와 불안의 영역이지만, 또한 동경과 희망, 모험, 약속과 기대의 영역이기도 하다. 많은 점에서 간격은 괴로움과 고통의 원천이다. 기억은 있었던 것을 망각에 빠뜨리는 시간과 맞서 싸울 때 정념이 된다. 고대하는 것, 약속된 것의 출현, 즉 최종적 도래의 순간이 지연될 때 기다림은 괴로움을 낳는다.
시간적 간격은 두 개의 상태, 또는 두 개의 사건 사이에 펼쳐진다. 그 사이의 시간은 이행의 시간으로서, 이때 인간은 어떤 특정한 상태에도 속하지 못한다.
불확정성이 과다해지면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머뭇거림은 문턱에서의 걸음걸이다. 수줍음도 문턱의 감정에 속한다. 출발과 도착을 분리하는 사이의 시간은 예측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야 하는 불확실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동시에 희망의 시간, 기대의 시간, 도착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순례의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저기로 건너가는 길이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순례자는 구원이 약속된 미래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관광객이 아니다. 관광객의 사전에 건너감이란 없다. 관광객에게는 모든 곳이 여기요 지금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길 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길은 볼거리가 없는 공허한 통로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가 전적으로 목표에만 집중한다면, 목표지점에 이르는 공간적 간격은 그저 최대한 빨리 극복해야 할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순전히 목표지향적인 태도는 사이공간의 의미를 파괴한다.
[떡갈나무의 냄새]
전반적으로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오직 사색적인 머무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가속화가 먼저 발생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색적 삶의 상실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가속화와 사색적 삶의 상실 사이의 관계는 더 복잡하다.
세계의 전반적인 탈소여화는 사물에서 고유의 광채를, 고유의 무게를 모조리 빼앗고 그것을 제작 가능한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사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만들 수 있고 제작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소여성이 물러나고 제작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존재는 소여성을 상실하고 과정으로 전락한다.
결국 가속화는 불안정하다는 것, 정주할 곳이 없다는 것, 받침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권태]
사건이 없는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깊은 권태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닌 역사와 혁명의 시대,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지속성과 반복의 상태에서 이탈한 이 시대야 말로 권태에 취약한 것이다. 아주 약간의 반복조차 이제는 단조로운 것으로 느껴진다. 권태는 결연한 행동의 대립자가 아니다. 오히려 양자는 서로에 대한 조건을 이룬다. 바로 적극적 행동에 나서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권태를 깊게 만든다.
진짜 시간부족은 우리가 시간을 잃어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우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발생한다. 시간 자체가 공허해진다.
권태는 결국 시간의 공허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사색적 삶]
1.한가로움의 짧은 역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로운 인간이 따르는 삶의 양식(비오이)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별한다. 쾌락(헤도네)을 추구하는 삶, 폴리스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업적을 이룩하는 삶(비오스 폴리티코스), 마지막으로 진리의 사색적 고찰에 헌신하는 삶(비오스 테오레티코스). 이 세 가지 삶은 모두 삶의 불가피한 필요와 강제에서 자유롭다. 돈벌이를 좇는 삶은 강제된 삶이기에 거부된다. 비오스 폴리티코스 또한 필수적이고 유용한 영역에 속하는 사회적 삶의 조직에 관한 것이 아니다. 비오스 폴리티코스가 추구하는 것은 영예와 미덕이다. 그림 그리기 등을 배우는 것도 필요에서가 아니라, 다만 이를 통해 육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능력을 촉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행복은 아름다운 것 곁에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데서 생겨난다. 그것을 옛날에는 테오리아(사색)라고 했다. 테오리아의 시간 감각은 지속이다. 영속적이고 변함없는 사물, 완전히 자기 안에 고요히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 미덕도 지혜도 아니고, 오직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이야말로 인간을 신들의 곁으로 데려간다.
노동은 꼭 해결하여야 할 삶의 욕구에 묶여 있다. 노동은 자기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노동은 그에게서 자유를 박탈한다. 한가로움은 모든 근심, 모든 궁지, 모든 강제에서 해방된 상태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중세까지도 사색적인 삶이 여전히 활동적인 삶에 비해 우선권을 누리고 있었다.
중세에는 활동적인 삶이 사색적 삶의 전적인 영향 속에 놓여 있었다. 일은 사색으로부터 그 의미를 획득한다. 하루는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마무리 된다. 기도가 시간에 리듬을 준다. 축일이나 축제일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날들은 휴무일이 아니며 기도의 시간, 한가로움의 시간으로서 고유의 의미를 부여 받는다. 중세의 달력은 단순히 날짜를 세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의 달력은 하나의 이야기가 그 바탕에 깔려 있고 그 속에서 축일과 축제일들은 일정한 서사적 상황을 이룬다. 이들은 시간의 강 속에 있는 고정 지점으로서, 시간을 서사적으로 묶어서 마구 흘러가버리지 못하게 한다. 이런 날들은 시간의 매듭을 짓고, 그렇게 하여 시간에 구조와 리듬을 부여한다. 그것은 마치 이야기의 절이나 소제목과 같은 기능을 한다. 시간과 시간의 흐름은 이를 통해 의미심장한 빛을 띠게 된다.
중세 후기에 이르러 일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유토피아에서 토마스 모어는 모두가 일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을 펼친다. 신분의 차별을 거부하는 토마스 모어의 혁명적 사회 구상은 일의 공정한 배분을 요구한다. 누구나 하루에 6시간씩만 일하면 된다. 일이 없는 시간에 유토피아인들은 한가로움과 사색에 몰두한다. 여기서는 아직 노동 자체의 가치가 격상된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비로소 노동에 삶의 필요성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노동은 이제 신학적 의미 맥락 속에 편입되어 정당화되고 그 가치가 격상되기에 이른다. 루터는 직업으로서의 일을 인간을 향한 신의 부름과 연결시킨다. 캘빈주의에 의해 노동은 구원경제학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캘빈주의자는 자신이 구원받을지 또는 버려질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밖에 의지할 데 없는 개인으로서, 행동에 있어 끊임없는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일에서의 성공만이 신에게 선택받은 징표로 해석된다. 구원에 대한 근심 때문에 캘빈주의자는 노동자가 된다. 물론 쉼 없이 일한다고 해서 구원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을 선택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캘빈주의에서는 행위가 강조되고, 행동을 향한 결연한 의지가 발전한다. 종교 엘리트는 스스로 신의 권능을 담은 그릇이라고 느끼거나, 아니면 신의 권능을 실행하는 도구라고 느낌으로써 자신이 누리게 될 은총의 지위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의 종교 생활은 전자의 경우 신비주의적 감정의 고양으로, 후자의 경우 금욕주의적 행동으로 기울어진다. 캘빈주의자는 결연히 행동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 구원을 찾는 자가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해주는 것은 사색적 삶이 아니라 활동적 삶이다. 행동을 향한 결연한 의지, 행동의 절대화가 일어나자, 사색적 삶은 행동하지 않는 사색으로서 비난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한다.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킨다. 일은 삶의 목표가 된다. 막스 베버는 경건주의자 친첸도르프(1700~1760)를 인용한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면 인간은 괴로움에 빠지거나 죽고 말 것이다.” 시간 낭비는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다. 불필요하게 오래 자는 것도 단죄의 대상이다. 시간의 경제학과 구원의 경제학이 서로 뒤얽힌다. 캘빈주의자인 백스터Ricjard Bext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날마다 더욱 조심하라. 그러면 가지고 있는 금과 은도 전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헛된 오락, 옷치장, 잡담, 쓸데없는 모임, 잠,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시간을 빼앗아가는 유혹으로 작용할 기미가 보이면, 이에 맞추어 경계심을 강화시켜라.
막스 베버는 프로텐티즘의 금욕주의 속에 자본주의 정신이 예표 되어 있다고 본다. 금욕주의는 축적의 강박으로도 나타나며, 이는 자본의 형성으로 귀결된다. 재산을 가지고 앉아 평안히 쉬는 것, 부를 향유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오직 더 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만 우리는 신의 마음에 들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따라서 엄청난 힘으로 분방한 부의 향유를 억압한다.
세속화는 구원의 경제학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구원의 경제학은 근대 자본주의 속에 계속 살아 있다. 거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돈 모으기는 단순히 물질적 탐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축적 강박의 바탕에는 구원의 추구가 깔려 있다. 인간은 구원 받기 위해 투자하고 투기하는 것이다. 이때 구원의 내용은 다양하다. 응고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끝없이 쌓아올림으로써 제한된 삶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부리고 싶은 소망도 있지만, 또한 권력욕도 확대와 축적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재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 준다(재산을 뜻하는 독일어 Vermogen은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역자). 자본으로서의 재산이 증가함에 따라 능력도 증대된다. 마르크스에게도 화폐는 탈소여화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즉 피투성을 폐지하고 이를 기투성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전능하다. 화폐는 사실로서 주어진 것의 전반적 해체를 초래한다.
화폐의 속성은 나의(화폐 소유자)속성이며 본질적 힘이다. 나인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따라서 결코 나의 개성을 통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추醜(추할 추)하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미녀를 살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추하지 않다. 왜냐하면 추의 작용,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추의 힘이 화폐를 통해서 제거되기 때문이다.
산업이라는 단어는 근면을 의미하는 industria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영어에서 industry는 여전히 근면, 부지런함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예컨대 industrial school은 청소년 교화 기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업화industrialisierung는 세계의 기계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근면한 인간으로의 훈육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산업화는 기계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를 통해서 시간과 노동의 경제학적 원리에 따라 ㅇ니간의 행태를 육체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최적화하라는 명령Disposity도 도입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768년에 필립 페터 구텐philipp peter Guden이 발표한 한 논문의 제목은 주목 할만하다. “산업 정책, 또는 주민의 근면성을 장려하기 위한 수단에 관한 고찰.”
기계화로서의 산업화는 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한다. 산업화의 명령은 기계의 박자에 맞게 인간을 개조하라는 시간경제학적 명령이다. 산업화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삶은 기계의 작업과정에, 기계의 기능 방식에 근접해간다. 노동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은 활동적 삶, 그것도 사색적 삶에서 완전히 차단된 삶이다. 그런데 사색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은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의 작업과정과 유사해진 인간의 삶은 오직 쉬는 시간, 일이 없는 막간, 일의 피로에서 회복하여 다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에 몸 바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밖에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긴장 이완이나 마음 끄기는 일에 치우친 삶을 바로잡아주는 균형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연습은 무엇보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노동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이른바 여가사회, 소비사회라는 것도 일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질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도 일이라는 지상명령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제는 더 이상 삶의 필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에서 발원한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사회의 궁극적 목적이 삶의 필수적 요구라는 족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 노동사회는 일이 삶의 필수적 요구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목적으로 독립한 사회, 그리하여 일이 절대적인 지위에 이른 사회이다. 일의 지배는 너무나 완벽해져서 노동 시간 바깥에는 오직 때우고 죽여야 할 시간 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일의 전면적 지배는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삶의 기획을 몰아낸다. 이제는 정신조차 일을 하도록 강요당한다. 정신노동은 강제의 공식이다. 사실 노동하는 정신이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사회, 여가사회는 특수한 시간적 양상을 나타낸다. 대대적인 생산성의 증가 덕택에 남아돌아가게 된 시간은 즉흥적이고 남는 것 없는 휘발성 사건과 체험으로 채워지고 있다. 시간을 지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 모든 것이 가속화되는 듯 한 인상이 남겨진다.
소비와 지속성은 상반적이다. 소비재는 지속을 알지 못한다. ㅅ괴를 구성적 요소로서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사물의 등장과 파괴의 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성장을 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에 따라 사물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되고 소비되기에 이른다.
경제성장은 사물의 빠른 소모와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이 갑자기 사물들을 잘 보존하고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사물들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상장을 추구하는 경제는 당장 쓰러질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머물러 있는 법을 잊어버린다. 소비의 대상은 사색적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색적 삶은 지속성의 실천이다. 그것은 노동의 시간을 중단시킴으로써 다른 시간을 정립한다.
4.비타 콘켐플라티바, 또는 사색적 삶
아렌트가 “활동적인 삶”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사유는 소수의 특권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소수는 오늘날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사상가들이 그나마 줄어들었다는 것이 아마도 오늘날의 특징적인 징후일 것이다. 어쩌면 사유는 사색적 삶이 활동적 삶에 자리를 내주고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큰 손상을 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유는 활동 과잉의 초조, 부산함, 불안함을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사유는 점점 커져가는 시간 압박 때문에 그저 동일한 것만 재생산한다. 니체도 이미 자기 시대에 위대한 사상가가 거의 없음을 한탄한다. 그는 이러한 결핍에 대한 원인을 “사색적 삶이 퇴조하고, 그러한 삶이 곧잘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데서 찾는다.
사유를 위한 시간, 사유 속에서 평정을 찾을 시간이 없는 까닭에, 어긋나는 견해들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전반적인 초조와 불안 때문에 사유는 깊어지고 과감하게 멀리 밖으로 나아가며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향해 뛰어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찾지 못한다. 사유가 시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유를 좌우한다. 이로써 사유는 잠정적이고 무상한 것이 된다. 사유는 더 이상 지속적인 것과 의사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니체는 “명상의 신령이 막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이런 한탄도 잠재울 것이라고 믿는다.
진정한 의미의 사유는 임의로 가속화시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사유는 계산이나 단순한 이성의 활동과 구분된다. 사유에 복잡한 장식이 달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예리하고 세련된 감각을 “일종의 두뇌 사치”라고 부른 것이다. 이성의 활동은 오직 필요와 필연만을 알 뿐이고, 사치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 사치란 곧 필연적인 것에서의 일탈, 직선에서의 일탈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사색적 삶은 인간을 더욱 완전하게 만드는 삶의 형식이다. 사색적 삶 속에는 추구되는 진리의 사색은 곧 인간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색적 계기가 소실된다면, 삶은 일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행위로 퇴락하고 만다. 사색하는 머무름은 노동으로서의 시간을 중단시킨다.
사색적 삶은 시간 자체를 고양시킨다. 아렌트의 단언과는 달리 기독교 전통에서 사색적 삶이 일방적으로 우위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경우에서처럼 오히려 활동적 삶과 사색적 삶을 매개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음을 알아야 한다. 좋은 삶은 삶의 계획이 활동적 삶에서 사색적 삶으로 넘어갈 것을 요구한다면, 영혼이 사색적 삶에서 활동적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때로 유용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타오른 사색의 불꽃을 통해 활동이 그 완전한 충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활동적 삶은 우리를 사색으로 이끌고 사색은 우리가 내면에서 관찰한 것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다시 활동으로 불러와야 한다.”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이다.
[Review]
세월은 흘러가는 시간이 인생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 보내는 세월은 곧 다양한 인생만큼이나 복잡하고 시간의 길이도 다르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자네”는 사람의 인생 중 어떤 기간의 길이에 대한 느낌은 그 사람의 인생의 길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열 살짜리 아이는 1년을 인생의 10분의 1로 느끼고, 쉰 살의 남자는 50분의 1로 느낀다는 얘기다. “윌리엄 제임스”도 시간의 길이와 속도의 느낌은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기억하는 사건들 속에서 선명하고 강렬하게 감지되는 차이점에 따라 어떤 시기의 길이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한 해가 그토록 길게 느껴지고, 나이를 먹은 후에는 한 해가 그토록 짧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 책 <시간의 향기>는 목적달성을 위한 활동적인 삶이 아니라 느긋하게 시간을 멈추고 자유를 누리는 사색적 삶이다. 빠르게 바뀌는 환경에서 현대인들은 한 가지 과업을 끝내기 전에 또 다른 과업을 계획해야만 한다. 시간은 과업에 의해 수없이 작은 조각으로 분해되어 지속성이 사라졌으며 그로 인해 사색할 시간을 얻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야기는 시간에 향기를 불어넣는다. 반면 점- 시간은 향기가 없는 시간이다. 시간은 지속성을 지닐 때, 서사적 긴장이나 심층적 긴장을 획득할 때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본문>
“오늘날의 가속화 역시 끝을 맺고 마무리하는 능력의 전반적인 소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은 그 어디에서도 종결과 완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을 붙들어주는 아무런 시간적 중력도 없기 때문에, 그저 마구 돌진할 뿐이다. 그러니까 가속화는 시간의 댐이 무너진 상황의 가시적 결과인 것이다. 시간의 강물을 조절하고 분절하고 그것에 리듬을 부여하는 댐, 즉 그 멋진 이중의 의미에서 할트Halt가 됨으로써 시간을 붙들고 지체시켜온 시간의 댐은 사라져버렸다.”<본문>
향기가 없는 시간은 삶의 흔적(기억)을 남기지 못하고 삶 자체가 허망해진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이루고 얻었다 해도 성취된 것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삶은 그저 힘들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통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여러 철학적 견해 헤겔, 마르크스, 니체, 프루스트,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료타르 등을 통해 현대 사회가 지배하고 있는 활동적 삶 중심의 가치관을 사색적 삶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시간에 대한 종래의 물리적, 감각적인 관찰에 이어 삶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철학적 주제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이 흥미롭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본다. 여러 책을 읽다 보니 접하게 되었지만, 내용 자체가 시간의 철학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읽기에 과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톨스토이가 인생의 말년에 고민했던 인생의 문제, 무엇 때문에 내가 살아야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원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가? 는 누구도 확실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신앙은 철학이 완전하게 주지 못하는 이 문제에서 출발한다.
저자인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는 독일에서 급진적인 사상가로 알려져 있으며 또 다른 저서<피로사회>는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이 책 <시간의 향기>는 <피로사회>의 전작으로 함께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 책이다.
<본문>
“오늘의 삶은 받침대가 없는 까닭에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시간의 분산은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개인의 시간 살림살이에서 짐을 덜어줄 안정적인 사회적 리듬과 박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도 뚜렷한 시간의 분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까닭에 더욱 더 강화된다. 중력의 부재로 인해 사물들은 슬쩍 스쳐 지나갈 뿐이다. 아무것도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아무것도 결정적이지 않다. 아무것도 최종적이지 않다. 어떤 결정적 단락도 생겨나지 않는다.”
“시간이 원자화된다면, 평면화 되고 희석되고 단축되어 버린다면, 시간의 향기도 사라지고 만다”.
“끊임없이 새로 출발해야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옵션, 새로운 버전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삶이 빨라졌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지속성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느낌일 뿐이다.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서사적 논리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과정이 가속화된다면, 그것은 좀처럼 가속화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는 시간에 향기를 불어넣는다. 반면 점- 시간은 향기가 없는 시간이다. 시간은 지속성을 지닐 때, 서사적 긴장이나 심층적 긴장을 획득할 때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 시간에서 모든 의미 구조와 심층 구조가 떨어져 나간다면, 시간이 원자화된다면, 평면화되고 희석되고 단축되어 버린다면, 시간의 향기도 사라지고 만다. 시간을 붙드는, 붙들어 제어하는 닻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 시간은 완전성을 잃는다. 받침대에서 분리된 시간은 마구 내달리기 시작한다.”
“사유를 위한 시간, 사유 속에서 평정을 찾을 시간이 없는 까닭에, 어긋나는 견해들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현대인들의 시간은 조각난 시간, 쓸모없는 시간 속에 버려져 있어서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 시간은 이제 사람들에게 잠정적이고 무상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음을 알아야 한다. 좋은 삶은 삶의 계획이 활동적 삶에서 사색적 삶으로 넘어갈 것을 요구한다면, 영혼이 사색적 삶에서 활동적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때로 유용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타오른 사색의 불꽃을 통해 활동이 그 완전한 충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활동적 삶은 우리를 사색으로 이끌고 사색은 우리가 내면에서 관찰한 것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다시 활동으로 불러와야 한다.> 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이다.”
“전반적으로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오직 사색적인 머무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가속화가 먼저 발생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색적 삶의 상실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가속화와 사색적 삶의 상실 사이의 관계는 더 복잡하다.”
“끊임없이 새로 출발해야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옵션, 새로운 버전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삶이 빨라졌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지속성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느낌일 뿐이다.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서사적 논리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과정이 가속화된다면, 그것은 좀처럼 가속화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로운 인간이 따르는 삶의 양식(비오이)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별한다. 쾌락(헤도네)을 추구하는 삶, 폴리스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업적을 이룩하는 삶(비오스 폴리티코스), 마지막으로 진리의 사색적 고찰에 헌신하는 삶(비오스 테오레티코스). 이 세 가지 삶은 모두 삶의 불가피한 필요와 강제에서 자유롭다. 돈벌이를 좇는 삶은 강제된 삶이기에 거부된다. 비오스 폴리티코스 또한 필수적이고 유용한 영역에 속하는 사회적 삶의 조직에 관한 것이 아니다. 비오스 폴리티코스가 추구하는 것은 영예와 미덕이다. 그림 그리기 등을 배우는 것도 필요에서가 아니라, 다만 이를 통해 육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능력을 촉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행복은 아름다운 것 곁에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데서 생겨난다. 그것을 옛날에는 테오리아(사색)라고 했다. 테오리아의 시간 감각은 지속이다. 영속적이고 변함없는 사물, 완전히 자기 안에 고요히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 미덕도 지혜도 아니고, 오직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이야말로 인간을 신들의 곁으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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