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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를 빛낸 인물 (9)
신경림 시인 편
기획·취재·정리 윤제철(시인)
1. 만남
2016년 2월 4일 목요일 오전 11시,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7번 출구로 나와 20여 미터 올라가 있는커피베이에 신경림 시인께서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오셔서 전화로 길을 안내해주셨다. 신경림 시인을 처음 뵌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 필자가 시낭송회를 창립(1994년)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초대 시인으로 참석하셨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사)세계문인협회 세미나를 참석하기 위해 임원진과 함께 수안보로 내려가던 중 목계를 만났다. 목계는 남한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루터였는데 충북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명맥을 잃었다. 그 인근에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가 서 있어 잠시 들러보고 간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시 속에서 서민과 농촌의 어려운 생활 환경을 그려 오신 노시인은 필자를 따뜻하게 반겨주셨다. 잡지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렵냐 하시며 위로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추운 날씨가 연속되다가 그나마 풀려 나오시는 데 불편을 덜 수 있어 다행이었다.
2. 시 창작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특별한 동기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를 읽다 보니 좋아서 나도 쓰게 되었지요. 시를 쓰고 싶다는 가장 강한 충동을 느낀 것은 다다이즘(Dadaism)과 전위사조에 대한 모방욕이 문학 운동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낳은 임화, 일제 강점기에 만주 등지로 떠돌며 살아야 했던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시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하였던 이용악,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내면서 우리 민족 공동체의 정서를 드러냈고 여행 중에 접한 풍물이나 체험을 표현한 기행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창작한 백석 같은 시인의 시를 읽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3. 주로 찾았던 추억의 장소가 있으시다면?
특별히 그런 곳은 없지만 자주 가는 곳은 있습니다. 고향을 제외하고 말한다면 강원도 정선, 경북 울진과 영해, 충남의 예산, 전북의 고창․정읍…. 뭐 이런 곳들입니다. 나름의 인연이 있는 곳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추억의 장소란 말은 맞지 않습니다.
4. 취미 생활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등산과 바둑, 그리고 여행입니다. 늘 아침이면 6시나 6시 반쯤 일어나 하루를 열었습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아마도 부지런함일 것입니다. 평소에 하던 일은 그대로 해야 한다는 고집이 생활 리듬을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등산은 지금도 일주일에 2번 합니다. 한때는 외국, 가령 안나푸르나나 중국의 노산이나 화산도 다니는 등 외국까지 가서 등반을 한 일도 있지만 요즘은 북한산을 오르는 일로 만족합니다. 다녀오지 않으면 할 일을 빼먹은 것 같아 그냥 시간을 보낼 수가 없습니다. 다녀오면 거뜬히 해낸 성과에 대하여 뿌듯한 자신감을 찾습니다.
여행은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당국에서 여권을 내주지 않아 열심히 국내 여행만 하다가 여권을 받으면서 외국 여행 복이 터져 일 년에 많게는 서너 번까지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건강 문제로 외국여행을 한 번 걸렀을 뿐 올해 초도 일본의 오키나와를 다녀왔습니다. 몽고와 러시아가 올해 여행지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바둑을 두는 일에 흥미를 가진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바둑을 두다 보면 담배도 피우게 되고 혼탁해진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안 되겠다 싶어 지금은 인터넷 바둑을 두고 있습니다. 잘 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재미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지는 바둑이면 만회하려는 욕심을 뿌리치지 못하고 밤을 새우기 십상이라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둔 승률로 인정한 인터넷 바둑 2급 정도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5. 가까이 지내셨던 친구 분들은 누구였습니까?
많은 친구들과 후배들이 있습니다.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와 후배 중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가령 호탕하고 선이 굵은 성격으로 시전문지인 『시인』을 창간하여 김지하․김준태․양성우 등 시인들을 발굴한 시인 조태일이 있고, 월간 『중앙』 편집을 맡아 마음에 들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아낌없이 퇴짜를 놓던 소설가 한남철, 주제와 문체까지도 농민의 어투에 근접한 사실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 보여 농민 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소설가 이문구, 그리고 가난하지만 앞날을 밝게 꿈꾸거나 주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동화작가 손춘익이 있습니다. 함께 술도 많이 마시고 여행도 많이 했고 말하자면 유신 독재와의 투쟁도 함께했던 친구들입니다.
특히 조태일 시인과는 5·18 때 함께 도망 다니다가 잡혀서 감옥도 함께 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마침 내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어서 장의위원장을 맡았던 인연도 있습니다. 이문구 작가와는 그의 마지막 며칠을 같은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백병원 5층에 입원해 있던 그는 어쭙잖은 병으로 들어와 있던 나를 찾아 2층까지 휠체어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자기 병을 잊고 내 걱정을 더 많이 하던 그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민주화 운동, 분단 현실과 민중의 삶을 깊숙이 파고드는 역작을 발표하며 민족문학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던 작가 송기숙과는 동갑으로 술도 많이 먹고 많이 놀러 다닌 친구인데 지금 병석에 있어 안타깝습니다.
6. 시 「농무」를 쓰신 동기나 시대적 배경에 대해 말씀하신다면?
유신 독재가 극에 달해 있던 시절입니다. 미래뿐 아니라 온 나라가 캄캄한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유신 독재와 싸워 그를 물리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내 시는 생태적으로 그런 정서를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시 「농무」를 나보고 설명하란다면 어떤 이데올로기나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 시대에 사람답게 살기 위한 몸부림이요, 절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농무」는 평소 시에 대한 관점이었던 삶의 모습과 정서가 깊이 내포되어 있을 때 감동을 주는 것임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으로, 고단한 민중의 삶에서 찾아낸 시의 소재로 농민의 피로와 애환을 묘사하였습니다. 당시에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농촌이 해체되어가는 피폐한 현실을 생생하게 떠올리면서 농민의 울분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7. 선생님의 시론에 대하여 한마디 해주십시오.
(1) 시도 소통이란 점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2) 다만 내가 살고 있는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시를 씁니다. 오늘의 현실에 깊이 뿌리박은 시일 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일이 없습니다.
(3) 그러면서도 일정한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거나 어떤 목적을 가지는 시는 스스로 경계합니다. 그건 시의 타락이니까요.
(4)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거나 현학적이 되는 것도 경계합니다. 시는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소박한 시적 아포리즘에 비교적 충실한 편입니다.
(5) 또한 시를 통해서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소리를 다하는 것도 시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6) 그러나 나의 가장 중요한 시론은 어떤 원칙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나는 시에 원칙이란 것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내 시는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얼마든지 언제나 자유롭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7) 한편 나는 시를 통해 꿈을 꾸고 꿈을 통해 시를 씁니다. 꿈은 내 시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8.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후배에게 들려준다기보다 내가 못해서 후회되는 일을 말하란다면 더 많은 책을 읽으라는 것, 그리고 시 이외에도 더 폭넓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도 귀담아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갇히는 것을 경계합시다. 그렇게 되면 시가 생명력을 잃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시를 써야 합니다.
잘된 일만 기억하려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잘못된 일도 우리가 행했던 일로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왜 잘못되었는지 밝혀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부끄럽다 하여 무조건 없애거나 비난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문단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작품을 이야기하지 않고 행적만 갖고 존재를 무시하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답습해온 관념을 재고하여 급변하는 시대상에 맞도록 어떤 것이 현명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9. 선생님의 문학 활동을 돌아보신다면?
만족스럽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최선을 다했던가를 생각할 때 후회되는 대목도 없지 않습니다.
10. 시세계
(1) 신경림 시인은 초기에 자연을 소재로 삼아 삶의 슬픔을 주제로 서정시를 썼다. 농촌에 들어가 10여 년 시를 쓰지 않다가 다시 쓰기 시작하여, 농민의 소외된 삶을 그린 「농무」(1971년)를 발표하면서 민중시의 길로 들어섰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가난한 농촌의 생활을 직접 목격한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우러나온 서정을 노래하였다. 농민들의 생활 감정을 민중에 가까이 다가가 노래하였다. 농민들의 궁핍한 삶, 황폐해진 광산, 떠돌이 노동자들, 도시 변두리의 뿌리 없는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1970년대의 대표적 민중시인이다. 참여시인들은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탐미적인 세계를 형상화했던 시인들과는 달리 현실의 모순과 억압받는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하였다.
(2)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고향 노래만을 부르고 있는 고향의 터주노래꾼이다. 고향을 노래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노래를 잃어가고 있다. 상소리와 독설과 재담의 시는 재미있고 실감나지만 노래는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렇게 노래를 잃어가고 또 고향을 잃어가는 시대이다. 어쩌면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근대화나 도시화란 이름으로 부르는 근자의 사회 변화 속에서 우리의 고향은 옛 모습을 잃고 획일적인 주택 단지로 변해가고 있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잃어버리기 이전의 우리의 고향이 되풀이 되어 노래된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한 시대 우리 고향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 있다고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말하고 있다.
(3) 그의 시가 나타내 보이는 형태적 특성은 첫 시집 『농무』에서는 거의 비연 형태를 기본으로 하다가 『새재』, 『달넘세』 등에서는 정형률의 구획이 지어지는 연 구분시를 차츰 선호하게 된다. 이때 그는 형태적 간결성을 체득하게 되었고, 이 간결성은 그 이후의 시 작품들에서 다시 쓰고 있는 비연 형태에서 매우 중요한 힘으로 작용한다.
신경림 시의 율격 구조는 정형성을 지니고 있는 민요율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많고, 4음보율에 부분적인 변격을 주고 있는 무가풍의 형태가 많은 듯하다. 3~4음보 교환반복형도 자주 구사되는데, 이는 민중적 정서를 표현하는 일에 실제로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한 개별적 시인의 시 작품과 시집이 지니는 의미는 과거를 알려주고, 가치는 현재의 시간으로 직접 이어지며, 목적은 미래의 평화, 안정, 행복 따위의 미덕들로 연결된다. 시인은 모든 독자들에게 자신의 표현과 시대정신을 탐구와 성찰의 유익한 재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표현은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재형성하고, 빈약한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간다.
신경림을 통해서 우리는 시인들의 곧고 참다운 시정신의 한 전형을 만날 수 있으며, 시적 진실의 올바른 좌표를 제공받을 수 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 한 모퉁이의 길 위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궁금증 많은 한 시인을 만날 수 있다고 이동순 시인은 말하고 있다.
11. 약력
충북 충주 출생(1935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제1회 만해문학상, 제8회 한국문학 작가상, 제2회 이산문학상, 제8회 단재문학상, 제6회 대산문학상, 제4회 만해대상, 제2회 시카다상, 호암상 예술 부문 수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문학 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한국예술인총연합 의장 역임,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시집 『농무』(1973년) 『새재』(1979년) 『달넘세』(1985년) 『가난한 사랑 노래』(1988년) 『길』(1990년) 『쓰러진 자의 꿈』(1993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년) 『뿔』(2004년) 『낙타』(2008년) 『사진관집 이층』(2014년), 산문집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년, 공저),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년) 『민요기행 1』(1985년) 『민요기행 2』(1989년) 『우리 시의 이해』(1986년) 『시인을 찾아서 1』(1998년) 『시인을 찾아서 2』(2002년)
12. 선생님의 대표시를 고르신다면?
전기에서 다섯 편을 뽑는다면 「갈대」․「농무」․「파장」․「목계장터」․「가난한 사랑노래」, 후기 작품에서 다시 뽑는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낙타」․「떠도는 자의 노래」․「별」․「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정도가 되겠습니다.
13. 주요작품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 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 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묻혔다.
집에서 언덕밭까지 다니던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
마을길을 지나 신작로를 질러 개울을 건너 언덕밭까지,
꽃도 구경하고 새소리도 듣고 물고기도 들여다보면서
고향살이 서른 해 동안 어머니는 오직 이 길만을 오갔다.
등 너머 사는 동생한테서
놀러 오라고 간곡한 기별이 와도 가지 않았다.
이 길만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게다.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미군 부대를 따라 떠돌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먼 지방을 헤매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본 것 수천 배 수만 배를 보면서,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
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
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걸으면서,
마을길도 신작로도 개울도 없어진
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 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
단풍을보면서..
단풍을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