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를 끓여 먹는 아침 외 4편
이병연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비며
누룽지에 물을 붓는 아침
물이 누룽지 사이사이로 헤엄쳐 들어가
딱딱한 근육을 말랑말랑하게 풀어주고 있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풀어헤치는
저 유들유들한 몸짓
쓸데없는 아집을 내려놓듯
견고한 껍질을 깨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유영하는
누룽지의 눈물겨운 투항
머리가 누룽지처럼 뻣뻣해질 때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고 문을 굳게 닫고 싶을 때
누룽지의 거룩한 투항을 기억해야 하리라
끈
끊어지면 이으며 사는 것
산 입에 거미줄 칠까마는
중학교 보내기는 어렵다는 귀에 박힌 못
못이 가슴을 쿡쿡 찔러대 홀로 북경행 열차를 탔네
만주 봉평 절은 잠시 멈춘 하나의 역
심부름하며 정차한 시간은 이 년
몇 달이나 걸려 죽을 둥 살 둥 고향으로 돌아와
학업이 끊어지면 다시 이어갔네
타국 땅에서 신주로 모신 끈
금융조합에 다니면서도
난리 통에도 놓지 않고
꿈인 듯 대학을 졸업하고 교단에 섰네
당신의 끈은 참 울퉁불퉁하네
이어진 마디마디 아름다운 통증이네
끈을 잇는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
뚝 잘린 데 한 땀 한 땀 꿰맨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
삶을 매고 꿴 끈
술 취한 밤이면 욱신거려
어둠 속에 한숨을 쏟아내고
밤새 아픔을 게워내고
인자한 미소만 가족의 밥상에 올린
아버지의 끈 잡고 있는
내 손 축축해지네
꽃의 말
꽃은 눈이 멀도록 눈부시게 왔다 간다
황홀한 순간,
꽃은 사진 찍듯 저장되지
세상이 텅 빈 공갈빵 같은 날
오래된 기억을 클릭해
내가 삭은 식혜 속 밥알 같은 날
잊고 지내던 나를 불러내
꽃은 빛깔만 고운 게 아니야
화심에 맺은 순정
부르기만 하면 잠근 문을 열고 맨발로 기어 나오지
사는 것 잠깐이라
사랑을 안고 갔다는 꽃의 말
장롱에 오래 넣어둔 옷처럼
접혔던 꽃잎이 허공을 밀어내며 피어나
한 생이 저만치 갔다가 돌아오는 거야
지팡이
원수산에서 내려오는 길
제멋대로 내지른 바위와 돌의 위험 신호
몸이 좌우로 쏠려 잔뜩 긴장한 발아래
들려오는 소리
길이 험하구나. 조심해서 내려와.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달팽이처럼 따라오는 아들에게 하는 소리
나는 지팡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길을 내며
몸이 닳도록 꼿꼿이 중심을 세우는 지팡이
한평생 아들의 지팡이였을 어머니
기우뚱거려도
끝까지 아들의 지팡이로 남고 싶은 마음
험한 바위와 돌길을 뚫고
보란 듯 산 아래 평지로 내려와
가쁜 숨 몰아쉬며
아들아,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다시 한번 힘껏 지팡이를 쥔다.
오래된 주문(呪文)
당신의 손은 크고
새끼손가락이 약간 굽어 있습니다
나는 젊은 날 반듯한 손가락을 두고
애틋한 마음으로 새끼손가락을 유독 만지작거렸습니다
여리지 않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아이가 오고
당신의 새끼손가락은 한참 외로웠겠습니다
여위고 윤기가 사라졌습니다
더 늦기 전에
오래된 주문을 찾아와야겠습니다
한겨울 둥근 식물 영양제가
진기가 빠진 화분에서 여러 날 주문을 외고
거실에 있는 군자란이
볼그레하게 늦꽃을 피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