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3: 1 법정의 서막 (2) 백보좌 심판
백보좌 심판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은 백보좌 심판이라고도 하며 이 심판은 악인의 부활 후 역사의 종말에 있을 마지막 심판으로, 하나님의 심판대(고후 5: 10)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심판대(롬 14: 10)라고도 하는데, 천사들이 심판의 수종자가 되고, 심판의 대상은 사탄을 비롯한 악한 천사들과 아담 이래 온 인류로서, 심판의 근거는 행위록과 생명록으로 그 행위에 따라 상선벌악이 달라지지만, 영벌과 영생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유무로 구분될 것이고, 따라서 불신자와 악인에게는 영벌을 그리스도를 믿는 의인에게는 영생과 상급을 확정하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대는 우리 마음에도 필요합니다.
백보좌 심판에 대한 객관적인 이론은 이 정도만 하고, 좁은 의미에서 악을 용납치 않고 의를 기뻐하는 이러한 엄정한 작용이 지금 우리 마음에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경건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런 백보좌와 같은 강력한 작용이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음의 블랙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야 의에 대해서는 살고 죄에 대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을 모신 우리 마음의 보좌 앞에 옛 창조에 속한 것이면 그 무엇도 피하여 도망가는 위대한 의의 성향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백보좌 심판대의 핵심은 진리적이지 않거나 생명적이지 않는 것은 모두 불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의가 됐든 능력이 됐든 성품이 됐든 염려 근심 두려움 등 주님으로부터 나지 않는 것은 모두 처리됩니다. 사망과 음부까지도 불못에 던져집니다. 이 심판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듯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더욱더 변화되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이 새로운 피조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이 알려주는 백보좌 심판대는 어떤 심판대입니까?
1. 큰 심판대입니다.
11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위엄이 있고 엄정한 심판대라는 의미입니다. 그 앞에 옛 창조에 속한 것은 두려워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땅과 하늘마저 피하여 온데간데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큰 보좌란 크다가 구속사와 관련이 있듯 우리 신앙을 온전하고 바로 세워주는 심판대입니다. 구약에 재판장의 타락은 사회적인 타락으로 귀결되었듯 공명정대하고 성숙한 마음의 재판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된 양심과 아울러 율법의 핵심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2. 성결의 심판대입니다.
“흰 보좌와” 희다는 것은 의를 장려하고 악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흰 보좌는 판단기준이 불투명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담긴 낱말입니다(사 5: 20-22).
마음 중심에서 죄를 미워하고 불의를 용납지 않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는 의로운 마음이 불처럼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사랑함이 하나님의 원수이듯 하나님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고전 2: 16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했듯 이 마음은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죄를 영원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지옥불로 나타났듯(시 7: 11), 우리 중심에도 죄인은 사랑하되 악은 미워하는 마음이 타올라야 합니다(사 5: 20-22).
3. 공의로운 심판대입니다.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여기 죽은 자들에 대해서 신불신 모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롬 14: 10, 고후 5: 10). 성도에게 심판이 없다는(요 5: 24)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정죄와 처벌이 없다는 뜻이지 심판대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롬 14: 10-12).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 그 보좌 앞에 서 있었는데 누구든지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큰 죄만이 아니라 작은 죄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뜻도 아닙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고(살전 5: 22), 말이나 농담으로라도(엡 5: 3), 생각으로라도 용납지 마시고며(마 5: 22, 28) 의를 기뻐하고 마음이 타오르시기 바랍니다.
4. 생명의 심판대입니다.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이 때 심판은 두 종류의 펴진 책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마 23: 15).
여기 “책들”은 복수이고, "생명책"은 단수입니다. 즉 책들은 행위록이고(말 3: 16) 다른 하나는 생명록입니다(눅 10: 20, 계 3: 5, 마 10: 32-33). 행위록의 수효가 많은 것은 그만큼 죄가 다양하고 많음을 시사합니다. 죽은 자의 행위록과 산 자의 생명록이 있듯이 이처럼 우리에게 적용하면 생명적이지 않는 것은 그 어던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생명적인 것이란, 하나님의 뜻이 생명이고 주님의 말씀이 생명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이었고(요 4: 34), 그 뜻대로 살고 이루는 것이 생명적인 것입니다.
5. 행위의 심판대입니다.
13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이 말씀은 심판을 받기 위한 불신자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영생과 영벌은 믿음의 유무에 따라 판결되겠지만, 상급과 고통의 수준은 그들의 행위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주를 위해 충성한 자들은 더 큰 상급과 영광을 얻는 반면 큰 악인일수록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피하여 간데없는데 어떻게 바다도 사망도 음부도 버젓이 나타나서 죽은 자들을 내어줍니까? 학자들은 이를 묵시문학적 기법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지옥 불에 던져 넣기 위해 부활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교훈적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주는 것처럼우리가 살려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죽은 행실입니다. 바다 음부 사망 이것들은 다 죽이는 것들입니다. 바다가 세상이라면 세상 때문에 죽은 우리 행실을 살려내야 합니다(겔 18: 4, 계 3: 1, 마 10: 32-33). 혹은 율법적 양심으로 인해 죽은 행실 역시 피의 복음으로 살려내야 합니다(히 9: 14). 죄로 인해 죽은 행실도 다 살려내야 합니다. 게으름으로 죽은 행실 역시 부지런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우리 행실이 되어야 합니다.
6. 신앙의 심판대입니다.
14절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악인과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사망도 없고 무덤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니 죄를 멀리하고,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요 11: 25, 고후 3: 18).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졌듯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성령의 불로 태우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처럼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는(시 42: 8, 시 16: 8-11)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7. 영원한 심판대입니다.
14-15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이처럼 귀중합니다(눅 10: 20). 지옥의 심판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런 불길이 현재 우리 안에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도 하나님이 좌정하신 일종의 작은 심판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극렬히 타오르는 불못과도 같고 마음을 청소하는 블랙홀과도 같은 작용을 하는 의에 은사가 있다면 다시는 주님을 슬프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아 8: 6-7에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의 왕자를 낳은 후 강렬해지고 무서워진 왕후 술람미의 노래입니다.
솔로몬이 왕후를 버린다면 왕자를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자식을 사랑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약 왕자를 해하려는 존재가 있다면 그녀의 마음은 지옥불과 같이 잔인한 존재로 변할 것입니다. 사랑의 에너지는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만 있다면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사는 것은 조금도 피곤한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백보좌 같은 의로운 불길은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비롯됩니다. 롬 5: 5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한 것처럼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임재로서 체험할 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고 즐거워하며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영입니다.지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원수인 불신과 악에 대한 진노가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씀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장차 역사의 종말에 백보좌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어 생명책에 기록된 참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편 우리 마음에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의를 즐거워하며 불신앙과 악을 용납하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의 위대한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예수 더 잘 믿고 하나님 더 잘 경외함으로 성령으로 더욱 변화되어 악의 잔재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온전함에 이르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샬 롬
(4) 사탄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우편에 섰다.
우편에 있어야 할 분은 주님이신데 사탄이 주님의 자리를 점령하고 자기가 마치 그리스도인 것처럼 과장하면서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존재로 드러나고 있다.
사탄의 역할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을 '대적자', '반대자', '고발자', '적대자'라 한다. 사탄은 대적하면서 참소한다. 그들의 대적하는 방법의 하나가 참소다. 즉 마귀의 뜻이 '참소'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발하여 참소하는 것이다. 그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한다.
* 계 12: 10 -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 요일 2: 1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벧전 5: 8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