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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완성, 그 이후
성경본문 : 느혜미야 7:1-4
김형준 목사
1992년 가을, 미국의 유명한 요트 항해가인 마이클 플랜트(Michael Plant)는 미국에서 프랑스까지 북대서양 단독 횡단에 나섰습니다.
플랜트는 이미 배로 세계일주를 한 번 이상 한 사람으로 항해분야에서는 플랜트와 필적할 만한 항해 기술을 보유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플랜트가 직접 만든 요트는 선체의 디자인, 제작에 사용된 재료, 편의시설 등을 포함해서 현대 항해지식의 최첨단에 선 것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배였습니다.
게다가 비상시에 인공위성으로 메시지를 자동 전송해 주는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소재 표시용 무전기 에펍(Epirb)도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플랜트는 이렇게 장기 항해에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 첨단장비를 갖추고 유럽을 향해 출항했습니다. 아무도 플랜트가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항해를 떠난 2주 만에 배는 전복된 상태로 수색대에 발견되었습니다.
배중에서 가장 안전한 배가 요트라고 합니다.
요트는 여간해서 전복되지 않고 그 어떤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배이기에 사람들은 플랜트의 요트가 전복됐다는 사실에 의아해했습니다. 의문을 가지고 전복 이유를 조사한 결과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요트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수면 위에 뜨는 부분보다 수면 아래에 잠기는 부분이 무거워야 하는데, 플랜트의 요트는 용골이라는 부분 밑에 배의 아랫부분을 무겁게 하려고 달아놓은 4톤짜리 물건이 떨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첨단 기술과 화려함을 겸비했다 하더라도 배를 안전하게 해주는 부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요트는 작은 파도에도 그만 전복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외형만 그럴 듯하면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대단한 지식을 갖췄다 하더라도 외형을 지탱할 만한 내면의 인격이나 삶의 철학 그리고 깊은 묵상이 없다면 어느 날 갑자기 몰락할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잘나가던 사람이, 잘나가던 가정과 기업 때로는 교회와 국가까지 몰락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 문제는 정말 심각합니다.
청년 실업자가 실업자의 5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초산업이 모두 넘어가 있는 중국과 우리 경제 개발 속도는 현재 1.7년 차이밖에 안 나는데,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은 머잖아 중국의 위성 국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불과 몇 년 뒤면 한국이 중국을 좇아갈 수 없을 것이며 결국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자와 이공계의 실력자들, 또 두뇌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현상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입니까? 바로 정치 문제 아니겠습니까. 정치자금이라는 명목 하에 받은 수 백 억이면 얼마든지 인재를 육성하고 기업을 튼튼히 하며 경제구조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소비성 정치자금과 정치인의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고 현재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정치 문제는 도덕과 윤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의 파괴는 물질의 풍요와 경제적 발전을 관리할 만한 정신세계가 황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내면세계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이 서원했던 예루살렘 성은 수없는 시련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52일 만에 완공됩니다. 힘들었던 만큼 완성한 보람과 기쁨이 무엇보다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 완공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성의 완공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함인가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집을 구입하는 것 보다 그 집을 통해서 어떤 가정이 되는가가 더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느헤미야의 성벽 완성은 더 큰 성공,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풍요와 화려함을 지탱해 주는 더 본질적인 내면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느헤미야의 이러한 태도는 바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 중요한 원리를 오늘 함께 찾아보길 원합니다.
느헤미야가 성 완공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1차 목표는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이었으나, 궁극적인 목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정체감과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성이 건축된 뒤에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뒤에도 내적인 완성을 위해 느헤미야는 만족감과 성취감에 안주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이 경제 발전을 기리는 샴페인을 몇 년 만 늦게 터뜨렸더라도 지금 구조와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조그만 것을 이루고도 샴페인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사실 성 쌓는 일은 대단히 고달픈 일입니다. 생명을 걸고 수많은 위협과 음모 속에서 성을 쌓았고, 백성들도 최선을 다해 동참했습니다. 힘든 과정을 겪으며 성을 완공했으니 온 백성이 잔치하고 낙성식을 해도 할만 하지 않겠습니까. 느헤미야는 6장 후반부에서 “도비야가 항상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통해 느헤미야가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작은 성공과 성취 후에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목표는 모르고 스스로 정한 뜻과 목표를 이루고 모든 것을 이룬 것 마냥 착각하고 거기서 멈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 가 중심이 되어 본인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었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잃고 자만과 교만에 빠져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을 정복한 느부갓네살 왕은 당대에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장군이며 왕인 동시에 정치가였고 건축가며 예술가였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을 정복하고 나서 높은 성 위에 올라가 외쳤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빌론은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혼자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서 느부갓네살 왕에게서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가 떠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느부갓네살 왕은 정신이상자가 되어 자기가 세운 궁에 거하지도 못하고 들에서 이슬을 맞으며 짐승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7년간 그렇게 살았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셔서 다시 궁에 돌아오게 되자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서 4장 37절에서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다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게 스스로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하지 않았습니까?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만 슬쩍 봐도 잘 외웁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암기력이 그 사람의 능력입니까? 머리 나쁜 부모님을 만나면 외우는 것도 힘듭니다. 머리 좋은 부모님을 만났기 때문에 좋은 암기력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이 못생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께 물려받았기 때문에 예뻐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내가 이룬 것은 아주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대단하다.’ 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용변을 가리고 밥을 떠먹었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누군가의 도움으로, 또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여러 조건들을 물려받아서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서 왜 이런 조건을 주셨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비전과 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느헤미야처럼 예루살렘 성을 완공하는 것 후에 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비전을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종살이가 귀찮아서 출애굽 했지만,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갈렙은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벗어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비전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막상 애굽을 떠나고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은 애굽의 종살이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광야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모두 도중하차해 버립니다. 그러나 비전과 꿈을 가진 이들은 실패하지 않았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조그만 것을 이루고 나면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결혼하는 형제, 자매들은 결혼식이 인생의 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그 날 무척 행복했습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날 때 저는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아내는 도봉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전 성남에 있을 때였는데, 매일 아내를 학교 앞 다방에서 기다렸다가 데이트하고 아내가 살던 방배동에 데려다주고 다시 성남으로 돌아오면 밤 1시가 됩니다. 이런 생활을 석 달 했습니다. 그 뒤에 청혼했더니 승낙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결혼식이 있는 날은 정말 기쁜 날입니다. 아무리 좋은 주례사가 있어도 신랑 신부는 듣지 못합니다. 질문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결혼식은 인생의 정점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결혼은 결혼식 후에 서로에게 실망하고 깨질 가능성이 큽니다. 결혼식은 결혼생활로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진짜는 결혼식 이후입니다.
우리나라가 60년대, 70년대에 외쳤던 구호는 ‘잘 살아보세’ 이었습니다. 정말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구호대로 잘 살고 보니까 그 다음 대안이 없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에는 ‘독재 타도’가 목표였습니다. 독재를 타도하고 나니 역시 대안이 없습니다. 지금은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마찬가지로 또 다른 어려움과 풀어야 할 문제들이 남을 것입니다.
동안 교회의 비전은 ‘치유와 회복이 있는 교회, 성장이 있는 교회,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는 교회’ 입니다. 이 비전을 통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과 사명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교회든 그 곳이 어디든-, 어둠의 영들이 주관하고 있는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바꿔가야 할 놀라운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선교사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보냄 받은 자의 영성을 훈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파송됐다고 생각해봅시다. 선교사의 영성을 가지고 밥하는 주부와 될 대로 되라는 자세를 가지고 밥을 하는 주부의 밥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정의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직장과 교회를 새롭게 하고, 사회를 새롭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즉 ‘내’ 비전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확실히 붙드십시오. 그럴 때 중도하차하지 않습니다. 작은 성취 앞에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축복이 저주로 변하지 않고,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세움 받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둘째 이유는 축복을 관리하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축복을 관리하고 유지하며 누리는 것은 훨씬 중요합니다. 건강의 축복을 받았지만 엉뚱하게 사용해서 잃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또 물질의 축복을 주셨지만 그 때문에 자녀들이 서로 다투고 나누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축복이 오히려 저주가 되는 상황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쌓게 하신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의 관리자들을 세웁니다. 성벽 공사를 마친 다음에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문지기를 세운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전에는 예루살렘에 외부 사람들이 마음대로 출입하고 노략질했습니다. 그런데 성을 쌓고 문지기를 세웠다는 사실은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통제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비전을 소유한 자로서 축복을 누리고 삶의 현장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사람은 세속적인 풍조나 생각이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문지기를 세워야 합니다. 포르노를 보고 있으면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의 다른 형제자매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안 됩니다. 내게 영적인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받은 축복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습관과 문화, 도덕과 윤리가 들어오려고 하면 문지기를 세워 막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아내와 남편이, 그리고 자녀가 지켜야 할 윤리 규범을 무시하면 깨집니다. 울타리를 세워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쉽게 잃어버리고 빼앗기지 않도록 간직하고 관리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삼각관계나 사각 관계로 얽힌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며 감동 받으면 안 됩니다. 그저 아무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적어도 애인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는 병든 가치관이 들어옵니다. 내 영혼을 물들이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병든 가치관을 차단하는 문지기를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밖에 없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사실 문지기가 있으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당장의 불편은 자신을 지켜줄 것입니다.
다음으로 2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읍의 책임자를 세웠습니다.
하나니와 하나냐입니다. 하나니와 하나냐를 성읍의 책임자로 세운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실해서 백성들을 잘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5장 15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토색한 귀족들과 전에 있었던 총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을 돌아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며, 느헤미야와 같은 관점과 비전을 가지고 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도자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고생하는 예는 역사나 영화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단 종파의 교주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에 자신들의 안타까운 현실은 깨닫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은 속성상 누군가를 섬기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지금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자존심을 섬기고 있을 수도 있고, 학력이나 돈, 이성 등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섬기는 대상이 정말 하나님과 관계를 가까이 하게 하고 하나님 자녀답게 살도록 하느냐 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섬길 때 다윗의 삶은 기쁨으로 넘치고 나라가 평안하며 백성들은 든든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자 하는 욕망을 섬기기 시작하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를,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성령을 의지하며 믿음 안에서 걸어가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까?
느헤미야는 축복을 관리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3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읍을 보호하는 수칙을 정합니다. 해가 뜨고 난 후에 성문을 열고, 해가 있을 때 성문을 닫는 것입니다. 보통 해가 뜰 때 성문을 열고 해가 질 때 닫는데, 아직 이스라엘 백성이 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낮에 해가 떠 있는 동안 성문을 열고 닫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성을 지키는데, 자기 집이 아니라 반대편 집을 지키게 합니다. 이는 성을 지키는 원칙이었습니다.
영적인 축복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지도, 기도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주야로 영화보고 친구들과 도박하며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사람이 학교를 졸업할 수 있습니까? 공부하는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듯이,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영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살면 당장 편할지 모르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유산은 가질 수 없고, 결코 일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남아공화국의 전 대통령 만델라를 잘 아실 것입니다. 만델라는 악명 높은 로벤 섬 교도소에 무려 20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만델라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같이 수감되어 있던 다른 흑인 지도자들은 만델라에게서 자기 부족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꿈, 뿐만 아니라 분노와 증오대신 용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낮에는 강제노동에 시달렸지만 밤에는 만델라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 부족의 언어를 가르쳐 주고 문화를 알려주었습니다. 지치고 분노에 찬 우리에게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주었는데 바로 용서였습니다. 증오와 분노로 이글거리던 우리에게 5년 동안 매일 밤 강조한 것은 용서였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정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타이르며, 사람을 미워하면 사람을 세우고 섬기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감옥에서 그에게 특별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만델라는 사람을 지배하고 문화를 바꾸며 평화를 만드는 삶의 원칙을 알고 있었기에, 분노와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용서로써 자기를 이기며 평화의 나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의 하나가 바로 노벨 평화상 수상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받은 복과 젊음 그 밖에 다른 특권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삶의 원칙들을 간직하셔야 합니다. 놀고먹고 자고 쉬면서 언제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유지하는 지혜를 가지십시오. 그럼으로써 받은 축복을 지켜나가십시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잃어버린 사명을 일깨워 줄 만한 영성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4절과 5절 말씀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한 것을 보면” 합니다. 5절 이후에 이어서 기록이 나옵니다.
성 건축을 마쳤지만 성에 거할 거민이 없었습니다. 성안에 사람이 없으면 성읍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주신 축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케 했다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는 하나님께서 생각을 넣어 주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귀환자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차에 걸쳐 귀환했습니다. 바빌론 포로로 있을 때 다 귀환하지 않고 5만 명 정도만 돌아왔습니다. 1차는 그 때로부터 1백 년쯤 전에 귀환했는데, 2차, 3차로 귀환한 사람들은 찾기 쉬웠지만 1차로 귀환한 사람들에 대해선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족보를 찾아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과 숫자를 확인하게 됩니다.
학자들 말을 빌면 1차로 귀환한 사람들은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거나 경건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또는 변화의 욕구가 있었던 사람 등 세 부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애국심이 있는 사람,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땅에 대한 감격, 즉 70년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자유를 얻고 조국을 찾았다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예루살렘 성을 돌아보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때 제사장들은 많이 돌아왔지만 레위인들은 드물었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돌아오면 고생하니까 오지 않은 것입니다. 레위인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대단히 적극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후손 대부분이 예루살렘에 살지 않고 다 흩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훼파된 예루살렘 성과 잦은 침략으로 현실은 몹시 피폐했습니다. 아무도 변호해주거나 지켜주는 사람 없이 살길을 찾아 이리 저리 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머물다가 기근이 들자 애굽에 갔는데, 그만 아내를 빼앗기는 위험을 당하고 맙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다가 남편과 자식 모두 잃고 며느리 룻만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거하게 하시는 땅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았습니다. ‘너희들이 거할 땅이 이곳이 아니냐? 이곳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다. 너희 선조들이 민족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자 고생을 감수하며 바빌론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냐. 잃어버린 우리 사명을 다시 찾자.’ 11장을 보면 느헤미야는 그들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시킵니다. 그들은 사명을 다시 찾고 황폐한 땅이지만 다시 옮겨왔습니다.
11장 본문 뒷부분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짓기 위해 요즘으로 치면 5백만 불에 해당하는 금은보화를 내놓습니다. 사람들이 헌신하며 가진 소유를 내어놓으니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맞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찾아 온 사명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사는 사명을 어려워도 성취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잠자던 그들의 사명을 일깨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공부하고 먹고 살기 바빠서, 혹은 교회 와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하라고 하신 그 땅을 떠난 분들이 있습니까? 공부하기 바빠서 기도의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까? 생활하는 게 바빠서 감사와 찬양의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까? 삶이 고달프다고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 영광 돌리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까? 좀 더 편하게 살고, 좀 더 나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힘들어도 머물라 했던 자리를 떠나있다면 서 이제 이사하십시오. 돌아오셔야 합니다.
20대 젊은이들의 50퍼센트가 기회만 되면 이민 가겠다고 하는 실정입니다. 여러분, 이 나라와 이 민족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땅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한 분이듯이 조국도 하나입니다. 지키고 서 있어야 할 그 자리가 때로는 고달프고 힘들다 해도 이 민족을 다시 살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주님의 명에 순종하는 우리들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중보기도 훈련을 받으라고 하는 이유는 육신의 힘으로 가지 못하는 기도의 자리에 강제로라도 안내하기 위함입니다. 새 생명과 풍성한 교회 생활 그리고 큐티, 성경공부 등을 통해서 잃어버린 사명을 다시 찾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스 핀젤 박사는 사람들이 변화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두려움 때문이다.
미지의 것은 사람들에게 안전지대를 뒤흔드는 위협이 된다.
둘째는 불안정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 이후에 자신들이 더 열악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권력의 상실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가 영향력과 권력의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느낀다.
넷 째, 타성 때문이다.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낀다.
다섯째,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들로 사람들은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에 머물며 익숙한 것을 좋아하다가 변화의 주변인으로 뒤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이사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용서의 자리로 옮겨가라고 하신다면 용서의 자리로 가십시오.
주님께서 헌신의 자리에 있기를 원하시면 헌신의 자리로 가십시오.
내가 그리고 내 가정이 서 있는 곳이 비록 험난하고 어려운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기 원하셔서 인도하신 것이라면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메시야를 오게 하는, 예루살렘 유다 지파가 있던 그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족보를 찾은 것이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서 오심을 영적으로 확인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메시야의 오심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사역을 이루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빌 3:12-14)”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