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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16
신비로운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 최승윤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을 둘러 싸고 있는 구조와 환경은 “기근”입니다. 기근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기근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레위기 26:19절 이하에 보면, “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 수고가 헛될찌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근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삼 년 육 개월이나 되는 오랜 시간 동안 기근이 아합 시대에 있었다는 것은 그 시대가 그만큼 하나님을 향해서 큰 죄악을 짓고 있었던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근이 심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생존권이 위협을 받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살벌해 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사건이 삼 년 육 개월의 기간 동안 어느 시점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시내가 마르고, 한 움큼의 밀가루로 과자를 만들어서 먹은 다음, 죽을 것을 생각할 정도라면 기근이 심해진 때일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면 사람들은 불안해 합니다. 먹을 것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넘어서 인간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악된 본성, 야수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것까지 빼앗아 먹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자식들을 삶아서 먹고, 늙은 부모를 버립니다.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기근이라는 구조, 그 상황 가운데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먹을 것과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기근이 얼마 동안 계속될 지 모르기 때문에 할수 있는 한 많이 확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기근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물자는 점점 더 고갈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 살기 위해서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먹을 것이 없어서도 살 수가 없겠지만 빼앗고 빼앗기는 살벌한 상태로 인해서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들어 있는 구조는 “기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근이라는 단어를 벗겨내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쟁사회입니다. 그것도 무한경쟁 사회입니다. 무한경쟁 사회란 상대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사회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에,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하고, 극대화 해야 합니다.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더 많이 끌어들이고, 더 많이 확보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을 갖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은 도태되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요, 구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요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 내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경쟁사회 속에서 먹고 먹히느냐? 살아 남을 것이냐? 사라질 것이냐? 살아 남기 위해서 나는 경쟁력을 키우고, 살아 남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확보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느냐? 상대방을 사랑과 협력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쟁 상대로만 보아야 하느냐? 사랑과 협력과 섬김은 무엇인가 내가 갖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없는데, 내가 살 수 없는데 그렇게 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런 물음들이 우리 안에 끊임 없이 일어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떠나서, 이런 것과는 다른 제 삼의 길은 없는가? 이런 것을 뛰어 넘는 제 삼의 세계는 과연 없는 것일까? 이런 이야기들은 거창한 이야기, 성경 속에서나 있는 이야기 정도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시돈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시돈은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입니다. 바알 종교의 본거지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우상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런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 있었는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모두 바알 종교에 관한 것이었으텐데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을 선택하시고, 그 여인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믿도록 하셨습니다. 참으로 귀하신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여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여인에게 보내신 이유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기근의 때에 엘리야를 섬기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결정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상하다 못해 기이하게 생각됩니다. 엘리야를 이 여인에게 보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방법으로 엘리야를 먹이셨습니다. 까마귀를 동원해서 아침과 저녁에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셨습니다. 물은 그릿 시내에서 마셨습니다.
기근이 심해지자 그릿 시냇가가 말랐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거기에 가면 한 과부가 있을텐데 내가 그 과부에게 명해서 너를 공궤, 섬기라고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바닥이 나서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요?
떡과 고기는 보내줄 수 있는데 빵과 과자와 떡은 만드실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먹을 것은 초월적인 방법으로 주실 수 있는데, 물은 그렇게 하실 수 없으셔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셨을까요?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샘물을 내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던 하나님입니다. 엘리야를 초월적인 방식으로 먹이셨다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렇게 하셔도 될 것입니다. 삼 년 육 개월이 아니라 십 년, 아니 백 년이라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을 다르게 잡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과 시돈을 괴롭히고 있는 기근도 실상은 엘리야의 기도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기근을 내리게 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엘리야라면 비도 오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삼 년 육 개월이 지난 다음에 엘리야가 기도를 해서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는 엘리야라면 한 두 사람 정도 도울 수 있는 것은 식은 죽 먹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도와야 하겠습니까?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도와주어야 하겠습니까?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도와 주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꺼꾸로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 질문을 다시 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왜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셨는가?
그것은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를 돕기 위한 것,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를 구원하시고,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신 방식은 사르밧 과부에게는 대단히 도전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가서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출발부터 도전적입니다. 기근의 때에, 한 방울의 물이 아까운 때에 물을 달라고 하니 물을 주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그런데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 여인은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아마도 물은 조금 여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엘리야는 가는 여인을 다시 불러서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의 형편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엘리야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추측하건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쨋든 그 여인에게는 엘리야의 말이 도전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떡은 고사하고 그 여인이 갖고 있는 것은 달랑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몇 방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궁핍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형편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 자기가 먹을 것을 포기하고 남에게 준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 남을 돕는다고 하더라도 그 도움이 얼마나 되겠으며, 자기가 먹고 죽으나, 남이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엘리야가 먹고 하루 이틀 더 살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다 죽으면, 그것이 더 귀한 일이다 라는 각성이 있지 않고서야 엘리야가 먹으나, 그 여인과 자식이 먹으나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또 엘리야가 먹고, 하루 이틀 하나님 말씀을 전하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몰라도 달라질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형편에서는, 자신과 아들이 먹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런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무례한 것이요,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여인의 말을 듣고도 막무가내입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서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뭐 저 따위가 다 있어”라고 할 만한 상황입니다.
그 여인의 얼굴 빛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엘리야는 계속해서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가 오늘 사건의 분수령입니다.
엘리야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 듣는다면 무엇 때문에 들어야 하며, 거절한다면 무엇 때문에 거절해야 하는가? 만약 거절한다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간단합니다. 그 여인의 말대로 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그 다음에는 나무껍질 벗겨서 삶아 먹다가, 그것도 없으면 남의 것 훔쳐서 살다가, 잡히면 죽도록 터질 것이고, 다행이 안 잡히면 어느 정도 그런 생활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죽은 동물이나, 죽은 사람을 먹을 수도 있겠지요.
옛날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인가 어디에 불시착해서 추위와 굶주림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나머지 사람들이 시체를 먹으면서 견디다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 때까지 살아보자 하는 식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다가 죽게 되겠지요.
엘리야의 말을 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엘리야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부터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야라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인가? 저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야의 인격이 아무리 고매하고 믿을만 하다고 해도, 엘리야가 한 말은 엘리야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내게 해주실 수 있으신가? 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대단히 큰 도전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죽는 것은 매 한 가지인데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을 도우려고 내것을 주고 죽었다면, 저 사람이 내 이름은 기억할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혹시 나를 좋게 보셔서 나를 살려주실 수 있지 않겠는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가서 할 말은 있지 않겠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밑져야 본전이다. 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한 번 믿어보자. 믿어서 손해볼 것 없지 않냐? 한 끼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그게 그것인데, 어디 저 사람 말대로 되는지 보자. 저 사람 말대로 되면 그것은 대단한 축복이 아니겠는가?
사르밧 과부가 어떤 마음으로 엘리야의 말을 들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것을 내려 놓았을 때, 자기의 것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를 체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을 읽는 독자들로서 우리가 사르밧 여인을 믿음의 여인으로 인정한다면,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
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았다는 것이 그 여인이 갖고 있는 중요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내려 놓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포기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많이 갖고 있을 때, 상황과 여건이 충족 되었을 때는 가진 자들의 여유로움으로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을 때, 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을 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대단히 크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은 결국 내 삶이, 내 생명이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과 도우심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건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요청,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에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은사와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이 우리들 삶의 유일한 도움이시요, 주관자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증거요,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믿고 섬기고 있다는 믿음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한 사르밧 여인과 그 가정은 기근이라는 혹독한 시련의 때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살게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신비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르밧 여인이 믿음의 사람이요,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아셨기에, 더욱 큰 은총을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 엘리야를 보내시고, 도전하셨고, 그 도전을 믿음으로 감당한 그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과 은총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경쟁사회에서, 삶이 불안하고, 힘들 때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확실한 길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많은 것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소유해야 하며, 얼마나 많이 쌓아두어야 하는가? 답은 다다익선입니다.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누군가는 적게 가져야 합니다. 내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누군가는 더욱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적게 가졌다고 생각하면 많이 가지려고 노력할 것이요, 많이 갖고 있다면 내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것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입니다.
내가 갖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많이 갖고 있으면 많이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 입니다. 나의 생존권이 위협을 받는다거나, 내가 어려워진다거나, 내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들어가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갖고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있느냐? 없느냐? 갖고 있느냐? 가진 것이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려는 것이 내 삶의 최우선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내 삶의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와 선하신 뜻을 이루는 것에 있다면 내 삶의 여건이 어떻든, 내가 힘들고 어렵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자기와 아들이 먹을 것까지 엘리야를 위해서 주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삶의 목표가 안전하게 사는 것이요,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쌓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불안한 때를 살아가는 합리적이고, 확실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삶의 방식 안에서는 신비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기대하고,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갖고 있는 만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생각은 생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쌓아두는 것은 모두 죄악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잘못 읽지 않았다면,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향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위해서 모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그 확실하고 안전한 방식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신비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그 어떤 기대와 믿음도 발생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해도 자신의 것을 쌓아두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유익과 안전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면, 하나님의 요구는 언제, 어떻게 내 삶 가운데서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봐서 아는 것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지, 풍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없어서,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만큼 끝이 없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초로 해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니라고 해도 좋습니다. 아니라고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풍성하고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소유의 넉넉함에 우리의 생명의 기초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렇게 말하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없는 가운데서도,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요구를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여인에게 보내신 것은 엘리야를 위함이 아니라 사르밧 여인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방 땅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던 그 여인으로 하여금 신비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신비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길임을 그 여인으로 하여금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여인이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슨 말을 들려주고 싶어할까요? 사르밧 여인의 행함과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만 할까요? 먼저는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내려 놓고, 우리의 것을 하나님의 요구와 요청에 따라서 드릴 때, 신비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체험하는 길임을 알라고 할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쌓아두고, 더 많은 것을 축적하는 것이 경쟁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요, 힘이요, 보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움켜쥐고, 쌓아두면 자기 자신만 사는 길이지만, 아니 움켜쥐면 쥘수록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줄 수 있는 것이지만, 내것을 내려 놓고, 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면 할수록 나도 살고, 이웃도 살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식을 더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사르밧 여인은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고 쓸 것을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르밧 여인이 체험하고 누린 신비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사르밧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체험하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기초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 하나님 아버지만이 우리의 삶의 기초라는 것을 확실하게 붙잡고 살 수 있겠는가? 우리의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여유가 있을 때나, 여유가 없을 때나, 가진 것이 넉넉할 때나, 부족할 때나, 상황이 되든지, 안 되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근본문제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의 것을 고집함으로, 우리의 상황을 핑계됨으로 신비롭게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과 능력과 사랑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일상 생활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그대로 살아감으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비로운 은혜와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