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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문화원 강진 일원 답사기
이명철
춘분을 거쳐 청명과 한식을 지난지가 1주일이나 된 봄날이다. 고창문화원에서는 전남 강진군 일원으로 답사를 떠난다. 나는 아내와 같이 2호차에 탔다. 산천(山川)은 꽃 떨어진 자리에 연초록 새싹이 파릇이 올라와 초록의 세상을 펼쳐놓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자연스런 평온이 감돈다. 일찍이 순자(荀子)는 ‘저 초록세상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면서, 강상풍월(江上風月)은 일정한 주인이 없어 한가로이 즐기는 자가 그 주인이다.’고 읊었다. 나 역시 오늘만은 강상풍월의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강진만 생태공원
강진만 생태공원에는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는 지역에 둑이 없는 열린 하구로 자연적인 생태공원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하구 습지에 인접한 농경지와 산지, 소하천 등의 생태 환경이 조화를 이루어 다양한 생태자원이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다는 안내판을 읽는다. 그 내용에 1,131종의 생태다양성의 보고라고는 하나, 내 눈에는 넓은 갈대밭의 갈대와 파랗게 돋아나는 풀과 꽃들 외에는 그 흔한 바닷가 농게 한 마리 볼 수가 없었다. 우리 고창군 지자체 전체가 생물권 보전지역임과, 람사르 운곡 내륙습지와 연안습지의 다양성을 떠올려본다. 자연환경에 따른 생태의 다양성은 비교의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은 영랑생가에 가기 위해 차를 타면서였다.
✩영랑생가
영랑생가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있어 맛깔스런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북의 소월, 남의 영랑’이란 말이, 북의 오산고보, 남의 고창고보와 대칭을 이루는 말 같아 해설이 한층 의미를 더한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현대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영랑 김윤식(金允植)선생(1903~1950). 영랑의 생가 초가집은 원형대로 잘 보존되고 있었다. 이는 건축적 의미를 지녔다기보다는 영랑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생각되고, 규모는 훨씬 작지만 옛날 우리 집 생각이 나는 것은 내면에 잠재된 의식일까 무의식일까?
시비(詩碑)를 읽으며, 중학교 때 처음으로 영랑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배우면서 나는 처음 영랑이 여자인 줄 알았음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인 설움에 잠길 테요/……”(이하생략). 시어의 여성스러움이, 이별한 임을 그리워하며 임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연상하였었기 때문이었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이며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옛날 상상에 도움을 주었으며, 주변 화단 등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를 강조라도 하듯 모란이 많이 심어져 단 한 송이 모란꽃 피워놓고 많은 꽃망울을 터드리려 하고 있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조국에선 반동지주로서 설움 받은 내용을 시로 표현하고 자신의 젊은 정열과 민족의 기상을 은연중에 문학을 통해서 불살랐던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거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영랑. 그러나 48세란 짧은 생을 살다간 것을 생각할 때 공연히 서글퍼짐을 느끼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무위사(無爲寺)
무위사는 617년(신라 진평왕39)에 원효국사(元曉國師)가 창건하였다. 1739년(영조 15)에는 미타전(彌陀殿), 천불전(千佛殿), 시왕전(十王殿)만 남아있었다고 사적기에 쓰여 있는데, 지금은 미타전의 개명으로 생각되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 남아있었다.
무위란 무엇일까? 특히 사찰(寺刹)에서 무위는 어떤 의미일까?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의 도가(道家)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도가(道家) 사상이 소규모 은자(隱者)집단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노장사상의 핵심이라고 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연결된다. 무위(無爲)란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음 이다. 감각이나 기존의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도가적 사유방식인 것이다. 도를 도라고 하면 진짜 도가 아니고,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대상의 본질은 퇴색해져버린다는 도가 사상. 이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포교를 위하여 도가의 사상을 포용한 결과의 산물이 아닐까 한다. 그 뒤 선(禪)에서 추구한 무위자연이 결국 선의 종지(終止)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문 앞에서 단체사진은 우리 모두 아라한이 된 것 같았다.
⟡일주문(一株門)
절에 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이란 말 그대로 기둥이 좌우 하나씩, 그 기둥을 연결하면 한일(一)자가 된다하여 일주문이라 부른다. 모든 건물에는 문(門)이 있고 여닫는 문짝이 있어야 되는데, 일주문에는 문짝이 없다. 이는 불교가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닌 ‘무신교(無神敎)’라는 뜻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신이 아니라 우리 인류와 역사를 같이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열반(涅槃)하실 때, “나는 신(神)이 아니다. 나는 다만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예배의 대상이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열반유훈(涅槃遺訓)을 남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부처님을 신과 같이 믿고 있는데, 이렇게 부처님을 신으로 믿는 것을 불교의 밀교(密敎)라 한다. 또한 일주문에는 그 절의 이름을 현판(懸板)으로 걸게 되었는데, 현판 앞에 그 절에서 신봉하는 산이나 강, 바다 이름을 붙이게 되어있다. 무위사는 ‘월출산 무위사(月出山無爲寺)’였다. 선운사는 ‘도솔산 선운사(兜率山禪雲寺)’라는 걸 생각하면서 올라가니 사천왕문이 나온다.
⟡사천왕(四天王)
천왕문은 불국토를 수호하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이 있는 곳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물리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 즉, 천왕문은 가람을 호지하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을 유지하고, 신성한 불법의 공간에 들어온 불자들의 마음가짐을 엄숙 정연토록 하는 의미를 갖는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토속 신이었으나 불교에서 수용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사천왕은 33천 중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을 관장하며 제석천의 명을 받아 수미의 4주를 다스리는 신으로 호세천(護世天)이라고도 하며, 아래로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거느린다.
동방-지국천왕(持國天王)-비파를 든 모습-파란색
남방-증장천왕(增長天王)-보검을 든 모습-붉은색
서방-광목천왕(廣目天王)-용을 잡은 모습-흰색
북방-다문천왕(多聞天王)-보탑을 든 모습-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며, 다섯 가지 색을 합하여 5방색이라 하며, 티베트에서는 타르초라한다.
⟡극락보전(極樂寶殿)
(국보 제13호)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을 봉안한 사찰의 법당들 가운데 대웅전 다음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 건물이 바로 극락전이다. 이 불전은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의 주존이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서원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 협시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ㆍ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전각이다. 따라서 이 법당은 다른 말로 ‘극락보전(極樂寶殿)’ㆍ‘무량수전(無量壽殿)’ㆍ‘미타전(彌陀殿)’ㆍ‘아미타전(阿彌陀殿)’ㆍ‘수광전(壽光殿)’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예로부터 불벽화(佛壁畵)는 회사벽 또는 재사벽 바탕에 그려져 왔다. 이러한 유물로는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후불벽화와 배면의 관음보살벽화, 안동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후불벽 배면의 관음보살벽화,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후불벽 배면의 관음보살벽화, 양산 통도사 영산전의 다보탑ㆍ양류간음(楊柳觀音)ㆍ나한상벽화 등이 유명하다.
무위사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한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49일째 되는 날,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는데, 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오래된 극락전에는 보통 아미타 부처님만을 단독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은데, 무위사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과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봉안되어있었다.(지장보살 대신 대세지보살을 배치한 불전도 많다) 중앙에 자리하는 아미타부처님의 형상은 연화대좌 위에 결과부좌한 자세로 ‘미타정인(彌陀定印)’이라 부르는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한 모습이며, 우견편단(右肩偏袒)의 형식으로 조성되는 석가모니부처님과 달리 가사를 양어깨에 걸치는 통견(通肩)의 형상으로 조성되었으며, 또한 양 협시보살 중 관세음보살상은 아미타불의 왼편에, 지장보살은 오른편에 각기 자리하고 계셨다. 관세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을 새겼으며, 지장보살은 석장을 든 모습이었다. (대세지보살은 보관에 정병을 새긴 형상으로 조성된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후불벽화(阿彌陀三尊後佛壁畵)는 국내에 현존하는 아미타후불화로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이 벽화는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기법이 어우러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륵전(彌勒殿)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언제 부처가 된다는 예언)를 받아 미래에 출현할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이 곧 미륵전(彌勒殿)ㆍ용화전(龍華殿)ㆍ자씨전(慈氏殿)이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이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조영한 불전이다. 미륵전에는 미륵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로서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 혹은 묘향보살과 법륜보살의 삼존상을 봉안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며, 수인은 미륵불상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이고, 복장은 통견의 가사가 보통인데, 무위사의 미륵전은 돌미륵 한분만 모셔져있었다.
⟡명부전(冥府殿)ㆍ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을 명부전(冥府殿) 혹은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한다. 명부(冥府)란 염마왕이 다스리는 지하의 세계인 유명계(幽冥界) 또는 명토(冥土)의 통칭이다. 또한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10대 지옥의 대왕을 모신다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르고, 이승과 저승의 가교역할을 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무위사의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그 협시인 도명존자 및 무독귀왕 과 시왕, 인왕, 녹사 판관 등이 봉안되었다.
⟡응진전(應眞殿)ㆍ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은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 혹은 500나한상을 모신 전각으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부른다. 나한은 일찍이 6신통과 8해탈을 모두 갖추어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이기도 하다. 아라한은 소승의 교법을 수행하는 스님으로 성문의 가장 상좌지위를 뜻하며, 석존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의 지위에 오른 16분을 가리켜 16나한, 16대사(大士)라 부른다. 이러한 나한신앙은 16존자의 한계를 벗어나 크게 오백나한으로 확대되었는데, 무위사의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ㆍ보현보살이 협시하고, 그 양 옆에 여덟 분의 나한이 봉안되어있었다.
⟡산신각(山神閣)
사찰에서 산신을 모시는 전각으로, 산령각(山靈閣) 또는 산왕각(山王閣)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던 토속신이다. 일찍이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나 사찰에 산신각이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중기부터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의 지형적 특성을 바탕으로 조선중기 이후에는 산신신앙이 크게 유행되었다. 이러한 산신신앙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의 성격으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사찰이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산신령은 사찰을 보호하는 외호신중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무위사 산신각은 극락보전 뒤쪽에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이었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불화를 모시며 대개 흰수염, 상투관,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ㆍ불로초 등 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ㆍ영주산ㆍ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또한 민간신앙에서는 산에 사는 영물로 호랑이를 산군으로 모시기 때문에 산신은 언제나 호랑이를 거느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무위사 산신각은 월출산산신각(月出山山神閣)이었다.
무위사(無爲寺)를 내려오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생각해본다. 선(禪)과 교(敎)가 하나라는 이치도 되새겨본다. 불도(佛道)는 무위자연 안에서 어떤 행위를 원하는 걸까? 장자(莊子)의 말대로 자신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으며, 개인적 이해에 얽매인 사람을 경멸하지도 않는 사람. 재물을 모으고자 애쓰지 않으며 그렇다고 청빈의 덕을 내세우지도 않는 사람. 남에게 의존함이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또한 홀로 걸어감을 자랑하지도 않는 사람. 대중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대중을 따르는 자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 이러한 무위자연 불도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불도(佛道)에서의 무위법(無爲法)은 생사의 변화가 없는 참된 법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덮어 어리석게 하는 것은 애착과 탐욕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있어서는 안으로 얻을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할 것이 없어 마음은 진리에도 얽매이지 않고 업도 짓지 않는다. 생각도 없고 지음도 없으며, 닦을 것도 없고 깨달아 얻을 것도 없다. 여러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가장 높은 것이니 이것을 일러 무위법이라 한다. 그러나 행(行)함이 없는 무위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구름은 끼었지만 솔바람은 월출산 산신이 보내는 맑은 바람인양 시원하며 청정하여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는 일주문을 다시 내려오는 발길(道)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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