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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 제12강 금강경 14.이상적멸분 離相寂滅分 2
제12강 이상적멸분 제14(2)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불응주색생심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이요 응생무소주심이니라
앞에 나온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구절과 닮은 내용입니다. 여타의 경전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한 가지 주제에 집중력이 떨어진다면, 금강경은 길이가 길지 않은 경인데도 어떤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장의 표현도 강합니다. ‘반드시, 틀림없이’라는 뜻의 응(應)자도 많이 나옵니다.
이 문장에는 불응이라고 하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불자로서, 보살로서 차원높은 삶을 살려는 사람이라면 응당히 어떤 사물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고 응당히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어떤 방향으로든지 항상 흘러가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인데, 어딘가에 머물러서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구름 흐르듯이 흘러가도록 두라는 것이지요.
금강경의 여러 구절들은 우리 일상에서 삶의 지침으로 삼아도 좋은데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生無所住心]’하는 구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가 나를 배신했으니, 의리가 없느니 하고 안달합니다. 그런데 흘러가는 것은 그 사람의 삶입니다. 나도 그렇게 흘러가고 남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스스로 변하고 싶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남이 보기에 나 역시 그렇게 변해가고 흘러가고 달라져 갑니다. 그런 것이 삶이라면 자기를 비춰서 남도 그렇게 이해해야지요. 너무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若心有住면 卽爲非住니 是故로 佛說菩薩은 心不應住色布施라하니라
약심유주면 즉위비주니 시고로 불설보살은 심불응주색보시라하니라
마음은 머물렀다고 할 때 벌써 흘러가고 있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모든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의 삶 중에서 가장 근본인 베푸는 삶, 보시에 대해서도 응당히 어떤 사물내지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했건 했다고 하는 그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위이익일체중생하야 응여시보시니라.
보살이 보시를 하는 것은 진정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타인에게 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베푸는 것입니다. 봉사단체에 가서 노인들의 목욕을 시켜드린다거나 빨래를 해드리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리 하나를 양보하는 것, 밥 한끼, 책 한권, 염주 하나를 선물하는 것도 모두 보시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려고 하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보시를 할 때 응당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해야 합니다.
보살의 삶은 베푸는 삶이니까 보시라는 말을 자꾸 합니다. 보시는 그대로 삶입니다. 보살이나 불자나 좀 더 뜻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이지요.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여래가 설일체제상이 즉시비상이며 우설일체중생이 즉비중생이니라.
금강경에 즉비라는 말이 스무 번 이상이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도 즉시비상과 즉비중생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체제상이라고 하는 모든 상이 즉시비상입니다. 따지고 보면 상은 없는 것인데 없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약 상이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라면 누구나 공히 똑같은 양의 상을 내야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해놓고도 상을 좀 덜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독 상을 많이 내는 사람도 있고 아예 상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그렇다면 상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고정된 어떤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만일 상이라고 하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부처님도 그렇게 ‘상을 떠나라’‘상을 내지 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설한 일체상은 곧 상이 아니며 덧붙이면 그 이름이 상일 뿐입니다. 시명상이지요. 말을 하자니 상이고, 편의상 상이라 이름 지어놓고 부르는 것이지요. 상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어쩌다 우리가 상을 좀 내더라도 크게 두려워 하거나 후회하고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 성인이나 부처님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우리는 좀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중생이라는 말을 잘 씁니다. 그러나 편의상 우리가 중생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부를 뿐입니다. 사실은 우리는 모두 부처지요.
불교 밖에서는 아예 중생이라는 말도 안 씁니다.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사람일 뿐입니다. 중생이 즉비중생인 이유,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닌 이유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동안 공부해온 것으로써 얼마든지 그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있지요. 중생이라고 하는 말에 전혀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시진어자며 실어자며 여어자며 불광어자며 불이어자니라
부처님이 모처럼 당신이 하시는 말씀의 진실성에 대해서 이렇게 다섯 번이나 간곡하게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다. 이 이름이 중생이다’ 불교 초보자는 이런 말을 듣고 의아해 합니다. 부처님은 그동안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고 했고, 깨달음이 깨달음이 아니고 이름이 깨달음이며, 설법이 설법이 아니고 이름이 설법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전생의 수기 역시 그 이름이 연등불에게 수기 받은 것이라고 하였지요. 이렇게 엄청난 사실들을 모두 부정하고 ‘그 이름이 무엇이다’ 라고 하였으니 초보불자들이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해가 안 가서도 못 믿지만, 자신을 저급하게 취급하고 꼭 참회를 하고 어디엔가 죄를 빌어야 하는 중생이라는 집착에 너무 굳어져 있어서 이 모든 말들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중생들의 이러한 모습은 부처님이 통탄할 일이고 가슴을 칠 일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나는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다[是眞語者,시진어자]’‘실다운 것만 말하는 사람이다[實語者,실어자]’ ‘진리와 똑같은 것만 말하는 사람이다[如語者,여어자]’ ‘속이지 않는 말만 하는 사람이다[不誑語者,불광어자]’ ‘사실과 다르지 않는 말만 하는 사람이다[不異語者,불이어자]’라고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는 모두 같은 뜻인데 표현을 달리 했을 뿐입니다. ‘나의 말이 얼른 이해가 안되거든 무조건 믿고 따르기라도 하라’는 뜻에서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야 여래소득법은 차법이 무실무허하니라
부처님이 얻으신바 법은 연등불에게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것이고, 역사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듯이 출가하여 6년 고행을 하시고 보리수 아래서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여래의 소득법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입니다. 저는 그런 표현을 잘 쓰는데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최대의 사건인가, 모든 인간이 죄 많고 업장 많은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인간이 모두가 부처이고 모두가 하느님이고 모두가 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부처님이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래가 얻으신 법이지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과거에 가신 인류나 현존하는 인류나 미래에 올 인류 전체가 부처의 격으로 상승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본래가치를 증명한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부처님 같은 성인은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에 ‘사람은 그대로 부처다’ 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을 바로 본 것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성인이라고 하지요. 그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거나 업장 많은 중생이라고 가르치는 성인은 온전치 못한 성인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방편이거나 인간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을 그렇게 가르친다면, 결코 성인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서 여기 고려청자가 있는데, 이 가치를 모르고 모조품이라고 한다든지 엉터리 그릇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도자기 전문 감정가가 못 됩니다. 제대로 감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전문적으로 감정한 사람은 부처님입니다. 사람을 전문적으로 감정하지 못한 사람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고, 업장 많은 중생이라고 하고, 종이라고 비하합니다. 고려청자를 가지고 엉터리 그릇이라고 보는 것과 같지요. 이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불교가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 사실을 빨리 깨닫고 만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당신이 발견한 그 깨달음마저도 무실무허라고 하였습니다.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는 것이지요. 깨달음마저도 깨달았다고 하는 관념에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엄청난 희생과 투쟁을 하였습니다. 왕자의 지위를 버렸고 6년이라는 피나는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런데 그 깨달음이 실다운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허망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무실무허라는 말은 천하의 명언입니다. 이 말을 우리 일상에 원용해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무실무허야, 실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망한 것도 아니야’라고 한다면 곳곳에 다 적용이 됩니다.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수보리야 약보살이 심주어법하야 이행보시하면 여인이 입암에 즉무소견이요 약보살이 심부주법하야 이행보시하면 여인이 유목하야 일광명조에 견종종색이니라
이 구절은 금강경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명언 중에 명언이지요.
‘만약에 보살이 대상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캄캄한 어둠속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심주어법 할 때의 법은 모든 대상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조건을 붙이고 이유를 붙이고 대가를 바랍니다. 마음에 집착함이 있는 것이지요. 자리를 앉히는 것만 해도 나와 가까운 사람은 좋은 자리에 앉히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본척만척 해버립니다. 그런 계산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조건과 이유를 다는 것은 마음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면서 행하는 보시는 밥 한 숟가락이나 종이 한 장과 같이 아주 작은 보시라고 하여도 그 결과가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러 교실에 왔는데,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면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계단이고 담벼락이고 전봇대에 넘어지고 구르고 부딪쳐서 상처투성이 피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어떤 조건, 어떤 이유, 이런 것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보시를 하는 것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만약 어떤 보살이 마음을 어떤 조건이나 이익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은 눈도 아주 밝은 눈이 있고, 태양빛도 환하게 잘 비추어서 가지가지 사물을 다 분별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만에서 자재공덕회를 이끄는 증엄스님은 이 시대의 관세음보살이며 성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 분의 일화 중에 교회가 없어서 예배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안타까와하여 교회를 지어준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보시는 마음속에 이미 나다 너다 불교인이다 기독교인다 하는 분별과 차별을 떠난 보시입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어디에 도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사람, 베푸는 사람입니다. 궁극에는 우리 불자들이 모두 그러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경지라고 생각한다면 어렵지만 한 생각 돌이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지혜에 의해서, 특히 금강경의 지혜에 의해서 마음에 조건을 달지 않고 이유를 달지 않고 내키는 만치 베풀고 거기 머물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밝은 눈이 있고, 태양빛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 있으니 계단이 아무리 좁고 험하더라도 다치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잘 오르내립니다. 도로에 차가 아무리 씽씽 달려도 빛이 있으면 그 차를 잘 피해서 다닙니다. 아무리 의자가 빽빽한 곳에서도 빛이 있으면 자기가 앉을 자리를 잘 찾아서 앉지요. 그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지혜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빛이 바로 지혜이지요.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지혜가 있을 때 자비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지 지혜가 없다면 자비 역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지혜가 우선입니다.
‘만약 보살이 마음을 온갖 것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보살이 온갖 것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밝은 눈도 있고 햇빛이 밝게 비칠 적에 갖가지의 온갖 사물들을 분별하여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는 이 대목 속에 저는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보시라고 표현했지만 꼭 보시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보시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일체 행위가 다 포함됩니다.
지혜가 없다면 무슨 일을 해도 캄캄합니다. 상처투성이 인생이 됩니다. 집착하는 것이 바로 지혜가 없는 것이지요. 조건을 달고 별별 ‘ 때문에’라고 하는 이유를 붙이는 것이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상처가 많은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동안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자식 때문에, 아내 때문에, 남편 때문에, 형제 때문에, 집안 때문에 ,부모 때문에 등등 별별 ‘때문에’ 라는 이유를 붙이지만 모두 아닙니다. 단 한가지 이유는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 것 뿐입니다. 그 외에 달리 이유를 붙일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혜만 있으면 내가 사는 주변상황이 어떻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나오듯이 눈도 밝고 태양빛도 밝아서 모든 사물들을 환하게 분별하면서 내 인생을 가는 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고 순리 따라서 자기 분 따라서 잘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구절의 교훈입니다.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則爲如來가 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수보리야 당래지세에 약유선남자선여인이 능어차경에 수지독송하면 즉위여래가 이불지혜로 실지시인하며 실견시인하야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하리라
당래지세는 불멸후 제1오백년이 됐든, 제5오백년이 됐든 간에 앞으로 오는 세상을 말합니다. 오는 세상에 만약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면 곧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그 사람들이 모두모두 한량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한다고 하는 사실을 다 보고 다 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와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앞서 ‘심주어법 이행보시하면 여인입암 즉무소견이고 심부주법 이행보시하면 유목하여 일광명조에 견종종색이다’라고 하는 엄청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전을 수지독송한다고 할 때 이 경전은 금강경 전편을 뜻합니다만 특히 앞서 말씀하신 이 대목을 뜻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따로 떼놓고 봐도 너무 좋고 근사합니다. ‘집착이 있으면 캄캄하고, 집착이 없으면 환하다’ 는 말씀은 곧바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열쇠입니다. 이 간단한 열쇠만 있으면 우리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구절 끝에 한 번 더 금강경의 위대함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누가 몰라줘도 걱정하지 마라 여래인 내가 다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래는 이천 육백년 전의 석가모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이해해 준다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옆집에 사는 보통 사람도 다 알아줍니다. 제3자의 입장이 되면 누구에게나 부처의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일이니까 캄캄하지요. 남의 일 같으면 환하게 압니다. 정작 자기 일에는 캄캄한 사람도 남의 일 훈수 두는 데는 잘 둡니다. 그러므로 부처의 지혜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3자의 입장만 되어버리면 우리는 곧바로 부처의 입장, 부처의 지혜를 가질 수가 있어요. 자신의 일에도 제 3자의 입장이 되어서 ‘남의 일이다’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자기 일을 저렇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옳지 않다’라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지요. 우리에게 당면한 일이나 애착하는 자기 가족의 일도 한번씩은 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보는 훈련을 한다면 좋은 안목, 좋은 해결책, 좋은 열쇠가 떠오릅니다.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2600년 전 석가모니의 지혜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제3자의 입장이 됐을 때 남의 일에 훈수를 둘 줄 아는 바로 그 안목이야말로 부처님의 지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상 금강반야바라밀경 상권이 끝났습니다.
권(卷)은 말을 권자입니다. 한 발 정도 종이를 둘둘 말면 그것이 한 권입니다. 그 이상이면 간수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내용이 아니라 양에 따라서 경전을 1권 2권으로 나누었습니다. 금강경도 짧은 경이지만 두루마리 두 권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상 하권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상권에 해당됩니다.
출처 : 염화실
[출처] 금강경 강좌 제12강 - 무비스님|작성자 단장중용
제13강 지경공덕분 제15
持經功德分 第十五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初日分에 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中日分에 復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後日分에 亦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야 如是無量百千萬億劫을 以身布施하고 若復有人이
聞此經典하고 信心不逆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야 爲人解說이리오
須菩提야 以要言之컨댄 是經은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하니 如來가 爲發大乘者說이며 爲發最上乘者說이니라 若有人이 能受持讀誦하야 廣爲人說하면 如來가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하리니 如是人等은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樂小法者는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則於此經에 不能聽受讀誦하야 爲人解說하리라
須菩提야 在在處處에 若有此經하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의 所應供養이니 當知此處는 卽爲是塔이라 皆應恭敬作禮圍繞하야 以諸華香으로 而散其處하리라
제15, 경을 지니는 공덕[持經功德分]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오전의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또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때에 또한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몸으로 보시해서, 이렇게 하기를 한량없는 백 천 만 억겁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아니하면, 그 복은 앞의 복보다 훨씬 뛰어나느니라.
그런데 하물며 이 경전을 쓰고 출판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널리 여러 사람들에게 해설하여 주는 일이겠는가?
수보리야, 요점만을 말한다면, 이 경은 상상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끝도 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여래가 대승(大乘)의 마음을 낸 사람들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하며, 최상승(最上乘 )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설명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이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끝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였음을 모두 알고 모두 보노라.
이러한 사람들은 곧 여래의 최상의 깨달음을 온 몸으로 짊어진 것이 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라는 소견, 남이라는 소견 ,중생이라는 소견, 수명에 대한 소견에 집착하여 곧 이 경을 듣고, 받아들이거나 읽고 외우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설명하여 주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만약 이 경전만 있으면 일체 세간의 천신들과 사람들과 아수라가 반듯이 공양하여야 한다.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부처님의 탑을 모신 곳이 된다.
모두들 반드시 공경하고 예배를 드리며, 주위를 돌면서 여러 가지 꽃과 향으로 그곳을 장엄하여야 하느니라.”
금강경 하권
제15분 지경공덕분부터는 금강경 하권에 해당됩니다. 경전의 양에 따라서 한 발 정도의 두루마리를 말은 것을 권이라고 하고, 금강경은 상, 하 두 권으로 이루어졌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하권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금강경의 제목과 대의를 상기해 보겠습니다.
경의 제목과 대지
이 경의 제목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견고하고 빛나고 날카로운 깨달음의 지혜로써 우리 인간사 세상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금강은 다이아몬드, 반야는 지혜, 바라밀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 이런 뜻이지요.
금강경의 대지(大旨)는 ‘파이집현삼공(破二執 顯三空)’입니다. 두 가지 집착을 깨뜨리고 세 가지 공의 이치를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집착이란 나라고 하는 집착인 아집(我執)과 나 이외의 다른 객관에 대한 집착인 법집(法執)입니다. 세 가지 공은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인데 나도 공하고 대상도 공하고 나와 대상이 함께 공하다는 뜻이지요. 뜻은 그렇지만 이름이 세 가지 공일 뿐입니다.
두 가지 집착만 없으면 세 가지 공은 저절로 드러납니다. 마치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과 태양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걷게 하는 일이 중요하지요. 태양을 어딘가에서 갖다 놓거나 푸른 하늘을 갖다 놓거나 하는 일은 아예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집착을 깨뜨리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으로 태어난 가장 훌륭한 보람과 의무도 충분히 다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란 ‘인간으로 태어난 소중한 기회를 한껏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경을 수지하는 공덕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경을 가지는 공덕에 대한 이야기’ 라는 뜻이지요. 부처님 경전은 무수히 많습니다. 금강경은 특히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이지요. 그만치 중요한 경전이고 우리 삶에 훌륭한 교훈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경전을 가지고 다니고, 읽고, 외우고, 사경하고, 위인해설하는 것을 경을 통한 다섯가지 수행법이라고 하고, 법화경에서는 5종법사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지경(持經)이라고 할 때 경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하게 경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 경을 읽고 외우고 쓰고 남을 위해 설명하는 것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렇게 할 때 그에 따르는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이지요.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初日分에 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中日分에 復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後日分에 亦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야 如是無量百千萬億劫을 以身布施하고 若復有人이
聞此經典하고 信心不逆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야 爲人解說이리오
수보리야 약유선남자선여인이 초일분에 이항하사등신으로 보시하며 중일분에 부이항하사등신으로 보시하며 후일분에 역이항하사등신으로 보시하야 여시무량백천만억겁을 이신보시하고 약부유인이 문차경전하고 신심불역하면 기복이 승피하리니 하황서사수지독송하야 위인해설이리오
하루 가운데 아침을 초일분, 정오를 전후한 점심을 중일분, 저녁을 후일분이라고 합니다. 몸으로써 보시한다고 하는 것은 일생에 한 번도 어렵지요. 과거에 의협심이 강한 의사들이 간혹 있었고 위법망구(爲法忘軀)라고 해서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펴기 위해서 몸을 헌신하는 순교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들은 참으로 희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만약에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항하강의 모래 같이 많고 많은 몸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보시하는데 그 보시를 하루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량백천만억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것 같으면 기복이 승피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 다는 것은 이 경전을 듣고 환희심이 나다는 것이지요. ‘이 경전이 정말 좋다’‘금강경의 가르침이 정말 훌륭하구나’‘소의 경전으로 삼을만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해서 신심을 내고, 기쁜 마음을 갖는 복은 앞에 말한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은 몸으로 아침 점심 저녁 무량백천만억겁동안 보시한 복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경을 서사하고 수지하고 독송하여 위인해설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여기는 서사가 먼저 나왔는데, 경을 수지, 독, 송, 서사, 위인해설하는 것은 다섯가지 수행방법입니다. 경전마다 순서와 표현이 약간씩 다르지만 상관없습니다.
앞서서 삼천대천 세계만한 금은보화로써 보시한 것 보다 금강경의 가치가 훨씬 크다는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경공덕분에서는 우리 육신의 가치보다 금강경의 가치가 훨씬 크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남산 크기 만한 황금덩어리보다 우리 손가락 하나의 가치가 더 있지요. 육신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큰 가치입니다. 그런 큰 가치를 가진 몸을 무수히 보시하는 것보다도 금강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해주는 이 다섯 가지 방법으로써 수행을 하는 가치가 훨씬 크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금강경의 가르침이 이러한 가치가 있구나’‘위대한 가르침이다’ 하는 느낌이 들고 이러한 가르침이 우리 마음에 와 닿을만큼 우리는 이 경전에 대해 심심을 내고 공부해야 합니다. 마음이 그렇게 열려야 하고 영혼이 그만치 맑아져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이지요. 인생을 살면서 또 경전을 공부하면서 경전의 가치를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때가 있어야겠지요.
꼭 육신을 가지고 보시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경전의 가치야말로 이 육신의 가치보다 훨씬 더 높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느낀다면 정말 공부를 잘 하는 것이 됩니다.
須菩提야 以要言之컨댄 是經은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하니 如來가 爲發大乘者說이며 爲發最上乘者說이니라
수보리야 이요언지컨댄 시경은 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변공덕하니 여래가 위발대승자설이며 위발최상승자설이니라
여러 가지 가치와 경전의 가치를 비교하였는데 여기서는 ‘요점만 가지고 말해본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점만 가지고 말해본다면 이 경전에는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덕, 표현할 수 없는 공덕, 가없는 공덕이 있어서 여래께서 이 경전을 아무에게나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대승자에게 설하며 최상승자에게 설했다는 것이지요.
대승자나 최상승자라는 말이 나오지만 성문 연각 보살 소승 대승할 때의 교리적인 차별상이 아닙니다. 이 말은 최고의 인격자를 말하는 것이고 영혼이 가장 맑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예요. 세속적인 속된 일에 연연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지 않는 고귀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을 대승자나 최상승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불자들은 여래 해 불교의 문에 드나들면서,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강의도 듣고, 기도도 하고 절도 많이 하면서 평소에 ‘불교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전백수자나 간시궐만이 화두가 아니지요.
‘불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 가 바로 불자들의 화두입니다. 다양한 가르침속에서 ‘과연 진정한 불법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관심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영혼이 남다르고 뛰어나며 고결한 사람이라고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지요. 한마디로 인생을 아주 멋지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최고의 가치로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若有人이 能受持讀誦하야 廣爲人說하면 如來가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하리니 如是人等은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약유인이 능수지독송하야 광위인설하면 여래가 실지시인하며 실견시인하야 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불가사의공덕하리니 여시인등은 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널리 남을 위해서 해설할 것 같으면 여래께서 그 사람은 이미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는 공덕을 다 성취했다고 하는 사실을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경전을 가지고 다닐 수가 있습니다. 외우는 것은 조금 어렵겠지만, 읽는 것도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남을 위해 일러주는 것입니다. 여기 서사라는 말이 빠졌습니다만 널리 남을 위해 알려주는 것에 서사나 사경이 다 해당됩니다.
‘도가 같은 사람끼리는 서로 안다[同道可知]’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정신이 이러한 수준에 이르렀다면 그 수준은 곧 여래의 수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래가 있고 없고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이 이미 여래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래는 그것을 다 알고 다 본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이러한 사람은 ‘여래께서 깨달으신 최상의 깨달음을 다 짊어진 사람들이다[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말입니다. 하담(荷擔)이라는 말은 ‘짐을 지다’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부처님 당신의 짐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주머니나 핸드백이나 걸망에 별별 잡동사니를 넣고 다니지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러준다면 이미 마음속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의 문제, 나의 화두, 나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과연 무엇일까’에 자나깨나 늘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래의 깨달음을 다 짊어진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樂小法者는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則於此經에 不能聽受讀誦하야 爲人解說하리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약요소법자는 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일새 즉어차경에 불능청수독송하야 위인해설하리라
왜 이렇게 여래의 수준에까지 금강경을 끌어올려서 이야기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소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을 해서 이 경을 받아들이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서 해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쉽게 이야기 하면 소인배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복을 짓고 공덕을 쌓으면 좋은 결과를 얻고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믿는 인천인과교 수준의 이야기가 일반 불교에서는 넘쳐나는데 이러한 것들이 소법이고 쩨쩨한 법입니다.
금강경 수준은 깊이와 높이를 이루 말할 수 없는 광대무변의 경지이기 때문에 소법을 가지고 논할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런 자질구레한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 남이라고 하는 분별심 차별의식, 부처님과 비교해 봤을 때 나는 못난 사람이라는 열등의식, 나이에 대한 한계의식에 늘 집착해서 이 경전에 대해서 듣고 받아들이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해설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도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서 해설한다고 하면 이미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고 하는 집착에서 떠나려 하고, 떠나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견이나 인견 못지않게 ‘중생이 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타성에 젖어있는 중생견이나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상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수자상도 우리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집착입니다.
설사 이러한 집착해서는 안 될 집착에서 아직 못 떠났다 하더라도 ‘아 이것은 아니다’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부족한 것은 어찌할 수 없지요. 하지만 ‘아니다’ 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자의의식이 강하고 남이라고 하는 차별의식이 강하고 중생중생 해서 열등의식이 있고, 또 나이에 관한 관념이 너무 깊지만 이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에 젖어 있을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거예요. 그런 사람은 소법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벗어날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 소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금강경을 제대로 좋아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읽지도 않을 것이고, 남을 위해서 해설해주는 기회도 없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須菩提야 在在處處에 若有此經하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의 所應供養이니 當知此處는 卽爲是塔이라 皆應恭敬作禮圍繞하야 以諸華香으로 而散其處하리라
수보리야 재재처처에 약유차경하면 일체세간천인아수라의 소응공양이니 당지차처는 즉위시탑이라 개응공경작례위요하야 이제화향으로 이산기처하리라
재재처처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화장실이든 침실이든 교실이든 식당이든 공원이든 어디든지 간에 만약에 내가 있는 그곳에 금강경이 있을 것 같으면 일체 세상 사람과 천신과 사람과 아수라들의 응당히 공양할 바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금강경은 너무 수준이 높은 경전이니까 어디에 있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경이 있는 곳은 무조건 공양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불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에는 불탑신앙이 발달하였습니다. 탑 속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모시듯이 탑을 모시고 공경하고 꽃을 공양 올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처님 사리는 한계가 있어서 열반하신 후에 주변 나라에만 전해졌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라든지 중국 같은 나라에는 탑안에 사리대신 경전을 넣었습니다. 불상 속에도 경전을 넣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똑같은 이 경전은 부처님 사리와도 같고, 사리가 모셔진 불탑이나 같아서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불탑과 똑같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보고 있다면 전부 부처님 사리탑을 하나씩 다 모시고 있는 것이고, 금강경이 열 권 스무 권 있다면 부처님 사리탑을 열 개 스무 개 모시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의미는 진리의 가르침,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아무 것도 없어요. 불상이든 탑이든 그 속에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응당히 공경하고 예를 짓고 탑을 돌기도 합니다. 요불요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을 모셔놓은 불탑이나 불상을 도는 것인데 하나의 공경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그 탑에 여러 가지 꽃과 향을 뿌립니다. 이것은 다 탑을 공경하고 공양할 때 하는 의식인데 경전에 대해서도 탑에 공경공양하는 마음자세로 모시고 받들며 섬겨야 된다는 뜻입니다.
지경공덕분에서는 경을 가지는 공덕을 몸을 보시하는 공덕과 비교를 했고, ‘이 경전이 그대로 불탑이다, 바로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표현까지 하였습니다. 경전의 중요성과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성을 이런 데서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줄 믿습니다.
출처 : 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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