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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조선 제16대 왕 인조 (仁祖 1595∼1649)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8 14.02.17 15: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제16대 왕  인조 (仁祖 1595∼1649(선조 2∼인조 27))

조선 제16대 왕(1623∼1649).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이름은 종(倧). 선조의 손자이며 원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 비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는 조창원(趙昌遠)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에 봉해지고 능양군(綾陽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광해군의 폭정에 대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반정이 일어나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자 영창대군(永昌大君) 의, 임해군(臨海君) 진,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을 복구하였다. 반정 후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공주(公州)로 남천(南遷)하기도 했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만 시험적으로 실시하던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하였으며, 1624년에는 총융청·수어청을 설치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외교적으로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취했다. 1627년 후금(後金)이 쳐들어오자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다가, 정묘화약으로 형제의 의를 맺고 환도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여 저항하다 삼전도(三田渡;지금의 松坡)에서 항복하고 군신의 의를 맺었다. 1639년 청(淸)나라의 요구로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웠다. 학문에 힘써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마련하였다. 능은 장릉(長陵).


능양군의 무력정변의 배경

인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던 선조였지만 임진왜란과 그밖의 여러가지 이유로 광해군에게 세자자리에서 밀린 인빈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은 항상 불만을 갖고있었다. 후에 광해군이 왕권강화 차원에서 그녀의 소생중에 가장 위험한 존재로 지목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능창군을 신경희 사건과 연루시켜 사사하고 인목대비마저 유폐시키자 능창군의 맏형인 능양군은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던 서인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에 관한 합당한 이유 세가지

첫째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
둘째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여 정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
셋째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 등이었다.
왕으로 등극후의 수습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했으며, 광해군 시절 정권을 독점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대북 세력 200여 명을 모두 숙청하였다. 그리고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 에 유배중이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앉히고 반정에 가담했던 서인의 김류, 이귀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분리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그는 또한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을 신원하고, 나머지 희생자들도 대부분 관작을 복구시켰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이 되었다. 한 편 대외적으로는 친명배 금 정책을 실시하여 그동안 광해군이 유지해오던 중립 외교의 틀을 깨뜨렸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대강

호시탐탐 내침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이 3년 뒤인 1627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키 자 후금군의 기세에 위험을 느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 때 후금은 조선측에 서신을 보내 어 자신들의 침략 이유 일곱가지를 밝히며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 내 놓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 것 등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립시키자 후금은 철군하였다. 이 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 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 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 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 때 척화론 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이모든 일련의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이괄의 난때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기에 변방의 수비에 많은 허점이 생겼던 까닭일 것이다.
인조의 업적

1624년에는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 했고, 이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했다. 이로써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1628년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왔는데, 그의 이름을 박연으로 고치고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 넣어 대포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해 조선군의 화력을 증강시키기도 했다. 한편 민생 안정책으로 광해군 당시 경기도에 한정해서 실시하던 대동법을 1623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해 징세의 일원화를 꾀하고 민간의 부담을 줄였으며, 1634년에는 삼남 일대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경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 정함으로써 세금 수입을 확대시켰다. 또한 농토세 징수 규범인 전세법을 폐지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화폐 사용을 위해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했으며, 청인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여 북관 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었다.(경원개시, 중강개시)
새로운 문화형성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 현세자가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책들이 간행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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