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여운 여인](1990)


성공밖에 모르던 냉혈한 사업가인 에드워드(리차드 기어)는 우연히 거리에서 콜걸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을 만납니다. 워낙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탓에 소소한 사건·사고가 이어지지만,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은 그 난관들을 이겨냅니다. 결국, 마음 한쪽에 아픔을 쌓아두었던 남자는 여자를 통해 위로를 얻고, 자신을 아낄 줄 모르던 여자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격려를 받네요. 그렇게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달라져 가며, 결국에는 상대와 함께할 수 있는 더욱 나은 남자와 여자가 되어갑니다. 사랑이란 스스로는 이룰 수 없었던 변화를 충동질하는 근사한 묘약이니까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따라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리는 뻔함의 매력이 잘 담겨 있습니다. 여자들의 로망이 집대성된 이야기라고 쉽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주인공은 신데렐라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여성이니까, 남자의 감정이 호기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까지 흘러간 것이겠지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1997)


28살까지 서로의 짝이 생기지 않으면 결혼을 하자고 약속했던 남녀. 그 약속을 9년 동안 은근히 기다려왔던 줄리안(줄리아 로버츠)은 마이클(더모트 멀로니)에게서 다른 여자(카메론 디아즈)와 결혼을 한다는 청천벽력같은 전화를 받습니다. 충격을 받은 여주인공이 그 결혼을 깨려고 방해공작을 펼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네요.
사랑의 짓궂음이랄까?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돌이켜 보면 참 설명하기 힘든 미묘함이 있지요. 마냥 내 것인 것 같기에 꽉 움켜쥐지 않았더니만 어느샌가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지는 타이밍의 문제. 이 정도의 감정이면 우리는 서로 사랑이 맞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상대는 훨씬 더 큰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는 크기의 문제. 내 것인 듯 내 거 아닌 그(녀)와의 엇갈림이 잘 담겨 있습니다. 진작 사랑이라 말할 것을. 왜 자꾸만 망설여야 할 이유를 더 열심히 찾았는가 싶어지지요.

[노팅 힐](1999)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 윌리엄(휴 그랜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여행서점에 유명한 영화배우인 안나(줄리아 로버츠)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부딪혀 그녀의 옷에 음료를 쏟은 것을 계기로, 특별한 관계로 발전해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유명인과의 연애가 그리 녹록하진 않네요.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그녀에 대한 부담과 불안이 자꾸만 남자를 움츠러들게 하네요.
"잊지 말아요! 난 단지 한 남자 앞에서 사랑을 구하는 여자일 뿐이라는 걸." 망설이는 남자가 야속하여 여자가 전하는 이 사랑 고백이 참 인상적입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사랑에서조차 서로를 "인간 대 인간"으로 나란히 세우지를 못하게 되네요.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이 누군가를 위에 세우고 누군가를 밑에 내리깔며, 없어도 될 계단을 굳이 만들어서는 거길 오르내리며 더 힘들고 불행해지고 있지요.
그 계단을 마치 진리인냥 떠드는 목소리가 많은 이들을 사랑 앞에서 자꾸만 뒷걸음질치게 하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더 귀 기울여야 할 소리는 어서 다가와 주길 바라는 상대방의 목소리라는 점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이를 향해 그저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을, 괜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며 망설일 필요는 없더라고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89년도 작품이지만, 맥 라이언의 로맨틱 코미디를 언급하면서 도저히 빼놓을 수가 없는 영화이지요. "남녀 사이에도 우정은 가능한가?!"를 놓고 설전을 벌이며 시작한 둘의 관계가 12년의 세월을 지나 친구와 연인 그 사이 어디 즈음에 머무는 시기를 다룹니다.
벌써 25년이나 세월을 묵은 작품이지만, 서로에게 끌리지만, 사랑이라 하기에는 애매하다 여기면서도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은 흥미롭지요. 남녀는 짧든 길든 항상 "친구"라는 시기를 지나 "연인"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분명 케케묵은 소재지만 여전히 호기심을 끄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친구에서 마침표를 찍고, 누군가는 친구를 출발선으로 삼는 탓에 엉키는 경우도 많고, 둘 다 친구일 뿐이라 철석같이 믿더라도 그 경계선이 의외로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지요. 기타 여러 상황이 우리를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고민하고 망설이고 좌절하게 하고요.
결국, 중요한 것은 "남녀 사이에 우정이 가능하다,아니다."라는 질문의 정답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자신의 진심이겠지요. 사랑이면 과감히! 아니라면 소중히! 그렇게 인생이란 긴 여정에서 좋은 인연으로 만난 그(녀)와 좀 더 오래 동행하면 되지 않나 싶네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곧 결혼을 앞둔 그녀(맥 라이언)는 우연히 들은 라디오 사연 속 남자(톰 행크스)에게 자꾸만 마음이 갑니다. 아내와 사별한 그가 추억하며 전하는 사랑의 순간들이 참 낭만적이었거든요.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운명적 사랑이 따로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무작정 라디오 사연의 남자를 만나러 시애틀로 날아갑니다.
아무래도 비현실적인 설정이긴 하지요. 라디오 사연을 듣고서 비행기를 타는 여자라든가, 우연의 우연이 겹쳐 만나게 되는 과장 심한 둘의 만남이라든가, 왜 호평받는 영화인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지요. 하지만 "비현실성"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이지 않나 싶습니다. 한 마디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인 거죠.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날. 비록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운명적 상대에 대한 상상. 이러한 크리스마스와 사랑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를 촘촘히 담아낸 작품입니다.
"설마 기적 같은 사랑이 나에게 벌어지겠어?" 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품고 있는 상상에 솔직해지며 감상하기 좋은 영화네요. "비현실"을 따지는 날카로움은 잠시 접어두면서요. 솔직히 사랑이라는 거. 가급적 현실과 멀찍이 동떨어진 곳에서 끌어당길수록 매력적이고요.

[사랑의 블랙홀](1993)


까칠하고 이기적인 성격의 TV 기상리포터 필 코너(빌 머레이)는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살게 됩니다. 심지어 자살을 해봐도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네요. 그러던 중, 리타(앤디 맥도웰)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매일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루 속에서 그가 점차 따뜻한 사람으로 변해가네요.
진부하다면 진부한 설정이죠.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사소한 것들이 주는 즐거움. 그렇게 달라진 삶의 태도로 이루어지는 사랑까지.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고 흘러가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흔드는 부분이 있네요. 자신이 가진 불만족스러운 부분에 대한 극적인 변화라든가, 전력을 다해 누군가에게 진심을 쏟는 사랑은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현실에서 실천하지는 못하니까요. 이런 일종의 대리만족이라 부를 수 있는 감정들은,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결핍"과 맞닿지요. 따라서 영화 속 그의 변화 혹은 사랑에 유독 마음이 흔들린다면, 조금은 더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네요. 만족스러운 혹은 끌리는 영화들은 내가 어떤 사랑을 원하는 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를 확인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하니까요.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


고양이와 외롭게 사는 철도국 매표소 직원 루시(산드라 블록)는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크리스마스까지 근무를 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바로 그 날. 말 한 번 나눠 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남몰래 흠모하던 멋진 남자 피터(피터 갤러거)가 불량배들에 의해 철도로 떨어져 코마 상태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를 구한 그녀는 얼떨결에 남자의 가족들에게 약혼녀로 오해를 받으며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영화 속 대사가 작품의 메시지를 설명하네요. 다들 멋지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지요. 그 사랑이 지금의 못마땅하거나 외로운 자신의 오늘을 확 바꾸어 줄 것이라 상상하면서요. 그런 행운을 얻은 루시입니다. 심지어 깨어난 피터의 기억상실증 덕분에, 그녀가 몹시 바라던 이상적인 사랑과 가족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거든요. 비록 거짓말로 이루어진 것이지만요. 하지만 그녀의 진짜 마음은 점차 한 상상 속 이상형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잭에게 향합니다. 결국, 영화는 어떤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타이밍에, 멋진 동화 속 왕자님이나 공주님만 꿈꾸느라 자신에게 다가온 진짜 사랑을 놓치지 말라고 전하네요.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꼭 불행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 계획 속에 설정해 놓은 공주님 혹은 왕자님은 결국 오지 않아도, 우리는 분명 좋은 사랑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