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육근(六根) 해석
최진규
무안이비설시의 무색서향미촉법(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눈, 귀, 코, 혀, 몸,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촉각, 법도 없느라. |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흔히 여섯 가지 인식(認識)의 뿌리라고 하여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육근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육근이라는 말은 중국의 육조대사(六曹大師) 혜능(慧能)이 반야심경을 풀이하면서 지어 낸 말이다.
다섯 가지의 감각과 그 감각을 인식하는 다섯 개의 감각기관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있는 의(意)와 법(法)은 서로 대구(對句)가 맞지 않는다. 한문은 글자 수를 맞추어 뜻을 나타내는 것이 많다. 안(眼)은 색(色)과 대구가 맞고 이(耳)는 성(聲)과 짝이 맞으며 비(鼻)는 향(香)과 대구가 맞으며 설(舌)은 미(未)와 짝이 맞고 촉(觸)은 신(身)과 대구가 맞다. 그러나 의(意)와 법(法)은 짝이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뜻으로 법을’ 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이 부분을 육근(六根)으로 해석하면 도무지 어떤 말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 내 뜻이면 그것이 바로 법이 된다는 말인가? 뜻으로 법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이런 말은 있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말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댓글이 있어야 하고 댓글과 뜻을 맞추어 보아야 한다. 그 뒤에 나오는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 댓글이다.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다고 하면 어법(語法)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다. 댓글인 형체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감도 법도 없다는 말도 역시 말이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다.
이 글은 ‘그런 뜻도 법도 없다’로 풀이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의(意)는 감각기관이 아니며 법(法)도 감각이 아니다. 의(意)의 댓글이 법(法)이므로 앞에 있는 무(無) 와 붙여서 ‘그럴 뜻이나 의미가 없다’고 풀이해야 한다.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실제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아무 의미도 없고 그것이 건강한 것이라는 법도 없다. 이런 식으로 풀이를 해야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육근(六根)이 아니라 오근(五根)으로 바꾸어야 한다. ‘뜻으로 법을’ 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이며 바르게 해석하기가 불가능하다.
말과 소리, 냄새, 음식, 외모 같은 것은 진실이 아니다. 사람의 모든 감각기관은 겉에 있고 모든 감각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겉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외모를 보고 훌륭하다고 느끼면 그 사람이 과연 외모대로 훌륭한 사람인가? 코로 냄새를 맡아봐서 향기가 좋은 것이면 그것이 그 향기만큼 전체적으로 훌륭한 것이겠는가?
이 부분은 댓글과 같이 해석해야 그 뜻을 알 수 있다. ‘의(意)와 법(法)’은 손바닥과 손등과 같은 것이다. 손바닥이 있으면 손등도 같이 있어야 한다. 한문은 꼭지가 없는 사과가 있을 수 없듯이 댓글이 없으면 그 뜻을 알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밝혀내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여 빠짐없이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다. 그러나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헛되어 늙어 죽는 것이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기에 고운 것, 혀로 맛보아서 좋은 것은 반드시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므로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다섯 가지의 감각이 훌륭하게 느끼는 것에 빠지지 않으면 헛되이 늙어 죽을 것이 없다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