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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派羅蜜多故)와 예수의 생존방식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派羅蜜多故)와 예수의 생존방식 앞에서 보살(菩堤薩唾)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이나 공포도 없으며, 허망(虛妄)하고 잘못된 생각인 전도몽상
(顚倒夢想)을 멀리 여의게 됨으로써 마침내 궁극적인 경지인 열반에 이르게 됨을 살펴본 바가 있다.
이 때 반야바라밀다는 한마디로 ‘공(空)’의 세계에 대한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며, 그 이해한 바를 실천에
옮기는 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는 ‘비움’과 ‘나눔’의 실천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궁극적 열반에 이르기 위한 지혜는 ‘빔(空)’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보시(布施)와 자비(慈悲)라는 ‘나눔’의 실천적
삶과 다름 아닌 것이다.
<반야심경>의 계속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제는 다시 보살뿐만 아니라, 삼세제불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결과에
대해서 논한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들도 나름대로의 존재방식이 있으니, 바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보살도(菩薩道)를 다 이루고 궁극적 경지에 이른 부처도 반야바라밀다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무상정등정각이라 하면 ‘더 없는 올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궁극적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니, 바로 이 반야바라
밀다의 지혜에 불교의 모든 궁극적 가르침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보살이나 부처 모두가 의지하는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불자들이 지향해야 하는 삶의 기본적 원리이자 가르침
이다.
이러한 바라밀다는 앞에서 언급한바 있듯이, 6가지의 바라밀다로 구분하여 설명된다. 이른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다.
이 육바라밀은 다시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라는 삼학(三學)으로 요약 될 수 있다.
부지런히 계율을 지킬 뿐만 아니라,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친 팔정도(八正道) 가운데서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생각(正念), 바른 명상(正定)을 통하여, 궁극적 지혜에 이르는 것이 육바라밀의 요체다.
그리스도교에서 ‘반야바라밀다’에 비유 될만한 내용은 무엇보다 ‘복음(福音)’이다. 모든 성도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의 원리를 좇아 살아야 한다.
복음의 원리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곧 예수의 ‘생존방식’이었다.
예수는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에 따라 삶을 살았다. 유혹이나, 핍박이나, 배고픔이나, 심지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생존방식을 충실히 따르며 살았다.
그 생존 방식은 다름 아닌 ‘비움과 나눔’의 원리였다. 말구유에서의 탄생과정이 그러했고, 두벌 옷을 가지지 않는
정신이 그러했으며, 치유와 용서와 사랑의 과정이 모두 그러했다. 육바라밀에서 제시하는 첫 번째 보살행위가 보시
(布施)였듯이, 예수의 삶은 철저히 비움과 나눔과 사귐의 정신에서 진행되었다.
예수는 그를 따르고자 하는 부자 청년을 향해, “네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사랑에 대하여,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복음 15:13)”고
했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비움과 목숨까지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 가르쳤다.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잘 이어받은 예루살렘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 ” 그리고 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사도행전 4:32-34).”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상적인 사랑의 공산(共産) 공존(共存)의 형태를 보게 된다.
이들은 당대의 이웃 백성들과도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사귐의 관계 속에 있었음을 유추 할 수
있다. ‘복음’을 따라 사는 길은 충돌이 아니라 평화의 길이다.
그것은 비움과 나눔 그리고 사귐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의 행위 속에는 한편으로 ‘호전성(好戰性)’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에 대한 항전(抗戰)으로 나타났다.
성전(聖殿)을 모독하며 장사꾼들의 소굴로 변질시키려는 무리들을 향하여 소요를 일으키며 성전을 숙청(肅淸)한
사건이 전형적인 예가 된다.
그리고 예수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
복음 12:49).” 뿐만 아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
복음 10:34).”
이러한 예수의 호전성은 평화를 전제로 한 격한 항전이었다. 그렇지만 폭력적 무기를 든 항전은 아니었다.
이른바 영적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영적 싸움을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에 비하면 계율을 지키는 행위인
지계(持戒)나 바른 정진으로서의 정정진(正精進)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보살이나 부처가 반야바라밀다의 지혜에 의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러므로 반야의 지혜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지혜 곧 하나님의 뜻이 된다.
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예수를 통해 역사 속에서 실현 될 때는 언제나 ‘비움과 나눔 그리고 사귐’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회적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예수의 나눔 실천과 성령의
평화적 사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야바라밀의 실천적 지혜나 하나님의 지혜의 실천 그것은 모두 비움과 나눔과
사귐으로 완결지어진다는 셈이다.
예수의 정신과 생존 방식은 끝없이 하향적이었다. 예수는 우선 “가난한 자들, 굶주린 자들, 우는 자들이 복이 있다
(누가복음6:20-21)”고 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마가복음 14:31)”이라 했으며,
“잔치를 베풀려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다리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누가복음 14:13)”고 했다.
예수의 하향적 생존 방식은 노자 <도덕경>의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같이 아래로 흘러가며 만물을 살리는 물과도 같은
것이다.
보살도 의지하고 부처도 의지하는 것이 ‘빔’과 ‘나눔’이라는 반야바라밀다의 지혜와 실천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위험과 두려움 앞에서도 “사람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사도행전 5:29)” 지혜와 용기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생존 방식이었고 부처의 길이었다.
37.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褥多羅三藐三菩提)와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褥多羅三藐三菩提)와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
아눗다라-삼약-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이를 소리 나는 대로 한역(漢譯)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문이 지닌 뜻은 소리의 기능 외에는 아무 뜻이 없고 산스크리트어의 본래 의미를 번역하면 ‘무상정등
정각(無上正等正覺)’이 된다.
아눗다라(anuttara)는 웃다라(uttara) 즉 ‘위(上)’의 뜻인데 안(an)이라는 부정어 ‘무(無)’가 앞에 왔으므로 ‘무상(無上)’
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며, 삼약(samyak)은 평등(平等)을 뜻하고, 삼보디(sambodhi)는 평등한 깨달음 혹은 보편적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더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는 뜻의 무상정등정각, 혹은 ‘더없이 바르고 보편
적인 지혜’라는 뜻의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더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세계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삼세제불이 모두 반야바라
밀다에 의지한 결과다.
보살이 구경열반(究竟涅槃)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결과다.
구경열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인식론적 ‘깨침’의 성격이 강하
다면 구경열반은 깨침의 결과로서 얻어진 존재론적 의미가 강할 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식과 존재가 따로 분리되지 않고 인식 즉 존재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를테면 선불교(禪佛敎)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말하는 것이 그렇다. 근본 바탕인 ‘성(性)’을 꿰뚫어 보고 대각
(大覺)을 이루면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부처가 된다(成佛)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반야바라밀다의 근본지혜는 ‘공(空)’을 기조로 한다. 이 공의 세계를 가장 일찍 실존적으로 또는
체험적이자 이론적으로 깨달은 이가 바로 역사적 석가모니였다.
이 체험의 사건을 두고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동양신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평했다.
이에 필적할만한 서양의 종교체험 특히 그리스도교의 종교체험을 들자면, 사도 바울의 종교체험에 비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말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부활의 주를 평생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며 순교하기
까지 그리스도교의 성장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던 체험을 말할 수 있다.
비록 대각(大覺)의 체험은 서로 다르고 그 내용도 다르지만, 공(空)의 체험이라는 각도에서 보면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다.
석가는 사물세계와 우주 현상의 배후에 놓인 공을 통찰한 것이고, 바울은 그리스도 없는 자신의 허무(虛無)를 깨달
은 것이다.
바울은 살아생전 예수를 눈으로 직접 본적은 한번도 없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직접 따르며 보고 듣고 체험한 제자
들이나 당대의 사람들 이외에, 예수를 보지 않고 예수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고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증거
한 자는 단연 바울을 들 수 있다.
바울은 당대의 학문을 철저히 수학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고등 지식인이었지만 그리스도 체험이후에는 그 모든
학문을 ‘초등학문’이라 여기며 분토(糞土)와 같이 여겼다. 그만큼 종교체험이 강했던 것이다.
조셉 캠벨이 동양 종교의 신화적 체험에서 석가모니의 종교체험을 가장 큰 이슈로 다루었지만 서양 종교의 종교
체험은 예수 이외에 바울의 종교체험을 가장 영향력 있는 체험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향력 면에서는 무하마드의 종교체험도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교회적 기초를 쌓은 바울의 종교체험과는 구분
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석가의 ‘공’과 바울의 그리스도 없는 ‘허무’는 ‘무성(無性)’에서 비교가 된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는 자유와 해방의 대명사였다. 일체의 구속(拘俗)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유한한 시간성으로
부터의 해방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궁극적 부활의 영원성,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체험 속에 내포되어있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함으로서 얻게 되는 구경열반의 경지인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 무상정등정각의 세계는 실로 도달하기 쉽지 않은 경지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보통 사람들이
그러한 더없는 높은 수준의 최상의 보편적인 깨침을 얻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석가모니가 달성한 그 경지를 설파한다. 어렵지만 도달한 길이고 어렵지만 열려있는 길이
기에 일체의 중생들도 보살의 도를 수행하여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는 것이다.
그 정진의 도상에 깔려있는 것이 반야바라밀다이다. 이를 다시 구체적으로 풀어 놓은 수행방침이 육바라밀이다.
결국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머리로만 가는 사변적 세계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수행이 병행되는 실천적 수행이다.
다만 불교에서는 깨달음이 강조될 뿐이고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음’이 강조되는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의 믿음도 ‘자기의 허무’에 대한 깨달음이 전제가 되고, 그 다음에는 수행이 병행 되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I-II)에서 표현한대로 “인간은 사랑(아가페)의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죄를 피하고 자신의 사욕(私慾, concupiscences)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제어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과 수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야고보가 제시한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종교이지만 보살은 물론이고 삼세제불도 마지막까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
하는 까닭은 실천적 보시(布施)와 같은 자비(慈悲) 수행이야 말로 인간이 참 인간되게 하는 근원적 까닭인 셈이다.
그 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는 길이요 하나님의 품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38. 고지(故知)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와 십자가와 부활
고지(故知)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와 십자가와 부활 지금까지 반야바라밀다의 총괄적인 내용을 서술했고,
여기서 부터가 <반야심경>의 결론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를 알아라”는 이 말은 <반야심경>의 뛰어난 가르침을 마치고 마지막 권면에 해당하는 진술
이다.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은 <반야심경>에서 서론부에서 한 번, 본론 후반부에서 두 번, 그리고 결론부에서 한번,
이렇게 모두 네 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서두에서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 할 때(行深般若波羅蜜多時)에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인 ‘오온’이 모두 실체가 없이 비어있는 것임을 알아차리고(照見五蘊皆空) 일체 모든
고통과 재난을 넘어선다(度一切苦厄)고 했다.
본론부에서는 보살(菩提薩唾)이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를 얻으면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心無罫碍), 두려움이 없으니
공포도 없고(無有恐怖),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보내게 되어(遠離顚倒夢想)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究竟涅槃)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삼세에 걸친 모든 부처(三世諸佛)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함으로써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라는 ‘더없이 높은 경지의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얻게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반 대중은 물론 보살과 부처까지라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은 물론 부처의 존재방식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반야바라밀다는 <반야심경>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불교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을 다시 분석해 보면, 반야(般若, prajnā)라는 말과 바라밀다(波羅蜜多, pāramitā)라는 말의
합성어다. 반야란 한마디로 ‘공’을 깨닫는 지혜를 말하는데, 이때의 지혜는 사물의 차별(差別)적인 모습을 보고(相)
분별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는 그러한 지혜가 아니라 직관적이고 초월적인 통찰을 말한다.
직관적이고 초월적인 지혜라는 것은 반드시 경험적 인식의 세계를 넘어선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직관 그 자체가 인간의 경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 인식 또한 인간의 경험세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경험세계를 완전히 떠나 버린 허공의
그 무엇도 아니다. 반야의 지혜는 경험적 세계를 토대로 한 인식이지만 손으로 잡히거나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초월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은 어느 선사(禪師)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했던 말 속에 담겨져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감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산이 따지고 보면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끊임없이 변모해 버리게 됨으로써 시시각각
본래적인 제 모습의 산은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영원불변한 실체를 지니지 못하는 산을 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산이 어느 순간 들로도 변할 수
있고, 지진으로 바다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은 또다시 산이라고 할 때에는 눈에 들어오는 일차적인 감각적 산의 개념이 아니라, 산아님을
한 번 거친 부정(否定)을 토대로 한 현실의 산으로 다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부정을 토대로 한 현실의 긍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산의 실체가 ‘공(空)’함을 알고 난 후의 현상적인 산에 대한
긍정을 말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할 수 있다. 본체로서의 속성은 공한데 현상적으로는 묘하게
존재한다는 뜻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현상계를 거짓으로 있다고 하여 가유(假有)라고 하기도 한다.
참된 실체는 아니지만 있는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야의 지혜가 돋보이는 것이다.
부정적 현실을 아주 부정해버리지 않고 그 부정을 통해 긍정의 세계를 다시 껴안는 것이다. 부정적 현실이란 철학적
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말한다면 소외(疎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외 현실 때문에 ‘반야’에 이어지는 ‘바라
밀다’의 뜻이 아주 소중해 진다. 공을 깨닫는 것이 반야라면 바라밀다의 뜻은 무엇인가?
이미 바라밀다(pāramitā)는 ‘피안으로 건너가다(度彼岸)’는 의미가 있음을 보았다.
피안(彼岸)이라는 저 언덕은 열반의 경지 곧 해탈의 세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이를 극락(極樂)의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저 피안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살이
지키고 수행해야 할 실천적 요목이 있다. 그것이 육바라밀 혹은 십바라밀로 설명되었던 것이다. 물론 육바라밀과
같은 보살의 길은 붓다가 처음에 설파했다는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나 삼학(三學 즉 戒, 定, 慧)을 확장하여 수행법
으로 만든 것이지만,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침을 얻겠다고 다짐한 후에 사홍서원(四弘誓願)과 같은 서원(誓願)
을 세워, 보시(布施) 등으로 이어지는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반야가 지혜라면 바라밀다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실천적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지혜의 결과가 열반이요 해탈이며 극락인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지혜의 가르침인 반야바라밀다는
그리스도교에 비유하면 무엇보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할 수 있다.
반야 없이는 바라밀다가 있을 수 없듯이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반야바라밀다가 공과 실천적 자비의 세계라면
십자가와 부활도 비움과 아가페 사랑의 결과다. 반야바라밀다는 공즉시색의 원리를 다시 한 번 천명해 주는 것이
기도 하다. 반야가 공의 세계라면 바라밀다는 색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죄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색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 현실 속에 자비와 사랑이 투여되고 그 결과는 피안에 이르는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 사랑과 증오의 갈림길에서
십자가는 사랑의 길로 안내하는 표지가 된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수반한 해방의 길목이 된다. 이것이 바울의 표현
대로 하자면, “십자가(十字架)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린도전서 1:18).” 반야의 또 다른 모습이 공이고 공의 뒷모습은 자비다.
반야가 바라밀다를 수반하여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십자가의 또 다른 모습이 부활이고, 부활의 뒷모습은 아가페
사랑이다. 십자가가 부활을 수반하여 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반야바라밀다의 모습은 어떠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를 다음에서 살펴보자.
39.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와 십자가의 도(道)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와 십자가의 도(道) 반야바라밀다이 공덕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것이어서
가히 신령(神靈)할 뿐 아니라(是大神呪), 광명처럼 밝은 것(是大明呪)이기도 하다.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는 그야말로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말한 ‘진심(眞心)’과도 같은 것이다.
이 ‘참 마음(眞心)’의 위대성이 ‘시대신주’요 참 마음의 밝음이 ‘시대명주’다. 지눌이 말하는 참 마음은 중국의 선사
(禪師)인 신회와 종밀의 견해를 따른 것으로, 그는 ‘진심’을 ‘공적영지(空寂靈知)’로 해석하였다. 공적영지는 비고
고요한(空寂)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묘한 지혜(靈知)라고 볼 수 있다.
반야가 참마음이 되며 공적이 된다는 것은 모든 중생이 자기 속에 참된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는데, 반야의 공을
터득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안의 참 본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때 자기 안의 참 본성은 모든 번뇌와 상념을 떠난 비고 고요한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그저 비어 있을
뿐이지만 신령한 것이기도 하여 세상 만물을 두루 비치는 광명한 빛과도 같다.
반야가 공적에 가깝다면 바라밀다는 영지에 가깝다. 영묘한 지혜는 운동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비어
고요한 반야이지만 그 자체가 지닌 광명한 운동력은 영지에 비유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영지는 본래부터 갖추어진 자성(自性)을 깨닫는 지혜이기도 하다. 그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앞서 말한 계(戒),
정(定), 혜(慧)라는 삼학(三學)의 수행으로 표방되는 것이다. 종밀은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을 투명한 구슬(珠)에
비유한다. 구슬이 티 없이 맑고(空寂) 투명하여(靈知) 주위 사물을 비추듯이 공적영지의 마음은 일체의 고뇌를
넘어 깨끗한 마음으로 만물을 두루 비추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는 뭐니 뭐니 해도 비움의 지혜를 통한 나눔의 실천이다. 이는 다시 사랑의 실천으로 요약 될 수 있다.
바라밀다가 표방하는 보시나 지계, 인욕 등은 모두 윤리적 사랑의 실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시(布施)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나눔이요, 지계(持戒)는 열 가지 좋은 행동(十善行)을 위한 지침으로서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분쟁을 일으키는 말, 욕된 말, 쓸모없는 말, 욕심, 증오, 잘못된 생각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계율이요 지침이 된다는 것이다.
인욕(忍辱)은 인내다. 인내는 관용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고통과 수치도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증오와
시기도 참아내야 하며 원수도 사랑으로 인내하며 용납해야 한다. 수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또한 정진(精進)이다.
진리에 뿌리박고 선행에 힘쓰는 것이다. 이렇게 정진하는 가운데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산란한 마음을 고정시켜
선정(禪定)의 자세로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깨침을 얻게 되는 것이 반야바라밀다의 요체(要諦)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보살의 단계를 <화엄경>에서는 52단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그 과정은 열 가지 믿음의 단계인 십신(十信)과 열 가지 주거의 단계인 십주(十住), 열 가지 바른 행동으로서의 십행
(十行), 열 가지 공덕을 돌리는 십회향(十回向), 깨달음이 보다 완숙해지는 열 가지 단계인 십지(十地)의 50단계와
마지막 두 단계인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이 있다.
이 가운데서 십지는 수행의 도를 완성하여 가는 마지막 관문으로서의 열 단계다. 이를테면, 첫 단계인 기쁨이 넘치는
‘환희지(歡喜地)’에서부터 더러움을 버리고 청정해지는 ‘이구지(離垢地)’를 거쳐 점차 내적 지혜의 빛을 발하는
‘발광지(發光地)’ 등을 두루 거쳐서 사물의 실상을 보는 ‘현전지(現前地)’, 더 이상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는
‘원행지(遠行地)’와 진리에 굳게 서는 ‘부동지(不動地)’ 등을 거친 후 끝내 진리의 구름에 머무는 ‘법운지(法雲地)’
단계에 이르러 중생에게 진리의 비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보살도를 완성하고 부처가
된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를 떠나지 않으니 과연 반야바라빌다의 지혜와 공덕은 크고도(是大神呪) 밝은 것이다
(是大明呪). 반야지(般若智), 곧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지혜, 그것은 우리를 초월로 인도해 주는 지혜
이기도 하다.
유한하고 더럽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무한하고 깨끗하고 완전한 세계로의 이행, 그것은 오직 반야바라밀다의 지혜
로만 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에서 ‘반야바라밀다’는 ‘십자가와 부활’에 비교 될 수 있다.
반야바라밀다의 공덕이 참으로 크고 밝은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공덕과 크기에 비할만한 것이다.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는 비움의 십자가였다. 그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다. 누구나 고통을 경유하지 않고는 참된
해방에 이르지 못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0:38).”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두 번씩이나 되풀이 되어 강조되고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
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4-25).” 이 같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각기 자신의 십자가를 질 것을 권면하고 또 자신을 비어 부정(否定)하고 허령(虛靈) 공적(空寂)한 마음
자세로 ‘자신’을 좇을 것을 권했던 것이다. ‘자신’을 좇으라는 것은 ‘진리’를 좇으라는 말이다.
이 점은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한복음 14:6)”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진리에 뿌리를 두고 고난을
인내하며 정진해 나가는 모습은 보살이 반야의 지혜를 바탕으로 바라밀다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 비교 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사도 바울은 자신의 관점에서 독특하게 해석해 내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1:18)”
고 한 대목이 그것이다. 이것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이사야29:14)”고
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려 표현 한 것이다.
실로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의 지혜는 세속적 지혜로서 ‘십자가의 도(道)’와 같은 ‘비움’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
이른바 중생이 ‘반야의 도’인 허령공적(虛靈空寂)의 지혜를 얻기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갈라디아서>에서도 계속된다. 그 십자가의 도는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거침 돌’이
되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5:11).” 바울에게는 실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적인 모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바 되었기 때문이다(6:14).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신학은 <에베소서>에서도 잘 나타나는 데 여기서는 십자가가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우주적 화해를 완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儀文)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
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먼데 있는 너희와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느니라(에베소서
2:14-17).” 바울의 이 진술은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우주적 화해의 사건을 말해 주는 것이고 또한 그 결과
는 평안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비움의 차원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성서 본문은 <빌립보서>에 있다.
여기서도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해석을 엿보게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2:8).
이것이 예수의 마음(2:5)이며,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진(2:7)’이로써, 예수는 이러한 십자가사건을 통해 하나님
으로부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부여 받았고(2:9), 예수는 그리스도로 곧 메시아로서의 고귀(高貴)한
신분인 주(主)가 되었던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의 도는 공과 실천, 곧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자 수행의 완성이다.
십자가의 도는 자기 비움과 인류의 화해라는 아가페 사랑의 완성이다.
서로 간에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이루는 우주적 가교다. 반야바라밀다의 크고도 밝은 지혜의 비밀이 공에 있음을
알아야 하듯이, 십자가의 도가 비움과 나눔을 바탕으로 하는 텅 빈 아가페의 무한한 수용력에 있음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만고불변의 진실은 불교의 보시나 그리스도교의 사랑에서
‘참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심(眞心)’이다.
40.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와 무상(無上)의 기쁨, 부활의 세계
(是無等等呪)와 무상(無上)의 기쁨, 부활의 세계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는 크고도 밝은 것이어서 더 이상 비교 할 수
없는 무등(無等), 무상(無上)의 가르침이다. 이는 보살이 수행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최상의 경지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화엄경>의 십지(十地)에서는 이러한 반야바라밀다의 지혜와 수행을 통해 얻은 결과가 환희(歡喜)의
기쁨에서 시작되어 진리의 구름인 법운(法雲)이 되어 중생에게 비를 내려주는 부처가 된다는 점을 보았다.
이 때 법운지(法雲地)에 도달한 사람은 보통의 보살과는 다르다고 하여 ‘위대한 중생(衆生)’이라는 뜻을 지닌
‘마하살(摩訶薩, Mahāsattva)’이라고 불려진다.
이른바 우주적 보살의 성격을 지지는 것이다. 이들 우주적 보살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보현보살의 삼대 보살 외에,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이 있다.
이들 마하보살 가운데 특별히 문수보살은 대승적 지혜(智慧)의 구현체로 표방되며, 관세음보살은 자비(慈悲)의 화신
으로, 보현보살은 행원(行願) 또는 원행(願行)이라는 원력(願力)의 구현자로 설명된다.
원력이라 하면 인간이 소망하는 바를 얻게 해 주는 힘을 뜻하는 것이니, 구원을 얻게 하는 자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들 세 보살의 역할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에 비교해 본다면 문수보살은 우주 법계(法界)의 실상을 근원적으로
깨우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자(聖子) 예수에게 비유 할 수 있다면, 관세음보살은 온 중생의 자비로운
어머니(慈母)로서 따뜻한 손길로 온갖 고난에서 보호해주며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성모(聖母) 성령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온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여 남김없이 깨달음을 이루게 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성부(聖父) 하나님에게 비교 될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이 수행하는 단계 중에 십지(40-50
단계)를 지나면, <화엄경>에서 보살 수행의 52단계 중 마지막 두 단계인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이 있다.
등각이 바른 깨달음이라면 묘각은 묘한 깨달음이라는 언어 상의 차이가 있다.
등각은 모든 부처의 깨달음이 한결같이 평등하다는 뜻이다. 이는 붓다가 깨달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
정각(無上正等正覺)’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최종적이고 최상위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등각 외에 또다시 마지막 52번째의 단계인 묘각을
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묘각은 깨달음이 한결같이 평등하다고 하는 등각의 모습도 없는 것이므로 이를 묘한 깨달
음이라하여 묘각이라고 한다.
또한 등각이 ‘본래의 모습은 없는 것’이라는 진공(眞空)에 비유한다면, 묘각은 ‘본래의 자성(自性)은 없어도 현상은
묘하게 존재 한다’는 묘유(妙有)에 해당한다.
이를 다시 다른 차원에서 비유해 보면, 등각은 여여(如如)하다는 점에서 ‘진여(眞如)’에 해당 된다면 묘각은 진여에
수반되는 ‘수연(隨緣)’에 해당된다.
수연은 글자 그대로 인연에 따라 수반 되는 일체의 모든 현상을 말한다. 또한 등각이 ‘진제(眞諦)’에 해당된다면
묘각은 ‘속제(俗諦)’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등각이 일체의 모든 것이 공하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을 깨닫는 것이라면, 묘각은 공 또한 색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을 깨닫는 것이다. 앞서 본바와 같이 색즉시공이나 공즉시색이 결국 다른 것이 아니
듯이, 방편에 따른 두 가지의 차이일 뿐이지 실체의 본질은 하나일 뿐이다.
이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표방하는 불교의 기본적 가르침과 일치한다. 색즉시공이 일체의 상(像, 相)을 여읜 공이
라면, 공즉시색은 일체의 상을 허락하는 공이다.
이 두 가지의 진실과 실상을 깨닫는 것이 곧 반야의 지혜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맞닿아 있고, 번뇌(煩惱)와
보리(菩提), 중생과 부처가 깨달음이라는 선상에서 둘이 하나가 된다.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얼마 전 가벼운 교통접촉사고를 당하여 정형외과에서 머리부분을 엑스레이로 촬영을 했다.
잠시 후 현상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앙상한 해골뿐이었다. 흔히 모든 해골이 그렇
듯이 나 자신의 턱뼈와 두개골의 모습을 본 순간 죽음을 상기하게 되었다.
나는 간곳없고 해골만 남은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시금 인생무상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색즉시공을 실감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열반이 없다면 생사는 고통일 뿐이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이 없다면
참담한 해골의 모습보다 다를 것이 없다. 누구나 시간성의 악마를 극복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로 설명되는 <반야심경>의 이 결론적 진술을 그리스도교로 말하자면 여지없이 부활의 세계에 비유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야 말로 그리스도교의 최종 최고(最高)의 가르침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그리스도
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고린도전서 15:14-17).”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15:19-22).” 바울에게서 그리스도교의
정점(頂点)은 부활로 설명 되는데, 이는 우주적 사건의 정점이기도 하다. 그 정점의 한 가운데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다. 이점은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한 대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있기 때문이다(1:17).” 그리스도를 중국어
성경에서는 헬라어 발음을 따라 기독(基督)이라고 표현했지만, 일본어 성경에서는 뜻을 지어 ‘어자(御子)’라고 표현
하는데 이는 ‘임금의 아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주는 이 ‘아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반면에 불교적 세계관과 비교해 볼 때는 아들의 위치에 ‘깨달음’이 차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 차지하는
어자(御子)의 역할이 불교에서는 각자(各自)가 모두 깨달은 자(覺者)가 되는데 있다.
불교에서 깨달음이 없으면 기쁨도 없고 윤회하는 고통만이 있을 뿐이듯이,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이 없으면 ‘세상
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될 뿐이다. ‘반야바라밀다를 아는 것(故知般若波羅蜜多)이 더 없는 최상의 주문(呪文)이
라고 했듯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부활,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 이상의 바랄 바 ‘주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최상 최고의 주문인 해탈(解脫)로 열반(涅槃)에 이르는 것이듯이, 그리스도교에서는 궁극적 부활
의 기쁨이 있다. 열반과 부활, 그것은 깨달음과 믿음의 세계다.
그런데 이 두 개념 모두 인간의 고뇌와 그 해방을 염원하는데 기초하고 있다. 유한한 인간이 고뇌의 현실을 극복
하기 위해 진리를 찾아 나섰고, 그 결과 만난 지점이 깨달음(覺)과 믿음(信)이라는 종점이었다.
사도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는 말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이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