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쌍수(定慧雙修)>와 교관겸수(敎觀兼修)
정혜(定慧)란 곧 우리 마음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 번뇌가 사라진 자리를 정(定)이라 하고,
그 자리에서 바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혜(慧)라 한다.
깨달음을 성취하면 분별망상이 완전히 사라져 항상 바른 생각이 나오는 정혜가 된다.
전통적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은 번뇌에 휩싸이고,
어리석고 미혹한 까닭에, 지관(止觀)으로써 마음을 닦아야 한다.
지관이 닦음의 출발이고
정혜(定慧)는
지관에 의해서 도달하는 특정한 수준으로서 수행결과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사마타-위빠사나를 강조했다.
사마타는 그칠 지(止)자,
위빠사나는 볼 관(觀)자,
그래서 지관수행(止觀修行)이라고 한다.
사마타-위빠사나가 수행의 큰 본류이다.
지(止)는 번뇌와 생각을 그치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며 본원적인 진리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며,
관(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지혜의 작용이 돼
사물을 진리에 합치시키며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정(定),
관은 혜(慧)에 해당하며,
오른팔이 위빠사나(vipassanā)라면 왼팔은 사마타(奢摩他, śamatha)이다.
본래 우리의 청정하고 맑은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마음이 계속 산만하게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이걸 하나로 집중할 수 있도록 일단 멈추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 사마타(止-定)이다. 고요하면 거기에 모든 삼라만상이 다 비친다.
내가 했던 행위들이나 생각들이 다 여기 비친다. 이게 통찰이고 지혜이다. 이게 위빠사나(觀 ― 慧)이다.
『정혜(定慧)는 불교적 수행방법을 말한다.
정(定)은 마음이 오롯해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선정(禪定)을 줄인 말이다.
혜는 지혜를 일컫는데, 세속적인 지혜가 아니라 반야의 절대적 지혜로서 정(定)의 상태에서
밝게 관조하는 것을 말한다.
정(定)은 정신 수행이고,
혜(慧)는 지혜의 연마이다.
정과 혜는 이를테면 등과 불빛과 같다. 등이 있으면 불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불빛이 없다.
등은 불빛의 본체이고, 불빛은 등의 작용이므로 등과 불빛의 이름은 다르나 본체는 하나인 것처럼
정과 혜도 그와 같다.정혜와 지관(止觀)은 같은 말로서, 언어나 이론 또는 사변을 넘어서,
사념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것을 말한다.』― <육조단경>
정혜쌍수(定慧雙修)란
정과 혜를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고루 닦아야 한다는 것인데,
수행자는 선정(참선수행)과 지혜(불교이론 공부)를 함께 공부해야한다는 뜻이다
불교수행 방법론상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말로서,
선과 교를 함께 공부함이라 해서 선교겸수(禪敎兼修)라고도 하는데,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선사의 주장이다.
정과 혜가 쌍수, 곧 아울러 닦아야만 정혜 균등으로써 가지런히 조화가 되는 것이다.
본래 우리가 부처로서, 부처 가운데는 정과 혜가 구족 원만하므로,
우리 공부도 그렇게 상응 조화해 나가야 계합이 빠른 것이다.
삼매가 제대로 못 되는 것은 정혜 불균등이기 때문이다.
조화가 된다면, 혼침(昏沈)도 도거(掉擧)도 점차로 끊어지게 돼있다.
혹자는 정(定)을 닦으면 혜(慧)가 저절로 따라오고,
혜를 먼저 닦으면 정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화두선(話頭禪)을 하거나
묵조선(黙照禪)을 닦거나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외도에게도 정(定)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기 전
외도 스승들의 지도 아래 9차제정 중 제8정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까지 이른 바 있다.
제8정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최고 정(定)이다. 바로 그 위의 마지막 단계인 멸수상정(滅受想定)은
일체 감각과 의식이 없는 정(定)이기 때문이다.
혜(慧)가 정(定)을 따라 저절로 오는 것이라면 부처님이 이런 고도의 정을 이루었음에도
왜 불교적인 혜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았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에게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전수했던
웃다카 라마풋다(Uddaka Ramaputta)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가 왜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외도들은 정은 닦지만 왜 불교와 다른 길로 가는지,
그리고 왜 불교적인 연기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을 닦으면 혜가 저절로 따라오거나 혜를 닦으면 정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공히 정과 혜를 둘 다 닦아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평생을 무인도에서 홀로 자란 사람에게
무색무취한 명상을 가르친다고 저절로 불교적인 연기론적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절대 아니란 말이다.
인간의 문화가 위대한 것은 스스로 무(無)에서 출발해 모든 진리를 자신의 힘으로만 터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교육이라는 위대한 힘이 있다. 인간은 선각자들의 위대한 발견과 업적과 성취를 후세인들이 교육을 통해 배워서 스스로 시행착오라는 값비싼 비용과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동일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정과 혜는 서로 다른 계통의 성취이다. 정(定)만 닦다가는 멍청한 중늙은이 되기 십상이라는 속담까지 있다.
혜(慧)만 닦다가는 건혜(乾慧)라고 몸과 감성이 따르지 않는 메마른 깨달음이 되기 쉽다.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한 성철(性徹) 스님도 상좌들에게 6개월간은 일본불교서적 등을 통해 철저히
경전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근본적인 교리를 모르고는 불교적인 깨달음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성철 스님은 주석처인 백련암에 도서관을 꾸릴 정도로 많은 장서를 소장하셨으며,
향곡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성철 스님은 책으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으셨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타임지(The Times) 등 해외 시사주간지를 보시고 그 내용을 법문에 반영하기도 하실 정도로
각양각색의 서적을 독파하셨다.
따라서 경전이나 현대과학과 현대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불교적 깨달음을 얻는데 장애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중도(中道)가 필요할 뿐이다.
『한국 선불교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는 말로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마음작용을 ‘범주적으로 부인하다(categorically deny)’보니 밑도 끝도 없는 신비한 마음에 집착해 그 위대한 신비한 마음의 앞면인 현실세계에
어두워져 정작 우리가 사는 현실(의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하는 모순에 빠져있지나 않은지 걱정스럽다.
그 위대한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고요해, 이 더럽고 어지러운 현실 세계와 관련이 없다면 도대체 그런 마음이
어디에 쓸모가 있겠는가. 그런 마음이 이 역동적인 연기세계에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깨달음의 마음과 세속의 마음을 구별해 지상 최대의 이분법 세계에 빠져있는 것이 한국 선불교의 모든
문제의 뿌리일지 모른다.』 ― 강병균
정과 혜는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고루 닦아야 한다는 것인데, 선과 교를 함께 공부함을 말한다.
이를 선교겸수(禪敎兼修)라고도 한다.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선교상자(禪敎相資)의
정혜쌍수를 그 지도이념으로 해서 그릇된 폐단을 없애고 올바른 깨달음의 길을 열기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했다.
정혜씽수(定慧雙修)는 교관겸수(敎觀兼修),
선교병수(禪敎倂修)와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주장으로,
‘교(敎)’는 교학을 말하고,
‘관(觀)’은 참선과 수양을 의미해서,
교리체계인 고학(敎學)으로 이로(理路)를 탐구하는
교(敎)와 실천수행법인 마음 닦음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의천은 원효(元曉)의 화쟁사상(和諍思想)과
중국 송나라 고승 정원(淨源)과 징관(澄觀)의 천태지관(天台止觀)에 영향을 받아,
학문에 있어서 편견을 경계하고 종파의 대립을 개탄했다.
교와 선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입장은, 교만 닦고 선을 행하지 않거나
선만 행하고 교를 등한시하는 것은 바른 불교 관행이 아니라고 하면서 교관겸수를 주창했다.
그리하여 의천은 천태와 화엄 양종을 통한 종합적인 불교관을 세워 교와 관을 함께 닦는 것이 불교수행의 바른 길이라고 했다. 교만 닦고 선을 없애거나 선만 주장하고 교를 버리는 것은 완전한 불교가 못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선종과 교종이 자기의 것만을 주장하는 폐단을 타파하고
모든 종파가 대동단결할 수 있는 이론적 체계를 담은 것이 교관겸수 사상이다.
의천은 신라시대 원효 대사가 중심이 돼 전개했던 여러 불교의 종파를 융합하려는 사상인,
일심의 회통(會通)을 강조한 화쟁사상(和融思想)의 이념에 가장 잘 정통한 사람이었다.
교관겸수 사상은 이러한 회통의 화쟁이론을 고려시대 천태종을 중심으로 실천하면서 교관겸수라 했으며,
지눌(知訥)의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의 뚜렷한 전통으로 전승됐다.
따라서 원효 대사의 회통불교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의천은 원효 불교의 부흥을 꾀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의 말년에 원효(元曉) 대사에게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최고의 시호를 추증케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해서 화쟁을 위해 당시 유행하던 화엄사상(華嚴思想)과 천태사상(天台思想)의 일치를 도모해,
5교와 9산을 통합하는 선교일치를 꾀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신천태종(新天台宗)을 창시하고 그 개조가 됐으며,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해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그대로 전승(傳承)하려고 했던 것이다.
의천이 추구했던 불교의 통합은 교종과 선종을 완전히 하나로 묶는 방식이 아니라 천태종 안에 선종의 수행 방식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당시 선종의 편협한 수행 전통을 경시해 함께할 수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새로운 종단을 통해 선종의 수행 방식만을 흡수해 궁극적으로는 선종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곧 교관겸수를 지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