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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화장실 문을 발로 힘껏 차본다. 이미 수십 차례 시도 했지만 아직 흠집 하나도 내지 못했다.
재질이 나무라서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까.
발은 이제 얼얼하고 주먹은 멍든지 오래 되었다.
다시 한번 오장 육부를 쥐어짜내며 최대한 큰 소리로 외친다.
'여기 202호인데 누구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코 풀고 버린 휴지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며 구겨져 있다.
이번에도 역시나 아무런 응답이 없다.
'젠장. 평소에는 방음 따위 하나도 되지 않더만 이럴 땐 방음이 잘 되나.'
체력은 이미 상당히 고갈되었고 배도 고프다.
변기에 앉아서 지금의 어이없는 상황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본다.
-2-
여느때처럼 아침 7시 50분에 알람소리를 듣고 기상한 나는
장의 신호를 받아 화장실에 들어가 큰 일을 보고 나서 머리를 감았다.
밖으로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데
'어라?'
문고리가 360도로 회전을 하는 것이었다.
'응? 이 녀석은 원래 45도 정도 밖에 안 돌아갔던거 같은데.'
문고리가 툭 빠져버린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허허허 혼자 너털 웃음을 짓다가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좀 민망하지만 현철이 형한테 도와 달라고 해야겠다.'
현철이 형은 내 방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는 내 동기다.
전화를 걸기 위해 스마트폰을 찾기 시작했다.
'아 맞다!'
평소에는 큰 일을 볼 때면 꼭 스마트폰을 챙겨서 네이버 해외 축구 기사를 체크하곤 했었는데
하필 오늘은 화장실에 들고 오는 걸 깜빡했다. 자신이 원망스럽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제 어떻게 하지.'
좁디 좁은 화장실을 죽 둘러보았다.
가로 세로 2.5m x 1.5m 정도 사이즈에 창문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밀실. 탈출할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 떠오른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 옆집에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
둘째, 나무 합판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만만한 문짝을 부수고 나가는 것이었다.
'후후. 아직 방법은 많다. 당황하지 말자.'
그 때 이후로, 체감상 30분 정도였던 것 같다.
문짝에 주먹질, 발길질을 하다가 지치면 옆집에 도와달라 소리치고, 또다시 문짝 부수는 것을 무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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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변기에서 다시 일어선다.
'옆집에서 도와주러 올 거 같진 않고, 망할 놈의 문짝은 왜 이리 튼튼하냐.
배는 고프고, 목도 마르고. 이거 완전히 심각한 상황인거 같은데...
나 못 나가는거 아니야? 그러면 설마 굶어 죽을 수도 있는 건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 순간
'쿵쿵쿵쿵쾅쾅쾅쾅쿵쾅쿵쾅'
갑자기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다.
제로백 3초를 자랑하는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를 타고 풀악셀을 밟으면 이런 느낌일까.
마치 심장이 '이 멍청한 놈아! 아직까지도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냐!' 라고 대뇌 전두엽에게 항의하는 것 같다.
현기증이 나면서 머리가 핑그르르 돈다.
호흡이 가빠지고 사지에 힘이 풀린다.
눈이 침침해진다.
'털썩'
얼굴에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느껴진다.
'내 몸이 왜 이러지? 이게 말로만 듣던 공황장애인가.'
주마등처럼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평소에 엄마한테 전화 좀 먼저할 걸... 어제 전화 왔을 때 맨날 똑같은 말만 한다고 짜증냈었는데. 내가 내 이야기를 먼저 안하니까 똑같은 말을 하셨던 건데.'
'혜선이가 보고 싶다. 내가 미쳤다고 차버렸지. 그 착한 애를. 나 많이 후회하고 있는데 내가 죽으면 슬퍼해줄까.
돈 아까워서 커플링도 로이드로 맞췄었는데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제이에스티나로 해줄 걸.... 다시 만나면 잘 해줄텐데.'
'나 유럽도 한 번 못 가보고 죽는거야? 저번에 민혁이가 스페인 같이 가자고 할 때 갔어야 했는데... 그땐 뭐가 그리 귀찮아서 거절했니 이 게으른 놈아.'
'성준이 형이 시험 전날에 족보 좀 빌려달라고 할 때 빌려줄 걸. 그게 뭐 별거라고 안빌려줬을까... 그 형 안그래도 성적 바닥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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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치듯이 번쩍하며 눈이 뜨인다.
잠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아. 꿈이 아니었구나... 제길.'
심장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평온하고 고요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지 천천히 생각해본다.
'엊그제부터 방학이니까 내가 학교에 안가도 아무도 날 찾지 않을거야.
나는 언제 발견될까. 월세 내는 날이 3일 뒤니까 월세가 안들어오면 아줌마가 일주일 정도 지나서 내 방을 찾아 오려나.
난 시체로 발견되겠지? 그럼 부모님한테 연락이 갈거고 많이 슬퍼하실거야.'
잘 익은 백도 복숭아 과즙처럼 눈에서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온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나겠지? 날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많이는 없을 거 같다. 내 인간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 평소에 사람들한테 잘할 걸. 후회된다.'
의식의 흐름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이상한 곳까지 나를 인도한다.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 건물엔 세입자가 한동안 안들어오겠지? 안그래도 빈 방이 많은데 아줌마 많이 힘드시겠다. 건물 값도 많이 떨어질거야. 이런 상황에 이런 생각이 들다니 나란 놈은 제정신이 아닌게 분명하다 큭큭큭.'
눈물을 흘리면서 키득키득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누가 보면 정신병자로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혜선이랑 안헤어졌으면 어땠을까. 하루정도 연락없으면 날 찾으러 오겠지? 착한 여자에게 상처를 준 벌을 받는건가.
아니! 하나님 아무리 제가 잘못했다고 해도 벌이 너무 심하지 않나요.
으으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앞으로 착하게 살고 교회도 열심히 나갈게요. 부처님이나 알라님도 제발 도와주셔요 흑흑. '
종교까지 동원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여길 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다 못해 유언장이라도 남기고 싶지만 그럴 여건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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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너무 마르다. 그럴만도 하지. 일어나고부터 지금까지 물을 한 잔도 못마셨으니까.
변기 물을 마실 수는 없고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 벌컥벌컥 마신다.
그런데 세면대 오른쪽 구석에 놓인 문고리가 눈에 들어온다.
'망할 놈의 문고리. 평소에 멀쩡하다가 갑자기 고장나고 지랄이야. 고장 났으면 미리미리 티라도 내든가'
증오의 눈빛으로 문고리를 째려본다.
'그러고 보니 저 문고리는 쇳덩어리니까 엄청 단단하겠네. 그럼...'
'아앗!'
'저걸로 문을 부술 수 있을 지도?'
갑자기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기운이 마구마구 샘솟는다.
내가 배운 의학 지식에 의하면 부신 수질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이 불쌍한 생명체가 마지막으로 발악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것이리라.
오른손에 문고리를 꼭 쥐고 미친듯이 문짝을 찍어 내린다.
'네 놈이 박살날 지 내가 죽을 지 모르겠다만 한번 해보자!'
살면서 이렇게 악에 받친 적은 처음이다.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문짝을 후드려 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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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 나무 맞아? 이렇게까지 했는데...'
문은 멀쩡해 보인다.
매끈한 표면을 뽐내며 반짝거리는 것이 나를 비웃는 것 같다.
이제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눈물도 나지 않는다.
이런 걸 가리켜 체념이라고 하는 가보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너 정말 강한 녀석이구. 요즘 나무합판은 참 튼튼하구나. 쓸데없이...'
절망감에 고개를 떨구고 양 손바닥을 문에 짚은 상태로 아무생각 없이 한동안 서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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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정도 지났을까. 깊은 무의식 속의 생존 본능이 이미 부서져버린 멘탈을 수습하라고 다그친다.
'그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조금만 더 방법을 찾아보자. 방법이 있을거야. 일단 앉아서 생각하자.'
다시 변기로 가기 위해 짚고 있던 손바닥을 떼는 순간
'어?'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포착했다.
'뭔가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거 같은데?'
자세히 살펴본다.
'아니 이건!!!'
어느 녀석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내 손가락의 촉각 수용기 중 하나가
손바닥을 뗄 때, 문 표면을 쓸어내리면서 울퉁불퉁한 요철 같은 느낌을 감지하였고
그 부위를 가까이서 보니 쿠키의 표면 같은 균열이 살짝 보이는 것이었다.
'살았다 살았어!! 살았구나. 하. 진짜.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다시 문고리를 쥐고 균열부를 집중적으로 타격한다.
느린 속도지만 균열이 조금씩 점점 깊어지는게 느껴진다.
팔이 많이 아프지만 균열이 깊어지는 걸 볼 때마다 힘이 나고 입꼬리도 살살 올라간다.
살면서 이렇게 설렜던 순간은 내 전여친 혜선이가 어느 비오던 날 새벽, 합성동 골목에서
우산을 씌워주러 달려온 내 품에 안기며 '사실 나도 널 많이 좋아해'라고 말했던 순간을 제외하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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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해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구멍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구멍 테두리가 뾰족 뾰족하여 배와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나서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다.
머리는 쉽게 바깥 세상으로 빠져나왔지만 가슴과 허리에서 구멍에 살짝 끼어버렸다. .
뾰족한 테두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타월을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온몸에 긁힌 자국이 무성하고 피도 스멀스멀 나고 있다.
하지만 뇌 속에선 엔돌핀이 최고조에 도달한 상태라 고통따윈 느끼지 못한다.
'하압!'
힘을 내어 한방에 발끝까지 쑥 빠져나온다.
바닥에 주저 앉아서 잠깐 쉬다가 책상으로 가서 스마트폰을 확인해 본다.
11시 37분.
만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겨우 3시간 47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 놀란다.
그동안 카톡에는 어떤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편의점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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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문 구멍을 통과하여 다다른 세상은
이전에 내가 살던 곳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곳이다.
공기는 왜이리 상쾌하며 햇살은 왜이리 따사로우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왜이리 정겨워 보일까.
지겹게 늘 먹던 편의점 도시락을 다시 먹는데 오늘은 정말 맛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엄마한테 전화를 건다.
'웬일이고 네가 먼저 전화도 하고'
'아. 엄마... 아 그냥... 엄마 사랑해요'
'미쳤나 갑자기 와그라노 무슨 일 있나.'
'아니 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구. 그냥.'
걱정하실까봐 일단 오늘 있었던 일은 말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조금 더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는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에 쑥쓰럽지만 기분 좋아보였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노트북을 켠다.
싸게 나온 9박 10일짜리 스페인 마드리드행 땡처리 항공권을 구매한다. .
'갈 수 있을 때 빨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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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 주인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씀드리니 미안하다고 사과하시며 빠른 시일 안에 새 문으로 교체해 주겠다고 하셨다.
하루종일 가능한 모든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오늘 있었던 나의 무용담을 흥분하여 떠들어 댔다.
대부분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살아 나와서 다행이다. 근데 너무 웃겨 ㅋㅋㅋ.'
누군가는 '야 화장실 문 부수는데 그리 오래 걸리냐 ㅋㅋㅋ 나름 재밌을 거 같은데.' 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아깝게 화장실 문을 왜 뿌시노 ㅋㅋㅋ 그냥 며칠 기다리면 구조 되겠지.'라고 했다.
나는 정말정말 무섭고 심각했는데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재밌는 에피소드 중 하나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 침대에 걸터 앉아 구멍난 문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지만 나에겐 전쟁에서 승리한 후 획득한 전리품이자 새로운 세상으로 올 수 있게 해준 통로이다.
불을 끄고 베개에 누워 눈을 감는다.
더 밝고 행복한 미래를 확신하며 기분좋게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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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3.0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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