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인들은 왜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13세기 원제국이 두번에 걸친 일본침공을 감행하나 참담하게 패전한데 대하여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의 많은 역사서적에 모두 기재가 남아 있다. 그러나, 가장 원시적인 기록은 세군데로부터 나온다. 하나는 원제국의 기록이고, 둘은 고려의 기록이며, 셋은 일본의 기록이다. 이 세가지 기록은 모두 치우친 점이 있고, 서로 모순되는 곳이 많다. 다행히 모두 유일한 기록은 아니고, 고고학적으로 방증을 찾을 수 있어서 상호비교하여 진상을 추리하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다.
그중 고려사람들의 위치는 국외인에 가까웠고, 전쟁과 큰 이해관계가 없어서, 이들의 기록이 가장 믿을만하다. 몽고인들이 일본을 공격한 것은 일본이 몽고제국에 신하로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여러차례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치라고 하였고, 고려국왕도 일본에 글을 보내어 몽고인들에게 굴복하라고 요구하였지만, 매번 일본인들은 가볍게 쿠빌라이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러한 무례함에 대하여 군림천하의 몽고황제는 당연히 그냥 두고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력으로 일본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설명해야할 것은 제1차일본진공때, 남송이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북방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당시 원나라제국은 병사를 모아서 남정을 준비하던 때였다. 일본으로 진공한 부대는 많지 않았다. 한인들은 이번 일본공격의 주력도 아니었다.
쿠빌라이가 일본을 지배하고자 한 것은 칸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외에 여러가지 실제적인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코황제의 재산은 세계최고였다. 그러나, 몽고귀족의 사치품에 대한 왕성한 수요에 몽고인들이 재산관리에 능숙하지 못했던 점으로 인하여 몽고제국의 재정은 자주 바닥을 드러냈다. 쿠빌라이 이전의 두 칸인 구유크와 몽케는 모두 돈을 펑펑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사치품을 구매하면서 귀금속으로 지급했고, 일부 미지급된 채무는 미래의 전리품을 담보로 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리부케와 칸의 지위를 놓고 4년간이나 격전을 벌였다. 이번 몽고족간의 내전에서는 아무런 전리품도 얻지를 못해서, 자연히 몽고제국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은 과거 수백년간 세계에서 최대의 백은(白銀) 생산지 겸 수출국이었다. 이 부유한 섬나라는 통화가 필요했던 몽고귀족의 눈에는 아주 탐나는 것이었다.
1274년, 일본을 진공하는 원정군은 조선에서 배를 띄웠고, 큐슈로 향했다. 원정군은 모두 25000명이었는데, 그중 몽고인과 고려인이 각각 절반씩 차지했고, 일부 여진인과 소량의 한인이 있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홀돈(忽敦)이었고, 두명의 부사령관은 고려인 홍다구(洪茶丘)와 한인 유복형(劉復亨)이었다. 원나라군대는 하카다만까지 항행했고, 먼저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를 점령하고 유린했다. 그후에 세 부대로 나누어 큐슈에 상륙해서 내륙을 공격했다. 삼로로 나뉜 원정군은 1로가 주력이고 두개의 로가 지원했다. 주력부대의 상륙지점은 개략 나카사키부근이다.
제1차 몽고침입을 맞이하여, 일본의 카마쿠라막부는 일부 정규군을 모집하여 전투하고, 큐슈연해의 각번들도 긴급히 사무라이와 민변을 조직하여 전투에 참전하였다. 참혹한 전투가 20여일간 지속되었다. 일본인들의 전술은 비교적 낙후되어, 처음에는 전투에서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원나라의 진격은 막아냈다. 며칠간 서로 대치한 후, 일본인들은 점점 몽고인들의 전술에 익숙해지고, 반격을 시작했다. 주로 사무라이로 구성된 일본의 중기병부대는 특히 용감했다. 그들은 궁수의 지원하에 화살의 비를 견디며 적진을 돌파하려했고, 상대방과 접근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몽고인들의 궁술에서의 장점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유복형은 격전중에 전사한다. 원나라군대는 절반을 잃은 후 바닷가로 패퇴하여 대포에 의지하여 방어한다. 원나라군대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진격이 어려워지자, 그들은 패전이 불가피했다. 그리고 화살과 물자도 곧 바닥을 보일 지경이었다. 원나라군대는 계속 진지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어 배에 올라 철수하게 된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군대는 폭풍을 만나 손실을 입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배는 안전하게 귀국한다.
이번 전투를 일본역사에서는 "문영지역(文永之役)"이라고 부른다. 몽고인들은 동아시아에서 장비, 훈련 및 용기의 면에서 자신들에 못지 않은 적수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고려인들은 전투에서 접근전을 책임졌다. 이들은 일본인들의 정면공격을 받아 손실이 참중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일본인들의 전투력 특히 일본인들의 전도(戰刀)에 대하여 인상이 깊었다. 원나라의 보통병사들이 가진 칼은 일본도와 부딛치면 바로 부러졌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활과 화살에 있어서는 몽고인들의 손실이 적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인의 화살은 비록 위력이 컸지만, 사정거리가 짧아서 몽고인들의 각궁에 비교할 수 없었다.
여기서 다시 일본도를 간략히 소개하기로 하자. 당시 일본의 야금술과 칼제작술은 세계일류였다. 일본도의 성능은 북인도와 서아시아에서 나는 다마스커스 강도(鋼刀)만이 이에 비길 만할 정도였다. 고대의 가장 우수한 강(鋼)은 성능으로 나누면, 다마스커스강(鑄造花紋鋼), 일본강(暗光花紋鋼), 말레이시아강(焊接花紋鋼)이었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강(鑌鐵)은 사실 한접화문강이었다. 그러나, 성능은 말레이시아것처럼 뛰어나지 못했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도검은 일반적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한 강으로 만들었다. 다마스커스강은 고급합금강이다. 여금기술이 복잡하고, 원가가 비쌌으며, 구체적인 제조기법은 이미 실전되었다. 고대에 다마스커스강도는 일반적으로 귀족들만 가질 수 있었다. 최고급의 다마스커스강도는 오자강도(烏玆鋼刀)로 인도에서 생산되었다. 그 다음이 스체르만도(斯切爾灣刀)로 페르시아에서 나왔다. 스체르만도는 제조기법과 장식이 아주 호화스러웠다. 몽고귀족들이 아끼는 것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일본강은 사실 그리 큰 특색은 없다. 일본도의 우수한 성능은 주로 독특한 후기의 공법에 있었다. 다마스커스강도는 비록 성능이 탁월했지만, 일본도는 제조원가가 저렴했다. 일본의 보통병사들도 좋은 칼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당시 고생을 견디는 것으로 따지자면 몽고전사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필요하면 그들은 말고기를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말의 피를 마시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다. 몽고인들은 작전때 기동성을 제일로 치고, 일반적으로 물자를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사병들은 먹고입는 문제를 주로 전쟁지구의 백성에게서 빼앗아 해결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몽고인들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지의 주민거주지역으로 깊게 들어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백성으로부터 약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전술은 아주 뛰어났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은 일본군대의 전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제1차일본공격이 끝난 후, 쿠빌라이는 일본인들이 몽고인의 위력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일본에 신하를 칭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아예 사신의 목을 베어버린다. 쿠빌라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을 전부 통일한 후, 그는 제2차 일본공격을 준비한다. 군대는 중국각지, 몽고와 고려에서 모으로 연해지구에서 상륙작전을 연습한다. 원장군의 양식보급은 전국각지에서 모아서 끊이지 않도록 조치했고, 동시에 고려와 중국동남연안의 조선소에서는 밤을 새워 크고 작은 전선과 보급선을 만들었다.
이같은 대규모의 원정준비는 비밀유지가 힘들었다. 일본인들은 정찰을 통하여 원제국의 동향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곧 있을 제2차 몽고침입에 대한 충분한 전쟁준비를 해두었다. 이때, 일본의 정국은 안정되어 있었고, 복조시종(北條時宗)의 카마쿠라막부와 일본 각번에 대한 지배력이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강력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더 많은 인적 물적자원을 모집하여 전쟁준비를 할 수 있었다. 막부는 큐슈에서 백성을 징용하여 하카다만일대에 원나라군대가 상륙할만한 곳에 돌벽을 쌓아두었다. 이로써 몽고기병의 활동을 막으려 했다. 몽골군대가 일본에 진격할 일시가 가까워오자, 복조종성(北條宗盛)과 북조종정(北條宗政)은 각각 정예 사무라이를 이끌고 혼슈와 큐슈의 연해지방에 병력을 배치했다. 복조종정의 진서군(鎭西軍)은 나중에 전투의 주력이 된다. 동시에 규슈의 각 번에서도 민병을 모집한다.일본의 다른 지역의 사무라이들도 전투에 참전한다.
1281년, 원제국의 방대한 원정군이 강소절강과 고려의 두 곳에서 동시에 출발한다. 이번 출정의 면모는 장관이었다. 모두 크고작은 선박이 5천척, 군대는 약 20만이었다. 그중 몽고인이 4만5천, 고려인이 5만여, 한인이 약 10만이었다. 그중 한인의 대다수는 새로 편제된 남송의 옛군대였다. 원정군에서 몽고인이 당연히 주축이었다. 북방에서 출발한 함대는 5월말에 일본인들이 생각한 하카다만에 도착한다. 다시 남방함대를 기다리는 기간동안 몽고인들은 가볍게 하카다만의 몇개 도서를 점령한다. 섬안의 주민은 모두 죽이고, 섬위의 건축물도 모두 불태운다. 유월상순 남방함대가 도착한다. 두개의 방대한 함대는 큐슈의 바깥 바다에서 회합하고, 이후 원나라군대는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상륙지점인 구룡산은 제1차때 주력부대가 상륙한 지점에서 멀지 않았다. 이번 원정군은 더욱 완강하고 효과적인 저항에 부딛친다. 일본군대는 돌벽으로 엄호하면서 계속 원나라군대의 진격을 물리친다. 기회를 틈타 돌파작전을 벌인다. 일본인의 가장 성공적인 반격으로 고려군의 주력은 궤멸한다. 몇명의 몽고지휘관도 연이어 전사한다. 격렬한 전투가 1개월여간 계속된다. 원정군의 손실은 이미 1/3을 넘어섰다. 그런 여전히 돌벽을 돌파하지 못했다. 7월하순이 되어, 원나라군대는 양식과 화살이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이때 몽고인이건 일본인이건 모두 이번 전쟁의 결과도 저번과 같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원나라군대가 철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8월 1일, 태평양에서 맹렬한 태풍이 몰려왔다. 태풍은 4일간 지속되었다. 원나라군대의 남방함대의 배는 기본적으로 모두 부서졌다. 북방함대의 배는 절반가량 부서졌다. 북방함대의 남은 배는 지휘관과 일부 몽고군과 고려군을 태우고 고려로 돌아갔다. 남방군의 지휘관과 일부 고급장교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겨우 남은 몇 척의 배를 타고 멀리 도망친다. 이때 구룡산의 바닷가에는 여전히 10만의 원나라군대가 남아 있었다. 이들은 보급선과 퇴로를 잃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방법도 없었다. 이제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3일후, 일본인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남아있던 원나라군대는 팔각도라는 좁은 지역으로 몰려갔고, 공격을 개시했다. 원나라군대는 대부분 피살되었고, 남은 2만여명은 포로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몽고인의 표준에 따라 포로를 4등급으로 나누었다. 전3등은 몽고인, 색목인, 여진인, 고려인과 북방한인으로 모두 죽여버렸다. 4등인 당인(唐人, 남방한인)은 죽음을 면하게 한 후 부민(部民, 천민)으로 삼았다. 지금도 하카다만에는 "원관총(元冠塚)"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이곳은 당시 원나라병사들을 집단으로 묻은 곳이라고 한다.
이번 참패에서, 남방군은 겨우 3명의 병사만이 도망쳐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겨우 작은 배 하나를 구해서 행운스럽게도 중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쿠빌라이는 3명의 생존자들을 통해서 패전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전쟁의 부총사령관 범문호는 참수되었고, 다른 관리들도 서로 다르지만 처벌을 받았다.
일본역사에서는 제2차몽고침입을 "홍안지역(弘安之役)"이라고 부른다. 이번 전쟁에 일본인들이 투입한 군대는 수준이나 수량면에서 모두 "문영지역"을 넘어섰다. 몽고인들은 전술에서 조금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몽고인의 전투력은 상상했던 것처럼 강대하지 않았다. 일본 사무라이는 여러 면에서 그들을 압도했다. 특히 장비와 전투기술의 측면에서 그렇다. 일본인의 장비우세는 일본도뿐이 아니었다. 사무라이의 철갑에서도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몽고인들의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몽고인들의 화살은 사무라이의 갑옷을 뚫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고 ,그들의 전쟁기술이 몽고인보다 뛰어났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몽고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개별전투, 단독전투에 능하다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주장과도 부합한다. 일본인의 원나라군대에 대한 평가에서 한인들을 가장 낮게 평가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인들은 죽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었고, 사기도 낮았고, 가장 형편없는 부대였다. 그러나, 한인은 싸우는 것은 잘 못해도, 노예로 삼기는 좋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한인들을 사면해서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