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시인을 낳은 땅, 강릉
올 여름 한달여 지속된 무더위를 핑게로 그동안 봐 주는 이 없어도 쉬지 않았던 '팔도강산 한시비'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혹 필자가 이번 복중에 더위를 먹고 心身이 쇠잔하여 마우스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여기실까 봐 서둘러 연재를 속개키로 하였습니다 -_-;; 이번에는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한시비가 있는 강릉으로 갑니다. 강릉은 그 수려한 풍광 만큼이나 많은 예술가와 학자를 탄생시켰는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하난설헌과 그녀의 남동생 허균의 경우만 봐도 그 대단한 地力이 느껴지시지요.
때를 만나지 못한 천재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그녀는 스스로 잘못 태어난 인생이라 한탄(三恨)하였다지요. 첫째 여인으로 태어 난 것, 둘째 여자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조선에서 태어 난 것, 셋째 더욱이 졸장부 김성립에게 시집가게 된 것. 그래도 가슴으로 지은 그녀의 절창들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널리 읽히는 조선 한시가 되었으니..(실제로 일본이나 중국 포탈사이트에 들어가 朝鮮漢詩를 검색하면 許蘭雪軒의 시가 많이 나옴)
허난설헌 허균 기념공원
사실 필자도 직접 가 보지 못하고 인터넷 상에서만 서핑하여 올리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강릉을 방문하게 되면 허난설헌기념공원과 강릉시비공원을 꼭 들르려 합니다. 허난설헌이 태어나 자란 곳은 강릉의 초당동(草堂은 난설헌 부친 허엽의 號, 초당두부로도 유명한 곳)으로 기념공원은 그녀의 생가터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을 두루 뒤져봐도 기념공원 안에 허난설헌의 한시비는 많지 않아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집안이 모두 한시에 능하여 아버지(허엽), 오빠(허성) 그리고 남동생(허균)의 한시비도 함께 세워야 했기에 그런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연가(竹枝詞*)
*죽지사(竹枝詞) : 당(唐)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낭주(朗州)에 유배되었을 때 즐겨 지었던 사랑의 노래 형식으로, 이후 죽지(竹枝)란 말은 사랑을 의미하게 되었음.
家住江陵積石磯(가주강릉적석기) 집은 강릉 땅 돌무더기 쌓인 냇가,
門前流水浣羅衣(문전류수완라의) 문 앞을 흐르는 물에서 비단 옷을 빨았지요.
朝來閑繫木蘭棹(조래한계목란도) 아침이 오면 한가로이 목란 배 매어놓고,
貪看鴛鴦相伴飛(탐간원앙상반비) 짞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보았다오.
허난설헌이 출가하기 전 강릉에서 살 때 지은 시로 꿈많고 행복했던 시절의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사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자식들을 남녀 차별없이 기르고 교육시켰다고 합니다. 난설헌과 허균을 당대 유명한 시인 손곡 이달(蓀谷 李達)에게 시를 배우도록 한 것만 봐도 許씨 집안의 예술적 내력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별도의 우리말 해석은 생략합니다.
난설헌은 당시 명문가라는 안동 김문에 출가하게 되는데, 그녀의 친정과는 너무나도 다른 고루한 양반가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남편 김성립은 시와 문장에서 부인보다 뒤진다는 자괴감 때문인지 그녀를 멀리하고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희망인 남매마저 어린 나이에 연이어 죽게 되자 이 천재 시인도 마침내 이승의 끈을 놓습니다.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역시 우리말 새김은 생략하겠습니다.
이 시는 난설헌이 죽기 전에 자신이 27살에 꽃처럼 질 거라고 예언하듯 진 시입니다. 이 시비는 강원도 강릉에 세워져 있는 게 아니고, 경기도 광주(廣州) 안동 김씨의 선산에 있는 난설헌의 묘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위 시의 제목에 나오는 광상산(廣桑山)은 전설속의 산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여러 이터넷을 두루 뒤져봐도 보이지 않네요. 아마도 자신의 딸과 아들의 무덤이 있는 광주(廣州)와 해가 떠오른다는 전설속의 지명인 부상(扶桑)을 조합하여 만든 가상의 산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만.. (필자 생각).
난설헌의 주옥같은 시가 많은데 기념공원 시비에 올라 있는 게 몇 수 되지 않아 그녀의 절창 한 수 더 붙입니다.
규방의 원망(閨怨)
月樓秋盡玉屛空(월루추진옥병공)
달 비친 누각에 가을은 깊어가고 옥 병풍은 비었는데,
霜打蘆洲下暮鴻(상타노주하모홍)
서리 친 갈대밭 물가엔 저녁 기러기 내려앉는다.
瑤瑟一彈人不見(요슬일탄인불견)
비파 한 곡 다 타도록 임은 보이질 않고,
藕花零落野塘中(우화영락야당중)
연꽃만 들판 연못 속으로 시나브로 지누나.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고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그 당시 여성이 이름 · 호 · 자를 고루 갖춘 경우가 드물었는데, 그녀의 집안에서는 남녀차별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명망이 높았던 초당(草堂) 허엽(許曄)이고 오빠 허성(許筬), 허봉(許)도 중요한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동생 허균도 어릴 적부터 뛰어난 문사의 기질을 보여 촉망을 받았다. 당시 3당(三唐) 시인으로 일컬어지던 서얼 출신 최경창(홍랑의 정인), 백광훈, 이달 등과 유난히 친분이 두터웠고 천출 시인 유희경(매창의 정인)도 이들 허씨의 후원을 입는다. 허성, 허봉 등은 이들 불우한 시인들을 남달리 알아주고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허성, 허봉과 터울이 지는 난설헌과 허균은 어릴 적부터 이달에게 시를 배운다. 그녀는 8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장편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데, 나중에 정조도
이를 읽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안동 김씨 집안으로 출가하는데, 남편 김성립은 변변치
못해 과거 공부를 했지만 별로 진전도 없었고 더욱이 아내와 시를 주고받을 수준도 안 되어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정분도 없었다.
더욱이 아내에 대한 열등감에 걸핏하면 기생방에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지아비의 버림을 받고 규방에서 눈물로 지새운 자신의 처지를 시로 읊는다.
딸과 아들을 낳아 남편에 대한 애정을 자식들에게 옮겨 정성을 쏟았고 어린 남매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재미를
느끼는 것도 잠깐, 어린 두 자식이 해를 연이어 죽는다. 자식을 묻고 훗날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두 아이의 무덤 뒷자리에 묘를 쓰라고 하여 이들 세
무덤은 광주 지월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녀의 불행은 계속 되어 잘 나가던 친정집에는 재앙이 이어진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주에서 객사했고, 이어 오라버니 허봉은 율곡의 잘못을 들어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된다. 허봉은 2년 뒤 풀려나 백운산, 금강산 등지로 방랑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 병이 들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아버지처럼 객사한다. 이런 친정의 연이은 재앙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자신의 시재를 알아주었던 인물이 하나씩
사라지는 데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그녀는 스물세 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친정에 가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신선 사는 곳에 올라 노닐면서 온갖 구경을 다 하다가 한 줄기 붉은
꽃이 구름을 따라 날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꿈에서 깨자 곧 “붉은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가 차가운 달에
떨어졌네” 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이 시처럼 그녀는 한과 원망을 가슴에 안고 스물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둔다.
그녀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이는 허균이다.
생전에 넓은 중국에 시명을 날리지 못한 것을 한탄한 누이를 위해 허균은 그녀의 시집을 중국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준다. 이리하여 그녀의
시는 중국에 널리 소개되었고, 중국의 여류시인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시를 애송하게 된다. 국내에서도 그녀의 시는 시화(詩話)나 시평을
통해 널리 소개된다. 어떤 시화에서는 격조면에서 허봉이나 허균의 시가 모두 그녀의 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시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자, 허균의 정적들은 허균이 그녀를 띄우기 위해 스스로 지은 시를 누이의 시라고 세상을 속인다고 모함한다. 특히 허균이 한글로
홍길동전을 써서 미움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죽자, 정적들이 허균의 죄상을 부풀리려고 날조한
것이다. 그러나 시의 안목을 갖춘 사람들은 그녀의 시를 오히려 허균보다 윗자리에 놓는다. 그리고 신사임당, 황진이, 옥봉 이씨, 매창(계생) 등 많은 여류시인 중 허난설헌을 최고로 꼽는다. 뒷날 허균은 부안의 기생으로서 뛰어난 시재를 보인
매창을 극진히 대하는데 그녀에게서 누이의 잔영을 본 것이리라.
그녀의 시는 강렬한 대결의식 또는 시사를 풍자하기보다 원망과 한탄을 주로 노래했지만, 풍부한 시어와 언어 구사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다만 그녀의 말처럼, 한 천재적인 여인이 봉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해 재주를 마음껏 뽐내지 못한 것은
한국 문학사의 불행이다. 만약 그녀가 좀더 자유분방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면 아마 훨씬 아름다운 시를 더 많이 남겼을 것이다.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