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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93 (양동리 125)
054-762-2630
매표시간 [4월~9월] 09:00-18:00 / [10월~3월] 09:00~17:00
관람시간 [4월~9월] 09:00-19:00 / [10월~3월] 09:00~18:00
관람요금 어른 4,000원 / 청소년 및 군인 2,000원 / 어린이 1,500원
양동마을문화관
관람시간 [4월~9월] 09:00-18:00 / [10월~3월] 09: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무료 주차
경북투어패스 48시간 이용권의 마지막 사용처는 경주 양동마을이었다.
제주투어패스 2번 이용하다보니 알게 된 노하우랄까? 48시간 이용이 사실은 입장기준이기 때문에...
경북투어패스를 이용하면서... 미리 첫날 이용시간을 오전 11시 20분에 시작하였고...
오늘 마지막 3일차 경주 양동마을 입장을 오전 11시 25분에 했다.
그럼 사실 총10개 시설물 약50여시간을 이용한 것이다.
제주투어패스와 비교해 더 좋은 점은 제주투어패스는 한군데에서 이용하면 1시간 후에 다른 곳에서 이용할 수 있는데...
경북투어패스는 시간적 제약이 없어서 가까운 곳을 묶어서 방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가지 더 알려주면... 경주신라투어패스 48시간권으로 구입하더라도 꼭 경주에서만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른 경북지역 영천, 포항 등 경주를 오가는 중에 사용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나도 경주 양동마을을 방문하기 전에 10여분 떨어져 있는 포항 로보라이프뮤지엄을 경북투어패스로 먼저 방문했었다.
경북투어패스는 잘 활용하면 할수록 그만큼 할인을 더 많이 받는 형태이므로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번 경주여행에서 내가 구입한 경주투어패스는 엑스포대공원 통합권으로 14,160원에 구입했다.
양동마을문화관은 무료 관람이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양동마을을 관람하기 전 꼭 먼저 관람하여 어디어디를 방문할 것인지... 또 어떤 곳인지 사전 정보를 가질 수 있기를 추천한다.
일부 건물은 소유자 등의 사정으로 개방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혹시 개방되지 않아도 사전 정보가 있으면 담장 너머로 대충 건물 배치나 모습을 그려보고 추정할 수 있다.
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 7월 31일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00년전 역사마을 양동마을로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관가정이었다.
양동마을에서 송첨종택 다음으로 오래된 집으로 보물 제442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조선 중종 때 관리로서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의 살림집으로
중종 9년(1514)에 지은 집이다.
‘관가정(觀稼亭)’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사당이 있으며,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조선 중기 남부지방의 주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경주 시내를 가로지른 형산강이 양동마을에 닿으면 양동천으로 이름이 바뀐다.
마을 앞을 관통하는 양동천은 안락천과 만나 마을을 더욱 비옥하게 한다.
그 골을 따라 초가가 이어진다.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더욱 위엄있어 보이는 것도 지리 지형 덕분이다.
유교 이념에 따라 철저한 계급사회를 지향했던 조선 시대의 엄격한 신분질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을 뒤편에는 163m의 야트막한 설창산이 양동리와 안계리에 걸쳐 병풍 역할을 한다.
마을 앞에는 안계들녘에서 드넓게 펼쳐져 마음마저 탁 트인다.
[next economy 문화]
양동마을은 500여년 전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모여 살면서 형성되었다.
특히 두 가문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종가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분가는 그 아래에 자리하여
조선의 엄격한 서열문화를 엿볼 수 있다.
관가정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좋은 풍광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동마을에서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은 관가정과 더불어 향단과 무첨당 단 3개 뿐이다.
사랑채 누마루에 오르면 형산강과 안강들녁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오고
소작농들의 농사짓는 모습도 한눈에 감독할 수 있어
실용성이 더 강조된 듯하다.
[next economy 문화]
우재 손중돈을 이조판서에 임명하는 고신(임명장)인 교지(조선시대 국왕의 명령및 의중을 담은 언사)
1528년(중종 23년) 정월 13일
손중돈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이조판서는 정2품 관직으로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수장이다.
문관의 선임, 공훈의 사정, 관리의 성적평정 등의 일을 관장했다.
지정조격(보물 제2118호)
원나라 순제 지정 6년인 1346년(충목왕 2년)에 간행한 원나라의 법전
원나라가 중원 대륙을 지배하면서 몽골의 관습법과 중국의 전통 율령을 통치에 적용할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한 법정이다.
지정조격이란 책의 편찬 시기가 지정 연호를 사용하였고 조격은 각종 성문법과 불문법 조항들을 배열했다는 뜻이다.
이 책은 손사성이 1423년(세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에 있을 때 참고한 책으로 추측된다.
손소 적개공신교서(경북 유형문화재 제13호)
1467년(세조 13년) 11월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손소를 적개공신 2등에 녹훈하는 교서
적개공신이란 1467년 5월에 발발한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세조는 9월에 모두 45인의 공신을 녹훈했는데, 손소는 2등에 녹훈되었다.
손소는 이시애의 난 때 평로장군 박중선의 총사관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자 내섬시정으로 특진 되고,
동시에 땅 100결과 노부 10구 등의 상전을 하사받았다.
신발을 벗고 올라갈 볼 수도 있다. 내려다 보이는 풍광이 좋다.
뒷편에 사당이 있고...
사당으로 출입하는 삼문의 모습이다.
올라왔던 계단으로 또 내려갈 필요없이 옆문으로 나갈 수 있다.
옆문으로 나와서 관가정에서 향단으로 이동한다.
향단(香壇)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인 중종 38년(1543년)에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임금이 지어준 집이라고 전한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1493-1553)이 형님 대신 노모를 모시고 살던 집으로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 이의주(1567-163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이후 여주 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편의성을 위해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한 몸체로 이루어지고
2개의 마당을 가진 특이한 구조다.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본래 99칸이었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일부는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56칸이 보존되어 남아 있다.
경주 양동마을 향단은 1964년 11월 14일 대한민국 보물 제412호롤 지정되었다.
이날은 안쪽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듯 하여...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경주 양동마을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은 서울 대도시에서 경험하기 힘든 흙길을 실컷 밟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른 흙길이라 흙냄새가 나고 그러지는 않지만... 구불구불한 흙길을 걸으면서... 마음이 힐링되는 치유의 시간을 갖는듯한...
그러다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곳을 찾아 들어간 곳이 심수정이었다.
심수정은 여주이씨 문중에서
조선 중기 학자 농재 이언괄(1494-1553)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명종 15년(1560)경에 지은 정자이다.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님인 회재 이언적 대신 노모를 모신 분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뜻을 두지 말고 귀먹은 듯 살아가라'는 뜻의 농재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정자는 철종 때에 행랑채만 빼고 화재로 모두 타버려 1917년 원래 모습을 살려 다시 지은 것이다.
'마음을 고요한 물과 같이 가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은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마을의 서당 역할을 했다.
마을 안팎에 있는 10개의 정자 중 규모가 제일 크며,
여주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건물을 'ㄱ'자로 배치하고 누마루를 두었다.
심수정은 국가민속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조용하던 양동마을을 떠들썩하게 웃음소리가 넘쳐났던 이유는 심수정에서 돌잔치 사진촬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삼관헌(三觀軒)은
仁者可以觀其愛焉 (어진 사람은 그 사랑으로 관찰할 수 있고)
智者可以觀其理焉 (지혜로운 사람은 그 다스림으로 알 수 있으며)
疆者可以觀其志焉 (굳센 사람은 그 뜻으로 보인다)
오늘 돌잔치한 아기가 머리위의 삼관헌의 뜻에 맞게 어질고 지혜로우며 굳센 의지의 사람으로 자라길 소망한다.
조금 더 일찍 왔었으면 돌잔치 사진촬영 구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막 도착했을 때는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심수정을 나서고 있었다.
심수정을 나와 찾아간 곳은 맞은 편 무첨당이었다.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종가에 16세기 중엽에 지어진 제청(祭廳)으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無忝堂 李宜潤, 1564-159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고, 동쪽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가 있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 독서와 휴식, 손님 접대와 문중회의를 했던 큰 사랑채다.
별당과 본채 뒤쪽 조금 높은곳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1964년 11월 14일 보물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창산세거(蒼山世居) : 창산은 무첨당 뒷산인 설창산을 일컫는 말로 창산세거는 설창산에서 대대로 살아오는 집을 의미한다.
양쪽 온돌방 앞에도 각각 편액이 걸려 있다.
대청 왼쪽에 써 있는 물애서실(勿厓書室)는 물봉골에 위치하고 있는 책방이란 뜻으로 현판 글씨는 용방 조광이 썼다.
물애서실(勿厓書室) 맞은 편인 대청 오른쪽에 ‘좌해금서(左海琴書)’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영남에서 선비가 살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 이곳에 들러 대쪽으로 쓴 글씨라고 한다.
무첨당에서 밖으로 나가면서 찍은 사진이고...
무첨당 밖에서 문 안으로 찍은 사진이다.
다음 근처에 위치한 대성헌(對聖軒)으로 이동한다.
이 집은 조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해 좌찬독고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물와 이재직(1805-1837)의 셋쨋 아들 이능단(1833-1912)이
철종 원년(1850)에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다.
앞쪽의 빼어난 산봉오리 성주봉(聖主峰)을 바라보고 지어졌는데 집의 이름도 '성주봉과 마주하고 있다'는 뜻으로
'대성헌(對聖軒)'이라고 하였다.
집의 구성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돼 있으며,
ᄀ자형의 안채와 一 자형의 사랑채, 행랑채가 모여 있어서 전체적으로 ᄆ자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안쪽 꺾이는 곳에 긴 부엌이 있고 오른쪽에 안방과 대청이 있으며, 옆으로 건넌방이 있다.
전체적으로 툇 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하고 있다.
사랑채는 다른 건물보다 높은 곳에 배치돼 있는데, ‘대성헌’이라는 현판이 달린 대청과 2칸의 사랑방이 있다.
사랑채 대청 앞에 2칸에 8짝문을 샛기둥 없이 달아 4짝씩 접어 올리게 한 것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대성헌을 나와 송첨 종택까지 꽤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닿았다.
송첨 종택은 경주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 손씨 입향조(入鄕祖)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이다.
1970년 12월 29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 '양동(良洞) 서백당(書百堂)'으로 지정되었다.
송첨 종택은 경주 양동마을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그의 외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물(勿)’자형의 형국을 이룬 양동마을의 가장 안쪽인 안골에 위치하고 있다.
제법 높은 언덕의 비탈면에 서남향으로 자리하였는데,
‘일(一)’자형 대문채와 ‘□’자형의 몸채를 지나면 동북쪽 뒤쪽에 사당이 있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書百堂)'의 의미는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양동의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의 뒤쪽에 사당이 있다.
현재 많이 전하지 않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가옥이자, 관가정, 향단(香壇) 등과 함께 양동마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물이다.
건축 시기를 비교적 확실히 알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대종가의 명맥을 잇는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꼽힌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송첨 종택을 나오는 대문으로 바라보는 풍경도 예사롭지 않다.
아랫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지 혹시 놀고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하는 역할도 했을텐데...
경주 양동마을의 관람은 그래서 쉽지않다.
어디 어디 개별적인 관람보다는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와 계층구조를 반영한 포괄적인 구도와 배치가 교묘히 숨겨져 있다.
그래서 '서백당'이 그리 곱지만은 않은 시선을 갖게 한다.
어쩌면 아랫사람들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바라 보고 양반으로서 인내하고 참는다는 허세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이향정 고택이다.
이향정은 조선 숙종 21년(1695년)에 지었다고 하며
온양 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1708-1783)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이름과 같이 뒤뜰에 큰 향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안채 뒤쪽으로 산길을 따라 쌓은 담장이 인상적인데 사랑채 앞으로도 낮은 산이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담장을 따라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초여름이면 찔레꽃이 만발하여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안마당이 넓고 방앗간채가 따로 있으며 곶간이 매우 많은 점으로 보아 집주인이 부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주 양동마을의 모든 관람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한 가족의 아들과 아빠의 대화가 인상에 남는다.
"아빠 좋은 집은 왜 높은 곳에 있어?"
"그래야 감시하지..."
물론 감시도 했겠지만... 아랫사람들을 말없이 살피고 돌보는 역할도 분명히 했을 거라고 믿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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