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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110. [역경의 열매] 박창환 (1-17) 아흔살의 愚問 "나를 신학으로 이끄신 까닭은?
이 세상에서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 한국식 나이로 90년을 살았으니 꽤나 긴 세월을 걸어왔다. 뒤돌아보면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시골 장로 할아버지의 평화로운 집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내가 아버지에 이어 목사가 되고 이후 한평생 신학 교수로 살아오면서 줄곧 드는 생각은 '그저 하나님 은혜구나'이다. 막대기보다 못한 나를 사용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무릇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어느 정도 안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경우도 더러 있다. 살다보면 자신을 한 우물 안에 가둬놓은 채 바깥은 내다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또는 내 자신의 주장만 밀어붙이며 타인과 다른 세상의 이야기에는 귀를 막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의 지난날에도 어떤 우물에 갇혀 있었던 적은 없었던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스스로 진단해보는 일은 너무 늦은 것일까. 하지만 기독교 목사로서, 소위 신학 전공 교수로서, 특히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죽기 전에 나의 신앙과 신학의 족적과 좌표를 확인하는 일 또한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어떨까. 내가 몸담아온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신학적 좌표는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일까. 내가 한평생 경험한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통주의적 보수교회 그 자체였다. 보수신앙에 기반을 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지고 운영되었다. 그들의 신앙과 신학 노선이 기독교의 전부인 것인 양 받아들여진 지난날의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도 분명 우물안 개구리 같은 시절이 있었다.
우리 교단의 신학만이 진리요 정통이라고 확신하면서 우리 교리와 상충되거나 그런 사조(思潮)가 나타나기라도 할 때면 전 교회가 들고 일어나 정통주의를 옹호하는 투사 노릇을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국 장로교회가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정통주의는 한마디로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를 내건 종교개혁의 정신을 간과한 시대착오적 주장에 가깝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에 의해 개혁된 교회인 개신교는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신학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나는 지난 3월 미국에서 돌아와 모교인 장신대 강단에 다시 섰다. 1988년 은퇴한 이래 꼭 25년만이다. 매주 화요일 3시간씩 신약성경신학을 1년간 강의한다. 학교로 다시 돌아오면서 후배들과 제자 교수들은 물론 새파란 신학도들과 얘기를 나눌 때가 많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에서는 오늘날 목회자와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이 적지 않게 묻어난다. 나는 스승으로, 선배로, 때로는 같은 신앙인으로서 그들에게 말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하게, 옳게 살아야 한다.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단어가 '체데크(공의)'와 '미쉬파트(정의)'였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온전해지는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 우리 신학도는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은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한다. 즉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고 바로 전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과연 그렇게 살아왔을까.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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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24년 3월 19일. 황해도 황주군 천주면 외하리 출생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졸업 △홍익대 영문학과(B.A)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Th.M) △대한성서공회 성서번역관 △장신대 제13대 학장 △인도네시아 선교사 △니카라과 장로회신학교 학장 △러시아 모스크바 장신대 학장 △장신대 명예 교수 및 초빙교수(2013)
***[역경의 열매] 박창환 (2) 박태로 선교사 등 세 祖父가 우리 집안 '신앙 뿌리
황해도 황주군 천주면 외하리 신동(新洞). 내가 태어난 외가(外家) 동네다. '새뒤이'라고 불리는 그 마을은 완만한 언덕에 교회당이 있고, 마을 앞으로 시내가 흐르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다. 외할아버지는 교회 장로였다. 같은 황해노회 소속이었던 친할아버지(박태화 장로)와 사돈을 맺어 맏아들인 아버지(박경구)와 외할아버지의 셋째 딸인 어머니(김몽애) 사이에서 내가 태어났다.
우리 집안 얘기를 하자면 할아버지 3형제를 빼놓을 수 없다. 큰할아버지(박태로 선교사)는 우리 박씨 집안에서 가장 먼저 예수를 믿었다. 그 영향으로 형제들도 신앙을 갖게 됐다. 큰할아버지는 황해도 신천 지방의 유명한 망나니였던 김익두(나중에 목사가 됨)를 전도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재령읍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전도사로 섬기시기도 했다. 그리고 평양신학교를 졸업(5회)한 뒤 꼭 100년 전인 1913년, 한국장로교 총회 파견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지역 선교사로 떠나셨다. 한국교회가 중국으로 보낸 제1호 선교사였다.
친할아버지는 나에게 모험심과 개척정신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신식 교육을 전혀 받지 않으신 분이었지만 '활천(活泉)' '농민생활' 등 잡지를 구독하시며 늘 새로운 것을 접하시려고 노력하셨다. 논밭을 일구면서도 양돈, 양봉, 양잠에 이어 정미소 경영까지 하셨으니까.
교회 일에도 앞장서신 분이다. 한번은 교회당 지붕에 물이 새서 지붕을 새로 깔아야 할 형편이 되자 한 마리밖에 없던 소를 내다팔아 비용을 마련하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운기나 트랙터쯤 될 만한 농번기의 필수품인데, 교회를 위해 선뜻 내놓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경제적으로 밀어주시느라 애쓰신 분이기도 하다.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공부할 때, 일본 도쿄에 유학을 떠났을 때도 모든 비용을 아낌없이 채워주셨다.
장남인 내 밑으로는 여러 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모두 합하면 9남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 다음에 태어난 숙환과 왜정 말기 태어난 신자, 해방 후에 태어난 혜연 등 여동생 3명은 어릴 적 모두 병사했다. 나머지 창연 정연 옥연 주연 창헌까지 6남매가 함께 자랐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와 동생들은 6·25전쟁 통에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가족의 소식은 30년쯤 지난 1980년대 말 재미교포 출신의 목회자 등 여러 루트를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창연과 주연은 황해도 송화 지역에 살고 있고, 옥연과 남동생 창헌은 행방불명이라고 했다. 대가족을 거느리시며 고생하셨던 어머니는 6·25전쟁이 나고 10여년 지난 1963년 황해도 송화에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도 전해 들었다. 6·25전쟁이 터지기 1년 전쯤 월남한 여동생 정연만이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동생들 소식을 전해 들었을 무렵, 주위에서는 북한을 방문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북한 당국이 6·25전쟁 때 해주 감옥에서 순교하신 아버지 가족의 상봉을 허락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행여 만난다 하더라도 결국 북쪽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은 당국의 감시와 간섭일 테니 마음을 접었다.
그저 하나님의 때가 오기를 간곡히 기도하면서 인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은 70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주시면서 남은 자들의 귀환을 약속하셨다. 북한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하루하루 전능자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그의 간섭과 역사를 기다릴 뿐이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3) 여덟살 무렵 우물 속으로 추락… '거듭남' 체험
여덟 살 무렵, 사리원으로 이사를 하면서 덕성보통학교를 다니게 됐다.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사리원 덕성보통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친구가 별로 없었다. 어울리는 친구라고는 앞집에 사는 오응식(당시 사리원서부교회 담임) 목사님 아들 기성이와 기준이 정도였다. 다른 취미라면 사리원 남단 경암산에 오르거나 여동생이랑 놀아주기, 어머니 집안일 돕기 정도였다.
처음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그 즈음이다. 하루는 집 뒷마당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릴 때였다. 물이 가득 담긴 두레박 무게를 못 이겨 내가 그만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우물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정신을 차리니 덜컥 겁이 났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돌 벽 틈새에 발을 디디고 서서 핏줄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와 동네 아낙네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담 벽에 걸린 두레박줄을 내려줬다. 나는 줄을 움켜쥐었다. 위에서는 서서히 줄을 잡아당겨 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우지직.' 잡고 있던 두레박줄이 끊어지면서 다시 물속에 처박혔다. 줄이 낡아 삭은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나를 구해주신 분은 교우 심방을 마치고 귀가하시던 앞집의 오 목사님이셨다. 우물 안까지 들어와 내 손을 덥석 잡고 끌어내셨다.
2년 뒤에는 아버지가 진남포 득신학교 교장으로 옮기시면서 한 번 더 이사했다. 내가 그 당시 진남포를 잊을 수 없는 건 내 신앙의 기념비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생(거듭남) 체험을 했다.
어느 날인가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가 억량리 교회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그 교회 담임은 김성택 목사였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매부이자 장로교총회 총회장을 지내신 분이다. 당시 부흥회에서 길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셨다. 일주일 정도 이어진 말씀 집회에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말씀의 은혜를 깊이 맛봤다.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때가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이듬해 졸업을 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숭인상업학교 두 곳에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일본어 시험성적이 낮았던 것 같다. 재수를 해서 이듬해 같은 학교에 시험을 쳤는데 또 떨어졌다. 할 수 없이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지원, 입학시험을 쳤다. 다른 동급생 8명이 함께 치렀는데 여기서는 나만 붙고 다른 이들은 모두 낙방했다. 오산학교에 붙으면서 나는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됐다. 비슷한 시기, 아버지는 교장 직을 관두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셨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오산학교 시절, 일제는 한글을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함석헌 선생은 수신(修身) 과목 시간에 일본어 교과서를 들고 들어오셨지만, 수업 내내 우리말로 가르치셨던 기억이 또렷하다. 주일이 되면 동네외곽에 있는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 멤버가 되어 교장 선생님의 사모님(남강 이승훈 선생의 딸), 또 다른 선생님 사모님들과 함께 찬양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의 출세 길을 꽉 막아 놓았다. 나는 공과(工科)나 의과 계통으로 공부를 해야 밥벌이가 될 것 같아서 서울 공업전문학교(서울대 공대 전신)를 목표로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보낸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그 편지가 내 인생을 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4) "목사 돼라"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편지
'우리는 목사 집안이다. 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야 한다. 가족회의에서 결정했다.'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 내용의 요지다. 한마디로 수긍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수줍음이 많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무섭고, 말까지 서툴렀다. 어느 면으로 보나 목사가 될 소질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다. '아버지 저는 목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어머니가 다시 편지를 보내오셨다.
'얘야, 목사 일을 사람의 힘으로 하는 줄 아느냐.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되는 것인데, 네가 못한다고 하면 되겠느냐.' 책망하는 어조였다. 어머니의 말씀은 거역하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는 말에 조금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뒤부터는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어떤 목사가 되어야 할까.'
가장 먼저 영향을 끼친 분은 오산장로교회 박기환 목사님이었다. 신령하신 분이자 설교도 잘하시는 분이었다. 다만 음치(音癡)라는 게 옥에티였다. 찬송가 선창을 못하셔서 찬송가를 펴면 교인들이 먼저 큰소리로 음을 잡아주곤 했다. 박 목사님을 보면서 나는 '적어도 음악을 아는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결심은 결국 일본 도쿄로 음악공부를 가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이어졌다. 앞서 나는 오산학교 브라스밴드 멤버로 트럼펫, 바이올린에 이어 피아노와 작곡까지 배웠다. 이런 경험까지 이어져 도쿄제국음악학교 작곡과 지망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당시 학교에서는 매일 정기적으로 나팔 신호가 울렸다. 오전 6시(기상), 오후 7시(저녁공부시간), 오후 10시(취침시간) 등 3차례였는데, 그 나팔수가 바로 나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시간에 맞춰 학교 앞 언덕에 올라가서 나팔 부는 일을 3년간 도맡았다. 이 공로로 나는 졸업식 때 개근상에다 봉사상, 우등상까지 받았다. 바쁜 농촌 일손을 멈추고 황해도 시골에서 맏손자 졸업식을 보기 위해 찾아오신 친할아버지께서는 무척 흐뭇해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에 유학, 도쿄제국음악학교 작곡과에 입학했다. 유명한 작곡가로 이름을 날린 나운영 선생과 우리나라 1세대 첼리스트 전봉초 선생 등이 졸업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도쿄의 초봄은 습기 탓인지 차고 을씨년스러웠지만 도쿄 구경도 하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유학생활은 몇 달도 가지 못했다.
대동아전쟁 때였던 당시 미국이 도쿄를 공습하면서 일본이 밀리던 때였다. 일본은 즉각 징병령을 내렸다. 한국인 갑자(甲子)생부터였다. 내가 딱 걸렸다. '아, 이제 일본군으로 끌려가는구나. 끌려갈 때 가더라도 집에 가서 부모님이랑 같이 지내다 가야겠다.' 이렇게 해서 나의 일본유학은 반년도 안 돼 끝나고 말았다.
귀국하니 아버지는 황해도 겸이포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계셨다. 나의 징병검사 결과는 갑종 합격이었다. 일본 수병으로 배정됐다. 징집 때까지 남은 기간은 약 2년. 아버지의 권유로 평양신학교 예과 2학년에 입학했다. 본과에 입학할 연령이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1943년 4월이었다. 입학은 했지만 공부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포탄을 만들고, 비행장을 청소하고, 심지어 소금까지 구웠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은 나날을 보낼 수 있는 흥밋거리를 하나 찾았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5) 일본군 징집 한달 만에 8·15 광복 '무사 귀환'
평양신학교 예과 1학년 과목 중에 헬라어 수업이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진도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수업이 중단됐다. 그 과목이 재미있었던 나로서는 아쉬웠다.
그 후 어느 날인가 아버지 서가에서 헬라어 교과서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나의 헬라어 공부 불씨는 다시 이어졌다. 당시 황해도 겸이포에서 평양까지 약 1시간정도 기차를 타고 통학했는데, 헬라어 연습문제를 푸는 데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때부터 마주한 헬라어 성경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의 매일 나의 하루를 열고 닫는 친구가 되고 있다.
대동아전쟁은 점점 일본에게 불리한 국면으로 흐르고 있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은 한국교회에 박해의 끈을 조이기 시작했다. 교단을 강제로 합치는가 하면 교회 문을 닫게 했다. 아버지도 겸이포 중앙교회에서 밀려나셨다.
1945년 4월 6일. 사복형사 두 명이 아버지를 체포해 갔다. 아버지가 주도해서 황주군 일대 목사들과 함께 반국가 음모를 꾸몄다는 허무맹랑한 이유였다. 아버지는 잠을 안 재우는 고문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 하루는 아버지를 뵈러 헌병대에 갔는데, 헌병대 사람이 나를 아무런 이유 없이 일주일 감금시켰다. 그러고선 죄목을 씌워 내보내야 하기에 나의 혐의를 따졌다. 취조관이 물었다. "너는 집에서 국어(일본말)를 상용했느냐?" "아니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일주일 구금은 결국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은 죗값인 셈이었다.
일본 수병으로 징집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 면회를 청했다. 만에 하나 내가 전쟁 통에 전사라도 한다면 이번이 마지막 면회일 수도 있었다. 일본 헌병 입회하에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슬쩍 옆을 보니 우리 부자(父子)를 지켜보던 일본 헌병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점령지 백성의 억울한 운명에 대한 동정이었는지, 그저 부자 사이의 불우한 작별이 가여워서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나의 일본 수병 생활도 길지 않았다. 입대한 지 한달 보름 만에 해방을 맞았다. 그 짧은 기간 중에서도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하루는 부대원 전체가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일본인 훈련관들이 나에 대해 쑥덕대는 소리를 들었다.
"고노 야쯔와 니게소다노니 니게나이노요(요놈은 도망갈 것 같은데 도망을 안 간단 말이야)."
그들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나중에 한국인 훈련관에게 전해 들었다. 입대할 때 일본어와 산수 시험을 쳤는데 둘 다 만점을 받은 사람이 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관들이 나를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8·15 해방과 함께 무사히 귀가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돼 계시던 아버지도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있었다. 온 가족이 다시 모인 건 하나님의 은혜였다. 다시 평양신학교에 갔지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어수선했다.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남한으로 이주하거나 탈출한 상태였다. 나는 본과 2학년을 시작하다가 교수진도 약하고 교통문제도 있어서 학교 나가는 것을 멈췄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황해도 장연읍에 머물며 그 지방 단기 성경학교에서 가르쳤다. 이어 몇몇 동기들과 중학교를 세우고, 영어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 늦가을의 어느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서울에는 좋은 신학교가 생겼다고 하더라. 거기에 박형용 박사 같은 훌륭한 교수들이 있다고 하더라. 서울에 가는 게 좋겠다."(당시 박형용 박사는 만주에서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6) 공부하러 배타고 南으로… 5년간 4개 신학교 '섭렵
1946년 늦가을이었다. 가방에 옷 몇 벌과 성경책, 영어 사전을 넣었다. 아버지 서재에 있던 헬라어 포켓 성경도 챙겼다. 그리고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불타산을 넘어 해안(태탄)에 정박해 있던 조그마한 어선에 몸을 실었다.
손을 흔들어주시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공부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 밑에 부목사가 되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존경하던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 장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옹진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포에서 내렸다.
먼저 찾아간 곳은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한신대의 전신). 아버지와 숭실대 동기였던 한경직 목사님의 추천서를 통해 조선신학교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3년여 동안 나는 한국교회 신학교 태동의 격변기를 몸소 체험했다. 당시 신학노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로서는 한국교회의 신학 문제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신학교 편입 1년여 만에 고려신학교(고신대의 전신)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진보와 보수로 갈린 신학노선 갈등으로 빚어진 이른바 '신앙동지회' 사건이 터지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박형용 박사가 1947년 9월 만주 봉천에서 귀국,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나를 포함한 신앙동지회 회원들이 대거 고려신학교로 편입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학교운영을 둘러싼 내부노선 갈등은 이어졌다.
급기야 교장인 박 박사가 취임 9개월 만에 사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태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1948년 6월 폐허가 된 서울 남산 조선신궁의 부속 건물에서 평양신학교의 전통 계승을 표방하는 장로회신학교가 생겼다.
나는 이 학교에 편입했다.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 고려신학교를 거쳐 장로회신학교까지 5년여 만에 4개 신학교를 다녀본 셈이다. 그해 7월 9일에는 장로회신학교의 역사적인 1회 졸업식이 열렸다. 25명의 졸업생 중에 나도 포함됐다.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나는 막막했다.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의 길을 하나님 뜻대로 인도해주세요." 그래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졸업식을 며칠 앞둔 날, 방과 후에 교장이셨던 박형용 박사님과 둘이서 청파동 사택을 향해 남산을 내려오던 중이었다. 박사님이 말을 건네셨다.
"박군은 졸업 후에 어디 갈 데가 있는가?" "없습니다." 박사님은 조금 뜸을 들이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신학교에서 가르쳐볼 생각 없는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인지라 어안이 벙벙했다.
"제가 무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어학을 가르쳐보면 어때?"
"그러지요." 나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 있게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1948년 9월 학기부터 모교의 어학 전임강사가 됐다. 그때 시작한 일이 일생을 신학교 교수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 줄이야.
신학교 교사(校舍)는 남산의 조선신궁 앞뜰 오른쪽에 'ㄱ'자로 된 일본식 다다미방이었다.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방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넷을 갓 넘었을 때였다. 결혼 적령기 때라 내 여동생(정연)을 통해 청혼하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하지만 서른 살이 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을 해놓은 터라 이성에게 한눈을 팔진 않았다. 만혼(晩婚)을 결심한 건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7) 6·25 전쟁통에 아내 현수삼과 '3無' 결혼식을
영국의 목사 출신 경제학자인 맬서스(Malthus)의 저서 '인구론'을 접한 건 평양신학교 시절 아버지 서재에서다. 일본어 번역본을 읽었는데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한국처럼 작은 영국이 인구팽창으로 수십년 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 방치할 경우, 영국 백성이 바다에 빠질 지경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30세 이후에 결혼하는 게 좋다는 그의 제안을 나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건 천정배필(天定配匹)을 만나는 일. 따라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이 나타날 때 내 자신의 계획이나 결심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당시 나는 서울 충무로에 있는 영락교회 여집사 댁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숙하는 한 신학생이 영락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하는 현수삼이라는 처녀를 소개해줬다. 명동 전주교회 부속 유치원 교사이고, 교회 성가대 부반주자라고 귀띔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태룡 목사였다.
나는 아무 저항 없이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영락교회를 찾아가 멀찌감치 서서 그녀를 바라본 적도 몇 번 있었다. '결혼하자.' 마음을 정했다. 그 집에서는 '신학교 전임강사'인 나를 좋게 보고 결혼을 승낙했다. 1950년 5월 30일. 서울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법대 교무처장 사택에서 박형용 한경직 목사 등 여러 목사님들의 축복 속에 약혼식을 가졌다. 약혼반지와 시계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돼 6·25 전쟁이 터졌다. 국군은 계속 남쪽으로 후퇴했다. 인민군은 집집마다 뒤져 남자들, 특히 청년들을 잡아갔다. 당시 나는 충무로 교회 집사님 댁에서 며칠 버티다가 약혼녀 부모님, 내 여동생(정연) 등과 함께 서울 명륜동 2층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약혼녀의 오빠(현수길)가 피난가면서 비워놓은 집이었다. 어느 날, 현 목사님은 약혼자인 수삼과 나를 불렀다.
"이 난리통에 생사를 같이해야 할 터이니, 결혼식을 치르는 게 좋겠네."
1950년 8월 4일. 현 목사님은 결혼식을 위해 쇠고기 한 근을 얻어오셨다. 그리고 나서 목사님은 우리가 사는 임시거처에 식구들을 다 모아놓고 나와 수삼을 앉힌 뒤, 결혼식을 주례하셨다. 집밖에는 인민군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라 찬송은 부르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신 후 축복기도로 결혼예식을 마무리하셨다. 나와 신부는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결혼반지도, 예물 교환도, 신혼여행도 없는 '3무(無)' 결혼식이었다.
1925년 황해도 은율 태생인 아내는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황해도 재령 명신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기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재원(才媛)이었다. 활발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은 나와 반대였다. 때때로 다투기도 했지만, 목사와 교수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대접하기를 즐겼고, 지도력도 있어서 유치원과 여전도회도 잘 이끌었다. 내가 장신대를 은퇴한 뒤로는 함께 외국으로 다녔다. 그 가운데 5년 정도 이어진 모스크바에서의 삶이 아내를 많이 힘들게 한 것 같다. 치매가 온 것이었다. 러시아 치안이 부실해 밖에 돌아다니기가 어려웠고, 언어소통도 원활하지 않다보니 생긴 증상 같았다.
미국에 돌아와 노인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심장병 수술을 한 뒤부터는 치매증상이 더 심해졌다. 그리고 병상에 누운 지 4개월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007년 5월 29일이었다. 아내는 미시간주 트로이 화이트채플 공동묘지에 묻혔다. 열흘쯤 뒤면 아내 소천 6주기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나의 아내 현수삼이 그리워진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8) 생사의 피란길서도 '히브리어 교과서' 번역만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1950년 6월 25일, 주일이었던 그날 나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튿날 아침에는 서울 남산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올라갔었다. 멀리 동두천 쪽에서 쿵쿵 들려오던 대포소리도 생생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국군이 잘 싸우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만 연방 내보내고 있었다. 6·25가 터진 직후 학교에는 출석 학생이 많지 않았다.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당시 한국의 미국 선교사들은 '적어도 목사들만큼은 남쪽으로 피난시키자'는 계획을 세웠다. 전쟁이 나자마자 많은 목사들이 잡혀서 목숨을 잃거나 이북으로 끌려갔다. 이 같은 위험을 파악한 선교사들은 한국인 목사들과 그 가족들을 트럭이나 열차를 통해 한강을 건너게 했다. 그때 나는 아직 목사가 아니어서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서울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해 도시를 장악한 상태였다. 밤이 되면 종종 공산당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대문에 와서 "이 집에 남자 있어요?"하고 묻곤 했다. 그러던 중 미군과 연합군의 반격으로 서울탈환작전이 시작됐다. 철수를 서두르는 인민군들은 집집마다 뒤져가면서 남자들을 다 잡아갔다. 내가 머물고 있던 명륜동 거처에도 그들이 찾아왔다.
"이 집에 남자 있습니까?"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자진해서 2층에서 내려와 마당으로 나가 10여명쯤 되는 그들을 맞았다. 내가 생각해도 용감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말을 건넸다. "동무들 수고하십니다." 먼저 인사를 건네자 의아하다는 듯이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이 지역에 비밀 임무를 띠고 와 있는 사람이오."
"그래도 이름만은…."
"안 되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소."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위기를 모면했다. 실은 이런 일이 있을지 몰라 맘속으로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내가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겠는가.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 이튿날, 국군과 연합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9·28 서울 수복. 장로회신학교가 다시 가을학기를 시작했다. 학교에 나가자 누구는 죽고 다치고 행방불명됐다는 소식과 소문이 무성했다 그런데 몇 달 뒤 북상하던 연합군이 중공군을 등에 업은 인민군의 반격으로 후퇴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소위 '1·4후퇴' 사태로 돌입했다. 신학교 강의는 또다시 중단됐다. 이번에는 한강을 넘어 피난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경직 목사님께 부탁해 복구된 한강철교를 건너는 마지막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열차는 대구역에서 멈췄다.
거기서부터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부산까지 이동해서 처가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안전을 위해 제주도로 가는 배를 다시 탔다. 그곳에서 처남(현수길)은 미국문화공보원에 자리를 얻어 일하면서 나에게도 일감을 얻어주었다. 매일 발간되는 한국신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그때도 짬짬이 히브리어 교과서(A.B.Davidson)를 번역했다. 촛불을 켜놓고 작업을 많이 해서인지 그때부터 시력이 약해져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겨울을 보내고 나서 박형용 교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그도 제주 성산포에서 피난 중이었는데 부산으로 가서 피난 신학교를 열자는 말씀이셨다.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으로 갔다. 임시 교사(校舍)로 사용된 부산진교회(당시 김성여 목사)에서의 피난 신학교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9) 전란중 떠난 美유학 "아! 신학이 이런 거였구나"
1951년 5월 21일 부산 대청동 중앙교회에서 장로회 총회가 열렸다. 직전 해 4월 대구제일교회에서 비상 정회된 총회의 속회였다. 그 총회에서 신학교 합동안이 통과됐다.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하나로 합친다는 내용이었다. 교명도 총회신학교로 개칭한다는 것이었다. 한쪽의 반발, 즉 조선신학교 측이 강하게 반기를 들었다. 급기야 교단을 탈퇴(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신학교는 이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으로 바뀌었다.
부산의 장로회신학교는 4회 졸업생을 내고 폐교했다. 1951년 7월 부산진교회 예배당에서 4회 졸업식이 열리고 같은 해 9월 대구 남산동 미국장로교선교사 사택단지의 한 동에서 '총회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나는 대구의 신학교에서 약 1년간 헬라어를 가르쳤고, 부산에서 열린 함해노회에서 목사안수도 받았다(1952년 3월 26일). 그 즈음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실시한 교회지도자 양성 프로그램 참가자로 발탁돼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다. 유학 준비를 마치고 나서 박형용 박사님을 찾아가 출발 인사를 드렸다. 그때 그가 당부한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 학교에 성경 교수가 없으니 이것저것 다 해 가지고 오시오."
신·구약을 모두 공부하고 오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맏아들(명진)을 낳은 지 보름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아내와 아들이 눈에 밟혔다. 온 국민이 전란에 시달리고 있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전액 장학생의 신분으로 모두가 동경하는 미국의 한복판에서 공부를 하다니.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뉴욕 맨해튼 49가에 자리 잡은 비블리컬(Biblical) 신학교는 학문보다는 경건을 위주로 한, 한마디로 경건훈련장 같았다. 13층짜리 건물 한 동에 예배당과 교실, 도서관, 기숙사, 사무실이 모두 모여 있었다.
1년 동안의 뉴욕 신학교 생활을 마친 이듬해에는 프린스턴 신학교로 옮겼다. 한태동, 김윤국, 문동환 등 여러 명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비블리컬 신학교가 경건에 무게를 뒀다면 이곳은 말 그대로 '학문의 전당'이었다. 신·구약 과목을 등록하고 고급 희랍어 강의도 들었다. '학문이란 이런 것이구나' 윤곽을 잡는 시기였다고 할까. 지금까지 한국에서 배웠던 신학 교육과는 딴판이었다. 정통 보수주의의 약점을 깨닫는 동시에 성경을 학문적으로 충실하게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깊이 되새기는 시기였다.
약속된 2년의 유학 기한이 찼다. 이것저것 다 배워오라는 박형용 박사님의 말씀이 계속 맴돌았지만 한 마리 토끼도 잡지 못했다. 신약이나 구약 석사학위도 얻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장로회신학교는 1953년 박형용 박사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한 뒤 서울 남산으로 다시 옮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신대 학생 수가 600명을 넘어섰다. 남학생들의 병역이 면제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늘어난 학생들을 위해 새로운 학교 부지를 찾는 게 급선무가 됐다. 하지만 부지 매입 과정에서 일이 터졌다. 토지중개 등을 위해 소위 '교섭 비용'으로 들어간 비공식적인 돈이 3000만원에 달했던 것. 지금으로 치면 수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른바 '3000만원 사건'으로 박 박사는 사표를 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 사건을 통해 한국 장로교회를 분열시키는 주범을 목격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10) '3000만원 사건' 통해 장로교 분열 주범을 보다
'3000만원 사건'으로 사표를 낸 박 박사의 구명운동 과정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등장한다.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WCC 회원교단으로서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 정신으로 교계의 연합사업에 동참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와 그 활동들도 한국에 조금씩 소개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일부 신학생들 사이에서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박 박사의 사표를 두고 에큐메니컬 진영의 음모라는 등 엉뚱하게도 에큐와 복음주의 진영 간 싸움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이 사태를 통해 한국 장로교를 분열시킨 주범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맹신과 무지, 그리고 욕심이다. 인간 사고체계 중 하나로 사물을 직관적으로 판단해버리는 습성이 있다. 사람의 오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모두 사실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 버리는 태도다. 즉 사람이 만든 교리를 성경 말씀 이상으로 맹신하고 있다는 말이다. 욕심에서 비롯된 주장이나 견해를 맹종하는 것 또한 큰 문제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조금 다른 점이 있어도 용납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의 판단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용인하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아직도 장로교단의 분파가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마다 품고 있는 '정통주의'를 성경보다도 우월한 위치에 두고 그 잣대에 안 맞으면 배척하고 따로 일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1959년에 장로교가 통합총회와 합동총회로 갈라진 사실이 대표적이다. 교단이 둘로 쪼개지면서 그해 가을 신학교 또한 총회신학교(현 총신대)와 장로회신학교(현 장신대)로 갈라졌다. 장로회신학교는 1959년 말, 대광학교로 잠시 옮겼다가 1961년 현재의 서울 광장동 신축교사로 이사했다.
하지만 앞서 모든 집기와 문서는 총회신학교 측으로 실려 갔다. 가장 중요한 학적부도 그쪽으로 가버렸다. 따라서 성적표를 작성해야 하는 우리 쪽(장신대) 학생과 교수들은 총회신학교에 가서 관련 서류를 받아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장로회신학교 학생과장을 맡고 있던 나에게 연락이 왔다. 총회신학교 사무장인 K집사였다. 한때 옆집에 살던 이웃으로 가깝게 지내던 분이었다. 그가 만나자고 했다. 서울 반도호텔에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던 중에 그가 어려운 형편에 처한 얘기를 들었다. 지인의 선거운동을 돕다가 빚더미에 앉았다는 것. 빚은 17만원 정도였다. 나는 덜컥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그 당시 내가 월급을 2곳(장신대·대한성서공회)에서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물었다. "목사님, 저에게 무언가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선의로 돕겠다는 겁니다."
"목사님, 사실은 신학교 학적부가 제 집에 보관돼 있습니다. 그건 장로회신학교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박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주시면 받지요."
그리고 학적부를 받을 날짜와 장소를 정한 다음 헤어졌다. 나는 곧바로 신학교로 달려가서 당시 학장이었던 계일승 박사와 사무장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그들은 숙고 끝에 학교가 책임지고 17만원을 마련키로 했다고 알려줬다. 학적부를 받기로 한 전날 밤, 계 학장과 사무장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 돈을 내놓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화가 났다. '나 단독으로라도 감행해야겠구나'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그날 밤중에 옆집 처형 댁을 찾아가 17만원을 월 5부 이자로 빌렸다. 그렇게 해서 학적부는 장신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일 때문에 집을 팔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11) 신약성경 새번역 작업과 '기독공보 筆禍사건
신학교 학적부를 되찾고 나서 매월 이자를 납부하고 있던 때였다. 그 고충을 알아준 분이 권세열(Francis Kinsler·미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였다. 내 사정을 알게 된 그는 우선 원금을 갚으라며 돈을 빌려줬다. 권 선교사에게는 이자 없이 원금만 내 월급에서 조금씩 갚아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박봉 탓에 원금 상환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약 2년쯤 지나서 권 선교사는 돈을 빨리 좀 갚아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급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 동교동 집을 팔아 빚을 갚은 뒤 서울 주자동에 방 한 칸짜리 전세를 얻었다.
당시 성경번역 작업을 하던 나로서는 종로에 있는 대한성서공회에 출근하기가 오히려 편리한 곳이었다. 성서공회는 당시 신약 새번역 작업을 계획하고 나를 전문 초역자(初譯者)로 발탁했다. 초역에만 4년이 걸렸다.
신약성경 새번역 작업은 시련과 열매를 동시에 가져다준 과정이기도 했다. 번역 작업을 앞두고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①쉬운 현대말로 번역한다, ②기존에 표기되어 있던 '인자(人子)'를 '사람의 아들'로 고친다, ③예수님의 말씀을 '해라'조가 아닌, 보통 사람의 말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보통 인간의 말을 하셨을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말투로 고쳐 표현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 내용이 교단 신문인 기독공보에 실리자 발칵 뒤집혔다. 1961년 장로교 총회석상에서 한 총대 목사가 들고 일어나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기독공보 필화(筆禍)사건'은 장로회 신학교 내부에까지 나에 대한 찬반 논란을 야기했다. 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격렬한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이 때문에 나는 1년 동안 장신대 교단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정직 기간은 또 다른 열매를 맺는 시기이기도 했다. 성서공회 성경번역 초역 및 번역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서 신약성경 헬라어 교본을 만들었다. 이것은 '헬라어-한글사전'을 만드는 계기로 이어졌다.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시도하지 못했던 작업들이었다. 이뿐 아니라 신약성서 개론과 신약성서신학 등 교과서 집필까지 할 수 있었다.
성서공회의 성서번역 작업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68년 즈음에는 한국천주교회의 요구를 받아 성서공동번역 작업에도 참여했다. 개신교 대표로 참여했던 나는 신약성경 번역을 맡았다.
이에 앞서 1966년 가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신학을 알면 알수록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신·구약 성경 중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해야겠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도 요구될 것 같았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다시 나를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 프린스턴 신학교로 보내줬다. 1년 만에 석사학위를, 윗워드(Whitworth) 장로교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나 홀로' 유학시절, 한국에 있던 맏아들 때문에 아내의 마음고생이 심했다. 아들의 예상치 못한 탈선 때문이었다. 내가 귀국한 뒤 결국 우리 부부는 고민 끝에 인도네시아 선교사를 지망했다. 1948년부터 23년 동안 섬겨왔던 장로회신학교를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과 더불어 군 입대를 앞둔 맏아들의 자립과 회복을 위해서였다. 그를 한국에 남겨두고 떠난 때가 1971년 9월. '인도네시아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떠났지만 3년 만에 귀국을 하고 말았다. 당시 장로회신학교 학장이었던 이종성 박사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12) "신학생이 너무 많다" 장신대 정원감축 단행
이종성 학장의 요청으로 다시 장로회신학교에 몸담은 건 1974년 9월. 교무처장과 교학처장, 대학원장 등을 거쳐 학장을 맡은 뒤 다시 교수로 1년반 동안 모교를 섬겼으니 장신대는 나의 평생 직장이나 다름없다.
1983년 5월부터 4년 동안 학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단연 학생 정원을 감축한 일이다. 한국장로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는 목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는 1959년 계일승 학장 시절에 "신학생이 너무 많기 때문에 10년간 신학교 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학장 시절, 장신대 대학부 신학과 입학 정원은 230명이었다.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걱정이 가득했다. 우선 입학 정원을 절반으로 줄였다. 일간신문 등에 관련 기사가 나고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뒤이어 대학부 신학과 입학 정원을 50명으로 줄였고, 그 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한 가지는 교수 석좌제다. 이 역시 학생 정원 감축 문제와 연관돼 있다. 학생 주머니를 털어 학교 재정을 운영하려니까 신학교는 불가불 입학 정원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수입원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교수 석좌제다. 서울 영락교회와 새문안교회 등이 호응했다. 하지만 지방의 많은 교회 목회자들은 여전히 목사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고했다.
신학교가 많은 이유는 뭘까. 현재 한국에는 200개 가까운 신학교가 있다고 한다. 이들 신학교에서 매년 수천명의 목사 후보생이 쏟아져나온다. 그리고 거의 다 목사가 된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임지(任地)가 없는 사실상 무직 목사인데도 신학교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신입생 유치 경쟁에 매달리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것은 신학교 운영 목적이 양질의 목사 양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신학교를 경영할 수 있을까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신학생이 많아야 학교가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현상이 나타나는 근본 원인을 몇 가지 꼽을 수 있다.
교파가 분열하면서 교파마다 신학교를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교파마다 내세우는 교리와 주장이 다른 탓이다. 또한 많은 목사들이 자신이 나온 신학교 학장이나 교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어 하는 욕심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목사가 많고 신학생이 많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과연 옳을까.
이 같은 생각이 고착화된 데는 종교개혁 정신의 퇴색과 맞물려 있다고 본다.
종교개혁 정신 중 하나가 '평상생활의 거룩'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거룩하게 부름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가르치는 일로, 농사꾼은 농사일로 각자 맡은 일에 충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성직자의 일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신학의 빈곤과 왜곡이 오늘날 신학교의 위기를 가져온 게 아닐까.
장신대 학장 시절, 매년 맞는 개학식마다 신입생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신학교에 오신 것을 우선 환영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신학과 성경을 알기 위해 왔다면 대환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 목사가 될 생각으로 왔다면 재고해보십시오, 목사가 남아돕니다. 여러분의 전문 직장에서 전도를 하면 됩니다. 목사가 될 사람은 목사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학장직을 내려놓은 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호소는 여전히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고 있다. 한국 교회, 한국 신학교의 현실이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13) 한국교회에 바치는 老 신학자의 4가지 선물
1989년 정년을 맞이하면서 40년 동안 몸담았던 장신대를 떠나게 됐다. 동시에 미국을 비롯한 해외를 중심으로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 신학도들을 가르치는 일이기에 해외 신학교가 주된 일터가 됐다.
미국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교수(3년)를 시작으로 나성(LA) 장로회신학대 대학원장(2년6개월), 러시아 모스크바 장로회신학대 학장(5년),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 신학교 총장(3년)…. 뒤돌아보니 현역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본격적인 미국 생활이 시작된 건 88년 겨울부터다. 시카고에 도착해 맥코믹 신학교 교수 생활을 3년 정도 이어갈 무렵, LA 장로회신학교 측으로부터 곧 신설되는 대학원을 책임져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92년 초, LA로 이사를 가 강의를 시작했는데, 몸이 서너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교수가 많이 없어 이 과목 저 과목 맡겨지는 대로 모두 가르쳐야 할 형편이었다.
LA에서 생활한 지 2년 반쯤 됐을까. 한국으로부터 빅뉴스가 전해졌다. 김일성 주석이 죽었다는 것이다. 휴전선이 곧 열릴 것만 같았다.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밀려왔다. 마침 한일신학대학(현 한일장신대) 측으로부터 한국에서 제자들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래서 그 해 9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휴전선은 지금까지도 열리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고민이 줄곧 맴돌고 있었다. '한국교회를 위해 내가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였다. 궁리 끝에 한국성경연구원을 조직하기로 했다. 목사들의 설교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목사들은 무조건 대형교회를 이루려는 생각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성경 연구나 기도 시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목회학에서는 목회자 1명이 감당하는 데 적당한 성도 수는 100명 정도로 본다.
하지만 그 이상 되는 성도들을 맡다보니 목사들의 성경연구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학교에서도 성경연구방법론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들은 성경구절의 진의(眞意)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강단에 서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마디로 '바빠서 못하고 몰라서 못하는' 현실이었다.
한국성경연구원의 역할은 명확했다. 신·구약 성경학자들을 통해 설교 본문의 참뜻을 해석해 잡지로 설교자들에게 배부하는 것. 94년 11월부터 시작된 성경연구지(紙)는 13년 만인 2007년에 성경 66권의 주요 구절들을 모두 다룰 수 있었다.
평신도 성경교재를 만든 일도 은퇴 후 보람된 사역으로 기억된다. 1982년 봄, 당시만 해도 한국 교계에 평신도 성경교재는 루터교회가 만든 '벧엘성서연구'가 전부였다. 이 교재는 30개 주제를 중심으로 성경 여러 곳을 참고하면서 공부하는 교안이었다. 나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을 한 권씩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꼭 20년에 걸쳐서 완성됐다. 인쇄 작업만 남겨둔 상태다.
한 가지 더 소개하고 싶다. 한평생 성경원어를 다루는 신학자 입장에서 신약성경을 사역(私譯·개인 이름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평생소원이었던 사역 작업을 2007년 끝냈다. 한국성경연구원 사역과 평신도 성경교재 발간, 신약성경 사역은 죽기 전에 꼭 해놓고 싶었던 나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 목록 네 가지 가운데 세 개다. 나머지 하나는 현재 준비 중인 자서전 쓰기다. 나이 아흔이 넘도록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게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14) 목회자 윤리문제, 신학생 때부터 바로잡아라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줄곧 제기하는 문제가 목회자의 도덕과 윤리다. 듣기조차 민망하고 부끄러운 목사들의 추문이 매스컴을 타고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조롱 섞인 비난을 퍼붓는 것을 보면 '목사의 권위가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추락했을까' 탄식만 나올 뿐이다.
한평생 신학자로 살아온 나로서는 목사의 윤리 문제에 앞서 예비 목회자인 신학도들의 윤리 문제를 먼저 얘기하고 싶다. 서울 남산 장로회신학교 시절(1948∼1950), 의자나 책상도 없이 다다미 방에 앉아 공부했지만 소위 '커닝'이라고 불리는 시험부정행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의 임시 교사에서 강의가 이뤄지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남의 답안지를 베껴가면서 시험을 치르는 게 아닌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 통에 살아남기 위해 속이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습성이 신앙인들에게도 익숙해진 것 아닐까 해서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1954년 1차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학생들의 시험부정행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에게 적발된 학생 중에는 1년간 정학처분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한번은 졸업반 학생 200여명이 과제물을 제출했는데, 30여명 것이 똑같았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낙제 점수를 줬다.
미국 콜롬비아신학교에서 1년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1988년 가을학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기말 시험 때였는데, 학생 중 절반 가까이가 커닝을 하고 있었다. 답답하고 허탈했다. 이들이 목사가 돼 교회와 양떼들을 이끈다면 한국교회의 앞날은 어찌 되겠는가. 잘못을 저질러도 눈감아주고 쉬쉬하며 덮어버리다 이 지경까지 온 게 아닌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목회자들의 윤리적 비행도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제자 중 하나였던 K목사는 일찍 결혼하고 전담목사가 된 뒤 신학생 시절 호감을 갖고 있던 여 동창생을 전도사로 데려왔다. 둘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지저분한 소문들이 나기 시작했다. 교회의 한 집사가 보다 못해 K목사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버렸다. K목사는 이후에도 잠시 가르치던 신학교 여학생들을 농락하고, 미국 유학중 여학생과 동거하다시피 하는 등 추잡한 행동을 계속했다.
K목사의 부정은 사실 한 차례 공론화될 뻔했다. 1980년대 말 그의 비행을 잘 알고 있던 서울의 한 교회 사모님이 예배에서 순서를 맡아 교회로 찾아온 K목사를 쫓아내버렸다. 이에 K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의 당회원들이 격분해 소송을 벌이려 했는데, 비행을 들춰보아야 결국 기독교회의 망신이 아니겠느냐며 교회 어른들이 나서서 무마했다고 한다.
신학대 총장을 지낸 또 다른 K목사도 유학 시절 부도덕한 행동으로 지탄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 참하고 신실한 여학생과 사귀었는데, 미국에 유학간 뒤 변심했다. 이 여학생은 미국까지 건너갔다 낙심해서 귀국한 뒤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런데도 K목사는 죄의식이나 미안한 마음 없이 신학교 기숙사에서 현지 여학생과 문란한 생활을 계속했다. 나는 이를 직접 목격하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목회자들이 미사여구로 교인들을 많이 모으고 큰 교회를 이루었다고 해서 참된 목회라 할 수 있을까. 바리새인들의 아름답고 권위 있는 말에 미혹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던가.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 진실하지 못한 일부 목회자들이 교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현실이 서글프고 안타깝다.
***[역경의 열매] 박창환 (15) 할아버지와 아버지 순교로 이룬 '5代 목회자 가문'
지난해 손자(박범 목사)가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우리 집안이 '한국교회 최초의 5대 목회자 가정'으로 소개됐다. 문득 70여년 전 아버지(박경구 목사)가 편지로 건네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는 목사 집안이다. 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순교 소식을 구체적으로 들은 건 장신대 학장이 된 직후였다. 1983년 봄 어느 날, 한경직 목사님이 나더러 미국 애틀랜타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김영혁 박사를 만나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관련된 얘기라고 하시기에 그해 여름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김 박사는 아버지 얘기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아버지와 동향(황해도 장연) 출신인 그는 6·25 전쟁 직후 월남해 미 8군에서 노무자 감독으로 일하던 때였다고 한다. 당시 동향 출신의 노무자 중 한 명이 있었는데, 그가 해주 감옥에서 아버지 순교현장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김 박사는 그와 함께 고향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 순교 목격담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고난의 길을 자초하셨다. 교회 탄압이 심해지자, 친지들이 "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해도 아버지는 "내 양(성도)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진격 명령이 떨어진 그날 새벽, 인민군 소속 내무서원 몇 명이 주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러 교회 예배당에 오신 아버지를 체포해 해주 감옥으로 이송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몸이 찢기고 손·발가락이 부러지도록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남으로 진격하던 인민군이 퇴각할 때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을 모두 사살하고 떠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해주 감옥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민군들은 아버지의 손과 발을 칼로 토막을 내 죽였는데, 그날이 1950년 10월 15일이었다고 한다.
꼭 100년 전인 1913년, 한국 최초의 중국 선교사였던 할아버지(박태로 목사)와 고난 가운데 순교하신 아버지 뒤를 이어 내가 목사가 된 것.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들(4대)과 손자(5대)까지 목사의 길을 가게 된 데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4월 17일,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서울 광장동 장신대 세계교회협력센터에서 예장통합 교단 평북노회 임직식이 있었다. 이 자리는 우리 집안에 5대 목회자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날 아들(박호진 목사)은 "인간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목회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손자인 박범 목사는 "신앙의 좋은 전통을 전수해 준 가정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이날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는 1949년 9월 13일 나에게 보내준 엽서를 끝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아버지는 나의 장래를 걱정하시는 동시에 미래를 축복해 주시면서 엽서 말미에 가훈 얘기를 언급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는 가훈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우리집 가훈을 다시 만들어 자녀들과 가정에 전해 주었다. 내가 화선지에 먹으로 쓴 가훈이 액자로 만들어져 손녀 집에 걸려있는 것을 봤을 때 흐뭇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계셨다면 얼마나 기특해하셨을까. 우리집 가훈을 소개한다.
'성삼위 하나님만 믿고 섬기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 앞에 기쁨을 주자.'
***[역경의 열매] 박창환 (16) 한국교회 미래, 경건과 학문의 조화로움에 있다
1차 미국 유학을 마친 1950년대 중반, 서울 남산 장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무렵, 어렴풋이 나의 새로운 사명을 깨달았다. 요약을 하자면 '경건과 학문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라 하겠다. 당시 장로교단은 무조건 정통 보수 신앙만을 부르짖으며, 자신과 다른 것이면 죄다 정죄하고 이단으로 취급했다. 신학이라는 학문 연구가 발전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학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교단, 장로교회, 나아가 한국 교회에 깊이 뿌리박힌 폐쇄적인 사고와 행동을 점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싹튼 것이다. 그래서 늦더라도 꾸준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학문적으로 가르치고 소개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나의 생각이, 느림보처럼 천천히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강의와 기고문, 저서 집필 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주위로부터 여러 차례 제지와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한발 더 나아갔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단(예장통합)은 물론 한국의 많은 장로교회에 학문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발전이 아닌가. 이렇게 된 과정 속에는 미력하나마 나의 땀방울도 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나의 신앙과 신학적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 바탕은 우리 교단의 일반적 신앙인 정통 보수주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 가운데 신행일치의 삶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경건'에 '학문'이 반드시 덧입혀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의 사고방식 변천사(史)는 이렇다. 우선 나의 오관(五觀)으로 감지되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다분히 그 경지를 넘나들고 있다.
이어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낸 것처럼 표면적인 현상 속에서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의 단계도 거쳤다. 신학적으로는 정통주의 이론을 답습하면서 정통보수주의의 원칙을 견지해왔다. 그러면서 나와 다른 것들을 나의 기준으로 정죄하는 풍조와 행위에도 동참했다.
그러다가 유학 등을 통해 다른 사고의 세계를 접하면서 '우물'에서 벗어난 것 같다. '나의 것만이 아니고 남에게도 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같은 경험은 나의 과거를 뉘우치는 계기가 됐다.
이제 나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적인 입장, 즉 초극의 지혜와 능력을 갖기를 소망하고 있다. 자신만의 입장을 떠나 남의 것들과 내 것을 모두 객관적으로 놓고 볼 수 있는 지혜다. 내가 기독교 복음을 알고 성경을 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 현재 입장과 내 표준에 비춰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하나님 보시기에 엉터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이 주장하는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것.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아는 지혜가 주어지기를, 그리고 겸손하게 그 진리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오늘도 기도하고 있다.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나 자신이 이미 다 얻었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곧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매진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높은 곳으로 불러주시는 그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좇아갑니다.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것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빌 3:13∼16·박창환 사역)
***[역경의 열매] 박창환 (17·끝) 장로교와 함께 한 70년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나는 지금 경기도 양평 양자산 자락에 있는 영성수련원 '모새골'에 와 있다. 모새골은 '모두가 새로워지는 골짜기'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사방이 고요한 이곳에서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참 행복했구나. 하나님의 은혜로구나'라는 감사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나는 수재도 아니고 결코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니다. 어떤 면으로 보든지 잘난 게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오히려 남보다 뒤떨어지는 게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남보다 앞서거나 남들을 리드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대 학장을 거쳤지만 사실 배운 것도, 아는 것도 별로 없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하는 위선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를 진짜로 무언가 아는 사람으로 알고 오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학문을 주장하고 장려하는 데 남보다 뒤지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보니 진정으로 학문을 할 만한 재간도 능력도 없어서 괜스레 아는 척하고 다녔던 게 아니었는지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써주셨으니 행복한 인생을 살았노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으로 따진다면 부자로 산 것은 아니지만 한번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빈털터리인 나를 두 번씩이나 미국 유학을 보내주셨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많은 중책을 맡겨 주시면서 넘치는 사랑의 부요함을 누리게 하셨다. 일감을 주시고,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강도 챙겨주셨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내 생애를 정리할 요량으로 계획했던 몇 가지 일까지도 마무리지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아직 생명을 이어가게 하셨다. 올 초였다. '아흔 나이에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 와중에 모교인 장신대에서 강의를 부탁해왔다.
흔쾌히 수락하고 지난 3월부터 다시 강단에 섰다. 25년 만이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어서 크게 어려움도 없고, 가르치는 가운데 새로운 깨달음도 얻고 있다.
내가 맡은 과목은 신약신학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신학도라면 마지막 단계 즈음에 공부하는 과목이다.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즉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통틀어서 원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메시지를 전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나타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강의를 하면서 누리는 기쁨 중의 기쁨은 무엇보다 진리를 나누는 재미다. 하나님의 진리는 무궁한 것, 죽도록 노력해도 다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다 얻었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항상 더 깊은 진리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기회 닿을 때마다 후배, 제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이 등장한다. 동산 한가운데에 생명나무와 더불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9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악 지식의 나무'라고도 일컫는데, 우리는 선악의 나무를 분별하는 지식이 필요하다. 아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할 일이다.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도들도, 현지 목회자들도, 나아가 한국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하면서 했던 얘기를 다시 되새겨본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고 바로 전하는 것이 믿는 자의 본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