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부 심보 / 최미숙
4월은 어떤 이에게는 인생을 시작하는 의미있는 달이기도 하지만, 4.19 혁명과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아픈 달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을 유혹했던 벚꽃이 지고 나니 철쭉과 꽃잔디, 그 외 온갖 꽃들이 결혼의 계절임을 알린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청첩장이 도착한다. 코로나 19로 할까 말까 고민도 많았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의 설레임을 생각하며 육아 하던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내 결혼기념일도 4월이다.
많은 부부가 준비없이 부모가 된다. 나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가 되어 3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셋째가 태어나기 전 두 아이 키울 때 아침 출근 시간은 전쟁이었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라 학교까지 가는 버스를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 아이들을 챙겨 근처에 사는 사촌언니 집에 데려다 주고 정류장까지 빠르게 걸어도 20분이 넘게 걸린다. 아침 20분, 30분은 직장인들에게 금쪽같은 시간이다. 버스 놓치지 않으려고 날마다 마라톤을 했다. 한창 꾸미고 싶은 20대 후반에 육아에 지쳐 멋이고 뭐고 없었다. 내 한몸 건사하고 다니기도 벅찼다. 새벽에 일어나면 늦은 밤 아이가 잠들 때까지 일과는 계속되었다.
작은 애는 빨간 포대기에 업고 큰 애는 걸려서 돌아 올 때 쯤 동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모여 평상에 앉아 놀고 있다. 멀리서 보아도 그들의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측은하다는 듯 쳐다보며 수군거린다. 반찬거리라도 사서 들고 오는 날이면 피곤에 쩔어 더 쳐지곤 했는데 초라하게 보일까 봐 일부러 꼿꼿이 걸었다. 말을 섞어보지 않아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보게되는 그 시간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 시절 학교에는 ‘여교사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약간의 회비를 걷어 교장실 꽃꽂이와 인사하는데 썼던 것 같다. 또 여선생님들만 따로 1주일씩 당번을 정해 교장실과 교무실, 현관 주변 청소도 했다. 당번이 되면 30분은 일찍 출근해야 한다. 아이가 어리니 단 몇 분이라도 일찍 가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왜 여자들만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선배들이 무서워 말 한마디 못했다. 그냥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려니 했다. 심지어 옷차림까지 간섭했다. 같이 근무하는 보건선생님(그때는 양호선생님이라 불렀다)이 간편한 점퍼를 입고 왔는데 눈에 거슬렸는지 시장에나 입고 다니는 잠바떼기를 입고 왔다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옛날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근무환경이 좋아졌다. 금요일이면 많은 선생님들이 조퇴를 한다. 일이 있어 조퇴 한다는데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한번은 교감 선생님이 교실로 찾아와 다 조퇴하고 갔으니 내게도 나이스에 올려 놓고 집에 가라는 것이다. 현재 학교 풍경이다. 그런데도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육아시간을 법으로 정해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한 것은 아이를 키우며 직장에 나가는 부모에게는 단비 같은 제도다. 젊은 선생님들은 그 시간이 되면 사정 보지 않고 가 버린다. 당연한 건데 왜 내 눈에는 이기적으로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관리자들 눈치 보느라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조차 포기하고 바보처럼 살아왔던 세대라 그런 모습이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종종거리며 힘들게 육아를 했던 선배로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누리지 못해 하는 질투인지 학교 일은 제쳐두고 육아시간이라고 가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과거에 이런 제도가 있었으면 나도 그 시간을 당연하게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후배들이 그 시간을 한도 껏 이용한다고 거슬려하는 마음은 무슨 심보일까? 시집살이 당해 본 사람이 더 지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