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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후궁 元嬪洪氏의 생애와 상장례
- 淑昌宮喪草日記를 중심으로-
이 미 선*
목 차
1. 머리말
2. 元嬪洪氏의 생애와 궁중 생활
1) 가계와 어린 시절
2) 후궁 발탁과 정조와의 관계
3. 淑昌宮喪草日記와 元嬪洪氏의
상장례
1) 일기 속의 상장례 절차
2) 元嬪의 무덤·사당 조성과 궁원
혁파
4. 元嬪洪氏상장례의 성격
5. 맺음말
1. 머리말
영조·정조 대의 치세는 ‘蕩平政治’ 시대였다. 이 시기의 정국운영과 관
련해서는 각 당파의 완만한 인물들을 등용하거나 준절한 인물들을 등용
한 사실에 따라 영조 연간을 ‘완론 탕평기’, 정조 연간을 ‘준론 탕평기’
로 구분하였다.1) 정조 대의 정치사 연구는 최근까지 관심과 주목을 받
게 되었는데,2) 대체로 정치세력의 변화를 중심으로 義理蕩平, 通共策,
*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초빙교수
1) 박광용, 「조선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정조 연간
시벽당쟁론에 대한 재검토」, 한국문화 11,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0;
김경현 외, 정조와 18세기, 푸른역사, 2013.
壯勇營, 수원화성, 병오년의 喪變등에 집중되었다.
정조는 영조와 함께 조선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군주였다. 정조 초반
에는 왕권의 취약성으로 인해 反王勢力과의 권력투쟁을 통해 안정적 권
력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때 정조를 보필하여 개혁을 추진한 인물
이 바로 洪國榮이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노론의 지도자였던 김종수조차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위세는 하
늘을 찔렀다. 이후에도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 되어 권력 강화를 꾀하
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恩彦君의 아들 常溪君李憺을 앞세워 왕위계승
권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는 직․간접적으로 정조 초반의 정국 중심에
홍국영의 누이동생 원빈홍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빈홍씨는 1766년(영조 42)에 태어나서 1778년(정조 2) 후궁이 된 후
1779년(정조 3)에 사망하기까지 불과 14년간 짧은 생애를 살았다. 더구
나 그녀는 궁중에서 겨우 1년 1개월밖에 생활하지 못한 정조의 후궁이
자 왕실여성이었다. 정조는 원빈홍씨 사후에 국왕의 사친이나 왕세자,
왕세자빈에게나 적용되는 전례를 행하였다. 원빈홍씨의 시호를 ‘仁淑’으
로 부르고, 묘소를 仁明園으로 추봉하였으며 사당을 孝徽宮으로 격상시
켰고, 비문을 親製하고 御製仁淑元嬪行狀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 행
장은 弘齋全書나 기타 기록에서도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장서각
유일본이다. 국왕이 후궁의 행장을 직접 작성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인데, 이는 원빈홍씨에 대한 사랑과 홍국영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이다.
이처럼 정조의 관심과 사랑으로 그녀의 죽음을 기록한 문헌들은 비교적
2) 김정자, 「정조대 전반기의 정국동향과 정치세력의 변화(Ⅰ)」(한국학논총
37, 2012)에는 정조대 탕평에 대한 연구 성과가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 바란다. 그 이후의 연구 성과로는 김정자, 「정조대 전반기의 정국동향
과 정치세력의 변화(Ⅱ)-이재난고를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 78, 2016)
와 「정조 후반 순조 초반 정치세력과 정국의 동향-정조 16(1792)~순조 6년
(1806)을 중심으로-」(한국학논총 50, 2018), 김백철, 「정조 초반 明義錄
과 王權의 위상-만들어진 이미지와 실상의 경계」(대동문화연구 제95집,
2016) 등이 있다.
잘 남아 있다.
원빈홍씨의 상장례를 기록한 淑昌宮喪草日記와 仁淑元嬪宮禮葬儀
軌도 그녀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숙창궁상초일기는 1779년(정조 3)
에 졸서한 원빈홍씨의 예장과 관련된 기록을 모아서 편찬한 일기로, 원
빈홍씨가 5월 7일 축시에 사망한 날로부터 7월 10일에 행한 매장까지 수
록하였다. 인숙원빈궁예장의궤는 예장에 관한 의궤로, 재실작업과 관
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문헌들은 조선후기 후궁의 상장례 과정과
성격에 접근할 수 있는 요긴한 자료이기도 하지만,3) 의례의 주인공인
원빈홍씨의 삶과 죽음자체가 직․간접적으로 정조 초반의 정국 변화와
무관하지 않고 정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홍국영의 세력 구도와도 밀접
한 관계를 갖고 있다. 원빈홍씨의 죽음을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빈홍씨에 대한 연구는 정조 연간 홍국영의 정치적 역할을 설명
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 본격적인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원빈홍씨의 가계와 간택후궁이 된 이후에 궁
중 생활을 행장을 통해 살펴보고, 상장례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원빈
사후에 치뤄지는 상장례의 내용과 그 의례적 성격을 검토하고자 한다.
본고는 후궁 상장례의 사례 연구이나4) 원빈홍씨의 짧은 생애를 살펴봄
으로써 정조와의 각별한 情誼를 검토해 보고, 그녀의 죽음 이후에 시행
된 주요 의례 과정에서 정조 초반의 정국추이와 홍국영의 위세를 가늠
해 보고자 한다.
3) 후궁의 상장례에 관한 기록은 본고의 대상인 淑昌宮喪草日記(藏K2-2967)
외에 張禧嬪喪葬謄錄(藏K2-3006), 戊戌苫次日記(藏K2-2948), 顯穆綏嬪
喪葬謄錄(藏K2-3032), 嘉順宮喪葬謄錄(藏K2-2911), 慶嬪禮葬所謄錄(奎
27008), 純獻貴妃園所儀軌(藏K2-2342) 등 6명, 희빈장씨, 숙빈최씨, 원빈홍
씨, 수빈박씨, 경빈김씨, 황귀비엄씨의 자료뿐이다. 註에서 ‘藏’은 한국학중앙
연구원 장서각 소장 자료이고 ‘奎’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자료임을 미리 밝혀둔다.
4) 후궁 상장례에 관한 연구로는 이영춘의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喪葬禮-
≪戊戌苫次日記≫를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회 52, 2010)와 이현진의
「조선후기 綏嬪朴氏의 喪葬의례와 성격」(조선시대사학회 76, 2016) 등이
있다.
2. 元嬪洪氏의 생애와 궁중 생활
1) 가계와 어린 시절
원빈홍씨는 1766년(영조 42) 5월 27일 午時(11~13시)에 도성 밖인 서
울 서부 西江坊新井里近水亭(오늘날 신정동 일대)에서 洪樂春과 우봉
이씨의 딸 사이에서 1남 1녀로 태어났다.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
정에 추증된 洪履祥이 그녀의 8대조이다. 홍이상은 6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홍방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고, 차남 홍립은 첨지중추부사를 지
냈으며, 셋째 홍집은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넷째 홍영은 공조참판을 지
냈으며 다섯째와 여섯째인 홍박과 홍탁은 각기 판관과 의금부도사를 지
냈다. 홍립은 영의정을 지낸 盧守愼의 종손녀와 혼인하였고 홍영은 좌
의정을 지낸 李廷龜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정구는 임진왜란 당시 외교
적으로 큰 공을 세우기도 한 유명한 학자였다. 이정구의 외손자이자 홍
영의 아들인 洪柱元은 선조와 仁穆大妃의 딸 貞明公主의 남편 永安尉인
데, 처신이 아주 깨끗하고 충성심이 뛰어나서 국왕의 행차를 모시다가
병사하여 칭송받은 인물이었다. 원빈홍씨의 6대조가 된다. 이 가계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 집안이 洪鳳漢과 이복동생 洪麟漢의 풍산홍씨 집안이
라는 사실이다. 홍봉한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조부로,
원빈홍씨와 정조는 12촌인 셈이다.5) 곧 그의 가문은 당시 조선에서 왕
실과 연혼관계를 통해 오랫동안 서울에 근거를 두었던 명문대가였다.
원빈홍씨의 고조 洪重楷는 충주목사를 지냈고, 조부 洪昌漢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백부 洪樂純은 대과에 급제했고 숙부 洪樂彬도
진사에 입격하였으나, 홍낙춘은 원빈홍씨가 후궁이 되기 전까지 변변한
관직조차 얻지 못한 처지였다. 실제로 혜경궁 홍씨는 원빈홍씨의 부친
홍낙춘에 대해 훗날 “광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못났던 아버지 홍낙춘도
5) 혜경궁 홍씨는 洪柱元의 장남 洪萬容의 장남 洪重箕의 가계이고, 홍국영은
洪柱元의 차남 洪萬衡의 둘째 아들 洪重楷의 가계이다(洪象漢編, 豊山洪氏
族譜 1~6, 1768(영조 44), 位~移쪽, 藏MF 35-2153)
덩달아 살아났다.”고 하거나, 홍국영이 입신양명하기 전까지 사람들로부
터 무시를 당해서 이를 안 홍국영이 오랫동안 분노했었다6)고 한 데에서
부친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빈홍씨가 후궁에 최종 선발된 전
후인 1778년(정조 2) 6월에 부사과를 거쳐 호조참의에 제수되었고7) 1년
뒤에는 지중추부사로 특별히 승진되었다.8)
외가는 우봉이씨 집안으로, 知庵處士李維가 그녀의 외조부이다. 이유
는 호조참의 李有謙의 증손이자 우의정 李䎘의 손자이며, 관찰사 李晩
堅의 아들이다. 또한 그는 문정공 李縡의 사촌동생이자 문인으로, 도학
으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1655년(효종 6)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녀의 5촌 당고모는 경주김씨 金漢禧의 부인
이자 金勉柱의 어머니였다. 김면주는 영조의 계비 貞純王后와 金龜柱
남매와는 6촌간, 순조 초년의 정계 실력자였던 金觀柱와는 4촌형제였다.
영조가 홍국영을 두고 ‘나의 손자’라고 말한 것은 영조 재위 당시에 영
조, 혜경궁 홍씨, 정순왕후 김씨와 혈연으로 연결된 인척 관계였음을 보
여준다. 그녀의 가계를 도표화하면, <별첨 1>과 같다.
이 집안의 부흥은 그녀의 오빠 홍국영 때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홍국
영은 원빈홍씨가 7살 되던 해인 1772년(영조 48) 가을에 25세라는 젊은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급제한 이후 승정원 가주서를
거쳐 정조가 직접 시험을 본 翰林召試에 합격하여 청요직인 사관이 되
면서 영조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를 보좌하
는 보직을 받았던 것은 그의 출세가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774
년(영조 50) 3월에는 동궁 시강원 설서가 되었고, 1776년 3월 정조가 즉
위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승지로 임명되었다. 명의록
에 “세손의 오른쪽 날개[右翼]”라고 불렀을 정도로 정조의 충신이 된 것
이다. 실제로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따르면, 용모가 준수하고
6) 혜경궁 홍씨작·정은임 교주, 한중록, 이회문화사, 2008, 132․143쪽.
7)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2년 6월 15일(계미);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2년
6월 20일(무신).
8) 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5월 16일(기해).
수완이 좋으며, 눈치가 빨라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하면서 정조가 이런
홍국영에게 마치 애첩에 반한 것처럼 홀렸다9)고 회상했을 정도로 정조
의 무한한 신임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홍국영은 정적 洪麟漢과 鄭厚謙등
척신 세력을 숙청하여 정조가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에 이른다. 정조 즉위 초 집권 세력은 좌의정 홍인한을 비롯한 金龜
柱과 金漢祿등 외척 세력이었고, 이들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를 죽이
고 정조를 폐위시키고자 했던 자들이었다. 1775년(영조 51)에 정조가 대
리청정의 명을 받았을 때에도 그들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한 정조의 정
적이었는데, 이들을 일거에 제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조의 명령으로
간행된 명의록에도 정조는 홍국영을 자신을 보호한 '의리의 주인[義
理主人]'이라 일컬었으며, “만약 그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겠는
가!” 라고 말하면서 즉위과정을 도운 1등 공신[同德會員]이자 최측신임
을 대내외에 천명한 바 있다. 이 때문에 1776년 3월 정조 즉위 3일 만에
홍국영은 일약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10) 7월에는 승정원 최고
직인 도승지 겸 숙위대장에 특진되었다.11) 당시 숙위 대장의 직무는 궁
궐 숙위뿐만 아니라 도성 전체의 경비를 담당하고 오군영까지 총괄하는
중요한 직책이었음을 고려해볼 때 그 위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반대의 정파를 존재할 수 없게 만든 홍국영은 이후에도 경연 참찬관
을 거쳐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 이
조참판, 수어사, 금위대장, 훈련대장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모든 국사가
홍국영을 경유하여 정조에게 상달되는 구조였던 만큼 정조 초기 원빈홍
씨의 오빠 홍국영은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고, 그의 세력 내
지 집안 역시 최고의 지위와 부를 누리게 되었다. 명실상부 오빠 홍국영
은 노론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12) 이와 같은 가문 배경은 원
9) 혜경궁 홍씨작·정은임 교주, 앞의 책, 2008, 143~144쪽.
10) 정조실록 권1, 정조 즉위년 3월 13일(갑신).
11) 정조실록 권4, 정조 1년 11월 15일(정축).
12)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9, 218~221쪽.
빈홍씨가 후궁이 되는 데에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정조의 후궁이 된 원빈홍씨는 태몽부터 남달랐다. 원빈홍씨의 태몽은
어머니 우봉이씨가 꾸었다. 모친 우봉이씨가 西湖私第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해 속의 두꺼비가 떨어졌다’고 말하면서
큰 진주 한 알을 모친에게 주었고 우봉이씨가 그것을 먹었는데, 꿈을 꾼
지 몇 년 후에 원빈을 임신하였다는 것이다. 또 서호 사제의 누각으로
하늘에서 내려준 붉은 비단을 부인이 양손으로 받은 꿈을 꾼 적도 있었
다. 원빈홍씨를 출산하였을 때에는 기이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고 한다.13)
남다른 태몽을 갖고 태어난 그녀는 품행이 예의바르고, 몸가짐이 단
정한 아이였다. 세 살 때는 어른이 무엇을 주면 반드시 꿇어 앉아 두 손
으로 받았고, 네 살 때 외가 집에 따라갔을 때는 사촌들이 곁에 있으면
의복을 벗은 적이 없었다. 여러 아이들이 그녀를 좋아해서 따라 다닐 경
우, 피부를 드러내 보이게 될까봐 변소에 가려고 하지 않아 혹시라도 병
을 앓을까 염려한 모친이 서둘러 귀가했을 정도였다. 스스로 首飾을 착
용하고 치마를 입을 때는 반드시 꼭 동여매서 옷차림이 반듯하였다. 모
친이 자주 아팠는데 어린 나이에도 침식을 폐한 채 애를 태우며 근심하
였고, 모친이 잠깐 나가기라도 할 때는 의복을 때맞추어 손질해서 드렸
다.14) 이것은 모두 10살 이전의 일로, 어린 시절 원빈홍씨는 작은 어른
같았다.
요컨대 풍산홍씨 집안과 오빠 홍국영은 훗날 원빈홍씨가 후궁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더구나 이 집안이 오랫동안 왕실과 연혼
관계를 가진데다가 당시 혜경궁 홍씨 집안과 경주 김씨 집안과의 친인척
관계라는 사실은 그녀가 정조의 후궁이 될 가능성을 배가시킨 것이다.
13) “嬪之未生也母夫人嘗夢于西湖之第人謂日中蟾蜍墜下奉而授夫人夫人受而
視之卽一顆大珠也納之口而呑之後數年而有娠夢輒見瑞氣又夢駕臨西湖第內
樓上以紅錦緞自樓門卷而下之夫人立以兩手受之. 臨娩異香滿室久而不散.” 어제원빈홍씨행장(藏K2-663), 1쪽.
14) 어제원빈홍씨행장(藏K2-663), 2쪽.
2) 후궁 발탁과 정조와의 관계
3년 후인 1778년(정조 2)에 13세가 된 원빈홍씨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
다. 정조의 측근으로 정치의 중심에 있던 오빠 홍국영이 자신의 확고한
신분을 보장받고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누이를 후궁으로 들여보
낸 것이다. 이는 조정뿐만 아니라 궁궐 안에서 돕는 세력을 강화하겠다
는 의미도 있으나, 실은 왕위계승권 문제에 깊이 신경을 쓴 것이었다. 당
시 인조연간 이래 서인의 노론 세력은 “국혼물실”, 즉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기본적 입장을 지켜왔는데, 홍국영 역시 그대로 본받
았던 것이다. 후궁 선발의 명분은 정조와 왕비 효의왕후 김씨와의 사이
에서 원자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영조의 3년 상이 끝난 1778년(정조 2)
5월에 결국 왕대비 정순왕후는 아래와 같이 빈어를 들이라는 언서를 내
리게 된다.
(언서) 4백년이 된 종사의 의탁이 오직 주상의 몸 하나에 달려있는데,
춘추가 거의 30에 가까워졌는데도 지금까지 오히려 종사의 경사가 늦어
지고 있다. (중략) 불행하게도 중전에게 병이 생겨 嗣續에 있어서 이제
는 가망이 없게 되었다. (중략) 대궐 안에 있는 궁인을 어찌 많지 않다
고 하겠는가마는, 주상의 본래 聖念이 미천한 처지의 사람에게는 마음
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고 보면 당면한 지금의 도리가 옛날 사람들
이 하던 의리를 본받고 우리 국조의 고사대로 준수하여, 사족들 중에서
幽閑貞靜한 처자를 간택하여 빈어의 자리에 있게 한다면, 삼종의 혈통
을 이어가게 되는 방도가 오직 이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15)
위 인용문에서 정순왕후는 중전에게 지병이 있어 원자를 생산할 수
없다는 점을 언급한 후 정조가 미천한 신분의 여성에게는 마음을 두지
15) 정조실록 권5, 정조 2년 5월 2일(신유).
혜경궁홍씨가 쓴 한중록에서는 이 일을 두고 홍국영이 대비를 시켜서 하
교를 내리게 했다고 적고 있다(혜경궁 홍씨작·정은임 교주, 앞의 책, 2008,
147~148쪽).
않으려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족의 딸을 후궁으로 들일 것을 명하
였다. 정순왕후가 중전이 후사를 생산할 수 없음을 공표한 일은 정조의
동의 없이 홀로 내린 결정이었다.16) 효의왕후에게 지병이 있어 원자를
생산할 수 없다는 논리는 후궁을 간택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는데, 이
런 이유로 당시 중전 효의왕후의 입장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
에 효의왕후의 친척인 金峙黙은 이 교서에 반발하여 함부로 병이라고
단정 짓지 말라는 상소문까지 올리는 일이 발생하였다.17)
김치묵의 불만 섞인 상소문에도 불구하고 1778년(정조 2) 6월에 19명
의 처자가 초간택에 참여한 가운데 원빈홍씨와 함께 좌랑 金在鎭과 정
랑 沈豊之의 딸이 선발되었다.18) 이틀 뒤 재간택에서 그녀는 김재진의
딸과 함께 뽑혔고,19) 6월 21일 최종적으로 후궁에 간선되었으며, 6일 뒤
에 선정전에서 가례를 행하였다.20) 이때 뽑힌 원빈홍씨는 원빈의 작호
와 함께 淑昌의 궁호를 받았는데,21) 이로써 조선시대 역사상 최초로 처
음부터 정1품 빈이 되었다.
원빈홍씨를 최종 간선한 것은 물론 국왕과 자전·자궁의 하교에 의한
것이지만 홍국영은 효의왕후 김씨에게 복병이 있다는 자교를 내게 하여
이를 명분으로 廣儲嗣의 하교를 유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원빈
홍씨의 간택은 홍국영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래 행장의 내용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16) 박광용, 앞의 책, 2009, 128쪽.
17) 정조실록 권9, 정조 4년 4월 14일(임술).
18)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2년 6월 13일(신축); 일성록 정조 2년 6월 13일
(기축).
19) 일성록 정조 2년 6월 15일(계묘).
20) 정조실록 권5, 정조 2년 6월 27일(을묘). 이러한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일
성록에서는 ‘3일이 지난 을묘일에 창덕궁 정전에서 가례를 행하고, 6월 21
일 삼간택에서 뽑힌 원빈은 별궁에 곧바로 갔으며, 같은 날에 선정전에서
납채를 거행하였고, 6월 24일에 납폐와 책빈, 6월 27일에는 조현례를 거행
하였다(일성록 정조 2년 6월 15일(계묘)’고 기록하였다.
21) 정조실록 권5, 정조 2년 6월 21일(기유); 일성록 정조 2년 6월 21일(기유
재간택 하는 날에 이르러서 자전께서 환후가 심해져서 어전에 임어
할 수 없었기에 침소에 임어하여 궁인의 부축을 받으며 앉아 발을 사이
에 두고 만나보셨다. 원빈을 볼 때에 미쳐서 용모와 몸가짐이 단정하고
여유가 있으며 덕성이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발을 걷
어 올리고 앞으로 다가오게 한 다음 어루만지며 좋아했다. 집으로 되돌
아갔을 때 집안사람들이 모두 분주히 허둥거렸지만, 원빈은 침착하게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삼간택 전날 저녁에 노복들이 모두 이별을 고했지만, 또한 그들을 찾
아보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다시 사저로 돌
아오지 못할 것을 아직 모르는가?’ 했지만, 이윽고 모부인 곁에 있으면
서 말하길, “정동 큰집의 사당에 어찌 다시 배알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도량이 헤아릴 수 없
을 정도로 깊고 깊어서 그러하였던 것이다.22)
위 인용문은 재간택에 벌어진 내정자에 대한 왕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내용에서 “삼간택 전날 저녁에 노복들이 모두 이별을 고했지
만” 또는 “다시 사저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직 모르는가?”고 공공연하
게 말하였는데, 이로 보아도 삼간택이 끝나기 전에 벌써 내정되어 있었
음을 대변해 준다. 실제로 정조는 초간택 이후 홍국영을 만난 자리에서
원빈의 덕용이 남달리 뛰어나다고 말한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의 말을
빗대어 은연중 그녀가 간택될 것이라는 사실을 내비치고 있다.23) 이처
럼 원빈홍씨가 후궁이 된 데에는 오빠 홍국영의 역할과 입김, 그를 신뢰
하던 정조의 정치적 결정이 크게 작용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입궁한 원빈홍씨는 여러 명의 왕실 여성들을 모셔야 했
다. 그녀가 입궁할 당시 궁궐 안에는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22) “至再揀日慈殿患候添加不得臨殿御寢所扶宮人坐隔簾而見之及見嬪容儀
整暇德性溫粹不覺捲簾而近前撫愛之及還第家人上下擧皆奔遑嬪晏然若
不知也三揀前日夕奴僕皆告辭而亦不之省家人意謂未諳不復還私第矣已
而在母夫人傍而言曰貞洞大家祠宇安得更拜以此推之非不知也器量沈深
若不可測而然也.” 어제원빈홍씨행장(藏K2-663), 2~3쪽.
23)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2년 6월 13일(신축).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 그리고 왕비 효의왕후 김씨가 있었다. 자신보다
12살이나 많은 효의왕후를 얕볼 수는 없었으나 가문 배경과 실세 오빠
의 존재로 효의왕후의 위세에 눌리지 않았다. 이는 원빈홍씨가 입궐한
이후에 중궁전에 알현하지 않은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그녀의 위
상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효의왕후의 위상이 위태로울 지경이
었다. 당시 효의왕후는 원자를 낳지 못한 처지에 가까운 인척들 대부분
이 殺洪論에 관여한 죄로 폐출되었고, 별궁에 머무르며 정조에게 進御
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24)
원빈홍씨는 신중하고 총명했다. 정조가 손수 쓴 행장에는 간택과정에
서 보여준 원빈홍씨의 태도와 몸가짐을 엿볼 수 있는데, 초간택에서 후
보자로 입궁한 그녀의 행동과 용모, 예절이 법도에 맞아 그녀를 본 궁중
사람들이 가마에서 내릴 때부터 앞다투어 사모하면서 뒤쫓아 따랐다25)
고 정조가 회상할 정도로 예의범절이 몸에 밴 조숙한 아이였다. 정조는
원빈홍씨가 지혜롭고 당찬 성격이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기록하
였는데, 당시 왕실에서는 삼간택이 끝난 최종 예비 후보자에게 그 적절
성을 검증하기 위해 궁중 제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을 던졌
다. 이때 원빈홍씨가 그 자리에서 말투와 표정에 큰 변화 없이 거만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답했다는 것이다.26)
타고난 총명한 기질과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예의바른 언행 때문에
그녀는 14살이 많은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둘 사이
에 금슬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조가 하루에도 한두 번씩 원빈
24) 황윤석, 頤齋亂藁 권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132쪽.
25) “嬪初膺揀選動容折旋無不中度宮中人見者不知爲誰家處子而自下轎時爭
先慕悅而趨附之隨以相語曰異哉異哉誰家處子如是夙就乎塡咽環擁辟之
不散老宮人以爲自是時人情己可見云.” 어제원빈홍씨행장(藏K2-663), 2
쪽.
26) “宮中古事三揀禮畢後宮人左右環侍加盛粧備禮服又詰以難對之語作爲覘
驗之端探試百方雖嫺於宮制者鮮不失措嬪終不露辭色亦不自矜尊左右莫
得以窺其際慈殿慈宮大加稱道及向殿宮拜禮訖又命賜飯饌溫雅閑靚不見
羞澁之色進退周旋但有敬愼之容是日儀節甚繁而輒皆鑿鑿中禮老宮人以
爲罕見云.” 어제원빈홍씨행장(藏K2-663), 3쪽
홍씨의 처소를 자주 찾아갔던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행장에 따르면,
정조가 원빈홍씨의 처소를 찾아갈 때마다 어린 나이에 법도에 맞게 행
동했고 간혹 바쁜 일정으로 늦어지거나 찾아가지 못할 때에는 한밤중이
라도 의복을 풀지 않고 늦은 밤까지 기다렸다가 내관이 전갈을 주어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27)
원빈홍씨의 반듯한 품행은 정순왕후, 혜경궁 홍씨 등 왕실 웃어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혜경궁 홍씨가 병든 원빈홍씨의 문안인사
를 만류하였을 때, “한가히 지내는 것이 더 편안한 줄을 모르니, 가서 모
시는 것만 못하다”28)고 궁인에게 말하면서 문안인사를 드렸다. 심지어
종기 증세가 심했을 때에도 왕실 웃어른에게 드리는 문안을 그만두지
않아 늙은 궁인이 만류했을 정도였다. 특히 원빈홍씨는 실질적인 시어
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더욱 애틋했다. 가례가 끝나고 어머니와 헤어진
후에 혜경궁 홍씨로부터 위로를 받은 원빈홍씨는 홍봉한과 한산이씨의
병환에 노심초사하는 혜경궁 홍씨 곁을 묵묵히 지켜주었고, 1778년(정
조 2) 12월, 홍봉한의 喪事때에도 턱 밑에 생긴 큰 종기로 인해 아픈 몸
이었지만, 지극정성으로 혜경궁 홍씨를 위로하였다.29) 이 때문에 혜경궁
홍씨로부터 두터운 신임과 총애를 받았고,30) 죽기 전까지 혜경궁 홍씨
27) “予入內則輒避席而不肯倂坐雖强之終不廳予亦敬憚之雖夜必整冠束帶而
後入入內亦罕日或一往或再往不但相對如賓之義誠以奇嬪特異有所畏惜
而然也予或悤擾至夜深未入而嬪未嘗解衣帶明燭經宵困甚則但端坐假寐
予近始知之如不暇入則必使中官告以不入來之故然後始就寢云.” 어제원
빈홍씨행장(藏K2-663), 5쪽.
28) “每朝盥櫛輒欲來侍而余爲其便息使之勿來言于宮人曰不知燕處之益便莫
如往侍之爲好來必自朝至暮拱手端坐不移其席.” 어제원빈홍씨행장(藏
K2-663), 8쪽.
29) 어제원빈홍씨행장(藏K2-663), 5쪽; 8~9쪽.
30) 혜경궁이 정조 사후에 지은 한중록에서는 홍국영이 원빈을 후궁으로 들
여보낸 일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서술하였고(혜경궁 홍씨 작·정은임
교주, 앞의 책, 2008, 147~148쪽), 순조실록에서는 원빈에 대한 각별한
정의를 지녔던 혐의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순
조실록 권19, 순조 16년 1월 21일(신축). [혜경궁 지문]). 홍국영 일가에서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숙창궁입궐일기에서도 혜경궁 홍씨가 효의왕후 쪽
인 인상을 준다. 본고는 정조가 지은 어제인숙원빈행장의 내용을 따랐다.
와 동고동락하며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성격이 조용하면서도 당찬 성격이었다. 언제나 말없이 꼼짝하
지 않고 단정하게 바른 자세로 앉아만 있어서 측근 궁인들이 항상 걱정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혜경궁 홍씨가 정조에게 “나는 원빈이 혹시 처음
이라 지나치게 부끄럽거나 어색해서 그런가 하고 여겼는데, 일 년을 하
루같이 잠시도 다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공경하고 조심하는 뜻이
날이 갈수록 더합니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터득한 천성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겠습니까.”31)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때론 자기주장이 강하고 소신 있는 행동의 소유자였다. 자신
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늙은 궁인이 수백 번을 요청하여도 자
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원빈 자신에게 아첨하는 궁인의 말에 대해
서는 얼굴을 정색하고 대답하지 않아 늙은 궁인을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홍국영의 위세와 최고의 가문을 친정으로 둔 여성으로서 자신감
있는 의연하고도 기품 있는 모습을 보여준 듯하다.
특히 원빈홍씨에 대해 정조는 ‘여자 성인[聖女] 또는 현명한 여자[哲
婦]라고 평하였는데,32) 정조가 남긴 그녀의 행장을 통해 대략적으로 그
녀의 성품이 지혜롭고 조심스러운 품행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것은 원빈홍씨의 죽음을 다루는 정조실록의 기록이나 순조실록 등
의 원빈 관련 기록에서 사관들 대부분이 홍국영에 대한 비난과 부정적
인 평가를 내린 것과는 달리33) 원빈홍씨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도 남기
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윤색되거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
31) “慈宮始知嬪天性然也謂予小子曰余謂嬪或始至羞澁而然周歲如一日雖分寸
之間未嘗見其少異但齋遫畏愼之意日加一日苟非生知之姿安有是也以至
僕御之賤亦莫不傳誦稱道以爲初見云.” 어제원빈홍씨행장(藏K2-663), 4쪽.
32) “柔而不至於愞寬而不至於流不言而服不嚴而尊德性渾然春煦而秋肅古所
稱聖女哲婦何限未及加筓之歲而備有妊姒之德者獨於嬪見之.” 어제원빈
홍씨행장(藏K2-663), 10~11쪽.
33) 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5월 7일(경인); 정조실록 권9, 정조 4년 2월 29
일(무인); 정조실록 권11, 정조 5년 5월 2일(임진); 순조실록 권19, 순조
16년 1월 21일(신축).
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화완옹주와 정후겸 母子에 대
한 인물 평가에서 “그런 아들과 그런 어미”34)라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정조실록의 사관들이 유독 원빈홍씨에 대해서만큼은 욕하거나 비난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원빈홍씨는 오빠의 권세 덕분에 후궁
의 자리에 올랐지만, 오빠를 뒷배경에 힘입어 비난을 살 만큼 나쁘게 굴
지도 오만한 행동을 저지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淑昌宮喪草日記와 元嬪洪氏의 상장례
1) 일기 속의 상장례 절차
본 책의 일기 부분은 원빈홍씨가 사망한 1779년(정조 3) 5월 7일에 시
작하여 오우제 이후 원소에 매안한 7월 10일에 끝나고 있다. 약 두 달간
의 기록이다. 이제부터 본서에 기록된 원빈홍씨의 상장례 과정을 살펴
보기로 한다.
원빈홍씨는 1779년(정조 3) 5월 7일 丑時(오전 1~3시)에 昌德宮養心
閤에서 졸서했다.35) 당시 그녀의 나이 겨우 14살이었고, 정조가 28세 되
던 해였다. 행장에 따르면, 작년 겨울부터 종기가 여러 번 발병하여 차
도를 보이지 않은데다가 증세가 갈수록 심해져 죽기 전 한 달 전부터 그
환후의 통증이 더욱 심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앓고 있던 병이 없었
으므로, 종기가 죽음의 원인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아래 기록은 원빈
홍씨의 병상과 임종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잘 보여준다.
원빈은 어려서부터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작년 겨울 이후로 종기 증
세가 이상하였으되 거의 종기를 앓지 않는 달이 없었다. 매우 위태롭게
34) 정조실록 권1, 정조 즉위년 3월 25일(병신).
35)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초7일<薨逝>; 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5월 7
일(경인); 일성록 정조 3년 5월 7일(경인).
되어서 종기를 따고 나면 회복되었다가 다시 앓곤 했는데, 마침내 이 지
경에 이르고 말았다. 괴이하도다. 종기가 났을 때, 그 뿌리가 매우 커서
사람들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원빈은 끝내 종기 난 곳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또 비스듬히 서고 기대거나 신음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자궁께서 가서 보았을 때 원빈은 일어나서 맞이하고
절을 올리고 꿇어앉았으되, 병이 들지 않았을 때와 다름이 없으므로 자
궁께서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지난 달 그믐부터 병세가 점점 더 위독해졌는데, 초6일 밤에 이르러
서는 오히려 정좌하고 의관을 단정히 차렸으며, 내가 들어가면 반드시
일어나서 공수했다. 7일 새벽에 병세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황
급하게 들어가 보니 원빈은 부축을 받고 앉아있었는데, 얼핏 보니 편안
하지 못한 기색이 있었다. 내가 “아프지 않느냐?” 물어보니 원빈은 “예”
라고 대답했고, 말소리가 그치자 숨이 끊어졌다. 운명함에 이르러서 조
금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이로써 숨이 다한 줄도 모르고 오히려 침
을 놓으라고 명했다. 아아, 이 어찌 보통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인
가.36)
원빈홍씨는 위 인용문에서 살펴보듯이 전년 겨울부터 발병한 종기를
치유하지 못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간 정조의 앞에서 앉아 있
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직후 혼을 부르는 招魂의 절차를 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일
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5월 초7일 未時(오후 1~3시)에 죽은 이의 시신
을 沐浴시키고, 곧 바로 수의를 입히는 襲절차를 행한 뒤 襲奠을 올렸
다. 이날 원빈의 예장을 담당할 예장·원소·빈궁혼궁 도감을 설치하도록
36) “嬪自兒時素無疾 昨冬以後腫症乖常幾乎無月不作濱危而破腫旣蘇而復
痛竟至于今怪哉腫時核甚大人所不堪而嬪終不以腫處見于予亦未嘗以跛
倚呻噤之容見之於人及慈宮往見之嬪起迎拜跪無異不病之時慈宮大奇之
自去月晦病勢轉篤以至初六日夜猶危坐整襟予入則必起立拱手七日曉聞
疾亟予蒼黃入見則嬪端拱扶坐微視之有不自安之色予問曰痛否嬪對曰唯
聲已而絶至奄逝少無動容以是不知其垂盡猶令試鍼鳴呼此豈凡人所能爲
者哉.” 어제원빈홍씨행장(藏K2-663), 5쪽.
하였다.37) 원빈의 상장 전반을 책임지는 예장도감의 도제조는 영의정
金尙喆로 하고, 제조는 호조판서 金華鎭, 공조판서 鄭好仁, 예조판서 鄭
光漢, 공조판서 韓光會, 도청은 金文鐸, 낭청은 南述毅, 徐直修, 申光鼎,
尹昌胤등으로 결정하였다. 다음으로 임시로 설치된 靈座의 오른쪽에
죽은 사람을 깃발로 표시하는 銘旌을 마련하였는데, 명정에 쓰는 방식
은 신미년(1751년, 영조 27) 효장세자빈의 상장례에 의거해서 隸書로 ‘元
嬪梓室’로 썼다.38) 대상에는 篆字, 소상에서는 隸字로 쓴다는 國朝喪禮
補編의 규정을 지킨 것이다.39)
다음 날인 5월 초8일 子時(오후 11~오전 1시)에 옷과 이불로 시신을
두르고 메우는 小斂을 2일째 되는 날에 거행한 후 小殮奠을 올렸다. 이
날 예조에서 단자를 올렸는데, 숙창궁 소속 여관들이 成服할 때 입을 服
制를 상례보편과 효장세자빈 때 행한 예를 따라 마련하도록 하였
다.40)
3일째 되는 5월 초9일 辰時(오전 7~9시)에 대렴을 거행하고, 4일째
되는 5월 초10일 진시에 有服者들이 상복을 입는 성복을 거행하였다. 성
복할 때 신미년의 예대로 대궐 안에 있는 백관들은 엷은 옥색의 淺淡服
을 입고 빈궁 밖에서 會哭했고 퇴직 관료인 罷散官과 성균관 관학유생
들은 소복을 입고 문 밖에서 회곡했는데,41) 이때 五上司에서는 향을 피
웠다. 오상사는 상급 관청인 의정부, 돈녕부, 의빈부, 충훈부, 중추부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 날에 중요한 논의가 있었는데, 정조가 후궁인 원빈을 위해 어떤 상
복을 입을 것인지에 대한 복제 논의였다. 당시 국가전례서에는 국왕이
빈을 위해 입어야 할 복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근거할 만
37)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7일<停朝市>; <設都監>.
38)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7일<銘旌式>;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5
월 7일(신묘)[경인]; 일성록 정조 3년 5월 7일(경인).
39)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국조상례보편, 「銘旌」, 민속원, 129쪽.
40)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초8일<當宮所屬服制>.
41)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초8일<第四日成服百官以下會哭>; 승정원일
기 79책, 정조 3년 5월 8일(임진)[신묘]; 일성록 정조 3년 5월 8일(신묘
한 문헌이 없었다. 1752년(영조 28) 국조상례보편이 편찬된 이후에도
국왕과 왕후, 세자나 세자빈 등을 제외한 왕실구성원의 상장 의식은 수
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예조판서 鄭光漢은 “周禮의 춘관에
‘왕은 삼공·육경을 위해서 錫衰를 입고, 사부·사를 위해서는 疑衰를 입는
다.’고 했고, 그 주에도 ‘이것은 임금이 신하를 위한 복이다. 임금이 오히
려 신하를 위하여 입었는데, 하물며 품계를 초월한 빈에 있어서랴?’ 하
였습니다. 또 大明集禮에 ‘황태자가 양제를 위하여 거애하고 하루에
세 번 곡하였다가 그친다.’ 하였고, 이어서 ‘만약 본래 기년복을 입는 자
는 하루에 세 번 곡하였다가 그친다.’ 하였습니다.”고 주례와 開元禮
를 인용하면서 복제와 공제가 함께 마련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좌의
정 徐命善과 영중추부사 李溵, 행판중추부사 鄭弘淳의 견해도 정광한의
의견과 같았다.42) 이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정조는 다음날인
11일에 결정된 일이지만 도승지 홍국영의 의견에 따라 복제와 ‘以日易
月’의 제도를 적용하는 공제를 거행하지 않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43)
국왕 순조의 사친인 수빈박씨의 상에 순조가 純元王后와 함께 3개월 시
마복을 입었던 경우와 달리44) 원빈홍씨의 상에 정조는 無服이었다.
다음으로 11일부터 시작되는 재실에 덧칠[加漆]을 시작해서 15일에
합목한 후 이안하여 20번 가칠하였다. 재실의 덧칠은 상례보편과 신
미등록의 예에 따라 30회[度]에 준하도록 한 것이다. 정조는 이때 재실
을 가장 좋은 것으로 마련하고 칠 작업에 장생전 제조와 본도감 당상이
감독하도록 지시하는 등 원빈홍씨의 장례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45)
이날 원빈홍씨의 신주를 만들고 시신을 봉안할 빈궁의 처소를 경희궁
爲善堂으로 정했다.46) 正名의 의리상 후궁의 경우 빈궁 처소를 대내에
42)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초10일<服制收議>; 일성록 정조 3년 5월 10
일(계사); 일성록 정조 3년 6월 2일(갑인).
43)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11일<服制置之擧條>; 승정원일기 79책, 정
조 3년 5월 10일(갑오)[계사].
44) 이현진, 앞의 논문, 2016, 175쪽.
45)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15일<外梓室合木畢役>; 인숙원빈궁예장의궤
(藏K2-2998);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5월 15일(무술).
마련하는 것이 후궁의 분수를 넘은 지나친 踰禮임에도 정조는 대내에
원빈의 빈궁을 설치했다. 이는 정조가 원빈홍씨의 위상을 높여주는 동
시에 홍국영의 권세를 엿볼 수 있다.
성복한 다음날인 5월 11일에 몇 가지 일이 생겼다. 사신과 外官들은
조정에서 보낸 원빈홍씨의 상에 관한 공문이 도착하는 날에 그 즉시 천
담복으로 바꾸어 입고, 각자 그곳의 정청에다 향탁을 설치한 후 망곡하
고, 연변의 관원만은 거애하지 않도록 하였다.47) 그리고 외관들이 진위
하는 箋文을 보내도록 했다. 5월 12일 예조에서 상례보편 「진향조」의
소내상을 참조하여 원빈의 혼궁에 의정부, 종친부, 충훈부가 진향할 것
을 정조에게 아뢰었다.48)
5월 13일은 원빈홍씨가 사망한 지 7일째 되는 날이다. 이날 원소도감
당상 판돈령부사 具善復등은 관상감 상지관 安思彦, 택일관 姜熙輔등
과 함께 산지를 간심하고 돌아와 묏자리에 대해 논의한 후 금년에 亥坐
가 이롭고 7월이 좋은 달이라는 의견을 별단에 써서 정조에게 올렸다.49)
이를 보고받은 정조는 5월 15일에 신미년의 등록대로 발인과 반우할 때
의 절목을 마련하라고 명하였다.50)
그로부터 26일까지 원빈홍씨의 묏자리가 최종 결정됨에 따라 원소에
서 거행하는 각 의절의 택일, 정자각·재실의 再基·定礎·入柱·上樑의 택
일, 開金井때와 발인 때에 승지 진참 여부, 시호 습의 생략, 발인 때 종
친 및 백관과 재추의 奉辭, 정자각 상량문 제술, 발인·반우·입묘 때에 차
비관 차출, 賜諡때 正使차출 등을 논의 혹은 결정했다. 각 의절이 결정
되는 동안, 16일 진시에는 시책·시인을 대내로 들이는 內入과 17일 진시
46)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초11일<神主造成處所>;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5월 13일(정유)[병신]; 일성록 정조 3년 5월 13일(병신).
47)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11일<外邑望哭沿邊官不爲擧哀>.
48)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5월 12일(병신)[을미]; 일성록 정조 3년 5월
12일(을미).
49)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13일<別單>.
50)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5월 15일(무술); 일성록 정조 3년 5월 15일
(무술).
에는 대내에서 내주는 內出절차를 거행하였고 곧이어 午時(오전 11~
오후 1시)에는 빈궁에 시호를 올려주었다.51)
6월 초1일은 혜경궁 홍씨의 생신날이었으나 원빈홍씨의 상장 준비로
인해 전례대로 진하하지 못하였다.52) 이날 정조는 원빈홍씨의 사당과
무덤의 칭호 및 조성 형태에 대해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황조전례에 황
후는 능, 황비는 원, 태자빈은 묘라 칭한다는 영의정 金尙喆의 의견에 쫓
아 정조는 廟와 墓가 아닌 宮과 園으로 결정하였다.53) 뒤이어 궁호는 물
망에 오른 孝徽, 孝貞, 端徽중에서 ‘효휘’로, 원호는 仁明, 昭德, 靖順중
에서 ‘인명’으로 최종 결정했다.54) 이 때문에 다음날부터 궁과 원의 규모
에 맞는 조성 형태와 의절을 변경해야 되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시일·발
일·반우일 각 항의 배종 및 집사관의 품수와 배종 담당 기관, 挽章抄啓
하는 인원수 등의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輓辭는 무신년(1728, 영조 4) 효
장세자의 상장례를 적용하여 80개로 결정되었다.55) 일정부분 장례 준비
를 마무리했다고 생각한 정조는 6월 9일 진시에 익선관·참포·오서대·백
피화 차림을 하고 천담복·오사모·흑각대 차림을 한 종친 문무백관과 함
께 빈궁에 친림하여 별전하였다.56) 이는 정조가 원빈홍씨에 대한 애틋
한 情을 드러낸 것이다.
6월 16일 진시에 빈궁에 있는 재실의 上隅板에 ‘上’자를 쓰고, 3일 뒤
인 19일 오시에 재실을 結裹했다.57) 이때 종친 및 오상사·2품 이상·육조
의 당상·삼사의 장관들이 참석하였다.58) 6월 17일 오시에 玄室의 명정을
51)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25일<發靷返虞節目>.
52)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1일<惠慶宮生辰賀置之>; 승정원일기 79
책, 정조 3년 6월 1일(계축).
53)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1일<宮號園號議定>; 승정원일기 79책, 정
조 3년 6월 1일(계축).
54)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1일<宮號園號>.
55)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6월 3일(을묘); 일성록 정조 3년 6월 3일(을
묘).
56)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8일<親臨殯宮別奠>.
57)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8일<書上字結裹吉日時>; 승정원일기 79
책, 정조 3년 6월 10일(임술).
썼는데,59) 印式의 내용은 시호 ‘인숙’을 반영하여 ‘仁淑元嬪之印’이었다.
6월 30일에 신주를 경희궁 위선당에서 조성한 후, 7월 초1일 진시에 이
곳에다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예전부터 신주 조성과 봉안 처소를 비어
있는 궁궐의 전각에 설치하였다.60) 다음날 2일 진시에 위선당에서 신주
를 받들고 빈궁에 신주를 봉안했다.61)
7월 초1일 진시에 발인하기 위해 빈궁에서 관을 꺼내는 계빈을 하려
했다가 7월 초2일 진시로 연기되었다. 발인 하루 전에 계빈을 하는 법식
은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 서씨의 국상 때에 마련되었다.62) 이날 이
러한 사실을 종묘·사직에 알렸다.63)
7월 초3일 축시에 발인하였다. 빈궁에 봉안되어 있던 재실을 받들어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한 뒤, 의장의 호위를 받으며 동부 溫水洞의 인
명원을 향해 출발했다. 발인할 때 대궐 안을 지나는 문로는 端陽門, 協陽
門, 宣仁門이었다.64)
원소로 가는 도중, 노제소에서 노제를 지냈다. 천담복을 입은 종친 및
백관과 소복을 입은 前銜宰樞·耆老儒生들이 도로 옆에 차례대로 서 있
다가 靈轝에 하직 인사를 드렸다. 정조를 비롯하여 왕대비전·혜경궁·중
궁전은 인명원까지 발인 행렬을 따라가지 못했기에 이곳에서 곡림하였
고, 궐 안의 여러 관원은 각각 眞所門밖에서 망곡례를 행하였다. 노제를
58)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8일<全體加漆時五上司三司入參>; 승정원
일기 79책, 정조 3년 6월 7일(기미).
59)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16일<銘旌書寫吉時>.
60)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11일<神主造成處所>; 승정원일기 79책, 정
조 3년 5월 13일(정유)[병신].
61)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25일<神主奉安擇日>; 승정원일기 79책, 정
조 3년 6월 10일(임술).
62)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8일<啓殯前一日付標觀象監官員科治>; 승
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6월 7일(기미);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啓
殯」, 민속원, 2008, 444쪽.
63)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7월 초3일<啓殯時告廟社>; 승정원일기 79책, 정
조 3년 6월 3일(을묘).
64)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3일<儀仗各差備>;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6월 3일(을묘).
지낸 뒤 원소의 정자각 靈帳宮에 도착했다. 그 안에 재실을 봉안하고 영
좌에 혼백함을 안치했다. 곧바로 成殯奠을 행하고 朝夕奠과 上食을 올
렸다.
7월 초3일 진시에 제조인 공조판서 鄭好仁의 감독 아래 현실에 재실
을 내리는 下梓室을 거행함으로써65) 3개월만에 장례를 지냈다. 이후 靈
座·靈寢등을 빈궁 뒤 원소의 깨끗한 곳에서 태웠고, 행사에 참여한 빈
궁도감과 혼궁도감의 당상과 낭청 이하 원역과 공장 등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66) 이날 당일에 반우를 하기 때문에 원소 정자각에 찬궁을
설치하지 않아 隧道閣內設次에 奠을 올리고, 朝上食을 올렸다. 또한 길
유궁에도 친림하여 신주의 전면에 ‘仁淑元嬪神主’, 신주의 陷中에 ‘朝鮮
國仁淑元嬪洪氏神主’, 라 쓴 뒤 立主奠을 올렸다.
곧이어 초우제를 거행했다.67) 이는 장례 지낸 날에 하루를 넘기지 않
고 무덤에서 지낸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68) 우제를 마치면 내시가 혼
백을 받들어 土藤箱에 담고 紅綃袱로 싸서 깨끗한 곳에 묻었다. 7월 10
일 오우제를 마친 후 진시에 흑단령을 입은 예조판서 정광한은 상지관
趙弘度와 함께 인숙원빈의 혼백을 담은 혼백함을 요여에 담고 세장의
인도를 받으며, 원소로 배왕한 후 오후에 복명하였다.69) 이처럼 원빈홍
씨는 오우제를 지냈다. 제후국인 조선에서 국왕이나 왕후의 국장에 ‘七
虞’, 세자·세자빈의 예장에 ‘五虞’를 해야 함에 비추어 보면 원빈홍씨의
상장의례는 세자와 세자빈의 예장에 준하는 등급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우를 행한 뒤 7월 12일에 졸곡제를 거행했다. 이는 오우제를
지낸 뒤에 강일[甲, 丙, 戊, 庚, 壬]을 만나 지낸다는 소내상의 규정을 준
수한 것이다.
65) 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7월 3일(을유).
66)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7월 초3일<員役賞格>; <賞典>; 승정원일기 79
책, 정조 3년 7월 3일(을유); 일성록 정조 3년 7월 3일(을유).
67) 일성록 정조 3년 7월 3일(을유).
68) 예기집설대전 권4, 「檀弓」下4;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虞祭」, 민속
원, 257쪽.
69)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7월 초10일.
2) 元嬪의 무덤·사당 조성과 궁원 혁파
원빈홍씨의 상장례는 후궁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호사스럽게 치
러졌다. 원빈홍씨가 졸하자, 사망 당일 진시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
를 비롯하여 정순왕후, 혜경궁, 효의왕후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조정 대신들은 宣化門밖에서 슬픔을 표시했다. 1751년(영조 27) 효장세
자빈 예장의 전례대로 5일 동안 조회와 장시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심지
어 당나라의 개원례와 명나라의 비빈의 예에 따라 원빈홍씨에게 시호
를 인숙, 궁호를 효휘궁, 원호를 인명원으로 추증하였다.70) 1년 남짓 빈
의 지위에 있었던 원빈홍씨에게 시호는 물론 원호와 궁호를 내린 정조
의 처사는 다른 후궁과 비교해 볼 때 가히 파격적인 조치였다. 궁과 원
은 세자나 세자빈, 또는 국왕을 낳은 후궁들의 廟號와 墓號였으므로, 1
명의 후사도 얻지 못한 원빈홍씨의 무덤과 사당에 각기 인명원과 효휘
궁이란 원호와 궁호를 붙인 것은 예법에 맞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러한
궁원의 호칭 등 그녀에게 베풀어진 특별한 의례는 정조의 총애와 오빠
홍국영의 위세 때문에 실현되었던 것이다.
6월 1일에 원빈홍씨의 무덤으로 결정된 인명원은 한성 동부 온수동에
위치한 곳으로,71) 북서쪽을 등지고 남동을 바라보는 해좌사향에 조성된
무덤이다. 원빈의 무덤 조성 과정을 살펴보면, 5월 11일 巳時(오전 9~11
시)에 공역을 시작하여 5월 20일 卯時(오전 5~7시)에 풀을 베고 흙을
펴낸 후에 새벽에 후토신에게 제사 지냈다. 5월 26일 묘시에 옹가를 만
들고 5월 29일 묘시에는 금정을 열었다. 혈의 깊이는 8척이었다.72)
70)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7일<擧哀吉時>; <擧哀處所>; 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5월 7일(경인). [元嬪洪氏의 졸기].
71) 이곳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경내에 있으며, 현재 舊인명
원터로 남아 있어 ‘애기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원빈홍씨의 무덤은 1950
년대에 고양시 원당의 서삼릉 내의 비공개지역인 후궁 묘역에 안장되었고,
현재 무덤에는 묘표, 향로석, 혼유석 등이 남아있다. 원빈홍씨의 무덤에서
출토된 화장 용기 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72)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13일<園所擇日>.
원소를 조성하는 동안, 5월 18일 묘시에 정자각의 터를 닦고 6월 초2
일 묘시에 주춧돌을 놓았으며, 같은 달 4일 진시에 기둥을 세운 후 申時
(오후 3~5시)에서 오시까지 기둥에 들보를 올려 정자각을 건설하였다.
원소를 관리하기 위한 齋室도 마련되었는데, 5월 20일 묘시에 터를 닦고
6월 초3일 진시에 주춧돌을 놓았으며, 6일 묘시에 기둥을 세운 후 오시
에 기둥에 들보를 올리려 했다.73) 그러나 재실의 입석과 상량은 정자각
의 입석과 상량 때와 함께 행하였다.74)
5월 5일부터 시작된 원소의 공역은 6월 6일에 외재실을 배진하였는
데,75) 외재실 운반에는 476명을 각 관서에서 차출하고 운로와 교량을 修
治하였다. 6월 15일에는 정자각에 상량문을 지어 올렸는데,76) 상량문의
제목인 ‘仁淑元嬪仁明園丁字閣上樑文’ 13글자를 서사관 李儒慶이 썼
다.77) 이와 같이 원빈의 무덤은 묘표, 상석, 향로석, 혼유석 등의 석물을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정자각과 재실, 紅箭門등을 건축하여 원소가 정
비되었다. 당시 원빈에 대한 정조의 지나친 우대와 僭禮에 대해서 조정
대신들 중에 앞장서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원빈에 대한 추증과 묘역 정비 사업이 일단락되자, 정조는 7월 10일
오우제를 마친 후에 승지를 보내 인명원에 봉심하도록 명하였다.78) 한
달 뒤인 8월 10일, 정조는 鍊兵館에서 돌아가는 길에 직접 인명원에 들
렀는데, 인명원의 산세가 명당을 둘러싸지 않고 혈 자리가 한길과 가까
워 명당자리가 아님을 지적하였다.79)
73)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13일<丁字閣以下擇日>.
74)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2일<齋室及丁字閣上樑同日擧行>; 승정원
일기 79책, 정조 3년 6월 2일(갑인).
75)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4일<丁字閣立柱>; <上樑文陪進>; 승정원
일기 79책, 정조 3년 6월 4일(병진).
76)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15일<上樑文製進>;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5월 20일(계묘).
77)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6월 초2일<上樑文陪進>;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6월 2일(갑인).
78)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7월 10일(임진).
79) 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8월 10일(신유); 일성록 정조 3년 8월 10일(신유).
원빈홍씨의 사당인 효휘궁의 호칭도 6월 1일에 결정된 후 이틀 뒤인
3일에 수봉관 2명을 차출하도록 명하였고80) 26일에는 효휘궁의 현판을
영조의 혼전인 孝明殿에 의거해서 정당에 걸도록 명하였다.81) 6월 30일
신주가 조성되자, 정조는 7월 초1일 진시에 위선당에다 신주를 봉안하도
록 한 후 다음날인 7월 2일 진시에 빈궁으로 직접 나아갔다.82) 7월 3일
에는 효휘궁 안의 신문 밖에 나아가 망곡례를 행하였다.83) 이후 11월 5
일에는 효휘궁 수봉관에 金成鎭을 임명하였고,84) 11월 15일에는 晝茶禮
를 행하였다.85)
이듬해인 1780년(정조 4) 2월에 정조는 승지 徐有防에게 효휘궁에 올
릴 別茶禮제문의 초안을 지시하였고, 사망한 지 11개월 만인 3월 7일에
소상인 練祭를 거행하였다.86) 이것은 원빈홍씨가 정조보다 먼저 사망했
으므로 기년상을 치른 의미였다.87) 삼년상이 아닌 기년상으로 상을 치
르게 됨에 따라 정조는 두 달 뒤인 5월 7일에 13개월이 되는 기일에 지
내는 大祥의 祥祭를 효휘궁에 나아가 직접 지냈다. 정조는 무복이었기
때문에 상제를 지낼 때 익선관에 黔袍와 烏犀帶를 입고 지냈다. 대상제
를 마친 뒤에 참여한 인명원의 守園官인 完豐君李濬를 비롯해서 효휘
궁 혼궁의 종실인 茂林君李塘, 雲峯君李杺, 海溪君李, 安春君李烿
등에게 상을 내렸다.88)
그로부터 4일 후, 정조는 禫祭뒤에 효휘궁을 入廟하는 문제에 대해
80) 일성록 정조 3년 6월 3일(을묘).
81) 승정원일기 79책, 정조 3년 6월 26일(무인); 일성록 정조 3년 6월 26일
(무인).
82) 숙창궁상초일기, 기해 5월 25일<神主奉安擇日>; 승정원일기 79책, 정
조 3년 6월 10일(임술).
83) 일성록 정조 3년 6월 3일(을묘).
84) 일성록 정조 3년 11월 5일(을유).
85) 일성록 정조 3년 11월 15일(을미).
86) 일성록 정조 4년 2월 1일(경술); 일성록 정조 4년 3월 7일(병술).
87) 의례주소 권30, 「喪服」제11;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祥祭」, 2008,
317~318쪽.
88) 일성록 정조 4년 5월 7일(을유).
대신들과 의논하였다. 사망한 지 15개월인 7월 3일 묘시에 담제를 행한
후, 신위를 彰義宮으로 移安하고 고유제를 올렸다. 국가전례서에서 담제
를 행하는 날에 입묘를 행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89) 효휘궁에서 창
의궁으로 입묘할 때의 의절은 계유년인 1753년(영조 29) 효순궁을 孝章
宮에 입묘할 때의 의절을 참작하였다.90) 창의궁은 연잉군의 생모인 숙
빈최씨의 궁가로 1731년(영조 7) 1월 효장세자의 사당이자, 정조의 형인
懿昭世孫의 사당이다.91) 정조 즉위 후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어
신위를 창덕궁의 延福殿으로 옮기면서 의소묘의 신위는 효장묘로 옮기
게 되었다. 이로써 원빈홍씨는 의소세손과 同宮異廟로 함께 모셔졌다.
원빈홍씨의 사당과 무덤을 효휘궁과 인명원으로 정한 것은 정조가 다
른 후궁보다 원빈홍씨의 위격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분명 원빈홍씨에
대한 애틋한 정의와 홍국영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후궁의 사당과
무덤을 궁과 원으로 올린 전대의 사례를 무리하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177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가 홍국영을 入朝시켜 집권 4년 만에 축출
한 이후92) 효휘궁과 인명원에 대한 문제 제기와 그에 따른 상소가 잇달
아 올라왔다. 이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녀가 사망한 지 3년 뒤인 1782년(정조 6) 6월에 좌승지 서유방이 인
명원의 ‘園’ 자를 없앨 것을 처음 건의하였다.93) 첨지중추부사 鄭述祚도
상소를 올려 서유방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에 따르면, 순회세자의 무
덤과 소현세자의 무덤도 원이라 하지 않고 묘라 했는데 빈어의 무덤을
원이라 한 것은 고례가 아니라며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94) 그
89)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小喪入廟儀」, 2008, 346쪽.
90) 일성록 정조 4년 5월 11일(기축); 일성록 정조 4년 5월 15일(계사); 일
성록 정조 4년 6월 5일(임자); 일성록 정조 4년 6월 9일(병진); 일성록
정조 4년 6월 14일(신유). 실제 담제를 행한 날은 7월 2일이다(일성록 정
조 4년 7월 2일(무인).
91) 영조실록 권29, 영조 7년 1월 3일(정묘); 영조실록 권77, 영조 28년 8월
2일(경인).
92) 일성록 정조 3년 9월 26일(정미).
93) 정조실록 권13, 정조 6년 6월 2일(정묘).
94) 정조실록 권13, 정조 6년 6월 2일(정묘); 일성록 정조 6년 6월 1일(병인
러나 정조는 인명원의 호칭을 고치자는 대신들의 이 같은 요청을 무시
해버렸다.
인명원의 원호를 고치자는 의견을 다시 내놓은 때는 그로부터 3년 후
인 1785년(정조 9) 7월이었다. 집의 洪宗藎은 인명원이 도성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고 청룡인 동쪽의 방위라고 하여 이장할 것을 청하면서 왕
을 낳지 않은 원빈의 무덤에 원호의 칭호를 내린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
였다.95) 1786년(정조 10) 1월에도 호조참판 정술조가 재차 후궁의 산소
에 ‘원’자를 붙이는 것이 조정에 없던 제도이고 원호인 인명이 문정왕후
의 휘호라고 하면서 그 명칭을 바꿀 것을 청하였다.96)
원호를 고치자는 대신들의 요청을 묵살해오던 정조는 같은 해 11월에
영의정 金致仁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그들
에 따르면, 궁원의 호칭은 우리 조정의 정해진 제도인데, 인명원과 효휘
궁에만 격례에 벗어난 의식을 새로 추가한다는 것은 전례에 어긋나고
예외의 의절을 만든 것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97) 이에 대
해 정조는 조정대신들의 의견과 국가 전례에 관계된 일이 전례에 어긋
났다는 이유로, 인명원의 원호를 강등하는 등의 의절을 예조에서 거행
하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인명원의 호칭을 고치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되풀이되자, 정조는 숙종의 후궁 寧嬪房의 전례에 근거하여 인명원과
효휘궁을 혁파하였다.98)
원빈홍씨의 궁원이 혁파됨에 따라 인명원은 조성된 지 7년 만에 元嬪
墓로 강등되었다. 원에서 墓의 위격으로 바뀌자 정자각과 홍전문을 헐
고 비석을 고쳐서 새기고 護石을 없애며 수봉관을 변통하는 절차를 시
행하도록 하였다. 그중에서 정자각은 배위청을 없애고 정당은 제청으로
95) 일성록 정조 9년 7월 8일(을묘).
96) 정조실록 권21, 정조 10년 1월 22일(정묘); 일성록 정조 10년 1월 22일
(정묘).
97) 정조실록 권22, 정조 10년 11월 11일(신사); 일성록 정조 10년 11월 11
일(신사).
98) 정조실록 권22, 정조 10년 11월 11일(신사); 일성록 정조 10년 11월 14
일(갑신).
사용하였다.
궁에서 廟로 변경되자 宮房이나 折受등에 의한 재원의 확보가 어려
워졌다. 그래도 제사 등에 대한 조처는 사당의 삭망분향을 중관이 전례
대로 하고, 俗節및 時享, 묘소의 忌祭및 속절은 그대로 거행하되, 제수
준비는 별도로 논의해 정하도록 하였다.99) 11월 25일 포와 식혜, 술만을
준비하여 묘관 李英冕이 주관하여 고유제를 지내도록 하였다.100) 이후
그녀의 신위는 숙종 때부터 후사가 없는 왕실구성원들의 제사궁으로 지
정된 壽進宮에 봉진되었다.101)
궁원은 종묘 왕릉보다는 그 위격이 낮지만 왕세자, 왕세손 등 일반 왕
실 구성원들의 廟墓보다는 한 등급 높이는 제도적 장치였다.102) 궁원의
위격에 걸맞지 않은 원빈홍씨에게 이를 무리하게 적용시킨 것은 급작스
럽게 죽은 원빈홍씨에 대한 정조의 총애와 홍국영의 위세 때문에 이루
어진 것이었다. 특히 여동생의 예제상의 지위를 높임으로써 자신의 지
위를 유지시키려는 홍국영의 정치적 야심도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혜경궁에 따르면, 홍국영이 효의왕후가 원빈을 독살했다고 확신
하며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내전의 나인들을 잡아들여 혹독하게 고문하
고 멋대로 국문을 했다고 쓰고 있다.103)
그 뿐만이 아니라 원빈 사망과 관련된 유언비어를 퍼트린 홍국영은
사도세자의 맏서자 恩彦君李裀의 맏아들 常溪君李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서 원빈의 장례 때에 大尊官으로 삼아 상을 주관하게 하였고 完豊
君이라는 작호를 주었다. 완풍군은 전주이씨의 관향을 뜻하는 ‘完’ 자와
99) 정조실록 권22, 정조 10년 11월 11일(신사); 승정원일기 86책, 정조 10
년 11월 11일(신사); 일성록 정조 10년 11월 14일(갑신).
100) 일성록 정조 10년 11월 25일(을미).
101) 순조실록 권23, 순조 20년 12월 11일(계사).
102) 조선후기 궁원제의 성립과 그 변천에 대해서는 정경희의 「조선후기 궁원
제의 성립과 변천」(서울학연구 23, 2004)이 있다.
103) 兪漢雋, 自著續集 4책,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
提學同知成均館事世孫左副賓客致仕奉朝賀李公行狀」, 한국문집총간
권249; 한중록, 서해문집, 2006, 338~342쪽; 박광용, 앞의 책, 푸른역사,
2001, 222~223쪽;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2, 아름다운날, 2007, 210쪽
풍산홍씨의 관향을 뜻하는 ‘豊’ 자를 합한 군호였다. 종실을 후궁의 양자
로 삼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이례적인 상황으로, 홍국영의 야심을 반영한
처사였고 왕위계승권 문제에 관여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4. 元嬪洪氏상장례의 성격
조선 전 시기 동안 후궁의 상장례는 여러 번 거행되었다. 그러나 그들
의 상장 관련 자료가 6종 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교적 자세하고 풍부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상장례 기록을 통해 실제 행례가 어떻게 치렀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 드러나는 원빈홍씨의 예장의 성격을 살펴
보고자 한다.
첫째, 원빈홍씨의 상장 절차는 기본적인 규정은 왕실상장례를 정비하
여 편찬한 국조상례보편의 「세자빈의주」를 준용하여 집행하였다. 국
조상례보편는 효순현빈의 상을 계기로 1752년(영조 28)에 국가전례서
가 정비되었고, 영조의 명을 받은 洪啓禧가 1758년(영조 34)에 다시 증
편했다. 이로써 국왕과 왕비의 국상인 대상과 내상의 의절이 크게 갖추
어졌을 뿐 아니라 왕세자와 세자빈의 예장인 소상과 소내상에 대한 규
정도 갖추어졌다.104) 국왕과 왕후의 장례를 국장, 세자나 세자빈은 예장,
세손과 정1품 후궁의 장례 역시 예장이라 칭했다. 국왕의 상을 大喪, 왕
후의 상을 內喪, 세자의 상을 小喪, 세자빈의 상을 小內喪이라 구별한 것
이다.105)
물론 국조상례보편에는 국왕·왕후 국장, 세자·세자빈 예장 외에 정1
품 후궁을 위한 예장 규정과 의절이 별도의 지면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원빈홍씨의 상이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하였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국조상례보편이 간행된 이후에 상을 치룬 후궁이었다. 원빈홍
104) 이현진, 「영조대 왕실 상장례의 정비와 국조상례보편」, 한국사상사학
37, 201, 118~142쪽.
105)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凡例」, 민속원, 103~107쪽
씨의 상보다 1764년(영조 40)에 발생한 사도세자의 모친 영빈이씨의 예
장이 있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관련 자료가 없기에 이 자료가 국조상례
보편 간행 이후 정1품 후궁에 대한 예장 의절의 전범을 보여준다는 점
에서 원빈홍씨의 예장 사례는 중요하다.
둘째, 원빈홍씨의 상장 절차와 의절은 여러 차례 언급되었듯이 신미
년과 임신년의 상장례를 대부분 참고해서 치렀다. 신미년은 1751년(영
조 27)에 거행된 효장세자의 빈인 효순현빈의 상장례이고 임신년은
1752년(영조 28)에 있었던 의손세손의 상장례를 가리킨다. ‘신미년의 전
례에 의거하여’, ‘임신년의 예를 참고하여’ 등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원빈홍씨의 상장 절차는 국조상례보편을 기본으로 삼고, 실제
행례할 때는 효순현빈과 의손세손의 예장을 전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원빈홍씨의 상장 의례는 예장이자 소내상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원빈의 예장은 각 의절을 거행한 시점이나 횟수에 있어서 전반
적으로 국가전례서에서 규정한 소내상에 따라 준행했음을 알 수 있다.
원빈홍씨 상례에서 신분에 따라 달리 일컫는 용어와 의물 역시 소상, 소
내상과 동급의 칭호를 사용했다. 예컨대, 국왕이나 왕비의 재궁을 두는
전각을 殯殿이라고 칭하고 세자나 세자빈 등은 殯宮이라고 일컬었다.
그 외에 국장과 예장 사이에 보이는 구별되는 용어는 혼전·혼궁, 왕릉·
원소, 찬궁·찬실, 재궁·재실, 외재궁·외재실, 현궁·현실, 부묘·입묘 등에
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원빈홍씨의 예제상의 지위는 국왕과 왕후
보다는 한 단계 위격이 낮은 세자와 세자빈의 등급에 준한다고 하겠다.
셋째, 원빈홍씨의 죽음에 대한 정조의 애도 행사이자 홍국영의 세도
를 과시하는 행사였다. 원빈홍씨가 사망한 시점은 홍국영의 권세가 절
정에 달했을 때였기 때문에 원빈홍씨의 상장례에는 화려한 절차가 적용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정에서는 원빈홍씨에게 당송 명나
라 비빈의 상례를 적용시켜 인숙이라는 시호, 효휘라는 궁호, 인명이라
는 원호 등을 올렸다.
홍국영 측에서도 “그때 홍국영의 횡포와 방자함이 날로 극심하여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홍씨의 빈장에 관한 절차와 관
련하여 예관이 모두 참람한 예를 원용하였다.”고 하면서 “송덕상은 심지
어 公除를 해야 한다고까지 했다”106)고 한 것으로 미루어 호화스러운
장례식을 추진한 모양새이다. 공제는 국왕 또는 왕비가 사망했을 때에
공무를 중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같은 공제를 후궁인 원빈홍씨에게
적용할 계획을 가진 것은 홍국영의 권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송시열의 현손인 송덕상은 재야 학자인 山林으로서 홍국영의 후원 하에
정조 초부터 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인물
이다.
홍국영의 전성기에 있었던 원빈의 화려한 장례식은 원빈의 죽음과 관
련된 문장을 짓는 데에 동원된 인물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청나라에
보낼 表文을 지은 李徽之는 영조 때에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원빈이
사망하던 해에는 규장각 제학을 제수 받았으며, 誌狀을 지은 黃景源은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蔡濟恭은 애책을 지었으며, 徐命善은
諡冊을 지었다. 원빈의 호사스러운 장례식은 그녀에 대한 정조의 총애
와 홍국영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행사였다고 하겠다.
5. 맺음말
원빈홍씨(1766~1779)는 정조의 첫 번째 간택후궁이자 洪國榮의 누이
동생이다. 그녀는 1766년(영조 42)에 홍낙춘과 우봉이씨 사이에서 태어
났다.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가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자 13세 되던 해에
조선 역사상 최초로 간택과 가례 절차를 통해 처음부터 정1품 빈에 봉해
진 후궁이다. 그녀가 후궁이 된 것은 왕실과 연혼관계에 있었던 풍산홍
씨 집안의 규수였기도 했지만, 조정에서 세도를 부렸던 친오빠 홍국영
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손수 쓴 어제원빈홍씨행장에
따르면, 그녀는 궁궐 안에서 근신한 몸가짐과 신중한 언행으로 정조의
106) 정조실록 권7, 정조 3년 5월 7일(경인).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원빈홍씨는 1779년(정조 3) 14세에 입궁한지 1년
만에 창덕궁 養心閤에서 腫氣로 졸서하였다.
급서한 지 3개월 만인 7월 5일, 한성 동부 온수동에 조성된 무덤에 묻
혔고, 7월 10일 오우제를 지내고 이틀 뒤에 졸곡제를 마쳤다. 그녀는 정
조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삼년상이 아닌 기년상으로 시행되어 11개월 만
에 연제, 13개월 만에 상제, 15개월 만에 담제를 지내고 곧바로 창의궁에
입묘되었다. 이때 원빈홍씨의 사당과 무덤은 국왕의 사친이나 왕세자의
廟號와 墓號인 궁원제가 적용되어 효휘궁과 인명원으로 명명되었다. 그
러나 그녀의 무덤과 사당에 궁원을 적용시킨 것이 예법에 맞지 않아, 7
년 뒤인 1786년(정조 10)에 혁파되었다. 이 과정이 일기로 기록되어 남
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淑昌宮喪草日記이다.
본서는 후궁들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희귀한 문헌으로서, 이
분야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시대 후궁의 상장 자료가 6종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상장 의례를 보여주는 특이한 자
료가 될 것이다. 이 자료를 통해 원빈홍씨의 예장에서 드러나는 상장의
례의 성격을 정리하면 대략 몇 가지 사실들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 원빈홍씨의 상장례는 1758년(영조 34)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
「세자빈의주」에 준용하여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국조상례보편이
편찬된 이후에는 왕실의 상장례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었지만, 국왕·왕
후 국장, 세자·세자빈 예장 외에 국왕의 사친이나 후궁의 예장 절차에
관한 규정은 마련되지 않았다. 원빈홍씨의 상이 국조상례보편에 의거
하였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국조상례보편이 간행된 이후에 상을 치
룬 첫 후궁이다. 그런 만큼 원빈홍씨의 예장이 주는 의미는 클 것이다.
둘째, 그녀의 예장은 기본적인 규정은 국조상례보편을 주요 텍스트
로 삼았으나, 전적으로 이 책에 의존하지 않았다. 실제 행례를 집행할 때
에는 1751년(영조 27)에 승하한 효순현빈의 상장 절차와 1752년(영조
28)에 요절한 의소세손의 상장 의례를 그 선례로 삼아 참고했다. 그런
점에서 원빈홍씨의 상장 의례는 정1품 빈의 예장이자 소내상에 해당한
다고 하겠다.
셋째, 소내상에 해당되는 원빈홍씨의 예제상의 지위는 국왕과 왕후보
다는 한 단계 위격이 낮은 세자와 세자빈의 등급에 준한 것이다. 그런
만큼 그녀의 장례식은 화려한 절차를 적용한 호사스러운 장례식이었다.
이는 원빈홍씨의 죽음에 대한 정조의 애도 행사이자 세도가 홍국영의
권력을 과시하는 행사였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당, 송, 명의 비빈 상례를 적용시켜 원빈홍씨
의 廟號-墓號가 사망 직후에 ‘孝徽宮-仁明園’으로 명명되었다는 점이다.
보통 궁원은 세자나 세자빈 또는 국왕을 낳은 후궁들에게 적용되는 것
인데, 궁호와 원호를 내린 정조의 처사는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는
원빈홍씨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극진하였던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홍국
영의 권세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1779년(정조 3) 9월에 홍국영이 실각하자, 그녀의 사당과 무덤이 궁호와
원호로 불리는 것이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조정의 여론으로 인해 1786
년(정조 10)에 元嬪廟-元嬪墓로 강등되었다. 이는 원빈홍씨가 사후 7년
만에 예제상의 위상이 추락하여 일반 후궁과 동일하게 된 것을 뜻한다
<별첨 1> 원빈홍씨의 가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