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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 다이어트 / 디스크,오십견, 관절염/ 만성난치질환/ 체질진료/전통 장침
2강 동아시아 30년 전쟁과 광주 민주 항쟁
1. 허위의 현대사
광주를 우리 민족의 문화 수도로서 어떻게 만드느냐는 여러분들과 나의 손에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문화수도는 과시적인 외형적 건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문화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교육기관, 문화창조센터들이 먼저 활성화되어야 한다. 투자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과 인내를 요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광주 사람들은 우선 광주의 역사를 알아야겠다. 오늘 주제는 우리 근대사의 문제이다.
나의 유명한 명제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All history is contemporary.
무슨 이야기냐 하면, 조선왕조실록을 적은 사관(史官)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관은 그 시대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즉 그 사람의 현대사를 적은 것이다. 그 사람이 생각한 것을 적은 것이다. 그러니깐 모든 역사는 현대사의 연속이다.
모든 역사는 당대의 가치관에 의하여 해석된 것이며, 따라서 현대사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역사는 오늘, 여기에, 내가 없이, 역사는 있을 수 없다. 내가 단군의 역사를 쓴다면, 그 단군의 역사는 도올 김용옥이 기술하고, 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한 단군의 역사이지, 그게 진짜 단군 시대의 역사인지 알 수가 없다.
그건 고대사니깐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현대사라고 해서 명백하게 우리가 다 아는 건 아니다. 사실 고대사는 소설로 꾸며도 잘 모른다. 단군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현대사로 들어오면 더 확실할 거 같지만, 현대사는 소설이 더 심하다. 단군의 역사보다 현대사가 더 구라가 더 심하다.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어디가 제일 먼저 불탔는지 아는가? 광주 MBC였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역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 가수들 노래만 나왔다. 그러니깐 태워버린 것이다. 그런 광주 MBC에 와서 내가 이런 강의를 하고 있다.
현대사는 편협한 권력욕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마음대로 날조되고 왜곡되었다. 독립운동사도 남북정권의 지배자의 구미에 안 맞는 99%의 역사가 은폐되었다.
2. 한국전쟁의 의미
현대사는 거짓말이 더 심하다.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게 사실일까? 자꾸만 철학자가 괴변을 늘어놓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인 거 같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할 때 과연 ‘한국전쟁’이란 무엇일까? 그때 발발한 것을 한국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것은 역사술어로서 검증을 요하는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여러분들이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걸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경우, 처음 기술해야 하는 것은 남침이었는지, 북침이었는지를 말해야 한다.
6월 25일, 김일성이 내려온 것인지 아니면 이승만이 쳐 올라 간 것인지 기술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한국전쟁을 말하면, 한국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야기는 철학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이라는 것을 6월 25일 어느 한 시점에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이야기하면, 한국전쟁의 의미가 없어진다.
한국전쟁은 최소한 6,25 즉 1950년 6월 25일이라는 한시적 시점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역사는 쓸 필요가 없다.
물론 남침인지 북침인지 궁금한 문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다각적이며 공평한 접근이 필요하다. 옛날에는 중국의 모택동 문서나 러시아의 스탈린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그런 것이 다 공개되었다. 우리가 사서 볼 수 있다. 복사를 해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몰랐던 어마어마한 사실들이 지금 다 밝혀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아직 우리 민중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3. 전쟁의 불씨
한국전쟁의 발발 시점에 대해, 1950년 6월 25일이냐, 아니냐와 같은 관점으로 역사를 봐서는 안 된다.
나는 한국전쟁은 1945년 8월 15일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이게 재미난 이야기다. 도올 김용옥이라는 철학적 사고를 하는 역사가가 역사를 쓸 때, 어떻게 쓰는지 말하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항복 선언을 했다. 항복 선언을 하면서, 이 히로히토라는 새끼는 역사에서 싹 빠진 것이다.
일본은 명치유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1세기동안 하면서, 일본이 제국주의를 한 모든 지역에 전쟁의 불씨를 뿌렸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친일과 반일의 문제가 생겨났다. 이런 문제는 어디에서나 생겼다. 중국에서도 생겼고, 러시아에서도 생겨났다. 한국은 가장 참혹하게 당했다. 그리고 좌익, 우익과 같은 이념 대립의 모든 구조를 일본놈들이 1세기 동안 동아시아 국가에다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하면서 이 새끼들은 싹 빠졌다.
일본은 항복선언과 동시에 미국의 우산 밑으로 들어갔고,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의 역사로부터 도피하였다.
자기들이 저질러 놓은 역사로부터 싹 빠져 도망갔다.
4. 중국의 상황
1910년 우리가 경술국치를 당한 다음에, 뜻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만주 땅을 향해 갔다.
중국의 상황은 1930년대 들어가면 노구교(盧溝橋) 사건이 일어나고,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이어 부의를 황제로 삼아서 위만주국을 세운다. 자기들의 꼭두각시 나라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중국 대륙을 침범하려고 한다.
1931년 : 만주사변
1932년 : 부의가 위만주국 황제로 등극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 히데요시는 중국에 가서 자기가 천자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니 길을 비켜달라는 명목으로 침략을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명목상 중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 조선전쟁을 일으켰고, 명치 천황도 탈아론(脫亞論)에 근거하여 동아시아 전체를 삼키려 했다. 이 모든 것이 도덕성이 전무한 깡패짓이다.
명치 제국주의라는 것도 똑같이 동아시아 전체를 대동아 공영권으로 만들겠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다 쳐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중국 사람들은 일본 놈들이 쳐들어와도 민족 개념이 없었다. 왜냐하면 매년 추수 때가 되면, 비적(匪賊)들이 와서 다 뜯어가고, 매년 비적들에게 시달렸기 때문에 일본 놈들이 와도, 그냥 또 다른 비적이 왔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비적들과의 관계에는 모두 룰이 있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중국 사람들은 중국 민족이 일본 민족하고 투쟁하고 싸워서 국권을 수호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모택동은 싸우기가 엄청 힘들었다. 모택동이 공산주의를 가지고, ‘중국인들이여, 지금 일본 놈들이 중국을 다 지배하려고 한다. 빨리 일어나서 싸우자!’고 해도, 싸우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땅이 워낙 크니깐 ‘그냥 저 비적새끼들 좀 떼어주고 말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을 이른바 계몽해야 했는데, 계몽을 시키려면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일본말을 잘 해서 일본을 잘 알고, 그러면서 중국말도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중국사람 중에는 없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일본 놈이라고 하면 죽이고 싶어하고, 거기다가 일본말 잘 하고, 한국말 잘 하고, 중국말까지 잘 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한다. 중국 혁명은 모택동이 일으킨 게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이런 역사를 우리가 모른다.
여러분들 6.25때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가 일어난 것을 알고 있다. 중국 놈들이 미쳐서 100만 명의 어린 자기 후손들을 한국에 보낸 게 아니다. 인해전술로 들어 와서 미국 놈들이 마구 쏴죽였는데, 사실 그때 내려온 중국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수양제가 고구려에 파견한 사람보다, 당시 모택동이 파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왜 그럴 수 있었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중국 혁명을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모택동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북한이 어려워지자, 보냈던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다. 여러분들은 우리 민족의 숨은 역사를 알아야 한다.
5. 러시아 혁명의 숨은 주역
러시아 혁명을 레닌이 모두 일으킨 줄 아는데, 연해주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은 전부 한국인들이었다. 거기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의식적인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레닌을 따라 우랄 산맥에서 연해주까지 이르는 모든 곳에서 연설을 하며, 레닌을 도운 여자가 있었다.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라는 한국인 여성이었다.
우리나라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라는 한국인 여성이다. 제 작품의 제 5번째 주인공으로 나온다.
@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1885-1918)
함경도 경흥, 김두서의 딸,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 혁명지도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인사회당 결성(1918)
그러니깐 중국 혁명도 러시아 혁명도 한국 사람들이 근대에 겪은 수난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한국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깨인 의식은 세계혁명사를 리드해나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수난은 세계사를 바꿔왔다.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점령하고 짓밟은 동안에도 우리 민중은 깨어있었다. 일본 놈들이 남을 수탈하고 짓밟고, 억압할 때, 우리는 인권이 무엇인지 알았고, 민족이 무엇인지 알았고, 국가를 지켜야겠다는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싸워나간 것이다.
6. 독립 운동의 주체, 민중
그런 혁명정신을 가지고, 대륙에서 노력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이 그렇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대륙에 있었던 백만에 가까운 한국 인민들의 희생 때문이었다.
일본군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이름이 홍범도이다. 삼수갑산 북청에서 활약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의 부인이 북청여자라서 그쪽에서 활약했다. 원래 이 사람은 평양 사람이다.
@ 홍범도 (洪範圖, 1868-1943)
평양감영의 군인출신으로서 삼수갑산에서 포수독립군을 조직하여 맹위를 떨쳤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었다.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한국인이었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쏴서 잡으면 너무도 행복했다. 왜냐하면 호랑이 잡은 것과 똑같았다. 호랑이를 잡으면 고기도 먹고, 가죽도 팔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을 쏴서 잡으면, 옷도 빼앗고, 군화도 빼앗고, 탄환도 얻고, 권총도 얻고, 군수품도 얻을 수 있었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 놈들을 죽여서 살아갔다. 그래서 홍범도 부대는 아주 무서웠다.
독립군들의 가장 큰 문제는 보급품이 없는 것이었다. 독립군에게 보급품을 공급해주는 곳이 없었다. 그러면 과연 독립군 100명이 만주 벌판에서100일을 움직인다면, 보급품도 없는데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싸웠을까?
산간지대를 포함한 만주 곳곳에 한국 사람들이 개간을 하고 살고 있었다. 거기서 보급을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독립군만의 역사가 아니라, 독립군을 먹여 살린 수많은 민중들의 역사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항쟁사는 기층민중의 보이지 않는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는 산악지대거주자들을 철거. 집단부락을 만들고 파출소를 세워 보급품을 차단시켰다.
청산리 대첩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번 싸우고 나면, 민중들은 처참하게 당했다.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 놈들을 사살하고, 일본 부대를 괴멸시키고 나면, 일본 놈들은 그 지역 전체의 조선 민중을 죽였다. 수천, 수만 명을 죽였다.
바로 우리가 5.18민주항쟁에서 경험했던, 그 악랄한 짓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본 놈들이 와서, 조선 민중을 죽였다. 그 유명한 사건이 경신참변이다.
@ 경신참변(庚申慘變, 1920)
삼일운동 이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후 간도지역 조선민중을 처참하게 살해한 사건. 일본군은 모든 조선인 부락민들을 이유 없이 도살하였다.
7. 독립운동사의 대맥
만주 지역에는 ‘동북항일연군’이 있었다.
@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1930년대 만주에 팔로군이 항일 빨찌산들을 연합하여 만든 군대. 이 군대의 주역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1로군 2군 6사장이 김일성이라는 청년이었다.
그 다음에 화북지역인 중부에는 장정(長征)을 거쳐서 연안에 팔로군 본부가 있었다. 그들과 협력해서 싸운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 장정(長征, long March)
모택동 홍군(紅軍)이 국민당군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강서성에서 성서성 연안(延安)에까지 온 대행진. 조선인 무정(武亭)은 모택동 참모의 한 사람이었다.
@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이 만든 조직에서 출발한 독립군. 연안에서 팔로군과 합세하여 의용군으로 발전.
그리고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노선과 화북지역 조선의용군의 의용투쟁, 만주 지역의 유격 투쟁이 소위 말해서 우리 독립운동사이다.
강남지역 : 외교투쟁노선
화북지역 : 의용투쟁노선
만주지역 : 유격투쟁노선
독립운동사의 대맥이 이렇게 흘러간다.
8. 해방과 국공내전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 선언을 했을 때, 우리는 팔로군을 위해서 싸운 세력도 있었고, 장개석의 국민당을 도운 세력도 있었던 것이다.
같은 독립군이라도 강남 쪽은 장개석에 붙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돈 모두를 장개석한테 받고 있었다. 장개석이 도와준 계기가 바로 윤봉길 의사의 홍구 공원 투척 사건이었다. 조선의 젊은이 1명이 우리나라 100만 군대가 한 것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했다고 칭찬하면서 임시정부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 때가 1932년이다. 그 후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성화된 것이다.
@ 윤봉길의 상해 홍구(紅口) 공원 투척사건
1932년 4월 29일 김구 한인애국단의 이 의거로 인해 상해임시정부는 비로소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을 했을 때, 중국의 세력들이 만일 통일되어 있었다면, 즉 모택동이나 장개석, 어디 한 쪽으로 통일이 되어 있었다면, 우리나라의 분열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비극적이지만, 중국은 분열되어 있었다.
1945년 8.15 이후, 중국은 국공분열로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8.15해방을 계기로 국공합작이 깨지고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조선반도에도 필연적으로 내전상황이 시작된다. 한국전쟁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6.25는 사실 동아시아 내전 상황의 한 고리일 뿐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중국이 내전에 들어가면서, 연안을 중심으로 한 모택동은 그 유명한 실천론, 모순론을 써가면서 공산당을 지도한다. 그 당시 장개석 군대는 미군의 지원을 받았고, 돈이 엄청 많았고, 부대 수도 엄청났다. 팔로군과 국민당 군대의 비율이 10대 1이었다. 그런데 결국 모택동이 이겼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49년 12월 1일까지, 천안문에서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할 때까지, 바로 국공내전의 그 처절한 시기가 우리 민족의 가장 비극적 시기가 된 것이다.
9. 동아시아 30년 전쟁
그런 상황에서 결국 한국전쟁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한국전쟁은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
@ 동아시아 30년 전쟁(1945~1975)
중국국공내전, 한국내전, 중미전쟁, 미소전쟁, 인도차이나 월남전쟁, 닉슨 독트린, 미국의 패배
1945년 8월 15일부터 1975년 미국이 월남에서 물러날 때까지, 동아시아의 일본이 지배했던 지역은 모두 전쟁에 휩싸였다. 그리고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가장 핵심적 고리가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이다.
동아시아 30년 전쟁 중에서 한국전쟁은 한국내전, 중미전쟁, 미소전쟁의 모든 요소를 함축하는 세계사적 대사건으로서 미소 냉전 체제의 출발이었다.
1949년 4월 23일 모택동이 양자강을 건넌다. 그때 물론 김일성도 한강을 건너려는 생각을 한다. 때는 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이나 중국대륙이나 같은 내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여러분이 이해해야 한다. 이걸 이해하려면 다음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10. 인민위원회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가 항복을 했다. 그리고 8월 16일 광주 시청, 광주 도청, 광주의 동사무소, 광주 경찰서, 어디에도 직원이 없었다. 싹 도망가 버렸다. 일제시대 때 해먹었던 새끼들은 일본이 망했기 때문에 16일 출근을 하지 않았다. 8월 16일부터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모든 관청은 싹 비었다. 온 나라의 관청이 텅 빈다.
미국은 맨해튼에서 정전이 났을 때, 그렇게 어마어마한 약탈이 일어났는데, 우리 광주 인민들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질서 정연했고, 한 명의 약탈도 없었다. 이게 몇 천 년을 축척해 온 호남인들의 저력이다.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16일부터 우리는 자치에 들어간다. 코뮌(자치)에 들어간다. 우리 스스로가 조선 전토에 걸쳐 ‘인민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한다.
@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
8,15해방직후 전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민중의 자치조직. 소련은 이 조직을 긍정적으로 활성화시켰고, 미군정은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고 친일세력을 적극적으로 부활시켰다.
인민(人民)이라는 말 때문에 역사적으로 공산당 조직으로 오해하는 데, 그건 잘못이다. 인민위원회는 그냥 보통 백성들이 자치적으로 치안을 담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합했던 것이, 일시적이었지만, 여운형의 건준 조직이다.
@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일제의 패망에 준비하여 국가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 인민위원회가 건준의 산하기관은 아니다. 상호 협조했을 뿐이다.
그러니깐 여운형의 건준 조직이 있고, 각 지방에는 건준 조직의 산하 개념은 아니지만, 스스로 자치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라는 것이 각 도에 있게 된다.
광주도 인민위원회가 8월 30일 결성된다. 좀 늦게 된 편이다.
11. 미군정의 오판
그런데 미국 놈 개새끼들이 9월 8일 들어온다. 미국은 애초에 한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애치슨라인이라고 해서 방위선에서도 빠져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무시했고, 무지막지했다. 미국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전혀 몰랐다. 공부도 안 했다.
반면에 소련은 이전부터 치밀하게, 전문적인 스터디를 해 왔다.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고, ‘스티코프’라는 전문가를 보낸다.
미국은 맥아더의 명령으로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곳인 오끼나와에 있었던 하지 중장을 보낸다. 하지라는 놈은 일리노이 촌놈으로 한국에 대해 무지했다.
‘인민위원회’는 일본이 물러나고 난 공백기에 스스로 질서를 지키며 잘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은 인민위원회를 다 빨갱이로 몰아 숙청하려고 했다.
하지라는 놈은 일제시대 때 경찰했던 사람들, 일제시대 때 도지사 했던 사람들을 돈 줘가면서, 총알 줘가면서 다시 다 불러들였다. 미국 놈들이 와서 ‘인민위원회’는 못 믿겠다고 하면서, 친일파 새끼들한테 국내 질서를 잡아달라고 한 것이다.
미군정이란, 미군이 한국의 정권담당자로서 통치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와 현실에 완벽하게 무지했다. 그리고 인민위원회를 무조건 빨갱이로 몰았다. 이러한 편견을 조장한 단체가 김성수, 송진우의 한민당이었다.
무식한 미국의 군인들이 와서 군정을 시작하였다. 군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정치를 하고,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처음 인민위원회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일제시대 때의 악랄한 놈들을 전국적으로 한 70명 정도를 죽였다고 한다. 한 두 명 정도 심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 정도로 인민위원회는 순했다.
그런데 미국 놈들이 와서 다시 일제시대 때 친일파 놈들을 다시 다 부르면서, 그들을 압박했다. 아무리 순한 인민위원회지만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다. 자치권을 내놓을 수 없다고 하니깐 미군들은 총을 갈기기 시작한다.
그럼 이 사람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타협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산으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산으로 간 사람이 소위 우리나라의 빨치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빨치산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의 광주 코뮌을 생각해 보면 안다. 만일 5.18 광주 항쟁 때 도청에서 죽지 않고, 산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면 모두가 산에 가서 빨치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 전체를 묶은 조직책으로 나중에 ‘이현상’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게 아주 복잡하다.
12. 한국전쟁의 과정과 의미
그렇게 되니깐, 결국 우리나라는 1945년 8월부터 이미 내전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대륙의 국공내전과 똑같다.
한국은 미군정과 더불어 내전에 진입했다. 그리고 6.25는 내전의 단순한 확대에 불과하다. 남침, 북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깐 이러한 내전 상태에서, 김일성의 판단에 남쪽에서 고생하고 있는 인민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주 당연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모택동도 장개석을 밀어 붙여서 천안문에서 개국을 선언했는데, 자신도 한강을 건너서 만세를 불러 ‘조선인민공화국’을 통일국가로 선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미 1947년 봄부터 3만 명의 부대를 중국으로 보낸다.
김일성은 1947년 4월 김책의 지휘아래 3만명의 조선군대를 만주로 이동시켰다. 만주 공산당 병력의 15~20%가 한국인이었다.
모택동 밑으로 보내, 국공내전에 참가시켜 훈련을 시킨 것이다.
김일성은 국공내전에서 조선인민군을 훈련시켰던 것이다.
옛날에는 자료가 없었는데, 지금 이런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6.25사변 직전인 1950년 4월 10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났다.
1950년 4월 10일
김일성, 박헌영과 스탈린 회담.
그리고 스탈린에게 남쪽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서 남쪽을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스탈린은 허락하지만, 미국 때문에 소련의 직접 지원은 어렵다고 한다. 결국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은 모택동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도우라고 연락을 할 테니 중국과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 이런 내용이 문서에 그대로 나온다. 그래서 박헌영과 김일성은 귀국했다가, 1950년 5월 13일 저녁 모택동을 만나러 간다.
1950년 5월 13일
김일성, 박헌형과 모택동회담 한국전쟁발발 불과 한달전이었다.
모택동한테는 이미 스탈린으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그때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택동도 스탈린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런데 스탈린의 연락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민의 무력항쟁을 뒤에서 후원하겠다는 확약을 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5월 16일 귀국을 해서 바로 조선인민군을 7사단 체제로 편재한다.
그때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은 1948년부터 50년 사이에 중국에서 활약하던 자그만치 조선의용군 10만명이 몇 기로 나누어서 돌아와 있었다는 것이다.
1948년 2월 리홍광지대의 귀환을 시작으로 1950년 3월까지 10만명의 조선의용군이 북한으로 귀환하여 조선인민군의 전위조직을 결성했다.
대륙의 모택동과 같이 활약한 조선의용군 부대는 팔로군에서도 엄청 중요한 부대였다. 전위 부대였고, 선전 부대였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았는데, 해방 이후에도 소위 국공내전에 참가했었다.
그러니깐 우리가 6.25사변을 이야기한다면, 한국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서울까지 단숨에 밀고 내려온 사람들은, 북한에 있던 인민군 부대가 아니었다. 중국내전에서 그 역량을 갈고 닦았던 조선의용군 10만이 내려 온 것이다. 방호산 부대와 같은 조선의용군이 밀고 내려온 것이다.
따라서 남침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그걸 남침이라고 해서, 남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침을 유도한 구조적인 원인은 남한 사회의 구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구조를 만든 제 일 원흉은 일본 개새끼들이었고, 그 다음 두 번째 원흉은 미국 놈들이었다.
그러니깐 한국전쟁은 남침, 북침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와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가 이 조선 반도에 저질러 놓은 악랄한 죄악이다.
내 말이 틀리는가? 이러한 비극 속에서 우리 민족은 북한, 남한으로 나누어져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을 벌인다.
생각해보라! 이런 가슴 통탄할 일이 어디에 있는가? 중국 대륙에서 싸우던 조선독립군들이, 상해의 광복군들은 우리 국군으로 들어가고, 조선의용군은 인민군으로 들어간다. 같은 동지였던, 일본을 향해서 36년 동안 그렇게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며, 외적 일본을 향해 싸웠던, 같은 동지였던 우리 민족의 독립혁명동지들이 바로 자신들의 해방된 조국 땅에서 서로 죽이는 비극이 바로 빌어먹을 6.25다!!
이 처참한 역사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지금 광주민중항쟁이 왜 일어났는가? 바로 이 처참한 역사가 반복되어서 일어난 것이다.
우리의 찬란한 독립운동사의 결말이, 이렇게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조선의 민중들은 6.25이전의 역사를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20세기 한민족의 찬란한 투쟁의 모든 성과를 무화(無化)시켰다. 그래서 독립운동사가 우리민중의 가슴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조선독립운동에서 누가 어떤 공을 세웠던지 간에 그들의 역사적 도덕성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왜? 다 잘못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말 천하에 죽일 놈이고, 김일성도 오판을 해도 한참 오판을 했다.
13. 여수순천사건
도대체 여수순천 사건이 뭐냐?
@ 여수순천사건
국방경비대 9개 연대가 15개 연대로 확대되면서 14연대는 현지에서 2천여명의 병력을 보충해야했다. 그리고 이때 좌익동조세력이 대거 들어갔다. 4.3 제주항쟁 이외로도 일제의 악덕을 계승한 경찰과 군인들과의 갈등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까 말했듯이 군정에 함께 인민위원회가 괴멸한다. 대개 괴멸되지만, 강원도 태백산부터 경상도, 지리산 일대의 산악 주변으로는 전부 빨찌산이 되었다. 그런데 가장 안전한 데가 제주도였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끝까지 버텼다.
여러분이 1948년 제주도의 4.3항쟁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 대거 일본을 갔던 사람들이다. 해방이 되니깐 다 돌아왔다. 깨인 지식인들이 많았다. 일본에서 공부했고, 일본에서 노동하고, 일본에서 탄광하면서 거기서 노동운동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당시 제주도는 가장 깨어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지리적인 이유로 미군정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니깐 여기서는 인민위원회가 끝까지 버텼다. 그러니깐 북한에서 내려온 그 개 같은 서북청년단을 내려 보냈다. 그들이 사람들을 죽이니깐 제주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여수에 주둔 중인 국방경비대 14연대를 제주도로 보내려고 한다.
미군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4.3제주항쟁에서 6만여명의 인민이 도륙되었고, 4만명의 인사들이 배를 타고 다시 큐우슈우, 오오사카 등지로 도망갔다. 이들의 상당수가 오늘 재일동포사회를 만들었다.
이 때, 군인들은 동족상잔이냐, 반역이냐를 고민한다. 뭘 선택했겠나? 결국 동족상잔보다는 반역이 낫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동족상잔이냐? 반역이냐?
물론 여수순천사건은 단순히 제주 민란에 대한 진압 문제 때문에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워낙 경찰과 마찰이 심했다. 여수 지역의 경찰이라고 하는 새끼들이 전부 일제강점기 때부터의 개새끼들이었다. 전부 일본경찰출신이었다. 일본경찰출신들이 국내 치안의 주도권을 쥐고, 군인들을 푸대접하고, 보는데서 막 군화발 지르고, 행패를 부리니깐 마찰이 있었다. 그런 등등의 문제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14. 박정희, 전두환
그러면서 어마어마한 좌익세력이 군대 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걸 발설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는 우리나라 군대 내에서 중요한 남로당 포스트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때 박정희소령은 육사1중대장이었다. 박정희를 남로당에 가입시킨 사람은 이재복(李在福)이었고, 그는 사회주의자인 친형 박상희(朴相熙)의 친구였다.
그래서 1963년 윤보선이랑 선거를 할 때, 바로 선거 전날 동아일보 호외가 나왔다. 박정희가 여수순천 반란사건 관련해서, 무기징역 받은 것이 호외로 나갔다.
그래서 다음날 박정희가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당선됐다. 오히려 그런 전력 때문에 그 사람을 당선시켰다.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가 간단하지 않다. 내가 TV에서 이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좌우익의 문제는 복잡한 역사다.
그러나 박정희는 또다시 비굴하게, 자기 동료들을 팔아먹고, 자기 신념을 배반하면서, 살아남는다.
일제강점기 때 그 사람이 대구사범학교를 다녔다. 사범학교에서 황국신민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키우는 그런 교육을 받았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소위 임관 직전의 박정희 모습(1944. 6)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 13호 박정희 죄과가 적혀있다.
난 박정희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여기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만주로 갔는데, 장지락처럼 독립군으로 가지 않고, 만주군관학교를 찾아간 놈은 좀 이상한 놈이다.
그리고 돌아와서 남로당에 들어갔으면, 여수순천사건에서 당당하게 책임을 지고 죽던지 했어야 하는데, 조직을 다 불어서 군내의 남노당 조직을 모두 괴멸시켰다. 남로당은 이 사건으로 완전히 괴멸한다. 그 때 남노당 괴멸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백선엽이다.
박정희는 그렇게 살아남았고,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때 미국은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박상희의 동생이 되었다고 하니깐 북에서 내려 보낸 사람이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이었다. 그리고 박상희의 딸이 바로 김종필 부인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배반을 하고, 만주군관학교을 나온 사람, 말마다 일본말이 나오고, 일본군가가 튀어나오고, 황국신민의 위대한 덕성을 찬양했던 사람,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받들고, 국보위를 만들기 위해서 광주인민을 학살했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전두환이다. 전두환을 찢어 죽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나?
5,18광주항쟁 때 광주인민들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런데 보도지침으로 광주인민이 북한에게 오판하지 말라는 한 것은 일체 보도하지 말라고 했다. 왜? 광주인민을 싹 빨갱이로 몰아야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랑 같이 다 빨갱이로 몰아야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사주해서 전남대 학생들에서 돈을 주어서 폭도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빨갱이 새끼들이 지랄을 하니깐 다 죽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광주항쟁을 빌미로 국보위를 만들어, 자기가 대통령이 되었다.
15. 고진감래
여기까지가 우리 민족이 겪은 비극의 역사이다. 이것이 동학으로부터 광주민중항쟁까지 근대사를 살아온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꾸준한 민본(Pletharchia, 플레타르키아)의 확대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중 동학에서 광주민중항쟁까지의 역사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민주의 기반을 확보한 투쟁의 유기적 단락이다.
여러분들은 정확하게 생각하셔야 한다. 누가 잘 했고, 누가 잘못했는가? 나는 말하기가 싫다. 내가 여러분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않고, 내가 여기서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않다.
우리 모두가 역사에 대해서 죄인이고, 우리는 너무 뼈아픈 역사를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고진감래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민족은 너무도 뼈저리게 잘못된 역사를 살아왔고, 너무도 수탈당하는 역사를 살아왔고, 너무도 극한까지 수탈당하고, 짓밟혀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당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21세기 우리 민중에게는 희망만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불의와의 투쟁보다 정의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보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도올-
앞으로 여러분들이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전하고, 끊임없이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고,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인식해야 우리의 미래가 열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태까지 역사를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보지 못했다.
저 도올 김용옥은 오늘의 우리자신 모습을 있게 해주신 호남의 정의로운 선혈들과 광주민주영령께 고개를 숙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새로운 역사적 비전을 가지고, 만들어 가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데 분명히 여기 빛고을 광주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빛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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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30년 전쟁과 광주민주항쟁
1. 동아시아 30년 전쟁(1945년 ~ 1975년 월남전쟁)
⑴. 한국동란: 1950.6.25 →1945.8.15 발발(좀더 다각적이고 공평한 접근이 필요)
- 인민위원회: 8.15 해방직후 전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민중자치조직
※ 미 군정하 인민위원회 강제 해산 - 빨찌산의 태동
* 1946.10.1. 대구폭동사건: 대구노동평의회와 경찰의 충돌
* 1948. 4.3. 제주 민중항쟁 : 47.3.1~54.9.21 소요사태의 진압과정에서 수 많은 인명피해 발생
* 1948. 10.19 제주 소요사태 진압 출동 거부 (좌익세력의 반란)
- 건국준비위원회:1945.8.15 여운형의 주도하 일제패망에 대비 국가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결성(인민위원회와 상호협조)
* 1947. 4. 김책지휘하 조선인민군 3만명 만주로 이동 (훈련 목적)
* 1948.2. 리홍광 지대의 귀환 ~ 1950.3. 조선의용군 10만명 귀환 - 조선인민군의 전위조직으로 활동
* 1950.4.10. 김일성,박헌영과 스탈린 회담(모스코바)
* 1950.5.13. 모택동과 회담(스탈린의 지시에 의거- 국제코민테른 체제)
※ 일본은 항복선언과 동시에 미국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 패전국으로써 모든 책임에서 격리 됨
⑵. 중국의 국공 내전 : 1945. 8.14. 태평양전쟁 종료, 국-공 내전(49년4월 모택동 홍군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 점령)
- 1911년 신해혁명: 쑨원의 3민주의(민족, 민주, 민생)
(북경소재 국회: 원세개 총리로 지명, 남경 소재 정부: 쑨원 총통)
- 1926년 장개석 국민당 정부 북벌 추진
- 1927년 모택동 농민중심의 홍군, 혁명운동 주도(임시정부 주석: 김구 취임)
- 1932년 만주사변(1931년9월)을 계기로 국-공합작 항일투쟁 전개
- 1949.12.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 중국의 항일 무장 단체(조선인)
① 동북항일연군 (1935년) 3로군 11군으로 구성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
중국공산당 중앙의 8·1선언에 따라 만주지방의 동북인민혁명군과 반일무장대를 반일구국의 기치 아래 연합하여 만든 부대.
- 1934년 3월 동만특위와 유격대 책임간부회의(연길현 삼도만 장지영)
-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결성, 사부(師部) 발족 ( 연길·화룡·왕청·훈춘 등 각 현에 조직되어 있던 유격대 통합)
- 사장(師長): 조선인 주진(朱鎭), 정치위원: 중국인 왕더타이[王德泰] 취임
② 조선의용군
- 1938.10 조선의용대 창설(좌파 4당 연합체: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조선혁명청년동맹(최창익)
- 1941.7.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결성(린현): 신악, 윤세주, 박효삼, 김창만 주도
- 1942.7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허베이성 세현)
- 1945.8.15 8로군 동북 정진군에 편입
③ 광복군
- 1920. 봉오동, 청산리 전투후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무장독립단체 활동 위축
- 1932. 1. 이봉창의거, 4월 윤봉길의거 계기로 한중연합전선의 기틀 마련
- 1940.9. 임정산하 무장 독립군 창설(충칭)
※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
- 동북지역(무장투쟁) 화북지역(의용투쟁) 강남지역(외교투쟁)
2. 국제 정세 변화
* 산업혁명(1760 ~ 1840 )으로 산업부르주아지, 임금노동자 출현. 급격한 도시화 현상 초래
- 명예혁명(1688년): 의회민주주의 태동 - 미국독립혁명(1776년) - 프랑스대혁명(1789년): 시민의 정치권력 장악
※ 1832년 부르주아지 정치참여 인정, 제1차 선거법 개정
* 코민테른(1919 ~1943)
- 1917년 볼세비키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의 이론적 실천적 상징
※ 제1인터내셔널(1864~1872): 1862년 만국박람회 참석한 독일, 영국, 프랑스 노동자 주도하 결성
- 1867년 노동자 선거권 인정: 차티스트 운동 결과
* 파리강화회의(1919.1 ~1920.1) 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문제 협의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수용 : 민족의식을 지닌 한 집단은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상
(식민지배를 받는 국가와 민족의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줌: 3.1운동에 영향을 미침)
* 제2차 세계대전(1939.9 ~ 1945.8) 독일과 쏘련의 폴란드 침공, 일본의 중국침공(1937.7)
* 카이로 선언(1943.11.27) 루스벨트·처칠·장제스
- 카이로 선언 주요 내용
각 군사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 포츠담 선언(1945.7.26) 트루먼, 처칠, 장제스 , (스탈린 서명)
-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 일본의 항복선언(1945.8.14) : 제2차세계대전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