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야신들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방편의 오묘함은 참으로 다채롭고 불가사의합니다. 보덕정광(普德淨光) 주야신은 게으른 중생의 마음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 선재와 32번 째 보덕정광(普德淨光) 주야신의 만남
“집에 있으면서 방일한 중생에게는 부정한 생각을 내게 하고, 싫은 생각, 고달픈 생각, 핍박하는 생각, 속박되는 생각, 나찰이라는 생각, 무상하다는 생각, 괴롭다는 생각, 내가 없다는 생각, 공한 생각, 생이 없는 생각, 부자유하다는 생각,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생각을 내게 한다.”
방일하여 게으름에 빠져 있는 중생의 마음은 오히려 더 한가롭지 못합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일어나 괴롭히니 혼침이나 도거에 빠지게 됩니다. 현대에는 넘쳐나는 음식과 다양한 약물, 마음을 뺏는 오락물 등이 있어 이들 기호품들로 마음이 도피합니다.
이러한 중생들에게 방일의 고통을 주어 궁극에는 “오로지 법의 즐거움에 머물게 한다. 자신이 집으로 여기는 삿된 것에서 벗어나 진실한 집에 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괴로운 생각이 들면, 이는 수행을 하지 않고 있는 나에 대한 주야신의 경고라는 것입니다. 고통은 발심과 정진의 계기가 됩니다. 나에게 오는 시련과 고통들은, 참으로 감사하게도, 주야신의 ‘가면을 쓴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는 것이지요.
선재가 37번 째 만난 대원정신력구호일체중생(大願精神力救護一切衆生) 주야신은 ‘출리심(出離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 같지 않은 삶을 그냥 묵인한 채 삽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래’ ‘내가 뭘 하겠어’, ‘세상 또는 사회의 편견을 바꿀 수 없어’, ‘ 그냥 대충 맞춰주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합리화 합니다.
하지만, 출리심 즉 ‘마음을 내는 것’ 자체가 온 우주를 바꿀 만큼 강력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지식을 보고) 마음을 내니 그와 같은 경지(同行)를 얻었다”,
“열 가지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니, 불찰 미진수의 보살님들과 같은 행을 얻었다”라고 합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마음을 낼 때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공익(公益)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있다면, 저절로 공익되는 일만 보이고 공익되는 일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아라는 암울한 존재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 타인을 이롭게 하겠다는 보살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살로서의 삶에 첫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우선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선재동자 여정의 막바지에는 보살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과 단계가 제시됩니다. 보살행을 원만히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삼매를 얻어 모든 부처님을 보고, 청정한 눈을 얻어 모든 부처님의 상호와 장엄을 항상 살펴야 한다’고 선지식은 말합니다. 보살행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은 우선 청정삼매를 얻어 부처님 세계를 보는 일입니다.
먼저 ‘크고도 깊은 지혜의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보살이 장엄해탈문을 얻을 수 있는 열 가지 법장(法藏)’이 제시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가 먼저 나열돼 육바라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 덕목인 ‘보시·지계·인욕’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위한 것이고, 뒤의 세 가지 ‘정진·선정·지혜’는 상구보리(上求菩提)를 위한 것으로 육바라밀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대승불교의 ‘보살 정신’을 압축해 놓은 것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추가 된 항목들이 방편·서원·힘·청정지혜로 모두 합해 열 가지의 법장을 이룹니다.
그리고 세상의 광명이 되는 ‘보살로 태어나는 열 가지 장(藏)’이 공개됩니다.
동자여, 보살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면, 능히 보살의 행을 원만히 할 수 있다. 보살행을 원만하게 하는 열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청정한 삼매를 얻어 모든 부처님을 항상 봄이요, 둘은 청정한 눈을 얻어 모든 부처님의 잘생긴 모습으로 장엄함을 관찰함이요, 셋은 모든 여래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의 큰 바다를 앎이요, 넷은 법계와 평등한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의 광명바다를 앎이요, 다섯은 모든 여래의 털구멍마다 중생의 수효와 같은 큰 광명바다를 놓아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케 함이다. 여섯은 모든 여래의 털구멍마다 모든 보배 빛 광명불꽃 내는 것을 봄이요, 일곱은 생각마다 모든 부처님의 변화하는 바다를 나타내어 법계에 가득하고 모든 부처의 경계에 끝까지 이르러 중생을 조복시킴이요, 여덟은 부처님의 음성을 얻어 모든 중생의 말에 상당하는 세상 온갖 부처님의 법륜을 굴림이요, 아홉은 모든 부처님의 그지없는 이름바다를 앎이요, 열은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을 조복시키는 부사의하고 자재한 힘을 앎이다.
이것을 성취하면 보살의 선근을 증장시키면서도 고달프거나 싫거나 물러날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 단계까지 오면, 선재동자가 간절히 찾던 ‘보살행과 보살도’에 대한 답들이 거의 다 제시되게 됩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몸을, 어떤 사람이 할퀴고 찢는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통절하겠는가? 보살은 자신을 위해 일체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생사와 욕락에 탐하지 않으며, 뒤바뀐 생각·소견·마음의 얽매임·애착·억측의 힘에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중생들이 모든 길에서 한량없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큰 원력으로 널리 거두어 주며, 자비와 서원의 힘으로 보살행(菩薩行)을 닦는다.
그것은 일체 중생의 번뇌를 끊기 위함이요, 여래의 일체지 지혜를 구하기 위함이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함이요, 모든 광대한 국토를 맑게 장엄하기 위함이요, 중생들의 욕락과 그 몸과 마음으로 행하는 일을 맑게 다스리게 때문에, 생사 중에서도 고달픈 줄 모른다.”
위에 인용한 문구는 어느 선지식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선재동자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살행과 보살도가 무엇인지 묻는 자신의 화두에, 스스로 답하는 선재동자를 보게 됩니다. 어느새 자신이 ‘보살’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선재동자는 점점 남으로 가다가 50번 째로 묘한 뜻 꽃문 성[妙意華門城]에 이르러 '환술처럼 머무르는 해탈[菩薩幻住解脫]'을 얻은 덕생동자와 유덕동녀를 만났다. 이 해탈을 얻었으므로 모든 세계가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으로 보나니 인연으로 생긴 탓이며, 모든 중생이 다 환술처럼 머무나니 업과 번뇌로 일어난 탓이며, 모든 세간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무명(無明)과 존재[有]와 욕망[愛] 따위가 서로 인연이 되어 생기는 탓이며, 모든 법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나'라는 소견 따위의 갖가지 환술과 같은 인연으로 생기는 탓이며, 모든 중생의 생기고 없어지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운 것이 모두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허망한 분별로 생기는 탓이라고 하였다.
또한, 모든 국토가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뀌어 무명으로 나타나는 탓이며, 모든 성문과 벽지불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것이니 스스로 조복하고 중생을 교화하려는 여러 가지 행(行)과 원(願)으로 이루어지는 탓이며, 모든 보살 대중의 변화하고 조복시키는 여러 가지 일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서원과 지혜의 환술로 이루어지는 탓이며, 환술 같은 경계의 성품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동자와 동녀는 자기의 해탈을 말하고는 부사의한 착한 뿌리의 힘으로써 선재동자의 몸을 부드럽고 빛나게 한 후 여유롭게 말하였다. 이 남쪽에 해안(海岸)이라는 나라가 있고 거기 대장엄(大莊嚴) 동산이 있으며, 그 안에 광대한 누각이 있으니 이름은 비로자나장엄장이라. 부사의한 해탈에 머무른 미륵보살마하살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을 위하여 이러한 경계를 나타내며, 이러한 장엄을 모으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재는 계속 (51)미륵보살 (52)문수보살 (53)보현보살과의 만남을 끝으로 긴 여정을 마치었습니다.
* 선재와 51번 째 미륵보살의 만남
선재동자는 왜 문수보살을 두 번 만나는가? 선재동자는 가장 첫 번째 선지식으로 문수보살을 만나고, 52번째 선지식으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난다. 같은 문수보살이지만, 처음 선재의 구도를 독려한 문수보살과 여정의 거의 최종 단계에 이르러 다시 만난 문수보살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같은 ‘반야지혜’이지만, 그 강도와 수준은 천지차이이다.
전자는 한 방울의 물이 머리에 똑 떨어졌다고 하겠고, 후자는 그 물의 근원인 바다에 풍덩했다고 비유할 수 있겠다.
선재동자가 길고도 머나먼 구도의 행각 속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것은 ‘반야지혜’였다. “수행이란 반야지혜를 키워나가는 것, 또는 완성해나가는 것” 이라는 선사들의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문수보살은 선재를 ‘보현행’의 도량에 들게 하고 사라진다. 끝이자 또 다른 시작. 선재는 다시 보현보살의 행과 원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입법계품의 기나긴 여정은 막을 내린다.
입법계품의 막바지 여정에 문수보살을 만나는 장면. 이때 문수보살은 멀리서 바른 손을 펴서 1백 10유순을 거쳐서 선재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말한다. “만약 선재의 믿음의 뿌리(信根)이 약했더라면 마음이 나약하여 이 같은 공을 닦는 행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 선재 이야기를 마치고 지장경 11품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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