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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41권 황해도 黃海道 [1]
본래 조선(朝鮮) 마한(馬韓)의 옛 지역인데, 후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그 지역을 지키지 못해, 마침내 신라에서 합병하였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궁예(弓裔)가 차지하게 되었다가 고려 태조가 그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다.
성종(成宗) 14년에 국내를 10도(道)로 나누었는데, 황주(黃州)ㆍ해주(海州) 등의 관할이 모두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으며 그 후에 고쳐서 서해도(西海道)로 하였다.
후에 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은율(殷栗) 등 현(縣)이 원(元) 나라에 들어갔었는데,
충렬왕(忠烈王) 4년에 원 나라에서 되돌려주었다. 후에 황주목(黃州牧)ㆍ안악군(安岳郡)ㆍ철화현(鐵和縣)ㆍ
장명진(長命鎭)을 서북면(西北面 평안도)에 이속시켰다가 신우(辛禑) 14년에 다시 본도에 예속시켰다.
본조(本朝) 태조 4년에 풍해도(豐海道)로 고쳤다가 태종 17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목(牧) 4, 도호부(都護府) 4, 군(郡) 7, 현(縣) 11을 거느렸다.
관원 관찰사 : 1명.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1명인데 관찰사가 겸임한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1명인데 관찰사가 겸임한다. 도사(都事)ㆍ심약(審藥)ㆍ검률(檢律) : 각 1명이다.
[비고]
연혁 광해군 8년에 황연도라 고쳤다가 인조 원년에 복구되었다.
황주목 黃州牧
동쪽은 서흥부(瑞興府) 경계까지 51리, 남쪽은 봉산군(鳳山郡) 경계까지 23리, 서쪽은 바다까지 50리,
북쪽은 평안도(平安道) 중화군(中和郡) 경계까지 39리이다. 같은 도의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3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8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취성군(取城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목(牧)을 설치하였으며 얼마 후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고, 황주 천덕군(天德軍)이라 일컫고,
관내도에 소속시켰다. 현종(顯宗) 때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또 목으로 고치고 서해도에 소속시켰다.
고종(高宗) 때에 고을 사람들이 거란의 군사를 막아내지 못하였다고 하여 지고령군사(知固寧郡事)로 강등하였
다가 후에 다시 황주목으로 칭하였다.
후에 서북면(西北面)으로 옮겨 예속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도로 서해도에 예속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도 그대
로 하였으며, 세조조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2 : 평산(平山)ㆍ서흥(瑞興). 군(郡) 6 : 봉산ㆍ안악ㆍ재령(載寧)ㆍ수안ㆍ곡산ㆍ신천(信川).
현(縣) 5 : 신계(新溪)ㆍ토산(免山)ㆍ우봉(牛峯)ㆍ문화(文化)ㆍ장련(長連).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ㆍ역학훈도(譯學訓導) : 각 1 명.
군명 동홀ㆍ취성ㆍ고령(固寧)ㆍ제안(齊安)ㆍ용흥(龍興)ㆍ성성(聖城)ㆍ대룡(大龍)ㆍ동울(冬鬱)ㆍ대홀(大忽)ㆍ
천덕군(天德軍).
성씨본주 윤ㆍ김ㆍ백ㆍ지ㆍ노(盧)ㆍ동(董)ㆍ단(段)ㆍ황(黃)ㆍ최ㆍ석(石)ㆍ황보(皇甫)ㆍ변(邊) : 촌(村). 노(魯)ㆍ
주(朱)ㆍ설(薛)ㆍ홍ㆍ위(魏)ㆍ강(康)ㆍ서 : 모두 이주해 왔다. 철화(鐵和) 나(羅)ㆍ최ㆍ홍ㆍ이 : 모두 속(續).
풍속 농사짓고, 누에치기를 힘쓰며 음사(淫祀)주D-001를 숭상한다.
형승 나라의 금대(襟帶)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記文)에, "고을 서북쪽에 대동강(大同江)이 있고, 동남쪽
에 절령(岊嶺)이 있으며, 극성(棘城)이 있는데 모두 나라의 요새지다." 하였다.
산천 벽화산(碧花山) : 고을 동쪽 4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천주산(天柱山)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칠봉산(七峯山) :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여계산(餘界山) : 고을 동쪽 50리에 있다.
발산(鉢山)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월라산(月羅山) : 고을 남쪽 40리에 있다.
정방산(政方山)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또 봉산군에도 보인다. 삼방산(三方山) : 고을 남쪽 40리에 있다.
천진산(天眞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봉명산(鳳鳴山) : 용복산(龍伏山)ㆍ건지산(乾之山) : 모두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또 봉산군에도 보인다.
독산(獨山)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고을 동쪽 25리에 있다.
구현(駒峴) :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상산점(上山岾) : 고을 남쪽 40리에 있다. 바다 : 고을 서쪽에 있다.
선도(鐥島) : 고을 서남쪽 15리에 있는데 어량(魚梁)이 있다.
철도(鐵島) :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옛날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성종 15년에 물과 풀이 없다고 하여,
안악 저도(安岳猪島)와 풍천 초도(豐川椒島)로 옮겨서 방목하였다.
비파곶(琵琶串)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철화강(鐵和江) : 철화현에 있다.
○ 공민왕(恭愍王) 8년 7월에, 강절 평장(江浙平章) 화니적(火尼赤)이 바람으로 표류하여 와서 이 강에 정박하
니, 쌀과 포목을 하사하고 행성 원외(行省員外) 신인적(申仁適)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는데 화니적이 수정
도끼를 바쳤다.
○ 홍건적이 고을에 침입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목사 민후(閔珝)가 싸워서 20여 명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았고
병기를 노획하여 헌상(獻上)하였다.
어초천(於草川)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물의 근원이 수안군 대현(大峴)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급수문(急水門) : 고을 서쪽 30리 바다 어귀에 있는데, 본주 및 용강(龍岡)ㆍ안악의 물이 서로 부딪치는 곳이다.
박배포(朴排浦) : 선도(鐥島)의 북쪽에 있다.
토산 실[絲]ㆍ여석(礪石) : 천진산(天眞山)에서 생산된다. 자초(紫草)ㆍ적토(赤土) : 고을 남쪽 2리에서 나는데
품질이 가장 아름답다. 벌꿀ㆍ무쇠 : 철화현(鐵和縣)에서 생산된다. 위어(葦魚)ㆍ숭어ㆍ붕어ㆍ눌어(訥魚)ㆍ
금린어(錦鱗魚)ㆍ게.
봉수 천주산 봉수(天柱山烽燧) : 남쪽으로 봉산군 건지산(乾之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평안도 중화군 운봉산
(雲峯山)에 호응한다. 비파곶(琵琶串) 봉수 : 서쪽으로 안악군 월호산(月乎山)에 호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황주가 서도(西道)의 요긴한 지방에 있어, 사신과 거마
(車馬)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고려 때에는 관내도에 속하였는데 토지가 기름지고, 백성이 많아서 풍부하기가
여러 고을에 제일이었으며 군(軍)을 설치하여 천덕(天德)이라 하였다.
후에 황해도에 예속하였으며 본조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하였다. 고을 서북쪽에 대동강이 있고, 동남쪽에 절령
(岊嶺)ㆍ극성(棘城)이 있으니, 모두 국가의 요새지로서 제어하는 일을 소홀하게 할 수 없고, 관사(館舍)도 사신
과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니 역시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관사(館舍)도 사신과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니 역시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거정이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황주에 무릇 수십 번이나 왕복하였으나 공해(公廨)가 낮고 좁은데다 거
의 다 무너질 지경이며 한 광원루(廣遠樓)가 있기는 하지만 사면 처마가 낮게 드리워져서 시루 안에 앉은 것
같으니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며 흉금을 활짝 펴 볼 수가 없었다.
서거정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황주 고을이 생긴 후로 태수(太守)가 된 이로서 어진이는 몇 명이요, 유능한 이
는 몇 명이었던고. 어찌하여 한 사람도 폐지되고 무너진 것을 수리하고 일으키는 이가 없어서 이렇게까지 되었
는가.' 하였다.
병신년 봄에, 호부(戶部) 기순(祁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왔는데,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로
두 사신을 인도하여 주(州)에 이르렀다. 마침 청명절(淸明節)이라 자리를 광원루에 마련하였는데, 갑자기 풍우
가 누각에 들이쳐서 자리를 대청으로 옮기니 대청이 또 낮고 좁은데다 또 앞 기둥이 없이 띠풀 덮은 처마로 보
충하였다.
한창 잔치를 하는데 비가 그치지 않고 처마 물이 줄을 이은 듯하니, 일을 맡은 사람들이 옷이 젖어서 모양 없이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서거정이 이 고을에 대한 불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었으랴.
이듬해인 정유년 봄에 족질(族姪) 통정(通政) 권정(權侹)이 목사가 되자, 개연히 중수하여 새롭게 할 것을 감사
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알려서 허락을 얻고 계획을 세워 시작하려 하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무술년 봄에, 광원군(光原君) 김가선(金嘉善) 백겸(伯謙)이 뒤이어 목사가 되고 또 통판(通判) 이효종(李孝宗)
으로 보좌하니 정령(政令)이 잘 행하여져서 사람들은 화합하여 백성들이 관가 일에 나오기를 즐겁게 여겼다.
이에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돌을 뜨고 기와를 굽는 등 온갖 물력을 모두 관청 물자로 하며, 실끝 털끝만큼도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으며 감사 이맹현(李孟賢)이 그 비용을 보조하여 옛터를 사용하되 그 규모를 더 크게
하여 대청 3칸을 세우고 전후에 툇마루가 있어 넓고 환하며 동서쪽으로 각각 헌(軒)이 있고 방이 있어 서늘하고,
더운 곳을 마련하였으며 행랑과 마구간과 창고도 모두 정돈되었다. 또 난간 동쪽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제도를 전부 새롭게 하니 화려한 것이 한 도의 장관(壯觀)이 되었다.
그 후로 관서(關西) 지방에서 오는 이들이 모두 감사의 정사를 칭찬하고 또 관해(官廨)의 장대함을 극구 칭찬하
였다.
서거정이 이 말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전일 내가 이 고을에 대한 불만이 이제 와서 전부 새롭게 되었
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을 만나야만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얼마 후 감사가 글을 보내어 기문을 청하기
에 내가 보니 이때에 수령(守令)이 된 이들이 대부분 그럭저럭 세월이나 보내며 관사를 마치 잠시 쉬어가는 여
관처럼 여기며 한 목재와 한 돌이 무너져도 다시 수리하려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다가 다 무너진 후에야 고치는
데 무너진 다음에 고치니 그 폐단이 여러 배나 된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편안하게 하는 도리로 백성을 부
리면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는다." 하였다.
지금 감사가 폐지되고 무너진 것을 수백 년 후에 고쳐 이룩하되 백성 부리기를 때에 맞추어 하는 도리주D-002
를 다하니 어질고 능한 것이 예전의 태수보다 뛰어남이 어찌 만배나 되지 않는가.
일찍이 증남풍(曾南豐 송 나라 증공(曾鞏))의 말을 들으니 이르기를, "무릇 고을에서 유능한 수령 만나기가 어
려우며 다행히 유능한 수령을 만나더라도 일을 일으키기가 어렵고 다행히 일을 일으키더라도 다음 사람이 폐
지하고 무너뜨리지 않게 되기가 또 어렵다." 하였다.
지금 황주에서는 다행히도 유능한 수령을 만나고 또 다행히 일을 일으키게도 되었는데 다만 알지 못할 것은 감
사 이맹현을 이어 오는 이가 감사의 좋은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대저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에 공사를 일으킨 것은 반드시 써서 칭찬하기도 하고 폄하하기도 하는 뜻을 표시
하였다.
이에 서거정도 삼가 그러한 뜻을 본받아서 그 사실을 바로 써서 훗날에 오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요, 감
히 감사를 위하여 지나치게 칭찬함이 아니다." 하였다.
신증 서목(徐穆)의 시에, "요동(遼東) 정벌하던 장병들 해골도 많이 버려졌으니 그 혼백이 아직도 창을 휘두르는
듯. 지난 일 아득하여 흐르는 물처럼 지나갔으니 혼 부르며 애도하는 노래 차마 부르지 못하겠네." 하였다.
○ 천금 준마를 타고 백금 갖옷을 입고서 강개하게 동정(東征)하여 봉후(封侯)주D-003하기 바랐네.
이기고 지는 것이야 병가(兵家)에서 원래 정할 수 없는 것, 남아(男兒)가 한 몸 죽어 골짜기를 메웠다네.
○ 온갖 신령 분주히 앞을 인도하는데 하늘 위의 조서(詔書)가 바다 모퉁이에 비치네.
내가 바로 옥황(玉皇)의 향안리(香案吏)라, 산귀(山鬼)들이야 감히 야유하지 못하리.
○ 판서(判書)의 깊은 계책 가는 길 멈추려는데 극성(棘城)의 옛일을 조용히 들려 주네. 귀신이 지각이 있다면
원통함이 더욱 심하리니, 전생이 태평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 한하리.
○ 당고(唐皐)의 시에, "황해(黃海)로 달리는 길 해는 아직 저물지 않았는데, 동쪽 나라 사람들 왕래하며 사신을
기다리네. 소나무 가지 길에 드리우니 말이 자주 놀라고 버드나무 수풀을 이루었으니 까마귀 자기 좋겠네.
동생(董生)의 부(賦)주D-004 잘 짓던 것 생각나니, 부질없이 한(漢) 나라 사신 신선의 떼배인가 의심하네.
주D-05 내일 평양(平壤)을 지날 때에는 끝없는 긴 강에서 저녁놀을 보내리."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하룻밤 사이에 눈꽃[雪花]이 갈 길에 가득하니, 새벽에는 하얗게 깔린 것 놀라겠네.
토끼는 바위 골짜기 생각하나 구멍을 못 찾고, 기러기는 물가로 지나다가 갈대밭 잃었으리.
숙맥(宿麥)주D-006은 소자(蘇子)의 글귀를 지을 만도 하고, 외로운 배는 섬계도(剡溪圖)주D-07 그릴 만하네.
가는 길 계산하니 점심에 생양관(生陽館)에 이르러, 직접 대 화로[竹爐]에 차를 끓이리." 하였다.
○ 광원루(廣遠樓) 앞에 말을 쉬었는데, 송별하는 이 자리에 또 금술잔 드는구나. 국왕은 가는 길 머물게 하려는
뜻 많으나, 사신의 임금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하리. 등잔 아래 한 항아리 밤 술자리 마련했는데,
말 앞의 쌍깃발은 빨리 가기 재촉하네. 바삐 삼한(三韓)땅을 왕래하다가 여가를 겨우 얻어 시를 짓노라.
누정 광원루(廣遠樓) : 객사 동쪽에 있다.
○ 고윤(高閏)의 기문에, "천순(天順) 원년 정축(세조 1년) 중하(仲夏)에 명을 받들어 조선에 오니, 국왕이 우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옛법을 준수하여 호조 판서 박원형(朴元亨)을 보내서 원접사(遠接使)로 나와서 맞
이하였다.
황주에 도착하니 유사(有司)가 예법에 의거하여 잔치를 역관(驛館)에서 베풀었는데 술이 다 된 다음, 같이 온
사신 한림수찬(翰林修撰) 진즙희(陳緝熙)가 웃으면서 그 왼쪽에 있는 누각을 가리키는데 광원(廣遠)이란 현판
이 걸려 있었다. 이날은 석양이 서쪽에 내렸기 때문에 서운하지만 그냥 자고 이튿날 아침 옷깃을 바로하고 단
정하게 앉아 있으니 마침 판서가 들어와서 접견하고, 드디어 끌고서 함께 누각에 올라갔다.
누각은 모두 3칸인데, 단청한 기둥과 날아갈 듯한 지붕에 겹 처마와 각도(閣道), 좌우쪽에 사다리를 설치하여
난간을 붙잡고 구부리고서야 올라가게 되었다. 누각 위에는 모두 선을 두른 자리가 깔려 있는데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어서 항상 객이 올라와 노는 이가 있는 것 같았다. 누각 동북쪽으로는 산이 막고, 서남쪽으로는 트였는
데 붉은 흙의 들판이 평평하고 넓어서 1만 마리의 말을 세워도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솔과 칡덩굴은 산 아지랑이를 띠어 울창하게 푸르며 벼와 삼[禾麻]은 비를 만나 무럭무럭 자라니 이것은 이 누
각의 넓은 것이요, 저 길이 중국에 통하여 만리로 뻗어서 1만 리의 직공(職貢)을 수행하고 경하(慶賀)를 드리는
데 자칫하면 해가 바뀌어서야 돌아오게 되며 한숨 쉬며 멀리 바라다보면 기러기는 날아 보이지 않고 구름이 깊
으니 이것은 그 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누각의 넓고 먼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이치에 있고 형적(形迹)에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
대개 물(物)이라는 것은 양(量)이 있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어 양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으니 어찌 넓을 수 있
으랴. 또 잡음[執]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니 잡음이 아니면 오래 갈 수 없으니 어찌 멀 수 있으랴.
그러므로 이 누각에 올라서 터득함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일만 가지 이치를 한 몸에 모아서 사해 팔황(四海八
荒)을 모두 내 문턱 안에 오게 하여 문장(文章)으로 발현하고, 사업으로 건설하여 천백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아야만 거의 가깝고 작은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내가 붓을 들고 글을 쓰려다가 보니 북쪽 산이 푸르게 홀로 솟아 높이 나는 형세가 있고, 여러 봉우리들이 그 뒤
에 읍(揖)하고 서서 사모하여도 다가갈 수 없는 것이 꼭 우리들 사람 같은 점이 있는데, 아깝게도 내가 용렬하여
여기에 크게 얻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훗날, 뜻을 같이하는 선비가 뒤를 따라 오르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지
금으로부터 옛날을 생각하고 물(物)을 보아서 회포를 일으킬 것이며, 그 형적만을 구경할 것이 아니라 힘써서
그 이치를 구한다면 이른바 넓고도 멀다는 것이 또 이 누각의 전유물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하여
둔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말발굽 흰 구름 무더기를 밟아 들어가니, 우뚝한 층루(層樓) 여기 있구나. 멀고 가까운
밭들엔 벼, 수수 심어 있고, 이곳엔 티끌 붙을 땅 없네. 봉우리 머리에 해가 지니 새소리 이제야 고요하고, 소나
무 위에 구름 돌아왔는데 학은 아직 오지 않네. 천고에 올라와 노는 이 강개(慷慨)한 생각 같으리,
시를 지으니 이내 몸이 중선(仲宣)주D-008의 재주에 부끄럽구나." 하였다.
○ 진가유(陳嘉猶)의 시에, "첩첩 층층한 멧부리에 온갖 초목 무성한데 한 누각이 소쇄(瀟酒)하게 산을 마주 섰
네. 여덟 창은 일천 숲의 빼어남을 한껏 당겨 들이는데, 사방 자리엔 한 점의 먼지도 없구나. 뜰안 나무에 바람
일어나니 까마귀 흩어져 가고, 옅은 황색(黃色)이 달 아래 걷히니 제비가 돌아오네. 가벼운 저 구름아, 시를 재
촉하는 비주D-009 보내지 말라. 나는 자건(子建)의 재주주D-10 아니네." 하였다.
○ 장령(張寧)의 시에, "높은 누각 푸른 산빛 사이에 높이 솟았는데, 경치가 멀리 트여 나그네의 얼굴 펴게 하네.
꽃다운 풀은 석양녘 하늘 밖의 길인데, 어지러운 봉우리는 남은 눈[雪] 바다 가운데 산이네. 연기가 들빛에 엉
기니 촌락이 작아지고, 바람이 변방 소리[邊勢] 전하여 사냥한 기사(騎士) 돌아오네. 문득 생각건대 중국의 서
울에는 봄이 바다 같으니, 봉래궁궐(蓬萊宮闕)에 오색구름이 한가하리."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행차가 잠시 쉬어 황주로 향하는 객과 함께 광원루에 오르네. 푸른 공중에 황학(黃鶴)을
불러 내릴 만하고, 청산은 흰 구름 뜨는데 걸리지 않네. 단청한 난간 굽이굽이에 일찍이 취해 놀던 곳, 옅은 황
색(黃色) 드리운 발 걷어올리지 말라. 경국(京國 한양(漢陽))에서 한 번 밥 먹은 것도 잊을 수 없는데, 시를 지으
려니 오히려 매추(枚鄒)주D-011에 부끄럽구나."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여기는 동방의 제일 고을, 대부분 좋은 경치 높은 누각 위에 있네. 일천 산에 비 지나니
하늘이 넓기도 하고, 일만 골짜기에서 구름이 오니 땅이 뜨려 하네. 신선이 취하여 돌아가니 바람이 물 같고,
미인이 노래를 끝내니 달이 갈고리 같구나. 올라와 구경하며 시 짓기 어렵다 한탄을 마소, 늙은 이 몸은 예전
부터 추(鄒)가 성(姓)이 아니라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새벽 하늘 처음 개고 눈[雪] 무더기 쌓이니, 사면이 병풍인데 중간에 앉았네.
찬 기운 옥우(玉宇)에 스며드니 인간 지경 아니요, 맑기가 얼음병주D-012처럼 환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
난간을 의지해 웃으며 붉은 해가 가까이 오는 것 붙잡으려 하고, 발을 걷고서 한가롭게 흰 구름 오는 것 놓아 두
네. 문장(文章) 태사(太史)가 좋은 글귀 남겼으니, 평생의 탁월한 재주 부끄럽지 않구나." 하였다.
○ 사신이 말을 몰아 황도(皇都)를 떠났는데, 지쳐서 봄빛 찾아 누각에 오르기 익숙하다네. 성긴 수풀은 눈[雪]
을 띠어 구슬꽃이 떨어지고 먼 멧부리 공중에 솟아 푸른 물결 떠 있네. 일만 경치는 분명하여 화보(畫譜)에 거둘
만한데, 술상 앞에 그저 앉아 시갈퀴[詩鉤]주D-13를 저버렸네. 이 나라 신하들 만나니 글하는 이 많구나.
도리어 동한(東韓) 나라가 노(魯) 나라 추(鄒) 나라에 가까운가 의심스럽네." 하였다.
○ 푸른 안개 깊은 속에 그림단청 누각 솟았는데, 끝없는 풍경이 두 눈에 들어오네. 나는 티끌 자취는 산 앞에서
끊어지고, 먼 물의 근원은 하늘가에서 흘러오네. 갈석장성(碣石長城)은 한(漢) 나라 사기[역사서]에 올랐고,
낙서 현상(洛書玄象)주D-14은 기주(箕疇)에서 출발했다네. 시를 쓰니 너무 거칠고 호방하다 말라,
이 내 가슴은 원래 9주(州)를 좁게 보네.
○ 금연시절(禁煙時節 한식절)에 한 번 누각에 오르니, 선들선들 가벼운 추위가 때늦은 갖옷[裘] 엄습하네.
이별을 느끼니 어찌 큰 잔 마시기를 사양하랴, 봄을 아끼니 답청(踏靑)주D-15 놀이가 좋구나. 송추(松楸) 만리
밖에 고향 생각이요, 풍우 천산(千山)에 나그네의 길 수심이네. 괴화(槐火)주D-16와 돌샘물은 글귀로 꿈에 드
는데 깨고 나니 이 신세 황주에 있음을 놀라네.
○ 장근(張瑾)의 시에, "한 누각이 흰 구름 뭉치 위에 높이 솟았는데, 창호(窓戶)가 영롱하게 사면으로 열렸네.
눈[雪]이 주렴(珠簾)에 비치니 맑은 것이 그림에 들 만하고, 바람이 옥자리에 부니 깨끗하여 먼지가 없네.
수풀 꾀꼬리는 여기저기서 봄을 즐기며 가고, 강 제비는 쌍쌍이 새끼를 데리고 오네. 올라와서 구경하는데 더구
나 좋은 천기 만났으니 읊으며 쓰노라고 시 재주[詩才] 부린들 어떠리." 하였다.
○ 가는 비 분분하게 옥루(玉樓)에 뿌리는데, 소슬한 바람 선들선들 초피(貂皮) 갖옷에 오르누나. 난초를 쥐고
수계(修稧)하며 새 즐거움 맞이하는데, 곡수 유상(曲水流觴) 좋은 놀이 모였구나. 우는 새 한두 소리에 봄은 깊
어가고, 나는 꽃 한 점에 객은 수심 더하누나. 송추(松楸)의 꿈 끊어저 고향이 아득하니, 도리어 황주를 가지고
황경(皇京)을 대신할꺼나.
신증 예전 누각이 퇴폐되었는데 목사 최세절(崔世節)이 다시 지었다.
관심정(寬心亭) : 고을 남쪽 1리 송령(松嶺) 아래에 있는데, 동쪽으로 어초천(於草川)에 다다랐다.
○ 이첨(李詹)의 시에, "작은 정자가 흐르는 물 위에 섰으니, 마음이 자연히 허명(虛明)해지는구나. 저물녘 노을
에 외로운 성이 멀어지고, 봄풀에 두 언덕이 질펀하네. 달이 뜨니 물결이 그림자를 움직이고, 바람이 지나가니
물이 소리를 남기는구나. 좋은 날에 신선 손님 따라와서, 마음대로 노닐며 세상 생각 씻어버리네." 하였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역학당(譯學堂)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경천역(敬天驛) :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예전에는 고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절령(岊嶺)의 길이 폐지되면
서 여기로 옮겼다. 신증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동부(洞府)는 선경(仙境) 같고, 사람 사는 것은 무릉도원(武陵
桃源) 같구나. 예법이 다르니 술상차림이 특이하고, 산이 첩첩하니 붉은 노을이 피어오르네. 보리 이랑에 가는
바람이 불고, 차 심은 언덕엔 따스한 기운 오르네. 가다가 머리 돌려 바라보니, 절령(岊嶺)이 푸르게 우뚝우뚝
섰네.
고석원(高石院) : 고을 동쪽 25리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 고을 동쪽 50리에 있다.
제중원(濟衆院) : 극성(棘城)의 북쪽 2리에 있다. 보제원(普濟院)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저복지원(貯卜只院) :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대제원(大濟院) :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교량 어초천교(於草川橋) : 봄여름에 비가 와서 물이 불으면 배로 건넌다.
흑교(黑橋)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저복지교(貯卜只橋) : 저복지원 곁에 있다.
불우 심원사(深源寺) : 여계산(餘界山)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 고을 서쪽 평지(平地)에 있다.
송림사(松林寺)ㆍ송방사(松房寺) : 모두 건지산(乾之山)에 있다. 대흥사(大興寺) : 정방산에 있다.
망일사(望日寺)ㆍ관정사(觀井寺) : 모두 천주산(天柱山)에 있다. 고정사(高井寺) : 칠봉산(七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극성단(棘城壇)으로 옮겨서 합하였다. 극성제단 : 고려 때에 극성이 여러 번 병란을 겪어, 백골이
들판에 드러나 있기에 하늘이 음침하고 비가 오면 귀신이 원통함을 부르짖고 모여서 여기(厲氣 전염병)가 되어
점차로 번져가서 황해도 지역에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 매년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드리게 하였다. 본조 문종 때에, 경기도까지 전염되니 왕이 근심하여 친히 글을 지어 관원을 보내어 제사
드렸다.
그 제문에, "이치는 순양(純陽)이 아니고 음(陰)도 있으며, 물(物)은 장생(長生)하지 못하고 죽음이 있다.
오면 반드시 가게 되고, 신(神)이 있으면 반드시 귀(鬼)가 있는 것으로 이는 원래 물에 의지하여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여기(厲氣)라고 주(主)가 없겠는가. 정(情)이 없는 것을 음양이라 하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하는데 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지만 정이 있는 것은 이치로 깨닫게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니, 물과
불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혹 때로는 사람을 죽이며, 귀신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혹 때로는 사람
을 해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과 불이 아니라 사람의 허물이며, 사람을 해치는 것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춥고, 덥고, 비오고, 개는 것과 오미(五味)주D-017의 음식은 천지가 사람을 살게 하
는 것이나, 사람들이 스스로 그 조화(調和)를 잘못하여 병의 근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귀신의 덕이 성
하여 그 이치가 천지와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여기(厲氣)는 실로 귀신의 장난이 아니요, 역시 사람들이 스스로 지은 재앙인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임금]이 허물을 지음으로 하여 전염병이 널리 번져서 여러 해가 되도록 그치지 않아, 죄 없는
백성이 잘못 걸려서 생명을 잃는 이가 그 얼마인지 모르니 어찌 귀신이 지나쳐서 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것주
D-018이 아니겠는가.
내가 부족한 덕으로 외람되게 한 나라 신(神)과 사람의 주인이 되어서, 항상 한 물건이라도 편안함을 얻지 못할
까 두려워하였는데 더구나 우리 백성들이 마구 전염병에 걸리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겠느냐.
이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각기 그 소재지에서 정결한 땅을 택하여 단을 만들게 하고 조정 신하들을 나누어 보
내어서 고기ㆍ술ㆍ밥ㆍ국으로 제사드리며 다시 간곡히 타일러 너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노니, 너희들 귀신은
선(善)으로 선을 이을 것을 생각하여 불평하고 분한 기운을 거두어 생생(生生)하는 덕을 베풀지어다." 하였다.
고적 철화폐현(鐵和廢縣) : 고려 때에 철도(鐵島)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서 고을 서쪽 30리 되는 곳에 거주하였는
데 충숙왕(忠肅王)이 철화(鐵和)라 칭호하고 현(縣)으로 승격하며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그 후에 없앴다.
본조 태조 5년에 다시 감무를 두었다가 태종 8년에 다시 없애고 본주에 속하게 하였다.
극성진(棘城鎭)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관군(官軍)이 홍건적(紅巾賊)을 여기서 방어하던
중 모두 적에게 섬멸되었다 한다. 행성(行城) 터는 정방산(政方山) 마루에서 박배포(朴排浦)에 이르는데 길이가
4만 3천 6백 59척이며 방수군(防守軍)이 있었다. 본조 문종 2년에 고쳐 돌성으로 쌓으니 길이가 5천 30척, 높이
7척이다.
○ 장성(張城)의 시에, "극성 성위에 작은 정자가 그윽하니 객과 함께 오르자 시야가 넓기도 하네. 뾰족뾰족한
두어 봉우리는 평지에 둘러 있고, 망망한 한 물은 하늘에 닿아 흐르네. 옛날엔 진지(陣地)에 속절없이 말 돌렸
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주민들 모두 소를 풀어 놓았구나. 이로부터 성조(聖朝)에서 일통(一統) 사업을 이룩했
으니, 무너진 담장, 퇴폐한 성루를 무엇 때문에 수리하리." 하였다.
○ 길가에 어떤 이가 모정(茅亭)을 지었나, 흥에 겨워 올라 보니 생각이 엉기려 하네. 바다에 임했는데 파도 없
이 만경(萬頃)이 푸르고, 산을 등졌으니 풀이 비쳐 발[簾]에 가득 푸르네. 황량한 성은 무너졌으니 다시 쌓아야
하는데, 옛일은 물어보아도 들을 곳이 없네. 천고의 흥망(興亡)은 이루어진 운수에 있으니, 시를 지어 지나는 곳
기념하네.
○ 김식(金湜)의 시에 "일찍이 금산(金山) 탄해정(呑海亭)을 올랐다가 큰 글씨는 이양빙(李陽氷)주D-019을 불러
온 듯. 이별한 후로 머리털 먼저 흰 것 스스로 부끄러운데, 여기 와서 누가 눈이 더욱 푸를 줄 알았으리.주D-20
암곡(巖谷)에 휘파람 부니 지나가는 범이 없고, 해천(海天)에 노래 끝내니 용이 있어 듣네. 풍진(風塵)도 시서
(詩書) 읽는 나라는 업신여기지 못하는데, 과거 보이는 것 오히려 옛법 지키네." 하였다.
○ 관풍(觀風)하는 행차주D-21 가는 곳마다 그윽한 경치 찾는데, 어찌 번화(繁華)로 나그네의 눈을 어지럽히나.
세월이 기약 있으니 사람은 북쪽으로 가고, 강하(江河)는 계책이 없는데 물만 동으로 흐르누나.
전공(田公)은 강개히 병든 말[馬]를 거두는데,주D-22병상(丙相)은 조용히 헐떡이는 소를 묻는다네.주D-23
나는 몸에 따른 한쌍의 보검이 있으니, 어찌 공업(功業)에 있어 옛 사람들 저버리랴.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옛날의 노한 도적 국경에 침입하니 맹렬한 불길이 언덕을 태우는 듯. 계속 몰아 며칠
사이에 성 아래 이르니, 요망한 기운 자욱하게 건곤(乾坤 : 천지)을 덮었네. 기문(期門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은
적을 맞아 기회를 그르쳤고 남군(南軍)이 낭패하자 오랑캐 말소리[胡語]가 시끄러웠네. 수십만 명 하루 아침에
섬멸되니 남은 군사 사면으로 흩어져 패해서 달아났네. 귀하고 천한 이들 다 함께 백골(白骨)이 되니, 원통한 기
운이 맺혀서 음운(陰雲)이 뭉쳤네. 슬픈 바람 우수수 지금까지 부는데, 옛 성이 푸른 산부리에 처량하네. 시를 던
져 장한 넋을 조상하려 하니, 붓끝으로 천고의 원한을 풀어볼꺼나.
신증 이세인(李世仁)의 시에, "서풍에 지친 나그네 누대에 올랐는데, 장해(瘴海) 수운(愁雲)에 하늘이 저물었네.
성곽은 무너지고 두어 치첩(雉堞)주D-024만 남았는데, 흥망은 자취 없이 몇 천 년 되었나. 마음 아파 떨어진 눈
물 두 소매가 젖는데, 제사드리고자 하나 빈 주머니엔 돈 한 푼이 없구나. 읊기를 끝내고 태평시대 만난 것을 자
랑하노니 뽕밭ㆍ삼밭 여기저기 밥짓는 연기 일어나네."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산세(山勢) 뻗어나가 바다 모퉁이 둘렀는데, 굶주린 까마귀는 옛 수자리[戌]에, 숲은 하
늘에 닿았네. 노는 사람 성첩에 의지하여 세 장수[三帥]주D-025를 슬퍼하는데, 돌부처는 말없이 백년을 지냈
구나. 풀숲 장기[茅瘴] 일어나자 구름이 먹과 같으니, 국상(國殤)을 제사하는 곳에 종이로 돈을 만들었네.
유유(悠悠)히 다함없는 흥망의 한(恨)은 들 밖에 쓸쓸하게 엷은 연기 일어나네." 하였다.
발산행성(鉢山行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7백 척이요 높이 10척이다.
심원사남점행성(深源寺南岾行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 2천 5백 척이요 높이 10척이다.
여계산성(餘界山城) : 주위가 3백 5보(步)인데 안에 우물ㆍ샘 다섯 군데가 있다.
사인암동성(舍人巖東城) : 고을 동쪽 2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백 70척이요, 높이 10척이다.
서성(西城)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 3백 30척, 높이 10척이다.
덕월산성(德月山城) :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주위 5천 3백척이요, 높이 7척이다.
월라산성(月羅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 6백 50척이요 높이 10척이다.
단림역(丹林驛)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로역(新蘆驛) : 고을 안에 있다. 옛동선역[古洞仙驛] : 지금은 봉산(鳳山)으로 옮겼다.
○ 고려조 의종왕(毅宗王) 22년에 행차를 황주 동선역에 머무르고 벽파정(碧波亭)에 잔치하며 또 배를 남계
(南溪)에 띄우고, 밤이 되도록 잔치를 즐기고, 악공(樂工)과 잡희인(雜戲人)들에게 백금(白金)을 하사하였다.
○ 고종 18년에 몽고 원수 살례탑(撒禮塔)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입하니 왕이 3군(軍)을 보내어 막게 하였
다. 동선역에 주둔하여 마침 날이 저물었는데 척후병이 보고하기를 적이 없다고 하여 3군이 안장을 풀어놓고
편히 쉬는데 몽고 군사 8천 명이 돌격하여 오자 장군 이자성(李子晟) 등이 목숨을 걸고 적을 막아 싸웠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우연히 운수굴(雲水窟)을 지나다가 좋은 경치 탐내어 오래도록 머무네. 올올(兀兀)
한 모습 중성(中聖)인가 의심되는데, 표표(飄飄)한 기분 신선된 것이 아닌가. 꽃이 있어 코에 향기 풍기는데,
마음 밭[心田]을 거칠게 할 가시가 없네. 발을 걷어올리고 길게 휘파람 부니, 그윽한 회포가 다시 시원해지네."
하였다.
○ 나무와 돌은 서로 어울리고, 풍연(風煙)은 연접해 있구나. 병 속에서 일월을 찾고주D-026 지상(地上)에서 신
선을 찾네. 물은 복사나무 심은 동구[桃源]에서 나오고,주D-27구름은 살구나무 심은 밭을 봉해 있네.주D-28
혹시라도 뜰 아래 아전들이 이 세상 버리고 표연히 신선되어 갈까 의심되네." 하였다.
명환
고려 이위(李瑋) : 선종(宣宗)조에 부사(副使)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근면하여 백성을 잘 보살피기로 알려졌다.
문극겸(文克謙) : 의종 때에 판관이 되었다. 이지명(李知命)ㆍ
최보순(崔甫淳) : 모두 서기(書記)가 되었다. 함유일(咸有一) : 판관이다.
안경공(安景恭) : 공민왕 조에 목사가 되었는데 백성을 잘 돌보고 은혜를 베풀어 유애(遺愛)주D-029가 있었다.
본조 김길통(金吉通)ㆍ강노(姜老) : 모두 목사가 되었다.
인물고려 김정순(金正純) : 천품이 용맹스럽고 활쏘고 말달리기를 잘하였다. 예종(睿宗)조에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을 정벌하고, 인종(仁宗)조에 김부식(金富軾)을 따라 서경(西京)의 반란하는 적을 토벌하여 모두 공이 있었
다. 벼슬이 수대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에 이르고 시호
는 충양(忠襄)이다.
제영 하늘에 이어진 자라등[鰲背]주D-030은 천 길이나 솟았네 : 예겸(倪謙)의 망해시(望海詩)에, "물빛과 산빛
이 한 번 함께 바라보이니 이 내 몸 지금 해동(海東)에 있구나. 하늘에 이어진 자라등은 천 길이나 솟았고,
땅을 가르는 고래 물결은 만리에 통했네. 뗏목을 타고 직녀성(織女星)에 갔다고 부질없이 말하나, 모름지기 말
을 타고 바람을 맞이하자. 평생에 운몽(雲夢)을 8, 9개 삼켰더니,주D-31 오늘의 흉금(胸襟)이 배나 더 웅장하네."
하였다. 일만 집 울타리 황주를 둘렀네 : 앞사람의 시에, "다만 청산을 가지고 성곽을 대신하니 일만 집 울타리가
황주를 둘렀네." 하였다. 절령(岊嶺) 서쪽, 서해(西海) 머리로세 : 이색의 시에, "절령의 서쪽, 서해 머리에 경계
가 평양에 닿은 곳 여기가 황주라네." 하였다.
산은 백리 성을 둘렀네 : 이양(李揚)의 시에, "물은 천 길 바다에 이어 있고 산은 백리 성을 둘렀네." 하였다.
[비고]
연혁 순조(純祖)조에 황강현(黃岡縣)이라 강등시켰다가 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 : 끝이 10리이다. 인제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신교(薪橋)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도치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50리이다.
경천(敬天)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주남(州南) :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심원(深源)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삼전적(三田赤)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고정(高井)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처음이 40리이다. 모성(慕聖)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보리(甫里)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두암(斗巖)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목곡(木谷)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사등곡(沙等谷)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분전(分田)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주복 :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송림(松林) :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청룡(靑龍)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성지 읍성 : 둘레가 2천 8백 30보(步), 옹성(甕城)이 1, 치성이 7, 곡성(曲城)이 15, 포루(砲樓) 4, 우물이 10,
호지(壕池) 5, 해자(垓子)는 북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옹성 모퉁이에 이르러 족금계(簇錦溪) 가로 통한다.
정방산성(正方山城) : 서쪽으로 30리 지점 봉산(鳳山) 경계이다. 밖으로는 평평하고 안으로는 험하며 뒤로는
준령(峻嶺)이 누르고, 앞으로는 큰 들판을 대하였으며, 왼쪽으로는 동선(洞仙)과 이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극성
(棘城)을 가로질렀는데, 가장 경치가 좋은 것을 차지하였다. 인조 14년에 쌓았고 둘레는 4천 8백 95보, 치성 7,
곡성 5, 우물 7, 호지 4, 대흥(大興)ㆍ안국(安國) 등 네 절[寺]이 있다.
수성장 목사(守城將牧使) 겸 별장(別將)이 1명이다.
영아 병영 : 주(州)의 성내에 있다. 선조 26년에 처음으로 해주에 설치하였다가 이듬해에 본주(本州)로 옮겼으
며, 30년에 다시 해주로 옮겼다가 34년에 본주로 반환하였다. 인조 14년에 영(營)을 정방산성으로 옮겼다가 19
년에 본주로 반환하였다.
관원 황해도 병마절도사ㆍ중군(中軍) : 병마우후(兵馬虞侯)ㆍ심약(審藥)이 각 1명이다.
○ 봉산(鳳山)ㆍ풍천ㆍ안악ㆍ곡산ㆍ평산 등 영(營)과, 정방ㆍ대현(大峴)ㆍ태백ㆍ장수(長壽)ㆍ구월(九月) 등
다섯 산성, 문성(文城)ㆍ선적(善積)ㆍ동리(東里)ㆍ산산(蒜山)ㆍ소이(所已)ㆍ위라(位羅)ㆍ문산(文山) 등 7진
(鎭)을 관장한다.
진보혁폐 흑교진(黑橋鎭) :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숙종 4년에 설치하고, 8년에 산산진(蒜山鎭)으로 옮겨 합
하였다.
봉수 고매치(古每峙) : 동남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다.
창고 고(庫) 7, 읍창ㆍ영창(營倉) : 모두 성내에 있다. 외창(外倉) : 황사포철(荒沙浦鐵)에 있다.
역참혁폐 단림역(丹林驛) :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장녕역(長寧驛)ㆍ기발(騎撥) 관문참(官門站)ㆍ
저복참(貯卜站)
목장 용양장(龍驤場) : 《고려사》에 실렸다. 철도장(鐵島場) : 본조 성종조 때 풍천 석도(席島)에 옮겼다.
진도 청룡진(靑龍津) : 안악으로 통한다. 다미진(多美津) : 서쪽으로 35리에 있는데 용강(龍岡)으로 통한다.
마상진(馬尙津) : 강서(江西)로 통한다. 이상은 모두 작은 길이다.
오초천교(於草川橋) : 가물면 다리가 되고 장마 지면 배가 된다. 흑교(黑橋) : 북쪽으로 25리 지점에 있다.
위의 두 곳은 남북 대로(大路)이다.
토산 지황(地黃)ㆍ배ㆍ갈대ㆍ잔새우 : 품질이 좋다.
누정 벽파정(碧波亭)ㆍ태허루(太虛樓)ㆍ월파루(月波樓)ㆍ죽루(竹樓)ㆍ태고정(太古亭).
사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 선조 무자년에 세우고 경종(景宗)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김굉필ㆍ이이 : 모두 문묘 편에 보인다.
[주 D-001] 음사(淫祀) : 당연히 제사지낼 것이 아닌 것을 제사지내는 것이니 사전(祀典)에 없는 요괴(妖怪)한
잡신(雜神)을 섬기는 것이다.
[주 D-002] 백성 부리기를 때에 맞추어 하는 도리 : 《논어》에, “백성 부리기를 때로써 하라.” 하였다.
농한기에 부역을 시키라는 말이다.
[주 D-003] 봉후(封侯) : 장수가 전공(戰功)을 이루면 후(侯)로 봉하였다.
[주 D-004] 동생(董生)의 부(賦) :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부(朝鮮賦)〉를 지었다.
[주 D-05] 부질없이 한(漢) 나라 사신 신선의 떼배인가 의심하네. : 한 무제(漢武帝) 때에 장건(張騫)이
대하국(大夏國)에 사신으로 갔다가 떼배를 타고 황하(黃河)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하늘의 은하수
(銀河水)에서 직녀성(織女星)을 보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주 D-006] 숙맥(宿麥) : 보리는 지난해 심어서 금년에 수확하기 때문에 숙맥이라 한다.
[주 D-07] 섬계도(剡溪圖) : 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눈오고 달밝은 밤에 섬계(剡溪)에 있는 대안도
(戴安道)의 생각이 나서 곧 배를 타고 밤새도록 갔다.
[주 D-008] 중선(仲宣) : 중선은 왕찬(王粲)의 자인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주 D-009] 시를 재촉하는 비 : 두보(杜甫)의 시에, “머리 위에 조각 구름이 검으니 아마도 비가 시(詩) 짓기를
재촉하는 것이네.” 하였다.
[주 D-10] 자건(子建)의 재주 : 조조(曹操)의 둘째아들 식(植)의 자(字)가 자건(子建)인데 문장이 뛰어났다.
진(晉) 나라 사영운(謝靈運)이 말하기를, “천하의 재주가 한섬[一石]인데 자건이 혼자서 여덟 말[八斗]을
차지하였다.” 하였다.
[주 D-011] 매추(枚鄒) : 한(漢) 나라 양효왕(梁孝王)의 문하(門下)에 매승(枚乘)과 추양(鄒陽)은 문장이 뛰어
났다.
[주 D-012] 얼음병 : 옛 시(詩)에, “맑기는 옥병에 얼음 같네[淸如玉壺永]” 하는 구(句)가 있다.
[주 D-13] 시갈퀴[詩鉤] :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시를 낚는 갈퀴[鈞詩鈞]”라는 말이 있다. 시를 짓게 만드는
좋은 경치를 말한 것이다.
[주 D-14] 낙서 현상(洛書玄象) : 우(禹)가 낙수(洛氺)에서 거북이 지고 나온 글인 낙서(洛書)을 보고 구주
(九疇)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을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말해 주었다 한다. 현상은 미묘한 상(象)이다.
[주 D-15] 답청(踏靑) : 청명(淸明)한 날에 들에 나가 노는 것을 답청(踏靑)이라 한다.
[주 D-16] 괴화(槐火) : 중국 옛날에 청명(淸明)에 백관(百官)에게 신불[新火]을 나누어 주는데 괴목(槐木) 등
의 나무를 뚫어서[鑽] 불을 취하였다.
[주 D-017] 오미(五味) : 신것[酸] 짠것[鹹] 단것[甘] 매운것[辛] 쓴것[苦]을 오미(五味)라 한다.
[주 D-018] 옥과 돌이 함께 불타는 것 : 《서경(書經)》에, “곤강(崑崗 : 옥이 나는 산)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玉石俱焚]”는 말이 있다. 이것은 좋은 것 나쁜 것이 함께 화(禍)를 당한다는 뜻이다.
[주 D-019] 이양빙(李陽氷) : 당 나라 때 전서(篆書)를 잘 쓰던 사람이다.
[주 D-20] 눈이 더욱 푸를 줄 알았으리. :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눈을 희게도 뜨고 푸르게도 뜨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흰 눈[白眼]으로 보고, 뜻에 맞는 사람에게는 푸른 눈[靑眼]으로 보았다.
[주 D-21] 관풍(觀風)하는 행차 : 왕명(王命)을 받고 지방에 순찰하는 것을 관풍(觀風)이라 한다. 그것은 풍속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주 D-22] 전공(田公)은 강개히 병든 말[馬]를 거두는데, : 콜론ERROR!!!
[주 D-23] 병상(丙相)은 조용히 헐떡이는 소를 묻는다네. : 한(漢) 나라 승상(丞相) 병길(丙吉)이 밖에 나갔다가
길가에 사람들이 싸워서 죽어 있는 것을 보고도 묻지 않고 지났는데 사람이 소를 쫓는데 소가 헐떡이며 혀를
내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 소가 몇 리[幾里]나 쫓겨 왔는가.” 물었다. 어느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사람이
싸워 죽은 것은 묻지 않고 헐떡이는 소를 묻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그는, “사람이 싸워 죽은 것은 장안령
(長安令)의 소관이지마는 지금 봄철에 소가 헐떡이는 것은 그것이 계절의 기운 때문이라면 음양이 고르지 못한
것이니 음양을 조화(調和)하는 것이 승상(丞相)의 책임이다.” 하였다.《한서》
[주 D-024] 치첩(雉堞) : 성(城) 위에 구멍을 뚫어 적을 향해 쏘는 곳이다.
[주 D-025] 세 장수[三帥] : 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이 홍건적(紅巾賊)을 쳐서 공을 이루었
으나, 김용(金鏞)의 꾐에 빠져 원통하게 죽었다.
[주 D-026] 병 속에서 일월을 찾고 : 한(漢) 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여남시(汝南市) 누상(樓上)에서 보니
한 노인이 낮에는 약을 팔다가 저물면 병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노인을 찾아가서 간절히 청하
여 함께 병 속에 들어가 보니 별세계가 있는 일월이 밝고 신선이 사는 곳이었다.
[주 D-27] 물은 복사나무 심은 동구[桃源]에서 나오고, : 진(晉) 나라 때에 무릉(武陵)의 한 어부(漁父)가 배를
타고 물을 올라가 산 속으로 들어갔더니, 수원(水源)이 막다른 곳에 한 구멍이 있었다. 그리로 들어간즉 안에는
들이 있고 촌락이 있는데 수백 년간 세상과는 통하지 않고 복숭아 나무를 많이 심었었다.
[주 D-28] 구름은 살구나무 심은 밭을 봉해 있네. : 삼국시대에 동봉(董奉)이 여산(廬山)에 숨어 살면서 남의
병을 치료하여 주고는 돈은 받지 않고 살구나무를 심어 달라 하여 수년 만에 십만 주(十萬株)가 되었다.
[주 D-029] 유애(遺愛) : 수령(守令)이 착한 정치를 하여 그가 떠난 뒤에도 백성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것을
유애(遺愛)라 한다.
[주 D-030] 자라등[鰲背] : 동해(東海) 가운데 떠다니는 산이 있었다는데 상제(上帝)가 자라를 시켜 머리로 그
산을 이고 있게 하였다 한다.
[주 D-31] 평생에 운몽(雲夢)을 8, 9개 삼켰더니,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제(齊) 나라
는 동쪽에 큰 바다가 있어 가슴에 운몽(雲夢 : 초(楚)의 큰 못) 8. 9개를 삼켜도 걸리지도 않는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자기의 흉금이 넓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평산도호부 平山都護府
동쪽으로 우봉현(牛峯縣) 경계까지 15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1백 20리, 서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1백 3리,
봉산군 경계까지 1백리, 강음현(江陰縣) 경계까지 22리, 북쪽으로 신계현(新溪縣) 경계까지 64리,
서흥부(瑞興府) 경계까지 62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1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이다 : 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하였다. ○ 살펴보건대, 한(漢) 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두 외부(外部)를 두었는데, 조선의 옛 지역인 평나(平那) 및 현도군(玄菟郡)으로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를 삼았다. 지금 부(府)의 동쪽 우봉현의 성거산(聖居山)이 바로 옛날의 평나산(平那山)
이니, 고을 이름이 그래서 얻어진 것이다. 아마도 부(府)는 한 나라 때 도독부인 것 같다.
신라에서는 영풍군(永豐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조 초기에 평주(平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때에 방어사(防禦使)
를 두었고 현종(顯宗) 때에 지주사(知州事)로 하였다. 원종(元宗) 때에 복흥군(復興郡)에 합병하였다가 충렬왕
(忠烈王) 때에 다시 예전대로 하였다.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도호부로 승격하
였다.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명.
군명 대곡ㆍ다지홀ㆍ영풍ㆍ평주ㆍ연덕(延德)ㆍ동양(東陽)
성씨본부 신(申) : 고려 태조 때에 사성(賜姓)한 것이다. 정(丁)ㆍ박ㆍ안ㆍ윤ㆍ유(庾)ㆍ조(趙)ㆍ김ㆍ왕ㆍ전(田)ㆍ
고ㆍ이 : 모두 이주해 왔다. 한(韓) : 속(續).
산천 멸악산(滅惡山) : 부의 서쪽 6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성악산(省惡山)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월봉산(月峯山) : 부의 남쪽 75리에 있다. 연봉산(煙峯山) :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운봉산(雲峯山) :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감악산(紺岳山) : 부의 북쪽 13리에 있다.
철봉산(鐵峯山)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만송산(滿松山)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서봉산(西峯山)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성불산(成佛山) : 부의 서쪽 90리에 있다.
모란산(牡丹山) : 부의 서쪽 69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산색이 창연(蒼然)하여 바라만 보아도 기이한데 산중의 정사(精舍 절)는 고비(高卑)라
부르네. 살고 있는 중은 여산파(廬山派)주D-001에서 나왔으니 술을 사다 놓고 맞이하며 취하자 시를 청하네."
하였다.
○ 장송(長松) 그늘 아래 돌이 대(臺)가 되었는데, 서쪽으로 바라보니 여러 산과 큰 들이 열렸네.
수양산(首陽山) 고죽(孤竹)주D-02 옛터라고 가리키나 그 유래를 어떤 이가 변박(辨駁)할꼬.
총수산(蔥秀山)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 동월(董越)의 기문에, "보산관(寶山館)에서 서쪽으로 10리쯤 가면 산이 있는데 높은 절벽이 흐르는 물을 내려
다본다. 구부려진 소나무와 괴이한 돌이 빈 바윗골 사이에 층층으로 보이고 첩첩으로 나와서 돌이빨[石齒]이
잇몸[齦齶]처럼 되었는데 비에 젖은 이끼로 점이 되고 담쟁이덩굴로 얽혔는데 위태로워 떨어질 듯한 것이
반이나 되고 그 사이에 비스듬히 걸려 있어 손과 주인이 나누어 앉은 것 같기도 하다. 흐르는 물이 북쪽으로 와
서 돌틈으로 흘러나오며 부딪쳐 쏘고, 거품을 뿌리는 것이 구슬이 뛰고 흰 해오리가 날개 치는 것 같으며,
굽이돌고 꺾여서 동으로 가서 멈출 곳을 알지 못한다.
지금 천자께서 황통(皇統)을 계승하시어 내가 황문(黃門) 금릉 왕군(金陵王君) 한영(漢英)과 함께 명을 받들어
정삭(正朔)을 반포하려고주D-003 이 동쪽 나라에 왔다. 처음 여기를 지날 때는 날이 벌써 저물려 하니 수레 끄
는 사람들이 바쁘게 달려서 관(館)으로 갔기 때문에 멈출 수 없어서 한 번 고개를 돌려보았을 뿐이었다.
밤에 보산관에서 유숙하면서 황문과 함께 그 말을 하니 마침 관반(館伴) 이조(吏曹) 허 판서가 통역을 통하여
말하기를, '조금 전에 산기슭을 지나오면서 잠시 멈추어 쉬려 하였는데 그만 따라오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을
가진다.' 한다. 내가 '이 산 이름이 무엇인가?' 물으니, 총수(聰秀)라 대답하였다. 드디어 황문과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잠시 멈추고 좋은 경치를 다 보고 가자고 약속하니 이조(吏曹)가 매우 기뻐하였다.
열흘 후에 우리 두 사람이 이 나라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데 보산을 지나니 아직 정오가 안 되었다.
이조가 예전의 약속을 이행하자 하고 황해 관찰사 윤군(尹君)이 역시 나를 맞이하러 와서 드디어 함께 갔는데,
도착해 보니 일을 맡은 이들이 벌써 장막을 길 왼쪽에 설치 하였는데 여러 가지가 모두 갖추었다. 때는 3월 22
일이다. 두 군(君)이 나에게 읍하며 자리에 앉게 하는데 오직 한 골짜기만이 깊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외
에는 모두 장막에 막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두어 걸음을 가니 여울이 급한 곳에 이르렀다. 맑은 물을 움
켜서 먼지 묻은 갓끈을 빨고, 그 비스듬히 갈려 있어 객과 주인처럼 나누어 있는 곳을 쳐다보았는데, 그 서쪽의
두어 봉우리가 푸르고 깎아질러서 푸른 파[蔥]와 같았다. 이조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 산 이름의 총(聰)
자를 총(蔥) 자로 고치지 않는가.' 하니, 이조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함께 따라 간 이들이 모두 돌 위에 걸터앉아서 어부들의 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였다. 얼마 후에 산마루에서 피리ㆍ
젓대 부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골짜기가 메아리에 울리는 소리인가 하였다.
황문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나에게 보여 주는데, 거기에는 두 졸병이 벌써 비스듬히
갈려 있는 곳, 동쪽에 높고 우뚝하게 나온 돌벼랑에 올라가서 원숭이처럼 매달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는데 이것은 관찰사가 시킨 것이었다.
자리로 가서 앉으려 하자 장막이 벌써 물가로 옮겨졌으며 음식 만드는 사람들은 칼을 두드리고 노루를 벗겨 구
워서 올리고 물고기로 상에 오른 것 중에 큰 놈은 손가락 같고, 작은 놈은 젓가락 같은데 거품을 품고 꿈틀거리
는 것이 불쌍해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이 통역을 명하여 모래를 트고 물을 끌어들이며 하나씩, 둘씩 잡히는 대로
그 안에 두는데 돌문 하나를 만들고 마음대로 가게 하니, 얼마 후에는 하나도 남아 있는 놈이 없었다.
그래서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물고기가 갈 곳을 얻은 것을 기뻐하였다는 말과 정이천(程伊川)의 〈양어기
(養魚記)〉를 외우니 이로부터 어부도 나의 뜻을 알고 다시는 빽빽한 그물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술잔을 주고받는데 이윽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견여(肩輿)를 재촉하여 수백 무(武 3척)를 보지 못하고 갔다.
여러 봉우리가 술렁술렁 동쪽으로 달아나는 것이 바람 앞 돛대 같고 진중을 달리는 말과 같아서 기괴한 정경이
온갖 나오다가 모두 총수(蔥秀)에 이르러 멈춘다. 여기서 또 이 산이 깊고 우묵하여 장질(藏疾)주D-004하기에
알맞을 뿐 아니라, 그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혼자 차지하여 좀처럼 양보하지 않음을 기뻐한다.
대저 강(剛)하고 유(柔)한 두 기운이 섞이고 엉켜서 형세를 따라 모양을 이루는데 명승지가 되는 것은 반드시
사람으로 인하여 되는 것으로서 자못 정해진 수(數)가 있다. 이 산이 동쪽 나라에 있어 그 동안 몇천 년을 지났
는지 모르지만 물가에 벽처럼 서서 지나는 이들에게 다시금 눈여겨보지 못하게 된 지가 오래되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이조(吏曹)의 주창과 우리의 화답으로 인하여 해가 뜨는 이 나라로 하여금 모두들 이 산의 이름
이 바뀌게 된 것이 내게서 시작될 줄 알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정해진 수(數)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
는가. 그러나 나는 사실 거짓으로 이 산을 중히 여기는 자가 아니다. 다른 날 계속하여 이곳에 오는 이들로
하여금 많이 일컬어서 한강 양화도(楊花渡)와 서로 백중(伯仲)이 되게 된다면 전혀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놀기를 마치고 저녁에 용천(龍泉)에서 자면서 내가 이 글을 적는다." 하였다.
황문(黃門)과 이조ㆍ관찰사도 다 시가 있다.
○ 왕창(王敞)의 시에, "푸른 산 깎으니 담을 두르는 듯하고, 칼 같은 봉우리 사방에서 모여 높고 낮네. 평평한
밭이랑 십여 장은 중앙에 펼쳤는데, 하늘하늘 물가 버들 연한 뽕을 겸하네. 두견화(杜鵑花) 떨어지니 붉은 향기
날고 괴이한 돌 꿇어 엎드렸으니, 이상한 분양(羵羊)주D-005 같네, 신선과 세속이 다만 하늘 한쪽에 격(隔)했
는데, 이 가운데의 좋은 경치 참으로 보통이 아니네. 찬 샘물 밑바닥에 푸른빛 어른거리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물 바로 만길이나 길구나. 벼랑을 뚫고 구렁에 웅덩이 지며 어찌도 그리 바쁜가, 돌모퉁이 옆으로 부딪치니 소리
도 낭랑하네. 펄렁이는 깃발 3월 하늘에 가는 길 재촉하는데, 향기로운 티끌 비단 치마에 살짝 스치네. 채찍 들고
말 몰아서 중첩한 멧부리에 섰는데, 전구(前驅)주D-06가 문득 관로(官路 큰길) 곁에서 보고하는구나.
판서가 잔치를 배설하고 술이랑 찬이랑 벌였는데, 겹겹한 흰 장막을 가지런히 높게 쳤네. 말에서 내려 왔다갔다
하는데, 물가에 좌석 벌여 걸상을 배설했네. 손과 주인 길게 읍하며 술잔을 돌리는데, 상 위의 해산물(海産物)
두 줄로 벌였네. 복어ㆍ곤포(昆布)에 여황(蠣黃)을 곁들이고, 잉어회만이 아니라 노루도 구웠구나.
어부들 그물 치며 강물에서 노니, 벗은 몸에는 쇠코잠방이[犢鼻褌] 걸쳤네. 그물 주머니를 뒤져도 방(魴)어와
준(鱒)어는 보이지 않는데, 모래를 헤치면 낱낱이 세 치 길이로다. 모래를 막고 땅을 파서 못을 만들고 놓아주니,
갈기[鬣]를 치며 빙빙 도는구나. 돌문에 한 구멍의 틈만 있는데, 어느 사이엔가 빠져나가 모두 도망했네.
황주 관찰사는 수염이 늘어졌는데, 기이한 것을 찾고 재미난 일 좋아함은 당할 이 없구나. 머리를 끄덕이며 급히
황두랑(黃頭郞)주D-007을 보내어 덩굴 만지며 바로 산 위로 올라가게 했네. 호가(胡笳) 소리 끊겼다 이어졌다
이량곡(伊涼曲)주D-08 부르는데, 하늘 높이 부는 센 바람 구름 밖에서 생황(笙簧) 소리가 들리네. 산이 비어 골
짜기에 메아리처럼 악기 소리 맑게 들려오니, 얼굴 들어 한번 보니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네.
잠깐 동안 정(情)과 경(境)을 둘 다 잊으니, 나도 모르게 절로 늙은이의 흥이 일어나구나. 동쪽 나라의 산수가 원
상(沅湘)주D-09 지방 같은데, 나무 꼭대기의 험한 길이 양의 창자처럼 서렸구나. 이 산의 수려(秀麗)한 명성 드
러남이여, 내가 와서 올라 구경하며 천황(天荒)을 열었으니 무릉도원(武陵桃源)과도 서로 다투겠네. 소금수레
끄는 준마(駿馬)가 네거리를 달리다가 백락(伯樂)이 한 번 돌아보면주D-10 좋은 말인 줄을 알아서 천금 값으로
다투어 사려하고, 말발굽이 벽옥(碧玉)인양 번득이며 용마처럼 뛰어올라 갈기털 하루아침에 광채가 난다네.
좋은 놀이의 오늘이 항상 있지 못할 것, 돌아가고 싶은 마음 천리에 황경(皇京)만 생각나네.
옥 섬돌 한밤중에 봉씨의 반렬[鵷行] 따라서 오색구름 깊은 곳에 옥황(玉皇)께 뵈이려 이두(螭頭)에 따오기처럼
옥패(玉珮)를 울리리. 이 먼 곳에서 즐거운 소리 어찌 다하리, 다만 짧은 글귀나 지어 찬양해 보네. 누가 있어 금
낭(錦囊)주D-11을 거두어 이 산으로 백천 세대에 꽃다운 이름 드리우게 할거나."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빙설(氷雪) 바위 앞에 경치 다시 기특한데, 주인은 객을 멈추어 금술잔 기울이네. 장차
녹으려는 은(銀)이 가득 깔렸고, 꽃이 피기 전에 옥이 가지에 붙었네. 냉기를 가시려니 세 번 잔을 들고, 회포를
쓰자니 칠언시(七言詩)에나 붙일밖에. 오래 전부터 이 산이 동쪽 나라에 이름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규봉(圭峯)
의 기록한 비(碑)가 있네." 하였다.
○ 길이 총수산(蔥秀山)에서 나와 물 흐르는 가운데 임했는데, 창연히 처음 올 때와 경치가 같지 않네. 시내 굽
어보며 물고기 구경하려니 얼음 얼었고 골짜기에 꽃 찾으려도 아직 피지 않았구나.
거북ㆍ용은 무엇 때문에 양자(羊子)를 슬퍼하나,주D-012 새ㆍ짐승들은 그래도 취옹(醉翁)을 즐겁게 하누나.
주D-13 머리를 돌리니 어느 사이 오늘에 옛날을 보게 되리,주D-14까마귀는 바다 동쪽에 날아오르네.주D-15
○ 수레를 황해도로 몰아오니, 지금 겨울 경치를 만났네, 소소(蕭蕭)하게 나무는 잎이 떨어지고, 막막(漠漠)하게
새 날아가는 그림자로세. 3일 만에 용천(龍泉)을 지났는데, 새벽에 떠나니 기온 아직 차구나.
가는 비 때문에 견여(肩輿)에 발을 드리우니, 두 눈을 가린 것 같네. 안성(安城) 동쪽으로 계속 가니 문득 총수령
(蔥秀嶺)에 이르네. 쳐다보니 초목(草木)이 어울렸고, 내려다보니 샘물과 돌이 어울렸네.
그 안에 다시 바윗골이 열렸으니, 뚫어져 트인 것이 더욱 그윽하고 고요하네. 아마도 봄빛이 무르익으면 온갖 꽃
들 찬란하게 피리라 하였더니, 다시 기온이 답답하여, 옷깃 풀어놓고 깨끗이 씻고 싶네.
이 산 이름 유래를 물으니, 동선(董仙 명 나라 사신 동월(董越)을 말함)이 이곳에 다녀갔다네. 눈여겨 다시 보니
흥이 더욱 깊어라. 기문 지어 재주 다시 보여 주니 이로부터 동방(東方) 사람들, 금 백 덩이보다도 더 소중히 여
기네. 3기(紀 36년)가 지났다고 하니, 연대가 아직도 멀지 않네. 남은 비(碑)는 바람과 비에 깎였으니, 글자 흐려
서 알아보지 못하겠네. 오직 비(碑)를 받친 거북이만 남아서 성낸 기운 스스로 목을 펴는구나.
수레 돌려오던 길 따라가는데, 견여(肩輿) 멘 하인들 빨리 걷네. 거듭 배회할 필요 없다, 이 뜻 벌써 잘 알았네.
지난 일 그렇지 않음이 없지만, 믿는 것은 경경(耿耿)한 마음 있다네. 보산관(寶山館)에서 짐을 푸니,
연기 낀 수림에 저녁 어둠이 드누나.
○ 사도(史道)의 시에, "동(董), 왕(王 왕창) 두 신선 왔던 때는 바로 봄철 경치였다네. 방초(芳草) 사이를 지나가
니, 걸음마다 화조(花鳥) 그림자였으리. 지금 비단옷은 춥지만 초구(貂裘)야 어찌 춥다 하리.
이러한 깊은 겨울에는 일만 경치 모두 감추었다네. 우연히 안성 동쪽에 나갔다가 돌아서 반곡령(盤谷嶺)으로
내려갔네. 문득 총수산을 보니 사랑함이 아울러 일어나는구나. 높고 높게 석벽이 섰는데, 텅 빈 동구가 고요하네.
빼어난 봉우리 정말 깎아 세운 것같이 파[蔥] 같은 그 형상 더욱 빛나고, 날아 떨어지는 샘물 용천검(龍泉劍)을
세운 듯 물가 모래판에는 새 발자국이 깨끗하구나. 모여서 잔치하던 그 옛터 있으니, 두 신선 와서 놀던 것이라
네. 동선(董仙)의 기문 돌에 새겨 있는데, 그 돌이 굴레 벗은 말이 달리는 것 같네. 높이 빼어난 모습 일천 산 중
제일인데, 풍류(風流)는 만금(萬金)의 가치였네. 맑은 물 동쪽으로 길게 길게 흐르는데, 높은 산 서쪽으로 멀리
멀리 가누나. 여기 지나는 동안 나는 잠이 들었는데, 통역하는 이 바삐 불러 깨우네. 다 구경하고 수레를 돌리려
는데, 차마 머리가 잘 돌려지지 않는구나. 당공(唐公 당고(唐皐)를 말함)이 동비(董碑)를 바라보며, 다시금 빨리
가지 말자고 주의시키네. 멍하니 거듭 탄식하니, 국상(國相 사신을 접대하는 조선의 정승)도 마음속으로 알아주
네. 따라서 관찰사에게 말하는데, 그 마음 우리와 함께 잊을 수 없다네. 나는 당공을 권하여 가자 하니,
날이 저물까 두렵네." 하였다.
운달산(雲達山) : 부의 남쪽 1백 3리에 있다. 속용산(束聳山) : 부의 남쪽 1백 20리에 있다.
남천(南川) : 보산역(寶山驛) 남쪽에 있는데 부(府)와의 거리는 19리이다.
사매천(賜每川)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바다 : 부의 남쪽 1백 50리에 있다.
삼탄(三灘) : 부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근원이 성불산(成佛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해주와의 경계이다. 전탄(箭灘)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기탄(岐灘) :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저탄(猪灘)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근원이 수안군(遂安郡)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와 신계현(新溪縣)을 지나
부의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부의 동쪽에서 전탄이 되며, 저탄에 와서 물이 비로소 커져서 아래로
강음현(江陰縣)으로 흘러 조읍포(助邑浦)가 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저탄은 패강(浿江)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또 우봉현조(牛峯縣條)에도 나온다.
○ 살피건대, 백제 시조 13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도읍을 한산(漢山) 아래로 옮기고 국경을 정하였는데,
북쪽은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으로 한계를 삼으며 서쪽은 큰 바다까지 가고 동쪽은 주양(走壤)
에 닿았다 하였는데, 만일 평양을 패강이라 한다면 그것은 고구려의 서울 곁에 있으니 어찌 백제의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랴. 그렇다면 패하(浿河)라는 것이 바로 이 물[水]인 것 같다.
○ 이색(李穡)의 시에, "물이 맑고 돌이 드러난 두 산 사이 지나가면서, 노는 물고기 세어보고 얼굴 비쳐보네.
오늘 동으로 돌아오는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니, 중국의 한림학사로 난새[鸞]를 타고 온다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비 온 뒤 저탄에 푸른 물결 넘쳤는데, 거듭 이곳 지나니 객의 정회가 많구나. 긴 다리는
어느 사이 거센 물결 따라 가버렸는데, 짧은 돛대가 가는 물결 따라 오고가네. 흰 안개는 저 멀리 하늘가의 장막
을 걷었는데, 푸른 산은 어지러이 바다 가운데 소라[螺]가 점찍었네.
칠령(漆嶺)을 굽이굽이 돌아오니 석양이 다 되어, 금암(金巖)에서 한 번 자는데 자는 밤이 어떠한지."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두어 칸 모래밭 가게가 모여서 마을을 이루었는데, 보리 이랑에 바람이 부니 푸른 물결
번득이는구나. 나루터 왕래하는 손에게 묻노니, 집안에서 농사짓는 이 몇 명이나 있는지." 하였다.
온천(溫泉) : 부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돌난간의 욕실(浴室)이 있다.
토산 사(絲)ㆍ남석(藍石)ㆍ청려석(靑礪石) : 보산역(寶山驛) 남쪽에서 생산된다. 석이ㆍ자초(紫草)ㆍ
적토(赤土) : 성악산(省惡山)에서 생산된다. 오미자ㆍ무쇠ㆍ눌어[納魚]ㆍ숭어ㆍ게ㆍ조개ㆍ붕어ㆍ
신증 녹반(綠磻) : 총수산 남쪽에서 생산된다.
봉수 독발산 봉수(禿鉢山烽燧) : 부의 북쪽 39리에 있다. 남쪽으로 봉자산(奉子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서흥부(瑞興府) 회산(回山)에 호응한다.
봉자산 봉수 : 부의 북쪽 21리에 있다. 북쪽으로 독발산에 호응하고 남쪽으로 남산에 호응한다.
남산 봉수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북쪽으로 봉자산에 호응하고 남쪽으로 강음현(江陰縣) 성산(城山)에 호응한
다.
성관(聲串) 봉수 : 부의 남쪽 1백 20리에 있다.
서쪽으로 해주 피관(皮串)에 호응하고 동쪽으로 연안 주지관(走之串)에 호응한다.
학교 향교 : 부의 남쪽 3백보에 있다. 신증 지금은 부의 동쪽 10리로 옮겼다.
역원 보산역(寶山驛)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밭에는 주사(周士)의 점심 먹는 이가 많고,주D-016언덕에는 한(漢) 나라 백성의 마
른 꼴[茭] 풀이 넉넉하구나.주D-17 들판의 외나무다리는 통발에 이어 있고, 산 속의 집은 새둥우리에 가깝네.
멧부리 따라가며 자색 고사리 꺾고 집을 둘러 푸른 박[匏] 기르네. 한 구역 그윽한 그 이웃 좋으니,
숨어 살아 친구 삼을 만하네." 하였다.
○ 땅에 두른 천번 서린 골짜기요, 하늘을 닿은 만첩 산이네. 버드나무 다리는 물 속에 흔들리고 솔 아래 돌층계
는 구름 사이에 둘려 있네. 옛 성첩에 찬 까마귀 모여들고, 앞 수풀엔 지친 새가 돌아오는구나.
사신의 행차도 지는 해 아껴 어둠을 타고 터벅터벅 가는구나.
○ 한 마을이 동학(洞壑) 속에 감추어 있는데, 뽕나무 그늘 아래 3, 4집 보이네. 어부는 조용히 낚시를 드리우고,
사냥하는 아이 한가롭게 그물을 짜네. 언덕 위 소나무엔 바람이 솔방울을 떨어뜨리고, 담장 덮은 이끼엔 비가
와서 이끼꽃을 보태네. 부럽구나, 너희들 밭 갈고 누에치는 외엔 한가하고 편안하게 세월 보내는 것."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중춘(仲春) 시절의 나그네길에서 달을 보는데, 말탄 행렬 멀리 보산관에 왔구나.
기운을 바라보고 금은(金銀)을 알아선주D-018 무엇하리. 주렴을 걷어올리고 좋은 구경이나 마음대로 하세나.
개인 구름 자욱한데 산은 울창하게 둘렀고 옛 절은 퇴락하였는데 소도(蘇屠)만 남았구나.
연등 가절(燃燈佳節) 전하여 들은 지 오래되는데, 이 밤에도 있는지 없는지."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보슬보슬 내리는 비 나그네 옷을 적시는데, 공관(公館)이 산기슭에 있는 것이 기쁘구나.
산아지랑이[嵐氣] 그림자 다락에 들어오니 발[簾] 그림자 무거워지고, 솔바람소리 골짜기에 생기니 새소리는
드무네. 시(詩)는 즐거운 나라[樂國] 읊어서 처음으로 진(陣)을 이루는데,주D-019 술은 수심성[愁城] 쳤으나
아직도 포위를 풀지 못했네. 저 들보 위의 제비 한 쌍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 날아오고 날아가누나."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먼 길 열흘 동안에 몇 번이나 옷 갈아입었나, 앞길을 소미성(少微星 처사성(處士星))에
게 물어볼까. 비 온 뒤의 시냇가 삼[麻]은 아직도 다 거두지 못했고, 길가의 산살구는 따고 나니 드물구나.
다가가 말을 멈추면 행주(行廚 길을 가는데 임시로 만든 부엌)가 있고, 가는 곳마다 시를 쓰는데 장막이 둘렸네.
이 내 심정 다 풀지 못한다 하지 말라, 도리어 산 위의 구름 따라 훨훨 나누나."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안성역(安城驛) 지나니 또 보산역인데, 수레 창 밖엔 가는 곳마다 산봉우리 들어가네.
뜰 앞의 제일 사랑스런 두 그루 소나무 늙었는데, 달밤에 누가 있어 백학(白鶴)이 돌아오는 것 보았는지."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날씨가 차니 가득 부은 술잔 사양을 말게, 나도 그대 위해 이 잔을 비우려네.
다만 두려운 일은 내일 아침까지 추우면, 괴로운 추위에 또 술 깰 때이지.
○ 날이 차니 가득 부은 술 사양을 말게, 더구나 이 정승이 가득 부은 술잔을 쭉 들이키네.
관찰사 멀리 와서 지주(地主)의 예절 바치니, 서로 만나 마시지 않고 언제 마시나." 하였다.
○ 사도(史道)의 시에, "금바위[金巖]에서 서쪽으로 나와 다시 보산(寶山)으로 들어왔네. 바위의 금은 어디에 보
이나 산의 보배는 언제 열리려는지.주D-020 이 나라 임금 어진 선비 좋아하며, 먼 나라에 큰 재주도 많네.
밤중에 천문(天文)을 바라보니, 서기(瑞氣)가 동쪽 나라에 통했구나. ○ 날이 차니 가득 붓는 술을 사양치 말게
나, 함박눈 불어와서 큰 술잔에 떨어지네.
이날엔 그대와 더불어 평수(萍水)주D-21로 만났는데 훗날에 두 번 만날 때 있을는지.
○ 날이 차니 가득 붓는 술을 사양하지 말고, 이별하는 안색으로 술잔 대하지 말세. 회포를 활짝 풀던 곳 어느 곳
이었나, 한강(漢江) 배안에서 함께 취할 때였네." 하였다.
기린역(麒麟驛) : 부의 서쪽 60리에 있으며, 승(丞)이 있다. 본도에 속할 역이 11이니 다만(茶滿)ㆍ원산(元山)ㆍ
연양(延陽)ㆍ진목(眞木)ㆍ박산(朴山)ㆍ문라(文羅)ㆍ안산(安山)ㆍ위라(位羅)ㆍ소곶(所串)ㆍ소평(所坪)ㆍ
신흥(新興)이다. ○ 승(丞) 한 사람이다.
금암역(金巖驛) : 부의 남쪽 7리에 있다.
○ 기순(祁順)의 시에, "안주(安州) 처음 지날 때 봄눈이 날더니, 황주(黃州)의 누대 앞에서 그 눈 다시 보겠네.
용공(龍公) 뒤를 따라 금암도(金巖道)까지 온 듯 나부끼고 뿌리는 것 황주와 다름없구나.
강산 천리에 먼지 씻어졌고 천지가 한 빛이니 티가 없구나. 높고 낮은 밭이랑 한껏 젖었는데
멀고 가까운 초목들 봄빛을 머금었네. 사신으로 온 내 몸이 편안히 쉬지 못하니 옥절(玉節)을 잠시 멈추다가 이
내 달려가네. 겹 갖옷[裘]은 나무꾼 만나서 울까 두렵고, 한 도롱이[蓑]로 어부들 쓰는 것 배우네.
연기 낀 마을에 좋은 경치 있으니 드러났고, 산길에 발자국 없으니 갈림길을 잃겠네. 처음엔 눈빛을 사랑하여
취한 눈이 어지럽더니 다시 가느다란 얼음이 읊는 수염에 달린 줄 깨닫겠네.
마부가 방황하며 말발굽 미끄러운데, 고삐를 당기며 걸음마다 넘어질까 조심하네.
조각배로 시내 위에 흥취를 낼 만도 한데 흐르는 물 다리가엔 모두가 시(詩)이네. 지쳐서 외로운 객관을 찾으며
날 저무는 줄 모르는데, 삼서(三瑞)주D-022를 기록하여 동쪽 나라에 전하려네.
취한 늙은이 백전(白戰)주D-23에 남은 솜씨 있으니, 붓을 적셔 억지로 옛사람을 본받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가련하게도 객지에 나와 지음(知音 자신의 심정을 잘 아는 벗)이 적으니, 비록 시가 이루
어져도 읊기를 게을리하네.
산은 철산(鐵山)이라 이름했으나 어찌 쇠가 있는가, 땅 이름은 금지(金地)이나 원래 금이 없다네.
관청에서는 병농(兵農) 정책 거행하기에 익숙하고 백성들은 언제나 제 생활 편안히 하네. 여기저기 지나는 곳에
모옥(茅屋)이 적으니 몇 번인지 말을 돌려 솔그늘 찾아갔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막막하게 넓은 언덕 한(漢) 나라 관문(關門)에 접하였는데 출정(出征)한 사람 북으
로 갔다가 몇 명이나 동으로 돌아왔나. 비가 오니 문득 높고 낮은 길을 잃었는데, 구름이 지나가니 잠깐 동안에
멀고 가까운 산이 나누어지는구나.
역리(驛吏)들 길옆에서 언제나 바쁜데 들판에 있는 중은 수풀 아래에서 늘 편안하고 한가롭네.
혼자 생각해도 가련한 것이, 시(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스스로 가엾다. 종일토록 가며 읊조리자니 살쩍
이 이미 히뜩히뜩."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길이 맑은 물굽이로 나가자 돌병풍 보이는데 동풍이 비를 뿌려 푸른 이끼 적시누나.
갈다 남은 오색 돌은 여와씨(女媧氏)주D-024가 어여쁜데 옮겨다 삼한(三韓)에 가까이 놓으니 거령(巨靈)이 감
사하네. 때를 씻노라고 무어라 남간수(南澗水)를 더럽히랴. 공중에 솟은 저곳에 북산명(北山銘)을 새기리.
그대께 부탁하노니 다시 서까래 같은 붓을 빌려 나의 사신 행차 이날 지난 것을 기록하소."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귀갑(龜甲)이 공중에 달리고 비단 병풍 벌였는데, 좋은 산이 다함없이 눈앞에 푸르네.
강은 적벽(赤壁)에서 나누었으니 하늘이 내린 험한 지역이요, 자라가 방호산(方壺山)을 머리에 인 것 같으니 땅
이 신령스럽게 보였네. 금곡(金谷)의 붉은 실은 보장(步障)을 열었고,주D-025 상암(商巖)의 전자(篆字)는 반명
(盤銘)주D-26을 보겠네. 누구를 시켜 동도(東都)로 옮겨가서 다시 중랑(中郞) 시켜 석경(石經)을 쓸거나."주D-
27 하였다.
안성역(安城驛) :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 김식(金湜)의 시에, "비 개인 공관(公館)에 더위 티끌 없는데, 전일 산을 보던 나그네 지금 또 왔네. 작은 길
연기와 풀에 묻혔는데 높은 누대는 들 구름을 마주하여 열렸네. 바람을 부르는 좋은 새는 맑은 소리 말하는 것
같고, 물에 스치는 새 볏잎은 부드럽기가 이끼 같구나. 일미의 인삼탕(人蔘湯)에 일백 근심 사르니,
무어라 술을 마시며 시재주를 허비하리."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물이 산을 둘러 한 점 티끌도 없는데 더구나 때 맞춘 비가 푸른빛 보내오네. 성긴 발은 거
듭거듭 걷어올림이 싫지 않고, 비단 장막 사면에 열어놓은 것 무방하다.
음식을 준비하는데 흰 돌을 삶을 이주D-028 없고, 시를 읊는데 객이 푸른 이끼에 섰네.
시를 이루니 모두가 양춘조(陽春調)주D-29라 화답하려 하니 칠보재(七步才)주D-30 아님이 부끄럽구나."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수림 끝에 우정(郵亭)이 길을 눌러 있는데, 가는 사람들 물과 함께 동쪽 서쪽으로 가누나.
버드나무 언덕에 녹음이 우거지니 처음으로 해를 가렸고 꽃동산에 붉은 꽃 쇠잔하여 반이나 진흙에 붙었구나.
앉아서 보니 석양은 고목 위로 넘어가고, 누워 들으니 밤비는 빈 뜰에 소리 내는구나.
밤새도록 임금 그리워 편안한 잠 못 드니 앞마을 새벽 닭 우는 소리가 기쁘구나.
○ 졸졸 골짜기에서 뿜어내리는
물, 오뚝오뚝 공중에 발길질하는 산일세. 나그네의 길은 일천 바위 밖이요, 인가는 한 골짜기 안이네.
나무꾼 아이는 연기가로 가고, 낚시꾼 늙은이는 달 아래 돌아오네. 멧부리 너머로 닭ㆍ개 소리 들리니 사립문은
밤에도 잠그지 않는구나."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희고 흰 배꽃은 짧은 담장 덮었는데, 푸르고 푸른 소나무 일산에 정오 그늘이 서늘하네.
빈 들보는 겹으로 친 발 장막[簾幕]에 걸지 않으니 동풍에 제비들 바쁘게 오가는 것 일임하네." 하였다.
저탄원(猪灘院) : 저탄 언덕에 있다. 귀령원(龜寧院) :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다정원(茶井院) : 부의 북쪽 21리에 있다.
숭수원(崇水院) : 총수산(蔥秀山) 동쪽에 있다. 샘물이 바위 구멍에서 나와 세 줄기로 흐르며 겨울이 되면 얼어
서 얼음 기둥이 되는데 혹은 길고 혹은 짧다. 늙은 농사꾼들이 그것을 보아서 내년의 풍년 흉년을 점치는데 하
나는 산군(山郡)을 주장하고, 하나는 기전(畿甸) 지방을 보고, 하나는 하삼도(下三道 경상ㆍ전라ㆍ충청도)를 보
는데 얼음이 길면 풍년이 지고 짧으면 흉년이 진다고 하는데 매우 증험이 있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신수원(神水院)이라 하기도 한다.
미륵원(彌勒院) :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장연원(長淵院) : 부의 서쪽 90리에 있다.
냉정원(冷井院) : 부의 서쪽 65리에 있다. 천방원(芊芳院) : 부의 북쪽 65리에 있다.
산수원(山首院) : 부의 서쪽 1백 10리에 있다.
불우 연봉사(煙峯寺)ㆍ성불사(成佛寺)ㆍ산암사(山菴寺)ㆍ묵방사(墨彷寺) : 모두 성불산에 있다.
용정사(龍井寺)ㆍ해운사(海雲寺)ㆍ망월사(望月寺)ㆍ쌍암사(雙菴寺) : 모두 모란산(牡丹山)에 있다.
소성불사(小成佛寺) : 만송산(滿松山)에 있다. 서림사(西林寺) : 속용산(束聳山)에 있다.
건동사(乾洞寺) : 성악산(省惡山)에 있다.
남방사(南方寺)ㆍ관남사(觀南寺)ㆍ음을사(陰乙寺) : 모두 멸악산(滅惡山)에 있다.
음적사(陰寂寺) : 감악산(紺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총묘 안극인묘(安克仁墓) : 저탄리(猪灘里)에 있다.
고적 성황산성(城隍山城)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5백 25척이요, 높이 20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자모산성(慈母山城) :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4백 80척, 높이 15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철봉산성(鐵峯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백 13척, 높이 10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청심루(淸心樓) : 객사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척서정(滌暑亭) : 지금은 있던 곳을 알 수 없는데, 김원외(金員外)의 시를 가지고 상고하여 보면 저탄(猪灘)
언덕 위에 있었던 것 같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취하여 높은 난간 의지하고 두건을 반만 벗었는데,
먼 산이 어른어른 맑은 강은 넓으네.
서시(西施)의 자태 아무래도 어여쁘니 엷은 단장이 짙은 단장보다 못지않네. 흥이 무르익자 석양(夕陽)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노젓는 노랫소리 명경(明鏡) 가운데 뜨네. 화공(化工)은 오히려 우리들이 쉽사리 흩어질까 하여
저녁달을 불어보내네.
○ 세상의 티끌 생각 모두 다 벗어 버리고, 잠시 다른 고장 찾아 보고 넓은 지경 바라보네.
높은 산의 일천 봉우리는 북두성 이고서[戴] 높았고, 평평한 강물 한 갈래는 땅을 가로비껴 줄을 긋누나.
하늘이 어두우니 물과 나무 문득 아득해지는데 흰 해오라기 한가로이 모래 물가에서 조누나.
무더운 5, 6월 마루 문에 상쾌하게 맑은 바람 생기는구나." 하였다.
명환고려 이지저(李之氐) : 이자겸(李資謙)에게 미움 받고 좌천되어 평주사(平州使)가 되었다가 이자겸이 패하
자 불러 돌아갔다.
최홍사(崔弘嗣) : 숙종(肅宗) 때의 지평주사(知平州事)였는데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인물
고려 유검필(庾黔弼) : 태조조의 개국공신으로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멸하였다. 출정할 때마다 태조가 반드시
맞아 위로하고 은총하였는데 여러 장수들보다 훨씬 대우하였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며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박수경(朴守卿) : 태조를 섬겨 원윤(元尹)이 되었다. 이때 견훤(甄萱)이 자주 신라를 침략하자 태조가 수경에게
명하여 가서 진압하게 하였는데 견훤이 두 번째 오는 것을 만나서 수경이 기이한 꾀로 패배시켰다.
조물군(助物郡) 및 발성(勃城) 싸움에 모두 힘껏 싸워 공이 있었다. 후일 역분전(役分田)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의
성품 행실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를 보아서 나누어 주기를 차등있게 하였는데 특별히 수경에게 밭 2백 결(結)을
하사하였다. 광종(光宗) 때에 여러 번 증직(贈職)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금준(今俊) :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
에 평주(平州)의 중 금준이 도망하여 여진(女眞)으로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金) 나라
의 선조가 되었다." 한다. 혹은 말하기를, "평주 중 금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 여진에 들어가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이라 하였는데 금나라 시조 아골타(阿骨打)가 그의 후손이다."
한다.
○ 《금사(金史)》를 보면, "금 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 고려에서 올 때 나이 벌써 60여 세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고 따르려 하지 않으니 아우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
함보가 완안부(完顔部)의 복알수(僕斡水) 물가에 살면서, 나이 60세가 되도록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에 장가
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가 오로(烏魯)이고 다음이 알로(斡魯)였는데 드디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하였
으니, 금 나라의 선조가 고려 사람인 것은 의심 없는 일이다. 다만 금준이나 극수 중 누가 저 《금사》에서 말한
함보인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신숭겸(申崇謙) : 원래 전라도 곡성(谷城) 사람인데 태조가 성(姓)을 주고 평산을 본관으로 하게 하였다.
속설에 숭겸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 사냥하다가 삼탄(三灘)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그때 기러기 세 마리가 공중
에 떠돌았는데 태조가, "누가 쏘겠는가?" 하니, 숭겸이, "신이 쏘겠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활과 화살, 안장 갖춘
말을 주었는데, 숭겸이 말하기를,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 하니, 태조가 웃으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라." 하였다. 숭겸이 명령에 따라 쏘았는데 과연 그대로 맞히니 태조가 장하
게 여겨 감탄하면서 명하여 평주로 본관을 삼게 하고, 기러기를 쏜 근처의 밭 3백 결도 함께 하사하여, 대대로
그 조세를 받아 먹게 하였으며 인하여 그 땅을 궁위(弓位)라 이름하였다. 나머지는 춘천(春川)편에 자세하다.
신군평(申君平) : 과거에 합격하여 충숙왕(忠肅王)조에 대관(臺官)이 되었으며 공민왕조에는 우대언(右代言)이
되었다. 한철충(韓哲冲)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본조 신개(申槩)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좌의정까지 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하
였다.
신자승(申自繩) : 신개의 아들인데 과거에 합격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열녀본조 조씨(曹氏) : 송을생(宋乙生)의 아내, 을생이 일찍 죽자 3년간 시묘살이하며 종신토록 절개를 지켰다.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워주었다.
제영 집 위엔 층층한 멧부리, 집 아랜 시내이네 : 송(宋) 나라 장임경(張琳卿)의 시에, "어제 용천(龍泉)에서도 경
치가 기이했는데, 한 봉우리 차갑게 푸르러 처마를 눌러 나직하네. 모두 다 겸한 평주관(平州館)만은 못하니 집
위엔 층층한 멧부리 집 아랜 시내이네." 하였다.
말머리[馬頭]가 일만 뭉치 구름을 뚫어 헤치네 : 예겸(倪謙)의 시에, "비 나머지 흩어져 눈이 분분한데, 산 안개
공중에 연하여 아득히 분간할 수 없네. 도롱이[蓑] 하나 입고서 산골짜기를 가니, 말머리가 일만 뭉치 구름을
뚫어 헤치네." 하였다. 한 가닥 서북 길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한 가닥 서북 길에 돌아가며 고생을 참네.
임금이 그리워 붉은 해를 쳐다보고, 집이 생각나 흰 구름 바라보네." 하였다.
시내 언덕 구불구불 길이 험하네 : 앞사람의 시에, "시내 언덕 구불구불 길이 험한데, 아침저녁 거마(車馬)들 가
고 또 돌아오네. 옥자리 평평하게 폈으니 얼음이 구렁에 얼었고, 은병풍을 겹겹이 쳤으니 눈이 산에 이어 있네.
옷을 다듬는 집에서는 다듬이 소리 바쁘고, 술을 파는 울타리가엔 깃발 그림자 한가롭네.
지나는 나그네 몇 번이나 좋은 경치 읊고 썼나. 양쪽 살쩍이 시(詩)에 물들어 아롱졌네." 하였다.
돌아다보니 장안(長安)은 백 리도 넘는다 : 앞사람의 시에, "말발굽 번개치듯 허공을 달리는데, 돌아다보니 장안
은 백 리도 넘는구나. 안개는 해를 막아 삼켰다 다시 토하고 바람은 구름 일산을 걷었다 도로 펴는구나.
전쟁 없는 변방엔 정장(停障 초소)이 없고 객을 맞는 언덕엔 역관(驛官)이 있구나. 민지(澠池)에서 한 번 모이게
된다면 그 누가 인상여(藺相如)주D-031를 이으리." 하였다.
멀고 높은 벼랑에 한 길이 평평하네 : 허성(許誠)의 시에, "멀고 높은 벼랑에 한 길이 평평한데, 수목이 우거진
촌락엔 저녁 연기 일어나네." 하였다.
시를 읊으니 길이 멀지 않네 : 이예(李芮)의 시에, "지금은 절월(節鉞)을 세우고주D-032 곤(閫)을 나누었는데,
전일에 임금 조서를 마지(麻紙)주D-33에 기초(起草)했네. 이 한 몸 일찍이 나라에 바쳤으니, 2년간이나 벌써
집을 잊었네. 술을 만났는데 술잔이 도리어 옅[淺]고, 시를 읊으니 길이 멀지않네. 풍미(風味)가 담담하다
말하지 마소, 동화문(東華門)주D-34에 분주한 것보다는 났다네." 하였다.
[비고]
연혁 철종(哲宗) 2년에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1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금암(金巖)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서봉(西峯)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보산(寶山) : 북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70리이다.
안성(安城)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문구(文邱)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70리이다.
신읍(新邑) : 위와 같다. 고지(古之)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세곡(細谷)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90리이다. 적암(積巖) : 서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상월(上月) : 서북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20리이다. 하월(下月) : 위와 같다.
방동(方洞) : 서남쪽으로 처음이 90리, 끝이 1백 20리이다.
마산(馬山) : 서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20리이다.
궁위(弓位) : 서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40리이다.
개일(介日) : 서남쪽으로 처음이 1백 20리, 끝이 1백 40리이다.
도륭(道隆) : 서남쪽으로 처음이 1백 40리, 끝이 1백 60리이다.
외읍(外邑)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성지 태백산성(太百山城) : 동쪽으로 4리 지점에 있다. 신라 경덕왕 21년에 쌓았으며 후에 성황산성(城隍山城)
이라 일컬었다. 본조 영조조 때에 터를 넓히고 개축하였다. 둘레는 1만 2천 1백 11척이며, 곡성 4, 옹성 8, 성문
이 넷이며, 동문 10여 보 밖에 큰 시내가 성(城)을 끼고 흐르는데 바로 저탄(猪灘) 상류이다.
○ 수성장 본부사가 별장ㆍ승장(僧將)을 겸하고 있었다.
영아 후영(後營) : 숙종조 때 설치하였다.
○ 후영장이 1명인데 본부사를 겸하였다.
○ 속읍은 평산ㆍ해주ㆍ서흥(瑞興)ㆍ금천(金川)이고, 속진은 선적(善積)ㆍ소이(所已)이다.
창고 읍창. 향창(餉倉) : 산성에 있다. 해창 : 도륭면(道隆面)에 있다. 신읍창(新邑倉) : 신읍면에 있다.
온정창(溫井倉)ㆍ광대창(廣大倉) : 서쪽으로 50리 지점에 있다. 시성창(矢城倉) : 서북쪽으로 60리 지점에 있다.
기린창(麒麟倉)ㆍ금교창(金郊倉).
역참 금교도(金郊道) : 옛날에 강음현(江陰縣)에 있었는데 강음현이 혁폐된 뒤에는 찰방(察訪)이 옮겨 본부에
있었다.
보산역(寶山驛) 찰방은 1명인데 역에 소속되어 들어가 있었다. 보산역 : 북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다.
혁폐 반석역(班石驛)ㆍ온천역(溫泉驛) 마발(馬撥) 관문참(官門站)ㆍ석우참(石隅站).
진도 저탄(猪灘) : 동남쪽으로 25리 지점에 있는데, 금천 대로로 통하는 길이다.
전탄(箭灘) : 동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데, 토산(免山)으로 통한다. 위의 두 곳은 겨울에는 다리로 건너고,
여름에는 배로 건넌다.
기탄(岐灘) : 동북쪽으로 40리에 있는데, 신계(新溪)로 통한다.
총수교(蔥秀橋) : 북쪽으로 30리에 있는데 서흥으로 통한다. 석탄교(石灘橋) : 서쪽으로 80리에 있는데 해주로
통한다. 금교(金郊) 남천교(南川橋)ㆍ부(府) 남천교 : 모두 남북 대로이다.
삽교(揷橋) : 서남쪽으로 1백 40리 지점에 있는데, 연안(延安)에서 해주 대로로 통한다.
토산 배ㆍ밤.
궁실 영소당(靈沼堂) : 기린역에 있다. 효종이 심양(瀋陽)에서 회란(回鑾 임금의 환궁)할 때 이곳에 머물러 잤다.
총수관(蔥秀館) : 중국 사신이 머무르던 곳이다.
사원 동양서원(東陽書院) : 효종 경인년에 세우고 숙종 정묘년에 사액하였다.
신숭겸(申崇謙) : 마전(麻田)편에 보인다.
이색(李穡) : 장단(長湍)편에 보인다.
○ 구봉서원 : 숙종 병자년에 세우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박세채(朴世采) : 문묘편에 보인다.
○ 태사사(太師祠) : 태백산성에 있다. 고려 때 세웠는데 본조 정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신숭겸ㆍ유검필(庾黔弼)ㆍ복지겸(卜智謙) : 이상은 철상(鐵像)이다. 배현경(裵玄慶) : 이상은 마전편에 보인다.
[주 D-001] 여산파(廬山派) : 여산(廬山)의 중 혜원(慧遠)이 술 즐기는 도연명(陶淵明)과 서로 친하였다.
[주 D-02] 고죽(孤竹) : 백이(伯夷)·숙제(叔齊)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다.
[주 D-003] 정삭(正朔)을 반포하려고 :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역서(曆書)를 보내주는 것이다.
[주 D-004] 장질(藏疾) : 좌전(左傳)에, “산과 숲은 나쁜 것을 감추어 준다.[山藪藏疾]” 하였다.
[주 D-005] 이상한 분양(羵羊) : 계환자(季桓子)가 우물을 파다가 흙독[土罐]을 얻었는데, 그 속에 양이 있었다.
흙의 괴이한 것[土怪]은 반드시 양처럼 생기는데 그것을 분양(羵羊)이라 하다.
[주 D-06] 전구(前驅) : 관원의 행차가 나갈 때에 앞잡이로서 말타고 가는 것을 .말한다.
[주 D-007] 황두랑(黃頭郞) : 배를 젓는 사람을 황두랑(黃頭郞)이라 하는데 누른 모자를 썼기 때문이다.
[주 D-08] 이량곡(伊涼曲) : 중국과 서역(西域)과의 국경에 이주(伊州)·양주(涼州)가 있다.
[주 D-09] 원상(沅湘) : 중국 남방에 원수(沅氺)와 상수(湘氺)가 있다.
[주 D-10] 백락(伯樂)이 한 번 돌아보면 : 백락(伯樂)은 말[馬]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므로 그가 지나다가
말을 한 번 돌아보면 값이 삼 배(三倍)나 올랐다 하다.
[주 D-11] 금낭(錦囊) : 당 나라 시인(詩人) 이장길(李長吉)이 놀러 나갈 때에 아이종에게 비단주머니를
들리고 나가서 시를 지으면 써서 그 속에 넣어 저녁에 돌아오면 주머니가 찼다 한다.
[주 D-012] 양자(羊子)를 슬퍼하나, : 양자(羊子)는 진(晉) 나라 양호(羊祜)를 말하는 것이다.
양호가 형주(荊州)에 진수(鎭守)하면서 덕이 있었으므로 현산(峴山)에 그의 비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날 때에 그를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타루비(墮淚碑)라 하였다.
거북과 용은 비(碑)의 머리에는 용을 조각하고 밑판에는 거북을 조각하였다는 말이다.
[주 D-13] 취옹(醉翁)을 즐겁게 하누나. :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저주(滁州)에 취옹정(醉翁亭)을 짓고
자기의 호(號)를 취옹이라 하고 그 기문(記文)에, “이 정자에서 연회(宴會)하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면 새들
만이 즐거워 지저귄다.” 하였다.
[주 D-14] 오늘에 옛날을 보게 되리, :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후세의 사람이 지금의 우리를
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가 옛날 사람을 보는 것과 같으리라.” 하였다.
[주 D-15] 까마귀는 바다 동쪽에 날아오르네. : 해[日]를 금까마귀[金鳥]라 하다. 부상(扶桑)은 동해 해 뜨는
곳에 있는 나무라 한다.
[주 D-016] "밭에는 주사(周士)의 점심 먹는 이가 많고, : 주(周) 나라 때에 극결(卻缺)이 들에서 밭을 가는데
그 아내가 점심을 가지고 갔는데 부부간에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였다 한다.
[주 D-17] 언덕에는 한(漢) 나라 백성의 마른 꼴[茭] 풀이 넉넉하구나. : 한(漢) 나라 때에 황하(黃河)의
언덕에 백성들이 꼴을 베고 목축하였다 한다.
[주 D-018] 기운을 바라보고 금은(金銀)을 알아선 : 두보(杜甫)의 시에, “탐하는 마음이 없으니 밤에 금은의
기운[金鋃氣]을 안다.” 하였다. 땅밑에 금은이 있으면 이상한 기운이 뜬다 한다. 여기서는 지명(地名)이
보산(寶山)이므로 이렇게 썼다.
[주 D-019] 시(詩)는 즐거운 나라[樂國] 읊어서 처음으로 진(陣)을 이루는데, : 시와 술을 시름[愁]을 쳐부수
는 군사에 비유한 것이다.
[주 D-020] 바위의 금은 어디에 보이나 산의 보배는 언제 열리려는지. : 옛 사람이 산에 들어갔더니 바위가
열리는데 그 안에 보배가 많이 있었다 한다.
[주 D-21] 평수(萍水) : 물에 뿌리 없이 뜬 부평초[萍]처럼 객지에서 잠깐 만났다는 말이다.
[주 D-022] 삼서(三瑞) : 정월에 눈이 세 번 오면 보리가 잘 된다 한다.
[주 D-23] 백전(白戰) : 무기를 가지지 않고 맨손으로 싸우는 것인데 여기서는 시 짓는 솜씨에 비유한 것이다.
[주 D-024] 오색 돌은 여와씨(女媧氏) : 옛적에 하늘이 무너진 것을 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갈아서
수보(修補)하였다 한다.
[주 D-025] 금곡(金谷)의 붉은 실은 보장(步障)을 열었고, : 진(晉) 나라 석숭(石崇)과 왕개(王愷)가 서로
부(富)를 자랑하여 왕개가 자사보장(紫絲步障)을 30리에 쳤다. 금곡(金谷)은 석숭의 별장이다.
여기서는 왕개와 석숭을 혼동한 것인 듯하다.
[주 D-26] 반명(盤銘) : 탕(湯) 임금의 반명(盤銘)이 있는데 《대학(大學)》에 나온다.
[주 D-27] 석경(石經)을 쓸거나." : 경(經)을 돌에다 각한 것인데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에
채옹(蔡邕)의 글씨로 새겼다.
[주 D-028] 흰 돌을 삶을 이 : 《신선전(神仙傳)》에, “백석생(白石生)은 항상 흰 돌을 삶아 양식으로 삼았다.”
하였다.
[주 D-29] 양춘조(陽春調) : 송옥(宋玉)의 글에, “양춘백설(陽春白雪)의 곡조는 초국(楚國)에서 화답하는 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니 곡조가 높을수록 화답하는 이가 적은 것이다.” 하였다.
[주 D-30] 칠보재(七步才) : 위(魏) 나라 조자건(曹子建)이 일곱 발자국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주 D-031] 민지(澠池)에서 한 번 모이게 된다면 그 누가 인상여(藺相如) : 전국시대에 진왕(秦王)과 조왕(趙王)
이 민지(澠池)에서 모여 노는데 진왕이 조왕에게 비파[瑟] 타기를 청하니, 조왕이 거역하지 못하여 비파를 탔다.
조왕의 신하 인상여(藺相如)가 진왕에게 장구 치기를 청하니, 진왕이 치지 않았다. 인상여가 대들며,
“만일 대왕(大王)께서 장구를 치지 않으면 신(臣)이 칼로 목을 찔러 대왕에게 뿌리겠습니다.” 하니,
진왕이 할 수 없이 장구를 쳤다.
[주 D-032] 절월(節鉞)을 세우고 : 장수가 밖에 나오면 부절과 도끼를 세운다.
[주 D-33] 마지(麻紙) : 당 나라 때에 임금의 조서를 황마지(黃麻紙)와 백마지(白麻紙)에 썼다.
[주 D-34] 동화문(東華門) : 당 나라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동화문으로 출입하였다.
서흥도호부 瑞興都護府
동쪽은 신계현(新溪縣) 경계까지 29리, 서쪽은 봉산군(鳳山郡) 경계까지 44리, 황주 경계까지 78리,
남쪽은 평산부 경계까지 17리, 북쪽은 수안군(遂安郡)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오곡군(五谷郡)이었다 :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동주(洞州)로 고쳤다. 성종(成宗)조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
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방어사를 폐지하고 평주(平州)에 속하게 하였다.
원종(元宗) 때에 임금의 태(胎)를 이 땅에 묻고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삼았다.
본조 태종 15년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으며 세종 6년에 명 나라 조정에 들어간 환자(宦者) 윤봉(尹鳳)의
고향이므로 승격하여 도호부를 삼았다.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명이다.
군명 오곡ㆍ우차탄홀ㆍ동주ㆍ농서(隴西)ㆍ서성(瑞城)ㆍ옥곡(玉谷).
성씨본부 민ㆍ정(鄭)ㆍ김ㆍ이ㆍ윤ㆍ강(康)ㆍ안ㆍ변(邊)ㆍ조(趙)ㆍ노(盧)ㆍ백ㆍ권ㆍ유(庾) : 모두 이주해 왔다.
윤 : 사성(賜姓)이다.
산천 대현산 : 부의 북쪽 7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나장산(羅帳山) : 부의 서쪽 31리에 있다.
백서산(白鼠山) : 곧 백서도(白鼠島)인데 부의 서쪽 31리에 있다. 금점(金岾)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자비령(慈悲嶺) : 부의 서쪽 60리에 있으며 절령(岊嶺)이라고도 하는데 평양에서 서울로 통하는 옛길이다.
세조조에 호랑이의 피해가 많고 또 중국 사신이 모두 극성(棘城)길을 경유하여 통행함으로 그 길이 폐지되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의하면 원(元) 나라 때에 여기로 경계를 삼았다 한다.
○ 이장용(李藏用)의 시에, "자비령 길 열여덟 굽이에, 한 칼로 가로막으면 일만 창이 어찌하지 못하네.
지금엔 천하가 모두 태평하니, 두견새만이 부질없이 지는 달에 울고 있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사닥다리 길 멀고 높이 어지러운 봉우리를 돌았는데 오정(五丁)주D-001이 조만간
에 산을 뚫어 통하리." 하였다.
고덕산(高德山) :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운마산(雲磨山) :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정족산(鼎足山) : 부의 남쪽 46리에 있다.
오덕산(五德山) :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식점(食岾) :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부연(釜淵) : 부의 동쪽 33리에 있다. 근원이 부의 북쪽 고음파산(古音波山)에서 나와 용천(龍泉)과 합류하여
봉산군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용천(龍泉) : 부의 남쪽 22리에 있다. 산기슭에서 물이 솟아 나와 시내를 이루었는데 이름을 용천이라 한다.
죽전(竹田) : 부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죽전수(竹箭藪)라고도 한다.
도의평(刀衣坪) : 부의 북쪽 60리에 있는데 고려 때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이다.
토산 노감석(爐甘石)ㆍ연철(鉛鐵)ㆍ무쇠 : 모두 식점(食岾)에서 생산된다. 석이ㆍ벌꿀ㆍ잣ㆍ사(絲)ㆍ마(麻)ㆍ
궁간목(弓幹木) : 구정리(俱井里)에서 생산된다. 눌어(訥魚)ㆍ금린어(錦鱗魚)ㆍ칠(漆)ㆍ오미자ㆍ자초(紫草)ㆍ
인삼ㆍ복령(茯苓)ㆍ자기(磁器).
성곽 대현산성(大峴山城) : 돌로 쌓았는네 주위가 2만 2백 38척, 높이 23척이다. 안에 우물 2, 못 1곳이 있으며
본부 및 수안ㆍ곡산ㆍ신계ㆍ우봉(牛峯)ㆍ토산(免山)ㆍ황주ㆍ봉산 등 고을의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소을마산 봉수(所乙麽山烽燧) : 부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봉산군 건지산(乾之山)에 호응하고,
남쪽으로 회산(回山)에 호응한다.
회산 봉수 : 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평산부 독발산(禿鉢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소을마산에 호응
한다.
누정 관덕루(觀德樓) : 객관 동쪽에 있다. 월영대(月迎臺) :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학교 향교 ; 부의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용천역(龍泉驛) : 용천의 서쪽 10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산을 뚫어 누가 길을 내었나, 기이하고 험한 것이 효함(崤函) 같구나.주D-002 일만
굽이 도는 골짜기에 용이 서린 듯, 일천 무더기의 바위는 범이 앉아 있는 듯. 시내의 수초는 물고기들이 함께 입
질하고 길가의 풀은 말이 다투어 먹네. 가고 가도 그윽하고 한가한 지경이니, 신선의 노닒 세속과는 아주 머네.
○ 닭 우는 소리 듣고 옛 역을 떠나니, 새벽 경치가 점점 어른거리네. 산빛은 검푸르기도 한데, 노을빛은 진하게
도 붉구나. 사냥꾼은 사냥개를 이끌었고, 노는 나그네는 칼을 찼네.
조만간에 조회할 말[馬]은 공중에 뛰며 바람을 밟고 있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장근(章謹)의 시에, "한 구역에 산수도 좋은데, 두어 호(戶)에 뽕나무 삼[麻]이 넉넉하구나.
관(館)에 와서 여윈 말을 쉬게 하니, 수풀로 찾아가는 저녁 까마귀 보이네. 밥을 더 먹으니 회와 구이가 있고,
술을 권하니 가지와 외를 섞어 올리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저 한 쌍의 매화나무, 시 읊으니 사신이 위로되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집을 짓고 새로 길 내었는데, 못을 파서는 함께 삼[麻]을 씻는구나. 새벽 흥취는 변방 기
러기를 따라 나는데, 저녁 휴식은 산 갈가마귀 따르네. 행색이 정말 맑은 물 같은데, 돌아갈 기약은 과만(瓜滿
관원의 임기가 만료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려네. 안장을 나란히 하니 위로되어 기쁜데, 쌍벽(雙壁)은 재주도
풍부하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밤에 용천역에 들어가니 봄 산이 달 가운데 숨어 있네. 아전이 맞이하니 역관(驛館)이 가
까운 줄을 알겠는데, 말을 멈추고 보니 뜰안은 비어 있구나. 분주한 이 내 몸 붙어 있는 것주D-003 같은데, 멀고
먼 길은 가도 끝이 없구나. 닭이 울 때 말을 재촉하여 떠나서 멀리 압록강 동쪽을 향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한 줄기 푸른 구름이 말 머리를 두르는데, 용천역의 공관이 산기슭에 있네. 해[日]가 옮
기니 느티나무 그림자는 외로운 자리에 오고, 바람이 움직이니 소나무 소리는 가까운 산에 이르렀네.
마신 술 적으니 천 일(千日) 동안 취할 길 없고,주D-04 일이 많으니 얼마 동안이나 한가함을 얻으리.
오늘 아침에 구름과 산을 벗삼아 쉬었는데, 오래지 않아서 또 이곳으로 돌아오리."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말을 멈추니 해가 석양이고 높은 곳에 오르니 안계(眼界)가 멀어지네. 동문(洞門) 세월이
한가롭고, 모옥(茅屋)엔 연기와 노을이 가려 있네. 흐르는 물은 비단을 펼쳤는데, 먼 산은 상투를 반만 내놓았네.
용천검(龍泉劍)주D-05 빛이 두우성(斗牛星)을 향하여 뻗으니 어디 가서 장화(張華)를 만나나."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객관이 깊이 붉고 푸른 산 사이에 의지했는데, 늦게 오니 먼지가 얼굴에 가득했네.
집을 둘러 장막은 쳐서 무얼 하나, 두 눈으로 마음껏 먼 산들을 보려 하노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높은 산의 첩첩히 쌓인 돌은 벽돌 쌓은 것 같고, 일렁이는 물의 비단 무늬는 도리어 주름
살 같네. 봄바람이 따뜻한데 꾀꼬리 울고, 꽃 안개가 아득한데 숫꿩이 우네. 먼 저녁 하늘 높은 비단을 펴놓은 듯
거친 가시덤불 무성한 풀은 바위구멍에 남았네. 급히 옛 객관을 찾아가서 용천이냐고 물으니, 따스한 기운이
사람에게 덮쳐 술에 취한 것 같네." 하였다. 신증 명 나라 애박(艾璞)의 시에, "먼 지역에 평탄한 길만 따라 노는
건 고당(高堂)에 계신 늙은 어버이께 근심될까 두렵네. 장기(瘴氣) 낀 고개에서 답답하고 무더운데 바람이 정오
를 피하고, 들판 인가(人家)가 말쑥하니 기후는 가을이 돌아오네. 무정하게 술을 대하니 몸은 객이 되고,
눈에 닿는 대로 구경하니 붓이 짝 되었네. 유독 기쁜 일은 동쪽 나라가 신의(信義)를 생각하는 것, 공명(功名)
으로 멀리 봉후(封侯)를 바라는 것 아니네. ○ 하인들이 닭의 소리 듣고 일찍 일어나라 하는데, 객의 회포 혼연히
취해 멍청한 것 같네. 한 짐 도서[圖籍]는 사람 시켜 보내고, 두 묶음 조서는 내가 친히 받드네.
바로 전하여 인류(人類)에 큰 은혜 고루 펴는데, 이 고장이라 해서 따로 미워하리.
용천역 도착하니 삼경(三更)은 되는데, 길 좌우쪽에 휘황한 횃불은 등불과 섞였네." 하였다.
○ 권건(權健)의 시에, "어찌하여 해마다 타향에 객이 되는고, 오경 밤중 외로운 베개에 나그네의 혼이 놀라네.
시가 시원찮아 거칠고도 따분한데, 쇠잔한 등불 다 돋우니 흐렸다 다시 밝아지네. 추위에 언 참새는 펄펄 달 그
림자를 흔들고, 찬 가지는 부스럭부스럭 바람 소리에 떨리네. 승명려(承明廬)에 당직했던 일 언제이던고,
새벽 누수(漏水 : 물시계) 맑은 소리 문득 생각나네." 하였다.
신흥역(新興驛) : 부의 남쪽에 있다. 부연원(釜淵院) : 부연 곁에 있다. 용천원(龍泉院) : 용천역 곁에 있다.
흥수원(興水院) :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독관원(禿館院)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판적원(板積院) : 부의 북쪽 75리에 있다. 목감원(牧甘院) :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자비령원(慈悲嶺院) : 자비령 아래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자색 골짜기 푸른 벼랑이 끊겼다 다시 이어졌는데, 두 번 찾으니 풍경은 예전대로
이네. 난간 밖에 칼처럼 꽂혀 있는 것은 천 그루 돌이요, 들앞에 구슬처럼 떨어지는 것은 한 줄기 샘물이네.
술을 사오니 웃는 이[齒]를 열 수 있고 시를 청하니 읊조리는 어깨 치솟네. 하필 여기서 결사(結社)주D-006
하고 늙어야 하리, 말 타고 자주 지내기만 해도 좋은걸." 하였다.
교량 학교(鶴橋) :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 서성(徐省)의 시에, "모래와 물이 밝고 맑아 반 묘(畝)쯤 평평한데, 바위 소나무 시내에 임하니 낮 그늘이 서
늘하네. 분주하게 다닌 6년간에 이 다리 익숙하게 지났지만, 한 번도 갓끈 씻지 못한 것이 부끄럽네." 하였다.
불우 성수사(星宿寺) :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석문사(石門寺) : 운마산(雲磨山)에 있다.
고정사(高井寺) :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석련사(石蓮寺) : 정족산(鼎足山)에 있다.
안국사(安國寺) : 자비령에 있다.
월량사(月涼寺) : 정족산에 있다. 자비사(慈悲寺) : 자비령에 있으니 바로 나한당(羅漢堂)이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해도와 평양의 경계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크고 높아서 지나는 이들이 매우 괴로워하
니 그곳이 바로 자비령이다. 영(嶺)의 북쪽은 평양에 속하고 그 남쪽은 서해도에 속했는데 나한당은 실로 영의
북쪽에 자리잡고 동선참(洞仙站)을 내려다본다. 어느 시대에 창건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
들이 자못 알려졌다. 내가 젊었을 때, 역마를 달려 연경(燕京)에 가면서 두 번 이 당 아래를 지났다.
일찍이 한 번 문안으로 들어가서 배례(拜禮)하였다. 당번(幢幡)들이 매우 많고 화려하였는데 모두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축원하는 말이었다. 부엌과 마구간의 설치를 보고 또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매우 갖추어
진 것도 알 수 있어, 마음으로 기뻐하면서도 그 자세한 것을 물을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 좌가부승록 계명사주
지 중덕정해(左街副僧錄啓明寺住持中德定海)라는 이가 또 중건하고 문도 성주(省珠)를 통하여 나에게 기문을
청하는데 또 그 집을 짓게 된 경위를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물으니, 성주가 또 말하기를, '계명사(啓明師)의 갈길이 매우 급하니 선생은 초록하여 주시오.
이번 일은 나한(羅漢)을 섬겨서 복을 구하고 지나는 길손을 편하게 하여 은혜를 베풀며 그 공덕을 쌓아서 임금
을 축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돌릴 뿐이니, 절의 내력 같은 것은 말단(末端)의 일이니 뭐라고 쓸 것이
없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지금 불교가 천하에 가득하지만 그 근원은 서역(西域)에서 온 것이니
글쓰는 법에 있어서 대략 서술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자비령이 우뚝하게 높고, 나한당이 찬란하게 아름다움을
읊조리는 즈음에, 한 번 눈으로 보기만 해도 어찌 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말을 쉬이고 마음대로 구경하며 분향하고 배례하면서, 기식(氣息)이 평정되고 심신이 고요하게 되어 비
록 잠시 동안이지만, 사람에게 이익됨이 많았으니, 글을 쓰는 법에 있어서 마땅히 즐겨 써야 할 것이다.
내가 이에 다시 그 자세한 것을 묻지 않고, 그대로 성주가 한 말을 써서 돌아가 벽 사이에 걸게 하노니, 계명사
(啓明師)의 자비가 마땅히 자비령과 더불어 풍성할 것이요, 나한의 신통함이 더러는 계명사의 신통한 것이 될
것이니, 자비와 신통이 어찌 국가의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이에 써서 주노라.' 하였다." 쓰여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봉우리 끝의 절이 산허리를 베개하였으니 세상의 티끌 자취야 올라올 수 있으리.
안개는 그윽한 시내에 덮였으니, 진경(眞境)이 감추어졌고, 구름이 빼어난 재[嶺]를 묻으니, 하늘이 아끼는 듯
한 종소리는 푸른 아지랑이 아득한 밖이요, 탑 그림자는 붉은 놀 고요한 그 사이네. 정결한 지경이 평범한 눈으
로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나니, 왕래하는 사람 한산(寒山)주D-007인 줄을 누가 알리.
○ 불긋 희끗한 누대가 푸른 산중에 높이 있으니 시내 들판 일만 겹 모두가 저 아래에 보이네. 붉은 화로에 불을
지피니 엄동에도 따스하고, 푸른 대자리가 바람을 부르니 한여름에도 차구나. 금간(金澗)의 물소리는 땅 밑에서
불고, 옥봉(玉峯)의 구름 그림자는 하늘 끝에 번득이네. 그윽하고 한가함 분명히 신선 지경인지라, 노는 사람들
앉은 동안 안장이 썩을까 염려되네.주D-08
○ 높은 고개의 뜬구름 미인이 푸른 눈썹을 치장한 듯, 나한(羅漢)님 머무는 곳이므로 자비로 이름했네.
도솔천(兜率天) 전각(殿閣)은 구름 사이에 떨어졌고, 방장산(方丈山) 누대가 바다 위에서 옮겨온 듯, 천리의 나
그네 종적은 속절없이 절로 지나가고, 한 암자의 선미(禪味)는 마침내 누가 알리.
공명 이룬 다음엔 부용사(芙蓉社) 결성하려는데, 임금 은혜 다 보답하자면 언제나 되려나.
○ 궁한 수심 어지럽게 늘그막에 모였더니, 우연히 이 절간 지나니 문득 다 풀리네. 다리[橋]가 푸른 벼랑 의지
했는데, 꾸불꾸불한 모양 보기 좋고, 길이 푸른 절벽에 이어 있으니 따라 나가기 겁나네. 지형이 상쾌하게 밝으
니 삼계(三界)를 벗어난 듯, 하늘 형세 맑고 비었으니 사선천(四禪天)을 지난 듯. 한스럽기는 왕명으로 가는 길
영(嶺)을 넘기 재촉하니, 바람 난간에 한바탕 잠자지 못하는 것.
○ 한 채의 천궁[花宮]이 인간세계와 떨어져 있는데, 무단히 산기슭에 환출(幻出)되었네. 뜰앞엔 옥을 씻는 졸졸
흐르는 물이요, 지붕 위의 소라 모양은 뾰족뾰족한 산이네. 땅은 푸른 산 아지랑이 보내어 아침에 섬돌을 덮고,
하늘은 밝은 해 보내어 저녁에 관문에 임해 있네. 몇 번이고 깃발 돌리며 맑은 지역 떠나지 못하는데,
잔나비는 계속 높게 우는데, 학은 마주하고서 한가하구나.
○ 층층한 산마루는 봉처럼 춤추고 물은 용처럼 서렸는데, 발을 걷고 자세히 보니 안계(眼界)가 넓구나.
문밖엔 얼기설기 환히 길이 통했고, 난간 앞엔 우뚝우뚝 멧부리 솟았네. 높은 하늘 해와 달을 언제나 먼저 차지
하는데, 천리의 강역(疆域)은 바로 저 아래 보이네. 우습도다, 세속 인연 다 되지 않아 억지로 영경(靈境)을 작
별하고 말을 몰아 가네.
○ 졸졸 물소리 일만 골짜기 일천 봉우리를 둘렀는데, 깎아지른 바위 머리에 외길이 통하네. 푸른 하늘 버티어
독수리재[鷲嶺] 서렸고, 푸른 바다 갈라서 용궁(龍宮)을 일으켰네. 새벽 등잔 그림자는 하늘 끝 달에 닿았고,
저녁 북소리는 나뭇가지 바람에 전하네. 향기로운 비, 묘한 꽃이 언제나 땅에 가득하니, 도인(道人)의 신통한 힘
조화옹과 같구나." 하였다.
속명사(續命寺) : 오덕산(五德山)에 있다.
○ 김처례(金處禮)의 시에, "만 길[萬丈] 티끌 속에 한치 가슴, 명리(名利)를 구하는데 마침내 끝이 없네.
달 밝은데 외로운 나그네 꿈을 깨니, 산 밖 절에서 한밤중 종소리 들리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부연용사(釜淵龍祠) : 봄가을로 본 읍에서 제사를 드린다.
○ 이첨(李詹)의 시에, "길 왼쪽 신령스런 못 깊이가 얼마인지, 매달린 폭포 물결 도는 웅덩이 반석(盤石)은 크구
나. 행인들 무서워 감히 엿보지 못하니, 신령한 용의 집이 이곳 그 아닌가. 밝은 구슬이 용의 손바닥에 있어 밤에
도 빛이 뜨는데, 구름 뇌성 때로는 하늘 위에서 일어난다네. 향불 피우는 사당 집에 봄가을 제사 드리는데,
하늘이 비 내리지 않으면 무녀(巫女)들 춤춘다네. 앉아서 사방에 단비 내리게 하여 사방의 만백성들 은택을 입
는다네. 용아! 용아! 과연 있는지 없는지, 지나는 나그네 늙은이에게서 들은 말이네." 하였다.
서도 신사(鼠島神祠) :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옛날 외적(外敵)이 침노했는데 어떤 중이 흰 쥐로 변화하여
밤중에 가만히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서 활과 살을 다 물어뜯어 놓으니 적이 패하여 달아나고, 중은 나장산(羅帳
山) 바위 구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지 1년여 만에 죽어서 서도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부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를 드린다. 가물 때 비를 빌면 문득 감응한다.
고적 절령책(岊嶺柵) : 바로 자비령 목책이다. 공민왕 때에 홍건적이 쳐들어와 침략하니 왕이 동지추밀원사(同
知樞密院事) 이여경(李餘慶)을 보내어 절령에 목책을 세우고, 밀직제학(密直提學) 정사도(鄭思道)와 김두(金㺶)
를 보내어 지키게 하였는데, 밤에 적이 만여 명 군사를 목책 곁에 매복시키고 새벽 닭이 울 때에 철기(鐵騎) 5천
명으로 목책 문을 쳐부수고 들어오니 우리 군사들이 크게 무너졌다.
상원수 안우(安祐)와 도병마사 김득배(金得培) 등이 단기(單騎)로 달아나 돌아왔다.
절령역(岊嶺驛) : 옛터가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고갯길이 폐지된 다음 봉산군의 검수(劍水)로 옮겼다.
초리소(酢梨所) : 자비령 아래 있다.
인물본조 민원(閔瑗) : 원래 부의 이속이었는데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전주 부윤(全州府尹)까지 되었다.
신증 김굉필(金宏弼) : 자는 대유(大猷)인데 성리학에 정밀하고 깊었으며, 뜻이 독실하고 힘써 실행하였다.
성종조에 특별히 참봉(參奉)을 제수하였으며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연산군 무오년에 김종직(金宗直)
의제자라고 하여 귀양갔다가 마침내 살해되었다. 금상 13년에 의정(議政)으로 증직되고 봄가을로 제사를 내려
해마다 그 집에 양곡을 보냈다.
제영 바다 봉우리엔 아직 눈이 있다. : 예겸(倪謙)의 시에, "새벽에 일어나니 하늘이 문득 어두운데, 밝기를 기다
려 서흥(瑞興)을 떠났네. 바다 봉우리엔 아직 눈이 있고, 돌 시내엔 얼음 벌써 없어졌네. 새가 희롱하니 객을 맞
이하는 것 같고, 소나무가 부딪치니 친구를 얻은 것 같구나. 높은 산 자주 쳐다보며, 말을 타고 구름 헤쳐 올라가
네." 하였다.
동부(洞府)엔 민가가 적네 : 이발(李潑)의 시에, "동부엔 민가가 적은데 소나무ㆍ전나무 빼어난 빛 짙었네.
그늘진 벼랑에 샘물이 밤에 소리 내고, 갠 밭두둑엔 사슴이 새벽에 지나가네. 산중 술에 실컷 취하여 언덕 위 꽃
속에서 미친 듯 노래부르네. 멀리 노는 이 내 마음 그지없이 말 위에서 세월을 보내네." 하였다.
무지개 흐르듯 절벽에 나는 샘물 쏟아지네 : 무지개 흐르듯 절벽에 나는 샘물 쏟아지니, 저 은하수가 공중에서
새어 내리지 않는가 두렵네. 만일 이적선(李謫仙 이태백)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찌 여산(廬山)에만 장천(長川)을
읊었으랴."주D-009 하였다.
양의 창자[羊腸] 아홉 굽이 길을 억지로 부여잡고 올라가네 : 앞사람의 시에, "양의 창자 아홉 굽이 길을 억지로
부여잡고 올라가네. 눈을 드니 평평한 수풀에 북두칠성이 마주 달렸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현종(顯宗) 12년에 특명으로 백 년 동안 현(縣)으로 강등시켰다 : 조대립(趙大立)이 반란하여 부사(府使)
이우주(李宇柱)를 죽였기 때문이다. 영조 38년에 복구시켰다. 정종 원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0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 고읍(古邑) 터는 동쪽으로 35리인데, 세조(世祖)조 때 지금의 관아로 옮겨 설치하였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부 : 끝이 30리이다. 매향(梅香) : 동쪽으로 40리이다. 구정(九井) : 북쪽으로 60리이다.
표리(票里) : 북쪽으로 40리이다. 도의평(刀衣坪) : 북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80리이다.
세평(細平) :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소사(所沙) : 북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60리이다.
목감(牧監) :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5리이다. 평리(坪里)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소이(所已)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전막지(田莫知)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화동(禾洞) :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초리소(酢梨所)는 자비령(慈悲嶺) 아래에 있다.
진보 선적진(善積鎭) 북쪽으로 40리인데 옛날에 만호가 있었다.
숙종 9년에 신당진(新塘鎭)을 합하여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 성현(城峴)ㆍ독치(禿峙)ㆍ건은령(件隱嶺)ㆍ동현(東峴)ㆍ자은령(自隱嶺)을 방수(防守)한다.
○ 병마동첨절제사가 1명이다.
소이진(所已鎭) : 서북쪽으로 40리이다. 숙종 6년에 소이ㆍ범한(凡汗) 2둔(屯)을 합하여 진을 설치하고,
둔장(屯將)을 만호로 승격시켰다.
○ 작리령ㆍ자비령ㆍ여계령(餘界嶺)을 방어하고 지킨다. 병마만호가 1명이다.
혁폐 신당진(新塘鎭)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숙종조 때 신당ㆍ병풍(屛風) 2둔을 합하여 진을 설치하고 만호를
두었다. 자은령ㆍ독치 노파령(老坡嶺)을 방어하였으며 9년에 선적진에 합하였다.
창고 읍창, 화창(禾倉) : 화동에 있다. 북창 : 북쪽으로 45리 지점에 있다. 향창 : 산성에 있다.
역참혁폐 절령도(岊嶺道) : 자비령 아래에 있는데, 영(嶺)이 허물어진 뒤에 봉산군(鳳山郡) 조수(釣水)에 옮겼다.
이폐(吏廢) 관문참(官門站)ㆍ서산참(西山站).
목장혁폐 농서장(隴西場) : 고려 때 설치하였는데 목감방(牧監坊)이 있다.
교량 남천교(南川橋)ㆍ흥수원천교(興水院川橋) : 모두 남북의 대로이다.
토산 활대[弓幹]. 뽕나무 : 구정산(九井山)에서 난다.
누정 농산정(隴山亭) : 부내(府內)에 있다. 영파루(暎波樓) : 운종관(雲從館)에 있다.
사원 화곡서원(花谷書院) : 선조(宣祖) 병진년에 세우고 그 해 사액되었다.
김굉필ㆍ이이 : 모두 문묘편에 보인다.
김유(金楺) : 호는 검재(儉齋)이며 청풍(淸風)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 전문형(吏曹參判典文衡)이고 영의정
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주 D-001] 오정(五丁) : 전설상의 다섯 명의 역사(力士)로, 촉(蜀) 나라의 험준한 지형에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 D-002] 효함(崤函) 같구나. : 산동(山東)에서 진(秦) 나라로 들어가는 데에 험한 함곡관(函谷關)이 있는데
그곳에 효산(崤山)이 있다.
[주 D-003] 내 몸 붙어 있는 것 :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남의 집에 잠깐 붙여 있는 것이요,
죽는 것은 본고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주 D-04] 천 일(千日) 동안 취할 길 없고, : 옛날에 중산(中山) 사람이 천일주(千日酒)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먹으면 천 일 동안 깨지 않는다고 한다.
[주 D-05] 용천검(龍泉劍) : 보검의 이름이다. 진(秦) 나라 장화(張華)가 뇌환(雷煥)과 함께 천문(天文)을 보니
하늘에 두성(斗星)·우성(牛星)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뻗쳐 있었다. 두우성(斗牛星)은 풍성(豐星)의 분야(分野)에
해당되므로 뇌환을 풍성령(豐城令)으로 보내어 땅을 파서 두 보검을 얻었다.
[주 D-006] 결사(結社) : 수도(修道)하는 사람들이 동지(同志)를 모아 결사(結社)하는 것이니,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백련사(白蓮社)와 같은 것이다.
[주 D-007] 한산(寒山) : 당 나라 때에 천태산 국청사(國淸寺)에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란 두 중이 있는데
미친 사람 같았다. 풍간선사(豊干禪師)가 여구윤(閭丘胤)에게 말하기를, “한산과 습득은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 하였다. 여구윤이 찾아가서 절하니, 그들은 돌구멍으로 들어갔다.
한산의 시집(詩集)이 지금까지 전한다.
[주 D-08] 노는 사람들 앉은 동안 안장이 썩을까 염려되네. : 진(秦) 나라 왕질(王質)이 도끼를 가지고 산에
나무를 베러 갔다가 신선을 만나 그들의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바둑판이 끝난 뒤에 보니 가지고 갔던
도끼자루가 썩었더라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 D-009] 어찌 여산(廬山)에만 장천(長川)을 읊었으랴." : 이태백(李太白)이 여산폭포(廬山瀑布)를 읊은
시에, “긴 내[長川]가 걸려있네.” 한 구절이 있다.
봉산군 鳳山郡
동쪽으로 평산부 경계까지 75리, 서흥부 경계까지 34리, 남쪽으로 재령군 경계까지 30리,
서쪽으로 바다까지 34리, 북쪽으로 황주 경계까지 3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2리이다.
신증 동쪽으로 평산부 경계까지 70리, 서흥부 경계까지 40리, 남쪽으로 재령군 경계까지 50리, 서쪽으로 바다
까지 45리, 북쪽으로 황주 경계의 극성(棘城)까지 3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0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휴암군(鵂巖郡)이다 : 휴류성(鵂鶹城)이라고도 하고, 조파의(租坡衣)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서암군(棲巖郡)으로 고치고, 고려 초기에 봉주(鳳州)라고 불렀다.
성종조에 방어사를 두었는데 현종조초기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황주에 예속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지봉양군사(知鳳陽郡事)로 고쳤는데 후에 다시 봉주로 불렀다.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을 삼았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이다. 신증 금상(今上) 18년에 구 읍내에 전염병이 많아서 지금 읍으로 옮기니 남쪽
으로 구군(舊郡)까지의 거리가 14리이다.
군명 휴류성ㆍ휴암ㆍ조파의ㆍ서암ㆍ지하(池河)ㆍ봉주ㆍ봉양 : 기순(祁順)의 부(賦)에, "내가 조선의 봉산을 지
나는데, 영물(靈物 봉(鳳))이 이르는 것이 있을 것처럼 생각이 되니 거짓으로 지은 이름이 아닌 것 같다.
부를 지어 펼치면 거의 적막하지 않을 것 같다. 기이하고 상서롭다 봉(鳳)의 새 됨이여, 천지의 영수(靈秀)한 기
운을 타고 조화의 정영(精英)함을 빼앗았도다.
오채(五采)가 범상치 않고 칠덕(七德)을 다 갖추었으며 구포(九苞)주D-001가 그 몸에 붙였고 여섯 가지 형상
[六像]주D-02이 그 몸에 있도다. 쇠한 세상에 숨었다가 나타나면 태평하며, 가는 것은 군자의 지조와 같고 나
오는 것은 성인의 뜻에 합하니, 이 때문에 우충(羽虫) 3백 60의 장(長)이 되어 홀로 인서(仁瑞)의 영물에 해당된
것이다.
천지 사이에 모든 물건이 한결같지 않은데, 여러 종류 중에 특출하고 무리에 뛰어나야만 이에 영물이 된다.
비늘 있는 동물의 장은 용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날아오르고 변화하는 것을 누가 같이할 수 있으며, 털 있는 동
물의 장은 기린(麒麟)이 제일이니 의(義)를 안고[抱] 인(仁)을 머금은 것이 왕자의 상서이며,
신이한 거북[神龜] 그림을 지고 나오니 인문(人文)이 베풀어졌고주D-003오총(五總)의 지혜주D-04가 갑충
(甲蟲) 중의 첫째가 된다.
이 봉새는 아름다움을 모든 온전히 하여 세 동물과 짝하여 사령(四靈)주D-05이 된다. 소리가 음률에 맞으니 앵
무새가 말할 줄 아는 것과는 다르며, 천 길[千仞] 높이 나니 어찌 홍곡(鴻鵠)의 뜻만이랴.주D-06 원앙새와 학이
그 밑에 돌며, 독수리가 물러나 피하고, 대붕(大鵬)새가 그 높이 낢을 양보하며, 제비가 그 밝고 지혜로움을 양
보하고, 매와 새매가 그 웅걸하고 호기로움을 양보하며, 공작과 난(鸞)새가 그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양보한다.
저들 온갖 새들이 모두 앞서기를 미루고 감히 비교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할미새ㆍ종달새의 작은 것이나 올빼미ㆍ
부엉이의 악한 것들이야 또 어찌 함께 말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서경》에서 칭찬을 받고, 《시경》에 읊은 바 되며 〈학기(學記)〉에 전하고 《초사(楚辭)》에 찬양
되었다. 이것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은 소호씨(少昊氏) 세상에서 보이며 음률을 조화한 것은 황제(黃帝) 때에 알
려졌고, 기년(紀年)에 있어서는 한(漢)ㆍ당(唐)의 황제가 번갈아 연호(年號)를 세우고, 덕을 비유하는 데 있어
서는 삼설(三薛)ㆍ양위(兩魏)의 칭호가 마땅하다고 하니, 대개 예나 지금이나 모두 귀히 여기는 것이요,
내가 사사로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옛날 헌원씨(軒轅氏) 때에는 그림을 머금고 와서 혹은 동원(東園)에 멈추고
혹은 아각(阿閣)에 깃들였으며, 요제(堯帝)가 정사를 할 때에는 다시 뜰에 보여서 그림을 펼치고 옥쇄를 주었으
니 천고에 증험된 일이다.
유우씨(有虞氏 순(舜)) 때에 와서는 소소(簫韶) 음악을 아홉 번 연주하니 펄펄 날아와서 거들었던 것이 그 음률
에 맞았으며 문왕(文王)이 도가 있고 주(周) 나라 왕실이 융성하니 기산(岐山) 아래서 화락하게 울었으니, 이것
은 모두가 성한 덕에 감동하여 온 것으로서 실로 세상에 드문 기이한 만남인 것이다.
시대가 춘추(春秋) 때에 들어서는 왕실의 기강이 무너지고 공리(功利)의 설(說)이 일어나고 성현의 도가 숨겨
지니 봉새가 이 기미를 알고, 높이 날아 멀리 갔네. 중니(仲尼)는 오지 않는다는 탄식주D-007을 일으키게 되고,
접여(接輿)는 덕이 쇠하였다는 탄식주D-08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는 치란(治亂)이 일정함이 없어서 인사
(人事)가 잘 시행되지 않으니, 어찌 아름다운 상서가 이를 것이랴. 그러므로 영천(潁川)에의 날아다님과 진유
(陳留)의 풀어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의 기이한 것에 지나지 못한 것이요, 융성한 세상의 상서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방금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어 문운(文運)이 크게 창성하니 안으로 구주(九州)에서부
터 밖으로 먼 나라에 이르기까지 덕화가 널리 퍼져서 무성하고 성대하여 근대(近代)를 하풍(下風)으로 비루하
게 보고 옛날에 비교하여도 빛이 있도다. 여기서 하늘과 땅이 감통(感通)하고 신과 사람에 믿어져서 바다와 산
이 영이(靈異)함을 본받고, 비오고 개는 것이 때를 맞춘다.
단이슬[甘露] 단술 샘[醴泉]과 아름다운 벼[嘉禾] 상서스런 보리[瑞麥] 경성(景星)이며 경운(慶雲)이며,
추우(騶虞), 신작(神雀)과 함께 천마(天馬)는 기특하고 신룡(神龍)은 뛰놀며 십붕(十朋)되는 거북과 기린의 뿔
이 연이어 이른다.
기약도 하지 않고 삼한(三韓)의 채색 새[彩鳥 봉(鳳)]도 역시 와서 좋은 때에 감응하고, 화한 바람으로써 불고,
상서로운 구름으로 인도하여 그 빛깔이 빛나고 그 무늬가 찬란한 것이 저 높은 멧부리에서 조양(朝陽 산의 남
쪽)에 우러러 덕의 황휘(煌輝)주D-009한 대궐을 바라본다.
무성한 높은 오동나무에 의지하고 우뚝우뚝한 성긴 대숲에 멈추며, 목마르면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주리면
임랑(琳琅)의 진기한 것을 먹으니, 보통 새들이 그 이름을 빌릴 수 없고, 혜성(慧星)이 참 별과 혼동될 수 없다.
대개 멀리 상류(常類)에서 뛰어나고, 지극한 인(仁)에 돌아가기를 즐겨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구경하는 자가 앞
을 다투고 말하는 자가 듣기를 좋아하며, 땅은 이로 인하여 신령스러워지고, 경치는 이로 인하여 좋아지며,
고을은 이로 인하여 이름이 나고, 사람은 지나면서 다시금 공경하는 것이니, 어찌 동쪽 나라의 문물(文物)이 한
결같이 한번 새로워지며 우리 조정[明國]의 기화(氣化)가 전성함을 보지 않겠는가. 이렇게 노래하여 부른다.
봉새의 이르름이여, 지극히 다스려진 세상임을 나타내도다.
천자의 덕이 먼 나라에 두루 미치니, 봉새의 울음이여, 아름다운 상서에 맞았도다. 천자의 복조가 억만년은 전
해지리.
신증 김수온(金守溫)이 기순(祁順)의 부를 차운(次韻)한 서문에, "미천한 이 사람이 들으니, 성스러운 임금이 나
면 반드시 성스러운 임금의 상서가 있다 한다. 그러나 왕자(王者)가 천명을 이어받아 정치를 하여 천하를 동일
시하는 인(仁)의 교화가 해내ㆍ해외의 구별이 없으니 그 상서의 나타남이 혹은 먼 구석 치우친 나라에 있기도
하기 때문에, ‘불을 먹는 닭’과 ‘외뿔 기린’을 서쪽 지방에서 바친 것은, 분명한 그 징험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비록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나 동쪽으로 퍼지는 중국의 문화를 실로 먼저 받았으니, 봉황이 이 고
장 산에서 울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닐 것이다. 지금 황화대부(皇華大夫)가 몸소 이곳에 와서 그 일을 목격하고
부송(賦頌)을 지어서 돌에 새겨 광채가 산골짜기를 비친다. 이 사람이 보잘것없으나 나라의 옛일을 상고하여 정
문(情文)주D-010을 겸하여 문득 높은 운(韻)에 의하여 또 한 편의 글을 짓는다. 대저 그 나라의 기이한 상서는
반드시 그 나라 사람이 글을 짓기를 기다리는 법이며 대부의 지은 글이 실지와 다름없음을 나타내고, 돌아가서
우리 대명(大明)의 큰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글에 이르기를, '객은 물산의 특출한 것으로 왕국의 영화(英華)이다. 신령스런 흉금을 오(吳) 나라ㆍ초(楚) 나라
에서 기르고, 높은 날개를 유주(幽州)ㆍ병주(幷州)에서 펼쳤고, 육합(六合)의 끝없는 곳을 돌아서 대괴(大塊 : 천
지)의 무형(無形)한 것을 호흡하였네. 한 번 치고 한 번 춤추니 하늘이 이루어지고 땅이 평평해지고[天成地平],
기상을 변화하고 성정(性情)을 열었다 닫았다 하도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명(皇明)은 운이 천일(千一)주D-011을 열었으니, 어찌 정치와 교화가 아름답고 밝을 뿐이랴, 또한 예악(禮樂)
과 문물(文物)이로다.
명당(明堂)주D-12이 열림이여, 요순(堯舜)이 옷을 드리웠고, 낭묘(廊廟)의 높음이여, 기ㆍ룡(夔龍 순 임금의 어
진 신하들)을 이었도다. 임금은 성스럽고 신하는 어질어 덕이 서로 합하고 뜻이 서로 같으니, 백 대로 올라가 옛
적을 논하여도 지금보다 나을 수 없도다. 아름답다, 호해(湖海)의 높은 선비는, 정말 인물 중의 제일 상서로다.
벼슬 않고 아래 있으면 효제(孝悌)를 행하여 풍속이 흥기되며, 현달하여 위에 있으면 아랫사람의 마음이 상달되
고 상덕(上德)이 널리 퍼지도다.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갓끈을 휘날리고 수레바퀴를 굴리며 부산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가. 온화하고 아름다운 황제의 말씀을 입에 물고 윤음(綸音)의 착하고 아름다움을 차고서 오셨네.
동쪽 나라가 연산(燕山)과의 거리가 4천 리이나 공자(孔子)의 누추한 곳에 거하려던 것주D-13을 사모하며, 호
시(弧矢)의 장한 뜻주D-14을 품고 조정 옷[朝表]을 걷고 저녁에 떠나니, 어찌 마음에 놀라고 몸을 피하랴.
쇠뇌[弩]를 지고 앞에서 먼저 가니 영광스럽고 이불을 가지고 종알종알함주D-15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돌아보건댄 우리 이 나라가 산천의 수려한 것 천하에 다 찾아보아도 비할 곳이 드무니, 명승과 이적(異跡)을 이
루 다 셀 수 없네. 옛날 문왕(文王)은 늙은이를 봉양하여 서주(西周)의 덕화를 일으키자 봉이 와서 높은 언덕에
울어, 권아(卷阿 시경의 편명)의 시를 읊었으며, 굴원(屈原)이 이소(離騷)를 읊으니 초사(楚辭)라 이름하였네.
그런즉 봉황이라는 새는 성스럽고 밝은 때에 나오는 것으로서 덕 없으면 오게 할 수 없고 덕 있는 시대만이 마땅
하네, 이것은 실로 하늘에 달렸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공(公)으로 하고 사(私)로 하지 못할 일이로다.
옛날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를 혁명할 때에, 기자(箕子)가 대의(大義)로 주(周) 나라 조정에 신하될 수 없었으
나 무왕이 구주(九疇) 홍범(洪範)을 물으니, 2대(代)의 문헌을 상고할 수 있었도다.
이에 수레는 노(輅)를 쓰고 풍악은 소(韶)를 따랐네,주D-16 조선에 봉하여 해뜨는 곳을 다스렸네, 왕도[皇極]의
가르침이 펴지고 8조(條)의 정사가 융성하였네. 봉이 이에 한 번 내려오니 사람들이 그 화한 울음 소리를 들었네.
드디어 그 땅에 고을을 설치하여 그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네. 나무꾼과ㆍ목동이 가끔 너울너울한 깃[羽毛]을 혹
시 만나리. 대개 이 새는 압록강(鴨綠江) 물결에 물 마시고 먹이 쪼으며 계림(鷄林)의 수목에 깃들이고 모이나니,
그 오는 것은 왕덕(王德)이 태평함이요, 그 가는 것은 국정이 어지러울 때라네. 이는 부로(父老)들의 말로 전할
뿐만 아니라 서적에도 분명히 적혀 있도다. 다행히도 황각(凰閣 중서성(中書省))의 공자(公子)가 해뜨는 변방 먼
나라에 와서 놀며 수레를 그 아래 멈추고 남기실 음성 생각하며 감탄하면서 웅편(雄篇)의 문장을 발표하여 선양
하니, 진실로 그 광채를 무엇으로 비기리. 이것은 일시의 이적(異跡)을 표현한 것만이 아니라 실로 천년의 상서를
나타냄이로다. 대개 이 작은 나라의 천한 선비들로 하여금 모두 황제의 덕업이 창성함을 우러러보며 그 은택을
입어 먼 나라에서 뛰놀면 온몸이 화창하고 귀에 쟁쟁하여 황제의 덕으로 돌아가서 밝은 빛에 가까이하게 함이로
다.
그러나 옛날 황왕(皇王)의 지극한 정치는 사방에 빛나고 위아래에 이르러주D-17 온갖 곡식이 잘 익고 모든 날씨
가 철에 맞아 사람마다 충신(忠信)을 행하고 집마다 콩과 보리가 있었다네.
그 당시엔 난새[鸞]와 봉이 나무 위에서 우는 것을 저 언덕 한 구석의 참새처럼 보며 신령스런 용이 못에 노는
것을 물 속의 고기 뛰는 것처럼 여겼네. 어찌 거북의 십붕(十朋 붕(朋)은 옛날 화폐의 수량. 큰 거북의 값이 십붕
한다는 말이다)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뿐이랴, 기린의 외뿔도 귀히 여기지 않았으리. 이것은 대개 중화(中和)주
D-18로써 근본을 삼고 박약(博約)주D-19으로써 학문을 삼으니, 일만 나라가 조공(朝貢)하는 것이 저 일백 냇물
이 바다로 모여드는 것 같으며, 한 분[임금]이 경사가 있으니 여러 별들이 북두칠성으로 향하는 것 같았네.
더구나 천문(天文)이 밝음에 있어서도 어찌 경성(景星)ㆍ경운(慶雲)을 대수롭게 보았으랴.
그러나 곤산(崑山)의 옥이 빈 골짜기에서 빛나는 것을 변화(卞和)가 초(楚) 나라 문왕(文王)에게 바쳤다가 울었
고, 푸른 깃과 코끼리 이빨이 남쪽 나라에서 난 것을 당 나라 유안(劉晏)이 대궐에 바쳤으며, 미세한 초목까지도
서리를 업신여기고 눈[雪]에 거만스러운 지조가 있다 하여 솔과 대[竹]를 취하였도다.
저 봉황이라는 것은 역시 보통 새와 달라서 시대마다 진귀하게 여기나, 그것을 예전에 찾기보다는 지금에 취하
는 것만 같지 못하며. 그것을 물건에서 취하기보다는 참 어진 사람에서 징험하는 것만 같지 못하도다.
지금의 황화대부는 시서(詩書) 육예(六藝)로 봉의 오채(五彩)를 삼고, 도덕ㆍ예의로 봉의 구포(九苞 포는 포함
하였다는 뜻으로, 봉은 아홉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함.)를 삼으며, 시(詩)에 흥기하고 예에 서며, 덕에 의거하
고 인(仁)에 의지하도다. 그것으로 먼 나라의 들에 노닐면 천하에서들 조양(朝陽)에 봉이 운다 하고, 그것으로
사방에 정치를 펴면 억조 백성들이 귀를 기울여 들으니, 이것이야말로 옛날이 아니면서 옛날이며 봉이 아니면
서 봉이로다.
보기 드문 것을 가지고서 어리석은 풍속에 자랑을 삼지 않으며 들은 바에 합당한 것으로써 성세(聖世)의 존경을
받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조(天朝)의 우의(羽儀)가 되고, 황제의 덕화에 문채를 놓아 황명(皇明)의 억만년 끝없는
정치의 성대함을 이룩하는 것이로다. 한 구석에 있는 이 사람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기쁨으로도 부족하여 노
래로 잇노라.' 하고 노래에, '봉황이 온 것으로 지극한 태평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이것은 그 실지를 경시하고 그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근본을 버리고 그 지엽(枝葉)을 취함이로다. 제제(濟濟)한 많은 선비들이 이것이 국
가를 잘 울림이로다. 그것은 당세의 상서일 뿐만 아니라 이름과 사실을 천년까지 전할 것이로다.' 하였다." 한다.
성씨본군 주(朱)ㆍ이ㆍ지(智)ㆍ전(全)ㆍ윤ㆍ최ㆍ김ㆍ백ㆍ한ㆍ배ㆍ명(明)ㆍ황ㆍ곽(郭)ㆍ차 : 모두 속(續).
오 : 해주(海州). 장(張) : 장성(長城). 강(康) : 재령(載寧).
산천 녹과산(祿科山) : 고을 서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자비령(慈悲嶺)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서흥부(瑞興府)편에 자세하다. 정방산(政方山) :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건지산(乾之山)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적암(赤巖) : 고을 동쪽 50리에 있다. 백학암(白鶴巖)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계유산(鷄遊山)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산에 양익봉(兩翼峯)이 있다. 관산(館山) : 고을 동쪽 9리에 있다.
소이산(所伊山)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여계산(如鷄山) : 고을 동북쪽 52리에 있다.
나한동(羅漢洞)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봉황대(鳳凰臺)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영천(靈泉) :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수동(水洞)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바다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와화곶(臥火串)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율곶진(栗串津) : 고을 서쪽 34리에 있다. 재령군 조(載寧郡條)에 자세하다
신룡담(神龍潭) : 휴류암(鵂鶹巖)이라고도 하는데 못이 고을 북쪽 5리에 있다.
○ 고려조 명종(明宗) 때에, 감찰어사(監察御史) 함유일(咸有一)이 황주 판관(黃州判官)이 되었는데,
속현(屬縣) 봉주산(鳳州 봉산)에 이르러서 고을 사람들이 바위 아래 못 속에 신룡(神龍)이 있어서 모두들 공경
하고 두려워하여 정성을 드린다는 말을 듣고, 함유일이 고을 사람을 불러 더러운 물건으로 그 못을 메웠다.
그날은 갠 하늘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오고 뇌성 번개가 무섭게 일어나서 사람들이 놀라 엎어지는 자도 있었는
데, 좀 있다가 비가 개자, 메웠던 더러운 물건이 다 없어지고 다시 맑아졌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제사드렸으며 이로부터는 매년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드렸
다. 가물 때 비를 빌면 곧 응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는 그 고을 관원을 시켜 제사드렸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산 앞의 푸른 돌 쌍 사립문이 열렸는데, 돌 밑의 맑은 못 만 길이나 깊네. 밝게 햇빛
을 담아 번쩍이고, 차갑게 수풀 그림자를 머금어 고요하고 그윽하네.
백성들 지금 바야흐로 탕(湯) 임금 때처럼 가뭄주D-020을 적셔 주기 바라는데, 정승된 이 누가 부열(傅說)의
장마주D-21 이루어 주려나. 출몰하는 저 물고기들 자세히 들여다보지 말라, 아마도 용이 먼저 보내서 사람들의
마음 시험하는 것이리."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동산의 구름 기운 뭉게뭉게 깊은데, 신령스런 못이 바로 구름 깊은 그 속에 있네.
구름이 오고 가니 절로 아침이요 또 저녁인데, 신룡이 여기 잠겨 용궁 삼았네. 물 근원 솟구쳐 돌틈에서 나오는
데, 갠 날 무지개 내려와 마시니 유리(瑠璃) 빛 짙었네. 못가에 반석은 책상같이 평평하고, 그 위에 사당 있어 푸
른 소나무에 이어 있네. 덩굴 부여잡고 내려다보니 두 눈이 아찔한데, 그 아래 한 물줄기 달려 흐르는구나.
그 물 나누어 관개함이 몇백 이랑인지, 옥토(沃土)의 벼 해마다 풍년진다네. 이 고장 사람들 제사드려 사철을 가
리지 않고 기도하면, 감응하여 영험이 신기하다네. 용아, 용아, 게을리 누워 있지 말고 때맞추어 구름과 비 주어
천하를 적셔 주소." 하였다.
대천(大川)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관탄천(館灘川) : 고을 서쪽 19리에 있다.
신증 발리산(鉢里山) : 고을 북쪽 7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토산 사(絲)ㆍ마(麻)ㆍ노감석(爐甘石). 황옥(黃玉) : 일흥창(逸興倉)에서 난다.
오석(烏石) : 묵천(墨川)에서 난다.
무쇠 : 백변(白邊)에서 난다. 자기(磁器)ㆍ뱅어ㆍ숭어ㆍ붕어ㆍ눌어(訥魚)ㆍ금린어(錦鱗魚)ㆍ게.
봉수 건지산 봉수(乾之山烽燧) : 남쪽으로 서흥부 소을마산(所乙麽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황주 천주산(天柱山)에 호응한다.
누정 환취루(環翠樓) : 객사 동쪽에 있다.
○ 명 나라의 단목지(端木智)가 건문(建文) 4년(태조 2년)에 사신으로 와서 올라보고, 사면으로 산이 둘러 푸르
른 것을 사랑하여 드디어 환취라고 이름을 짓고 시를 지었다. 시에, "바다와 산이 멈추는 곳마다 뜻에 맞는데,
천 길 산이 내 눈을 서늘하게 하는구나. 활짝 걷히자 뜬구름 위에 솟았고, 굽이쳐 둘러 긴 물가를 가렸네.
돌아보니 금봉조(金鳳鳥)요, 마주 있는 섬은 연꽃이 빼어났구나. 푸른 공중이 장막을 쳤으며 노을빛이 단구(丹
丘 신선이 사는 곳)에 비치누나. 연작(燕雀)의 뜻 떨어버리고 홍곡(鴻鵠)의 노는 것 그리워하네.
그대 잠거(簪裾 벼슬하는 사람의 의관)가 어찌 얽매었다 하랴, 큰 노래에 온갖 시름 가시네." 하였다.
○ 명 나라 반문규(潘文奎)의 시에 "땅이 동남으로 돌면서 한 길이 넓어지는데, 겹쳐 있는 누각이 구름 끝에 일
어섰네. 좋은 산이 사면에서 뾰죽뾰죽 창[戟]과 같고, 빽빽한 나무 천 그루나 푸르러 모였네. 남기(嵐氣)가 따
스하고 훈훈하니 책상이 윤택하고, 새소리가 맑게 가까우니 무늬 새긴 창문이 차구나.
올라와 구경하니 한없는 고향 생각, 봄바람의 열두 난간을 다 기대보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객중의 정회를 스스로 풀 길이 없어, 누각에 올라 붓끝 빌려 써보리. 포도가 옥잔에 가득
하니 풍광(風光)이 따뜻한데, 뽕나무가 마을에 이어 있으니 들빛이 뭉쳤네. 한 줄기 물이 깊으니 봄눈이 녹았고,
사면 창문 산이 가까우니 새벽에 추위가 생기네. 중국 사신 이름 남긴 후로 몇 명의 시인들이 오래도록 난간을
의지했나." 하였다.
○ 김첨(金瞻)의 시에, "아득한 평원(平原)이 눈앞에 넓은데, 붉은 지붕과 푸른 기와가 수풀 끝에 솟았네.
서원(西園)에 비 개니 꽃이 처음 피었고, 동령(東嶺)에 구름이 걷히니 달이 한창 둥글구나. 백 척 장송(長松)에
이끼 버섯이 오래었고, 사면 처마 뭇 멧부리에 푸른빛이 차네. 좋은 시절, 명승지에 아름다운 곳 만나니,
사신을 멈추어 오래도록 난간을 의지하게 하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정오가 지나서 잠시 안장을 풀고 봉산의 누각 위에서 난간을 의지했네. 모란화야,
얼른 쉽게 피지 말고, 동풍에게 일러두어 나와보기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푸른빛 깊은 곳에 아로새긴 지붕 내려다보니, 사면에 산이 많아 몇 층인지 셀 수 없네.
석양(夕陽)은 빛을 놓아 발해(渤海)에 밝고, 늙은 소나무의 푸른빛 나누어 술잔[觚稜]에 들어오네. 맑은 바람에
푸른 난새[靑鸞] 타고 싶으니, 더위를 물리치는데 하필 옥 사발의 얼음이랴. 황경(皇京)에 머리를 돌리지만 돌아
가지 못하니, 구름다리를 내려왔다가 또 거듭 오르게 되네." 하였다.
○ 고윤(高閏)의 시에, "하인 시켜 베개 자리 옮기고, 한가히 이 다락에서 쉰다네. 뜬구름에 지는 해는 어른어른
산 머리에 있네. 푸른 홰나무 맑은 그늘 드리워 있는데, 우는 새는 찾은 곳이 있는 듯 좋은 바람 남쪽에서 불어오
니, 다시금 난간이 그윽함을 느끼겠네. 높이 읊조림이 드디어 시를 이루었는데, 술이 있으니 잠시 머물러 가세나.
왕사(王事) 아직 마치지 못했으니 나의 가는 길 어찌 쉬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봉산(鳳山)이 둘러 쌓여 높은 지붕을 호위했는데, 홀로 구름다리 걸으니 몇 층이나
되는지. 해가 바다 위에 떠오르니 시야가 밝아지고, 바람이 푸른 나무에 부니 술잔을 움직이네. 처마에 푸른 남
기(嵐氣)는 나부끼는 비 같고, 땅에 가득한 배꽃은 얼음으로 만든 것인 듯. 하늘 동쪽 경치 좋은 곳에, 우리들 몇
사람이나 올라 보았는지." 하였다.
○ 장녕(張寧)의 시에, "봉산의 누관(樓館)이 그득하게 높은데, 거리를 지나오는 사신의 수레로세.
사람 말[語]은 지역이 다르니 점점 알아질 듯, 시 생각은 병이 많으니 모두 스러지려 하네. 저 새벽 그림자 멀리
바라니 구름이 기러기와 나란하고, 들렸다 끊겼다 하는 차가운 소리는 바다에 조수가 나가네. 무어라 풍속을
물어보며 또 옛일 다시 조상하리, 사방에 일 없으니 부역(賦役)이 쉬었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동으로 천리를 온 기자(箕子)의 봉역(封域)이라 하는데, 한 번 높은 다락에 오르니 흥이
배나 더하구나. 부(賦)를 짓는 사신(詞臣)들 말에 기대는[倚馬] 재주 많고,주D-022 노래 부르는 호걸은 전일에
용을 따르는 이들.주D-23 땅은 창해(滄海)에 이어 있으니 조수 소리가 가깝고. 발은 푸른 산에 드리웠으니
나무 그림자 겹겹하네. 오늘 올라와 구경하며 취하도록 마실 것이, 내일 아침 돌아보면 뭇 봉우리 막혔으리."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그늘진 여름 나무 사면 처마를 둘렀는데, 원근의 남기(嵐氣) 빛 얕았다 짙었다 하네.
산 형세는 동으로 나와 춤추는 봉(鳳)을 맞이하는데, 황제 사신은 북으로 가니 나는 용을 쳐다보네.
벽오동 새벽 날에 3천 그루인데, 단혈(丹穴)의 갠 구름은 몇만 겹인지. 신선의 옥퉁소를 빌릴 수 있다면, 한가로
이 불면서 최고봉으로 올라가리."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산머리 옛 동구를 흰 구름이 막았는데, 다락 위의 남기(嵐氣) 빛이 눈 온 뒤에 짙어졌네.
늙어가니 시명(詩名)은 조하(趙嘏)주D-024가 부끄럽고, 취해오니 호걸 기운 원룡(元龍)과 비슷하네.주D-25
한 사람이 경사 있으니 천하가 태평하고, 천리 먼 곳에 은혜를 베푸니 비와 이슬이 거듭 내리네.
조양(朝陽)을 향하여 봉의 울음 들으려 하니, 푸른 오동과 무성한 대숲이 갠 봉우리를 막았네."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푸른 남기(嵐氣) 부슬부슬 채색 지붕 둘렀는데, 흥이 나니 바로 최고봉으로 올라가네.
사방의 나무 그늘은 하늘 일산 덮은 듯, 한 조각 구름 그림자가 달빛을 상쇄시키네. 발[簾] 밖의 바다 산에는 아
직 눈이 있고, 길 곁 돌 시내에는 벌써 얼음이 풀렸네. 동쪽 나라 좋은 경치 얼마나 많은지, 사신이 노닐며 두루
구경하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평원은 가득히 바라보는데 오직 봉산 고을만이 보이네. 무쇠를 구부린 듯 솔가지가 늙었
는데, 잇달은 구름처럼 보리밭도 많구나. 다리는 방초(芳草) 나루터에 가로놓였고, 사람은 석양 다락에 의지했
네. 시편(詩篇)이 아니더라면 정말 꿈속의 놀이 되었겠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환취루 앞에 잠시 말을 쉬게 하는데 끝없는 시 생각이 강가에 둘렸네. 앞사람들 모든
경치 두루 다녀 보았겠지만 나만은 깊은 겨울에 와서 무엇을 보나." 하였다.
○ 시 짓는 이 몸이 게으르게 말안장에 앉은 것 괴이히 여기지 말라, 세상사 매양 서로 관계됨을 어찌할 수 없네.
봉산 정자 아직도 푸른 산이 둘렸으니[環翠], 어쩌면 시인이 웃으며 볼거나.
신증 척서루(滌暑樓) : 객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1리에 있다. 신증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검수역(劍水驛) : 고을 동쪽 40리에 있다. 절령(岊嶺)의 역을 폐지하고 여기로 옮겨 설치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이곳을 거듭 지나니 마침 비 온 뒤라, 그 좋은 풍물을 사람으로야 어찌하리.
물이 옛 시내를 잊으니 교량(橋梁)이 적고, 길이 깊은 산으로 들어가니 초목도 많구나. 수레와 일산이 체모가 있
으니 습속을 고치기 어렵고, 시골 말투는 글자가 없으니 잘못 전하기 쉬우리. 새로 가져온 보검(寶劍)이 천 금짜
리나 되는데, 바위 샘물에다 한번 갈아나 볼까."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돌아가는 말[馬] 바삐 또 여기를 지나는데, 다리는 기울고 물은 넘치니 어찌하면 좋으랴.
문득 보니, 들에 가득 농부들 기뻐하는구나. 아침까지 비 많이 왔다고 괴이히 여기랴. 평탄하고 험한 것 제 스스
로 보아 지나갈 것이지, 노(魯) 자와 어(魚) 자를 누가 다시 그릇된 것 분별하리오. 풍파란 나그네길에 흔히 있는
일인데, 장한 절개는 원래 갈려 없어지지 않으니."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수풀 꽃 옆에 잠시 쉬니, 산이 깊은데 해 아직 기울지 않았네. 떨어진 꽃은 개미 구멍에
펄럭이고, 묵은 꽃송이에 벌떼들 어지럽구나. 석굴(石窟)에는 이무기가 숨어 있고, 천류(泉流)에는 보검[鏌鎁]
을 감추었다네. 이 사이에 아름다운 기운 있으니, 누굴 시켜 장화(張華)주D-026에게 알려 줄거나."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용천검 한쌍 물 속에 잠겼는데, 우정(郵亭)은 홀로 산을 베고 있구나. 처마끝에는 푸른
멧부리 합했고, 돌층계엔 자색 이끼가 아롱지네. 게으른 버들개지 날자마자 떨어지고, 외로운 구름은 갔다 다시
돌아오는구나. 멀고 먼 길에 여윈 말을 채찍질하니, 흰 갈매기의 한가로움에 웃음이 나는구나." 하였다.
동선역(洞仙驛)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예전에는 황주에 있었는데, 절령(岊嶺)길이 폐지된 다음 여기로 옮겨
설치하였다. 소관역(所串驛)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관산역(館山驛)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사리원(沙里院) :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율관원(栗串院) :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교량 누교(樓橋)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불우 중흥사(中興寺)ㆍ덕구사(德仇寺)ㆍ보리사(菩提寺)ㆍ심적암(深積菴)ㆍ
불지사(佛智寺) : 모두 자비령(慈悲嶺)에 있다.
정림사(淨林寺)ㆍ정수사(淨水寺)ㆍ관성암(寬性菴)ㆍ견성암(見性菴)ㆍ우지사(亏知寺)ㆍ망일암(望日菴)ㆍ
회산사(檜山寺) : 모두 계유산(鷄遊山)에 있다. 성불사(成佛寺)ㆍ관불사(觀佛寺)ㆍ도증암(道證菴)ㆍ
상원사(上院寺)ㆍ일출사(日出寺)ㆍ고산사(高山寺) : 모두 정방산(政方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신증 고을 남쪽 13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고을 북쪽 1리에 있다. 신증 고을 남쪽 14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신증 고을 남쪽 13리에 있다.
신룡담사(神龍潭祠) : 고을 북쪽 5리에 있다. 휴류암연(鵂鶹巖淵)이라고도 이름한다.
신증 고을 서남쪽 14리에 있다.
고적 휴류성(鵂鶹城)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8천 6백 56척, 높이 15척인데, 안에 우물
한 곳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21년에 쌓았는데, 지금은 절반이나 무너졌다.
고당성(古唐城) : 고을 서쪽 12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리, 높이 24척이다.
관혜향(觀惠鄕)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인물
고려 지채문(智蔡文) : 현종(顯宗) 원년에 중랑장(中郞將)에 보직되었다. 이때 거란의 군사가 많이 쳐들어 왔는
데, 지채문이 서경(西京)을 구원하고 적병을 맞아들여 항복하려고 음모하는 자를 베고 여러 번 싸워 물리쳤다.
왕이 전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가게 되니, 지채문이 따라가서 호위하는 데 공로가 있었다. 왕이 토지 30결(結)을
하사하고, 상장군 우복야(上將軍右僕射)에 임명하였다.
본조 이수(李隨) :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문명(文名)이 있었다. 세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일찍이 그에게 수학
(受學)하였는데, 왕위에 오르자 등용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세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효자고려 김덕련(金德連) : 아버지가 몹쓸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드리니 아버지 병이 나았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웠다.
제영 곳곳에 등 밝히고 관현(管絃)을 연주하네 : 명 나라 육옹(陸顒)의 시에, "멀리 바라보니 계림(鷄林)이 해변
에 가까웠고, 동으로 오니 정절(旌節)이 산천에 비치네. 봄밤 역관(驛館)이 모두 비슷비슷한데 곳곳에 등 밝히
고 관현을 연주하네." 하였다.
봉양(鳳陽) 정절(旌節)이 갠 시내를 비치네 : 명 나라 주맹헌(祝孟獻)의 시에, "친히 윤음(綸音) 받들고 해 뜨는
지역으로 내려오니 봉양 정절이 갠 시내를 비치네. 먼 지방이 조공하여 전란이 그쳤으니 봉양 정절이 개인 시내
를 비치네. 먼 지방이 조공하여 전란이 그쳤으니 일만 나라의 기쁜 노래 순(舜) 임금 거문고를 즐기네."주D-027
하였다.
산은 푸르고 구름 흰데 길은 좁고 아득하구나 : 산은 푸르고 구름 흰데 길은 좁고 아득하네. 버들가지 바람 따라
봉양(鳳陽)에 당도했네. 옛날 일, 내 어버이 회수(淮水)를 건너가서, 북순(北巡)하던 시절에 고황(高皇 명 태조)
을 모셨던 것 생각나네." 하였다.
전년에 수레 멈추고 봉주(鳳州)에서 묵었네 : 장근(章瑾)의 시에, "전년에 수레 멈추고 봉주에서 묵었는데,
훈풍(薰風)이 먼저 초량루(草涼樓)를 지났네. 지금 6월의 삼한(三韓) 길은 옛날 놀던 강산과 비슷하네." 하였다.
폭포수 뿌려와서 안개를 이루네 : 김식(金湜)의 시에, "푸르른 연기 낀 풀 반이나 처량하고 희미하니, 이것이 산
중의 옛날 길이라네. 폭포수 뿌려와서 안개를 이루고, 바위에 꽃 떨어지자 밟아 진흙 되네. 마침 좋은 술 있어
객을 맞아 취하는데, 누가 그윽한 새를 보내 객을 향해 우는고. 고향 생각 가슴 가득, 어디다 풀고 좋은 시를
마음가는 대로 익숙히 쓰네." 하였다.
12영(詠) : 이색(李穡)의 시. 봉황대(鳳凰臺) : 높은 대가 임학(林壑)을 내려다보니 많은 산은 궤연(几筵) 같구나.
또 흰 새가 모인 곳에 외로운 봉새 펄펄 날아드는 듯, 채색 깃은 아득하여 보기 어렵지만,
아름다운 이름은 천년에 전해지네. 오동꽃은 떨어진 지 오래고, 고목엔 푸른 연기가 어둡구나.
나그네의 깊은 뜻이 있어. 〈권아편(卷阿篇)〉 낭랑히 읊네.
백학암(白鶴巖) : 푸른 바위 천 길이나 높은데, 은은하게 안개비[煙霏] 머금었네. 긴 바람 휙 불어오니, 백학이
타고 날아가네. 훨훨 마음껏 날아 해가 멎도록 나를 버리지 않으리.
밤중 달 아래서 청전(靑田 산 이름으로, 학으로 유명함)을 꿈꾸고, 가을 서릿발에는 흰 옷을 나부끼리.
천년 전의 사람이 훨훨 학과 함께 할 수 없음이 한이로세.
관음전(觀音殿) : 내가 들으니, 보타산이 멀리 남해 가운데에 있다고 하네.
노는 사람은 짚이라도 믿고 놀란 물결은 먼 공중을 헤친다네. 멀리 남해의 험한 곳을 건너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여기에 이 청련궁(靑蓮宮)이 있구나.
절하면서 수월(水月 관세음(觀世音))을 상상하니 황홀히 원통(圓通 관음원통(觀音圓通))에 노는 것 같구나.
병 속에 한 가지 버들 있으니 가는 곳마다 모두 봄바람이네.
장경각(藏經閣) : 서방 축건(竺乾) 몇만 리냐, 백마는 참으로 나는 구름이네.
천만 두루마리를 번역해 내었으니, 중서군(中書君)주D-028을 다 늙게 했네. 많은 말로 미묘한 이치 말하였으니,
변재(辯才)로다. 석가(釋迦)의 글이여. 그 누가 있어 이 집을 지었나, 성긴 난간에 붉은 서기(瑞氣) 통하네.
오랜 겁(劫)에 이미 문훈(聞熏)주D-29하였네.
나한동(羅漢洞) : 나한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데, 때로 범을 타고 논다네. 흰 구름 돌 위에서 일어나고,
맑은 샘물은 꽃 아래로 흐르네. 누가 이 동중(洞中)에 살면서 공(空)을 배워 세속의 시끄러움 피하나, 공명(功名)
에는 참으로 허상이요 천지는 또 물거품 같구나. 부끄럽다, 이 내 몸 5욕(欲)으로 차서 구슬프게 바라보며 부질
없이 머리만 긁네.
거사암(居士菴) : 나는 산중 사람 좋아하니, 흰 망아지에 한 묶음의 꼴.주D-030 신선 되어 간 후 적막한데, 높은
그 풍도(風度)를 누가 계승하나. 석실엔 글이 벌써 쇠잔한데, 지초 밭은 비에 아직 푸르구나.
지금도 밤중에 학이 울고 산 위의 달이 그윽하고 적적함을 비쳐 준다네. 옛날을 생각하며 한 번 크게 탄식하니,
분분한 세상사 몇 번이나 영욕이 바뀌었나.
양익봉(兩翼峯) : 두 봉우리 날 것 같은데, 두 날개가 높이 날아가려 하네. 하늘이 날아갈까 두려워서 돌로 뼈를
만들었네. 맑은 바람은 푸른 덩굴 속에서 일어나는데, 가느다란 냇물은 흘러 달을 부수네. 내 들으니, 인(仁)한
자는 정(靜)하다주D-031더니 중후하여 이치를 알 수 있네. 어찌하여 날아 움직이려 하는가.
머리를 들고 천궐(天闕)을 상상하네.
신룡담(神龍潭) : 못이 어찌 그리도 깊은가. 만고에 천택(天澤)주D-032을 저장하였네. 신룡이 서려 있는 곳에
밤마다 흰 기운이 일어난다네. 날고 잠기는 것[용(龍)] 본래 때가 있으니, 며칠 안 가서 벼락이 날게 되리.
한 번 비 내려 사해(四海)에 두루 미치니 어진 자는 자연 대적할 이 없다네. 산 앞의 사람들을 보지 못하였나,
벼 김맬 때 땀이 구슬처럼 떨어지는 것을.
백척추(百尺楸) : 백 자나 되는 늙은 추나무[楸樹] 우뚝 서서 산감(山龕)에 임하였네. 뇌락(磊落)하여 풍우를 흔
들고 날이 맑으면 푸른 기운이 떠오르네. 서로들 전하기를 진ㆍ위(晉魏) 시대를 거쳤다고 하니, 나무 중에는 팽
조(彭祖)와 노담(老聃 오래 산 사람들)이네. 재목이 크면 옛부터 쓰이기 어려운 것, 버려두어도 마음에 달갑다네.
역사(櫟社)는 자연 보전될 수 있는 것, 남화경(南華經 장자(莊子))의 그 말이 믿어지누나.
오리송(五里松) : 아름다운 푸른 수염의 늙은이[蒼髥叟 소나무를 말함], 산중의 옛 군자라네. 은사(隱士)들과 서
로 따르니 속세의 선비 아닌 줄 알겠네. 허사(許史 한(漢) 나라 때 세도를 부리던 외척 허씨와 사씨를 말함)와
금장(金張 모두 권귀로, 김일제. 장안세이다)은 원래 자취가 물 같은 것, 들판의 학이 때로 날아오고 맑은 바람은
가지 위에서 일어나네. 한 해 저물어 눈ㆍ서리 많을 때, 그대와 함께 남은 생애 보전할거나.
영천(靈泉) : 학이 쪼아 맑은 샘물이 나오니, 서늘하여 폐부(肺腑)를 찌르네. 이 물 마시면 신선의 뼈가 되려는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현포(玄圃 곤륜산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곳)를 생각하게 하네. 어찌 시심(詩心)을 씻을
뿐이리. 죽을 병도 물리칠 수 있으리. 평생에 청정(淸淨)을 사랑하니, 다보(茶譜)를 속(續)하였으면 하네.
주D-033 돌솥을 가지고 가, 소나무 가지에서 비 뿌리는 것 보리.
수동(水洞) : 아악(雅樂)이 오랫동안 흩어졌으니, 사양(師襄)이 바다로 들어갔네.주D-034 궁(宮) 소리 상(商) 소리
서로 난잡하니, 음절 곡조는 망연하여 의거할 데 없네. 문득 놀라운 것은 동중(洞中) 물, 맑게 울려 음률에 맞네.
사물의 이치는 원래 저절로 이루어지고, 천기(天機)는 묘하여 엿보기 어렵네. 다만 금석을 감춘 그곳에,
홍동(鴻洞)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네.
[비고]
연혁 중종 18년에 관아를 백운산(白雲山) 아래로 옮겼다 : 옛 관아 남쪽으로 15리에 있는데 휴암성(鵂巖城)이
보인다.
방면 토성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귀연(龜淵) : 동남쪽으로 50리에 있다. 감당(甘棠) :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묵천(墨川) :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초구(楚邱) :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무릉(武陵)ㆍ어사(御史) : 모두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문정(文井) :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미산(眉山)ㆍ사인(舍人) : 모두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사원(沙院) : 서쪽으로 25리에 있다.
서호(西湖)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와현(臥峴) : 서남쪽으로 40리에 있다. 동선(洞仙)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산수(山水) :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성지 ○ 동선관행성(洞仙關行城) : 북쪽으로 15리 황주(黃州) 경계에 있으며 속칭 사인암성(舍仁巖城)이라 하며
돌이 공중에 우뚝 솟아 있어 적암(積巖)이라 이름하고, 사인암(舍人巖)이라고 부른다. 고갯길이 좁고 매우 비탈
져 말과 같이 걸어갈 수가 없다. 영종(英宗) 22년에 성을 쌓아서 동쪽과 서쪽에 문(門)을 설치하였다.
성의 길이는 모두 10천 9백 70보다.
영아 전영(前營) : 인조(仁祖) 때에 설치하였다.
○ 전영장이 한 사람인데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으로는 봉산(鳳山)ㆍ황주(黃州)와 속진으로는 동리(東里)ㆍ산산(蒜山)이 있다.
진보 동리진(東里鎭) : 동쪽으로 15리 상산령(商山嶺) 아래에 옛적 만호(萬戶)가 있다.
○ 상산령(商山嶺)ㆍ무초령(茂草嶺)ㆍ고성령(高城嶺)을 지킨다.
○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가 한 사람이다.
산산진(蒜山鎭) : 서북쪽으로 25리에 옛 극성진(棘城鎭)의 터가 있다. 숙종 4년에 진을 설치하고, 8년에 흑교진
(黑橋鎭)을 극성(棘城)에 옮겨 합치고, 첨사겸 별중영장(僉使兼別中營將)으로 승격시켰다가 후에 별중영장은
감하였다. ○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가 한 사람 있다.
혁폐 극성진(棘城鎭) : 고려 때에 흙으로 행성(行城)을 쌓아서 관문(關門)을 설치하였다.
정방산(正方山)의 봉우리에서부터 박배포(朴排浦)까지 방수군(防守軍)을 두어 평지엔 가시나무를 심었다.
본조 2년에 돌로 성을 다시 쌓았다. 단종(端宗)이 즉위하여 공사를 정지시켰으니 지금도 성가퀴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관문 바로 아래에서선도(鐥島)까지의 땅이 평지이고 험한 곳이 없어 그 가운데 깊은 곳엔 물이 고여
서 개간하여 농사짓는다. 비록 가시나무를 심어서 성을 둘렸으나 면적이 넓어서 지키기 어려우니 반드시 높은
담[墉]을 여러 겹 쌓아서 험준하게 만들어야 한다.
○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관군(官軍)이 홍건적을 방어하여 이곳에서 모두 섬멸하였다.
○ 패강진(浿江鎭) : 지금 극성진(棘城鎭) 터인데 신라는 대동강(大同江)으로 경계를 하였기 때문에 거진(巨鎭)
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선덕왕(宣德王) 3년에 순행(巡幸)하여 한산주(漢山州)에 패강진(浿江津)을 설치하여 백
성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원성왕(元聖王) 원년(元年)에, 패강진(浿江鎭)으로 고쳐 도독(都督)이 총관하게
하였다.
헌덕왕(憲德王) 18년에 우잠(牛岑) 태수 백영(白永)에게 명하여 한산 이북의 모든 군내의 사람들 10만 명을 동
원하여 패강장성(浿江長城) 3백 리를 쌓았다.
○ 극성(棘城)에서부터 대간(大幹)ㆍ봉산(鳳山)ㆍ황주(黃州)ㆍ서흥(瑞興)ㆍ수안(遂安)ㆍ곡산(谷山)에 관련된
영(嶺)의 위에서 가끔 행성(行城)의 옛터가 보이는 것은 백영(白永)이 쌓은 바의 것이다.
창고 읍창(邑倉). 동창(東倉)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오리포창(梧里浦倉).
역참 도공역(陶工驛)ㆍ소관역(所串驛). 기발(騎發) 산수원참(山水院站)ㆍ관문참(官門站)ㆍ동선참(洞仙站).
진도 황병곶(黃柄串) : 서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안악(安岳)과 통한다.
충열사전(忠列祠前) : 서남쪽으로 35리에 있으며 서호방(西湖坊)으로부터 재령(載寧)의 소로(小路)로 통한다.
대천교(大川橋) : 당성천(唐城川)이 범람하면 배를 사용한다.
토산 갈대[蘆]ㆍ물억새[荻]. 배[梨] : 품질이 좋다. 지황(地黃)ㆍ도루묵(銀口魚).
사원 문정서원(文井書院) : 숙종 신유년에 건축하여 계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 : 모두 문묘(文廟) 조에 보인다. 김집(金集) : 태묘(太廟) 조에 보인다.
강석기(姜碩期) :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이며 회천(禬川) 사람이다.
벼슬은 우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 D-001] 구포(九苞) : 구포(九苞)는, 첫째는 입은 명을 포함하고[口包令]
둘째는 마음이 도(度)에 합하고[心合度] 등 아홉 가지이다.
[주 D-02] 여섯 가지 형상[六像] : 육상(六像)은 눈은 해를 상하고[目像日]
등은 달을 상하고[背像月] 등의 여섯 가지이다.
[주 D-003] 신이한 거북[神龜] 그림을 지고 나오니 인문(人文)이 베풀어졌고 : 거북이 낙수(洛氺)에서 그림을
지고 나오자 우(禹)가 그것을 보고 구주(九疇)를 알아내었다.
[주 D-04] 오총(五總)의 지혜 : 거북이 2백 년이 일총(一總)이 되는데 오총(五總)이 된 거북은 물으면 모르는
것이 없다.
[주 D-05] 사령(四靈) : 기린·봉황·거북·용이 사령(四靈)이다.
[주 D-06] 어찌 홍곡(鴻鵠)의 뜻만이랴. : 제비가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랴 한 옛 사람의 말이 있다.
[주 D-007] 중니(仲尼)는 오지 않는다는 탄식 : 공자는, “하수(河水)에 그림이 나오지 않고 봉새가 이르지
않는다.” 탄식하였다.《논어》
[주 D-08] 접여(接輿)는 덕이 쇠하였다는 탄식 : 초 나라 광인 접여가 공자를 봉황에 비유하면서 덕이
쇠하였다고 탄식하였다.《논어》
[주 D-009] 덕의 황휘(煌輝) : 이소경(離騷經)에, “봉황이 천 길 높이 날다가 덕휘(德輝)를 보고 내려온다.”
하였다.
[주 D-010] 정문(情文) : 정(情)은 마음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요, 문(文)은 꾸미는 문장이나 의식(儀式)을
말하는 것이다.
[주 D-011] 천일(千一) : 천년 만에 황하수가 한 번 맑아서 성인이 난다는 말이다.
[주 D-12] 명당(明堂) : 명당(明堂)은 천자가 제후(諸侯)를 조회 받고 정치하던 곳이다.
[주 D-13] 공자(孔子)의 누추한 곳에 거하려던 것 : 공자가 동방의 구이(九夷)에 거하려 하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누추하니 어찌 하렵니까.” 하니, 공자는, “군자가 거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 하였다.
이 글에서는 우리 조선을 구이(九夷)의 땅으로 본 모양이다.
[주 D-14] 호시(弧矢)의 장한 뜻 : 옛날 풍속에 남자가 처음 나면 활과 화살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쏘는데
그것은 남자는 사방에 다니며 공명(功名)을 이루라는 뜻이다.
[주 D-15] 이불을 가지고 종알종알함 : 한유(韓愈)가 회골(回鶻)에 사신으로 가는 은 원외(殷員外)에게 지어 준
글에, “지금 벼슬하는 이들이 하룻밤 숙직(宿直)에 이불을 가지고 들어가면서도 집을 잊지 못하여 계집종을 돌
아보고 종알종알 잔말을 하는데 은 원외는 만리 외국으로 가면서도 조금도 기색에 나타내지 않는다.” 한 말이
있다.
[주 D-16] 수레는 노(輅)를 쓰고 풍악은 소(韶)를 따랐네, : “하(夏)의 역서(曆書)를 쓰고 은(殷) 나라의
수레[輅]를 쓰고 음악은 소(韶 : 순의 음악)를 써야 한다.” 하였다. 《語論》
[주 D-17] 옛날 황왕(皇王)의 지극한 정치는 사방에 빛나고 위아래에 이르러 : 콜론ERROR!!!
[주 D-18] 중화(中和) : “중화(中和)를 극치로 하면 만물이 발육된다.” 하였다. 《中庸》
[주 D-19] 박약(博約) : “문(文)으로써 넓게 하고 예로써 요약하다.[博文約禮]” 하였다. 《論語》
[주 D-020] 탕(湯) 임금 때처럼 가뭄 : 탕(湯)왕 때에 7년 가뭄이 있었다.
[주 D-21] 부열(傅說)의 장마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임명하면서,
“너는 가뭄에 장마[霖]가 되라.” 하였다.
[주 D-022] 말에 기대는[倚馬] 재주 많고, : 전쟁하러 나가는데 말[馬]에 기대어 격문(檄文)을 쓰는 민첩한
글재주란 뜻이다.
[주 D-23] 용을 따르는 이들. : “구름이 용을 따르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어진 임금을 따른 데 비유한
것이다. 《周易》
[주 D-024] 조하(趙嘏) : 당 나라 조하(趙嘏)가, “긴 피리 한 소리에 사람이 누에 기대었네.[長笛一聲人倚樓]”
라는 시를 지었으므로, 사람들이 조의루(趙倚樓)라 불렀다.
[주 D-25] 취해오니 호걸 기운 원룡(元龍)과 비슷하네. : 한(漢) 나라 진원룡(陳元龍)은 호기(豪氣)있는 사람
으로 백 척(尺) 되는 누상(樓上)에 거처하였다.
[주 D-026] 장화(張華) : 진(晉) 나라 장화(張華)와 뇌환(雷煥)이 천문(天文)을 보니 두우성(斗牛星)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뻗친 것을 보고 풍성(豐城) 땅속에 묻혀 있는 보검을 찾아내었다.
[주 D-027] 순(舜) 임금 거문고를 즐기네." : 순(舜) 임금이 천하가 태평하매 오현금(五絃笒)을 타면서 남풍가
(南風歌)를 불렀다.
[주 D-028] 중서군(中書君) : 한유(韓愈)의 글에, 붓[筆]을 중서군이라 하였다.
[주 D-29] 문훈(聞熏) : 불경(佛經)에, “문훈(聞熏)·사훈(思熏)·수훈(修熏)이 있는데 문훈은 불법을 들어서
얻는 것이다.
[주 D-030] 흰 망아지에 한 묶음의 꼴. : 《시경》 백구(白駒)편에, “생꼴 한 묶음[生蒭一束] 그 사람이 옥과
같다.[其人女玉]”는 말이 있다.
[주 D-031] 인(仁)한 자는 정(靜)하다 : 《논어》에, “인(仁)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 인한 자는 정(靜)하다.”
하였다.
[주 D-032] 천택(天澤) : 만물을 적셔 줄 천지의 수택(水澤)이란 말이다.
[주 D-033] 다보(茶譜)를 속(續)하였으면 하네. : 옛 사람의 다보(茶譜)가 있으면 그 속편(續編)을 짓는다는
말이다.
[주 D-034] 사양(師襄)이 바다로 들어갔네. : 공자(孔子) 때에 주(周) 나라가 쇠하므로 악사(樂師)들이 가서
숨는데 그 중에 사양(師襄)은 바다로 들어갔다.
42권 안악군 安岳郡
동쪽으로 바다까지 40리, 남쪽으로 신천군(信川郡)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 문화현(文化縣) 경계까지 18리,
북쪽으로 장련현(長連縣) 경계까지 46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6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양악군(楊岳郡)인데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풍주(豐州)에
속하였으며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목왕(忠穆王) 4년에 승격하여 지군사(知郡事)로 하였
으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하였다.
관원 군수ㆍ 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양악(楊岳)ㆍ양산(楊山).
성씨본군(本郡) 양(楊)ㆍ원(元)ㆍ강(康)ㆍ유(柳)ㆍ이(李)ㆍ조(趙)ㆍ팽(彭)ㆍ신(申)ㆍ박ㆍ홍 : 모두 속(續).
최 : 나주(羅州). 오 : 해주. 임(任) : 풍천(豐川). 김 : 개성.
산천
양산(楊山) : 군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구월산(九月山) : 군 서쪽 30리에 있는데 문화현에 자세하다.
소산(所山) : 군 남쪽 5리에 있다. 월호산(月乎山) : 군 북쪽 30리에 있다. 감적산(甘積山) : 군 북쪽 45리에 있다.
소해(小海)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저도(猪島) : 군 북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목장이 있다. 신증 지금은 폐지되었다.
요현포(要玄浦) : 바로 해포(海浦)인데 군 동쪽 15리에 있으며 고기살[魚梁]이 있다.
성초곶(省草串) : 군 동쪽 60리에 있다. 도곶(桃串) : 군 동쪽 29리에 있다.
석통지(石筒池) : 군 남쪽 9리에 있는데 만경(萬頃)의 논에 물을 댄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겨울철이 되면 신령한 용이 얼음 경작을 세로도 하거나 가로도 하는데 가로로 하면 비가
많이 온다." 한다.
영진포(迎津浦 마진개) : 군 동쪽 28리에 있다. 근원이 구월산에서 시작하여 신천군의 우산포(牛山浦)와 합류
해서 이 포(浦)가 되었는데, 바다를 통하는 조수가 있다.
월불당포(月不唐浦) : 군 동쪽에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나온다.
원당포(元堂浦) : 군 동쪽 40리에 있다. 동음온천(洞陰溫泉) : 군 북쪽 27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철(鐵) : 군 북쪽 자광동(慈光洞)에서 난다. 사기[磁器]ㆍ자초(紫草)ㆍ송이[松蕈]ㆍ
벌꿀[蜂蜜]ㆍ인삼ㆍ숭어[秀魚]ㆍ참게, 뱅어[白魚]ㆍ붕어[鰕魚]ㆍ토화(土花)ㆍ윤화(輪花)ㆍ꽃게[紫蟹]ㆍ
소금.
봉수 소산(所山) 봉수 : 동쪽으로 월호산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감적산에 호응한다.
월호산(月乎山) 봉수 : 남쪽으로 소산에 호응하고, 동쪽으로 황주(黃州)에 비파곶(琵琶串)에 호응한다.
감적산(甘積山) 봉수 : 남쪽으로 소산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장련현 금음복산(今音卜山)에 호응한다.
신증궁실 객관(客舘)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삼추(三秋)에 명승지 찾아드니 백 자나 되는 높은 다락이 있네.
큰 바다에 흉금이 넓어지고, 가벼운 구름은 부질없는 세상일 같구나. 나그네 행장은 갈꽃[蘆荻]도 늦었는데,
돌아가는 꿈은 서울일세. 말 멈추고 사신 행차 보낸 다음, 다른 친구 데리고 노네." 하였다.
○ 어세겸(魚世謙)의 시에, "임금 위하여 말타고 다니니, 객이 되어 누대에 오르기 익숙하네. 멀리 바라보니
구름은 매인 데 없고, 높은 곳에 서니 대지는 떠있는 것 같구나. 마음은 임금 계신 북쪽에 있는데,
몸은 나라 서쪽 고을을 달리네. 3년간이나 역참 이속[郵吏]들 괴롭히니, 벼슬하러 다닌다고 말하기 너무도 부끄
럽네." 하였다.
○ 유윤겸(柳允謙)의 시에, "우연히 양산군에 이르니 중천에 좋은 다락 솟아 있네. 올라가 구경하니 봄 흥취에 겨
운데, 호탕하게 풍경이 떠있구나. 부(賦)를 지은 왕찬(王粲)주D-001을 생각하고, 시 잘 짓는 유주(柳州)주D-02
가 부끄럽구나. 늙어도 풍정(風情)이 아직 있어, 마음 놓고 취하여 붙들고 노네." 하였다.
○ 한훈(韓訓)의 시에, "만리 건곤(乾坤 : 천지)을 구경한 눈[眼]으로 오늘 아침 다시 누대에 올랐네.
강산은 친구가 될 만하고, 우주 간에 휴부(休浮)주D-003를 맡기네. 붓을 들면 일천 수(首)를 휘두르고,
넓은 가슴엔 구주(九州)주D-04를 좁게 보구나. 1년 간이나 사절(使節) 따라, 길이 한가한 놀이 하였네." 하였다.
○ 이세인(李世仁)의 시에, "무정한 백발이 이 내 머리에 사정을 두지 않는데, 강개한 마음 타향[天涯]에서 홀로
난간에 기댔네. 비가 연꽃에 젖으니 붉은 빛 선명하고, 강은 산색을 적셔 푸른 기운 어른어른. 근심을 나누는
[分憂]주D-005 그날에 어전[仙仗]주D-06을 떠났는데, 고을살이 간청은 어느 해에 익주(益州)를 꿈꾸었나.
옛 친구 있어 정분도 두터워서 함께 항아리술 가지고 질탕하게 노네." 하였다.
누정 이요루(二樂樓) : 객관 동쪽에 있는데, 연못이 있다.
○ 김수영(金壽寧)의 시에, "홰나무는 천 년이나 된 고을에 늙었고, 꽃은 백 척 누대에 둘렀네. 못이 열리니 태화
(太華)에 이어진 듯,주D-007 산이 가까우니 나부산(羅浮山)을 껴안은 듯. 이 세상에 선경(仙境)이야 있으랴.
하늘 서쪽에 좋은 고을이 있네. 공부(工部 두보)의 시흥 참을 수 없어, 때때로 낭만(浪漫)한 놀이를 한다네."
하였다.
신증 우연당(友蓮堂) : 동헌(東軒) 곁에 있는데, 군수 정숙은(鄭叔垠)이 지었다.
청심당(淸心堂) : 객관 서쪽에 있는데, 군수 심광문(沈光門)이 지었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진목역(眞木驛) : 고을 북쪽 7리에 있다. 영진원(迎津院) : 고을 동쪽 25리에 있다.
신구리원(薪仇里院) : 고을 북쪽 45리에 있다.
불우 연등사(燃燈寺) : 구월산에 있다. 청암사(靑菴寺) : 양산에 있다.
남산사(南山寺) : 홍암산(紅巖山)에 있다. 자광사(慈光寺)ㆍ두라사(豆羅寺) : 모두 구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 안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 고을 북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도곶신사(桃串神祠)ㆍ성초곶신사(省草串神祠) : 고려 때에 모두 사전[祀典]에 실렸고, 지금도 본군에서 제사를
드린다.
고적 홍모처(紅毛處)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양산고성(楊山古城) :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6백 18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명환본조 하연(河演) : 일찍이 지군사(知郡事)가 되어 농사를 권장하고 독려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다.
영춘정(迎春亭)ㆍ편월정(片月亭)ㆍ대수정(大樹亭)ㆍ어약정(魚躍亭)ㆍ필봉정(筆峯亭)을 지었으며 토지와 들
사이를 순행하면서 스스로 농사지으며 부르는 노래 두어 곡을 지어서 권장하였다.
배둔(裵屯). 신증 윤탕(尹宕) : 정사를 하는 데 청렴하고 밝음을 숭상하였다.
인물
본조 김조(金稠) :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까지 되었다.
이평(李枰) :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大司諫)까지 되었다.
효자본조 박선(朴善)ㆍ강녕(康寧) : 모두 효자로서 정문(旌門)이 있다.
신증 정계주(鄭繼周) :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도로 잘 섬겨 정성(定省) 온청(溫淸)주D-008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하자 3년간을 시묘살이하고 또 아버지를 위하여 3년상을 추후로 하였다.
사시절의 절일[俗節]과 기일(忌日)에도 제사에는 반드시 곡(哭)을 하였다. 금상 6년에 정문을 지어 표창하고
예빈시 참봉(禮賓寺叅奉)을 제수하였다.
제영 상자[桑柘 뽕나무]는 평야에 이어 있다 : 한상경(韓尙敬)의 시에, "상자[뽕나무]는 평야에 이어 있고,
여염(閭閻 민가)은 옛 고을을 웅장하게 하였네." 하였다.
소나무 멧부리 들판을 가로질러 끊었다. : 이적(李迹)의 시에, "소나무 멧부리는 들판을 가로질러 끊었고,
연기나는 나무는 하늘에 닿아 떠있네." 하였다.
[비고]
연혁 본조(本朝) 세조(世祖) 12년에 군수(郡守)로 고치고 중종조(中宗朝)에 관아를 양산(楊山)의 남쪽에 옮겼다 :
옛 관아는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선조(宣朝) 22년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 역적(逆賊) 변숭복(邊崇福)이
태어난 읍이다. 41년에 다시 승격하였다.
방면 순풍(順豐)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사곶(寺串)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대원(大元) : 동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원성(遠城)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소곶(小串) :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안곡(安谷) :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섭하(涉河)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행촌(杏村)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대덕(大德)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초교(草郊)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문일(聞一)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흘홍(屹紅) : 동북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20리이다.
세동(細洞) :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미석(未石) :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판교(板橋)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독산(禿山) : 처음이 15리, 끝이 35리이다.
청파(靑坡) :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장령(長嶺) : 동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성지 양산고성(楊山古城) : 둘레가 천 6백 18척이며 흙으로 되었다.
영아 중영(中營) : 인조조(仁祖朝)에 신천(信川)에 설치하고 숙종 10년에 본군으로 이주하였다.
○ 속읍으로는 안악(安岳)과 신천(信川), 재령(載寧)이 있다. ○ 중영장은 본 군수가 겸임한다.
봉수 감적산(甘積山) : 북쪽으로 45리에 있다. 이현(梨峴) : 위에 보인다. 소산(所山) :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동창(東倉)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60리에 있다.
진도 영진(迎津) : 동남쪽으로 2리에 있으며 재령(載寧)으로 통하는 빠른길이다.
애진(艾津) : 동쪽으로 35리에 있으며 봉산으로 통하는 빠른 길이다.
사진(沙津) : 동북쪽으로 50리에 있으며 황주로 통하는 빠른 길이다. 사하진(沙河津) : 북쪽으로 60리에 있으며
강서(江西)로 통하는 사잇길이다.
북창진(北倉津) : 북쪽으로 60리에 있으며 용강(龍岡)으로 통하는 사잇길이다.
토산 잣ㆍ배ㆍ갈대[蘆]와 물억새[荻]ㆍ백새우[白蝦]ㆍ웅어ㆍ단유ㆍ도곶단(桃串壇) : 고려에서는 간사진도곶
(間斯津桃串)이라 칭한다.
성초곶단(省草串壇) : 고려에서는 간사진성초곶(間斯津省草串)이라 칭하며 이 두 곳은 모두 사전(祀典)에 실려
있다. 본조에서는 본읍에서 관장하여 봄과 가을로 제사 지낸다.
[주 D-001] 왕찬(王粲) : 한(漢) 나라 왕찬(王粲)이 형주성(荊州城) 문루(門樓)에 올라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주 D-02] 유주(柳州) : 유종원(柳宗元)이 유주 자사(柳州刺史)가 되어 성루(城樓)에 올라 칠언율시(七言律詩)
한 편을 지었다.
[주 D-003] 휴부(休浮) : 사는 것은 뜬 것과 같고 죽는 것은 쉬는 것과 같다.[生也若浮死也若休]는 옛 글이 있다.
[주 D-04] 구주(九州) : 고대에 중국(中國)을 구주(九州)로 나누었다.
[주 D-005] 근심을 나누는[分憂] :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을 분우(分憂)라 하며 임금의 백성 걱정하는 것을 나눈
다는 뜻이다.
[주 D-06] 어전[仙仗] : 궁궐에 임금을 호위하는 의장(儀仗)을 말한 것이다.
[주 D-007] 못이 열리니 태화(太華)에 이어진 듯, : 한유(韓愈)의 시에, "태화봉(太華峯) 머리에 옥정(玉井)의
연꽃."이란 구(句)가 있는데, 이것을 인용한 듯하다.
[주 D-008] 정성(定省) 온청(溫淸) : 《예기》에 부모 섬기는 도리를 말하되, "밤에는 편히 주무시게 해드리며
새벽에는 문안하고[昏定晨省]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며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라.[冬溫夏淸]” 하였다.
재령군 載寧郡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해주(海州) 경계까지 32리, 서쪽으로 신천군(信川郡) 경계까
지 31리, 북쪽으로 봉산군(鳳山郡) 경계까지 31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9리이다. 신증 동쪽으로 봉산군
경계까지 30리, 평산부 경계까지 90리요, 남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신천군 경계까지 15리, 북쪽
으로 봉산군 경계까지 20리, 안악군 경계까지 2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9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식성군(息城郡)이다 : 한성군(漢城郡)이라고도 하며 내홀(乃忽)ㆍ한홀(漢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중반(重盤)으로 고치고 고려 초기에 안주(安州)라고 개칭하였다.
성종(成宗) 때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초에 방어사를 혁파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
시켰다.
예종(睿宗) 때 감무(監務)를 두고, 고종(高宗) 때에 거란 군사를 막아 공이 있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승진
시켜 현령(縣令)으로 하였다.
본조 태조 6년에 풍주(豐州) 관내의 삼지현(三支縣)을 가져다 붙였으며, 태종 15년에 전례에 의거하여 지군사
(知郡事)로 승진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 각 1명. 신증 금상 14년에 예전 읍내[邑居]에 염병이 많다고 하여 지금 읍으로 옮겼
는데, 동쪽으로 예전 읍과 거리가 60리이다.
군명 식성ㆍ한홀ㆍ중반ㆍ안릉(安陵)ㆍ안풍(安風)ㆍ안주
성씨본군 정(鄭)ㆍ운ㆍ이ㆍ강(康)ㆍ조(趙)ㆍ신(辛)ㆍ안(安)ㆍ설(薛)ㆍ동(董)ㆍ서(徐)ㆍ김(金) : 모두 이주해
왔다.
삼지 김 : 속(續).
형승
북쪽으로 봉양산(鳳陽山)과 맞다있고, 남쪽으로 수양산(首陽山)에 닿았다 : 신정리(申丁理)의 서(序)에, 북쪽
으로 봉양산과 맞다있고 큰 강을 빙 둘렀으며, 남쪽으로 수양산에 닿고, 바다에 즈음하였다." 하였다.
산천 장수산(長壽山) : 고을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 배환(裵桓)의 시에, "북쪽을 누르는 돌산이 높게도 솟았는데, 가운데 멧부리 수려한 정기 모아 이름난 고을
창설하였네." 하였다.
금장산(金藏山)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남지산(南枝山)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천마산(天磨山)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백활산(白活山)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금점산(金岾山)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대조모로산(大棗毛老山)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전방산(箭防山) : 고을 동쪽 9리에 있다. 영진(迎津) : 고을 북쪽 78리에 있는데, 안악군 편에 자세하다.
율곶진(栗串津) : 고을 북쪽 63리에 있다. 근원이 해주 조화동(助化洞)에서 나와 고을 동쪽에 와서 입석탄
(立石灘)이 되고, 고을 북쪽에서 합탄(蛤灘)이 되며, 그 아래가 기탄(岐灘), 삼지강(三支江)이 되고,
또 그 아래가 이 나루가 된다. 기탄 아래로는 조소가 왕래한다.
합탄 : 고을 북쪽 28리에 있다. 입석탄(立石灘)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기탄 : 고을 북쪽 62리에 있다.
삼지강 : 삼지현(三支縣)에 있다. 신증 검산(釰山) : 고을 북쪽 1리에 있는 진산이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석철(石鐵) : 대조모로산에서 생산된다. 자초(紫草)ㆍ오미자ㆍ하수오ㆍ눌어(訥魚)ㆍ게ㆍ
뱅어ㆍ송이ㆍ붕어ㆍ숭어.
성곽 장수산성(長壽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천 9백 15척이요, 높이가 9척이다. 바윗돌이 험하고, 막혔으
며 성안에는 일곱의 우물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전덕루(全德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장수산 앞 백 척 누대에 올라가, 사면을 바라보니 안계도 넓구나.
바위 사이 늙은 나무는 천길이나 곧게 뻗어있고,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샘물[飛泉]은 한 갈래가 흐르네.
끊어진 밭두둑에 풀이 나니 젖 먹는 송아지 졸고, 황량한 오솔길에 오디[椹]가 익었으니 우는 비둘기 취했네.
백성들 오고(五袴)주D-001를 노래하고 촌가가 조용한데, 도리화(桃李花) 봄바람이 한 고을에 가득하네."
하였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신증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달만역(達滿驛)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 고을 동쪽 9리에 있다.
수철원(水鐵院) :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기탄원(岐灘院) : 기탄 언덕에 있다.
제흥원(濟興院) :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교량 합탄교(蛤灘橋) : 합탄에 있다.
불우 묘음사(妙陰寺)ㆍ운점사(雲岾寺)ㆍ쌍문사(雙門寺)ㆍ자복사(資福寺) : 모두 장수산에 있다.
불지사(佛知寺)ㆍ석천사(石泉寺) : 모두 천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 안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장수산에 있다. 신증 검산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광천소(廣淺所) :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삼지 폐현(三支廢縣) :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옛 삼지역[古三支驛] : 옛터가 삼지현에 있다.
인물본조 강진(康晉) : 세종조에 급제하고 검교호조판서(檢校戶曹判書)를 지냈다.
[비고]
연혁 중종 14년에 검산(劍山)에 옮겨서 설치하였다. 옛 관아는 장수산(長壽山) 남쪽 5리에 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文獻備考)》
방면 좌리(左里) : 남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우리(右里) :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성원(成垣)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상율(上栗) :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하율(下栗)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좌율(左栗)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우율(右栗)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20리이다. 삼지강(三支江) :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우두천(牛頭川) :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은줄지(銀乼只)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화산(花山)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역대(驛垈) :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5리이다.
성당(聖堂) : 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유등(柳等) : 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방인(方洇) : 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청수리(靑水里)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동우(東隅).
진보 철현진(鐵峴鎭) : 남쪽으로 70리, 유등방(柳等坊)에는 훈국장관(訓局將官)이 한 사람의 차별장(差別將)을
두어 연철(鍊鐵)을 본영에 납부한다. 진군(鎭軍) 2백 50명은 각 사람마다 철 50근씩을 본영에 내야 한다.
만약 위급한 때에는 별장이 진군을 인솔하여 장수산성(長壽山城)으로 들어가 지킨다.
창고 읍창(邑倉)ㆍ외창(外倉) :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역참혁폐 삼지역(三支驛)ㆍ금동역(金洞驛)
진도 율곶진(栗串鎭) : 동북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봉산(鳳山)으로 통하는 빠른 길이다.
영진(迎津) : 서북쪽으로 18리에 있으며 안악(安岳)으로 통하는 빠른 길이다.
당탄진(唐灘津) : 동쪽으로 15리에 있으며 서흥(瑞興)의 큰 길로 통하며 연수지마(淵水至馬)는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석탄(石灘) : 다리가 범람하면 배를 쓴다.
토산 자초(紫草)ㆍ갈대[蘆]와 물억새[荻].
사원 경현서원(景賢書院) : 효종(孝宗) 을미(乙未)년에 건축하여 숙종 을해(乙亥)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이이(李珥) : 모두 문묘에 보인다.
[주 D-001] 오고(五袴) : 한(漢) 나라 염범(廉范)이 촉군(蜀郡)의 태수(太守)로 가서 전일에 밤에 불켜기를 금지
하던 것을 해제하여 백성들이 길쌈을 하게 하였더니 백성들이 칭송하기를, "전에는 중의도 없었더니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五袴]이로다." 하였다.
수안군 遂安郡
동쪽으로 곡산군(谷山郡) 경계까지 45리, 남쪽으로 신계현(新溪縣) 경계까지 25리,
서흥부(瑞興府) 경계까지 34리, 서쪽으로 동부(同府) 경계까지 35리,
북쪽으로 평안도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48리,
삼등현(三登縣) 경계까지 91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0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장새현(獐塞縣)이다 : 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서암군(栖巖郡)의 영현
(領縣)이 되었으며,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곡주(谷州)에 속하였으며 후에 현령(縣令)
을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때 원(元) 나라 조정의 폐관(嬖官) 이대순(李大順)의 요청으로 승격하여 수주(遂州)가
되었다 : 고을 사람 이연송(李連松)이 나라에 공로가 있어, 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본조에서 수안군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저새ㆍ수주ㆍ요산(遼山)ㆍ장률(獐栗)
성씨본군 박ㆍ이(李)ㆍ계(桂)ㆍ추(秋)ㆍ피(皮)ㆍ용(龍) : 속(續). 김(金) : 장담(長潭)
산천 요동산(遼東山) : 고을 동북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아달산(阿達山) : 고을 북쪽 60리에 있다.
대청산(大靑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웅산(熊山)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언진산(彦眞山) : 고을 동쪽 45리에 있다. 가라읍산(加羅邑山) : 고을 동남쪽 30리에 있다.
능성강(能成江) : 고을 북쪽 93리에 있다. 곡산군 말흘단(末訖灘) 하류요, 평안도 삼등현 경계이다.
흑석탄(黑石灘) : 고을 동쪽 24리에 있는데 근원이 언진산에서 나온다.
대교탄(大橋灘) : 고을 남쪽 10리에 있는데, 고을 북쪽 도동(陶洞)에서 나와 보음탄(甫音灘)으로 들어간다.
보음탄 : 고을 남쪽 25리에 있는데 바로 흑석탄의 하류이다.
또 남쪽으로 흘러 우봉현(牛峯縣)으로 들어가 저탄(猪灘)이 된다.
신증 용담(龍潭) : 저헌도인(樗軒道人 이석형(李石亨)의 시 서문에, 고을에서 1리쯤 되는 곳에 바위가 있는데,
입같이 생겨, 맑은 샘을 뿜어내며 졸졸 흘러서 못을 이루는데, 겨울에도 얼지 않고 가물 때도 마르지 않으며 비
가 와도 넘치지 않는다. 벼랑 돌[崖石]이 높이 섰는데 5, 6명은 앉을 만하며 투명하여 털끝도 비춰 볼 수 있다.
구멍이 빙 돌아 좁아져서 형상이 목구멍 같은데, 그 근원을 엿볼 수 없다. 아마도 조물주가 괴이한 것을 만들어
서 세상의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시에, "돌문에 푸른 안개가 낮에 뿌리는데,
그 윤기(潤氣)가 은하수에 닿아 비ㆍ이슬[雨露]이 되는구나. 한 줄기의 신령스런 물 근원 맑으면서 마르지 않
으니, 이 사이에 교룡(蛟龍)이 있는가 의심되네." 하였다.
토산 실[絲]ㆍ마(麻)ㆍ옥석(玉石) : 괘항산(掛項山)과 웅암(熊巖) 두 곳에서 생산된다.
철(鐵) : 견조산(見造山)에서 생산된다. 구리쇠 : 동리포산(銅里浦山)에서 생산된다.
인삼ㆍ복령(茯苓)ㆍ자초(紫草)ㆍ영양(羚羊)ㆍ벌꿀ㆍ오미자ㆍ송이ㆍ석이[石蕈]ㆍ
궁간목(弓幹木) : 언진산에서 생산된다. 눌어(訥魚).
관방 방원진(防垣鎭) : 고을 북쪽 24리에 있는데 본군 및 우봉(牛峯)ㆍ신계ㆍ서흥 네 고을 군졸이 번갈아 방어
한다. 진 동서쪽에 행성(行城)이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6백 20척, 높이가 8척이다.
신증궁실 객관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새벽에 황주를 떠나 여기 저기 더욱 바쁘구나. 절월(節鉞)을 새 정자
에 멈추니 벌써 석양이 되었네. 하늘에 병풍을 펼쳤으니 구름이 한 조각이요, 돌문에 일산이 번득이니 나무가
천 그루이네. 부슬부슬 안개에 거문고와 책이 축축하고, 산들산들 가벼운 바람에 배개와 자리가 서늘하네.
거기에 다시 꽃이 붉어 사방 자리를 비치니, 먼저 항아리 열고 술 따르며 춘광(春光)을 구경하네." 하였다.
○ 관서(關西) 지방에서도 궁벽한 곳이라 봄 추위를 겁내는데, 말타고 유유히 오며 억지로 마음을 푸네.
학의 둥우리 내려다 보며 나무 끝을 돌아가는데 바람부는 돌층계 붙들고 올라가서 구름 끝에 나오네.
내 평생 곤궁한 길에 통곡할 줄 몰랐으니,주D-001 이번 길이 행로난(行路難)임을 어찌 알리오. 바로 높은 하늘
(層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발돋움하니 천리 밖에 장안(長安)이 멀다 하지 말라." 하였다.
누정 동환정(同歡亭) :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이름을 공취(拱翠)로 고쳤다.
신증 풍화루(風和樓) : 바로 객관 문루이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위라역(位羅驛)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조산원(造山院) : 고을 남쪽 35리에 있다.
지천원(紙川院) : 고을 북쪽 60리에 있다. 서효원(徐孝院) : 고을 북쪽 35리에 있다.
여의원(如意院)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보음원(甫音院) : 보음탄(甫音灘) 언덕에 있다.
판적원(板積院) : 고을 서쪽 35리에 있다.
불우 불각사(佛角寺)ㆍ영대암(靈臺菴)ㆍ반야암(般若菴)ㆍ은적사(殷積寺)ㆍ수정사(水淨寺) : 모두 언진산에
있다. 청암(靑菴) : 아달산에 있다. 송림사(松林寺) : 대청산에 있다. 상암(上菴) : 남갈산(南碣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요동산사(遼東山祠) : 봄 가을로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사암역(射巖驛) : 옛 터가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이마곡소(尒磨谷所)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신증 요동산 봉수(遼東山烽燧) 옛터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마지암산 봉수(馬之巖山烽燧) 옛터 : 고을 북쪽 60리에 있다.
방원 폐진(防垣廢鎭)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정덕(正德) 병인년(성종 1년)에 혁파하여 강음현 탈미곡(江陰縣脫彌谷)으로 옮겼다.
명환본조 최중겸(崔仲謙).
인물
고려 이수산(李壽山) : 충혜왕(忠惠王) 조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되었으며, 공민왕(恭愍王) 조에 첨의평
리(僉議評理)로 임명되었다가 찬성사(贊成事)으로 승진되고, 외직으로 나가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가 되어 여진(女眞)의 경계를 정하였다. 시호는 공양(恭良)이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윤소종(尹紹宗)에
게 상소하기를, "현릉(玄陵 공민왕의 능호)이 후사가 없고, 이인임(李仁任)이 신우(辛禑)를 세우려 하니 대신들
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는데, 이수산만이 홀로 종실(宗室)로 세우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몸은 이미 죽었지만, 충의(忠義)가 사람을 감동하게 하니, 추후로 포창하여 시호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연송(李連松) : 충숙왕(忠肅王) 때에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었는데, 이연송이 원 나라에서 쌀을 사올 것을 조
정에 건의하여 쌀 3만 석을 청구하여다가 자신이 직접 다니며 구제하니 왕이 기뻐하여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
功臣)의 호를 주고 수안군(遂安君)을 봉하였다. 본읍에는 원래 노비가 없었는데,
이연송이 자기 집의 여종을 내어 본읍에 소속시키니 그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지금까지 그 힘을 입었다.
이휴(李庥) : 이연송의 아들인데 벼슬이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수안군을 봉하였다.
이완(李完) : 이휴의 아우다. 벼슬이 대광 정윤(大匡正尹)에 이르고, 수안군을 봉하였다.
이염(李恬) : 이수산의 아들이다. 공민왕 조정에 급제하여 판전의시사(判典議寺事)를 지내고 벼슬이 경상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이르렀다.
효자고려 최일(崔溢) : 그 부모가 죽으니 집 동쪽 가까운 곳에 장사지내고 조석으로 죽을 때까지 음식을 올렸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문(㫌門)을 세웠다.
제영 작은 고을은 수풀 기슭을 의지했다 : 최부(崔府)의 시에, "작은 고을은 수풀 기슭을 의지했고, 시냇물은 짧
은 담을 지나간다." 하였다.
백 년 동안 백성의 풍속이 후하다 : 박아(朴雅)의 시에, "백 년 동안 백성의 풍속이 후하고, 9월에 나그네의 옷이
서늘하다." 하였다.
일은 지나갔는데 청산은 있다 : 이익박(李益朴)의 시에, "일은 지나갔는데 청산은 있고, 관청이 한가하니 흰 해
가 길구나." 하였다. 요산(遼山)은 하늘이 만든 험지이다 : 이예(李芮)의 시.
[비고]
연혁 효종(孝宗) 4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사노비 예향(禮香)이 그의 주인 정화악(鄭華岳)을 죽였기 때문이다.
현종 3년에 다시 승격하였다.
방면 동부(東部) : 끝이 20리이다. 서부(西部) :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대천(大千)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마지암(馬之巖)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대포(大浦) : 북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이다. 공동(公洞) : 북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이다.
소내곡(所內谷)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도동(道洞) :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수구(水口) : 북쪽으로 처음이 90리, 끝이 1백 10리이다. 성동(城洞)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율계(栗溪)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현조산(見造山)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미동(未洞) :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북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21년에 쌓았으며,
삼등연(三登沿)으로부터 큰 냇물이 직접 들어와 방원(防垣)에 부딪쳤다.
오늘날에는 고성산(古城山)이라 한다. 둘레는 5천 8백 37척이다.
성현행성(城峴行城) : 패강장성(浿江長城)에 남은 터가 있다.
진보 문산진(文山鎭) : 북쪽으로 20리 방원령(防垣嶺) 아래에 있다. □종조(□宗朝)에 방원진(防垣鎭)을 설치하
고 패강(浿江)을 수축하고 옛 행성(行城)에 관을 설치하였다. 성의 길이는 6백 20척이고 성의 좌우에 높은 산이
마주 솟아있다. 인조 2년에 이괄(李适)의 군대가 이곳에 도착하였지만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숙종 6년에 문산(文山)ㆍ총명(聰明) 두 곳의 둔장(屯將)을 만호(萬戶)로 승격시켜 이곳에 옮겨 설치하였다.
○ 방원령(防垣嶺)ㆍ명월령(明月嶺)ㆍ만령(蔓嶺)ㆍ이령(泥嶺)ㆍ납로리령(納老里嶺)을 지킨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한 사람이 있다. 위라진(位羅鎭) : 서남쪽으로 25리 양파령(陽波嶺) 안에 있다.
숙종 6년에 둔장을 만호로 승격시켰다. 도정령(道汀嶺)ㆍ비륵령(飛勒嶺)ㆍ서대령(西大嶺)ㆍ성현양퍄령(城峴陽
波嶺)ㆍ마유령(馬踰嶺)ㆍ제지령(悌只嶺)을 지킨다. ○ 병마만호가 한 사람이다.
혁폐 총령진(葱嶺鎭) : 동쪽으로 25리에 있으며 본래는 총명둔(聰明屯)이다.
숙종 6년에 둔장(屯將)을 만호(萬戶)로 승격하여 지키고, 건은령(件隱嶺) 민을령(民乙嶺) 동대령(東大嶺) 등을
문산진에 합하였다.
창고 읍창(邑倉)ㆍ사창(社倉) : 서북쪽으로 25리 대천방(大千坊)에 있다. 신창(新倉) : 북쪽으로 70리에 있다.
동창(東倉) : 동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역참 판적원(板積院) : 서남쪽으로 25리에 있으며, 중화(中和) 황주(黃州)ㆍ상원(祥原)을 잇는 모든 길이 모이
는 곳이다.
서대령(西大嶺)ㆍ마유령(馬踰嶺)ㆍ양파령(陽波嶺)의 사이와 또 서흥(瑞興) 근처의 동현(東峴)ㆍ건은치(件隱峙)
에 이르는 길은 점점 넓어지고 아주 험한 고개는 있지 않다.
성교원(星橋院) : 동쪽으로 40리에 있으며 곡산으로 가는 길이다.
토산 배ㆍ은어ㆍ담비[山獺].
사원 용계서원(龍溪書院) : 현종(顯宗) 임인년에 건축하여 숙종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관녕(管寧) : 자는 유안(幼安)이며 한(漢) 나라 북해(北海) 사람이니 헌제(獻帝) 때에 손님으로 요동(遼東)에 왔
었다.
이연송(李連松) : 수안(遂安) 사람이며 고려 때에는 평장사 수안군(平章事遂安君)으로 충숙왕(忠肅王)을 따라
원(元) 나라에 들어갔다가 약을 받아 먹고 죽었다.
강백년(姜栢年) :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이니 진주(晉州) 사람이다. 벼슬은 판중추(判中樞)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 D-001] 내 평생 곤궁한 길에 통곡할 줄 몰랐으니, :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길을 가다가 길이 다하여
퉁곡하고 돌아왔다.
곡산군 谷山郡
동쪽으로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의 경계까지 92리, 남쪽으로 신계현(新溪縣) 경계까지 45리, 서쪽으로 수안군
경계까지 34리, 북쪽으로 평안도 성천부(成川府) 경계까지 93리, 동도 양덕현(陽德縣) 경계까지 1백 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4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십곡성(十谷城)이다. 덕돈홀(德頓忽)이라고도 하고, 곡성(谷城)이라고도 하며,
고곡군(古谷郡)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진서(鎭瑞)로 고쳐서 영풍군(永豐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조에서 곡주
(谷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때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현종(顯宗) 때에 지주사(知州事)로 하였다.
본조 태조 2년에 현비 강씨(顯妃康氏)의 고을이기 때문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하였다.
태종 2년에 다시 강등하여 지주사로 하였다가 후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삼았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십곡성ㆍ덕돈홀ㆍ고곡ㆍ진서ㆍ상산(象山).
성씨본군 우(禹)ㆍ노(盧)ㆍ강(康)ㆍ한(韓)ㆍ용(龍)ㆍ연(延)ㆍ척(拓)ㆍ전(全)ㆍ백ㆍ이 : 모두 이주해 왔다.
풍속 풍속이 누에치기[蠶桑]를 힘쓴다. 《지지(地志)》
형승 동쪽으로 교주(交州)에 인접하고, 북쪽으로 평양(平壤)에 교통한다 : 이색(李穡)의 기문.
산천 남산(南山) : 고을 남쪽 8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협올산(峽屼山)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증격산(甑擊山) :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미륵산(彌勒山)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신유산(新留山)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무산(霧山) :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고달산(高達山) : 고을 동쪽 55리에 있다. 청량산(淸凉山) : 고을 북쪽 50리에 있다.
달보산(達寶山) : 달운(達雲)이라고 하는데, 고을 북쪽 35리에 있다. 운련산(雲連山) : 고을 동쪽 25리에 잇다.
오륜산(五倫山) :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감둔산(甘芚山)ㆍ백운산(白雲山) : 모두 고을 북쪽 60리에 있다.
은금동대령(銀金洞大嶺) : 고을 북쪽 65리에 있다.
말흘탄(末訖灘) : 고을 북쪽 25리에 있는데, 근원이 양덕현(陽德縣)에서 나와, 평안도 평양부 대동강으로 들어
간다.
당저탄(堂底灘) : 고을 동쪽 5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달산에서 나와 말홀탄과 합한다.
토산 사(絲)ㆍ마(麻)ㆍ영양(羚羊)ㆍ눌어(訥魚)ㆍ벌꿀ㆍ잣[海松子]ㆍ황양(黃楊)ㆍ송이ㆍ석이ㆍ오미자ㆍ
자초(紫草)ㆍ인삼ㆍ궁간목(弓幹木) : 고을 북쪽 도삼며[刀三㫆]에서 생산된다.
누정 척서루(滌暑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곡산 고을은 서해도(西海道)의 궁벽한 곳이다. 동쪽으로 교주에 인접하고, 북쪽으로
평양과 경계하였는데, 산이 높고 물이 아름다우며, 한 구역이 평평하고 넓은 곳이 고을의 소재지이다.
공관(公館)은 북쪽에 가까운데 여염집으로 둘러 있어 빈객이 오더라도 올라가 구경할 것이 없어서 우물 속에 있
는 것 같았다.
지주사(知州事) 윤상발(尹商發)이 이를 개탄하여, 수목을 베고 띠풀을 쳐내고 작은 정자를 짓기로 하였는데, 임
기가 끝나서 이루지 못하고 갔다. 김공(金公)이 뒤이어 와서는 또 말하기를, '윤공이 못한 것이 아니라 나를 기다
린 것이다.' 하고, 아전과 함께 그 땅을 더 넓히고 닦은 다음 재목을 산에 가서 가져오고 기와를 들에서 구어,
두 달만에 공사를 끝냈다. 이에 그의 문객 통문시위호군(通門侍衛護軍) 서윤명(徐允明)을 보내어 편지로써 기문
을 청하므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지역은 삼면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북쪽으로 장백산(長白山)에 닿았는데, 바다에 붙은 주현(州縣)
은 누대(樓臺)가 서로 빛나고 빈객이 서로 잇달아 왕래하며, 구경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시(四時)의 즐거움이
끊이지 않아, 수백 년이 하루 같았더니, 바다 도둑(왜구)이 일어나면서부터 해마다 늘고 달마다 더하여 봉화(烽
火)는 밤낮을 이어서 오르고, 무사[甲胄]는 춥고 더운 때를 가리지 않으며, 바다를 낀 지역에는 해골뿐이요,
하물며 황무한 풀밭뿐이었으니, 소위 누대를 말해서 무엇하리.
폐허에 여우ㆍ토끼 뛰노니 지나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곡산 고을은 서울 북쪽 3백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다와 상당히 멀어서, 백성들은 봉화(烽火)를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밥먹고 봄가을 농사짓는 이외에는 아무 일
도 없으니, 수령(守令)된 자도 정사가 번거롭지 않고 공을 쉽게 이룸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인(仁)으로써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며, 의(義)로써 시행하여, 백성은 쉽게 편안하고 일이 쉽게 되는 것
이 김공 같은 이 있으랴. 그 누대를 짓는 공사가 성취됨을 분명히 반드시 할 수 있다. 수령이란 백성과 직접 만나
는 직책이니 백성이 편안하면 이것으로 충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윗사람을 공경하는 데에 있으며,
윗사람을 공경함은 법규를 준수하고 사신을 예대(禮待)하는 것뿐이니, 김공은 그 급선무를 알아서 한 것이다. 공
의 이름은 승귀(承貴)요, 벼슬은 3품관인데, 이번 일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윤지주(尹知州)는 내 문생(門生)이며 서호군은 나의 옛 벗 송씨의 생질이다. 그러므로 졸렬함으로써 사양하지 않
고 대략 기록한다.' 하였다." 한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소곶역(所串驛)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관원(館院)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금음물원(今音勿院) :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잉고개원(仍古介院) : 고을 북쪽 55리에 있다.
불우 사효사(思孝寺) : 증격산에 있다. 사벽사(沙壁寺) : 운련산에 있다. 관적사(觀寂寺) : 오륜산에 있다.
정림사(淨林寺) : 백운산에 있다. 고달굴(高達窟) : 고달산에 있다. 문수굴(文殊窟) : 청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달보산 고성(達寶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만 5천 60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말귀원보(末龜院堡)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하남산거질천보(下南山居叱遷堡) : 고을 남쪽 35리에 있다.
다호천보(多乎遷堡) : 고을 서북쪽 45리에 있다.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적곡소(赤谷所)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명환고려 이행검(李行儉)
인물
고려 노조(盧朝) : 급제하여 벼슬이 우복야 지중추부사(右僕射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두 번 지공거(知貢擧
시험관)가 되어 선발한 김교(金皎)ㆍ김연(金緣)ㆍ박경작(朴景綽)ㆍ김지화(金至和) 같은 이들이 모두 명사로 알
려진 사람들이니 세상에서 그의 감식안을 칭찬하였다.
본조 연사종(延嗣宗) : 태종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벼슬이 곡산부원군에 이르고 시호는 정후(靖厚)이다.
한옹(韓雍) : 벼슬이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이르고, 시호는 평절(平節)이다.
열녀본조 강씨(姜氏) : 본관은 진양(晉陽)인데, 이태경(李台慶)의 아내이다.
이태경이 일찍이 초계 군사(草溪郡事)가 되었다가 관직 재임 중에 죽어서 경산(慶山)에 장사지냈는데,
아들 이규(李糾)가 아직 어렸다. 강씨가 3년간 시묘하고, 상(喪)을 마친 뒤에 여기에 와서 거주하니 세력있는
집안에서 다투어 강씨에게 장가 가려고 하자 강씨가 울며 죽기로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다. 세종조에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제영 상산(象山)은 오히려 의관(衣冠)의 지방이다 : 백군녕(白君寧)의 시에, "상산은 오히려 의관의 지방인데,
변방은 모두 창칼의 풍진일세." 하였다.
구불구불 뱀 기어가듯 길이 통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곡주가 일반 산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구불구불 뱀 기어가듯 길이 통하였네." 하였다.
일만 번 구비쳐도 시냇물이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 김처례(金處禮)의 시에, "천 번 돌아도 역로(驛路)는 서울로
돌아가고, 일만 번 굽이쳐도 시냇물은 대동강으로 들어가네." 하였다. 산수는 맑고 그윽하며 숲속은 순후하다.
예전 사람의 시에, "산수 맑고 그윽하고 숲속은 순후하니, 한 구역의 백성생활 주진촌(朱陳村) 같구나." 하였다.
두세 채 초가집 주점 푸른 산을 곁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누대 서쪽 지는 해 이미 붉은데,
항아리 술에 조용히 담소하네. 얼마의 우거진 숲은 푸른 멧부리 감추어졌고, 두세 채 초가집 주점은 푸른 산을
곁했네. 산은 곡령(鵠嶺)에서 달려오니 모두 북쪽에서 왔고, 물은 저탄(猪灘)으로 들어가니 다 남쪽을 향하는
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현종 10년, 신덕왕후(神德王后) 복위 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정종 6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5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순조조(純祖朝) 때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후에 승격시켰다.
방면 읍내 : 사방 10리이다. 동촌(東村) : 동북쪽으로 60리, 동쪽으로 30리이다.
매을미(買乙彌)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70리이다.
이령(伊令) : 동북쪽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1백 30리이다.
도삼미(刀三彌) :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90리이다. 사화이(沙火伊) : 처음이 50리, 끝이 1백 리이다.
오사(吾舍) : 처음이 30리, 끝이 1백 리이다. 서촌(西村)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도하(道下)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천외(川外)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50리이다.
북도(北道)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화촌(花村) : 서북쪽으로 90리에 있다.
적곡소(赤谷所)는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진보 문성진(文城鎭) :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영(嶺)의 아래가 검암(檢巖)하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21년에 성을 쌓았으며 영(嶺)의 위에는 관(關)을 설치하였다. 본조 중종(中宗) 때에
만호(萬戶)를 설치하고 숙종 9년에 첨사(僉使)로 승격하였다.
○ 검암령(檢巖嶺)ㆍ민을령(民乙嶺)ㆍ월현령(月峴嶺) ○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가 한 사람이다.
창고 읍창(邑倉)ㆍ북창(北倉) : 은금국령(銀金國嶺) 아래에 있다.
역참 천두역(泉頭驛).
토산 배[梨].
신천군 信川郡
동쪽으로 재령군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45리, 서쪽으로 송화현(松禾縣) 경계까지 8리,
북쪽으로 안악군(安岳郡) 경계까지 1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승산군(升山郡)이다. 고려조에 신주(信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조에 방어사(防禦使)
를 두었다. 현종(顯宗)조 초기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황주(黃州)에 속하였으며,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거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으로 하였으며, 예종 원년에 명(明) 나라에 들어
가 있는 내시 정동(鄭同)의 고향이기 때문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승산ㆍ신주ㆍ신안(信安)ㆍ신성(信城)ㆍ화산(花山)ㆍ승주(升州)
성씨본군 강(康)ㆍ오ㆍ임(林)ㆍ이ㆍ문(文)ㆍ정(鄭) : 속(續). 최 : 용주(龍州) 고(高) : 이주해 왔다.
산천 화산(花山) : 고을 북쪽 6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천봉산(天奉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는데,
위에 용정(龍井)이 있어, 가물 때면 비를 빈다. 중령산(中嶺山)ㆍ신성산(信城山) : 모두 고을 북쪽 7리에 있다.
우산(牛山) : 대ㆍ소(大小) 두 산이 모두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능동(陵洞)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누교천(樓橋川) : 고을 남쪽 4리에 있다. 송화현 소교천(燒橋川)의 하류이다.
부정천(婦貞川)과 합류하여 고을 동쪽에 이르러 우산포(牛山浦)가 된다.
부정천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근원이 천봉산(天奉山)에서 나와 누교천과 합류한다.
온천(溫泉)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우산포 : 소우산(小牛山) 아래 있는데, 누교ㆍ부정 두 냇물이 합류하여 고을 북쪽에 와서 이 포(浦)가 되어 바다
로 들어간다.
마명천(馬鳴川) :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토산 사(絲)ㆍ마(麻)ㆍ자초(紫草)ㆍ붕어ㆍ게.
누정 모한정(慕漢亭) : 객관 북쪽에 있다. 신증 취원루(聚遠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 우리 태조 원년에 감무 송거중(宋居中)이 짓고, 정 총(鄭摠)이 기문을 지었다.
역원 원산역(元山驛)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사원(沙院)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대모원(大母院)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토성원(土城院)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불우 광복사(廣福寺) : 신성산에 있다. 낙달사(樂達寺) : 천봉산에 있다. 자혜사(慈惠寺) : 증산(甑山)에 있다.
망일사(望日寺) : 능동(陵洞)에 있다. 반야암(般若菴) : 중령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내석향(內石鄕)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명환본조 윤반(尹磻)ㆍ이맹상(李孟常).
인물본조 강신(康愼) : 세종조에 급제하여 세자 필선(世子弼善)이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
강곤(康袞) : 무용(武勇)으로 이름이 났다. 세조조의 정난익대공신(靖難翊戴功臣)이며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고, 신천군(信川郡)을 봉하였다.
신증효자본조 김숙손(金淑孫) : 부모 상중에 모두 3년간 시묘살이 하였으며 사당을 묘소 곁에다 세우고 아침
저녁으로 생전처럼 상식(上食)하며,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금상 5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쌍으로 뾰족한 들판 밖의 산이다. : 강희안(姜希顔)의 시에, "한구비 수풀 앞의 물이요, 쌍으로 뾰족한
들판 밖의 산이다." 하였다.
[비고]
방면 동부(東部) : 끝이 10리이다. 서부(西部) : 끝이 10리이다. 마산(馬山) : 동남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능동(陵洞)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대정(大井) : 위와 같다.
두라(頭羅)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5리이다. 가개(加介)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연사(蓮寺)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어항(於項)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가산(加山) :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어로(魚蘆) : 동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성월(聲月)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가음곶(加音串)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중령(中嶺) :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삼동(森洞) : 끝이 내석향(內石鄕) 북쪽으로 10리이다.
성지 고토성(古土城) : 신성산(信城山)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남창(南倉)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토산 철(鐵)ㆍ갈대[蘆]ㆍ물억새[荻].
사원 정원서원(正源書院) : 선조 무자년에 건축하여 숙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
이황(李滉)ㆍ이이(李珥) : 모두 문묘에 보인다.
신계현 新溪縣
동쪽으로 곡산군 경계까지 40리, 강원도 이천현(伊川縣) 경계까지 45리,
남쪽으로 평산부(平山府) 경계까지 21리, 우봉현(牛峯縣) 경계까지 38리, 토산현(免山縣) 경계까지 37리,
서쪽으로 서흥부(瑞興府) 경계까지 41리, 북쪽으로 수안군(燧安郡) 경계까지 46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8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려의 신은현(新恩縣)이다. 현종(顯宗) 때에 곡주(谷州)에 속했는데, 고종(高宗)조에 위사공신
(衛社功臣) 이공주(李公柱)의 고향이라 하여 지담주사(知覃州事)로 승격시켰으며, 후에 주(州)를 혁파하고,
예전의 이름으로 회복하여 다시 곡주에 속하였다.
본조 태조 5년에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고 협계현(俠溪縣)을 여기에 속하게 하였으며,
태종 13년에는 전례에 의거하여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세종 27년에 두 고을 이름을 따서 지금 이름으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1명.
군명 신은ㆍ담주ㆍ신성(新城).
성씨본현 송ㆍ고ㆍ진(秦)ㆍ전(田)ㆍ길. 협계 배ㆍ윤ㆍ민ㆍ선(鮮)ㆍ변(邊)ㆍ윤ㆍ민 : 모두 촌(村).
산천 구봉산(九峯山) : 고을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학소봉(鶴巢峯)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 "옛날에 흰 학이 그 마루턱에 깃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봉우리 위에는 현종대(縣鐘臺)가 있고, 대 아래 간월암(看月巖)이 있다.
탁목봉(啄木峯)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태일산(太一山) : 고을 동쪽 33리에 있다.
천개산(天蓋山)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화개산(華蓋山) : 고을 동쪽 32리에 있다.
송천산(松泉山)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기달산(箕達山) : 고을 동쪽 31리에 있다.
성암(星巖)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남탄(南灘) : 고을 남쪽 1리에 있는데, 근원이 화개산에서 나와 사팔적탄(沙八赤灘)과 합한다.
사팔적탄 : 고을 서쪽 8리에 있는데, 근원이 수안군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오며 하류가 우봉현의 저탄(猪灘)이
된다.
노연(蘆淵) : 탁목봉 아래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문득 감응한다.
토산 인삼ㆍ자초(紫草)ㆍ무쇠 : 고을 동쪽 축천리에서 생산된다. 복령(茯苓)ㆍ오미자ㆍ송이ㆍ눌어(訥魚).
누정 이요정(二樂亭) : 객관 동쪽에 있다.
○ 강희안(姜希顔)의 시에, "한번 오르니 만 가지 끌리는 생각 모두 없어지니, 벼슬살이와 나그네 심사 둘 다 아
득하구나. 책상 머리에 바로 천길 석벽을 마주 했는데, 골짜기 입구에는 길게도 백 구비의 시내[川]가 돌아오
구나. 옛부터 회포 풀 만한 땅이 마침내 있는 것이요, 이 인생 어디가나 천운에 관계 않으리.
말 없이 앉은 하룻동안에 참 취미를 이루니, 어찌 인간세상 향하여 이 취미 함부로 전하리."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먼지같은 세상의 일 괴롭게도 서로 이끄는데 견디지 못하겠더니, 외로운 정자에 한
번 오르니 기운이 호연(浩然)하구나. 참 진경(眞境)은 한가한 세월을 보낼 만한데, 신선고장에 처음으로 좋은
산천 보겠네. 맑은 못은 백 길이나 깊어 밑이 없는데, 서린 골짜기[盤谷]에 천년의 별천지가 있네. 제일 기쁜 일
은 도화(桃花) 흐르는 깊숙한 물이니, 정녕 이 좋은 경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지 말게." 하였다.
수림정(秀林亭) : 고을 동쪽 1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흐르는 물에 임하였으며 끊어진 언덕이 천 자는 된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소평역(所坪驛)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광산원(廣山院)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장양원(長楊院)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금강원(金剛院)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회원(灰院)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식점원(食岾院)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불우 천개사(天蓋寺) : 천개산에 있다. 봉지사(鳳池寺) : 태일산에 있다. 송천사(松泉寺) : 송천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종대 북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협계 폐현(俠溪廢縣) : 고을 남쪽 30리에 있는데, 원래 고구려의 수곡성현(水谷城縣)이며 매차홀(買且忽)
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단계(檀溪)로 이름을 고쳐서 영풍군(永豐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곡주에 예속되고, 후에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속하였다.
북소궁(北蘇宮) : 북소(北蘇)는 곧 고을의 기달산이다. 신우(辛禑) 때에 도선(道詵)의 〈비기(祕記)〉에 의하여
권중화(權仲和) 등을 보내어 찾아 얻고 좌소 백악산(左蘇白岳山), 우소 백마산(白馬山)과 함께 3소(蘇)를 삼고
궁궐을 지었는데, 그 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또 장단부(長端府) 및 풍덕군(豐德郡) 편에도 보인다.
관상역(管上驛) : 옛 터가 고을 동쪽에 있다. 신은고현(新恩古縣)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제영 구름 깊고 나무 늙었으니 천년 고을이다 : 배둔(裵屯)의 시에, "구름 깊고 나무 늙었으니 천년 고을이요,
녹음(綠陰) 어둡고 꽃무늬 4월 철이구나." 하였다.
○ 산악 천여 개 층은 북진(北鎭)을 이루었다 : 장후(張厚)의 시에, "큰 산악 천여 개 층은 북진을 이루었고,
긴 교량 백 척은 남쪽 시내에 누워 있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옮겼다. 《문헌비고(文獻備考)》
방면 중부(中部) : 읍내(邑內)에 있다. 동리(東里)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고도(孤島)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45리다. 채촌(菜村) : 동북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60리이다.
지파곡(芝破谷)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사이곡(沙伊谷)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적암(赤巖)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55리이다.
여배이(餘背耳)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마지곡(麻知谷)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서리(西里) : 서쪽으로 끝은 15리이다.
율탄(栗灘) : 남쪽으로 처음은 12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수회(水回) :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5리이다.
다원(多院)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역참혁폐 생곡역(栍谷驛) : 현(縣) 남쪽에 있다.
교량 방아교(方阿橋) : 남쪽으로 22리에 있으며, 율탄(栗灘) 상류에 있다.
남천교(南川橋) :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오소천교(烏巢川橋)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사라탄교(沙羅灘橋) : 서쪽으로 8리에 있으며, 서흥(瑞興)과 통하고, 우로는 대로(大路)와 병행하여 있다.
토산 배[梨].
누정 영한루(詠閑樓)ㆍ청심정(淸心亭) : 모두 현(縣) 내에 있다.
우봉현 牛峯縣
동쪽으로 토산현(免山縣) 경계까지 33리, 남쪽으로 경기도 장단부까지 84리, 서쪽으로 평산부 경계까지 29리,
북쪽으로 신계현 경계까지 31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우잠군(牛岑郡)이다 : 우령(牛嶺)이라 하기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에 평주(平州) 에 속했으며, 문종(文宗) 때에는
바로 개성부에 속하고 예종(睿宗) 때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4년에 승격하여 현령(縣令)으로 하였으며 태종 13년에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현령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우잠ㆍ우령ㆍ수지의ㆍ삼주(三州)ㆍ잠성(岑城).
성씨본현 이ㆍ최ㆍ황(黃)ㆍ태(太)ㆍ김ㆍ박 : 속(續).
산천 학봉산(鶴峯山) :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수룡산(首龍山) : 고을 동쪽에 있다.
장굴산(長屈山)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관음점(觀音岾)ㆍ압점(鴨岾) : 모두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인달암(因達巖) : 성거산(聖居山) 북쪽에 있다. 청석현(靑石縣) :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백계현(白界縣)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성거산 : 고을 남쪽 60리에 있는데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하고 또
평나산(平那山)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다섯 봉우리가 있고 그 봉우리마다 각각 작은 암자가 있어 오암(五菴)이
라고 부른다. 또 장단부(長湍府)편에 보인다.
○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성골 장군(聖骨將軍)이 부소산(扶蘇山) 오른쪽 골짜기에 살았
는데,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9명과 함께 평나산으로 매를 잡으러 갔다.
마침 날이 저물어 바윗구멍에서 자는데, 범이 와서 구멍 앞에 막아 서서 크게 소리지르니 10명이 서로 말하기를,
'범이 우리들을 잡아먹으려 하니 관(冠)을 벗어 던져서 범이 그 관을 웅키는 자가 밖으로 나가 당하게 하자.' 하
고 모두 관을 벗어 던졌는데 범이 성골의 관을 웅켰다.
성골이 나가서 범과 싸우려 하는데 범은 문득 보이지 않고 구멍이 무너지며 9명이 모두 나오지 못하였다.
성골이 돌아와서 평나군에 보고하여 와서 9명을 장사지내며 먼저 산신에 제사드렸는데, 그 신이 나타나서 말하
기를, '내가 과부로서 이 산을 맡아 왔었는데 다행히도 성골장군을 만나 부부가 되어 함께 신정청(神政請)을 다
스리려 하니 봉하여 이 산의 대왕(大王)이 되기를 청한다.' 하고 말을 마치자, 성골과 함께 숨어 보이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하여 성골을 대왕으로 봉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드리며, 9명이 함께 죽었으므로 산 이
름을 구룡(九龍)이라고 고쳤다." 하였다.
성골의 손자 보육(寶育)이 중이 되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수도하고 돌아와 이 산 북쪽 산협에 살았다.
○ 이색(李穡)의 시에, "부소산 동쪽에 산이 끝 없는데 여러 봉우리들 하늘에 솟아 석순(石筍)이 벌려 있네.
구룡산 둥글게 위로 솟아 형세가 높은데, 뒤의 것은 따르는 것 같고 앞의 것은 당기는 것 같구나.
성승(聖僧)의 남긴 자취 아직도 완연한데, 돌이 기울고 위태로워 떨어질 것만 같네. 절간[招提]은 임학(林壑)이
연기와 노을에 섞었고 정병(淨甁 중이 다닐 때 가지고 다니던 물병)과 석장(錫杖)은 세월이 오래니 푸른 버섯
[蒼菌] 쌓였네. 어느 때 긴 휘파람 불며 상봉에 올라가서, 만리의 푸른 하늘에 가을 매[隼]를 볼거나.
호경사(虎景祠 성골장군의 사당)에 분향 재배하고, 국록 먹고 직임을 수행하는 이 몸 불민(不敏)함을 사죄하네.
우러러 비노니 신의 위령(威靈)을 빌어 동해를 편안히 하기를, 조정이 지금 군색한 형세 보지 못하는가.
계속 진(陣)의 여러 장수들 전라도로 향하는데, 농사하는 백성을 누가 불쌍케 여겨주나. 농사는 한번 시기를 어
긋나면 백성은 살지 못하는 것, 생명이 가파른 언덕에서 떨어짐을 차마 볼 수 있으리오. 마땅히 좋은 계책으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다시 큰 바람 일으키고 세찬 비 휘몰아서 적의 배 쓸어서 동쪽으로 가게 하면 백성들 다
시는 깊은 시름하지 않으리. 여기서 예악(禮樂)으로 나라 다스리는 일 물으리니, 비파 타다 놓을 때에 부자(夫子)
의 웃는 것주D-001 어찌 알리.
○ 고승은 그날 풍진세상을 떠나고 용녀(龍女)가 서로 따른 일이 가장 신비하네. 천 길 산머리에 함께 자취를 붙
이고, 두 병물[二甁水] 속에 혼자 몸을 감추었네. 절간이 적적하니 연하(煙霞)가 오래였고, 인간 세상 유유하니
세월만 새로웠네. 그 중에는 바위 앞에서 범의 휘파람 들으니, 지금토록 봉력(鳳曆)주D-002이 천춘(千春)에 비
치네." 하였다.
○ 정총(鄭摠)의 시에, "좋은 날 절간 찾아 지팡이 짚고 푸른 산기슭 올라가네. 소나무 바람소리 세속의 나그네
귀를 깨워주고, 꽃 조각은 사람의 옷에 부딪치구나. 옛 굴(窟)은 전하여 들은 지 오래되었지만, 신령한 추(湫)는
찾아보는 이 드무네. 여기에 흥취 얕지 않으니, 산새는 돌아가라 재촉하지 말아라." 하였다.
영취산(靈鷲山) : 바로 현화사(玄和寺) 주봉(主峯)이다.
금신동(金神洞) : 동부(洞府)가 깊숙하고 수목이 울창한데 북쪽으로 현화사에 가고 서쪽으로 토령(土嶺)을 넘
는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벽려(薜荔) 넝쿨 깊고 깊고 잡목들도 섞였는데, 구름속으로 난 외길이 산허리로 돌았
구나. 수풀을 사이에 두고 지척 사이에서 들리는 시냇가의 말소리는, 두서너 상자중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누
나." 하였다.
오도령(悟道嶺) : 성거산에 있다.
박연(朴淵) : 천마ㆍ성거 두 산 사이에 있는데, 형상이 돌독[石甕] 같으며, 들여다보면 새까맣다. 반석(盤石)이
있어 한가운데 나왔는데, 섬바위라 한다. 물이 절벽으로 달려 흘러 성낸 폭포가 내려오는 것이 열 길은 되어 완
연히 흰 무지개가 공중에 비치는 것 같고, 나는 눈이 돌다리에 뿌리는 것 같다.
뇌성이 달리고 번개가 부딪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전설(傳說)에 옛날 박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피리를 못 위에서 부니 용녀(龍女)가 감동하여 데려다 남편을 삼
았으므로 박연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용랑(龍娘)이 피리에 감동하여 선생에게 시집가
니, 백년을 함께 즐겨 정도 흐뭇하리." 한 것이 이것이다. 그 어머니가 와서 울다가 못으로 떨어져 죽어서 그만
고모담(姑姆潭)이라고 이름하였다. 못 위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매양 영험이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곳에 와서 놀다가 도암(島巖) 위에 올라갔는데, 문득 풍우가 갑자기 일어나고
돌이 흔들리니 문종이 놀라고 두려워 하였다. 그때 이영간(李靈幹)이 호종(扈從)하였다가 글을 지어, 용의 죄목
을 들어 책망하며 못에 던지니 용이 곧 그 등을 들어내므로 매를 때리니 못물이 다 붉어졌다 한다.
못 위 양쪽 언덕에 석불(石佛)이 있는데, 동쪽의 것은 달달박박(怛怛朴朴)이라 하고, 서쪽의 것은 노혜부득(努𦕎
夫得)이라 한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위태롭고 높도다. 인달암(因達巖) 물이 북쪽으로 흐르는데, 나는 근원을 찾아 바위
위에 오르려네. 바위틈이 샘물을 마시니 샘물이 급한 여울되었고 여울물 구렁으로 부어 구름 사이에 떨어지네.
고여서 돌 추[石湫 깊은 연못]가 되니, 발우[鉢] 밑이 없는 듯 발우 가운데 반석이 뿌리가 박혔네. 사람들이 말
하기를 신물(神物)이 의탁한 곳이라는데, 많이 고여 맑고 깊어 석벽으로 내려 쏟네. 깎아지른 절벽 천길에 나는
폭포 달렸으니, 은하수가 푸른 하늘에서 오는 것 같구나. 공중에 울려 용의 소리 읊조림 같은데, 구슬을 방아찧
고 옥이 만길[萬丈]이나 떨어지네.
용이 응당 여의주 안고 그 속에 잠겼으리. 음침한 구렁엔 대낮에도 항상 구름과 연기로세. 일찍이 임금 행차 이
곳 지났단 말 들었으며 박진사 그 사람 숨어 살던 곳. 지금 그 이름은 기록에 전하지 않지만, 두 어진이(달달박박
과 노혜부득)의 어려운 일 기이한 전설이네. 누가 이 물의 흐르는 갈래 우리나라를 배반한다 하는가,
백리로 돌아 흘러 서쪽으로 강에 들어가네. 강 조수 들어올 때는 객이 주인에게 읍하고, 북쪽으로 갔던 인물들
예전과 같이 온다네. 가는 것도 한 때요 오는 것도 한 때, 태평성대 천년에 풍운을 기약하리."주D-003 하였다.
○ 이제현의 시에, "때는 봄철 산 기운 아름다운데, 골짜기의 새 소리 손님을 부르는 것 같구나.
그윽한 곳 찾으니 그리던 생각에 흐뭇하고, 좋은 경치 새로 얻은 것 기쁘구나.
침침한 옛 두 못은 가까이 가려니 마음이 아찔하네. 신물(神物)은 깊은 물 속에 숨고, 급한 물결 천 척이나 내려
떨어지네. 깊고도 맑아 구름 하늘에 내려 쏟고, 일렁거려 숲과 돌을 흔드네. 의(義)로 책망하니 채찍질도 달게
받고 신비로운 애정은 피릿소리 들은 것이 인연이네. 사귀어 감동하여 오는 것이니,
무어라 유명(幽明)주D-004이 다르다 하리.
바위 위의 꽃을 꺾어서 그것 가지고 맑은 술잔 권하네. 아름다운 혜택으로 가뭄이 없게 하소,
우리 백성들 보리 농사짓고 있네." 하였다.
○ 이색(李穡)의 노래에, "깎은 듯한 푸른 바위 천 자도 넘는데, 그 위에 작은 못 있어 거울처럼 맑네.
가운데 반석 있고 외로운 소나무 났다는데, 소나무는 지금 볼 수 없고 이끼 자국만 푸르구나.
천마산 북쪽 언덕 여러 골짜기의 물 흘러내려 여기 와서 나루터같이 되었네. 넘어서 아래로 떨어지니 은하수가
매달려, 뿌리는 거품 사면으로 흩어지니 큰 비 오는 것 같구나. 노는 사람 조금만 서 있어도 머리카락이 곤두서
는데, 돌에 부딪치는 은은한 소리는 용의 울음 같구나.
6월의 무더위도 감히 가까이 못하고, 땀흐르던 피부에 소름이 끼치어 만져 보게 되구나.
내 옛날 사왕사(四王寺)에 분향할 때, 낮 불공 여가에 이 산 언덕 올랐네. 흐르는 물에 다다라 미친 흥이 절로
나서, 바로 이태백(李太白)인양 짧은 노래 불렀네. 서응(徐凝) 쯤은 보잘것없다고 내려다보았더니 오늘날에 병
들 줄 뉘 알았으리. 누워서 때때로 지난 자취 생각나니, 지금 이런 고열(苦熱)을 어찌하면 좋으냐.
누가 나를 가져다 그 폭포 곁에 두어, 큰 물소리 귀에 들리고 앉아서 시원스레 달빛 보게 할거나."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산은 높고 언덕 골짜기 험한데, 아래 위에 신령스런 못이 깊구나. 나는 눈[雪]이 두 사이
에 뿌리니, 서늘한 기운이 옷깃을 스며드네. 흐르는 물에 임하여 앉아서 휘파람 부니,
이 내 몸 늘 육침(陸沈)주D-005한 것 부끄럽네. 또는 번개가 땅속[地脈]을 울리는데,
신물(神物)은 못 안에 숨었다네. 기이한 바위는 쌓여서 무쇠더미 같은 그 무성한 나무 빽빽히 수풀을 이루었네.
시를 써서 돌 위를 더럽히자니, 사람들이 기롱할까 두렵네.
소새(瀟洒)한 의조랑(儀曹郞 예조(禮曹))은 간절한 한결같은 단심(丹心)을 품었다네. 백성을 생각해도 힘이 미
치지 못하니, 강개(慷慨)히 슬프게 읊조리네. 백성들 바야흐로 성탕(成湯)의 큰 가뭄 만났는데, 네게 바라는 것
부열(傅說)의 장마를 만들어 주소."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박연도(朴淵圖) 시에, "여산폭포(廬山瀑浦) 절승함은, 천하에서 아는 것,
그러나 박연(朴淵)의 기이함만이야 하리. 깎아지른 철벽(鐵壁)은 천 길이나 웅장하고, 거꾸로 내려 쏟는 은하수
한 갈래 드리웠네.
십여 리 갠 공중에 나는 우박 어지럽고, 두 언덕 대낮에 성낸 우레가 달리네. 천마산(天磨山) 하룻밤에 산신령이
울 것이니, 모두 다 서생(書生)의 자리 곁에 옮겨졌기 때문이리."라고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공중에 비낀 푸르른 천만봉, 하나하나 모두가 금부용(金芙蓉)을 깎아 만들었네.
무쇠 독 깊은 데 맑은 유리 담은 듯, 멧부리엔 은하수 내려 붓네. 구슬이 뛰고 옥이 뿜어 물거품 따라 나오는데,
햇빛과 붉은 번개 번쩍 서로 부딪치네. 금고(琴高)주D-006와 함께 어룡(魚龍)을 타고서, 한번 웃고 저 폭포 속
에 헤엄치고 놀려네. 조물주는 기괴한 정기를 발설시켜, 뭇 아이들 좁은 마음과 눈을 깜짝 놀라게 하구나.
예전의 우물안 개구리 다시 자랑하리, 독 가운데 해계(醢鷄)주D-07 뒤엎으니 기쁘고도 통쾌하네.
내 평생에 내 눈만 믿고 남의 말 믿지 않으니, 여산(廬山)이 정말 이렇지는 못하리라. 그 옛날 임금 행차 지나던
곳, 고목과 푸른 등덩굴에 어디인지 알 길이 없네. 이에 저 나는 새 따라 끝없이 바라보는데, 옛날 일들 구름만
회상하니 유유(悠悠)하네. 가슴속에 시가 있으나 이 경치 써낼 수 없으니, 어찌하면 적선(謫仙 이태백)을 불러다
서로 놀아볼거나." 하였다.
저탄(猪灘) : 고을 서쪽 25리에 있는데 평산부(平山府)편에 자세하다.
합탄(蛤灘) : 고을 동쪽 30리에 있으니 바로 원중포의 상류이다.
원중포 : 고을 서쪽 25리에 있는데, 근원이 수룡산(首龍山)에서 시작하여 저탄과 합류한다.
오조천(吾早川) : 고을 서쪽 30리에 있는데 근원이 성거산(聖居山)에서 시작하여 저탄으로 흘러 들어간다.
언덕 위에 돌이 빙 둘러 병풍 같은데, 높이가 열 길이 넘으며 매우 기이하고 웅장하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오조(吾早)라는 시내 이름. 이 이름이 어디서 생겼나. 모래 밟으며 여윈 말로 건너니,
나무토막 작은 다리 가로 놓였네. 인가에서 길어다 먹을 물 풍족하고, 사신이 다니기에 편리하구나.
우봉(牛峯)이 원래 이 땅이리, 목동의 노래가 밤 깊도록 들리는구나." 하였다.
토산 청려석(靑礪石) : 경아점(景兒岾)에서 생산된다. 석이ㆍ벌꿀ㆍ인삼ㆍ잣[海松子]ㆍ
무쇠 : 관음산(觀音山)에서 생산된다.
신증 궁실(宮室)ㆍ객관(客館) : 한훈(韓訓)의 시에, "외로운 객관에 봄이 깊고 버들실 드리웠는데, 두 언덕에 청
산 8, 9집이 있네. 객사 난간에 게을리 누워 낮잠이 들었는데, 한 주렴[簾] 성긴 빗발에 배꽃이 떨어지네."
하였다.
○ 이의무(李宜茂)의 시에, "피곤한 몸 한가로이 가을 난간 위에 기대였는데, 공관(公館)이 쓸쓸하고 작은 동부
(洞府) 그윽하네. 십리 사이에 소나무ㆍ전나무 길을 따라 어울렸고, 두어 마을 인가들 산옆에서 조밀(稠密)하네.
세월이 가고 늙은 서리 귀밑에 달려드는데, 세상사 득실(得失)은 마침내 내 마음에 오지 못하네. 게다가 주인의
은근한 술을 드니, 마음과 술잔 주거니 받거니 다시 머무네." 하였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흥의역(興義驛) : 옛 이름은 임패(臨浿)이며, 영파(迎波)라고도 하는데 고을 서남쪽 30리에 있다.
고려조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이 거란 군사를 치고 개선하여 오는데, 왕이 친히 영파역에 나와 맞이하여
채붕(綵棚 임시로 만든 채색한 무대)을 만들어 놓고 풍악을 갖추어 장수와 군사들을 잔치하면서, 금화(金花) 여
덟 가지로 친히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고,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바른 손으로 술잔을 들어서 위로하니
강감찬이 절하며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례하였다.
그리고 역(驛) 이름을 고쳐 흥의(興義)라 하며, 역리(驛吏)들에게 관대(冠帶)를 하사하여 주현(州縣)의 이속들과
같이 대우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새벽 일찍 먼 길 떠나니, 돌아가는 흥을 걷잡을 수 없구나. 좁은 길에 자주 고개를 넘
고, 긴 다리[橋]로 여러 번 강을 건너네. 나그네 길 얼마나 다녔는지, 고향 생각에 눈물이 줄줄이 떨어지네.
말고삐를 산 아래 역에 멈추니, 석양에 작은 창에 이르렀네.
○ 오래 앉아 안장[鞍] 썩힐 겨를은 없고,주D-008 잠시 발 멈추고 웃으며 난간에 기대었네. 완상할 마음은 그지
없어 저버리기 어렵지만, 돌아갈 마음 바쁘니 어찌 늦추리.
이정표인 장승[里堠]은 사람을 맞이하여 옛 길에 섰고, 시냇가 다리 객을 보내며 앞 여울에 걸터 있네.
그대의 경치 사랑하여 시취(詩趣) 보태어, 필해(筆海)가 출렁거려 끝 간 데가 없는 것 사랑하네." 하였다.
○ 정총(鄭摠)의 시에, "풀 깔고 팔 베고 누운 곳에, 밤이 새니 꿈에 절로 놀라 깨네. 여울에 바람이 곁에서 치니
물소리 정히 급한데. 구름 속 달은 그림자 희미하네. 나라일 바쁘니 어머니 어이 모시리, 농사철이지만 군사 소
집 자주 있네. 먼 산에서 들려오는 저 두견새 소리, 외로운 객의 심사 어찌 하랴."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천리 먼 길 동쪽으로 나오니 말소리 다른데, 몇 번이고 입을 열려다 다시 우물쭈물하네.
백성들의 생활 옛부터 포목을 많이 사용하고, 토산물은 옛부터 금을 공납하지 않았네. 문사(文士)는 계교 많아
직책만을 지키고, 무인들은 은혜 생각하여 마음을 쉽게 바치네. 토끼메[兎山] 소재[牛嶺]에 비 개이자마자,
돼지 여울[猪灘] 건너니 어느 사이 또 석양이네. ○ 맑은 새벽에 시 쓰고 역루(驛樓)에 내려오니, 사산(四山)의
구름이 아직도 걷히지 않았네.
풀 머리[草頭]에서 잔 나그네 말을 달리려 하는데, 시냇가에서 사는 사람들 벌써 소죽을 먹이네.
달면령(達面嶺) 남쪽에 소나무 차츰 적어지고, 국청로(國靑路) 북쪽엔 밤나무도 많구나. 한 차례 더운 비 개고
나니, 가는 곳마다 훈풍(薰風)에 벌써 보리가을일세."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만 골짜기 구름과 연기에 덮여 산기슭 안 보이는데, 흩날리는 눈발이 객의 옷에 점점이
붙네. 반달 만에 봄이 바야흐로 왔는데, 어느 곳에서 버들개지가 공중에 가득히 나를꼬."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흥의(興義) 산 머리에 한 작은 정자, 전날 지날 때 올랐던 일 생각 나네. 뜰 앞에 닿은 풀
빛은 예전과 같이 푸르고, 자리 맞은 편의 산빛은 예나 다름 없이 푸르구나. 구름에 눌려 소나무가 나지막하니
잡아당길 수 있는데, 새 울자 꽃 떨어지니 차마 듣기 어렵네. 가는 나그네 길 재촉해 저탄수(猪灘水) 건너는데,
생각은 연하(煙霞) 따라 아득한 데로 들어가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 이 곳이 소메[牛峯]라, 예전에 석양 때에 잤었네. 멥쌀을 지나는 사신에게 바치는데,
농사 짓는 일 물을 겨를 없었네. 발이 묻히니 풀 속에서 조는 듯, 머리를 드니 소나무에 부딪칠 것 같은데.
허다한 전지들 넓기도 한데, 기름진 비에 봄빛이 정히 무르익네." 하였다.
잉읍천원(仍邑川院)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수정원(水精院) : 고을 북쪽 35리에 있다.
재차이원(濟次伊院)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부흥사(復興寺) : 고을 남쪽에 있다. ○ 오학린(吳學麟)의 시에, "세월이 바뀌니 사물[物]도 바뀌고, 일이
달라지니 사람도 달라지네. 학은 새해[年]의 새끼가 늘었고, 소나무는 지난해의 가지가 늙었구나.
원(院)마다 옛것인지 아닌지, 중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롭게 수각(水閣)에 올라서, 다시 한 번 옛날 쓴 시를
찾아보네."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길을 잃고 절간 찾아드니, 사람들 여기가 부흥사라고 하네.
푸른 소나무에 학만이 보이고, 대낮에 중은 만날 수 없네. 옛 벽엔 금부처 모셔있고, 빈 들보에 옥 등잔이 밝구
나. 앞 난간이 자못 깨끗하니, 지나는 나그네 혼자 와서 기대 섰네." 하였다.
영감사(靈鑑寺)ㆍ원달사(元達寺)ㆍ운암사(雲菴寺)ㆍ윤필사(潤筆寺)ㆍ인달사(因達寺)ㆍ의상암(義相菴)ㆍ
수정사(水精寺)ㆍ안적사(安寂寺) :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현화사(玄化寺) : 영취봉(靈鷲峯)의 아래에 있는데, 주저(周佇)가 비문 지은 비가 있다.
○ 고려조 충숙왕(忠肅王)의 시에, "만기(萬機 임금의 직무)가 밀려 날마다 바쁘니, 도리어 높은 중 누더기 옷
걸치고 조는 것 부럽구나. 소나무 가지에서 난간에 비친 달은 금이 부서지는 듯, 꽃가지 밖에 섬돌에 떨어지는
샘물은 옥을 방아찧는 듯. 서운(瑞雲)이 자욱한데 어느 곳이냐, 흐르는 물 굽이쳐 도는 곳에 별천지가 있네.
한 점의 홍진(紅塵)도 날아서 이르지 못하는데, 다만 노을[霞]이 가사(袈裟)처럼 중의 어깨에 걸쳐지네."
하였다.
수정굴(水精窟) : 성거산에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수정 정사(精舍) 깨끗하여 티끌 없는데, 폐지된 것을 중흥하니 새로 창설한 것 같구나.
푸른 담장이 자색 등덩굴이 가는 길[細道] 따라 얽혔는데, 푸른 이끼 흰 돌은 꽃다운 자리를 끼고 있네."
하였다.
개성사(開聖寺) : 성거산에 있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백 걸음에 아홉 번 꺾인 길로 높은 데 올라가니, 집이 반쯤 공중에 있는데 두어 칸
뿐이네. 신령한 샘이 많고 맑은데 찬물이 떨어지고, 옛 벽이 암담(暗淡)한데 푸른 이끼가 아롱지네.
돌 머리에 소나무 늙었는데 한 조각 달이요, 하늘 끝에 구름이 나지막한데 어느 곳의 산인가.
홍진(紅塵)의 만사(萬事)가 여기는 못 오고 그윽한 사람 혼자서 긴 세월에 한가하구나." 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옛 절간 평대(平臺) 위요, 처량한 바람에 잎사귀 떨어질 때이네. 인정은 구름 기운에 엉
겨 엷어가는데, 마음은 저문 구름과 함께 더디어 지구나. 그늘진 곳엔 용의 소[湫 깊은 연못]가 검푸르고,
높은 바위에 부처님 자리 위태롭네. 석장(錫杖)이 어디서 날아 왔던고, 비석 부러졌으니 수심 절로 나네."
하였다.
문수사(文殊寺) : 성거산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산의 연원이 멀기도 하다.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하여 꾸불꾸불 천여 리를 오고, 동
해를 따라 남쪽으로 뻗어 오기를 또 천리에 멈추어져 제일 높은 곳을 화악(華岳)이라고 하며, 남쪽으로 수백 리
를 내려오다가 우뚝 솟은 것을 성거(聖居)라고 한다. 산중에는 절이 많은데 높고 험준하며 기후가 차서 겨울철
에 거처하기 어려우며 산허리 아래는 대개 그리 높지 않은데, 문수사가 모두 차지하였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앞에 모여서 여름에 비가 올 때면 물소리가 뇌성같이 수풀을 뒤흔들며, 얼음이 얼 때에는 깨
고 물을 마시니 떠올리기도 쉬웠다.
절이 불타서 황폐한 지 오래였는데, 중 모(某)가 중건하려고 나에게 글을 청한다. 내 일찍부터 산에 놀러 갈 생각
이 있었으나 병들어 일어날 수 없으니, 비록 전일의 소원을 이루려 하나 하늘이 허락할지 모르겠다.
만일 하늘이 나에게 복을 내려 지팡이를 짚고 가든지, 혹은 남녀(藍輿)에 실려 놀면서 천 길 산 위에서 옷을 떨치
고 퉁소를 불며 만리를 아래로 굽어본다면 어찌 나의 답답한 회포에 위로가 되지 않으랴." 하였다.
원통사(元通寺) : 성거산에 있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보전(寶殿)이 바람 앞에 섰으니 봉(鳳)새가 날으려는 듯, 그 중에도 가장 잊기 어려
운 곳 서쪽 난간이라네. 새벽이 아직 아닌데도 동쪽이 환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먼저 북쪽 고개의 침침함을 차
지하네.
길이 험하니 다시 돌층계 올라가는 것이 근심되고, 샘물이 다[甘]니 소나무 뿌리에서 긷는 것[汲] 그 아니
좋은가. 땅 신령이 사람을 머물게 하려는 듯, 짐짓 연하(煙霞)를 일으켜서 동구를 잠그는구나." 하였다.
길상사(吉祥寺) : 성거산 북쪽에 있다. 앞에 흐르는 샘물이 있고, 모여서 못이 되는데 물이 맑고 마르지 않는다.
금신사(金神寺) : 성거산 남쪽에 있는데, 산 위에 도솔(兜率)ㆍ보월(寶月)ㆍ장춘(長春) 등의 암자가 있다.
절에 금부처 하나가 있는데, 존자(尊者)라 칭하며 옛날부터 영험이 있다 하여 오는데, 지금도 송도(松都) 사녀
(士女)들의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는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푸른 덩굴 휘어 잡으며 산꼭대기에 오르니, 불전(佛殿)이 공중에 걸쳐 있네.
부처가 오래였으니 존자라 부르고, 산이 신령스러우니 성거(聖居)라 이름했네. 종소리는 산 밖에 떨어지고, 솔
그림자는 달 아래 성기네[疏]. 가장 사랑하노니, 좌선(坐禪)하는 편안함이라, 그 마음 태연하리.
○ 금신 동부(金神洞府)가 깊고도 깊은데, 때로 노승이 혼자 찾아드는 나를 맞아주네.
사슴ㆍ사향노루 편히 조는데 풀은 짜놓은 것 같고, 박쥐떼들 어지러이 나니 산이 음침하구나.
돌이 바위 샘물 부딪히니 옥덩이가 부서지고,
바람이 칡덩굴 사이 달에 부니 황금이 흩어지네. 새벽에 이 마음 깨달으려 종소리 듣고 앉으니,
소릉(少陵)이 당년에 이 마음 알았구나."주D-009 하였다.
운거사(雲居寺) : 박연(朴淵) 아래 있다. 원명사(元明寺) : 대둔산(大芚山)에 있다.
용두사(龍頭寺) : 학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구룡산사(九龍山寺) : 함유일(咸有一)이 구룡산사가 가장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서 사당에 가서 신상(神像)을
활로 쏘자 회오리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자 양쪽 문을 닫아 그 화살을 막았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총묘 이제현(李齊賢)의 묘소 : 고을 남쪽 도리촌(桃李村)에 있다.
고적 중미정(衆美亭) : 고려조의 의종(毅宗)이 지었다. 정자 남쪽 시내에 흙과 돌을 쌓아 저수하고, 언덕 위에는
모정(茅亭)을 지었는데, 오리 기러기 갈대숲의 풍경이 완연히 강호(江湖)와 같았다. 배를 그 가운데 띄우고 소년
을 시켜 배 젓는 노래, 고기잡는 노래를 부르게 하면서 마음대로 놀았다.
일찍이 금신굴(金身窟)에서 현화사(玄化寺)로 돌아오다가 이공승(李公升)ㆍ허홍재(許洪材)ㆍ중 각예(覺倪) 등
과 함께 배를 띄우고 취하도록 마시며 밤이 되도록 놀았다.
홍화사(弘化寺) : 고려조 명종(明宗) 때에 이 절의 중이 귀법사(歸法寺) 등 중의 2천여 명과 함께 성 동문으로 침
범하여 이의방(李義方)을 베이려 하다가 도리어 쫓겼기 때문에 절도 불에 탔다.
우현소(牛峴所) :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백계현 고성(白界峴古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4백 63척이요, 높이 26척인데 서북쪽이 무너졌다.
인물고려 이자성(李子晟) : 천성이 강렬(剛烈)하고 용력이 있으며 활을 잘쏘아서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다.
동경(東京 경주)을 평정한 후로 장사들이 날마다 그 집에 모여드니, 권귀(權貴)들의 시기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하고 문을 닫았더니, 사람들이 기미를 안다고 하였다. 벼슬이 문하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의열
(義烈)이다. 본조 이길배(李吉培) :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본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유우본조 권근(權近) : 일찍이 사사로이 명나라 예부(禮部)에 보내는 자문(咨文)을 뜯어 본 일과 이숭인(李崇仁)
의 죄를 변명한 죄로 하여, 간관(諫官)이 윗사람을 속인 죄로 탄핵하여 이 고을에 유배되었다.
열녀본조 황씨(黃氏) : 남편인 은율(殷栗) 현감 이계간(李繼幹)이 죽으니, 3년상 중에 아침 저녁으로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상식하고, 복제(服制)가 끝난 다음에도 초하루 보름전을 올리는 일을 폐하지 않았다.
사적이 보고되어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제영 우뚝우뚝 뭇 봉우리 모였네 : 이행의 시에, "작은 고을이 산비탈에 걸려 있는데, 우뚝우뚝 뭇 봉우리 모였네."
하였다 산간 사람들 매[鷹]를 많이 기른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산간 사람들 매를 많이 기르는데,
서로 부르며 산 언덕 올라가누나. 돌아와서는 마주앉아 술 드는데, 집마다 멧 짐승[貆] 매달아 있네." 하였다
해질녘이면 집마다 일찍 문닫네 :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소나무 전나무 총총히 들어서 사면이 어두운데,
만 겹 산 위에 만 겹 구름이네, 골짜기 안에 가득 바람 일자 호랑이 휘파람치니, 해질녘이면 집마다 일찍 문닫네."
하였다.
산 기슭 저 안에 인가가 가까워진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산기슭 저 안에 인가가 가까워지는데,
소나무 바람 부는 소리 시냇물 같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효종(孝宗) 2년에 강음현(江陰縣)과 합하여 금천군으로 승격시켰는데,
읍을 오조천(吾早川) 남쪽에 세웠다. 숙종 4년에 치소(治所)를 저탄(猪灘) 남쪽에 옮겼다가.
영조 29년에 다시 오조천 남쪽으로 옮겼다 : 지금은 구금천(舊金川) 이라 하는데, 북쪽으로 지금의 치소와 30리
거리다. 후에 또 저탄 남쪽으로 옮겼다 : 우봉(牛峯)의 옛 치소는 동북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다.
방면 군내(郡內) : 끝이 10리이다. 현내(縣內) : 동북쪽으로 20리이다. 합탄(蛤灘) : 동북쪽으로 40리이다.
귀이동(貴耳洞) : 동쪽으로 30리이다. 백빈(白蘋) : 북쪽으로 30리이다. 호현(好賢) : 북쪽으로 50리이다.
오조천(吾早川) : 남쪽으로 30리이다. 도화곡(桃花谷) : 북쪽으로 60리이다.
구수산(九水山) : 동쪽으로 50리이다.
강북(江北) : 서쪽으로 30리이다. 강동(江東) : 남쪽으로 15리이다. 강서 : 서쪽으로 35리이다.
감남 : 남쪽으로 30리이다. 산외(山外) : 서쪽으로 50리이다. 위의 5면은 강음현 땅이다.
○ 대남면(大南面)ㆍ소남면은 강음현의 남쪽으로 30리다. 순조 계미년에 분리하여 개성에 소속시켰다.
○ 식점처(食岾處)ㆍ우현소(牛峴所)는 우봉(牛峯) 남쪽 45리이다.
성지 광성(廣城) : 북정산(北鼎山)에 있는데, 둘레가 5리이다. 평산(平山)에서 토산(免山)의 큰 거리로 통한다.
고성(古城) : 곧 고성산(古城山)에 남은 터가 있다. 신라 효소왕(孝昭王) 3년에 우잠성(牛岑城)을 쌓았다.
창고 읍창, 우봉창(牛峯倉) : 옛 우봉에 있다. 산성창(山城倉) : 대흥산성(大興山城)에 있다.
역참 옥지역(玉池驛) : 위의 역은 강음현에 관계된다.
안신역(安信驛)ㆍ백원역(白原驛) : 위의 두 역은 우봉에 관계된다. 철폐 병전기참(餠廛岐站)ㆍ관문참(官門站)
목장혁폐 강음장(江陰場) : 고려 때 설치하였다가 본조에서 폐지하였다.
진묘 저탄진(猪灘津) : 서북쪽으로 5리 지점에 있는데 평산 대로로 통한다. 겨울에는 다리로, 여름에는 배로
건넌다.
마탄진(馬灘津) : 서남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는데, 조읍포(助邑浦)로 통하는 샛길이다.
조읍포진 : 서남쪽으로 22리 지점에 있다. 동남쪽으로 개성으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배천으로 통하며,
서쪽으로는 해주로 통하고 서북쪽으로는 재령(載寧)으로 통하는데, 일방(一方)으로 요충지가 된다.
토산 송심(松蕈)ㆍ비석ㆍ석회ㆍ위어ㆍ이어ㆍ수달(水獺)
사원 민충사(愍忠祠) : 숙종 갑술년에 세우고 임진년에 사액하였다.
이중로(李重老) : 자는 진지(鎭之)요, 호는 송재(松齋)이며 청해(靑海) 사람이다.
벼슬은 훈련도정청흥군(訓練都正靑興君)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성부(李聖符) : 자는 존중(存中)이며, 본관은 전주, 벼슬은 훈련도정 우방어사(右防禦使)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박영신(朴榮臣) : 자는 인보(仁輔)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풍천 부사로서 기탄(岐灘)을 지켰고,
벼슬은 오위장(五衛將)이며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사주(李師朱) : 본관은 전주이며 부체찰사군관(副軆察使軍官)이다. 벼슬은 이천부사 우방어사
(伊川府使右防禦使)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윤정준(尹廷俊) : 자는 수백(秀伯)이고,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인조 정묘년에 옹진(瓮津) 부사로서 전사하였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권호원(權浩源) : 벼슬은 훈국초관(訓局哨官)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장면(張緬) : 본관은 덕수인데, 벼슬은 훈국초관이며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방흡(方潝) : 벼슬은 판관우방어사 군관(判官右防禦使軍官)이다. 이상은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 때 전사하였다.
[주 D-001] 비파 타다 놓을 때에 부자(夫子)의 웃는 것 :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기 너의 뜻을 말하라." 하니,
자로(子路)가 얼른 대답하기를, "천승(千乘)의 나라가 전란을 당하고 흉년을 만났으면 제가 그 나라를 맡아 다스
리면 3년 만에 용맹도 있게 하고 또 도리를 알게 하겠습니다." 하니 공자는 빙그레 웃었다. 증점(曾點)이 비파를
타다가 놓고 자기의 뜻을 말하고 나서, "부자(夫子)께서 왜 유(由 : 자로(子路))의 말에는 웃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예(禮)로써 하는 것인데 유(由)는 그 말을 사양하지 않으므로 웃었노라."
하였다.
[주 D-002] 봉력(鳳曆) : 옛적 소호씨(少皥氏) 때에 봉이 마침 이르렀기 때문에 봉으로써 관명(官名)을 하여 역
서(曆書) 맡은 관직을 봉조씨(鳳鳥氏)라 하였다. 여기서는 나라의 연대를 말한 것이다.
[주 D-003] 태평성대 천년에 풍운을 기약하리." : 《주역》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어진 임금을 만나는 것을 말하였다.
[주 D-004] 유명(幽明) : 명(明)은 사람을 말하고 유(幽)는 용녀를 말한 것이다.
[주 D-005] 육침(陸沈) : 물이 아닌 육지에서 잠겼다는 말인데, 세상에 발용하지 못하고 파묻혀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 D-006] 금고(琴高) : 금고(琴高)는 잉어[鯉魚]를 타고 신선이 되어 갔다.
[주 D-07] 해계(醢鷄) : 혜계는 술독 위에 뜨는 벌레다.
[주 D-008] 오래 앉아 안장[鞍] 썩힐 겨를은 없고, : 진(晉)나라 왕질(王質)이 나무하러 깊은 산에 들어갔다가
신선을 만나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동안에 백여 년이 되어 옆에 놓아 두었던 도끼자루가 썩어 있다는 이야기
를 여기에서 인용하였다.
[주 D-009] 소릉(少陵)이 당년에 이 마음 알았구나." : 두보(杜甫)가 절에서 지은 시에, "종소리 듣고 깊은 반성
발하네[聞鐘發深省]" 하였다. 두보를 소릉(少陵)이라 한다.
문화현 文化縣
동으로 안악군(安岳郡) 경계까지 23리, 신천군(信川郡) 경계까지 25리, 남으로 송화현(松禾縣) 경계까지 26리,
서쪽으로 은율현(殷栗縣) 경계까지 33리, 북쪽으로 장련현(長連縣) 경계까지 2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2리다. 신증 동쪽으로 안악군 경계까지 19리, 남쪽으로 신천군 경계까지 13리,
서쪽으로 송화현 경계까지 47리, 은율현 경계까지 40리, 북쪽으로 장련현 경계까지 42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7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궐구현(闕口縣)이다. 고려조에서 유주(儒州)로 고쳤는데,
현종(顯宗) 때에는 풍주(豐州)에 속하였으며, 예종(睿宗) 때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때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유경(柳璥)의 고향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訓導) : 각 1명.
신증 금상 15년에, 구읍(舊邑)에 역질이 많으므로 지금의 읍으로 옮겼는데,
북쪽으로 구읍과의 거리가 13리이다.
군명 궐구ㆍ유주ㆍ시령(始寧)ㆍ문성(文城).
성씨본현 유(柳)ㆍ오(吳)ㆍ강(康)ㆍ노(盧)ㆍ구(仇)ㆍ나(羅)ㆍ표(表)ㆍ임(任)ㆍ영호(令狐).
김 : 속(續). 이 : 대흥(大興). 최 : 이주해 왔다.
산천 구월산(九月山) : 고을 서쪽 10리에 있으니 바로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다른 이름은 궁홀(弓忽)이요,
또 다른 이름은 증산(甑山), 삼위(三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또 백악(白岳)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이 산이다.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단군이 이내 당장경(唐藏京)으로 옮겼으며, 후에 다시 이
산으로 와서 숨어,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한다. 또 장련현 및 은율현 편에 보인다.
전산(錢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가을산(加乙山) : 장장평(莊莊坪) 동쪽에 있는데 옛날 백령진(白翎鎭)이 이 곳에 임시로 와서 있었다.
용산(龍山)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구라산(仇羅山) : 고을 남쪽 22리에 있다.
건지산(乾止山)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신증 고을 북쪽 4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정자천(亭子川) :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궁촌온천(弓村溫泉) : 고을 남쪽 15리에 있는데, 물이 돌 사이에서 나며 매우 맑다.
종달온천(終達溫泉)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토산 실ㆍ삼[麻]ㆍ잣ㆍ송이.
누정 어풍루(馭風樓) : 객사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신증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연양역(延陽驛) : 고을 안에 있다.
불우 사왕사(四王寺) : 성수(星宿)에 초제(醮祭)주D-001 하는 옛 단이 있다. 월정사(月精寺)ㆍ 각명사(覺明寺)ㆍ
패엽사(貝葉寺)ㆍ연대사(蓮臺寺)ㆍ화장사(華藏寺)ㆍ안양사(安養寺)ㆍ묘각사(妙覺寺)ㆍ운계사(雲溪寺)ㆍ
흥률사(興栗寺)ㆍ활복사(活福寺)ㆍ청석사(靑石寺)ㆍ수월사(水月寺)ㆍ금강사(金剛寺)ㆍ미타사(彌陁寺)ㆍ
선암사(仙菴寺)ㆍ묘선굴(妙仙窟)ㆍ도솔암(兜率菴)ㆍ달마암(達摩菴)ㆍ계조암(繼祖菴)ㆍ인우암(印又菴)ㆍ
남명암(南明菴)ㆍ은적암(隱寂菴)ㆍ동일암(東日菴) : 모두 구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신증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신증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삼성사(三聖祠) : 구월산 성당리(聖堂里)에 있으니 바로 환인(桓因)ㆍ환웅(桓雄) 단군의 사당이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 제사드리며, 또 비가 심한 때와 가물 때 기도하면 문득 감응한다.
전산사(錢山祠) : 매년 봄ㆍ가을 및 겨울 10월에 향축을 내려 보내어 제사드린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장장평(莊莊坪) : 고을 동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장장평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당장경(唐藏京)의 와전이다.
인물고려 유거달(柳車達) :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에 유차달이 거마(車馬)를 많이 내어 군량길을 통하였다
하여, 그 공으로 대승(大丞) 벼슬을 봉하고,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주었다.
유효금(柳孝金) : 유거달의 아들이다. 일찍이 구월산에 유람하다가 길에서 큰 범이 앞을 막으며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리는데, 흰 물건이 입 안에 가로 걸렸다. 유효금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해치지 않으면 내가 꺼내 주겠
다." 하니, 범이 머리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시늉을 하므로 곧 꺼내니 그것은 은비녀였다.
그날 밤에 범이 와서 이르기를, "나는 산의 정령(精靈)이다. 어제 성당리(聖堂里)에 가서 어떤 여인을 잡아 먹다
가 물건이 목에 걸려서 매우 괴로웠는데 공이 나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공의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 하였다. 그 후에 유효금의 벼슬이 좌윤(左尹)에 이르렀다.
유공권(柳公權) : 유효금의 5세손이다. 을과(乙科)에 둘째로 뽑혔으며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 대학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택(柳澤) : 유공권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한람학사 승지에 이르렀다.
유경(柳璥) : 유택의 아들이다. 고종(高宗)조에 급제하고, 김준(金俊) 등과 함께 최의(崔竩)를 주벌하고서, 정권
을 왕실에 돌렸다.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세 번 문과 시험을 맡아보
았는데 뽑은 사람은 모두 명망있는 인사들이다.
이존비(李尊庇)ㆍ이혼(李混)이 모두 그의 문생(門生)이다. 유승(柳陞) : 유경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관직에 있으면서 게으르지 않으며 술마시고 방탕스럽게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풍악ㆍ
여색이나 재물에 담백하였다.
탄자[彈丸]를 잘 쏘아서 반드시 명중하였는데 한 번은 손님과 같이 앉아 있다가 멀리 물 긷는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오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사람을 맞히면 상하고, 그릇을 맞히면 깨어지겠으니 탄자를 동이 가운데 떨어
지게 하여야겠다." 하면서, 탄자를 쏘았는데, 과연 그대로 되었다.
벼슬이 첨의찬리(僉議贊理)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신(貞愼)이다.
유돈(柳墩) : 유승의 아들이다. 과거에 뽑혀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본조 유정원(柳廷願) : 유돈의 손자이다.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유량(柳亮) : 유거달의 후손이다.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유관(柳觀) : 유거달의 후손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사눌(柳思訥) : 두 번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속(文肅)이다.
유계문(柳季聞) : 유관의 아들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안숙(安肅)이다.
유권(柳睠) : 유계문의 아들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다.
신증 유질(柳輊)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조 판서체 이르렀다.
유정수(柳貞秀)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유빈(柳濱)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유순(柳洵) : 글을 잘하여 일찍 과거에 합격하였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유담년(柳聃年) :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무(襄武)다.
신증효자본조 박선강(朴善橿) :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효도로 섬겼으며, 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또 어머니를 위하여 추후로 상복을 입었다. 금상 12년에 정문을 세웠다.
유씨(柳氏) : 나이 14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직접 전(奠)을 드렸다.
어머니가 또 악질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서 불태워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13년에 정문을 세웠다.
이권(李權) : 부모를 정성을 다하여 섬겼으며 상을 당하자,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손수 제수를 만들어 드리며,
쌀과 채소, 과일을 먹지 않았다. 금상 21년에 요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시종(時種) : 사노비이다. 아버지가 악질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잘라 술에 섞어 드리니 병이 마침내 나았다.
금상 21년에 정문을 지어 표창하였다.
제영 시내와 산은 예전 그대로 맑고 기이하네 : 이초(李椒)의 시에, "사람의 일이란 기한이 있어 서로 오고 가지
만, 시내와 산은 옛 그대로 맑고 기이하네." 하였다.
하늘가에 구름 걷히니 월악(月岳)이 기이하구나 : 김처례(金處禮)의 시에, "시냇가에 해가 지니 증천(甑泉)이
따스하고, 하늘가에 구름 걷히니 월악이 기이하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중종 15년에 건지산(乾止山) 남쪽에 옮겨 다스렸다 : 옛 도읍지는 북쪽으로 13리에 있다.
당저(當宁) 2년 : 신해년에 강등시켰고, 현감(縣監) 11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은 10리이다. 서부(西部) :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갈산(葛山) : 동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초천(草川)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용진(用珍)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초리(草里) : 서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흥왕(興往) : 서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궁촌(弓村) :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방죽동(方竹洞)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북창(北倉)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35리에 있다.
토산 잣[海松子]ㆍ송이버섯[松蕈].
묘전 환인(桓因)ㆍ환웅(桓雄) : 환인의 서자(庶子)로서 속호(俗號)는 곤시씨(坤市氏)이다.
단군(檀君) : 책 머리에 자세하고 후손은 갈라져서 동북쪽으로 부여(扶餘)가 되고, 그 연대(年代)는 반고씨세기
(盤古氏世紀)에 있는 듯하다.
사원 봉강서원(鳳岡書院) : 효종 병신년에 세웠고, 숙종(肅宗) 을묘(乙卯)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 : 모두 문묘(文廟)에 보인다.
정계서원(程溪書院) : 현종(顯宗) 경술년(庚戌年)에 세웠다가 숙종 무자년(戊子年)에 사액하였다.
유관(柳寬) : 자는 경구(敬久)고, 호는 하정(夏亭)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벼슬은 우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 D-001] 초제(醮祭) : 도가(道家)에 옥황(玉皇)이나 별[星宿]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초(醮)라 한다.
토산현 免山縣
동쪽으로 경기도 삭녕군(朔寧郡) 경계까지 16리, 남쪽으로 같은 고을 경계까지 24리,
서쪽으로 우봉현(牛峯縣) 경계까지 33리, 신계현(新溪縣) 경계까지 69리,
북쪽으로 강원도 안협현(安峽縣) 경계까지 19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조에 장단현(長湍縣)에 속하여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할하였으며,
후에 옮겨서 개성(開城)에 속하였고, 예종(睿宗) 조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거하여 감무를 현감으로 하고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오사함달ㆍ월성(月城)
성씨본현 호(胡)ㆍ황보(皇甫)ㆍ김ㆍ몽(蒙)ㆍ길(吉)ㆍ정(程)ㆍ노(盧)ㆍ안(安)ㆍ형(邢)ㆍ윤ㆍ허ㆍ박ㆍ고ㆍ최ㆍ
이ㆍ임(林)ㆍ백ㆍ배ㆍ왕ㆍ남ㆍ하(河). 맹(孟) : 속(續).
산천 토산(免山) :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관문산(觀門山) : 고을 북쪽 7리에 있다.
두모산(豆毛山) : 고을 남쪽에 있다. 화산(花山) : 고을 동남쪽 2리에 있다.
학봉산(鶴峯山) :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정산(碇山)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부압산(浮鴨山)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동대천(東大川) : 고을 동쪽 2리에 있으니 바로 강원도 안협현 포리진(浦里津)의 하류이다.
고을 북쪽에 와서 북포(北浦)가 되고, 경기도의 삭녕(朔寧)ㆍ마전(麻田)ㆍ적성(績城) 등지를 경유하여 장단부
(長端府)에 와서 임진(臨津) 나루가 된다.
비라천(非羅川) : 고을 서쪽 30리에 있으니, 우봉현 원중포(源中浦)의 하류이다.
남천(南川) :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북포(北浦)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장포(長浦)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두모산에서 나와서 동대천으로 들어간다.
토산 인삼ㆍ벌꿀ㆍ수정석(水精石) : 고을 남쪽 주화리(注火里)에서 생산된다. 칠(漆)ㆍ자초(紫草).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원우 이두등원(梨豆等院)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석곶원(石串院) :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불우 석두사(石頭寺)ㆍ금계사(金鷄寺)ㆍ석양사(夕陽寺)ㆍ상운사(上雲寺)ㆍ문수암(文殊菴) :
모두 학봉산(鶴峯山)에 있다.
○ 중 탄연(坦然)의 시에, "한 방이 어찌도 이리 고요하나, 온갖 인연 함께 고요하네. 길은 돌틈을 뚫어 통했고,
샘물은 바위 틈을 통해 떨어지네. 밝은 달은 처마에 걸리고, 서늘한 바람 임학(林壑)을 움직이구나.
누가 있어 저 스님 따라 맑게 앉아서 진락(眞樂)을 배우나." 하였다.
대사(大寺) : 토산(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인물고려 김부윤(金富允) : 충렬왕(忠烈王)이 세자로 있을 때에 원(元) 나라에 가는데, 김부윤이 따라가서 비록
험난한 일을 만나서도 절개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원 나라 세조(世祖)가 그 이름을 알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관직에 제수하였다. 후에 찬성사(贊成事)로 마쳤다.
제영 멧부리 높이 솟아 사면을 둘렀다 :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멧부리 높이 솟아 사면을 둘렀는데,
날으는 샘물[飛泉] 한 갈래가 푸른 뱀처럼 달리네. 문득 들으니 닭ㆍ개소리 안개 구름 저 너머로 사는데 울타리
사이 봄바람에 산 살구꽃 피었네." 하였다.
산전(山田)이 평평하고 넓은 것 적다 : 신천(辛蕆)의 시에, "산전이 평평하고 넓은 것
적으니, 칼로 파고 파서 진흙 만드네. 가을 바람이 수풀 사이에 들면, 기장ㆍ조가 산비탈에 드리워진다네."
하였다.
동강(東江) 연기ㆍ안개에 인가가 보이지 않네 : 배중륜(裵仲倫)의 시에, "객사(客舍) 맑은 아침에 좋은 경치도
많은데, 동강 연기ㆍ안개에 인가가 보이지 않네. 뜰안에 가득 누른 잎이 가을 생각을 산란하게 하는데,
봄빛 아직도 사계화(四季花)에 남아 있네." 하였다.
오정을 알리는 닭의 소리 언덕 건너 집에서 들리구나 : 조계생(趙啓生)의 시에, "작은 난간 남쪽 북쪽에 나무
그늘도 많은데, 오정을 알리는 닭의 소리 언덕 건너 집에서 들리누나.
다행히도 공사(公事) 한가해서 조용히 앉았는데, 뜰에 가득한 산비(山雨)에 석류화 비치네." 하였다.
인가는 절반이나 수풀 속에 감추어졌네 : 선형(宣炯)의 시에, "작은 고을이 기슭을 의지했는데,
인가는 반이나 수풀 속에 감추어졌네." 하였다.
산이 높으니 소나무ㆍ도토리나무 무성하네 : 이행의 시에, "산이 높으니 소나무ㆍ도토리나무 무성하고, 골짜기
깊으니 여우ㆍ토끼도 많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文獻備考)》
다치(多峙) : 동쪽으로 끝은 10리이다. 우인(寓人)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석적(石積)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천동(泉洞)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서가동(西加洞) : 서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미원동(未原洞) : 서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65리이다.
유촌(柳村)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외현(外縣) : 서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서창(西倉) : 서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생선현(生鮮峴) 아래에 있다.
진묘 동진(東津) : 동쪽으로 2리에 있으며, 삭녕(朔寧)과 통한다.
토산 송이버섯[松蕈]ㆍ신감채(辛甘菜).
장련현 長連縣
동쪽으로 안악군(安岳郡) 경계까지 13리, 남쪽으로 문화현 경계까지 27리,
서쪽으로 은율현(殷栗縣) 경계까지 21리,
북쪽으로 해안까지 16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0리이다.
건치연혁 장명진(長命鎭)은 원래 황주(黃州)에 속하고, 연풍장(連豐莊)은 원래 안악에 속하였는데,
공양왕(恭讓王) 2년에 처음으로 장면ㆍ연풍을 겸임하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5년에는 장면진을 혁파하고, 연풍에 속하게 하였으며 태종 14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縣監)
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장명 : 지금 읍이다. 연풍.
성씨장명 송ㆍ노ㆍ이ㆍ강(康)ㆍ김ㆍ양(楊)ㆍ최ㆍ방(方)ㆍ한(韓)ㆍ서ㆍ정(鄭)ㆍ백ㆍ박ㆍ오 : 모두 속(續).
연풍 이ㆍ김ㆍ임(任)ㆍ조(曹) : 모두 속(續).
산천 봉황산(鳳凰山) : 고을 북쪽 5리에 있는 진산이다.
구월산 : 고을 남쪽 10리에 있는데, 자세한 것은 문화현 편에
보인다. 소금산(小金山)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바다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아사진 송곶(阿斯津松串)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대곶(碓串 방아곶이)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질법포(叱法浦) :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소금 가마(盬釜)가 있다.
당도(堂島) : 고을 동쪽 10리에 있는데, 소금 가마가 있다.
수삼파(水三派) :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구월산 중턱에서 세 줄기의 물이 각각 다른 골짜기에서 나오니 부연
(釜淵), 마연(馬淵), 요연(腰淵)이라 하는데, 합류하여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석담(石潭) : 구월산 중턱에 있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기를, 신룡(神龍)이 돌을 파서 못을 만들었다 하는데,
네모지고 넓이가 6척이며 물 깊이를 알 수 없다. 가물거나 장마가 나도 언제나 한결같다.
토산 석철(石鐵) : 소금산에서 생산된다. 죽합(竹蛤)ㆍ미역ㆍ정분(丁粉) : 방아곶에서 생산된다.
자초(紫草)ㆍ송이ㆍ어표(魚鰾)ㆍ은구어(銀口魚)ㆍ숭어ㆍ복(鰒).
신증관방 대진관(大津關)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가정(嘉靖) 계미년(중종 18년)에 설치하였는데,
본도 사람으로 권관(權管)을 임명하고 수군(水軍)을 주어서, 장사배들이 사사로 이 중국에 왕래하고 연락하는
것을 금하였다.
봉수 금음복산 봉수(今音卜山烽燧) : 고을 북쪽 10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안악군 감적산(甘積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평안도 삼화현 신녕강(新寧江)에 호응한다.
누정 각서정(却暑亭) : 고을 서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박산역(朴山驛) : 고을 동쪽에 있다.
불우 학거사(鶴居寺)ㆍ원정사(元正寺)ㆍ신암사(神巖寺) : 모두 구월산에 있다.
봉황사(鳳凰寺) : 봉황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아사진송곶사(阿斯津松串祠) : 사전(祀典)에 큰 냇물로서 소사(小祀)에 실렸으며,
봄ㆍ가을로 향축을 내려 보내어 제사 드린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연풍현(連豐縣)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제영 옛 고을 바다 동쪽 언덕이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깊은 마을은 산 북쪽 기슭이요, 옛 고을은 바다 동
쪽 언덕이네." 하였다.
월악(月岳 구월산)에 상서로운 기운 서렸네 : 성윤문(成允文)의 시에, "월악에 상서로운 기운 서렸고, 사진(蛇津
아사나루)은 장연(瘴煙)에 가셨네." 하였다.
울타리에 다시 인가의 연기가 오르네. :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바다와 산에 도적떼 없어지니, 울타리에 다시
인가의 연기가 오르네." 하였다.
[비고]
방면 현내(縣內) :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동면(東面)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일도(一道) :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이도(二道)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도리(道里) :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진보 ○ 대곶료망(碓串瞭望) : 장졸(將卒)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강소창(舡所倉) :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해변가에 있다.
진도 대진(大津) : 북쪽으로 17리에 있으며, 주위는 수십 리이고, 조수의 흐름이 빠르고, 삼화(三和)로 통한다.
토산 소금[鹽]ㆍ잣[海松子]ㆍ오미자(五味子)ㆍ조개[蛤]
사원 봉양서원(鳳陽書院) : 숙종 을해년에 세웠다가, 병자(丙子)년에 사액하였다.
박세채(朴世采) : 문묘(文廟)에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 黃海道 [3] 해주목 海州牧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 경계까지 69리, 용매량(龍媒梁)까지 95리, 남쪽으로 강령현(康翎縣) 경계까지 49리,
서쪽으로 옹진현(甕津縣) 경계까지 94리, 장연현(長淵縣) 경계까지 92리,
북쪽으로 신천군(信川郡) 경계까지 56리,
재령군(載寧郡) 경계까지 41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5리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라 고쳐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고을이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년에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절도사를 두고 해주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며,
양주(楊州)와 함께 경기의 좌우 보(輔)로 삼았다. 현종(顯宗) 때에는 절도사를 폐지하고 네 도호부의 하나로
정하여 안서(安西) 도호부라 불렀으며, 예종(睿宗) 때에는 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다시 목으로 고쳤는데,
공민왕 조에 왜적이 목사 엄익겸(嚴益謙)을 죽이니, 고을 아전으로서 목사를 구원하지 않은 자를 베고, 주(州)를
군으로 강등하였다가 후에 다시 목으로 하였다.
본조 태종 17년에 평산부의 서쪽 지경을 나누어서 예속시켰으며, 세조조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도호부가 2 : 연안(延安)ㆍ풍천(豐川). 군이 1 : 배천(白川). 신증 현으로 강등하였다. 현이 6 : 송화(松禾)ㆍ
은률(殷栗)ㆍ강음(江陰)ㆍ강령ㆍ옹진ㆍ장연. 신증 배천.
관원 목사ㆍ판관ㆍ교수 : 각각 한 사람.
군명 내미홀ㆍ지성ㆍ장지ㆍ폭지ㆍ대녕(大寧)ㆍ서해(西海)ㆍ안서(安西)ㆍ수양(首陽)ㆍ고죽(孤竹) :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에 "고려는 원래 고죽국이라 하였는데, 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지금의 해주이다.'
하였다." 하였다.
○ 이제 살펴보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영평부(永平府) 서쪽 15리에 고죽국 군(君)의 봉한 땅이 있다."
하였으며, 또 "부성(府城) 서북쪽에 고죽국의 삼군(三君)의 무덤이 있고, 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이
있으니, 이곳이 고죽국인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하였다.
배구는 아마도 백이ㆍ숙제가 동이(東夷) 사람이라고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이첨이 해주를 고죽이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성씨본주 최ㆍ정(鄭)ㆍ오ㆍ민ㆍ임(林)ㆍ문(文)ㆍ경(景)ㆍ임(任)ㆍ욱(郁)ㆍ송.
형승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관서(關西)의 큰 주이다 : 모두 서거정(徐居正)의 〈동헌기(東軒記)〉에 있는
말이다.
산천
용수산(龍首山) :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
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광석천(廣石川) :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동구 안이 깊숙하고 양 가로 꽃나무들이 무성하고 총총하며, 가운데에
반석(盤石)이 있어 평평하고 넓으며 반듯하여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샘물이 돌을 덮고 흘러 비단필 같다.
우이산(牛耳山) : 고을 북쪽 11리에 있다.
지성산(池城山) : 고을 동쪽 20리에 있는데, 꼭대기에 폭포가 있어 3백여 자나 날아 떨어진다.
불족산(佛足山) :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산마루 돌 위에 사람 발자국이 있는데 사람들이 부처 발자국이라 한다.
북숭산(北嵩山) : 고을 서쪽 31리에 있다. 수미산(須彌山) : 고을 북쪽 17리에 있다.
자단산(紫丹山) : 고을 서쪽 93리에 있다. 선녀산(善女山) : 고을 서쪽 4리에 있다.
공수산(公須山) : 고을 동쪽 62리에 있다. 달마산(達磨山) :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취라산(吹螺山) : 고을 동쪽 65리에 있다. 청태암(靑苔巖) : 고을 동쪽 29리에 있다.
수양산(首陽山) : 고을 동쪽 5리에 있는데 산마루에 대(臺)가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청산은 창해(滄海)가에 첩첩하고, 창해는 청산 앞에 아득하네. 산 이름 수양이 기이하고
빼어난데, 지도에는 주(周) 나라 땅에 들지 않았네.주D-001 옛 대(臺)가 완연하여 아직도 변함없는데,
고을 사람들 역력하게 서로 전하네. 중을 찾아서 야사(野寺)에 갈 것도 없고, 신선을 찾아 바다배를 띄울 것도
없네.
고사리 캐던 옛 자취 그 아니 우러러 볼 것인가, 높이 백세천세(百世千世)에 뛰어났네.
주려도 주 나라 곡식 먹지 않고, 가서 숨는데 형과 아우 같이 하였네. 이것을 달게 여기고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
고 그 자취를 산중에 의탁했네.
산이 있으니 이 내 뼈는 묻을 수 있는 것, 주 나라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목구멍에 넣을 것인가.
기어이 한 번 죽음으로 후세 사람들 깨우치니, 높은 바람 천 년 후에도 늠연(凜然)하게 분다네.
아, 외나무로 큰 집을 버티어서, 길이 은(殷) 나라를 오래 가게 하지 못한 것이 한이로세." 하였다.
바다 : 고을 동남쪽 10리에 있다. 어사교천(於賜橋川) : 고을 동쪽 53리에 있다. 근원이 공수산(公須山)에서 나
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작천(鵲川) : 고을 동쪽 22리에 있다. 근원이 불족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읍천(泣川)이 된다.
읍천 : 고을 동쪽 31리에 있다. 작천의 하류가 여기 와서 바다로 들어간다.
광탄(廣灘) : 고을 서쪽 95리 장연현과의 경계에 있다.
삼탄(三灘)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근원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취라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평산부 성불산
(成佛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그 부 모란산(牧丹山)에서 나오는데,
취라산 동쪽에 와서 합류하고 여기 와서 바다로 들어간다.
마산온천(馬山溫泉) : 고을 서쪽 63리에 있는데, 근처의 지기가 모두 따스하고, 물맛이 또 짜다.
수압도(睡鴨島) : 대소 두 섬이 고을 남쪽 해중 60리쯤에 있는데, 두 섬의 거리는 5리다.
용매도(龍媒島) : 용매량(龍媒梁)의 남쪽에 있다. 원래는 소 기르는 목장이었는데,
금상 3년에 소를 그만두고 말을 방목하였다.
연평도(延平島) : 고을 서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목장이 있다.
○ 선덕(宣德) 10년(세종 17년)에 연평도 순검군이 왜선 1척을 붙잡아 궁전(弓箭)ㆍ도검(刀劍)ㆍ갑주(甲冑)ㆍ
수은ㆍ진주ㆍ유황ㆍ법라(法螺) 등 물건을 빼앗았는데, 세종이 명하여 영(嶺) 밖으로 귀양보냈다.
산연평도(山延平島) : 연평도 남쪽 5리에 있다.
토산 거서(秬黍 검은 기장) : 세종 때에 거서를 해주에서, 경석(磬石)을 남양(南陽)에서 얻어서 박연(朴堧)을 명
하여 편경(編磬)을 제조하게 하였다.
박연이 밀납을 녹여서 거서의 알 형태를 만들되 약간 크게 하여 분(分)을 모아 관(管)을 만드는데,
한 알로 한 분을 하며 열 알을 모아 촌(寸)을 하였다.
법에는 황종(黃鐘)주D-002의 길이는 9 촌으로 하되, 3분을 덜하고 더하여서 12율(律)을 이루게 하여 새 경(磬)
두 틀을 지어 드렸다.
세종이 이르기를, "새 경이 바로 되어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그런데 이칙(夷則) 소리 하나가 조화되지 않으니
어쩐 일인가." 하니, 연이 곧 자세히 보고 말하기를, "먹금이 아직 남아 다 갈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곧 가니 먹금이 다 없어지고 소리가 제대로 조화되었다.
사(絲)ㆍ마(麻)ㆍ청옥(靑玉) : 용유리(龍遊里)에서 난다. 무쇠 : 사곶(沙串)에서 난다.
석철(石鐵) : 황곡리(黃谷里)에서 난다.
하엽록(荷葉綠) : 청태암(靑苔巖)에서 난다. 자초(紫草)ㆍ미역ㆍ사곽(絲藿)ㆍ청각(靑角)ㆍ백하(白蝦)ㆍ
자하(紫蝦)ㆍ대하(大蝦)ㆍ굴ㆍ홍어ㆍ게ㆍ홍합ㆍ은구어(銀口魚)ㆍ석수어(石首魚)ㆍ마어(麻魚)ㆍ노어(鱸魚)ㆍ
붕어ㆍ청어ㆍ소어(蘇魚)ㆍ조개ㆍ낙지ㆍ소라ㆍ숭어ㆍ소금.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만 1백 97척이며, 높이가 16척이며 안에 우물 12곳이 있다.
관방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 성 안 동쪽에 있다. 용매량영(龍媒梁營)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다.
봉수 남산봉수(南山烽燧) : 동쪽으로 마아미(馬兒彌)에 응하고, 남쪽으로 사포곶(沙浦串)에 응한다.
송산(松山)봉수 : 고을 동쪽 45리에 있다. 동쪽으로 피곶(皮串)에 응하고, 남쪽으로 마아미에 응한다.
피곶봉수 : 고을 동쪽 69리에 있다. 동쪽으로 평산부 성곶(聲串)에 응하고 서쪽으로 송산에 응한다.
사포곶봉수 : 고을 남쪽 35리에 있다. 동쪽으로 남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령현 견라산(堅羅山)에 응한다.
마아미봉수 : 고을 동쪽 27리에 있다. 동쪽으로 송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남산에 응한다.
궁실 객관 동헌(客觀東軒) :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해주는 관서의 큰 고을인데, 원래 고구려
의 내미홀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폭지군(瀑池郡)을 설치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에, 고을이 남쪽이 큰 바다에 임하였으므로
처음으로 해주라 이름하였다. 성종이 12목을 설치할 때에 해주가 그 하나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절도사로 고치고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였다. 현종조에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고치고 예종
조에는 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고종조에 다시 해주목을 설치하였으며, 공민왕 22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목사를 죽였는데 읍의 아전들이 구원
하지 않았다. 이에 주를 강등하여 군으로 하였다가 마침내 다시 목으로 하였으며, 이름하기를 대령(大寧)이라 하
고 고죽(孤竹)이라고도 하였다.
주에는 대수압(大睡鴨)ㆍ소수압ㆍ연평ㆍ용매의 네 섬이 있으며, 그 지역은 넓고 그 백성은 많아서, 전지의 비옥
함과 물산의 풍부함이 여러 주 중에서 제일이다. 여기에 관원으로 온 자가 사무는 번거롭고 처리하기가 고되어
서, 어려운 일[盤錯]주D-003을 처리하는 재주가 없으면 다스리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관원을 보낼 때마다 그
인재 구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성화(成化) 11년 을미(성종 6년) 봄에, 이후(李侯) 염의(念義)가 여기에 목사로 갔는데, 부임한 지 두어 달이 못
되어서 정사가 크게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기를 좋아하게 되니,
공은 개연히 폐하여 없어진 것을 다시 일으킬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객관에 동헌이 있으니, 홍무(洪武) 무인년
(태조 7년)에 목사 김회련(金懷鍊)공이 지은 것인데, 세월이 오래 되어서 무너져 있었다.
공이 통판 우찬(禹贊)공과 의논하고, 중신(重新)할 계획을 조정에 보고하여 허락을 얻은 다음, 옛터를 쓰되 그
규모를 더 크게 하니, 건물이 높직하고 단청이 찬란하였다.
8월 초순에 시작하여 10월에 가서 준공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병신년 봄, 내가 압록강으로 사신 나갈 때, 다시 이후(李侯)를 봉산군(鳳山郡)에서 만나니, 기문을 지어 달라 부
탁하며 말하기를, '주의 진산(鎭山)을 용수산(龍首山)이라 하는데, 높고 험하며 북쪽으로는 우이(牛耳)ㆍ불족
(佛足) 두 산에 연접해 기세가 웅장하여 수십 리에 서리어 있다. 난간 동쪽 3리쯤에는 수양산(首陽山)이 있는데,
산 위에 이제대(夷齊臺)가 있고, 소나무ㆍ노송나무가 하늘에 닿아서 옥창끝[玉槊] 같은 것이 총총하며,
또 고사리가 나는데 통통하고 연한 것이 보통과 다르다. 2리쯤에는 광천(廣川 광석개)이 있는데, 넓이가 백 보
쯤은 되고 밑에 흰 돌이 돗자리처럼 깔렸으며, 물이 푸르고 맑아 손으로 움켜 마실 만하다.
노어(鱸魚)니 붕어니 하는 아름다운 고기가 수백 수천 마리 떼를 지어 한가롭게 노니는데, 물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 손가락을 꼽아 세일 수 있으며, 낚시질할 수 있고 작살질할 수 있으며 그물을 던져 잡을 수도 있다.
난간에서 조금 북쪽으로 나가면 대(臺)가 있는데 높이가 한 길이 넘고, 들메나무[楠] 두 그루가 무성하고 울창
하여 층층한 그늘이 땅을 덮어서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또 서북쪽으로 가면 삼괴정(三槐亭)이 있는데, 경치 좋기로 남정(楠亭)과 서로 최고를 다툰다. 그 남쪽에 못이
있어 연을 심으니 붉은 향기 푸른 그림자가 좌우로 어른거리며, 그 헌(軒) 앞에는 욕실(浴室) 두어 채가 있고, 욕
실 아래 위에 모두 새 못을 파니 넓이가 10여 길씩 되며, 연을 심고 고기를 기르니 윗못의 물이 졸졸 섬돌밑을
따라 돌아서 아랫목으로 들어간다. 목욕을 마치고 난간에 의지하면, 유쾌하고 시원하여 번거로운 세상 생각 씻
고 혹심한 더위를 잊을 수 있다. 동헌 옆에 또한 누(樓)가 있는데 높고 밝으며 상쾌하여, 사신이나 손님이 오면
반드시 여기서 술 마시고 시를 짓는다. 이것이 이 고을 형승의 대략인데, 그 중에도 여러 승경을 다 모은 곳은
우리 동헌이다. 그대는 좀 드날려 주오.' 하였다.
내가 듣고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동헌의 승경이 이와 같은데도 오래도록 폐지하고 수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큰 흠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어진 판관ㆍ목사와 어진 통판을 만나서 새롭게 되었으니, 기쁨을 알 만한 일
이다. 세상에 논하는 자들이 모두 관청 건물을 수리하고 안하는 것이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먼 옛적에는 집이 없이 나무 위에 살거나, 들판에 거처하였는데,
성인이 대장괘(大壯卦)에서 취하여 궁실을 경영하였다.주D-004
더구나 관청 건물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며, 빈객을 접대하고 사신을 높이고 관청을 엄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그럭저럭 두어두고 다 무너져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리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요즘의 수령들을
보니, 무능하고 오활한 자들은 문서에도 오히려 멍청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또 어느 겨를에 무너진 건물들을
수리하여 새롭게 할 것인가. 무너진 건물들을 수리하여 새롭게 하는 일은 사실 어진 사람과 유능한 사람들의
하는 일인 것이니, 이것은 내가 두 수령을 보고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주에는 산수의 승경이 이미 저렇고, 관부 청사의 아름다움이 또 이러하니, 내가 두려워하는 바는 여기
에 거처하는 이가 노는 데 빠져서 세월을 허송하는 폐단이나 없을까 하는 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관청 건물의 수리가 이야말로 정치에 방해가 되고, 외물에 끌려 뜻을 상실하는 거리가 될
것이니 어찌 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는 마땅히 어진 마음에서 근본하여 어진 정사가 베풀어져서,
백성 부리는 데 도리가 있어 농사철을 빼앗지 않고 본말주D-05이 함께 시행된 연후에야 옳을 것이다.
아, 옛날 성인이 《춘추》를 지을 때, 모든 건축 관계의 일을 반드시 썼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 부리는 일을 중히 여긴 것이다. 백성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서, 때가 맞지 않는데 일
을 크게 벌인다면 폄(貶)하고, 재력을 손상하지 않으며 농사때를 어기지 않게 하면 포(褒)한 것이다.
이번 후(侯)의 이 일은 《춘추》의 예(例)에 의하면, 특별히 써서 아름답게 여겨 포(褒)하여야 할 일이니, 내가
어찌 말이 없을 수 있는가. 이러므로 기문을 적는다.' 하였다." 하였다.
누정 봉지루(鳳池樓) : 객사 동쪽에 있으며, 연못이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한 지역 외로운 성이 바닷가에 가까운데, 봄바람의 먼 나그네 혼자서 누에 올랐네.
산은 서북쪽으로 잇달아 천 겹으로 푸르고, 땅은 동남쪽으로 터져서 만고에 흐르네. 널리 포용하니 하늘이 큰 것
을 알겠고, 바다가 아득하니 세상이 떠 있는 줄 깨닫겠네. 백 년 동안 분주하여도 무슨 일을 이루겠나,
연파(煙波)에 낚싯배나 띄워 볼거나." 하였다. 신증 관찰사 남곤(南袞)이 이름을 영해(瀛海)로 고쳤다.
○ 정난종(鄭蘭宗)의 시에, "북소리 나팔소리에 변방의 성이 저물고, 호산(湖山)에 가을빛이 깊었네. 마른 연잎
은 밤새도록 소리 내고, 쇠잔한 버들 반못[半池]에 그늘지누나. 주렴에 반딧불 처음 지나가고,
누대에는 달이 들어오려 하네. 이때 객의 한(恨) 절로 나니, 잔나비주D-006 울음 들어서가 아니네." 하였다.
○ 조위(曺偉)의 시에, "멀리 노니니 한 해가 저물려는데, 병들었다가 일어나니 술잔 깊은 것이 두려워라.
나뭇잎 떨어지니 가을빛 줄어들고, 누가 높으니 저녁 그늘 생기는구나. 풍광은 가는 곳마다 다른데, 서늘한 기
운 앉은 자리에 스며드네. 한나절 중을 만나 이야기하다가, 외로운 회포를 짧은 시에 적어보네."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뭇산이 들에 비껴 끊겼는데, 온 지경이 다시 맑고 깊네. 복사ㆍ오얏 새 길을 이루었고,
주D-007 소나무ㆍ전나무는 옛 그늘이 자랐네. 새가 우니 봄빛이 늦었고, 누대가 고요하니 달빛이 침노하네.
술항아리 자주 권하니, 시를 짓고도 읊어보지 못하네." 하였다.
○ 송질(宋軼)의 시에, "절(節)을 안서부(安西府)에 멈추고 누에 오르니 감회도 깊구나.
주렴에는 황학(黃鶴) 그림자 보이지 않는데, 산에는 흰 구름 그늘이 오락가락하누나. 숲 빛은 연기 속에 어두운
데, 연꽃은 비 뒤에 피었네. 앉아서 못가의 풀 푸른 것 보다가, 사공(謝公)의 시가 모자람을 한탄하네."주D-008
하였다.
해운정(海雲亭) : 주의 동쪽 5리에 있다. 신우(辛禑) 3년에 우리 태조가 왜적을 해주에서 치다가 주의 동정자(東
亭子)에서 싸웠다. 싸움이 한창일 때, 진흙에 빠지는 땅이 한 발이 넘는 곳을 만났는데, 태조의 말이 한 번에 솟
아올라 뛰어서 지나가니 따르던 자들은 모두 건너지 못하였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으로 적을 쏘아 열일곱 번
에 모두 죽이고, 군사를 풀어 진격하여 드디어 적을 크게 깨뜨렸다.
은행정(銀杏亭) : 동헌 북쪽에 있다. 모란정(牧丹亭) : 별관 북쪽에 있다. 서정(西亭) :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신증 부용당(芙蓉堂) : 객관 서쪽에 있는데, 목사 김망(金望)공이 고쳐 지었다. 당이 연못가운데 있어,
극히 맑은 운치가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2리에 있는데,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옛 집터이다. 지방 사람들이 최충을 문묘에
배향하였는데 목사 정성근(鄭誠謹)이 사전(祀典)에 없는 것이라 하여 파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문에, "우리나라는 문교(文敎)가 크게 밝아져서 중화에 견준다. 수령이 먼저 선성(先聖)
을 알현한 뒤에서야 관청에 나가서 일을 보며, 감사가 수령들의 성적을 보는 데에도 학교를 잘하는 것으로 제일
[最]을 삼았으니,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하여 다스림을 도모하는 뜻이 지극한 것이다.
해주 고을은 지역이 넓고 사람이 많으며, 등급이 목(牧)이 되는데도 학교가 폐지되어 수리하지 못하여 선생과
제자가 다른 곳으로 가서 거처하니, 아, 관원으로서 법을 받들어 조정의 뜻에 맞게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정통(正統) 경신년 봄에, 쌍매당(雙梅堂) 이 선생의 적손 창(昶)이 해주에 목사로 갔는데 부임하자마자 정사는
공평하고 형벌은 깨끗하니, 사람들의 믿음을 받았다.
다음해에 통판 김자행(金自行)군과 더불어 학궁(學宮) 지을 것을 계획하니, 아전들이 시절이 적당하지 못하다고
말렸으나 후(侯)는 그럴 수 없다 하며 말하기를, '노후(魯侯)가 반궁(泮宮)을 수리한 것을 《춘추》에 쓰지 않았
으니 성인의 뜻을 알 수 있다. 어찌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 되고, 인재를 기르는 그 곳을 오래도록 폐지하고 중수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땅을 문헌공 최충의 옛 집터에 정하였는데, 재목은 옛 관청을 헐어 쓰고 산에서 베지 않았으며, 인력은 이
졸을 시키고 백성을 부리지 않았다. 경영한 지 10개월 만에 완성되니 성전(聖殿)이 매우 넓으며 명륜당이 남쪽
에 날아갈 듯하며 좌우의 협실과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남쪽 행랑까지 칸수가 모두 35칸이었다.
목사가 병으로 인하여 고을을 버리고 가고 정발(鄭發)공이 후임으로 와서 다스리는데, 그는 또 벼슬하는 집 후
손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역시 학교를 중하게 여겨서 단청을 새로 하고 부엌이나 마굿간 같은 것을 증설하
며 기와로 덮고 담장으로 두르니, 제도가 새롭고 외관이 더욱 장려하며, 방과 마루, 다락 고방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겨울에는 덥고 여름에는 서늘하였다.
선생과 제자가 거처할 데가 있고, 포주(庖廚)와 창름(倉廩)이 차례가 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고을 사람들의 기쁨일 뿐이겠는가. 후일의 미담도 될 일이다.
임술년 겨울에 그 고을 사람인 장연교도(長淵敎導) 백하선(白河善)이 나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주학(州學)
이 오래도록 폐지되어 우리 지방의 수치였더니, 수리되는 것이 앞사람에게서 되지 않고 쌍매당의 손자를 기다렸
으며, 손질하여 꾸미는 것이 뒷사람에게 넘겨지지 않고 정공에게서 갖추어졌으니 해주의 다행함이 어떠하겠소.
문헌공 옛 집터가 몇 해인지 모르게 풀 속에 묻혀 있다가 반드시 오늘에 와서 개척하게 된 것도 그 역시 하늘의
뜻이 그렇게 시킨 것이요, 우리 고을 읹재 중의 문헌공ㆍ쌍매당 같은 현인이 이후로 배출될 것이요,
그대 역시 우리 고을 사람이니, 이상 두 목사의 공적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기문을 지어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바라오.' 하여, 대략 그 본말을 기록하여서 책임을 때우는 바이다." 하였다.
신증 목사 정성근(鄭誠謹)이 중수하였는데 성균관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 남곤(南袞)의 중수기에,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다음해에, 크게 온 나라에 고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교육하여 태평의 정치를 도와서 이루게 하니, 대소 관원들이 송구하여 유시한 조문을 삼가 받들었다.
이때는 반정(反正) 후 새로운 것이 시작되어 조정과 재야에 일이 많고, 시절도 풍년이 들지 못하여 백성들이 소
생하지 못하며, 관리는 문서를 받들고 정기 집회에 응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 관한 일은 손댈 사이가
없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서 모두가 옳게 아는 것이 없게 되니, 식자들이 걱정하였다.
5년 경오년에, 조정에서 풍산(豐山) 심염문(沈廉問)공을 서해도 감사로 보내었는데, 개연히 생각하기를, '백성
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관원에게 있으며, 관원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은 감사에게 있다.' 하여, 먼 곳도 가까운 곳
처럼 보고, 험한 곳도 평지 가듯 하여 두 달도 못 되어 순시의 행차가 두 번이나 관내를 돌았다.
모든 민간의 이익과 고통을 풍속의 후박에서 알게 되어, 궁벽한 여염집과 흩어진 마을의 하찮은 원통이나, 고부
간의 싸움하는 말까지도 모두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수령 중의 더욱 혼미하고 나약하여 일하지 못하는 자
한 사람을 파면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니, 정사가 실시되고 명령이 행하여져서,
위엄에는 두려워하고 은혜에는 감복하였다.
공이 또 생각하기를, '해주 고을이 웅장하게 자리잡아 물산이 많고, 지역이 커서 사민(四民 사(士)ㆍ농(農)ㆍ공
(工)ㆍ상(商))이 모두 모여들고 여러 고을을 관리하는 곳이니, 정령을 시행하고 풍교를 펴는 것을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야 하겠다.' 하여, 수레를 이곳에 멈추고,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방법을 어찌하면
그 근본을 얻을까 생각하였다.
이에 길일을 택하여 관띠를 갖추고 선성(先聖)의 사당에 알현한 다음, 물러나 명륜당에 앉아서 여러 생도들을
불러 읍하게 하니, 의관을 제대로 갖춘 선비들이 모두 뜰아래 모였다. 이에 노숙한 선비를 앞에 나오게 하여, 학
교를 세운 역사를 물으니, 답하기를, '정통(正統) 연간에 이후(李侯) 창(昶)이 우리 주에 목사로 와서 처음으로
터를 잡아 지었는데 하동(河東) 정상공(鄭相公)이 그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홍치(弘治) 연간에 와서는 정후(鄭
侯) 성근(誠謹)이 유학계의 명망 있는 이로 여기에 와서 고을을 다스리면서, 낡은 것은 새것으로 바꾸고, 좁은
것을 넓혀서 크게 하며, 부족한 것을 완전히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하여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은
다 그가 규정 제작한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더욱 혼자 마음으로 느끼고 분발하기를, '아, 내가 말하는 풍속을 교화하는 근본이 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온갖 공인(工人)들이 가게에 있어야 그 일을 이루는 것인데, 지금의 학교는 선비들의 가게이다. 만일, 건물이 막
히고 답답하다면 거기서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막힌 생각 통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가게를 헐어놓
고 공인들에게만 일을 잘하라고 책망하는 것이나 같으니, 그 이른바 감추고 닦고 놀고 쉬는 데에 결함이 있지
않을 것인가.' 하며, 드디어 수리할 것을 계획하고, 막료인 장사문(張斯文) 맹우(孟羽)에게 물으니 의논이 잘 맞
았다.
목사 한후(韓侯) 사개(士价)를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후 역시 일에 숙달한 사람이라 공장들을 모집
하고 재목을 모으되 털끝만큼도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다. 집을 고쳐 짓지 않고 허물어진 데 따라 손질하며, 뜰안
을 더 넓히지 않고 지형을 따라 평탄하게 하였다. 계단의 벽돌이 무너진 것은 새로 쌓고, 담벽의 구멍 뚫리고 틈
난 것은 흙으로 발랐다. 당의 동서쪽을 트고 익실(翼室)을 붙이며 단청을 새로 하고, 주회암(朱晦庵)의 백록동규
(白鹿洞規)와 옛 어진이 언행 중의 경계가 될 만한 것을 나무판에 써서 문 위에 걸었다.
또 여러 고을에서 재주 있는 사람 몇 명을 뽑아 여름철 공부를 시키는데, 후한 음식으로 공궤하고 예로 우대하며,
날마다 그 재주를 비교하고 달마다 그 능력을 시험보니, 얼마 안 가서 저절로 모두 스스로 새로워지려 하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 공이 서신을 서울로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청하며 이르기를, '해주는 그대가 노닌 곳이 아니며,
학교는 그대가 와서 본 것이 아닌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그 어느 것 하나 그대의 의사 아닌 것이 없으니,
그대가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다.
내가 서신을 받고서 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여기에까지 생각이 있었겠는가. 기한을 정해 놓고 만기가 되기
만을 기다리며, 책벌을 면하기만을 바란 것뿐이니, 그 밖의 일이야 어찌 알았으리오. 만일 공의 이 일을 사필(史
筆) 잡은 이가 듣는다면 정말 사책(史冊)에 적을 것이지만, 나의 직책이 태사관(太史官)에 속하지 않았으면 문장
이 또 생색낼 수 없는 것으로, 장차 그 성대하고 아름다운 사적을 매몰시키게 될 것을 어찌하랴. 다만 공의 인재
를 육성하는 아름다운 뜻을 여러 생도들을 위하여 분부할 뿐이다.
지금 선비의 관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고 이 고장에 있는 자들은 역시 이 고장이 어떠한 고장인 줄을 아는가.
이것이 문헌공(文獻公)이 도(道)를 강론하던 궐리(闕里)주D-009가 아닌가. 9재(九齋)의 생도들이 빨리 모여 와
서 낙성(樂聖)ㆍ성명(誠明)주D-10으로 공부를 삼아서, 북치면 모여 책을 들고 당에 오르는 자가 문 밖에 신이
항상 가득하며, 진덕(進德)하여 대빙(待聘)주D-11하는 자가 띠뿌리 뽑히듯주D-12 한꺼번에 진출하여, 고려조
5백 년 간의 문풍을 크게 일으켰던 것으로서, 그 당시 인재의 성함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땅이 그 땅이요, 학문도
다른 학문이 아닌데, 지금 또한 그때의 인물이 있는가.
지금 호남ㆍ영남으로 말하면 서울 가기가 천여 리나 되지만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공부에 부지런하여 과거 때
마다 갑ㆍ을과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사방 선비에 비하면 언제나 태반을 넘는데, 관서 지방은 알려진 이
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인재 내는 것을 예전에는 많이 하고 지금은 인색하게 하며, 동남 지역엔 후하게
하고 서북 지역에 박하게 하는 것이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장관된 자가 잘 지도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인가.
혹시 이곳 인사들이 힘쓰지 않은 것인가. 장관이 지도하지 않은 것은 이것을 광직(曠職)주D-013이라고 하여 그
벌이 동(銅)으로 속(贖) 바치고 녹을 깎는 데에 그칠 뿐이지만, 선비들의 힘쓰지 않는 것은 이것을 자기(自棄)라
하는 것으로서 그 해가 소ㆍ말에 옷 입히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금수의 지경에 돌아간다면 모두들 어떻다 할 것인가.학문은 정미함과 거침이 있고, 글은 화(華)와 실
(實)이 있다. 주석이나 주워 모으고 구두를 나누어 끊어서 입과 귀만으로 받아들이고 털과 가죽만을 깎는 것은
학문의 거친 것이요, 깊은 곳을 끌어내고 속을 헤치며 털끝만한 것도 나누고 실오라기도 갈라서 도(道)가 체(體)
와 용(用)을 겸하고, 공(功)이 중화(中和)의 극치(極致)에 이름은 학문의 정미한 것이다.
글귀만을 읊조리고 아로새겨 꾸미는 데에 마음을 쓰며, 청(靑)과 황(黃)을 대우(對偶)로 맞추고주D-014 새와 짐
승이나 읊조리는 것은 글의 화(華)요, 음양을 이리저리 얽고 우주를 진동하여 경(經)이 되고 위(緯)가 되어 국가
의 정치에 문채를 놓는 것은 실(實)인 것이다.
그 실과 정은 원래가 용이하게 얼른 얻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일 그 화하고 거친 데서부터 공부를 한다면 아마
나중에는 얻게도 될 것이다. 생도들은 단지 정한 것을 찾고 실한 것을 채우는 것이 어려운 줄만을 알고, 그 화하
고 거친 것까지도 모두 폐지하니,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지금 조정이 밝고 사방에 근심이 없어, 군사에 뽑히거나 공사에 증발되는 부역이 몸에 미치지 않으니,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식을 기르며 배불리 먹고 즐겁게 노는데, 문학을 버리고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
세월은 가고 우리와 함께 오래 머물지 않는다. 작은 것을 쌓으면 정말 큰 것을 이룰 수 있으며, 아래로 인사를 배
우는 것이 곧 위로 천리를 통달할 수 있는 길이니, 여러 생도들은 힘쓸지어다.
서촉(西蜀) 사람들이 문옹(文翁)이 태수로 온 것을 만나서야 문장이 비로소 성하여졌다. 이 역시 서로 만나는 것
이 때가 있고 일어나는 것이 시기가 있어,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난 후에야만 성취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장경(長卿)ㆍ자연(子淵)ㆍ자운(子雲)주D-15의 재주가 어찌 우리 관서 지방에만 없을 것인가.
이 늙은이가 지금부터 눈을 비비며 기다리겠다.' 하였다." 하였다.
역원 청단역(靑丹驛) : 고을 동쪽 40리에 있다. 찰방이 있다. 본 도에 속한 역이 아홉인데,
금곡(金谷)ㆍ심동(深洞)ㆍ망정(望汀)ㆍ금강(金剛)ㆍ문라(文羅)ㆍ금동(金洞)ㆍ신행(新行)ㆍ유안(維安)ㆍ
남산(南山)이다.
○ 찰방 1명이다.
망정역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금강역 :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고을 성 동쪽에 있다. 읍천원(泣川院) : 읍천 언덕에 있다. 삼탄원(三灘院) : 삼탄 언덕에 있다.
작천원(鵲川院) : 작천 언덕에 있다. 금강원(金剛院)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점석원(粘石院)ㆍ
증원(甑院) : 모두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광탄원(廣灘院) : 광탄 언덕에 있다.
수여원(水餘院) :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신증 양거원(楊距院) : 고을 서쪽 70리에 있다. 가천원(茄川院) :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불우 신광사(神光寺) : 북숭산(北嵩山)에 있다. 지정(至正) 2년에 원(元) 나라 황제가 원찰(願刹)이라 칭하고,
태감 송골아(宋骨兒)를 보내어 목공과 장인 37명을 거느리고 와서 고려 시중 김석견(金石堅)ㆍ밀직 부사
이수산(李守山) 등과 함께 감독하여 설계 건축하였다.
지금도 전당(殿堂)과 불상의 금은 단청을 한 것이 완연하여 엊그제 한 것 같다.
신증 남곤(南袞)의 시에, "천 겹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빠져나와, 십홀(十笏) 선방에서 자리를 빌려 자네.
6월의 무더위가 들어오지 못하니, 절간에 별다른 천지가 있네."
○ "동구에 들어오니 저 멀리 종소리 들리더니, 다리를 지나서야 전각들이 보이누나. 구름과 안개가 어찌 잠갔
으랴, 관원들의 티끌 자취 절로 오지 못한 것이리."
○ "지정 연간 황실에서 난리 있을 때에, 신광사 절간이 찬란히 세워졌네. 지금 사는 중들 천 명이나 되는데,
모두들 송골아가 이 절을 지었다고 말하네."
○ "한가한 날 서로 이끌고 절간 찾으며, 시내와 산 가는 곳마다 맑은 놀이 마련했네. 그대들과 함께 술 마시니,
풍류스런 자리 위에 내가 오두(熬頭)주D-016로세."
○ "미투리 행장 경쾌도 하게 내시 따라 들어가며, 마음 내키는 대로 벽예(薜荔) 덩굴 그늘에 술항아리 옮기네.
명일에는 도로 관도(官道)로 갈 것이니, 천 겹 어지러운 봉우리에는 매미만 울겠네." 하였다.
보현사(普賢寺) : 불족산(佛足山)에 있다. 서진사(棲眞寺) : 수양산에 있다.
금강사(金剛寺) : 지성산(池城山)에 있다. 자비사(慈悲寺) : 우이산(牛耳山)에 있다.
빈발사(鬢髮寺) : 북숭산(北嵩山)에 있다. 명석사(命石寺) : 우이산에 있다.
동고산사(東高山寺) : 동고산에 있다. 서고산사(西高山寺) : 서고산에 있다.
중대사(中臺寺) : 우이산에 있다. 수다사(水多寺) : 청암산(靑巖山)에 있다.
은동사(恩洞寺)ㆍ은적사(隱寂寺) : 모두 자단산(紫丹山)에 있다.
원통사(圓通寺) : 취라산(吹螺山)에 있다. 묘자사(妙慈寺) : 우이산에 있다.
선정사(禪定寺) : 달마산(達磨山)에 있다. 묵방사(墨房寺) : 천봉산(天鳳山)에 있다.
광조사(廣照寺) : 수미산(須彌山)에 있다.
고려 검교상서좌복야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진철대사(眞澈大師)의 비가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남산에 있다.
우이산사(牛耳山祠) : 사전(祀典) 소사(小祀)에 실려있는데, 봄가을로 향과 축을 내려 보내서 제사지낸다.
여단(厲壇) : 고을 서쪽에 있다. 지성산사(池城山祠) : 관에서 제사 드린다.
신증 최충묘(崔冲廟) : 문묘 서쪽에 있는데 아들 유선(惟善)을 함께 제사 드린다.
고적 형제도(兄弟島) : 고을 남쪽 바다 가운데 30리에 있다. 두 작은 섬이 있으므로 민가에서 형제도라고 이름
한다 그 중 하나는 높이가 12보(步)이고 하나는 높이 8보인데, 둘레는 모두 1백 20보이고 서로의 거리는 2백 70
보이다. 전해 오는 말에, "백이ㆍ숙제가 여기서 죽었다." 한다.
우다굴(亏多窟)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굴의 높이가 두 길이 넘는데 구멍이 어두워서 사람들이 불을 가져야만
들어간다. 5리쯤 가면 구멍이 굽어지며 깊어지고, 또 물이 있어 그 근원을 모른다. 전해 오는 말에,
"우다장군(亏多將軍)이 이 구멍으로 들어가서 구월산(九月山) 꼭대기의 구멍에 도달하였다 하는데 거리가 백여
리나 된다. 굴 안에서 불을 피우면 10여 일 만에 구월산 구멍으로 나간다." 한다.
수양산성(首陽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만 8백 56척이요, 높이 18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안함(安咸)ㆍ원로(元老)ㆍ동중(童仲) 세 사람이 있어, 터를 보아 쌓았다." 한다.
산중에는 또 고죽군(孤竹君)의 옛 터가 있다.
마산처(馬山處) : 곧 마산온천이 있는 곳이다. 백석처(白石處) : 고을 북쪽 60리에 있다.
청산소(靑山所) : 고을 북쪽 90리에 있다. 장봉소(長峯所)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황암소(黃菴所) :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지성산고성(池城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천 4백 57척이다.
명환
고려 김한충(金漢忠) : 선종(宣宗)조에 수안서도호부(守安西都護府)가 되었다.
이백겸(李伯謙) : 충선왕(忠宣王)조의 목사였는데 정치 잘하기로 알려졌다. 조돈(趙暾) : 목사가 되었다.
김흥조(金興祖) : 목사가 되었다. 최영유(崔永濡) : 목사로서 관사에서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고을 북쪽에 장사
지내고 묘지기를 두어, 나무 베고 소ㆍ말 먹이는 것을 금하며, 죽은 날짜를 목판에 써서 고을 관청 벽 위에 걸어
두고, 죽은 날이나 명절을 당하면 제사드린다.
신증본조 구치곤(丘致崑) : 목사가 되어, 청렴 간이하며 백성을 사랑하였다.
정성근(鄭誠謹) : 목사가 되어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돌보아 주었다.
인물
고려 최충(崔冲) : 주의 아전 온(溫)의 아들인데, 풍체가 훌륭하고 지조가 굳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목종(穆宗)조에 갑과에 첫째로 뽑혔으며 벼슬이 개부의동삼사 수태사겸 문하시중 상주 국내사
령(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內史令)에 이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자세한 것은 개성부 고적편
에 보인다.
최유선(崔惟善) : 충의 아들이다. 현종(顯宗)조에, 을과에 첫째로 뽑히고, 벼슬이 중서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화(文和)요,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우 유길(惟吉)은 수사공 섭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
이다. 아버지 최충이 연령은 높으나 아직도 탈이 없었는데 왕이 나라의 원로들을 잔치할 때에 유선ㆍ유길이 충
을 부축하여 들어가니, 당시에 모두들 성대한 일이라 하였다. 한림학사 김행경(金行瓊)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
를, "상서령이 중서령을 모시고, 을장원(乙狀元)이 갑장원을 부축하였네." 하였다.
최사제(崔思齊) : 유선의 아들이다. 문종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판이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평(良平)이다.
최약(崔瀹) : 사제의 아들이다. 예종(睿宗)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예부 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최사추(崔思諏) : 충의 손자이다. 문종조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왕이 사추가 명문가 자제로서 박학다문하다
하여, 내시성(內侍省)으로 불러들였다. 숙종(肅宗)조에는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수태사 중서령에까지 이르렀다.
사추는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공정하고 청렴하며, 문벌 지위로써 사람들에게 교만하지 않으니, 조정에서 벼슬하
기 40여 년간에 조금도 과실이 없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를 보존하는 데 힘쓰고, 감히 경솔하게 옛 제도를
고치지 않았으며, 문인 자제 중에 와서 뵙는 이가 있으면 언제나, 임금 섬기는 도리로서 교훈하고, 사사로운 일
을 말하지 않았다.
최사량(崔思諒) : 나이 18세 과거에 합격하여 문종조에 공부시랑검교태사를 거쳐 좌복야 참지정사에까지 승진
되었다. 사량이 행동과 외모가 단아하며 조용하고 말이 적었으며, 국권을 잡고 문형(文衡)을 주관하여 명망이
당시에 중하였다. 시호는 강경(康敬)이다.
최윤의(崔允儀) : 충의 현손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에 이르렀다. 문벌 높은 집
안에서 성장하여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일을 의논하는 데 사리가 명백하고 뜻이 강개하였다.
이부(吏部) 관리 임명을 맡았을 때에 공평하고 정당하였으며, 두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는데, 당시에 그는,
선비를 잘 뽑았다 하였다.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 50권을 편찬하였으며, 의종(毅宗)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자(崔滋) : 충의 후손이다. 젊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글을 잘 지었다. 강종(康宗)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
이 수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최유엄(崔有渰) : 자의 아들이다. 천성이 겸손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아서, 10년 동안에 승진이 없었는데, 충렬왕
(忠烈王)이 오래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여러 번 승진시켜 도첨의 찬성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원 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신하 중의 어진이를 보내라 하였는데, 유엄이 명에 의하여 원 나라에 갔으며 원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치하고, 세록(世祿)과 노비법을 혁파하려 하는 것을 유엄이 힘써 청원하여 정
지시켰다. 돌아오자 나라 안 사람들이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삼한(三韓)을 보존한 최
시중이다." 하였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고, 4왕조를 내리 역임하며 섬기며 세가의 원로가 되었는데 조정이나 민
간에서 모두 의지하여 중히 여겼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최춘명(崔椿命) : 충의 후손인데, 천성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절조가 있었다. 고종조에 자주 부사(慈州副使)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추밀원부사에 이르렀다. 자산군(慈山郡) 편에 자세하다.
최홍윤(崔弘胤)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사마시(司馬試)를 창설하자 네 번 고시를 맡았는데, 뽑은 사람이 모두 이름 알려진 사람으로 경상(卿相)이 된
사람도 많았다. 세상에서 옥순문생(玉筍文生)이라 불렀다.
최함(崔諴)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오연총(吳延寵) :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기거랑(起居郞)이 되었으며 후에 전주 지주(全州知州)가 되
었다가 불려서 추밀원에 들어갔다. 예종(睿宗)이 여진을 정벌하는데, 연총이 윤관(尹瓘)이 다음이 되어서 여진
을 격파하고, 지경을 개척하여 9성을 쌓았다. 후에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오형(吳詗) : 처음 이름은 한경(漢卿)이다. 원종(元宗)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빛나고 요긴한 직위에 역임하고
벼슬이 첨의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호는 쾌암(快庵)이요, 학문이 정밀하고도 해박하
였다. 드러난 공적은 없지만 너그럽고 간략하여 겉치레가 없어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정유산(鄭惟産) :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상서 한림학사로 대제학을 맡았다.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자의 이름을
봉하는 법을 세웠으며, 벼슬이 문하평장사에까지 이르렀다.
본조 정이(鄭易)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의정부 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아들 충경(忠敬)은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고, 충석(忠碩)은 벼슬이 동지중추에 이르렀다.
최만리(崔萬理) :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고 뽑혀서 집현전에 들어갔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신증 정희량(鄭希良) :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예문관봉교로 무오사화를 당하여 귀양갔다.
후에 방면되어 돌아왔으나 끝내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강물에 빠져 죽었다. 시를 잘 짓기로 이름이
났으며 《허암집(虛庵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정미수(鄭眉壽) :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이다. 관직이 찬성에 이르고,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였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소평(昭平)이다.
효자본조 경비(敬非) : 그 아버지 한중덕(韓仲德)이 병이 나서 3년이 되도록 낫지 않으니, 경비가 자기의 손가락
을 찧어 국에 섞어서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신증 이성동(李性同) : 어머니가 악질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끊어서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5년에 정문을 세웠다.
장수이동(張愁伊同) : 소경인데 아버지가 악질에 걸렸을 때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5년에 정문을 세웠다.
김수원(金守元) : 아버지가 악질에 걸렸는데, 수원의 나이 13세에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8년에 정문을 세웠다.
송세광(宋世匡) : 어머니가 병이 급하였는데 다리살을 베어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곧 나았다.
금상 9년에 정문을 세웠다.
김산동(金山同) : 어머니가 나쁜 병을 앓았는데, 산동의 나이 13세에 손가락을 잘라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1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섬들은 많이도 봉화(烽火)에 비치네 : 이색(李穡)의 시에, "섬들은 많이도 봉화에 비치고, 밭두둑은 태반이
다북쑥에 묻혔네." 하였다.
바다 출렁거려 앞을 둘렀네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높은 산은 층층한 구름가에 은은한데,
넓은 바다는 출렁거려 앞을 둘렀네." 하였다.
땅은 바다 어귀를 곁하여 깊었네 : 김자지(金自知)의 시에, "고을은 수풀 언덕을 의지하여 궁벽하고,
땅은 바다 어귀에 곁하여 깊었네." 하였다.
만고의 백이ㆍ숙제 살던 곳이네 :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만고에 백이ㆍ숙제 살던 곳인데,
그 유풍(遺風)에 감회도 깊구나." 하였다.
우이산(牛耳山) 높은데 동부(洞府) 음침하네 : 최한보(崔漢輔)의 시에, "용매도(龍媒島)가 머니 바다 어귀 넓고,
우이산 높은데 동부(洞府) 음침하네." 하였다.
금도(金桃)는 붉은 것이 벌써 흐트러졌네 : 김수령(金壽寧)의 시에, "금도는 붉은 것이 벌써 흐트러졌고, 은행은
푸른 잎 처음으로 그늘지네." 하였다.
[비고]
연혁 광해주 8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읍의 큰 의옥(疑獄) 사건으로써, 인조 원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내동변(內東邊) : 처음이 읍내이고, 끝이 10리이다. 외동변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서대공(西大公) :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동대공(東大公) :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소문(蘇文) :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천결(泉潔) :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일신(日新) :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내성(來城)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동강(東江) :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추이동(秋伊洞) :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위의 10면은 모두 주(州)의 동쪽이다.
서변(西邊) : 처음이 읍내에 있으며 끝이 20리이다. 가좌동(茄佐洞) :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아달(阿達) :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마산(馬山) :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가천(茄川) :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이다. 교정(交井) : 처음이 90리, 끝이 1백 50리이다.
대진(代陳) : 처음이 70리, 끝이 1백 리이다. 삼곡(三谷) :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고장박(高壯朴) :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월량곡(月良谷) :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위의 10면은 모두 주의 서쪽이다.
고촌(古村)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송림(松林) : 처음이 물에서 40리, 육지에서 50리, 끝이 80리이다.
상평(上平) : 처음이 70리, 끝이 1백 리이다.
하평(下平) :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위의 3면은 주의 동남쪽이다.
청산(靑山) :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백운(白雲) : 처음이 60리, 끝이 1백 리이다. 검단(黔丹): 위와 같다.
표지(票枝) : 처음이 50리, 끝이 90리이다. 미륵(彌勒) :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고산(高山) :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취거(取車) : 처음이 60리, 끝이 90리이다. 위의 면은 주의 서북쪽이다.
해남(海南) : 남쪽으로 처음이 물에서 30리, 육지에서 40리, 끝이 50리이다.
수미(須彌)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군량곡(軍糧谷) : 처음이 40리, 긑이 60리이다.
송라동(松羅洞)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석동(席洞) :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위의 4면은 주의 북쪽이다.
영아 순영 : 본조 태조 4년에 설치하였다.
관원 관찰사 : 병마수군절도사ㆍ순찰사ㆍ해주 목사를 겸하였다. 도사(都事)ㆍ
중군(中軍) :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역학훈도(譯學訓導)ㆍ심약(審藥)ㆍ검률(檢律) : 각 1명이다.
진보 용매량진(龍媒梁鎭) : 섬 가운데 있는데 옛날에 만호를 두었었다.
○ 수군동첨절제사가 1명이다. 요망(瞭望) : 가천(茄川)ㆍ흑두포(黑頭浦)ㆍ옹진(甕津) 편에 상세하다.
봉수 피곶(皮串) : 동남쪽으로 80리이다. 용매도(龍媒島)ㆍ수압도(水鴨島)ㆍ
연평도(延平島) : 이상은 수로원봉(水路元烽)이다. 사곶(沙串) : 이상은 지보순영(只報巡營)이다.
창고 고(庫) 12 : 읍성내에 있다. 결성창(結城倉) : 갯가에 있다.
서별창(西別倉) : 서별강가에 있는데, 옛날 수장산곶(收長山串) 이북의 여러 읍 전세(田稅)를 배에 실어 서울에
이르렀다. 조운(漕運)은 지금 폐지되었다.
남창(南倉) : 취야포(翠野浦)가에 있다. 일소둔창(一所屯倉) : 가천에 있다. 구해창(舊海倉) : 읍천포(邑川浦)가에
있다. 청단역창(靑丹驛倉)ㆍ용매진창(龍媒鎭倉)ㆍ산성창(山城倉)ㆍ점석둔창(粘石屯倉) : 서쪽으로 40리 지점에
있다.
해남창(海南倉)ㆍ표지창(票枝倉)ㆍ상평창(上平倉)ㆍ하평창ㆍ동강창(東江倉)ㆍ소문창(蘇文倉) :
모두 면내에 있다.
수미창(須彌倉) : 광조사(廣照寺) 옛 터이다.
역참 가동역(嘉東驛)ㆍ남산역(南山驛).
목장 용매도장(龍媒島場) : 본래 목우장(牧牛場)인데, 뒤에 마장(馬場)이 되었다가 진을 설치한 뒤에 폐해졌다.
연평도장(延平島場) : 폐해졌다.
교량 어사천교(於賜川橋) : 여름에 물이 부르면 배를 사용함. 읍천교(邑川橋)ㆍ작천교(鵲川橋)ㆍ
석담천교(石潭川橋)ㆍ죽천교(竹川橋).
토산 먹ㆍ박석(薄石).
누정 공북루(拱北樓) : 북성문루(北城門樓)이다. 탁열정(濯熱亭) : 북녘 마을에 있다. 백림정(栢林亭)ㆍ
취야정(翠野亭) :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다.
묘전 청성묘(淸聖廟) : 숙종 신미년에 세우고 신사년에 어필로써 편액을 썼다.
백이(伯夷) : 성(姓)은 묵씨(墨氏), 이름은 구(九), 자는 공순(公淳)이며 고죽군(孤竹君)의 장자(長子)이다.
시호는 이(夷)이며 송 나라에서 청혜후(淸惠侯)로 봉하였다.
숙제(叔齊) : 이름은 지(智), 자는 공달(公達), 고죽군의 막내 아들이다. 시호는 제(齊)이며 송 나라에서 인혜후
(仁惠侯)로 봉하였다.
사원 문헌서원(文憲書院) : 명종(明宗) 기유년에 세우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최충(崔冲) : 자는 호연(浩然)이며 해주 사람이다. 벼슬은 태사상주국 중서령으로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헌이다.
최유선(崔惟善) : 최충의 아들인데 벼슬은 사도중서령이고, 시호는 문화(文和)이다.
소현서원(紹賢書院) : 선조(宣祖) 정축년에 세우고, 광해주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晃)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 모두 문묘 편에 보라.
[주 D-001] 지도에는 주(周) 나라 땅에 들지 않았네. : 백이·숙제가 주(周) 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절개를 지켜
수양산(首陽山)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었기 때문에, 수양산은 주 나라 지도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 D-002] 황종(黃鐘) : 음악에 12율(律)의 첫째가 황종인데 율관(律管)을 제정할 때에 황종을 기본으로 한다.
[주 D-003] 어려운 일[盤錯] : 반근(盤根) 착절(錯節)을 만나지 아니하면 잘 드는 연장을 분별할 수 없다는 말
이 있다. 반근은 나무의 뿌리가 서려 구부러지고 뭉친 것인데 잘 드는 연장이 아니면 그것을 다듬을 수 없다.
착절도 역시 나무의 교착(交錯)된 마디다. 즉 어려운 일을 당하여야 일을 잘 처리하는 재주를 볼 수 있다는 뜻이
다.
[주 D-004] 성인이 대장괘(大壯卦)에서 취하여 궁실을 경영하였다. : 주역에 대장괘(大壯封)가 있는데 계사
(繫辭)에 말하기를, “상고에 사람들이 구멍에 살고 들에 거처하였더니 후세에 성인이 궁실(宮室)을 지어 바람 비
를 막은 것은 대장괘(大壯卦)에서 취한 것이다.” 하였다.
[주 D-05] 본말 : 마음은 본(本)이요 정사는 말(末)이다.
[주 D-006] 잔나비 : 중국 삼협(三峽)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구슬프게 우는 잔나비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슬퍼진다 한다. 시인의 글귀에 많이 나온다.
[주 D-007] 복사ㆍ오얏 새 길을 이루었고, : 사기(史記)에, “복사꽃 오얏꽃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밑은 저절로
길을 이룬다.” 하였다. 그것은 그 꽃을 보려고 사람들이 저절로 많이 온다는 뜻이다.
[주 D-008] 사공(謝公)의 시가 모자람을 한탄하네." : 사영운(謝靈運)의 시에, “못에 봄풀이 난다.
[池塘生春草]” 하였는데, 명구라 한다.
[주 D-009] 궐리(闕里) : 궐리는 공자가 살던 동리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충(崔冲)을 해동의 공자라 하므로
최충이 살던 땅을 공자의 궐리에 비하였다.
[주 D-10] 낙성(樂聖)ㆍ성명(誠明) : 낙성재(樂聖齋)·성명재(誠明齋)는 최충이 제자를 가르치던 서재의 이름
이다.
[주 D-11] 대빙(待聘) : 대빙(待聘)도 최충의 서재 이름인데 그것은 공부를 하여 나라에서 뽑아서 초빙하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주 D-12] 띠뿌리 뽑히듯 : 띠는 한 뿌리를 뽑으면 얽힌 여러 뿌리가 한꺼번에 빠진다. 이것은 어진 선비들이
한꺼번에 서로 끌고 진출하는 데 비유한 것이다. 《주역》에서 나온 말이다.
[주 D-013] 광직(曠職) : 관직을 비운다는 말인데 직책을 이행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주 D-014] 청(靑)과 황(黃)을 대우(對偶)로 맞추고 : 변려문(騈儷文)을 짓는 데는 청(靑) 자와 백(白) 자 등으
로 서로 대우를 맞추어 만들기에 힘을 쓴다.
[주 D-15] 장경(長卿)ㆍ자연(子淵)ㆍ자운(子雲) : 장경과 자연·자운은 곧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왕포(王褒)·
양웅(揚雄)을 가리키는데, 모두 서촉(西蜀)에서 난 문인(文人)들이다.
[주 D-016] 오두(熬頭) : 촉중(蜀中) 성도(成都)의 풍속에 4월 19일에 태수(太守)가 나가서 놀이를 하면, 남녀
들이 나무 걸상에서 구경하는데 그것을 오상(熬狀)이라 하고 태수는 오두(熬頭)라 하는데 오두는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연안도호부 延安都護府
동쪽으로 배천군 경계까지 33리, 서쪽으로 평산부 경계까지 31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29리,
북쪽으로 평산부 경계까지 3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8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동음홀(冬音忽)이다 : 음(音)은 삼(彡)으로 쓰기도 하며, 시렴성(豉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는 염주(鹽州)라 하였다. 성종(成宗)조에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현종(顯宗)조 초기에는 방어사를 폐지하고 해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조에 거란 군사를 막아 싸워 공이 있으므로 영응 현령(永膺縣令)으로 승격시켰으며, 후에 또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가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으므로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시켰다.
원종(元宗)조에는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이 되었으므로 석주(碩州)로 고쳤고 충렬왕(忠烈王)조에는 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이 여러 목(牧)을 없앨 때에 강등하여 부로 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하고 경기에서 다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명이다.
군명 동음홀ㆍ시렴성ㆍ해고(海皐)ㆍ염주ㆍ영응ㆍ온주(溫州)ㆍ오원(五原)ㆍ양원(陽原)ㆍ복주(復州)ㆍ석주.
성씨본부 송ㆍ이ㆍ홍ㆍ고ㆍ강(康)ㆍ전(田)ㆍ김ㆍ정(鄭)ㆍ차(車)ㆍ노(魯) : 모두 촌(村)ㆍ단(段)ㆍ황(黃)ㆍ
최 : 모두 속(續).
형승
남쪽으로 와룡지(臥龍池)에 임하고 북쪽으로 비봉산(飛鳳山)을 의지하였다 : 권근(權近)의 〈향교기(鄕校記)〉
에 있다 동남쪽으로 끝이없이 큰바다가 하늘에 닿았다 : 위와 같은 글. 관서(關西)의 첫째주(州)이다.
이영간(李靈幹)이 말하기를, "관서의 첫째주로서, 국가의 복된 땅이다." 하였다.
산천 봉세산(鳳勢山) : 부의 북쪽 3리에 있는 진산이다. 비봉산이라고도 이름한다.
천배산(天拜山) : 부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옛 사당이 있다. 도정산(都正山) : 부의 남쪽 2리에 있다.
문서산(文書山) :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용박산(龍縛山)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용박산 그 이름 들은 지 오래였는데, 지금 와서 상봉에까지 올랐네.
나는 새의 등 옆으로 보고, 큰 강의 흐름을 굽어보네. 땅이 터졌으니 산하는 넓기도 한데,
하늘이 둘러싸니 섬은 그윽하구나. 서울이 얼마쯤 떨어져 있나, 올라와서 바라보니 문득 수심이 나누나."
하였다.
태자산(太子山) : 부의 북쪽 25리에 있다. 증산도(甑山島) :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수락산(水洛山) : 부의 남쪽 31리에 있다. 바다 : 서ㆍ남쪽이 모두 바다이다.
여애산(餘哀山) :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우리도(亏里島) : 부의 서쪽 75리에 있다.
모로도(毛老島) : 부의 남쪽 30리 바다 가운데 있다. 반니도(班尼島) : 부의 남쪽 37리, 바다 가운데 있다.
고기 살[魚梁]과 소금 가마[鹽釜]가 있다.
가이도(加耳島) :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적촌포(赤村浦)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풍천(楓川) : 부의 서쪽 21리에 있는데, 근원이 용박산에서 나온다. 금련포(金蓮浦) : 부의 동쪽 8리에 있다.
각산진(角山津) :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배천(白川)ㆍ교동(喬桐)에도 보인다.
○ 고려조 공민왕 7년에 왜구가 각산에 침입하여 배 30여 척을 불태웠다.
나진(那津) : 소초포(所草浦)의 동쪽 13리에 있다.
소초포 : 부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청초호(靑草湖)라고도 한다. 모든 선박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서울에
이른다.
와룡지(臥龍池) : 속명은 남대지(南大池)이며, 부의 남쪽 3리에 있는데, 주위가 20리 1백 2보이다. 겨울철마다,
못의 얼음이 세로 혹은 가로로 갈라지는데 읍 사람들이 용이 갈이하는[龍耕] 것이라 한다. 그것을 보아서 이듬
해의 풍년 흉년을 미리 점친다. 가로로 갈라지면 풍년이 되고, 세로로 갈라지면 물이 넘치고, 전혀 갈라지지 않
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본조 태종 때에 안노생(安魯生)이 그 사실을 알리니 유사(有司)를 명하여,
매년 봄ㆍ가을철에 제사드리게 하였다.
○ 고려조 문종왕이 못 안의 땅이 기름져서 전지를 만들 수 있다 하여 흥왕사(興王寺)에 하사하였다.
그 해에 가무니, 읍의 출신인 한림학사 이영간(李靈幹)의 주청에 의하여 돌려주어 못을 만들게 하였는데,
흑룡(黑龍)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라가더니, 그날로 큰비가 내렸다.
토산 자하(紫蝦)ㆍ백하ㆍ홍어ㆍ조개ㆍ숭어ㆍ붕어ㆍ부레[魚鰾]ㆍ굴ㆍ게ㆍ소금.
봉수 정산봉수(定山烽燧) : 부의 남쪽 32리에 있다.
북쪽으로 주지곶(走之串)에 응하고, 남쪽으로 간월산(看月山)에 응한다.
백석산봉수(白石山烽燧)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서쪽으로 간월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주지곶봉수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서쪽으로 평산부 성관(聲串)에 응하고, 남쪽으로 정산(定山)에 응한다.
간월산봉수 : 부의 남쪽 33리에 있다. 북쪽으로 정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백석산에 응한다.
각산봉수 : 각산진(角山津) 위에 있는데, 서쪽으로 백석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배천군 봉재산(鳳在山)에 응하며,
남쪽으로 경기도 교동현 수정산(喬洞縣 修井山)에 응한다.
신증궁실 객관(客館) : 남곤(南袞)의 〈동헌 중수기(東軒重修記)〉에, "연안은 옛날의 염주(鹽州)이니, 지방에
어렴(魚鹽)의 이익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던 것이다.
서관(西關 황해ㆍ평안도)과 기보(畿輔 경기)간의 중지(重地)에 있고, 서해상의 요충에 해당하여, 수륙의 교통이
얽히고 장사치들이 모여든다. 좌부(左符)주D-001를 쪼개어 가지고 나가 이 고을의 관장이 되는 자로서 행정하
기 어려운 것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열 배뿐만이 아니니, 조정과 변방의 문서에 수응하고 소송을 판결하는 외에
는 다른 일에 미칠 겨를이 없고, 대개는 그럭저럭 지내가려 하였다.
기사년에 내가 외람되이 감사의 책임을 맡고 관내를 순찰하여 연안에 이르러 행장을 동상방(東上房)에 풀고 둘
러보니, 난간과 방문은 낮고 누추하며, 뜰안은 구질구질하고 좁아서 사람을 답답하게 하여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헌(軒)의 동북쪽에는 누각을 지었던 옛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무너져 수풀 가운데 버려져
있었다.
읍 사람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이것이 취원루(聚遠樓)인데, 지난날 비바람에 무너진 것을 고쳐 짓지 못하고
버려둔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한다.
이때 우리 동종(同宗)인 남후(南侯) 효원(孝元)이 부사가 되었다. 내가 후에게 부탁하기를, '누각의 있고 없는
것이 원래 고을 정치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찌 목로(牧老 목은(牧隱))의 기문과 도재(陶齋 도은
(陶隱))의 시를 감히 부셔서 없앨 수 있을 것인가.' 하니, 후가, '그렇다.' 하며, 그 터에다 섬돌을 쌓고 정자를 지
었으며, 정자의 둘레에는 담을 쌓고 시와 기문을 모아서 그 글자를 새겨서 붙이고, 또 남쪽 청사의 옛집을 철거
하고 새 건물로 고쳤다.
다음해 경오에는 내가 벌써 임기가 차서 부름을 받아 돌아오게 되었는데, 도중 연안에 들르니 후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새 정자 위에 마련하였다. 자리에 앉아 사면을 돌아보니, 산천의 형승이 보태진 것 같고 넓어진 것 같
기도 한 것이, 전날의 연안이 아니었다. 내가 술을 들어 후에게 주며 말하기를, "오늘의 이 낙이 모두 주인의 혜
택이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동헌(東軒)만은 생각하지 않는가.' 하니, 후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혼자서만
일을 하겠소. 후일에 반드시 맡을 자가 있을 것이오.' 하며, 웃고 말았다.
지난 가을에, 나의 동년(同年) 유공실(柳公實)이 뜻밖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근래에 연안에서 돌아왔
는데, 그대의 벗 부사 이청원(李淸源)이 감히 새 동헌의 기문을 청구하였소.' 하는 것이었다. 그 경영한 전말을
물으니, 말하기를, '새 동헌의 공사는 순전히 왕명을 받고오는 사신들을 위함이요, 대청까지 새로 짓지 못한 것
은 백성의 노력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지금 여기에, 대청에 붙여서 안방을 만들고 방에 붙여 양헌(涼軒)을 만드
니, 이것은 옛것을 철거하고 새로 세운 것이요, 헌(軒) 북쪽에 긴 집을 짓고, 집 북쪽에 작은 다락을 지으니 이것
은 예전에 없던 것을 새로 지은 것입니다.
주렴이 어른어른하고 창문이 영롱한데, 굽은 난간 가로지른 난간이 둘러싸여 겹겹이며, 올라가서 배회하면 바람
과 날씨가 맑고, 한 점 티끌도 이르지 못하는데, 날아갈 듯이 한 몸이 반 공중에 있는 것 같고, 공중을 내려다보면
전일의 가렸던 것이 드러나고 이지러졌던 것이 완전하여, 어느 것이나 형세에 합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
으며, 문을 헤치고 들어와서 앞에 진열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듣고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연안 고을의 관사가 반드시 청원(淸源)을 기다려서야 새롭게 되었으니,
그것이 역시 무너진 것을 이룩할 운이 있어서인가. 지금 그대가 이미 청원의 말로, 와서 말하니, 이것은 저 목은
(牧隱)이 백성에게 혜택을 입게 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내가 기문을 짓는 것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청원의 기대에 맞을 수 있으리오.' 하고, 해가 넘도록 감히 붓을 들지 못하였다.
청원이 또 서신을 급히 보내어 독촉하기를, '기문이 없으면 낙성을 할 수가 없다.' 하므로, 삼가 무너진 것을 이
룩하는 데 대한 설로 답하기를, '비봉(飛鳳)으로 산을 삼고, 와룡(臥龍)으로 못을 삼았는데, 그 사이에 읍이 된
지 천백 년을 지나왔도다.
그런데 아직도 명칭이 문장으로 나타난 것이 없어 쓸쓸하고 황량한 지역으로 하등 고을이었는데, 취원(聚遠)이
라는 다락이 있은 후로 한산자(韓山子 목은)의 붓으로 찬미함을 얻은 뒤에야 산은 그로 인하여 산이 되고, 못은
그로 인하여 못이 되었도다. 그래서 백천 년 후에 태어난 사람으로도, 당시에 송사성(宋思誠)이라는 사람이 있
었다는 것, 나아가서는 연안 고을에 이러한 형승의 땅이 있은 것이 송 태수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하였으
니, 이것이 어찌 연안 고을의 한 좋은 운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형승은 전과 같지만 인사의 성쇠는 아침저녁으로 변해가는 것이어서, 우뚝하게 높던 것이 비바람에 허
물어졌는데, 그래도 고칠 줄을 모르니, 그 다른 것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그렇다고 하지만 폐해지고 일으키는
것은 운수로서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남후(南侯)를 만나서 전일의 누각이 새 정자가 될 수 있었고, 두 번째로 청원(淸源)을 만나서 옛
객관이 새롭게 되니, 이에 이르러 연안 고을이 운수를 만난 것이 극에 달한 것이다.
비록 산천의 형승이라도 또한 반드시 운을 만난 것을 경축하여야 유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폐지되고 흥하고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은 한 번 가고 한 번 와서 영원히 다하도록 서로 되풀이되는 것이니, 어찌 오늘날 이룩
한 것이 후일의 무너짐이 되지 않을 것인지, 이 동헌이나 이 기문 역시 기둥이 흔들리고 엎어져서 수풀 속에 무
너져 있을 것인지, 현판이 헐려지고 글자가 없어져서 먼지 흙 속에 묻힐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원래 그 책임이 하늘에 있는 것이요, 나나 청원이 아랑곳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청원이 기문 구하기를 할 만한 사람에게 하지 않고 반드시 나에게 하는데, 이것은 새 동헌에 무게를 더
할 수 없는 일이니, 당세의 도재(陶齋)를 구하여 시 짓게 하고 그 사실을 읊조려 전파한 후에야만 청원이 가더라
도 처음 간 것이 아니요, 한 헌(軒)이 헐리더라도 헐리는 것이 아닐 것이니, 힘쓰지 않을 것이랴.
만일 이룩함이 있으면 헐리는 것이 있음은 물(物)의 이치라고 한다면, 헐린 때에 다시 일으키는 것을 청원의 마
음 그대로 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 이 역시 후에 오는 군자들의 힘쓸 일일 것이다. 청원이 이미 비로소 시작함에
힘써 처음 이루었으니, 후에 오는 이가 또 헐리게 될 때에 힘쓴다면, 연안 고을의 관사는 내가 그 이루는 것은 보
고, 그 헐리는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청원의 이름은 윤식(允湜)인데 과거로 출세하였으며, 연안을 다스리는 데
성적이 최우등으로 알려졌다. 이 공사에서 보더라도 역시 알 수 있는 일이다.
을해년 6월 상한(上澣)에 적는다.' 하였다." 하였다.
누정 취원루(聚遠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나의 한 동리 친구 신택민(申澤民)이 연안에 갔다 돌아와서 그 고을 태수인 나의 동년
(同年) 송사성(宋思誠)의 서신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누는 내 눈으로 자세히 본 것이니, 송 부사의 서
신이 거짓말이 아니다.' 하였다. 내가 그에게 물어보니, 비봉산을 의지하고 와룡지를 굽어보면서 좌우쪽으로 돌
아보면 청초호(靑草湖)와 금련포(金蓮浦)이다. 수림이 숨었다 비쳤다 하고 구름과 안개가 변화하니 원래가 사람
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나, 사람마다 기뻐하여 각각 그 마음에 얻음이 있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우리 택민(澤民)이 스스로 얻은 바가 적지 않으나, 이는 역시 말로 전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산수 누대의 좋
은 구경을 한 사람의 몸으로 다하는 것은 옛부터 있지 않았던 일이다. 더구나 본 것이 듣던 것보다 못한 것이 많
은데, 내가 어찌 취원루를 보지 못한 것을 한하겠는가.
또 하물며 택민의 눈으로 본 것이 곧 내 눈으로 본 것과 다름이 없음에 있어서이겠는가.
태산에 올라서서 천하를 작다 하고 동산(東山)에 올라서선 노(魯) 나라를 작다 한 것은주D-002 다름이 아니라,
모이기[聚] 때문이다. 한 도의 책임은 안렴사의 몸에 모이고, 한 부의 책임은 태수의 몸에 모인다.
한 고을의 빼어난 경치는 이 다락에 모이고, 이 한 다락의 빼어난 경치는 이 마음에 모이는 것이니, 아아, 모이고
멀고 크고 작은 것이 하나일 뿐이다. 공사는 김인백(金仁伯)에서 시작하였는데, 지금 전공판서(典工判書) 이방
(李昉)공이 안렴사가 되었을 때에 계획한 것이다. 그 후에, 전 성균좨주(成均祭酒) 정후(鄭侯)가 시어사로서 나와
이 부를 다스리면서 단청을 하였다. 지금 안렴사인 전법정랑(典法正郞) 김효선(金孝先)공이 순시하러 왔다가 올
라서 구경하고 조용히 말하기를, '이 누가 먼 곳의 경치를 모았으니[聚遠] 그것으로 이름을 지으면 어떠하랴.' 하
니, 이에 읍 사람들이 놀라며 기뻐하여 서로 축하하기를, '우리 누가 얼마나 다행한가. 처음 일으킨 이가 안찰공이
며, 지금 이름지은 이도 안찰공이니, 우리 누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였다. 부사가 '그렇다.' 하면서, 드디어
기문을 구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백성이 모이지 않으면 재물이 모이지 않고, 따라서 누도 이루어질 수 없다.
10년을 지나고, 몇 사람을 거쳐서야 누의 일이 완성되니, 이 역시 모이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후일에 이 누에
오르는 이 (부사(府使))들이, 빼어난 경치가 모인 것을 낙으로 삼지 않고, 그 책임이 모인 것으로 근심을 삼는다
면, 모임이 먼 것이다. 그 가까이 모인 것으로 낙을 삼고, 그 낙을 불행하게 하는 자는 홀로 무슨 마음일까.'
하였다." 하였다.
○ 하상봉(夏祥鳳)의 시에, "조서를 받들고 동쪽 나라에 와서, 바로 취원루에 올랐네. 청산은 좌석을 둘렀는데,
푸른바다에 가는 배가 보이는구나. 묘한 곡조는 꽃다운 잔치를 열었고, 맑은 바람은 가을 기운이 동하누나.
이공(李公)이 기문 지었으니, 먼 시골에 광채가 비치누나."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길을 물어 처음 고을에 들렸고, 시를 얻으려고 다시 누대에 오르네. 처마에서 나는
소리 늙은 나무에서 들리고, 돛대 그림자는 돌아가는 배를 알아보겠네. 흰 물결 아침 햇빛에 밝은데, 누런 꽃 늦
은 가을에 비치누나. 취하여 붓을 휘두르니, 호기가 궁벽한 지방을 덮었네." 하였다.
신증 남곤(南袞)의 시에, "먼 멧부리 아득히 보이는데, 질펀한 수풀은 높은 누에 닿았네. 비는 앞 못 언덕을 넘치
게 하였고, 바람은 먼 포구의 배를 몰아가네. 바라보매 시름되니 임금 생각하는 줄 알겠고, 글귀가 여위니 가을
을 슬퍼해서이네. 도재(陶齋)ㆍ목은(牧隱)의 문장 여기 있으니, 정말 바닷가 지역에 빛나누나." 하였다.
학교 향교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성인의 가르침이 천하에 있는 것이, 원기(元氣)가 천지간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 공자께서 산정(刪定)하고 편수(編修)한 시ㆍ서ㆍ춘추는 만세에 법이 되어, 하루라도 강습하지 않을 수 없
는 것은, 역시 원기가 만물을 발육시켜 하루라도 끊어질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원기가 존속되므로 백성들이 그 생을 보존할 수 있으며, 성인의 가르침이 밝아지므로 백성들이 그 윤리를 펼 수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죽음은 모두 있는 것이요, 백성은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는 것이니, 성인의 학문을 강습
하지 않는 것이 백성들의 우환이 되는 점은 천지의 원기가 병든 것보다 더하다. 하물며 원기의 성하고 쇠함은
하늘에 달렸고, 성학(聖學)의 어둡고 밝음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니, 하늘에 달린 것은 우리들이 힘을 써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에게 달린 일이야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을 것인가.
옛날 성인이 상(庠)ㆍ서(序)ㆍ학(學)ㆍ교(敎)주D-003를 설치하여 가르친 것은 모두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
었다. 때문에 위로는 왕궁 국도(王宮國都)에서 아래로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가 있는데,
이것이 인륜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이루어서 지극한 정치를 이룩하는 것이니,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힘쓰지 않
을 수 있겠는가.
고려가 쇠약하여 교화가 무너지자 연안부의 향교도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또 왜구의 난으로 인하여 학업이
중단된 지도 오래였다. 신미년 여름에 나의 동년(同年) 정달몽(鄭達蒙)군이 이 부의 교수관(敎授官)이 되었다.
처음 와서 거처할 곳이 없으므로 절간을 빌려서, 어린이들을 모아 가르치다가 얼마 안 가서 그만두었다.
다음해 임신년에 우리 조선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자, 더욱 문교(文敎) 정치를 중히 여겼는데, 다시 정군을 명하
여 교수의 직책을 주었다. 거처는 전과 같이 빌려서, 강습시키고 권면하기를 더욱 힘썼으며, 개연히 학교를 지을
생각을 가졌다. 3년을 지난 갑술년 봄에, 중훈대부(中訓大夫) 정이(鄭易)가 부사로 부임하여 함께 옛 터를 찾아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통정대부 이성(李晟)이 대신 와서 일을 계속하여 마쳤다.
정 교수가 서울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연안부의 학교는 정사군(鄭使君)이 처음 계획하고, 이 사군이 마침내
이루었으며, 정치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끼친 은택이 있으니, 이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네.
아름다운 산천의 경치는 그래도 이미 직접 본 것이라 가까이서 보면 끊어진 봉우리가 우뚝하고, 소나무 수십 그
루가 그 위에 벌려 심어져 울창하고 깊숙한데, 그 사이에 돌 대가 평탄하고 넓으며 맑고 상쾌하여 앉아서 더위를
씻을 만하다오. 남쪽으로 큰 못에 임하였는데 이름을 와룡이라 하며, 북쪽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였는데 이름을
비봉이라 한다. 청초호(靑草湖)가 그 앞을 돌고 금련포(金蓮浦)가 그 왼쪽을 둘렀으며, 촌락과 들언덕이 보일 듯
말 듯 작고 크게 펼쳐져서 바둑판 같으니, 한 읍의 기이한 경치가 모두 난간 창 사이 좌석 아래에 모였다.
강론하고 공부하다가 둘러보며 읊조리고, 휘파람 불 때는,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화평하여 영욕을 모두 잊으며,
가슴속이 한가롭고 물아(物我)의 간격이 없어지니, 이른바 '나는 증점(曾點)을 허여한다.'고 한 기상을 상상할 수
있고, 멀리 바라보면 동남쪽으로 끝없이 넓은 큰 바다가 하늘에 닿아 둘러있고 널리 퍼져서 한눈에 천 리가 보이
는데, 하늘 끝 땅끝이 아득하여 끝 간 데를 모르며, 흉금이 넓게 틔여 하늘과 같이 넓으니, 공자의 태산(太山)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여기던 뜻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저 쉬고 노는 도(道)주D-004와, 성인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는 학문주D-05에 도움이 되는 공이 적지 않
다. 그러니 어찌 아울러 기록하지 않을 것인가.' 한다.
나는 말하기를, '자네의 말이 너무 크니 처음 배우는 선비는 감히 가까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성문(聖門)의 가르침은 차례가 있으니, 먼저 가깝고 작은 것을 알려주고 후에 멀고 큰 것에 미치는 것이다.
요순(堯舜)의 도는 효제(孝悌)에 근본하여 신명(神明)에 통하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쇄소응대(洒掃應對)에 순종하고 장성하게 되면 예의염치(禮義廉恥)에 힘써서, 안으로는 그 부형
을 섬기고 밖으로는 그 장상(長上)을 섬기며 성인이 산정 편수(刪定編修)한 글을 강습하여 그것을 심신과 사물
의 위에 실천하는 것이니,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의 사이에 어디가나 나의 직책에서 하여야 할 일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인륜이 후하여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성현의 사업을 점차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인재는 국가의 명맥이요, 성인의 교화는 인재의 원기이다. 보존하고 확충하여 이 기운을 배양하여 그 덕을
이룬다면, 인재의 성함이 임금의 덕화를 아름답게 할 수 있고, 세도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후(李侯)가 정치를 하는 데 있어, 학교를 이룩하는 데 급히 하였으니, 그 근본을 알았다고 하겠다.' 하였다."
하였다.
역원 심동역(深洞驛) :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심동원 : 심동역 곁에 있다. 독산원(禿山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각산원(角山院) : 각산진 언덕에 있다. 신원(新院) :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교량 반지항교(反地項橋) : 적촌포(赤村浦)에 있다. 나진교(那津橋) : 반지항과의 거리는 10리이다.
불우 설암사(雪菴寺)ㆍ용봉사(龍鳳寺) : 모두 용박산(龍縛山)에 있다.
장수사(長壽寺)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송청사(松靑寺)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연안사(延安寺) : 태자산(太子山)에 있다. 정산사(定山寺) : 정산에 있다.
홍복암(弘福菴) :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봉세산(鳳勢山)에 있다.
여단(厲壇) : 부 북쪽에 있다. 남신당(南神堂) : 부의 남쪽 7리에 있다.
고적 봉세산성(鳳勢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5천 4백 척이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신증명환본조 남효원(南孝元).
인물고려 태평(泰評) : 경사(經史)를 널리 읽었다. 태조가 개국할 때에 참여하여 힘이 있었으므로 순군낭중(徇
軍郎中)을 제수하였다.
윤선(尹瑄) : 사람됨이 침착하고 용감하며 병법에 통하였다. 처음 궁예(弓裔)가 사람 죽이기를 거리낌없이 하니,
화가 몸에 미칠까 염려하여 드디어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으로 달아나서 무리들을 모아 2천여 명에
이르렀다. 골암성(鶻巖城)에 있으면서 흑수번(黑水蕃)의 무리를 불러들여, 오래도록 변방의 해가 되었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니, 북쪽 변경이 편안해졌다.
김도(金濤) :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홍무(洪武) 2년(공민왕 18년)에 중국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고, 어버이가 연로하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왕이 손수 김도장원 나복산인(金濤長源蘿葍山人)의 여덟 글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 이색(李穡)의 왕이 써준 여덟 글자의 찬(贊)에, "성균사예(成均司藝) 신(臣) 도(濤)가 색에게 말하기를, '도가
불초한 것은 그대도 아는 바이다. 재주는 임금의 부림에 감당할 만하지 못하고, 학문은 임금의 고문(顧問)에 응
할 만하지 못한데도, 위의 돌아보심을 받아 빛나고 친근한 관직에 특별히 뽑혔으니, 참으로 만 번 죽어도 보답할
수 없을까 두려운데, 지금 또 서연(書筵)에서 필묵으로 크게 성명과 자호(字號) 모두 여덟 글자를 써서 하사하시
므로 절하고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송구스러웠다.
어찌 특별한 은총이 이렇게까지 이르렀는가 삼가 장식하고 끈 달아서, 장차 사대부들이 임금의 거룩한 덕을
노래하는 글을 얻어서 불초 이 사람의 이름을 거기에 의하여 영구히 전하려 하는데 그대가 먼저 지어 주지 않겠
는가. 또 나를 도(濤)라고 이름지은 것도 그대요, 나의 자를 장원(長源)이라 지은 것도 역시 그대요, 나를 나복산
인이라 한 것도 또 그대의 의사이니, 원하건대, 그대는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 한다.
신 색이 엎드려 보옵건대, '위의 글씨를 때로 신하들에게 하사하는데, 혹은 이름을 써 주고 혹은 자(字), 혹은 호
를 써 주지만, 일찍이 이름과 자ㆍ호를 이렇게 전부 갖춘 일은 없었으니, 김군으로서 바라던 바에 너무 지나친
데에 놀라고 기뻐하는 것이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감히 전날의 이름지은 뜻과 임금께 지우(知遇)를 받
은 연유를 서술하여 임금의 거룩한 덕을 노래하여 칭송하는 근본을 삼으려 한다.
군이 처음 진사 시험을 볼 때에, 나에게 자기가 지은 글을 고쳐 달라 하였는데 읽어 보니, 옥을 울리는 소리가 나
서 작가(作家)의 기풍이 있었으며, 달포가 못 되어 그 글이 더욱 향상되므로 내가 매우 기뻐하였다.
그가 이름지어 주기를 청하므로 이름하여 도(濤)라 하니 그 글을 아름답게 여김이요, 자(字)를 지어주기를 청하
므로 자를 장원이라 하니, 그 근본을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그 후에 과연 높은 과거에 올라서 어사가 되고 정언이 되어 재주가 날로 진보되었다. 지금 황제가 (명(明) 나라
태조)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크게 천하 선비를 금릉(金陵)으로 불렀는데,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멀리 바다 건너가
기를 꺼려서 움츠리고 물러서서 피하였다.
군이 홀로 단연히 웃으며, '내가 내 글을 시험하여 보리라. 합격하고 합격하지 못하는 것과 죽고 사는 것은 모두
명이니 무엇을 근심하리오.' 하고, 향시(鄕詩)를 보았는데 과연 합격하였고, 회시(會試)에도 합격하였으며, 천자
의 뜰에서 대책(對策) 시험에는 25명의 고등(高等)에 들었다.
이 과거에 합격한 자가 무려 1백 20명이나 되는데, 그 위에 있는 자가 이렇게 적으니, 군의 재주와 실력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구현(丘縣)의 승(丞)을 제수하였는데 사양하기를, '신이 언어가 통하지 않고 또 부모가 모두 늙었
습니다.' 하며,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임금께서, '능하다.' 하시었다.
그러므로 대우를 특별히 후하게 하였는데, 지금 임금이 내려주신 문자가 이렇게도 온전하게 갖춘 것은, 김군의
재주나 학문이 특히 출중한 것을 표창함이다. 그리고 호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고 한 데에는 세 가지 설명이
있다.
김씨는 원래 염주(鹽州) 사람이요, 동복현(同福縣)이 그의 외가인데 동복의 별호가 나복(蘿葍)이다.
군의 부모가 살았으니 그곳은 곧 군의 소자출(所自出)이다. 또 나복이라는 그 물건은 신기하지는 않지만, 싫어
하고 미워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에게 유익하고 사용하여 손해는 없으니, 사람으로서도 이와 같다면 역시 세상
에서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군의 얼굴이 설천민(偰天民)과 유사하므로 고관들이 길에서 군을
만나 설천민의 안부를 물으므로 군이 짐짓 설천민인양 대답하고 물러가니, 듣는 사람들이 웃었다.
그런데 설씨(偰氏)는 회골(回鶻) 사람이기 때문에 친구들이 모두 군을 가리켜 회골이라 한다. 회골 사람들은 천
성이 몸을 깨끗이 하며 의복이 꾸밈에 힘쓰지만, 능히 좋아하는 것을 참고 먹는 것을 박하게 하여 나복을 먹으
며 먹다 남은 것도 버리지 않으니, 회골인의 나복이라는 말이 대개 이러한 것이다.
임금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김도는 설첩해(偰帖該) 같다.' 하였는데, 첩해는 천민의 숙부이다.
그리고 보니 그대를 나복산인이라 호한 것이 어찌 신(臣)의 뜻만이리오. 이래서 김도장원 나복산인의 여덟 글자
가 임금의 글씨에 나타나서, 세상의 드문 영광이 된 것이다. 무릇 신하로서 누가 권면하여 주상이 어진이를 장려
하는 거룩한 뜻에 맞추려 하지 않을 것이리오. 필법을 연구하고 주상의 덕을 선양하며 삼가 머리에 손을 대고 절
하며 찬(贊)을 기술한다.
그 글에 '때마침 한가로울 제 왕의 마음 편안하시었다. 신하의 능함 권장하려고 은총을 하사하셨네.
엷은 서리 희게 펴졌고, 고운 이슬 불어 맑은데, 붓 끝이 돌고 도니 옥이 소리나고 금이 울리네. 규벽(奎璧)이 밝
게 빛나니, 귀신은 유명에서 우네. 절묘함 그 극치에 이르니 말로 형용할 수 없네.
임금의 덕은 바람 부는 것 같아서 부딪치기만 하면 어디서나 소리나네. 혹시라도 이 은혜를 모르면, 금수의 사나
움이리, 그대들 관직에 있는 이는 나의 말을 들어 보소.' 하였다." 하였다.
김장수(金長壽) : 공민왕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하고 가는 곳마다 들이밀렸는데, 김장수가 중랑장
(中郞將)으로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유격전을 하며 최영기(崔英起)를 보내어
달려가서 행재소(行在所)에 보고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상장군 겸 만호를 제수하였다.
또 적이 흥왕(興王)의 행궁(行宮)을 범하니, 최영(崔瑩)을 따라서 군사를 거느리고 행궁으로 달려가 문을 헐고
칼을 빼어들고 들어가서 적을 베고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난리가 평정된 다음 1등 공신에 책정되었다.
본조 김로(金輅) : 개국정사공신(開國定社功臣)이며 벼슬이 연안군(延安君)에 이르고,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김자지(金自知) : 도(濤)의 아들이다. 벼슬이 개성유후(開城留侯)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김여지(金汝知) : 자지의 아우이다. 벼슬이 참찬(叅贊)에 이르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김효성(金孝誠) :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양효(襄孝)이다.
이귀령(李貴齡) :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 잠저(潛邸) 때에, 노관(盧綰)의 옛정주D-006이 있었다.
아우 귀산(貴山)은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석형(李石亨) : 정통(正統) 신유년(세종 23년)에 진사ㆍ생원ㆍ문과 세 시험에 모두 장원하였다.
성종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벼슬이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을 봉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하(金何) : 자지의 아들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선(靖宣)이다.
이보정(李補丁) :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번 간관을 역임하였으며,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숭원(李崇元) : 계유년 과거에 장원하였다. 좌리공신에 참여하였으며,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연원군(延原君)을 봉하였다.
이숙기(李淑琦) : 두 번 무과에 합격하고,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에 참여하였으며, 연안군(延安君)을 봉하
였다. 아우 숙감(淑瑊)은 갑술년 과거에 합격하고, 또 중시(重試)ㆍ발영(拔英) 두 과거에 선발되었으며,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고, 문장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김제신(金悌臣) : 자지(自知)의 손자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김흔(金訢) : 자지의 증손이다. 신묘년 문과에 장원하고 문장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벼슬은 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김륜(金崙) : 자지의 증손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문장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신증 김심(金諶) : 흔의 아우이다. 대과에 장원으로 뽑혔으며, 맑고 곧으며 글을 잘 지었다. 벼슬이 지중추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전(金詮) : 심의 아우요, 자는 중륜(仲倫)이다. 기유년에 장원 급제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효도하고 우애가 있으며 청렴 결백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형제 세 사람이 모두 세상에
알려졌다.
김봉(金崶) : 윤(崙)의 아우인데,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김감(金勘) : 자지의 증손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연산조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봉작되었다.
효자본조 김자렴(金自廉) : 어머니 이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상기가 끝난 후에도 그대로 조석전(朝夕奠)을 드려
폐기하지 않았다. 아버지 극의(克義)가 등창을 앓았는데, 친히 입으로 빨아내었으며, 또 대변을 맛보기도 하였
다. 특별히 절충장군을 제수하였다.
신증 이귀진(李貴進) : 아버지가 나쁜 병이 있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물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어머니도 나쁜 병이 있었는데, 역시 그렇게 하였다. 금상 10년에 정문을 세웠다.
신증열녀본조 송씨 : 선비 민경현(閔景賢)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무덤에 가
서 곡하고 전(奠)을 드리며, 복이 끝난 다음에는 신주를 모시고, 의복 기구를 진열하여 놓고 전드리기를 한결같
이 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금상 5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들이 넓어 먼 바다에 닿았다 : 이원(李原)의 시에, "들이 넓어 먼 바다에 닿았고, 하늘이 낮아 푸른 멧부리에
붙었네." 하였다. 못 물빛은 큰 들에 닿았다 : 권근(權近)의 시에, "못 물빛은 큰 들에 닿았고, 하늘빛은 낮은 멧부
리에 닿았네." 하였다.
용지(龍池)에 한 조각배이네 :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봉악(鳳岳)은 천 층 돌이요, 용지에 한 조각배이네."
하였다.
[비고]
연혁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동부ㆍ서부ㆍ남부ㆍ북부 : 모두 끝이 10리이다. 석곶(石串)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지촌(池村)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적촌(赤村) : 위와 같다.
식척(食尺)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신성(薪城)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개현(介峴) :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소식(召食) : 위와 같다.
대산(大山)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병성(竝城) : 서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유두(楡頭) : 서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잉곶(芿串)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봉촌(蓬村)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송청(松靑)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정촌(亭村)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금암(今巖)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홍장(洪長)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범정(凡庭) :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삼둔(三屯)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 명종 10년에 쌓았는데, 선조 24년에 신각(申恪)이 본부를 지킬 때 수축하였다.
둘레가 1천 3백 89보이다. 옹성(甕城) 2, 성문 4, 해자 깊이가 1장, 우물 5개소가 있다.
고루(古櫐) : 나진포(那津浦) 남쪽 들 가운데 있다.
창고 읍창. 유두창(楡頭倉) : 서남쪽으로 40리 바닷가에 있다.
교량 마진교(馬陳橋) : 서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 풍천교(楓川橋) : 서쪽으로 25리 지점에 있는데, 금사(金沙)ㆍ
용박(龍縛) 두 산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위의 두 다리는 해주 대로로 통한다.
토산 연밥ㆍ마늘.
사원 비봉서원(飛鳳書院) : 선조 병신년에 세우고 숙종 병술년에 사액하였다. 주자 : 문묘편에 보라.
최충(崔冲) : 해주편에 보라. 김굉필(金宏弼)ㆍ이이ㆍ성혼ㆍ박세채(朴世采) : 모두 문묘편에 보라.
현충사(顯忠祠) : 인조 무인년에 세우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이정암(李廷馣) : 자는 중훈(仲薰), 호는 퇴우당(退憂堂). 경주 사람인데 벼슬은 지중추이다.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이며,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신각(申恪) : 평산(平山) 사람이며 벼슬은 병사 부원수인데, 선조 임진년에 화를 입었다.
김대정(金大鼎) : 언양(彦陽) 사람인데 위계(位階)는 가선대부이며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송덕윤(宋德潤) : 연안(延安) 사람이며, 임진왜란 때의 병장인데 벼슬은 첨사ㆍ양근 군수(楊根郡守)이다.
장응기(張應麒) : 자는 경유(景儒), 울진(蔚珍) 사람이며, 다시 무과에 올랐다. 의병장이며 벼슬은 군수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광정(趙光庭) : 자는 응현(應賢), 한양 사람인데 군자주부(軍資主簿)에 추증되었다.
[주 D-001] 좌부(左符) : 임금이 지방에 수령(守令)을 보낼 때에 부(符)를 만들어 두 쪽을 내어 오른쪽 것은
임금이 가지고 왼쪽 것은 수령에게 준다. 그것은 기밀(機密) 명령을 전할 때에 그것을 보내면 맞추어서 표적을
삼게 한 것이다.
[주 D-002] 태산에 올라서서 천하를 작다 하고 동산(東山)에 올라서선 노(魯) 나라를 작다 한 것은 :
공자(孔子)가 그렇게 하였다는 것인데 《맹자(孟子)》에서 나온 말이다.
[주 D-003] 상(庠)ㆍ서(序)ㆍ학(學)ㆍ교(敎) : 고대의 교육기관은 네 종류인데 상(庠)·서(序)·학(學)·교(校)이다.
[주 D-004] 쉬고 노는 도(道) : 옛글에, “학에서 쉬고 학에서 논다.[息焉遊焉]”는 말이 있다.
[주 D-05] 성인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는 학문 : 주염계(周濂溪)의 말에, “선비는 현인을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바라고 성인은 하늘을 바란다.[土希賢, 賢希聖, 聖希天]” 하였다.
[주 D-006] 노관(盧綰)의 옛정 : 한 고제(漢高帝)와 노관(盧綰)이 어릴 때에 한 동리에서 함께 자라며 서로
친밀하였다.
풍천도호부 豐川都護府
동쪽으로 은률현(殷栗縣) 경계까지 25리, 남쪽으로 장연현(長淵縣) 경계까지 33리,
송화현(松禾縣) 경계까지 27리,
서쪽으로 업청강(業淸江)까지 10리, 북쪽으로 허사포(許沙浦)까지 42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6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구을현(仇乙縣)이다 : 굴천(屈遷)이라고도 한다. 고려조 초기에 풍주(豐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조에 도호부로 승격하고, 현종(顯宗)조에 방어사로 고쳤다.
본조 태조 6년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고, 은율현이 와서 합하여 풍률군(豐栗郡)이라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파하고, 각각 예전대로 하였다.
세종 5년에 병마사를 고쳐 첨절제사로 하였는데, 예종 원년에 중궁(中宮)의 외조(外祖)의 고을이었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 명씩이다.
군명 구을ㆍ굴천ㆍ풍주ㆍ서하(西河)ㆍ성해(成海)ㆍ안주(安州).
성씨본부 임(任)ㆍ노(盧)ㆍ문(文)ㆍ김ㆍ옥(玉)ㆍ손ㆍ오ㆍ내(來) : 모두 촌(村). 박ㆍ이ㆍ백ㆍ고ㆍ한(韓)ㆍ
정(鄭)ㆍ강(康)ㆍ류(柳)ㆍ김ㆍ손ㆍ문ㆍ나(羅)ㆍ홍ㆍ유(劉)ㆍ부(部)ㆍ방(方)ㆍ노(盧)ㆍ음(陰)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산천 서린봉(瑞麟峯) : 부의 북쪽 성 안에 있는 진산이다. 장령산(長嶺山)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망덕산(望德山) : 부의 북쪽 2리에 있다. 약산(藥山)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광석산(廣石山) : 부의 서남쪽 25리에 있다.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옛날 중국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 왕래하던
길이다." 하는데, 산 아래 당관(唐館) 옛 터가 있다.
사인암(舍人巖)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박석산(縛石山) : 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송화현 조에도 나온다.
바다 :서북쪽이 모두 바다이다. 석도(席島) : 부의 북쪽 30리 바다 가운데 있다.
초도(椒島) : 부의 북쪽 15리 바다 가운데 있다. 목장(牧場)이 있다. 송포(松浦)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벽달포(碧達浦) : 벽달향(碧達鄕)에 있다. 공민왕(恭愍王) 9년에 홍건적의 배 70척이 와서 정박하였는데,
이방실(李芳實)이 쳐서 30여 급을 베니, 적이 도망갔다. 두요포(豆要浦) : 부의 북쪽 19리에 있다.
업청강(業淸江) :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니, 곧 해포(海浦) 만호영(萬戶營)의 옛 터가 있다.
귀림곶(貴林串) : 부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만호영이 있다.
토산 사(絲)ㆍ마(麻). 뇌록(磊綠) : 부의 북쪽 군장리(軍長里)에서 난다.
철(鐵) : 부의 동쪽 60여 리, 은률현 금산(金山) 경계에서 난다.
옻ㆍ석이ㆍ송이ㆍ자초(紫草)ㆍ청어ㆍ사곽(絲藿)ㆍ지황(地黃)ㆍ부레[魚鰾]ㆍ녹각교(鹿角膠)ㆍ왜저(倭楮).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7백 10척이요, 높이가 6척이다. 성의 동ㆍ서ㆍ북쪽 3면으로 또 무너진
성이 있는데, 벽돌 및 돌과 흙을 섞어서 쌓았으며 안에 민가가 있다.
관방 허사포영(許沙浦營) : 부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업청강에서 여기로 옮겨 왔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신증 비파곶(琵琶串) : 부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가정(嘉靖) 계미년(중종 18년)에 설치하였다.
허사포 만호가 관할하여 상선(商船)이 비밀히 중국에 왕래하는 것을 금하였다.
봉수 소산봉수(所山烽燧)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북쪽으로 은률현 건지산(乾止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고리곶(古里串)에 응한다. 고리곶봉수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남쪽으로 장연현 궤곶(几串)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산에 응한다.
신증궁실 객관 : 강혼(姜渾)의 중수기에, "내가 사가(四佳) 서상국(徐相國)의 풍천 팔영(豐川八詠) 시를 읽고,
풍천이 해안지역의 명승지임을 알았다. 젊어서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두 번 관서지방을 가는 길에 황해도
를 지났지만, 풍천을 경유하는 곳이 아니어서 아직 보지 못하였다.
임신년 정월에, 사문(斯文) 오한상(吳漢相)이 안주목(安州牧)에서 이 부(府)로 전임되었는데, 부임하기 수일 전
에 객관을 지키는 사람이 불을 조심하지 않아서 서헌(西軒) 대청이 다 화재로 없어지고 말았다. 군이 부임한 뒤
둘러보고 말하기를, '아, 이것을 그대로 버려 둘 수 없다.' 하면서, 곧 부로들을 모아 의논하고 계획하여 재목이
며 품삯을 계산하고, 일꾼들에게 맡겨 공사를 독려하니, 장인들은 일에 부지런하고 아전들은 일을 서둘렀다.
구운 기와는 이지러진 것이 없고 다린 재목은 먹줄에 맞으며, 규획하는 것이 제도가 있고 처치하는 것이 방법이
있었다. 백성의 힘을 쓰지 않고 중들을 시키며, 백성의 재물을 손해보게 하지 않고 관청 재물의 남는 것을 사용
하였는데, 이 해 3월 초에 역사를 시작하여 5월에 낙성하였다. 서쪽에 층계를 놓고 단청하여 장식하였다.
대청과 서헌(西軒)이 우뚝 솟으니 한 읍의 장관을 이루었다.
얼마 있다가 나의 동년(同年) 이유청(李惟淸)공과 이세인(李世仁)공이 잇따라 황해도를 안찰하게 되었는데, 모
두 절(節)을 이 부에 멈추었다. 이 집이 넓고 헌출함은 장하게 여겼으나, 옛 헌(軒)이 낮고 좁음을 탄식하며,
모두들 군에게 한꺼번에 새롭게 하여 보라 부탁하였으니, 군의 능력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여력을 가지고 전에 하던 일을 끝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군이 명을 삼가 받고, 다시 일꾼을
모아 맡을 일을 정하고, 또 명령하기를, '앞서의 제도를 고치지 말고, 앞서 하던 공력을 게을리 함이 없이, 맡은
일을 힘써서 끝마침을 잘하게 하라.' 하니, 이속과 장인들이 모두,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부지런히 하지
않는 이가 없고, 서로서로 태수의 명을 저버리는 일이 없게 하자고들 권면하며 여러 사람의 힘이 함께하여 마침
내 완성하게 되었다.
금년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손을 떼었는데, 침방을 동상방(東上傍)이라 하고, 헌을 동헌(東軒)이라 하였다.
터는 옛 터 그대로 하였지만 제도는 보다 더 새로워졌으며, 단청의 빛남과 헌함의 트이고 넓음이 그 아름다움을
다하여 대청ㆍ서헌과 함께 합하여 한 구역이 되니 그 굉장하고 화려함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다시, 동ㆍ서 행랑과 고방ㆍ부엌에 이르기까지도 새로 만들기도 하고 수리하기도 하여 완전히 정비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으니, 대소 빈객이 이 부를 지날 때에는 서늘하고 따스함이 모두 적당하고, 높고 낮은 이가 질서 있어
서 왕명(王命)에 바쁜 중의 노고를 펴고, 기체의 화창함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다시 읍이 더욱 웅장하고, 형세가 더욱 굳건하여지니, 앞에 이른바, 서 상국이 읊은 팔영(八詠)의 경치도,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아졌음을 상상할 수 있겠다.
한스러운 일은 내가 관직에 얽매여서 끝내 한 번 그 사이에 가서 그 여운을 이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군은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시서(詩書)로 출세하여 사마 시험에 나와 같이 합격
하였고, 또 과거에 뽑혀서 안팎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번에 풍천 태수가 되어, 그 시설한 것이 이렇게 여유가
있으니, 군의 재능이 여기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몇 등이 앞섬을 알 수 있다. 군을 계승하여 풍천의 태수가 되는
이들로 모두 군과 같이 부지런히 공수를 받든다면, 풍천 고을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 것인가. 내가 군이 기문을
구함에 당하여, 그 일의 본말을 갖추어 적어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고을 관우(館宇)의 굉장한 것이 오군의
재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하려 한다. 그러나 군이 능히 사람을 사랑하므로 능히 이 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
이니, 세상에 어찌 사람 사랑하는 데 근본하지 않고 능히 일을 이룩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 하였다.
누정 영휘루(迎輝樓) : 객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안산역(安山驛) :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불우 청량사(淸涼寺)ㆍ화장사(華藏寺) : 모두 약산(藥山)에 있다.
안읍사(安邑寺)ㆍ현봉사(縣峯寺) : 모두 풍장산(楓長山)에 있다.
운암사(雲巖寺)ㆍ임한사(林汗寺) : 모두 박석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망덕산(望德山)에 있다.
서해신사(西海神祠) : 고립소 임해봉(古立所臨海峯)에 있는데, 봄ㆍ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드린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초도사(椒島祠) : 관에서 제사드린다.
고적 고행성(古行城) : 부의 서쪽 해변에 있다. 벽돌과 흙을 섞어 쌓았는데, 주위가 1만 1천 81척이다.
안에 샘ㆍ우물 24개소가 있고, 또 연못이 있다. 벽달향(碧達鄕) : 부의 북쪽 25리, 은률현 경계에 있다.
용산향(龍山鄕) : 부의 북쪽 13리에 있다. 풍장향(楓長鄕) : 부의 서남쪽 15리에 있다.
당관향(唐館鄕) : 광석산(廣石山)조 아래에 자세하다. 지촌향(池村鄕) : 부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옛날 중국 가는 사신이 배를 타던 곳이다. 고립소(古立所) : 부의 서쪽 해변에 있다.
명환고려 이행검(李行儉) : 고을 태수가 되었는데, 청렴 간결하기로 알려졌다.
인물
고려 임주(任澍) : 벼슬이 어사에 이르렀다. 임자송(任子松) : 주의 아들인데 적신(賊臣) 조적(曹頔)을 베었다.
정란공신의 호를 하사하고 부원군을 봉하였다.
임경유(任景儒) : 자송의 아들이다.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성균좨주에 이르렀다.
임군보(任君輔) : 경유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 밀직부사에 임명되어, 김난(金蘭)ㆍ목인길(睦仁吉)과 함께 궁중
에서 모든 일을 맡아 하였는데, 임금의 총애가 비할 데 없었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판사사(判司事)가 되었다.
군보가 비록 신돈(辛旽) 때문에 정승은 되었지만, 속으로는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가졌다.
왕께 아뢰어 말하기를, "나라에 사람이 모자라지만 어찌 천한 중으로 정치를 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겠
습니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존오(李存吾)ㆍ정추(鄭樞)가 신돈을 논핵하다가 쫓겨나자 군보가 구원하니, 신돈이 미워하여 후에 왕에게
참소하여 여흥(驪興)으로 귀양보냈다.
본조 노숙동(盧叔仝)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경상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임원준(任元濬) : 문과 장원에 합격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여 서하군(西河君)을 봉하였다.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고,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신증 임유겸(任由謙) :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소간(昭簡)이다.
제영 하늘이 바다와 함께 가이없네 : 이지심(李知深)의 시에, "하늘이 바다와 함께 가이 없으니, 망망하여 바라
보아도 끝간 데가 없구나. 사방으로 천리의 눈이요, 6월에도 9월 가을바람이라네. 그림으로도 묘하게 그릴 수
있으며, 글론들 어찌 잘 묘사하리. 이 몸이 날개가 돋쳐서, 저 공중에 있는 것만 같구나." 하였다.
업청강(業淸江)에 맑은 놀이 족하네 :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업청강 위에서 맑은 놀이 족한데, 끊어진 기러기
소리가 푸른 나무 가을에 높았네." 하였다.
갈대숲 쓸쓸히 바다 북쪽 모퉁이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가을 바람에 한 번 석양루(夕陽樓)에 오르니,
갈대숲 쓸쓸히 바다 북쪽 모퉁이네." 하였다.
조수가 물러가니 물가가 희네 : 이종검(李宗儉)의 시에, "조수가 물러가니 물가 희고, 연기가 걷히니 풀ㆍ나무
푸르네." 하였다.
팔경 서거정(徐居正)의 시와 서문에, "풍천의 빼어난 산수가 관서에서 제일이 되는데, 서하군 임원준(任元濬)
공이 부의 팔영(八詠)으로 나에게 시를 구한다. 내가 생각건대, 옛사람이 이르기를, '인걸(人傑)은 지령(地靈)
이라.' 하였다.
대개 땅이 영(靈)하면 사람이 반드시 걸(傑)이 나며, 사람이 걸나면 땅이 더욱 영해지는 것이다.
신야(辛野)는 이윤(李尹) 때문에, 위수(渭水)는 여상(呂尙) 때문에, 융중(隆中)은 제갈공명(諸葛孔明) 때문에,
엄릉뢰(嚴陵瀨)는 엄광(嚴光) 때문에, 창려(昌黎)는 한퇴지(韓退之) 때문에, 기주(蘷州)는 두자미(杜子美) 때문에,
미산(眉山)은 소동파(蘇東坡) 때문에, 부옹(涪翁)은 황노직(黃魯直) 때문에, 저주(滁州)는 구양수(歐陽修) 때문에,
모두 그 사람들 때문에 땅이 더욱 영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걸한 것은 반드시 땅의 영함이 아닌 것이 아니다. 임씨(任氏)는 고려의 시중 자송(子松)으로부터
크게 가문의 명성을 떨치고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여 왔다. 지금 서하군은 대과에 뽑혔으며, 기린각(麒麟閣)
에 그림 그리고 묘당에 올라서 아들이나 손자가 모두 당대에 이름났으니, 그 땅으로 하여 사람도 걸(傑)로 낳음
을 알 수 있다.
비루함을 헤아리지 않고 절구 8수를 써서 제영(題詠)의 장본을 삼는다." 하였다.
초도춘운(椒島春雲) : 바다 위의 높은 봉우리 푸른 잠(簪)이 솟았는데, 한가로운 구름 막막하여 엷은 그늘 희롱
하네. 봄철 되면 때맞추어 오는 비가 되니, 무심한 듯하지만 역시 유심(有心)하다네.
업청추월(業淸秋月) : 풍랑은 고요하고 가을달 밝으니 대지(大地)의 산하가 한없이 맑구나. 물결 속에는 구슬이
눈물 있으리니,주D-001 짐짓 조는 용을 깨워 일으키리.
쌍지함담(雙池菡萏) : 모난 연못이 위아래로 푸르게 늠실거리는데, 붉은 연꽃 성하게 피니 한 기이한 경치로다.
저 꽃 따라 때로 놀이배로 저어가는데, 누가 있어 약야사(若耶詞)주D-02를 부를 줄 아나.
일경양류(一徑楊柳) : 누가 황금실 1만 올을 날려내었나, 봄바람에 일도 많아 아리따운 모습 희롱하네.
바람에 불려 미친 버들개지는 될지언정, 아예, 풍류스럽게 여자의 허리주D-03는 배우지 말라.
박석적설(縛石積雪) : 박석산 앞에 눈발이 빽빽하더니, 푸른 산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희어졌네.
아마도 새벽에 일어나 시 지을 때는, 은해(銀海)가 어른거리고, 옥루(玉樓)가 얼[凍] 것이네.주D-04
청량효종(淸涼曉鐘) : 절간이 한산(寒山)주D-05 몇째 층에나 있나. 종소리 달에 섞이니 새벽바람 맑구나.
들으매 절로 깊은 반성 생기니, 이 좋은 시는 누구의 시가 소릉(少陵) 같을 거나.
망덕영사(望德靈祠) : 산은 깊고 사당 그윽하여 신명하기도 한데, 몇 사람의 주민들 애써가며 영험 비는구나.
신령 있다면 근년에는 부끄러울 것이, 전란 흔적 무슨 일로 아직도 가시지 않나.
환관교목(環館喬木) : 옛 나무들 삐죽삐죽 몇 봄이나 겪었나. 이즈음은 모두가 늙은 용의 비늘 되었네.
주D-06 옛 집의 문헌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또다시 용두(龍頭) 제일인(第一人)주D-07을 보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문헌비고》
방면 읍내 : 끝이 10리이다. 유산(遊山) :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율리(栗里)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하리(下里)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상리(上里)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천동(泉洞)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인람(仁嵐)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진등(眞等) :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벽달향(璧達鄕)은 북쪽으로 25리이다. 용산향(龍山鄕)은 북쪽으로 25리이다.
풍장향(楓長鄕)은 서남쪽으로 15리이다. 광관향(廣館鄕)은 광석산(廣石山) 아래에 있다.
영아 좌영(左營) : 인조조에 설치하였다.
○ 좌영장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하였다.
○ 속읍은 풍천ㆍ장연(長淵)ㆍ은율(殷栗)ㆍ장련(長連)ㆍ문화(文化)ㆍ송화(松禾)ㆍ강령(康翎)이다.
진보 초도진(椒島鎭) : 섬 가운데에 있는데, 원사(元史) 지지(地志)에, "초도진을 북쪽 경계로 삼았으며 맹주
(孟州)의 땅으로 비파곶(琵琶串)과는 30리 거리인데 지금은 독진(獨鎭)이 되었다." 하였다.
○ 수군첨절제사 1명이다.
혁폐 석도진(席島鎭) : 원사 지지에, "석도진을 북계로 삼았으며 선주(宣州) 땅이다.
원종(元宗) 10년에 원 나라에 몰수되었다가 뒤에 반환되었다." 하였다.
업청강진(業淸江鎭) : 옛날에 수군만호가 있었다.
귀림곶진(貴林串鎭) : 북쪽으로 40리 지점에 있는데 옛날 수군만호가 있었다.
○ 추포방소(追捕防所) : 초도ㆍ허사포(許沙浦) 당관포(唐館浦). 위의 세 곳은 추포무사(追捕武士)가 있었다.
○ 초도ㆍ석도는 모두 요망장졸(暸望將卒)이 있었다.
요망(瞭望) 12곳이다.
창고 읍창ㆍ임창(任倉) : 함께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 서쪽 바닷가에 있다.
둔창(屯倉) : 서남쪽 바닷가에 있다.
목장 초도장(椒島場) : 감목관(監牧官)이 있었는데 초도첨사가 겸하였다.
혁폐 석도장 : 성종조 때 황주(黃州) 철도(鐵島)에서 이곳에 옮겼다.
토산 벼룻돌ㆍ옻(漆)ㆍ꿀ㆍ청각(靑角)ㆍ황각(黃角)ㆍ세모(細毛)ㆍ쪽[藍]ㆍ전복ㆍ해삼ㆍ조개.
궁실 천사관(天使館) : 옛날 중국의 사신이 이곳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지었다.
황화문(皇華門) : 물길로 중국에 조회갈 적에 뗏목이 경유하던 곳이므로 이름지었다.
○ 《당서(唐書)》에, "등주(登洲)에서 바다를 지나 곧 남쪽으로 해연(海堧)을 끼고 패강(浿江 대동강) 어귀
초도를 지나면, 신라 서북의 경계가 된다." 하였다.
[주 D-001] 물결 속에는 구슬이 눈물 있으리니, : 바다 속에 교인(鮫人 : 인어)이 있는데 울면 눈물이 구슬이
된다. 이상은(李商隱)의 시에, “바다에 달이 밝으매 구슬에 눈물이 있다.[滄海月明珠有珠]” 하였다.
[주 D-02] 약야사(若耶詞) : 오월(吳越) 지방 약계야계(若溪耶溪)에 채련(采蓮)하는 여자가 많으므로
이태백의 시에, “약야계 옆 채련하는 계집.”이라는 시가 있다.
[주 D-03] 여자의 허리 : 여자의 가는 허리를 버들개지에 비유하였다.
[주 D-04] 은해(銀海)가 어른거리고, 옥루(玉樓)가 얼[凍] 것이네. : 도서(道書)에 사람의 눈을 은해(銀海)라
하고 어깨를 옥루(玉樓)라 하였다.
[주 D-05] 한산(寒山) : 당나라 장계(帳繼)의 시에, “고소성 밖 한산사에 밤중에 종소리가 손의 배에 이르네.
[姑蘇城外寒山寺夜半鐘聲到客船]” 하였다.
[주 D-06] 이즈음은 모두가 늙은 용의 비늘 되었네. : 늙은 소나무의 껍질을 말하였다.
[주 D-07] 용두(龍頭) 제일인(第一人) : 과거에 장원한 사람이다.
배천군 白川郡
동쪽으로 강음현(江陰縣) 경계까지 27리, 개성부 경계 벽란도(碧瀾渡)까지 33리, 남쪽으로 해안까지 38리,
서쪽으로 연안부(延安府) 경계까지 23리, 북쪽으로 평산부(平山府) 경계까지 40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도랍현(刀臘縣)이다 : 치악성(雉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구택(雊澤)으로 고쳐서 해고군(海皐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으며 고려조 초기에 백주(白州)라고
하였다.
현종(顯宗)조에 평주(平州)에 예속하고,
의종(毅宗)조에 토산 중흥궐(免山重興闕)을 창건하였으며 지개흥부사(知開興府事)로 승격하였다가,
후에 다시 예전 이름으로 하였다. 고종조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이인식(李仁植)의 고향이라 하여
충익현령(忠翊縣令)으로 승격하고, 원종(元宗)조에, 위사공신 조오(趙璈)의 고향이라 하여 복흥군(復興郡)으로
승격하였다. 공민왕조에 시중 경복흥(慶復興)의 이름을 피하여 다시 백주라 하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하여, 경기도에서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한 명씩이다. 신증 금상 21년에,
고을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 자 있어 현(縣)으로 강등시켰다.
관원 현령 : 한 사람이다.
군명 도랍ㆍ치악성ㆍ구택ㆍ백주ㆍ개흥ㆍ충익ㆍ복흥ㆍ은천(銀川).
성씨본군 조(趙)ㆍ유(劉)ㆍ음(陰)ㆍ길(吉)ㆍ오(伍)ㆍ양(梁)ㆍ심ㆍ윤ㆍ정(井)ㆍ노(魯). 마(馬) : 촌(村). 호(扈)ㆍ
최 : 모두 속(續).
풍속 풍속이 배를 저어 다니며 장사하기를 좋아한다. : 지지(地志).
산천 치악산(雉岳山) : 고을 북쪽 1리에 있는 진산이다.
봉재산(鳳在山) : 고을 남쪽 20리에 있는데 차자산(車子山)이라고도 한다.
황의산(黃衣山)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천등산(天登山) :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고려산(高麗山) : 고을 서쪽 21리에 있다.
토산(免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거압산(居鴨山) : 고을 남쪽 13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대이산(大耳山)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시산(匙山)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바다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금곡포(金谷浦) : 고을 동쪽 25리에 있는데, 강음현 조읍포(助邑浦)의 하류로서 조세(租稅)를 운수하는 곳이다.
대교포(大橋浦) : 고을 남쪽 5리에 있는데 근원이 세 갈래가 있다. 하나는 황의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고려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연안부 용박산(龍縛山)에서 나오는데,
고을 서쪽 감물라(甘勿羅)포에서 합류하여, 광정도(匡正渡)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각산진(角山津) : 고을 남쪽 25리, 연안부 경계에 있는데, 교동(喬桐)에 들어가는 자가 이곳을 경유한다.
광정도(匡正渡) : 고을 동쪽 10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벽란도(碧瀾渡)와의 거리는 10리이다.
성천(星川)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근원이 평산 지경 금산(今山) 아래서 나와, 고을 서쪽 감물라포로 들어간다.
우피포(牛皮浦)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전점온천(氈岾溫泉)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대교온정(大橋溫井)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신증 소정(所井)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물이 돌구멍에서 나오는데, 끌어서 논에 물을 대며 가물 때면 비를
빈다.
토산 제호유(鵜鶘油)ㆍ숭어ㆍ붕어ㆍ부레[魚鰾]ㆍ게.
봉수 봉재산봉수(鳳在山烽燧) : 동쪽으로 미라산(彌羅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연안부 각산(角山)에 응한다.
미라산봉수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동쪽으로 부모리(夫毛里)에 응하고, 서쪽으로 봉재산에 응한다.
부모리봉수 : 고을 동쪽 35리에 있다. 동쪽으로 개성부 신당(神堂)에 응하고, 서쪽으로 미라산에 응한다.
누정 취경루(聚景樓) : 객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금곡역(金谷驛) : 금곡포(金谷浦)에 있다.
보달원(普達院) : 고을 동쪽 40리에 있다. 소초원(所草院) : 고을 남쪽 12리에 있다.
창고 금곡포창 : 해주ㆍ연안ㆍ풍천ㆍ신천ㆍ장연ㆍ문화(文化)ㆍ강령(康翎)ㆍ옹진(甕津)ㆍ송화ㆍ장련(長連)ㆍ
은률 및 본군의 전세(田稅)를 여기에서 거두어, 배로 서울까지 수송한다.
교량 대교(大橋) : 대교포에 있는데, 배들이 다리 아래로 지나간다.
불우 강서사(江西寺) : 고을 동쪽 광정도(匡正渡) 위에 있는데 견불사(見佛寺)라고도 한다.
중 혜소(惠素)가 여기 거주하였는데 김부식(金富軾)이 늘 나귀를 타고 방문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외로운 구름 바위 구멍에서 나오고 큰 강이 흐르는데, 상국(相國)이 나귀 타고 찾아드니
지경이 더욱 그윽하네. 무슨 일로 기별도 없이 자주 왕래하나, 산승(山僧)이 술 사가지고 함께 다락에 오르네."
하였다.
○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혼자서 푸른 나귀 타고 청산을 찾아드니, 산승이 응당 후세의 풍간(豐干)주D-001
이리. 이 늙은 중의 실없이 말 많은 것이 아니더라면, 누가 누런 사립문[黃家]의 상상(上相)으로 보겠나."주D-02
하였다.
○ 한수(韓脩)의 시에, "강 위의 푸른 산 백 층으로 첩첩한데, 한 노새의 맑은 그림자 물 속에 거꾸로 비치네.
왕래하는 그 낙(樂)이 무슨 일인지, 억지로 말하기를 중을 찾는다지만, 중은 있지 않다네." 하였다.
신증 신종호(申從濩)의 시에. "시달려서 병들어도 그대로 객이 되니, 하늘가에 길 가기도 어렵네. 강산은 혹 다
할 날이 있을 수 있으나, 서릿발에 찬 것을 견딜 수 없구나. 매화 꽃봉오리 보니 벌써 봄 들어 온 것 놀래고,
산초꽃 피어 해[歲] 저문 것을 알려주네. 만년에 불쾌한 일도 많으니, 어찌하면 이 시름을 없이 할거나."
하였다.
등암사(燈巖寺) : 천등산(天登山)에 있는데,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공민왕의 탄생한 곳이라 한다.
관음사(觀音寺) : 치악산에 있다. 호국사(護國寺)ㆍ여흥사(麗興寺)ㆍ선정사(禪定寺) : 모두 고려산에 있다.
늑암사(勒巖寺)ㆍ비구사(比丘寺) : 모두 황의산에 있다. 성일사(聖日寺)ㆍ운령사(雲嶺寺)ㆍ
배암사(背巖寺) : 모두 치악산에 있다. 석봉사(石峯寺) :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벽해사(碧海寺) : 거압산(居鴨山)에 있다. 정명사(正明寺) : 대이산(大耳山)에 있다.
수월사(水月寺) : 봉재산(鳳在山)에 있다. 청송사(靑松寺) : 시산(匙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치악산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중흥전(重興殿) : 고려조 의종(毅宗) 12년에, 유원도(劉元度)가 아뢰기를,
"백주(白州)의 토산 반월강(免山半月岡)은 실로 우리나라가 중흥할 땅이니, 여기에 궁실을 짓는다면, 7년 안에
북쪽 오랑캐를 항복받을 수 있다." 하니, 최윤의(崔允儀)를 보내어 풍수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돌아와서 아뢰기를, "산이 조공(朝拱)하고 물 흐름이 순하니 궁실을 지을 만합니다." 하였다.
이에 박회준(朴懷俊) 등을 명하여, 이곳에 별궁을 짓게 하고, 이름하여 중흥전이라 하였는데,
술객들이 은밀히 말하기를, "이곳은 도선(道詵)의 이른바 경방(庚方)에 객호(客虎)가 머리를 들고 덮쳐오는
형세이니, 여기에 궁궐을 지으면 위망(危亡)의 근심이 있을 듯하다." 하였다.
치악산 : 돌성의 옛 터가 있는데, 주위가 1만 2천 6백 척이다.
인물
고려 조반(趙胖) : 신우(辛禑) 때에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이 그들의 억센 종들을 내놓아 남의 전지를
빼앗게 하였는데, 조반의 전지도 흥방의 종 이광(李光)에게 빼앗겼다. 조반이 애걸하니 흥방이 전지를 돌려주었
는데 이광이 다시 빼앗고 모욕을 주었다.
조반이 분노를 참지 못하여, 수십 기(騎)로 광의 집을 둘러싸고 잡아 베어버렸는데, 우(禑)가 그것을 이용하여
임견미ㆍ염흥방을 베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후에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고 벼슬이 문하부사에 이르렀다. 복흥군(復興君)을 봉하였으며,
시호는 숙위(肅魏)이다.
본조 조서강(趙瑞康) : 반의 아들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조서안(趙瑞安) : 서강의 아우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개성부 유수에 이르렀다.
효자본조 권거의(權居義) : 고려 신우 때에 상례(喪禮) 제도가 문란하여 모두 백 일 간 복을 입고 벗었는데,
거의(居義)만은 3년간 시묘 살았다. 정문을 세웠다. 신증 안규(安珪) : 열녀 원씨(元氏)의 아들이다.
일찍이 집에 불이 났는데, 원씨가 남편의 신주를 안고, 미처 나오지 못하고 엎어지니,
안규가 불 속으로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신주를 안고 나왔는데 머리와 얼굴이 모두 데어 문드러졌다.
홍치(弘治) 신해년(성종 22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본조 원씨(元氏) : 송화 현감 안근후(安謹厚)의 아내다. 근후가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이 3년을 하고,
그대로 무덤 곁에서 살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신씨(申氏) : 전 강음 현감 이종운(李種耘)의 아내이다. 그의 남편이 세상 떠난 후로 30여 년을 아침저녁으로
친히 제사드리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세은(世隱) : 호장(戶長) 조생(趙生)의 아내이다. 일찍이 밤에 범이 방에 들어와서 남편을 움켜가는데,
세은이 전판(剪板)으로 범의 머리를 치니 범이 버리고 달아났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
하였다.
신증 변씨(邊氏) : 충의위(忠義衛) 조여익(趙汝翼)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남편이 술에 취하여 길에서 죽었
는데, 애통해하고 먹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빨리 죽어서 따라가기 소원이다." 하고는,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
금상 1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은천(銀川)에 조수가 들어오려 하네 :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치악산에 구름 아직 있고, 은천에 조수가
들어오려 하네." 하였다.
치악과 토산은 상하를 다투네 :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치악과 토산은 상하를 다투고,
은천과 금곡(金谷)은 가운데와 가에 나뉘였네." 하였다.
[비고]
연혁 중종 21년에 현령(縣令)으로 강등시켰다 : 아비를 죽인 옥사로써 30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유천(柳川) : 남쪽으로 처음 10리, 끝이 20리이다. 소학포(小鶴浦)ㆍ노천(蘆川)ㆍ
각산(角山) : 위의 3면은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인데, 모두 바닷가이다.
지척(紙尺)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여의(如意)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서촌(西村) : 서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동촌 : 동쪽으로 끝이 20리이다.
화산(花山)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0리이다. 도상(道上) :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도하(道下)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상금산(上金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하금산 : 위와 같다. 금곡(金谷)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무구리(無仇里)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발산(鉢山) :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성지 읍성 : 다만 터만 남아 있다. 미륵산고성(彌勒山古城)ㆍ강서사성(江西寺城) : 모두 터만 남아 있다.
창고 읍창. 해창(海倉) : 금곡에 있는데 조창(漕倉)의 옛 터만 남아 있다.
향창(餉倉) : 개성 여현진(礪峴鎭)에 있다.
진도 벽란도(碧瀾渡) : 동남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는데, 황해 우도(右道)의 서울로 통하는 대로(大路)이다.
이포진(梨浦津) : 동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여현진으로 통한다.
전포진(錢浦津) : 동쪽으로 25리 지점에 있는데, 개성으로 통하는 샛길이다.
각산진(角山津) : 남쪽으로 40리 지점인 연안 경계에 있는데, 남쪽으로 교동(喬桐) 북진(北津)으로 통한다.
사천진(蛇川津) : 소진(小津)이다.
교량 주교(舟橋)ㆍ누교(樓橋). 해교(蟹橋) : 대교천(大橋川)에 있는데 옛날 산수(山水) 편에 상세하다.
토산 위어(葦魚)ㆍ농어ㆍ마늘ㆍ배.
사원 문회서원(文會書院) : 선조 병오년에 중건하고 인조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숙종 경신년에 동서사(東西祠)
를 창건하고 무인년에 연이어 사액하였다. 두 차례 모두 어필이었는데,
병오년 중건 때 주지번(朱之蕃)에게 부탁하여 서액(書額)을 썼다. 이이ㆍ성혼 : 모두 문묘 편에 보라.
조헌(趙憲) : 김포 편에 보라. 박세채 : 문묘 편에 보라.
○ 이상은 서사(西祠)이다.
안당(安瑭) : 자는 언보(彦寶)이며 순흥(順興) 사람인데 중종 신사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좌의정이고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신응시(辛應時) : 자는 군망(君望), 호는 백록(白麓)인데 영월(寧越) 사람이다.
벼슬은 부제학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오억령(吳億齡) : 자는 대년(大年), 호는 만취(晩翠)인데 동복(同福) 사람이다. 벼슬은 우참찬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덕함(金德諴) : 사천(泗川) 편에 보라.
○ 이상은 동사(東祠)이다.
[주 D-001] 풍간(豐干) :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士)에 있던 중이다. 태주 자사(台州刺史) 여구윤(閭丘胤)
이 풍간에게 묻기를, “태주에 높은 중이 있는가.” 하니, 풍간이, “국청사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왔으니,
부엌에서 그릇을 씻는 심부름을 하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다.” 하였다. 여구윤이 부엌에 가서 한산과 습
득에게 절을 하니, 두 중이 웃으며, “풍간이가 말이 많아서 누설시켰구나.” 하였다.
[주 D-02] 누가 누런 사립문[黃家]의 상상(上相)으로 보겠나." : 정승의 문에 누런 칠을 한다.
작자(作者)가 정승의 행색을 감추고 절에 갔는데, 중들이 알았으므로 위에 인용한 풍간(豐干)에게 비하였다.
옹진현 甕津縣
동쪽으로 해안까지 25리, 해주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해안까지 20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6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9리이다.
건치연혁 원래는 고구려의 옹천(甕遷)인데 고려조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조에 현령을 두었다.
본조 태조 6년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 5년에 고쳐 첨절제사라 하였으며, 후에 다시 현령으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 한 사람이다.
옹천.
성씨본현 이ㆍ김ㆍ하(賀)ㆍ나(羅)ㆍ구(瞿). 노(盧)ㆍ박 : 모두 속(續).
만진(萬珍) 나ㆍ이ㆍ강(康)ㆍ김ㆍ황.
풍속 주민들은 어렴(魚鹽)으로 생활을 한다 : 지지(地志).
산천 화산(花山) : 고을 동쪽 2리에 있는 진산이다. 관산(館山)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어을 마산(於乙亇山)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강령현(康翎縣) 편에 보인다.
개룡산(開龍山) :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연근산(連根山)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바다 : 고을 남쪽 4리에 있다.
소강(所江) : 소(所)는 원래 소(蘇)이다.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서경포(西京浦)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소금 가마가 있다. 어화도(魚化島)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비압도(飛鴨島) : 고을 남쪽 22리에 있다. 화도(火島) : 고을 남쪽 25리, 바다 가운데 있는 어량이 있다.
마합도(磨蛤島) : 고을 서쪽 80리 바다 가운데 있다.
고도(孤島)ㆍ모도(謀島)ㆍ거차도(巨次島)ㆍ기린도(麒麟島) : 모두 고을 남쪽 30리 바다 가운데 있다.
창린도(昌麟島) : 고을 서쪽 70리 바다 가운데 있다. 목장이 있다.
토산사(絲)ㆍ마(麻)ㆍ자초(紫草)ㆍ미역ㆍ황각(黃角)ㆍ조기ㆍ청어ㆍ죽합(竹蛤)ㆍ부레[魚鰾]ㆍ복어ㆍ홍합ㆍ
낙지ㆍ소라ㆍ굴ㆍ청각(靑角)ㆍ사곽(絲藿).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5백 24척이요, 안에 우물 세 곳이 있다.
관방 소강진(所江鎭) : 수군 첨절제사영이 있다. 관할하는 곳은 광암량(廣巖梁)ㆍ아랑포(阿郞浦)ㆍ
오차포(吾叉浦)ㆍ허사포(許沙浦)ㆍ가을포(茄乙浦)ㆍ용매량(龍媒梁)이다.
○ 첨절제사 한 사람이다.
관량수(館梁戍) : 고을 서쪽 8리에 있는데 수어군(戍禦軍)이 있다.
봉수 개룡산봉수(開龍山烽燧) : 서쪽으로 장연현 대곶량(大串梁)에 응하고, 동쪽으로 금물여산(今勿餘山)에
응한다.
금물여산봉수 :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동쪽으로 탄항산(炭項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개룡산에 응한다.
탄항산봉수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 강령현 밀점(密岾)에 응하고, 서쪽으로 금물여산에 응한다.
누정 망해루(望海樓) : 객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문라역(文羅驛) : 고을 남쪽 4리에 있다.
불우 연근사(連根寺) : 금봉산(金鳳山)에 있다. 개룡암(開龍菴) : 보운산(寶雲山)에 있다. 심적암(深寂菴)ㆍ
망해사(望海寺) : 모두 청암산(靑巖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 고을 북쪽 2리에 있는데, 안에 우물 아홉 곳이 있다.
행성(行城) : 고을 남쪽 5리에 있는데, 토성이 있다.
회산목책(回山木柵) :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만진장(萬珍莊) :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효자본조 양귀진(梁貴珍) : 나이 9살에 아버지 인길(仁吉)이 간질을 앓았는데, 곧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신증 호계현(胡繼賢) : 아버지가 간질이 있었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18년에
정문을 세웠다.
[비고]
연혁 숙종 4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방면 읍내 : 서쪽으로 끝이 20리, 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동면(東面) : 끝이 15리이다. 남면 : 끝이 20리이다.
서면 : 끝이 30리이다. 용연(龍淵) : 서쪽으로 끝이 60리이다. 만진장(萬珍莊)은 서쪽으로 40리이다.
성지 행영성(行營城) : 소강(所江)에 있는데 둘레가 1천 5백 40보(步), 호지(壕池)의 길이가 83척이다.
영아 수영(水營) : 숙종 45년에 설치하였다.
관원 황해도 수군절도사 : 옹진도호부사를 겸하였다. 중군(中軍) : 곧 수군우후(水軍虞侯).
역학훈도(譯學訓導) 각 1명이다.
속읍 해부ㆍ풍천ㆍ장연ㆍ연안ㆍ안악(安岳)ㆍ백천ㆍ은율(殷栗)ㆍ장련ㆍ강령.
속진 백령ㆍ초도ㆍ등산(登山)ㆍ용매(龍媒)ㆍ허사(許沙)ㆍ오차(吾叉)ㆍ조이(助泥). 본영 및 속읍ㆍ속진에 각양
전선이 1백 8척이 있다 : 진강(津舡)은 25척이다.
진보 추포방소 : 저작포(底作浦)ㆍ마합포(磨蛤浦)ㆍ갈합포(葛蛤浦) 위의 세 곳에는 추포무사(追捕武士)가 있다.
○ 어화도(魚化島)ㆍ기린도(麒麟島)ㆍ창린도(昌麟島)는 모두 요망장졸(瞭望將卒)이 있다. 요망(瞭望)이 다섯
곳이다.
봉수 대점(大岾).
창고 읍창ㆍ고(庫) 4개. 서창(西倉) : 서쪽으로 50리 지점에 있다.
목장 기린도장(麒麟島場). 혁폐 창린도장(昌麟島場).
토산 실미역ㆍ고동ㆍ소금.
누정 누피향정(樓披香亭) : 모두 읍내에 있다. 세검정(洗劍亭) : 행영(行營)이다.
송화현 松禾縣
동쪽으로 신천군 경계까지 72리, 서쪽으로 풍천부 경계까지 11리, 남쪽으로 장연현 경계까지 53리,
북쪽으로 은률현 경계까지 1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2리이다.
건치연혁 청송현(靑松縣)은 원래 고구려의 마경이(麻耕伊)요, 가화현(嘉禾縣)은 원래 고구려의 판마곶(板麻串)
이었는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함께 풍천(豐川)에 예속하고, 예종(睿宗)조 초에 각각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8년에 두 현을 합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마경이ㆍ판마곶ㆍ청송ㆍ가화.
성씨청송 송ㆍ이ㆍ나(羅)ㆍ오ㆍ장(張). 유(庾) : 다른 곳에서 왔다.
가화 건(騫)ㆍ이ㆍ척(拓)ㆍ임(林)ㆍ오ㆍ유(柳)ㆍ전(田)ㆍ나ㆍ홍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영령(永寧) 진(陳)ㆍ전(田)ㆍ최ㆍ강(康)ㆍ임(任).
산천 묵산(墨山) : 고을 북쪽 15리에 있는 진산이다. 용문산(龍門山) : 고을 동쪽 40리에 있다.
달마산(達磨山)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박석산(縛石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수회천(水回川) : 고을 동쪽 20리에 있는데, 묵산에서 나와 흘러서 장연현 남대천(南大川)으로 들어간다.
소교천(燒橋川) : 고을 동쪽 60리에 있는데, 달마산에서 나와 흘러서 신천군 누교천(樓橋川)으로 들어간다.
온천 : 고을 남쪽 15리, 판교리에 있다.
토산 무쇠 : 은률현 지경 금이산(金伊山)에서 난다. 자초(紫草)ㆍ은어ㆍ옻.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유안역(維安驛)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가을원(茄乙院)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불우 수증사(修證寺) : 묵산에 있다. 보림사(寶林寺) : 용문산에 있다. 안원사(安圓寺) : 달마산에 있다.
약산사(藥山寺) : 화약산(火藥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고을 북쪽 4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총묘 임자송묘(任子松墓) : 고을 북쪽 고암리(高巖里)에 있다.
고적 영녕폐현(永寧廢縣) : 원래, 고구려 웅한이(熊閑伊)인데 고려조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조에
풍주(豐州)에 예속하고, 후에 신천(信川)으로 이속하였다.
본조 태조 5년에 가화현(嘉禾縣)에 이속하였고, 태종 8년에 폐지하여 직촌(直村)으로 하였는데 고을 남쪽 30리
에 있다. 신점고성(新岾古城)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돌과 흙을 섞어 쌓았는데 둘레가 9천 2백 1척이다.
가화고현(嘉禾古縣)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상리(上里) : 끝이 10리이다. 온정(溫井)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사마촌(司馬村)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어천(魚川) : 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방죽(方竹)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삼팔이(三八伊)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장양(長楊) :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60리이다.
구이동(仇耳洞) : 동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창고 읍창ㆍ동창(東倉) : 가화 고현(嘉和古縣)이다. 남창 : 영녕(永寧) 고현이다.
순로창(巡老倉) : 남쪽으로 45리이다.
사원 도동서원(道東書院) : 숙종조에 사액하였다. 주자ㆍ조광조ㆍ이황ㆍ이이 : 모두 문묘 편에 보라.
은율현 殷栗縣
동쪽으로 문화현 경계까지 24리, 남쪽으로 송화현 경계까지 30리, 서쪽으로 풍천부 경계까지 19리,
북쪽으로 장련현 경계까지 13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율구(栗口)이다 : 율천(栗川)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조에 풍주(豐州)에 예속하였다.
본조 태조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태종 14년에 풍주에 합하였다가, 후에 예전대로 하고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명이다.
군명 율구ㆍ율천.
성씨본현 홍ㆍ오ㆍ방(方)ㆍ임(林)ㆍ구(仇). 주(周) : 명주(溟州). 박ㆍ임(任)ㆍ김ㆍ양(梁)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풍속 풍속이 소금과 쇠로 생계를 삼는다 : 지지(地志).
산천 건지산(乾止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구월산(九月山)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산허리에 물이 있으니
고요연(高腰淵)이라고 하는데 형상이 가마 같으며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민간에서들 용이 있다 이르며, 가물 때 비를 빌면 곧 응한다. 모을산(毛乙山 모래산) :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금란굴(金襴窟) : 구월산에 있다. 바다 : 고을 서북쪽 30리에 있다. 웅도(熊島 곰섬)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함천(醎泉) : 고을 북쪽 13리에 있다. 맛이 짠데, 사람들이 많이 목욕하여 병을 치료한다.
금산포(金山浦)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석도(席島 돛섬) : 고을 서쪽 30리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
섬은 원래 풍천에 속하였는데, 금상 2년에 이 고을로 옮겨 속하였다.
토산 사(絲)ㆍ마(麻)ㆍ석철(石鐵) : 금산포(金山浦)에서 난다. 자초(紫草)ㆍ잣ㆍ죽합ㆍ부레[魚鰾]ㆍ은어ㆍ
사곽(絲藿).
성곽 구월산성(九月山城)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4천 3백 86척이며 높이 15척이다.
섬의 모양이 큰 배 같고, 남쪽 북쪽에는 길이 없으며 동쪽 서쪽에만 나무다리 길이 있다. 섬 안에는 나무가 묶어
세운 것같이 빽빽하며, 물이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한 시내를 이루고, 성 서쪽에 와서는 양쪽으로 산이 높이 서
서 문 같으며, 물이 문 밖으로 나와서 폭포가 된다. 성 안에 좌우 창고가 있는데
문화ㆍ신천ㆍ안악은 좌창에 속하고, 은률ㆍ풍천ㆍ송화ㆍ장연ㆍ장련은 우창에 속한다.
관방 광암량영(廣巖梁營) :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 수군만호 한 명이다.
봉수 건지산봉수(乾止山烽燧) : 서쪽으로 풍헌부 소산(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안악군 감적산(甘積山)에 응한다.
누정 관가루(觀稼樓) : 객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 고을이 풍주에 병합하고, 향교가 오래도록 폐지되었는데 홍무(洪武) 29년(태조 5년)에 비로소 감무를 두고,
교서감 교감 정여(鄭餘)를 감무로 삼으니, 정여가 비로소 학교를 세우고, 고을 사람들 자제를 모아서 가르쳤다.
이첨(李詹)의 기문이 있다.
역원 문라역(文羅驛) :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판초원(板草院)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불우 정곡사(亭谷寺)ㆍ장불사(長佛寺)ㆍ거선사(居仙寺) : 모두 구월산에 있다.
건지사(乾止寺) : 건지산에 있다. 용천사(龍泉寺) : 용산(龍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남산(南山)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제영 구월산은 높아 푸른 공중에 반쯤 솟았네 : 권사복(權思復)의 시에, "서하(西河)의 길가엔 붉은 나무도 많고,
구월산은 높아 푸른 공중에 반쯤 솟았네." 하였다.
구월산 서쪽에 열 집 고을이네 : 이적(李迹)의 시에, "구월산 서쪽 열 집 고을에, 누른 꽃 붉은 잎이 깊은 가을에
비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조 32년에 군으로 고쳤다.《문헌비고》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0리이다. 북면 :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서면 : 서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남면 : 처음이 3리, 끝이 25리이다.
창고 읍창. 해창(海倉) : 서북쪽으로 25리에 있다.
토산 석어(石魚)ㆍ굴.
강음현 江陰縣
동쪽으로 평산부 경계까지 16리, 북쪽으로 같은 부의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 배천군 경계까지 25리,
남쪽으로 개성부 경계까지 31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7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굴압현(屈押縣)이다 : 강서(江西)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송악군(松岳郡)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현종조에 개성현(開城縣)에 속하여 바로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할되었으며, 후에 개성부에 예속하였다.
인종(仁宗)조에 비로소 감무를 두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을 삼고 본도에 예속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사람이다.
군명 굴압ㆍ강서ㆍ화산(花山).
성씨본현 송ㆍ이ㆍ정(鄭)ㆍ변(邊). 오ㆍ김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차(車) : 촌(村).
산천
천신산(天神山) : 고을 서쪽 9리에 있는 진산이다. 고성산(古城山) :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말룡포(末籠浦) : 고을 남쪽 59리에 있는데 조읍포(助邑浦) 하류이다. 기탄(岐灘) : 고을 북쪽 16리에 있다.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수안군(遂安郡)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평산부 서쪽 냉정원(冷井院)
등처에서 나와서 같은 부의 저탄(猪灘)에 이르러 합류하여 조읍포로 들어가는데, 옛날에는 기평도(岐平渡)라
하였다. 《고려사》에는 개성현에 부속하였다.
조읍포 : 고을 남쪽 5리에 있는데, 기탄의 하류이며, 세곡을 수로로 운반하는 곳이다.
산수(酸水) : 고을 동쪽 12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기탄과의 거리가 6리이다.
토산 자초(紫草)ㆍ숭어ㆍ산달(山獺).
신증관방 탈미곡 군영(脫彌谷軍營)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금교역(金郊驛)에서 흥의역(興義驛)에 이르기까지
산은 높고 골은 깊으며 도적이 웅거하여 백주에도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니 나그네가 다니지 못하였다.
정덕(正德) 경오년(중종 5년)에 영을 설치하고 막아 지켰다.
봉수 성산봉수(城山烽燧) : 북쪽으로 평산부 남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개성부 송악산 국사당(國師堂)에 응한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금교역(金郊驛) : 고을 서남쪽 30리에 있는데, 본도에 속한 역이 10곳인데, 흥의(興義)ㆍ금암(金巖)ㆍ
보산(寶山)ㆍ안성(安城)ㆍ용천(龍泉)ㆍ검수(劍水)ㆍ동선(洞仙)ㆍ소곶(所串)ㆍ경천(敬天)ㆍ단림(丹林)이다.
○ 찰방 한 사람이 있다.
○ 권근(權近)의 〈역누기(驛樓記)〉에, "우리나라에서 명(明) 나라 섬기기를 매우 삼가하여, 해마다 직공(職貢)
을 거행하여 감히 혹시라도 어기는 일이 없으니, 명 나라 조정에서도 사방 만국 중에, 조선만이 제일 충성하고
순종한다 하여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서 교화를 선포하여 행차가 앞뒤로 서로 잇달았으니, 상국과 하국의
사이가 흡족히 화합한다고 할 만하다.
금교역은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겨우 30리인데, 중국 사신이 올 때와 복명(復命)으로 돌아갈 때에 언제나 여기서
잔다. 올 때에는, 왕이 반드시 먼저 대신을 보내어 여기서 맞아 위로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의장과 호위를 갖추어 멀리 나가 맞이하며,사신도 아침에 들어온다.
갈 때에는 왕이 장막을 설치하고 멀리 나가 전송하며, 또 대신을 보내어 위로하며 전송하는데 사신이 반드시 늦
게 들어온다. 때문에 일찍이 이곳을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니, 여기에 대한 숙식을 공급하는 비용이 다른
역에 비하여 갑절이나 된다. 예전에는 객관이 있었지만 좁고 누추하며 낮고 축축하며, 여름철의 더운 비바람에
는 답답하고 무덥기가 더욱 심하고 바람 쐬일 곳이 없으니, 오는 이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영락(永樂) 2년(태종 2년) 가을 8월에 나의 친구 대령(大寧) 최자고(崔子固)군이 문학과 재간이 있음으로 뽑혀서
풍해도 찰방(豐海道察訪)이 되고, 8참(站) 정역사(程驛使)를 겸하여 8참을 순시하게 되었다. 일을 본 지 달이 넘
으니 땔나무와 마초(馬草)가 넉넉히 쌓이며, 모든 공급할 물건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이르기를,
"이 역이 가장 서울에 가까우며, 사신의 거마(車馬)가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쉬고 자는 곳인데, 집이 낮고 누추하
여,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뜻에 맞출 수 없으니, 어찌 옛것을 헐고 새로이 하지 않겠는가.'
하고, 곧 조정에 보고하여 허락을 얻었다.
이에 9월에 일을 시작하였는데, 재목을 구하고 기와를 굽는 노력이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농사가 시작되
기 전에 일꾼을 고용하였다. 중앙에는 담을 높이 쌓고 좌우로 방을 붙였으며, 왼쪽 방 바로 앞에 다락 세 칸을
지으니, 굉장하고 널리 트여서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게 하고, 아래는 온돌방을 만들어서 춥고 더울 때
에 모두 편리하게 하였다.
명년 3월 초에 준공하였는데, 여름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각이 강과 바다를 바라다보는 먼 경치는 없지
만 산봉우리들이 빙 둘러 향해 있고 들언덕이 둘러서, 개도 좋고 비가 와도 기이하며,
아침놀과 저녁 연기가 다르게 변화하는 모양은 문인들의 읊고 노는 흥을 돋울 만하고, 맑은 바람이 난간에 가득
하며 먼 길의 더위와 먼지를 씻을 만하며 밝은 달이 발에 비치며, 손님을 맞은 자리에 고상한 흥취를 돋울 만하
니, 여기에 대하여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아, 그대의 한 일이, 공은 매우 큰데 말은 매우 간략하니 겸손하도다. 누각의 설치가 정치와 무
슨 관계가 있으리오마는, 이것으로 그 정치의 득실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우역(郵驛)을 설치하여 사명을 전달하
고, 객관을 만들어서 행객을 기숙하게 하는 것은 모두가 삼대(三代) 때부터 정치하는 데에 있어 유의하는 바이
다.
그러므로 옛날 주(周) 나라의 선자(單子)가 초(楚)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 진(陳) 나라를 지나가다가 그곳
에서는 객이 와도 여관을 주선하여 주지 않으므로 행객들이 유숙할 데가 없음을 보고, 마침내 진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우역(郵驛)을 두어서 사신을 대접하고, 여관을 두어서 행객을 대
접하는 일에 전부터 매우 주력하였는데, 그대가 나라에서 위임하는 뜻을 잘 받들어, 먼저 양곡과 마초를 많이
모아 쌓고, 다음 유숙할 집을 수리한 후에, 다시 올라가 구경하며 근심을 풀 만한 곳까지 만들어서 그 마음을 위
로하게 하였다.
지금부터 중국 사신이 오면 더욱 우리나라에서 대국을 섬기는 정성과 정사를 잘하는 것이 나라에 인재가 있어
길이 태평을 누릴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공의 큰 것이 아닌가. 어찌 올라가 구경하며 읊고 노는 것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 군은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 출신으로 높은 과거에 뽑혔고 대간을 역임하여 일찍이 조정에 현달
하였다. 지금 여기 역정(驛程)의 직책에 몸을 굽히고 있으면서도, 능히 그것을 낮게 생각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
을 보며 겸손하게 몸을 가져 재목이 크고, 도량이 넓은 것이 이와 같으니, 후일에 크게 등용되어 나라에 공을 세
움을 어찌 이루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김장한(金張翰)의 시에, "산관(山館)이 시원스러워 이렇게도 맑은데, 이경(二更)의 베개와 대자리에,
가을 기운 생기네. 서쪽 창가 시 읊기에 매우 좋으니, 솔바람 소리 듣고 또 빗소리 듣누나." 하였다.
○ 장녕(張寧)의 시에, "흔들흔들 깃발 멀고 높은데 올라 앉아, 세어보니 나그네 길 두 달이나 되누나.
방초 무성하여 간 곳마다 푸르고, 좋은 산은 그림같이 마주 사람 대해 한가롭네. 일년 중 좋은 경치 봄은 어느
새 저물려는데, 천리나 먼 사신 걸음 객은 아직 돌아가지 못하네. 어젯밤 꿈에는 분명 귀국하여 전일 그대로
대궐 안에서 신하들 반열에 서 있었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산이 높아 오르지 못한다 하지 말라. 누대는 백운간에 치우쳐 가깝네. 옛부터 좋은 경치
는 사람이 만나기 어려운데, 부생(浮生)인 이 내 몸 한가롭지 못함을 어이하나, 골짜기에 가득 맑은 바람에 꽃잎
지고, 밭에 뿌리는 가는 비에 제비가 날아 돌아오네. 옛날 이곳에 와서 시 쓰고 간 나그네들, 지금 중국 조정의
시종하는 반열에 있다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한가로운 꽃 다 떨어지니 어느 사이에 남풍인데, 나그네길에 높은 데 오르는 이는 느낌
이 같으리, 밤비가 골고루 와서 꽃다운 나무 푸름을 더하고, 새벽놀은 비껴서 비단 도포 붉은데 비치누나.
돌아다보니 북쪽 대궐은 저 멀리 아득한데, 동쪽 나라 서울은 바로 저 앞이라 하네. 풍경이 사람 마음 흔들어
시 생각도 없지 않은데, 한 소리 길게 웃으니 바다 하늘이 넓구나." 하였다.
○ 기순(祈順)의 시에, "다시 금교역 지나니 돌아가는 길 왔는고. 좋은 바람은 수놓은 깃발을 휘날리고,
이름난 말[馬]은 화려한 굴레에 얽매였네. 시흥이 장함을 더욱 깨닫겠고, 경치가 맑은 줄 이제 새삼 느끼겠네.
먼 나라 사람들 예의에 돈독하니, 만세토록 황명(皇明)을 섬기리." 하였다.
○ 정총(鄭摠)의 시에, "송악산이 한 점 가늘게 보이는데, 여윈 말 긴 행로에 어느새 석양이 네.
무기가 쓸데없는 날 언제나 있으려나, 풍진이 눈에 아득하니 객의 마음 슬프구나." 하였다.
임제원(臨濟院)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만수원(萬壽院)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와원(瓦院)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창고 조읍포창(助邑浦倉) : 조읍포 언덕 위에 있다. 본현 및 황주ㆍ서흥ㆍ평산ㆍ봉산ㆍ곡산ㆍ수안ㆍ안악ㆍ
재령ㆍ신계ㆍ우봉(牛峯)ㆍ토산(免山) 등 고을의 전세를 여기에 모아서 배로 서울에 수송한다.
불우 쌍봉사(雙鳳寺)ㆍ금강사(金剛寺)ㆍ보현사(普賢寺)ㆍ천신사(天神寺)ㆍ문수사(文殊寺) :
모두 천신산(天神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고을 서쪽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식척처(食尺處)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속명은 식점(食岾)이다.
제영 고을 이름은 남포(南浦)로 인해서이네 : 신개(申槩)의 시에, "고을 이름은 남포로 해서이고,
땅의 영기는 사방으로 산이 둘렸네." 하였다.
밝은 광채 어촌에 가득하네 : 최부(崔府)의 시에, "새벽 되자 강물 불으니, 밝은 광채 어촌에 가득하네." 하였다.
쓸쓸한 열 집고을이네 : 원효연(元孝然)의 시에, "쓸쓸한 열 집 고을에, 밥 짓는 연기 한 강촌(江村)이네."
하였다.
어렴(魚鹽)은 바다 이익을 통하네 : 성개(成槪)의 시에, "어렴은 바다의 이익을 통하고, 밀물 썰물은 인가에
들어오네." 하였다.
강령현 康翎縣
동쪽으로 가을포(茄乙浦)까지 30리, 남쪽으로 등산곶(登山串)까지 60리, 서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30리,
북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3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9리이다.
건치연혁 영강현(永康縣)은 본래 고구려의 부진이(付珍伊)였는데 고려 초기에 영강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옹진현(甕津縣)에 예속하였으며,
예종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어서 가화현(嘉禾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14년에 장연현에 합하고 얼마 안 가서 예전대로 하였다. 백령도(白翎島)는 원래,
고구려의 곡도(鵠島)였는데 고려조에서 백령진(白翎)이라 하고, 현종조에 진장(鎭將)을 두었다.
공민왕 때에는, 물길이 험난하므로 육지로 나와서 문화현 동촌 가을산(文化縣東村加乙山)에 임시로 우거하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땅이 협착하다 하여 진장을 폐지하고 문화현에 예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는 파하여 직촌(直村)으로 하였다. 본조 세종 10년에, 영강ㆍ백령을 합하여 강령현으로 하고, 해주ㆍ
우현(牛峴) 이남의 땅을 분할하여 예속시켜 현의 치소를 사천(蛇川)으로 옮기고,
진을 설치하여, 첨절제사 겸 판현사로 하였는데,
후에 고쳐 현감으로 하였다 : 옛날 영강현의 치소는 지금 장연현의 금동역(金洞驛)이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명이다.
군명 부진이ㆍ영강ㆍ백령 : 가을산 지역에 임시 우거할 때에는 그대로 백령이라 하고, 본 섬은 장연현에 속
하였다.
성씨영강 강(康)ㆍ팽(彭)ㆍ정(鄭)ㆍ임(任)ㆍ조(趙) : 해안(海安)ㆍ임(任) : 장연. 백령 유(庾)ㆍ김ㆍ이ㆍ노(盧)ㆍ
척ㆍ고(高)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산천 봉황산(鳳凰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는, 진산이다. 견래산(堅來山)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다립산(多立山)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어을마산(於乙亇山)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등산곶(登山串) : 고을 남쪽 60리에 있다. 백사정(白沙汀)이 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흰 모래가 평평하며 넓고,
진흙 감탕이 없어서 말을 달려 사냥을 할 만하다. 곧 옛날 해주 땅인데 사슴이 많아서 천백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닌다. 고려조에, 신우(辛禑)가 요동(遼東)을 치려고 하여 5부(部)의 장정을 동원하여 군병을 삼으면서 서쪽
으로 해주 백사정에 사냥 나간다고 빙자하여 말하였는데 곧 이곳이다. 지금은 목장이 되었다.
바다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청룡포(靑龍浦) : 고을 동쪽 10리에 있는데 사근포(沙斤浦)의 하류이다.
두모포(豆毛浦)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사근포 : 고을 남쪽 50리에 있는데, 구속포(仇束浦)의 하류다.
구속포 : 고을 남쪽 20리에 있는데 두모포의 하류이다. 남포(南浦)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연화지(蓮花池) : 고을 남쪽 60리에 있다. 순위도(巡威島) : 고을 남쪽 60리 바다 가운데 있는데 목장이 있다.
우정(牛井) : 고을 서쪽 9리에 있다.
토산 모시ㆍ삼ㆍ숫돌 : 순위도에서 난다. 미역ㆍ황각(黃角)ㆍ자초(紫草)ㆍ녹용ㆍ부레[魚鰾]ㆍ세모(細毛)ㆍ
청각(靑角)ㆍ사곽(絲藿)ㆍ굴ㆍ해삼ㆍ소라ㆍ홍합ㆍ낙지ㆍ죽합ㆍ청어ㆍ조기ㆍ전복.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8백 척, 높이 9척이다.
관방 가을포영(茄乙浦營)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 수군만호 한 명이다.
봉수 밀점봉수(密岾烽燧) : 고을 남쪽 55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옹진현 탄항산(炭項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구월산(九月山)에 응한다.
견라산(堅羅山) 봉수 : 고을 남쪽 13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해주 사포곶(沙浦串)에 응하고 서쪽으로 구월산에
응한다.
구월산봉수 : 고을 남쪽 30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밀점에 응하고, 동쪽으로 견라산에 응한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원우 우정원(牛井院) : 우정 곁에 있다.
불우 안국사(安國寺) : 어을마산(於乙亇山)에 있다. 정수암(靜修菴) : 견래산(堅來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광천소(廣川所)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명환고려 이세화(李世華) : 백령진의 진장이 되었는데, 정치를 청렴 공평하게 하였고, 향교를 처음 창설하여
자제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니, 과거 보는 사람까지 있게 되었다.
본조 김처례(金處禮) : 세조조에 지현사(知縣事)가 되었으며, 정사 성적이 최우등이므로 불러 들여서 병조 지사
(兵曹知事)를 삼았다.
인물
고려 강증(康拯) : 마음가짐이 부지런하고 자세하였다. 음관(蔭官)으로 군기주부(軍器注簿)에 보직되었다가,
예종조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에 강증이 좌군 지병마사로 종군하여 공을 세워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
사에 이르렀다.
열녀본조 검덕(檢德) : 고을 이속 강치중(康致中)의 아내이다. 남편이 나쁜 병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약에 섞어 드리자 병이 나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제영 조수가 관도 나루터에 밀리니 언덕이 묻히네 : 배둔(裵屯)의 시에, "해가 수루(戍樓)에 지니 고각이 울리고,
조수가 관도에 밀리니 언덕이 묻히네."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 15년에 개혁하여 해주에 소속시켰다가 조금 있다가 다시 설치하였다. 효종 4년에 개혁하여
옹진(甕津)에 소속시켰다가 10년 뒤에 설치하였다 : 현종 7년에 치소를 고요연촌(高要淵村)에 옮겼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문헌비고》
방면 읍내 : 끝이 북쪽으로 30리이다. 고현(古縣)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서면(西面) : 서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동일(東一)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동이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남면 : 처음이 40리, 끝이 90리이다.
광주소(廣州所)는 동쪽으로 15리이다.
진보 등산곶진(登山串鎭) : 옛날 동남쪽으로 45리에 있었는데 후에 순위도(巡威島) 가운데에 옮겼다.
숙종 30년에 만호로 승격시켰다. ○ 수군동첨절제사겸 감목관(水軍同僉節制使兼監牧官)이 1명이다.
○ 추포방소 : 등산포(登山浦) 순위도(巡威島)에 있다. 요망(瞭望)이 여섯 곳이다.
봉수 식대산(食大山) : 남쪽으로 50리 지점에 있다. 밀치(密峙) : 남쪽으로 70리 지점에 있다.
창고 읍창. 남창 : 남쪽으로 60리 지점에 있다. 둔창(屯倉) : 등산곶(登山串)에 있다.
목장 등산곶장. 혁폐 순위도장(巡威島場).
토산 소라ㆍ감ㆍ소금.
누정 망해정(望海亭) : 남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데, 서쪽으로 대해(大海)가 바라보이며, 섬들이 나열되었다.
장연현 長淵縣
동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56리, 남쪽으로 해안까지 40리, 서쪽으로 아랑포(阿郞浦)까지 47리,
북쪽으로 풍천부 경계까지 2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장연(長淵)인데, 신라와 고려에서 모두 옛 이름 그대로 하였다.
현종(顯宗)조에 옹진현에 속하였으며,
예종(睿宗)조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조 원년에 만호를 두어 감무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 2년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후에, 영강현을 병합하여 연강(淵康)이라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각각 예전대로 하였다.
세종 5년에 병마사로 고치고, 첨절제사를 삼았다가, 후에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명이다.
군명 장담(長潭)ㆍ연강.
성씨본현 문(文)ㆍ노(盧)ㆍ장(張)ㆍ변(邊)ㆍ임(任). 이ㆍ경(景)ㆍ임(林)ㆍ김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해안(海安) 송ㆍ조(趙)ㆍ오(吳)ㆍ노(盧) : 모두 속(續).
풍속 풍속이 누에치기, 고기잡이, 소금으로 생계를 삼는다 : 지지(地志).
산천 괴림산(槐林山)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오반산(五盤山)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석봉산(石峯山)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불타산(佛陁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장산곶(長山串) : 고을 서쪽 64리에 있다.
대청도(大靑島) : 고을 남쪽 30리 바다 가운데 있다. 소치는 목장이 있다.
소청도(小靑島) : 대청도 동쪽에 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면 대청서(大靑嶼)ㆍ소청서(小靑嶼)로 되어 있는데 곧 이것이다.
《고려지리지》에, "백령진(白翎鎭)에 대ㆍ소청 두 섬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은 백령도도 고을 경계 안에 들어
있다. 백령도 : 대청도 서쪽에 있으니 옛날 백령진이다.
강령현(康翎縣) 연혁 조에 자세하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元) 나라에서, 적당(賊黨) 탑야속(塔也速)을
여기로 귀양보내었다. 목장이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높은 하늘 스치며 몇 번이나 성내어 날았나, 외로운 섬 돌며 날다가 잠시 돌아가기
를 잊었네. 사선(四仙)이 한 번 간 후에 알아줄 이 없으니, 공연히 아름다운 옷 떨치며 석양에 서 있네." 하였다.
신곶(薪串) : 고을 서쪽 47리에 있다. 별서강(別西江) :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백사정(白沙汀) : 고을 서쪽 58리에 있는데 길이가 7, 8리요, 넓이는 3, 4리이다. 남쪽에 연못이 있고,
북쪽에 승선봉(勝仙峯)이 있는데, 봉우리 위에는 잔디풀이 있다.
3면이 바다인데 흰 모래가 평평하게 깔리고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밀려 쌓여 언덕을 이룬다.
어린 솔과 해당화가 붉고 푸르게 서로 비치는데 유람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신증 남곤(南袞)의 유백사정기(遊白沙汀記)에, "아랑포(阿郞浦)는 서해의 깊숙한 지역이다.
산이 있어 연강(淵康)의 치소(治所) 북쪽에서 서쪽으로 뻗어왔는데 푸르게 뾰죽뾰죽 솟고 구불구불 달려오기
10리는 하다가 항구(港口)에 와서 멈춘다.
물이 있어 항구에서 거꾸로 꺾여 흘러 동쪽으로 가서 산을 따라 돌면서 콸콸 흘러 또 수십 리를 달리다가 언덕
을 만나 움츠러졌고, 산이 그치는 곳에 당하여 끊어진 벼랑이 우뚝 일어났는데, 그 위에 군중의 울타리 설치한
것은 만호영(萬戶營)이다.
물이 움츠러진 곳에 당하여 큰 돌이 사람처럼 서있는 곳에, 고기잡이 배, 장삿배가 그 아래 정박하는 것은 입죽
암(立竹巖)이요, 만호영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며 10여 리에 거울빛이 눈에 부시는데 푸른 봉우리 한 점이 거울
에 임하여 뾰족한 것은 승선봉(勝仙峯)이요, 푸른 봉우리 절 밖에 눈더미가 공중에 솟고 푸른 솔과 푸른 수림이
그 밑을 둘러싼 것은 비로봉(毗盧峯)이요, 눈더미 아래에 평평한 모래가 희게 깔리고 긴 물가 멀고 가까운 곳에
해당화 붉게 나부끼는 것은 백사정이다.
저 승선봉과 비로봉은 정말 기이하고 빼어나기는 하지만, 높아 추워 떨리니 정말 신선의 뼈를 가진 자가 아니면
오래 머물 수가 없고, 그 중에 아늑하고 수려하여 놀며 거닐기에 합당한 곳은 백사정만이 제일 좋으므로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기사년에 내가 겸절도사의 명을 받고, 관내를 순시하여 이곳에 이르렀는데 군비(軍備)를 점검하는 여가에 누각
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고 마음으로 좋은 경치임을 알았으나, 공무가 총총하여 찾아 구경할 겨를이 없이 하룻밤
을 자고 돌아가게 되니, 떠날 때에는 머뭇거리며 자못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이듬해 경오년 가을에 막료 정숙간(鄭叔幹)군과 함께, 공무의 여가에, 서로 이야기하다가 말이 백사정의 빼어난
경치에 미쳤다.
숙간이 말하기를, '사람의 일이란 어긋나기가 쉽고 빼어난 경치는 만나기 어렵습니다. 공의 임기도 벌써 가까웠
는데, 가을철이라 공무도 번잡하지 않으니 지금 한 번 가서 놀지 않으면 호산(湖山)에 대한 묵은 빚주D-001을
언제 갚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더구나, 중추의 달빛 아래 호수 구경을 옛 사람이 기이한 경치라 하였으니, 만일 공을 따라 한 번 좋은 구경을
하게 된다면 역시 내 평생의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한다. 좌중에 이청로(李淸老)라는 이가 있는데 나의 같은
마을 사람으로 어릴 때 파피리 불며 놀던 옛 친구인데, 나를 찾아와 있다가 숙간의 말을 듣고 매우 찬성하였다.
마침내 계획을 정하고, 호위하여 따르는 사람들을 간략히 하고, 정ㆍ이 양군과 함께 연강(淵康)으로 향하여 떠
났다.
8월 보름에, 입죽암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고을 수령 신후 경광(申候景洸)이 배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잠시 후에 황주 목사 유후(柳候) 세웅(世雄)이 역시 공문을 보고 왔다. 물가에 멈추고 대강 인사를 나누는데, 뱃
사람이 급히 와서 알리기를, '조수가 곧 빠지니 빨리 배를 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에 얕은 여울이 있어서
배가 반드시 얹힙니다.' 한다. 우리들은 서로 재촉하여 배에 오르고, 조수를 따라 배를 띄워서 중류에서 내려갔
다. 포구의 넓이가 수백 묘(畝)는 되는데 양쪽 언덕으로는 산이 둘러싸여, 층층이 쌓인 멧부리들이 완연히 그림
같다.
갈매기와 해오라기 수천 마리는 물가에서 서로 불러 울며 훨훨 날아들고, 노는 고기들 배밑에서 활발히 다니거
나 혹은 물위로 두어 자씩 뛰어 오르니, 참으로 강호(江湖)에 서로 잊는 것이라 할 만하다.주D-002
재관(材官) 손수용(孫守庸)이 뱃노래를 잘 하는지라, 뱃전을 의지하여 노래 부르고 같이 배 탄 사람들이 풍악을
울리며 화답하니 소리가 수풀 사이에 진동하였다. 좌중이 서로 즐겁기도 심하여 큰 자기 사발로 술을 돌렸으며,
또 법을 정하기를, '마시고는 곧 사발을 엎어야 한다.' 하니 좌중이 모두 취하였다. 20리쯤 가니 곧 만호영 남쪽
이었다. 황주(黃州)가 술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배 가운데 눕고, 계속하여 나도 누웠다.
나는 듯이 달리는 배는 노를 젓지도 않았는데, 이른바 거울빛[鏡光]이라는 10여 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니, 그 사이의 산천 풍경을 자세히 기억할 수도 없었다. 해가 신시쯤 되어서야 술이 좀 깨었는데, 눈을 떠보니
배가 승선봉 아래 있었다.
여기서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가서, 말타고 수삼 리를 가서 백사정에 도착하였는데,
하인들이 이미 밥을 차려놓고 기다린다. 그때에, 저녁 조수 벌써 나가서 물가가 다 드러났는데, 바다와 산은 푸
르고 멀며, 물새들은 쌍쌍이 노을 사이로 날며 운다. 그러나 우리들은 취한 술이 아직도 깨지 않아 눈앞이 어른
어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흥이 극도에 달한 끝에 도리어 슬퍼져서 자못 참담한 생각이 나게 된다.
이어 견여(肩輿)에 올라서 비로봉으로 향하여 가니, 긴 수풀 사이로 나무 그림자가 어른어른 하는데 동방을 바
라보니 달이 벌써 두어 길은 올라왔다. 이른바 눈더미[雪堆]라는 곳으로 올라가서 큰 바다를 내려다보니,
아래의 물과 위의 하늘이 새파래서 흔연히 한 빛이 되는데 달도 엷은 구름에 가려 약간 흐릿하였다. 좀 있으니
긴 바람이 서북쪽에서 불어오고, 소나무와 노송나무가 우우 소리를 내며 구름이 흩어지니 달빛이 밝아진다.
밤 조수가 또 올라오니 솟구치고 진동하여 은산(銀山) 같고, 눈 지붕 같은 것이 넓고 푸른 사이에 엎치락뒤치락
한다.
바다 기운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쌓이고 쌓여서 흰 비단처럼 되는데 내가 올라가 있는 봉우리가 바로 허공 중에
떠있으니, 완연히 찬바람을 타고 허공 중에 노니는 것 같아서 한없이 아득하고 훨훨 나는 듯한 그 기분을 이루
형상할 수 없다. 동인(僮人)으로 하여금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피리ㆍ호가(胡笳)로 곁들이게 하니, 소리가 저
먼 공중에 통하여 십주삼도(十洲三島)의 신선을 거의 만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에 무릎을 치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제서야 조물주가 재주 많은 줄을 알겠도다.
모래란 원래가 붙지 않는 물건으로서, 움켜서 쥐었다가도 손을 펴면 곧 흩어지는 것인데, 이게 홀로 곧게 높이
솟아 봉우리를 이루고, 바닷바람에 날려가도 무너지지 않으니 이것이 조물주의 재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바다가 멀리 떨어진 고장에서 맑고 그윽함을 독차지하고, 인간세계의 티끌이 미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화식
(火食)하는 인간들의 더럽힐 곳이랴.' 하니, 신 현감이 나와서 말하기를, '읍 안의 부로들에 전하여 오는 말에,
「이곳엔 신령한 신선의 신비스런 자취가 있어 노는 사람들이 함부로 밟으면 반드시 풍우의 변을 가져오기 때
문에 대개는 창황히 돌아가고, 일찍이 끝까지 놀다 간 이가 없다.」 합니다. 지금 공이 오셨는데 또 신령한 신선
이 전처럼, 공의 맑은 놀이를 저해하지는 않을까 하였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고 입죽암 아래서부터 물결이
조용하고 바람의 형세가 순하여 거슬리는 일이 없으며, 이 산마루에 올라오니, 하늘이 맑아 아무런 가림도 없이
하늘이 아끼고 땅이 비밀히 하던 것을 공을 위하여 드러내니, 공이 역시 신선 중의 사람인가 합니다.' 하여,
서로들 크게 웃었다.
한량없이 술을 마시고, 나와 숙간ㆍ청로는 각각 운자를 내어 시를 지었다. 밤중이 되어서, 취한 몸을 가누고 내
려와서 봉 아래 정사(精舍)에서 어렴풋이 잠들었다가, 이튿날 새벽에 간단한 음식을 먹고 올라가서 다시 지난밤
의 놀이를 계속하였다.
가을 하늘은 높고 날은 맑으니 우주간이 비고 넓기만 한데, 고래도 숨고 신기루도 소멸되고 조그만 풍파도 일지
않았다. 초도(椒島)ㆍ장산(長山)은 용이 할퀴듯, 범이 움킬 듯 다투어가며 자리 아래에서 기이한 모습을 비추니,
다만 내 몸이 더욱 작고, 내 눈이 더욱 무디며 하늘은 더욱 높고 땅은 더욱 두텁고, 도랑물 냇물이 더욱 누추하고
강(江)ㆍ회(淮)ㆍ하(河)ㆍ한(漢)ㆍ여(汝)ㆍ사(泗)ㆍ제(濟)ㆍ약(瀹 중국의 물 이름)이 잔잔하고 졸졸 흘러서 이
바다에 비하면 감히 물이 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운몽(雲夢) 8, 9개를 가슴속에 삼켜도 일찍이 걸림이
조금도 없다.주D-003고 한 옛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혼돈하고 망망한 그 속에 서서 천지가 처음 생기던 시절로 이웃을 하니, 망연자실하여 자득한 신묘함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음이 지난밤보다도 더하다. 숙간 이하 여러 사람들이 서로 일어나서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권하니, 다시 과음을 조심하지 아니하고 실컷 취해버렸는데, 정오가 되어 부축하고 내려가, 백사정에서 좀 쉬며
저녁 조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어스름에, 승선봉(勝仙峯)에 올라 풀숲을 깔고 술자리를 벌였는데 신 현감이 또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는 달 뜨는 것이 조금 더디니 우선, 조급히 굴지 말고, 달이 뜨기를 기다려서 배를 타면 역시 쾌한 일이
아니겠소.' 하므로, 내가, '좋다.' 하였다. 어름어름하는 중에 사환이 와서 달이 벌써 올라왔다고 이른다.
곧 배를 불러 타고 겨우 언덕을 스쳐 나가니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 사면으로 오는데, 달이 호수 가운데 들어오
니 마치, 옥부처가 천 이랑 물결에 가로누운 듯, 흔들리고 일렁거려 이지러졌다가 다시 완전해진다.
청로가 소동파(蘇東坡)의 도해(渡海)시 첫 연구(聯句)를 읊어 외기를, '구름 흩어지며 달 밝은 것 누가 점철한
것이냐. 하늘 얼굴 바다빛이 원래 맑은 것이라네.' 하고, 이어서 또 읊기를, '이 놀이 더없이 기이하여 평생에 제
일이네.' 하는데, 그 읊는 소리가 멀고 맑아서 유연(悠然)히 무궁한 의사가 있었다. 좌중이 조용하게 듣고 있다가
이르기를, '파옹(坡翁)이 바로 오늘을 두고 지은 시이다.' 하였다. 내가 이에 읍하고 말하기를, '땅 밑에 묻힌 이
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하여 말채찍이라도 들고 따르겠다.' 하고, 큰 사발에 술을 부어 청로에게
전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봉식(封殖)하여 각궁(角弓)을 잊지 말라.'주D-004 하니, 좌중이 모두 웃고 크게 마시
며 즐거워하였다.
멀리 만호영(萬戶營)쪽을 바라보니 횃불을 벌여 낮같이 밝게 하고, 우리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배가 가까워지
니 군사들이 모두 갑옷을 입고 방패를 세우고 맞이한다. 배를 벼랑 아래 대고 고각(鼓角)을 울리며 여러 재관
(材官)들도 각기 일어나서 춤추어, 돛 내리는 노래를 화답하고, 밤이 들어서야 파하였다.
이튿날 연강으로 돌아와서 어제 놀던 곳을 돌아보니 연파(煙波)가 아득하고 아지랑이 안개 자욱하다.
정(情)과 흥(興)이 아련하여 친하고 사랑하는 이를 이별한 것 같아서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열람하다가 김극기(金克己)의 백령도 시(白翎島詩)를 보니, '사선(四仙)이 한 번 간
후에는 참으로 구경하는 이 없다.'는 구가 있으니, 신라 네 선랑(仙郞)의 무리가 서해 지경에서 두루 놀았던 것
을 알았다.
아랑포(阿郞浦)에서 백령도까지는 물길로 하루길이고 보면 포구의 이름이 4선랑이 놀며 구경함으로 인하여
얻어진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니, 그 이름을 아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4선랑의 풍모가 아름답
고 뛰어난 것을 보고, 사랑하고 기뻐하여 칭찬하여 한 말인 것이다.
아깝게도 지방이 무식하여 글이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을 좋아하지 않아서 저 네 선랑의 바람 수레 깃 일
산놀이와 기린포ㆍ외ㆍ대추의 잔치로 하여금 파묻히게 하여 전함이 없게 되었도다. 하물며 우리들의 외로운 배
와 짧은 돛대로 출몰부침하면서 한 제멋대로의 노래 와 춤이야 한 번 지난일이 되면 누가 다시 알 것이랴.
그러나 오히려 빙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문자에 의탁하는 것뿐이다. 문자라는 것은 천지간의 썩지 않는 물건
이다. 옛날부터 높은 사람 이름난 선비들로 강산의 좋은 경치에서 술들며 논 자가 얼마인지 모르게 많지만 그 중
에서도 오직 왕희지(王羲之)의 회계산음(會稽山陰)의 계음(禊飮),주D-005손흥공(孫興公)의 천태산(天台山)의
놀이,주D-06 이태백의 채석강(採石江) 달구경,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강(赤壁江) 뱃놀이만을 지금껏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소상하게 어젯일같이 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문자가 있었기 떄문인 것이다.
만일 저들 네 선랑으로 한 번 화려한 문장을 펼쳐서 당시의 빼어난 일을 기록하였더라면, 만 길은 되는 광채가
동방에 빛나고, 집마다 전하며 사람마다 외우는 것이 저 몇 사람들의 글과 같은 데만 그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신선놀이의 자취를 묻어서 전하지 못한 것은 지방에 글이 없는 허물뿐만이 아니라, 역시 네 선랑들
자신들이 이름 전하는 것을 탐탁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름이라는 것은 실(實)의 손[賓]이니 실이 없으면 이름이 설 곳이 없는 것이며, 문자라는 것은 또 이름
의 끝이니 문자에 의탁하여 썩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아, 역시 끝이라고 하겠다.
이른바 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천지 가운데에 서서 우러러보면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내려다보면 땅에 부끄럽지 않으며, 사람에게 알리려 하
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 들어 알고, 천하 후세에 알리려 하지 않아도 천하 후세에서 자연 알지 않을 수 없게 되
는 것이니, 이런 것을 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무리의 선비들은 어찌 또한 실에 힘쓰지 않을 것이
랴.
연강(淵康)에 이른 날, 숙간과 청로가 모두 나에게 권하여 기문을 쓰라 하므로 사양할 수 없어서 대강 위와 같이
적는다." 하였다.
남대천(南大川)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송화현 수회천(水回川)의 하류로서 고을 서쪽 10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조니포(助尼浦) :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용정(龍井)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끌어서 논에 물대는데 가물면 비를 빈다.
대곶량(大串梁) : 고을 남쪽 63리에 있다. 오차포(吾叉浦)의 옛 영(營)이 있었다.
토산 사(絲)ㆍ마(麻). 동철(銅鐵) : 진석동(眞石洞)에서 난다. 철(鐵) : 동라곶(冬羅串)ㆍ길곶(吉串) 두 곳에서
난다.
상기생(桑寄生) : 대청(大靑)ㆍ백령 두 섬에서 난다. 곽(藿)ㆍ사곽(絲藿)ㆍ녹각교(鹿角膠)ㆍ청각(靑角)ㆍ
황각(黃角)ㆍ세모(細毛)ㆍ소라ㆍ홍합ㆍ은어ㆍ청어ㆍ복어ㆍ상어(鯊魚)ㆍ죽합ㆍ숭어ㆍ벌꿀.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다. 둘레가 5천 7백 25척이요 높이 13척이며 안에 우물 세 곳이 있다.
관방 오차포영(吾叉浦營) :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 수군만호 한 명이다. 아랑포영(阿郞浦營) :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 수군만호 한 명이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물가 맑고 모래 희어 기이하기도 한데, 조수 나가며 구름 거두고 물 고요한 그때이네.
태평 무사한 시절 만났으니, 장군이 창을 비끼고 새 시를 짓누나." 하였다.
봉수 궤곶봉수(几串烽燧) : 고을 서쪽 61리에 있다. 남쪽으로 미라산(彌羅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풍천부 고리곶
(豐川府古里串)에 응한다. 미라산봉수 : 고을 서쪽 52리에 있다.
남쪽으로 청석산(靑石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궤곶에 응한다.
청석산봉수 : 고을 서쪽 34리에 있다. 동쪽으로 대곶량에 응하고 서쪽으로 미라산에 응한다.
대곶량봉수 : 고을 남쪽 63리에 있다. 남쪽으로 옹진현 개룡산(甕津縣開龍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청석산에
응한다.
누정 진서루(鎭西樓) : 객사 동쪽에 있다. 남문루 : 곧 성의 남문루이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4리에 있다.
역원 신행역(新行驛)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금동역(金洞驛) : 고을 동쪽 45리에 있으니 영강현(永康縣) 옛 터이다.
광천원(廣淺院)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신증 장동원(長洞院) : 고을 북쪽 35리에 있다.
불우 천일사(千日寺) : 오반산(五盤山)에 있다. 안심사(安心寺) : 미라산에 있다. 견불사(見佛寺)ㆍ
천불사(千佛寺)ㆍ해림사(海林寺) : 모두 불타산(佛陀山)에 있다. 곡서사(鵠棲寺) : 괴림산(槐林山)에 있다.
영남사(永南寺)ㆍ석봉사(石峯寺) : 모두 석봉산(石峯山)에 있다. 자비사(慈悲寺)ㆍ해림사(海臨寺)ㆍ
칠봉사(七峯寺) : 모두 불타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장산곶사(長山串祠) : 사전(祀典)에, 대천(大川)으로 소사(小祀)에 실려 있는데, 봄ㆍ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드린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대청도(大靑島) : 고려조 충숙왕(忠肅王) 5년에, 원(元) 나라에서 발라태자(孛剌太子)를 여기에 귀양보냈다가
10년 소환하고, 11년에 발라태자를 여기에 귀양보냈다가 16년에 소환하였으며, 17년에는 도우첩목아(陶于帖木
兒)를 여기에 귀양보냈다가 후원년(後元年)에 소환했는데 그들의 거처하던 집터가 아직도 있으며, 목장(牧場)
이 있다.
용혈(龍穴)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끊어진 언덕이 있어 길이 2백여 보는 되는데, 언덕 머리에 구멍이 있으니,
지름이 한 길이 넘으며 언덕 끝에 역시 구멍이 있어 수미(首尾)가 서로 통한다.
사람이 불을 가지고 들어가서 백여 보를 갔는데 물이 있어 깊고 어두워서 근원을 찾을 수 없어 돌아왔다.
웅침리 목책(熊沈里木柵)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고영강(古永康) : 고을 동쪽 50리에 있다.
해안 폐현(海安廢縣) :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고려 때에 현령을 두었는데, 후에 청송현(靑松縣)에 예속하였으
며 본조 태종 16년에 그 지역이 본현(本縣) 서쪽 경계에 넘어 들어왔다 하여 본현에 예속하고,
직촌(直村)을 삼았으며 그 주민과 아전은 송화현에 예속하였다.
두견산 고성(杜鵑山古城) : 고을 북쪽 4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2백 88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인물
고려 문정(文正) : 문종(文宗)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여러 번 옮겨서 병부시랑 좌간의대부에 이르렀다.
동번(東蕃)이 난을 일으키자 정이 승전하고 돌아오니, 특별히 보충찬화탕구정새공신(輔忠贊化蕩寇靜塞功臣)
호를 하사하고, 특진검교사도 문하시랑평장사상주국장연현개국백(特進檢校司徒門下侍郞平章事上柱國長淵縣
開國伯)을 더하였다. 시호는 정헌(貞獻)이며 선종(宣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문인위(文仁渭) : 목종(穆宗) 때의 사람이다. 성실하고 겉치레가 없으므로 인하여 김치양(金致陽)의 난에 화를
면하였다. 벼슬이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제영 아득히 저 멀리 물이 하늘에 닿았네 : 안성(安省)의 시에, "아침에 서린군(瑞麟郡)을 떠나서,
해질녘에 장연에 이르렀네. 어스름하게 구름은 멧부리를 덮었는데, 아득히 저 멀리 물이 하늘에 닿았네.
어부들 노래는 가을 섬 달 아래요, 군사들 피리 소리는 늦은 강 연기 속이네.
뜻밖에도 최명부(崔明府 동여진)를 여기서 만나 지난일 생각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광해주 계해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영조 40년에 현감으로 강등시켰다 : 왕제둔(汪濟屯) 백성이
둔감(屯監) 김상념(金相念)을 묻어 죽였기 때문이다.
44년에 수군영장(水軍營將)을 겸하였다 : 장산(長山) 이남 오읍(五邑)ㆍ삼진(三鎭)의 수군을 나누어 다스렸다.
49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순조 25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방면
낙산(樂山) :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목감(牧監)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이다.
속달(速達) :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설산(雪山) : 서쪽으로 끝이 10리이다.
후강(朽舡) :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남읍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본읍 옛 터인데 불타산(佛陁山)의 남쪽에 있다.
해안(海安)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90리이다.
순택(蓴澤) : 동북쪽으로 30리이다. 신곡(薪谷) : 서북쪽으로 60리이다.
추라(秋羅) : 서남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40리이다.
동라(冬羅) :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대곶(大串)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성지 고읍성(古邑城) : 남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는데 남은 터가 있다.
고행성(古行城) : 불타산 위에서 장산곶(長山串)까지 산 허리를 따라가며 혹은 돌로 쌓고 혹은 흙으로 쌓았는데,
군데군데 남은 터가 있다.
진보 조니포진(助泥浦鎭) : 서쪽으로 60리 장산곶의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금사(金沙)와 20리, 남쪽으로 오차(吾叉)와 20리, 동쪽으로 용정(龍井)과 20리인데,
옛날에 별장이 있었다. 숙종 37년에 아랑포(阿郞浦) 만호를 내합(來合)하였다.
○ 수군만호 1명이다. 금사사보(金沙寺堡) : 승장(僧將) 1명이다.
추포방소(追捕防所) : 무수룡포(舞睡龍浦) 남쪽으로 65리, 동령포(東令浦) 서북쪽으로 55리,
쾌암포(快巖浦) 서쪽으로 50리이다.
오차포(吾叉浦)ㆍ조니포(助泥浦)ㆍ백령포(白翎浦) 이상 6개처에는 추포무사(追捕武士)가 있다.
○ 오차포ㆍ백령도ㆍ도사내도(島乃島)는 모두 요망장졸(瞭望將卒)이 있다. 요망(瞭望) 24처(處).
봉수 송독(松纛) : 서쪽으로 40리이다.
창고 읍창. 관창(管倉) : 대곶(大串)에 있다. 동창(東倉) : 동서쪽으로 50리 지점에 있다.
남창 : 남쪽으로 60리 지점에 있다. 사창(社倉) : 서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다.
북창 :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다.
왕제둔창(汪濟屯倉) :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다.
토산 게ㆍ소금ㆍ녹용ㆍ세모(細毛)ㆍ해삼ㆍ해방풍(海防風) : 모래 속에서 난다. 벼룻돌.
사원 용암서원(龍巖書院) : 숙종 기축년에 세우고 경종(景宗)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주자ㆍ이이 : 모두 문묘 편에 보라.
백령도진(白翎島鎭)
연혁 본래 곡도(鵠島)인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폭지군(瀑池郡)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가 백령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진장(鎭將)을 두었고 공민왕 6년에 수로(水路)가 험함으로써 육지에서 나와 붙어 살았다.
문화현(文化縣)의 갈산(乫山)은 조금 있다가 땅이 좁아져서 진(鎭)을 폐하였다.
본조 세종 10년에 본도(本島) 영강현(永康縣)에 합하였다. 광해주 원년에 진을 설치하였다 :
수군(水軍) 오진(五鎭)을 관장하였다.
관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 감목관(監牧官)을 겸하였다. 1명이다.
○ 추포방소(追捕防所) 요망(瞭望)이 각 1개처이다.
○ 목장이 1개소이다.
○ 상기생(桑寄生) : 본도 대청도(大靑島)에서 난다. 매ㆍ전복ㆍ해삼 등의 어물이 난다. 장연(長淵)도 같다.
여러 가지 모양의 전선(戰船)이 7척이다.
[주 D-001] 묵은 빚 : 놀러 가겠다는 것이 빚[債]이 되었다는 말이다.
[주 D-002] 강호(江湖)에 서로 잊는 것이라 할 만하다. : 장자(莊子)에, “물고기들이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는다.” 하였다. 그물에 든 고기는 서로 거품을 나누어 먹이며, 서로 아끼고 불쌍히 여기는 것 같으나,
강호에서 자유롭게 노는 고기들은 서로 있는 줄을 모르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스럽고 좋다는
뜻이다.
[주 D-003] 운몽(雲夢) 8, 9개를 가슴속에 삼켜도 일찍이 걸림이 조금도 없다.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
(上林賦)에, “초(楚) 나라 운몽(雲夢) 같은 큰 못을 8, 9개나 삼킬 만하다.”는 문구가 있다.
[주 D-004] '원컨대 봉식(封殖)하여 각궁(角弓)을 잊지 말라.' : 《좌전(左傳)》에서 나온 말인데,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뜻이다. 각궁(角弓)은 《시경(詩經)》의 편명이다.
[주 D-005] 왕희지(王羲之)의 회계산음(會稽山陰)의 계음(禊飮), : 왕희지가 3월 3일에 난정(蘭亭)에서 계음
하였다. 계음은 중국 풍속에 3월 3일에 물가에 모여서 재액(災厄)을 씻어 없애고 술을 마시는 것이다.
[주 D-06] 손흥공(孫興公)의 천태산(天台山)의 놀이, : 손흥공(孫興公 : 손위)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