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교리문답 세례 3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은총의 도구 곧 세례를 사용하신다
세례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믿음을 결합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재세례파는 둘을 따로 분리시켜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의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오감을 통해 느끼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복음의 선포도 결국 말을 통해 외적으로 표현되지 않습니까? 간단히 말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외적 질서를 통해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어떤 목적이든 어떤 도구를 통하든지 바로 그곳으로, 우리의 믿음은 그분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곳에서, 우리의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다시 꺼내 봅시다. ‘누구든지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복되다’ 이 말씀은 세례의 물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이 하나님의 질서가 서려 있는 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례와 세례의 물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이고 세례를 명령하시고 붙들어 매신 그리스도와 신앙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그 안에 담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세 번째 항목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세례의 위대한 능력과 유익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세례의 대상)
이 항목에 관한 것도 다음의 말씀에 아주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복되다.’ 세례 받은 이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가져오는 거룩한 물을 유익한 믿음으로 받을 때, 세례 받는 이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물과 함께 깃든 말씀이 이를 가르치고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례를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물은 아무 쓸모없습니다.
우리 생각에 복을 받고 복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믿는 사람은’이라는 이 유일한 말씀이 모든 행위의 공로를 거부하고 퇴짜 놓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믿음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고,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보화다.
이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세례는 분명 그것 자체로 일종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당신 말대로 행위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변입니다.
‘네 우리의 행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히 세례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세례와 목욕물 세례 사이에 놓인 거대한 차이를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구원을 위한 일이기에 필요하며, 믿음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에 물만 붓는다고 해서 온전한 세례가 아닙니다. 그렇게만 해서는 세례의 유익을 취할 수 없습니다. 세례를 통해 약속에 담긴 복을 받고 그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이름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물 안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익을 받는 것은 자기 힘으로 안 되며 육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으로만 신뢰할 수 있습니다(믿음).
그러므로 세례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행위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화이며 믿음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취할 수 있도록 말씀 안에 담아 놓은 보화입니다. 그런데 재세례파들은 ‘오직 믿음만으로를 가르치면서 그 믿음에 위배되는 설교를 하고 있다’고 우리를 향해 소리치며 왜곡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고 아무것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담을 믿음의 그릇이 없는 것이다.
이제껏 성례전에 관해 세 가지 항목을 다뤘습니다.
특별히 강조할 것은 성례전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므로 진정으로 귀히 여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세례 받을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비록 성례전이 눈에 보이는 단순한 물질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계명과 연결된 것 또한 육적인 혈육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부모가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계명으로 품습니다. 그 계명이 부모라고 부르고 섬기도록 명령입니다.
‘가서 세례를 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면, 우리가 세례를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믿고 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계명이 있고 명령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에는 그 명령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고 정하신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합니다.
간단히 말해 세례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가둘 수 없는 풍성한 위로와 은총이 됩니다. 이것을 믿기 위해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보화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보화를 담고 붙잡을 수 있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세례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묘약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생 세례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에 걸맞은 행동을 끊임없이 이루어 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주신 은총의 선물로 악마와 죽음을 이기고, 죄를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한 의사가 있다고 해봅시다. 만일 그에게 사람을 죽지 않게 하거나 죽은 자도 살려서 영원히 살게 하는 묘약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 부을까요? 하지만 세례는 대가를 받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보화의 창고가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 안에는 죽음을 삼키고 모든 인간을 생명으로 옮길 묘약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