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31주년 특집 시 모음>
+ 광주에 바치는 노래
1.
그해 5월
광주는 달도 밝았다
호남선 특별열차로
헬리콥터로 떼몰려온 흡혈귀들이
온 시가지를 쑥밭으로 만들 때
2.
광주는 그러나
달도 둥그러이 밝았다
집집마다 거리마다
침략자와 같은 몽유병자들이
피에 굶주려 날뛸 때
3.
그해 5월
광주는 끝없는 바다였다
갈매기가 날으고
돛이 오르고
파도가 나는 바다였다
섬, 섬들도 사람들로 울부짖는
4.
그해 5월
광주는 고독한 십자가였다
학살자들이 황구(黃狗)를 그슬리며
시뻘겋게 웃을 때
신부와 스님들도 잡아가서
부랄이 깨져라고 두들겼을 때
5.
그해 5월
광주는 부러진 십자가였다
발가벗겨 내팽개쳐진 부처의 알몸이었다
그러나 그해 5월
광주는 또 다시 볓 번이고
치솟아오르는 불사조!
6.
아아, 그해 5월
광주는 달도 밝았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물처럼 흐르고
길가의 가로수도 어깨동무 해주고
사람 세상 통일 세상 강강술래였다
7.
총칼뿐인 악마들이
사방팔방 미친 듯이 들쑤셔도
온 시가지가 보리밭으로 출렁이고
사람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이 땅의 갈 길을 향하여
살과 뼈의 깃발을 흔들었다
8.
아아, 그해 5월 광주는
함께 사는 즐거움이 있었다
함께 쓰러져 죽으면서도
함께 일어나 살고야 마는
하늘 같은 하늘 같은 펄럭임이 있었다
(김준태·시인, 1948-)
+ 목련이 진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설레임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닢 한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예 그리 슬프랴
(박용주·시인, 1973년 광주 출생)
* 박용주는 1988년 4월에 쓴 이 시로 전남대가 주최한 1988년 '5월 문학상'을 수상한다. 놀랍게도 그때 그의 나이 15살이었고 전남 고흥 풍양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진한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다.
+ 5월 18일
비가 내립니다
그것은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비여야 합니다
그날의 울부짖음이 이제는 단비가 되어
타는 목마름을 적셔 주어야 합니다
비가 내립니다
30년 전 아픔이 씻겨 내리며
대지를 적시고 사람을 적시고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목마르지만
오늘 눈물처럼 내리는 이 단비는
다시 천년의 민주주의를 이어갈 거름이 될 것입니다
비가 내립니다
어쩌면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상처 난 가슴을 적시는 아픈 이 비에
오늘 대한민국이 젖어듭니다
오늘 대한민국은 울어도 좋습니다
(이선명·시인, 1978-)
+ 오월은 내게
오월은 내게 푸르름이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노을 빛
오월은 내게 기다림이었다가
금방 꽃 피우고 떨어지는 꽃잎
몰래 다가와 피고 지는 봄 꽃
멀리 떠난 그리운 님 기다리듯
올 듯 말 듯 안타까워 꽃피고
혼자 영그는 씨앗 같은 그리움
그리움으로 싹 틔우는 들꽃
오월은 그저 따사로운 한줄기 햇살
햇살로 왔다가 별빛으로 사라지고
금남로 최루 가스와 함께 피어나던
민들레, 그리고 오월은 내게
가장 긴 기다림의 순간을 맞이하는
첫사랑의 설레임.
오월은 내게 살아있음을 노래하고
푸르게 흔들릴 줄 아는 바람으로 왔다가
바람으로 떨어져버린 망월동의 꽃잎.
(하태성·시인)
+ 오월꽃 그대
그대가 돌아오지 않던 그 봄날
우리 마을엔 아무도 없었네
모두들 그대와 한몸이었으므로
그대 금남로에 피투성이로
사람의 길을 열고 있을 때
우리 마을엔 들불의 기운이 감돌았네
그대 이웃들과 함께 처절한 봄이 되어 떠나간 뒤
우리 마을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네
보기만 해도 온몸이 용광로처럼 달아오르는
그대 비록 뱀같이 싸늘한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갔지만
갈라진 이 땅 숨소리 들리는 곳마다
온몸 들썩이는 오월꽃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을.
(홍관희·시인, 1959-)
+ 금남로
사랑이 넘쳐흐르는 거리였었다
희망이 잠들지 않는 거리였었다
억눌린 사람들의 정직한 목숨이
공기로 햇살로 빗물로 쏟아지던
오오 하느님 같은 사람으로 넘실대던
낭만이 넘치는 사람의 거리였었다
밝은 그 거리에
사람과 하느님과 모든 생명들이 하나가 된 그 거리에
도깨비 같은 총탄이 쏟아져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음모와 욕망이 쏟아져
삶과 죽음이 그토록 가까이 있을 줄이야
하느님과 사탄이 그토록 가까이 있을 줄이야
분수대조차 말라버린 그 거리에는
슬픈 꽃 한 송이도 피지 못하였지만
한 많은 그 오월의 십자로에
스러져간 벗들에 대한
어둡고 긴 기억의 터널을 지나
우리들의 사랑은 또다시 타오르고
무등산 바람은 시퍼런 눈빛으로 다가와
하느님 닮은 사람들 가슴에 청솔을 심어놓는다.
(홍관희·시인, 1959-)
+ 망월동
언니 오빠들이 봄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릅니다.
무덤 속의 오빠들에게
들려주는 노래입니다.
안경 쓴 할머니가
비를 맞으며
엉엉 웁니다.
무덤 속의 언니가
보고 싶은가 봅니다.
노래 소리를 듣고
무덤 속에서
제비꽃이 피어납니다.
엉엉 우는 소리를 듣고
풀잎들이
할머니 머리를 만져 줍니다.
5.18 묘역에서는
비가 와도
깃발이 펄럭입니다.
(김진경·광주 서석초등학교 4학년)
+ 5월 - 젊은 죽음을 위하여
잊혀지지 않는 그 어느 해 늦은 봄
5월의 통곡 소리
하늘이 무너졌다네
삼천리 산하
동강난 허리
울음 그칠 날 없었는데
초여름 날 남쪽 하늘 붉은 피 검게
타오르네
민주여 자유여
부르짖던
호남의 뜰 광주의 젊은 넋이여
총칼 앞에 민주의 한을 노래하고
봉오리 꽃피우기 전에 독재의
폭풍 속에
떠나신 님이여
5월 18일 오늘은 잠든 님
그대 영혼은 민주의 들꽃 한 송이
자유의 품으로
활짝 피우겠습니다
님이여 편히 잠드소서
영원한 자유의 종 곱게 꽃피우리라
(장수남·시인, 1943-)
+ 또 다른 5월에
망월동에 다녀온 날 밤
나는 어둠 속에 누워서
벽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잠들지 못하고 한밤내
내 안에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
오장육부를 들어내는 쓰린 아픔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벽을 따라 울지 못한 나는
어둠에다 얼굴을 감추었다
그늘에서 자란 풀들이 묘지를 덮고
아버지의 관 앞에서 사진을 안고 있던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망월동의 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내 마음 어둠을 파고 옮겨 심었다
아, 신록으로 피어나는 어린 싹이여
나를 부끄럽게 했던 많은 세월들을 이기고
오월을 찾아서 피어나는 푸름이여
잎잎마다 노래를 달아 놓고
나는 반짝이는 눈물을 본다
오월의 신록이 왜 눈부신지 모르는
저 어리석음 발길로 차며
울음이 끝나지 않은 오월의 아침
철쭉 붉은 통곡의 벽 앞에서
나는 또 얼굴을 묻는다
(정군수·시인)
+ 빈 꽃병을 바치며 -망월동 오월묘에서
혹시 국화 장미 튤립 수선화
안개꽃 후리지아……
혹시 빨간 꽃 보라 꽃 희고 노란 꽃 향기로운 꽃
그렇게 쉽게 순결을 팔아버린 꽃들로는
이 꽃병을 채워선 안됩니다
어느새 순하게 길들어버린 산야에
들꽃은 무리 지어 허천나게 피어나고
진실을 허물고 들어선 꽃집마다 사시사철
속절없이 고와만 가는 꽃들로 넘쳐나도
혹시 그럼 꽃들의 한 송이 거짓이라도
더는 참될 수 없이 맑은 이 순수 앞에
바쳐져선 안됩니다
피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그 언덕에
그 거리와 광장에
야수의 손길로 황급히 옮겨 심은 꽃
색색이 현란하게 향기도 짙은 꽃들은
아이들을 온순하게 길들이고, 아아
우리들도 꽃에 속아 비겁해졌습니다
혹시 수없이 무릎꿇어버린 복종이나 하룻밤 새
세 번도 넘게 부정해버린 비겁의 한 송이라도
이 뜨거움 앞에 바쳐져선 안됩니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라도
우리들이
우리들의 이름으로 꽃씨를 뿌릴 수 없다면
우리들의 뜨거운 가슴을 모아
해방의 꽃을 피울 수 없다면
향기론 사랑의 혁명으로
압제의 땅 차가운 사슬을 끊을 수 없다면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라도
이 꽃병은 그냥 비워두어야 합니다
(김해화·시인, 1957-)
+ 무덤 앞에서
상원아 내가 왔다 남주가 왔다
상윤이도 같이 왔다 나와 나란히 두 손 모으고
네 앞에 내 무덤 앞에 서 있다
왜 이제 왔느냐고? 그래 그렇게 됐다
한 십 년 나도 너처럼 무덤처럼 캄캄한 곳에 있다 왔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나는 오지 않았다 상원아
쓰러져 누운 오월 곁으로 네 곁으로
나는 그렇게는 올 수 없었다
승리와 패배의 절정에서 웃을 수 있었던
오 나의 자랑 상원아
나는 오지 않았다 그런 내 앞에 오월의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기 위하여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기 위하여
나는 네 주검 앞에 올 수가 없었다
그따위 짓은 네가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왔다 상원아 맨주먹 빈손으로
네가 쓰러진 곳 자유의 최전선에서 바로 그곳에서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 나는 왔다
그러니 다오 나에게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들불을 밝힐 밤의 노동자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 그것을 나에게 다오
(김남주·시인, 1946-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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