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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길을 따르시렵니까?
< 본문 – 누가복음 13:31-35 >
누구나 들어보았을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가지 않는 길’이라는 시의 일부를 읽어드립니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때론 두 갈래 길에서 하나는 포기하고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수없이 많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기준하여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로스트는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을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대부분 편안하고 안전합니다. 반면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신앙인이 가야하는 길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길일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라 많은 사람이 가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신앙인이 가는 길은 결코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지 않습니다. 문이 좁다는 것은 보잘것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출세나 성공이나 부귀영화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길입니다. 협착하다는 것은 고난의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칭찬받고 환영받는 길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며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니 그 길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신앙인은 넓고 편한 길, 칭찬받고 영광을 얻는 길을 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의 결국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굳이 그 길을 가려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길을 가야 하리니.”(본문 33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시려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왜 주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가시겠다고 힘주어 말씀하신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바리새인들이 와서 헤롯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데서 시작됩니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여기를 떠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늘 틈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걱정해 주는 것처럼,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여기를 떠나 피신하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그들이 예수님을 걱정해서 헤롯의 음모를 전해준 것일까요? 여기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입니다. 그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분봉왕입니다. 그는 나바테야의 공주 파샬리스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이복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의 미모에 빠져 파샬리아와 이혼하고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이건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이었기에 세례 요한의 호된 질책을 받아야 했고, 그런 세례 요한을 결국 처형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그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스리던 땅에 눈엣가시와 같은 사람이 또 한 명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경계했습니다.(누가복음 9:7)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그가 다스리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백성들에게 인기를 끌자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냥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시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들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제자들이 오해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뭔가 거사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시고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여전히 갈릴리 지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자 헤롯의 마음은 조급해졌을 것입니다. 자신이 통치하는 갈릴리 지역에서 거사를 일으키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로부터 정치력이 없는 무능한 왕으로 낙인찍혀 분봉왕의 자리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헤롯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영역에서 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바리새인들을 사주해서 ‘헤롯이 너를 죽이려 하니 여기서 빨리 도망쳐!’라고 협박을 한 것입니다. 만일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죽이려 생각했다면 군사력을 동원하여 죽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객을 보내든 몰래 암살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예수님까지 살해하면 백성들에게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되어 그것 또한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의 지방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사주해서 ‘빨리 이 지역에서 나가라!’고 협박을 한 것입니다.
그런 의도를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말씀합니다. 여우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교활함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자신이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하지 않고,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당신을 쫓아내려 한 그 교활함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아신 것입니다.
여러분, 헤롯은 자신의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쫓아내려 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신앙적 고민이나,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이 통치하는 백성들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안정뿐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불법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그래서 동생의 아내까지 빼앗는 짓을 자행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욕망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없고 권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할 뿐, 힘이 있고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그렇게 살고 싶어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고 싶어 출세하려고 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때로는 남의 눈치를 보는 듯하지만, 때로는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삽니다. 그게 앞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넓은 문, 쉬운 길로 가려 하는 사람들’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우리도 그런 욕망에 끌려 살고 있진 않습니까?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정작 중요한 문제 앞에서 믿음의 가치는 무시되고 세상적인 이익과 내 욕망이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시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서 내가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신앙을 버린 채 살곤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생각하시며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성경의 역사에서 선지자들이 죽임당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수도 없이 죽였습니다.
선지자들이 누구입니까? 나라가 잘못되어갈 때,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에 끌려 통치할 때, 백성들이 정의를 따르지 않고 불의의 편에 설 때, 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왕의 눈치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치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면 당연히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실제로 선지자들이 외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범죄했을 때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악한 왕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아합 왕조차도 엘리야 선지자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겸비해졌습니다.(열왕기상 21:29)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선지자들을 죽이는 권력자들이 많았습니다. 정치 권력에 죽임당한 대표적인 선지자가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임당한 사가랴입니다.(누가복음 11:51) 누가 선지자들을 죽였을까요? 힘없는 백성들이 죽인 것 아닙니다. 권력자들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만든 것처럼, 권력자들이 자기들이 가진 권력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권력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에 빌붙어 콩고물을 얻어먹으려 하는 권력의 하수인들이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권력자가 위협을 가한다 하더라도 당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묵묵히 가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 3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헤롯이 아무리 협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헤롯이 바리새인을 사주하여 갈릴리에서 떠나도록 위협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과 내일 여기에 머물며 당신이 하셔야 할 사역을 계속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삼일’이라고 일컫는 ‘당신의 때’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밝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아무리 협박한다고 해도 그 협박을 피해 도망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헤롯이 아무리 큰 권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권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고집스럽게 감당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때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인데, 그 예루살렘에서 당신은 죽음을 맞이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죽으심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헤롯이, 그리고 선지자들을 죽였던 권력자나 그 하수인들이 갔던 길과는 다릅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위협하고, 거짓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세상에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길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는 길이 아니라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는 길입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도 고통당하는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3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것’입니다. 아무리 폭풍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암탉은 자기 새끼를 품에 안아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자기 새끼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권력을 주셨다면 자신에게 있는 힘을 가지고 그런 일에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백성들을 죽이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그렇게 사셨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은 이들의 곁으로 다가가 그들을 치료해 주셨고, 세상에서 소외되고 멸시를 받아 외롭게 울고 있는 힘없는 자들을 품에 안아 위로해 주셨습니다. 귀신의 권세에 억눌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된 삶을 살도록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가족조차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던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져주시며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악으로 인해 사망의 그늘 아래서 죽음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서 죽음을 굴레를 벗겨내 하늘 백성을 만드시고자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게 주님께서 걸어오신 길이었고, 지금도 걷고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제 걷게 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롯처럼, 그리고 수많은 권력자들처럼 욕망의 길을 가시려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실 수 있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귀가 유혹한 것처럼, 마귀에게 절하고 마귀와 타협하여 마귀의 하수인이 된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손에 움켜쥘 수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던 것처럼,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떠밀려가셨다면 왕의 자리에 오르셨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뭔가 큰 거사를 일으키려 하셨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얻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적 혼란을 틈타 교회나 일부 목사들이 군중들을 선동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정치 집단화하여 자기들의 정치적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세상이 추구하는 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죽는 것이고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께서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의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헤롯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길입니까?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는 그 앞에 두 개의 길이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람들이 덜 가는 길을 선택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헤롯의 길입니까? 예수님의 길입니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이 헤롯의 길을 따르라고 소리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아가 세상 사람들처럼 넓고 편하고 자신을 위하는 길을 가라고 독촉한다 하더라도, 그런 우리의 욕망과 자아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넓은 길을 가라고 부추깁니다. 쉬운 길을 가라고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욕망을 따가 가라고 유혹합니다.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살라고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남을 짓밟고 올라서라고 말합니다. 그게 성공하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편안한 길을 가라고 속삭입니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어떤 위협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꿋꿋하게 가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말입니다. 비록 내가 죽어야 하는 길이고, 내가 희생해야 하는 길이지만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에,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야 하는 길이기에 그 길을 가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도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헤롯처럼 위협하고 남을 죽이려는 길과 주님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 길입니다. 내 욕망을 따르는 길과 십자가를 따르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길과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느 길을 가고 계십니까? 아니 어떤 길을 가시렵니까? 누구의 길을 따르시렵니까? 헤롯입니까? 예수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