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 *51가지 철학 체험(로제 폴 드루아 지음) 중 발췌
흐르는 물에 면도날을 씻자, 거품에 섞여 있던 수염 조각들이 세면대에 흩어진다. 이것은 몸의 일부일까, 아니면 이미 사물이 되었을까?
우리와 사물 사이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보려는 사람은 우리의 몸에서 지속적으로 사물이 되어가는 것에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잘린털, 벗겨진 피부 각질, 빠진 머리카락, 깎아놓은 손톱과 발톱 조각은 지속적으로 몸에서 떨어져나간다. 이처럼 몸의 일부가 사물의 세계로 끊임없이, 충돌 없이 옮겨가고 있다.
전기면도기. *사물어사전/홍일표
1) 내가 가지고 있는 전기면도기는 수년 전 나에게 입양된 물건이다.
2) 지금은 나에게 군림하는 폭군 같다. 아침마다 면도기는 나를 처형한다.
나는 기꺼이 처형당한다. 면도기는 나의 나태와 안일을 처단하는 것이 주요 일과다.
3) 모든 예술은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지형도를 만들기 위해 기존의 것과의 부단한 싸움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쟁취한다. 그때 비로소 특별한 예외가 탄생한다. 전기면도기는 내 몸의 관습을 용납하지 않는다. 잘게 잘린 언어의 조각들이 면도기 안에 가득하다. 죽은 언어의 벌레들이다. 전기면도기는 나의 충실한 도반으로 아침마다 나를 새롭게 한다.
4) 턱에 돋아나는 검은 잡초는 독수리의 오래된 부리와 같다. 독수리가 제 부리를 바위에 으깨어 신생의 새 날개를 퍼덕이듯 나는 전기면도기덕분에 매일 낯선 세계로 진입하는 입장권을 얻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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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razor [면도기]
사회 입문의 공인인증서
친한 선배가 유명한 문학상을 받았다. 야인적 기질로 유명했던 그가 꽤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동료들에게 축하의 대상인 동시에 특별한 일로 여겨졌다. 상의 권위는 '사회'의 권위이며,
그의 야인적 기질은 늘 '사회 바깥 또는 경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상식장에 나타난 그의 얼굴은 낮설었다. 늘상 털보였던 그의 얼굴이 면도로 말쑥해져 있었다.
사회라는 무대에 공식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 대부분의 남자가 거의 예외 없이 제거하는 것이 바로 수염이다. 야인이었던 선배 얼굴도 공식적인 사회 무대에 입장해야 할 때는 면도라는 통과의례
를 거쳤다. 그런 점에서 면도기는 사회 입문식에 쓰이는 제의적 사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염이 깎인 얼굴을 보면 사회는 그가 사회 바깥의 야인은 아니라고 '일단' 판단한다. 왜일까. '털(수염)'
에서 환기되는 야생적 이미지가 제거됨으로써, 문명인의 무의식에 내재된 불안감이 누그러져서 아닐까.
요즘 면도기는 칼날이 표면으로 노출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지만, 면도기의 물리적 본질은 예리한 '칼' 이상이 아니다. 면도기는 신체에서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얼굴에 칼을 댐으로써,
야성의 표식을 질서화된 사회의 표지판으로 변형시킨다. 면도한 얼굴은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겠다는 공인인증서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면도는 머리를 깎는 행위와는 다르다.
머리를 깎는 극적인 상황의 주인공을 떠올려보자. 실연한 여자,스님이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한 사람, 삭발 투쟁을 하는 시위자도 있다. 이 상황은 중대한 결심을 상징한다. 어제의 시간, 자기가 묶인 사회에 결별과 단절을 선언한다. 반면 면도기가 절실한 주인공은 기업 임원들과 면접을 앞두고 있는 신입사원이다. 사회를 버리기 위한 행위가 머리를 깎는 것이라면, 사회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면도기다.
신화인류학자 엘리아데에 따르면 초월적 제의는 문명인의 세속 한가운데서도 의식되지 못한 채 반복된다. 그러나 초월의 욕망은 속(俗)에서 성(聖)스러움의 방향으로만 향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면도기는 자연의 인간을 세속의 인간으로 수정한다.
면도기. *철학자의 사물들(장석주)
수염은 하루치의 갈망과 시간의 용적을 보여준다. 수염은 무질서이고 혼란의 기호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면도를 하는 것은 문명세계에서 몸의 털들은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면도날에 의해 토
막 난 수염들, 나로부터 멀어지는 사물, 나와 무관해진 사물, 결국 버려지고 잊힐 사물, 아무런 신성성도 없는 이것은 세면기 밑바닥의 구멍으로 소용돌이치는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간다.
세면기 바닥에 뚫린 구멍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허虛와 무로 들어가는 문이다. 몸에서 잘린 수염들은 누추하고 쓸쓸한 시간의 사라짐,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사물세계의 고갈과 소멸에 대한 암시이다.
수염이 없는 밋밋한 얼굴은 말끔한 인상을 주는데 반해, 수염이 덥수룩하면 거칠고 지저분한 인상과 함께 그 내면의 불확정성과 아노미를 암시할지도 모른다
수염 자르기가 문명의 관습에 속한다면 덥수룩
한 수염은 자연주의적 취향이나 이 문명의 주류가 되어버린 억압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을 암시한다. 뼛속까지 자유정신을 갖고 수염을 기르는 자들에게 수염은 위엄으로써 사회적 구별 짓기이고, 더 나아가 관습적인 권력들에 대한 저항의 징표이
다. 예수가 그렇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렇고, 톨스토이가 그렇고, 니체가 그렇고, 체 게바라가 그렇다.
수염은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현재와 찰나에 대응한다. 사라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기억조차 할 수가 없다. 면도기에 잘려나간 수염들은 어떤 자취들, 부재의 징표들이다. 삶이란 것은 그런 망각의 흔적들 위
에 쌓아올린 그 무엇이다. "망각은 기억의 살아 있는 힘이며, 추억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산물”(막 오제, 《망각의 형태>>이라고 한 것은 막 오제 Marc Augé 라는 프랑스 출신의 인류학자이다. 망각은 일종의 존재 경화증이고 추억은 망각의 잔여물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위에 꿋꿋하게 서있다는 것을 뜻한다. "망각은 그것이 모든 시제들과, 이를테면 시작을 체험하기 위해선 미래와 순간을 즐기기 위해선 현재와,귀환을 실천하기 위해선 과거와,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그 모든 경우와 결합할지라도 우리를 현재로 귀착시킨다. 그러니 현재에 계속 속해 있으려면 망각해야 하고, 죽어가지 않기 위해선 망각해야 하며, 변함없이 남아 있기 위해선 망각해야 한다." (마오제, 앞의 책) 모근毛禮에서 뻗어 나온 수염들은 삶의 노역과 시간의 형상들에 대한 불가피한 물증이다. 수염은 문명화 이전, 길들여지지 않은 야만과 본성의 잔재이다. 내게 수염을 자르라고 명령하지 마라. 그렇다고 수염을 기르라고도 하지 마라. 나는 수염을 기르지도, 혹
은 자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수염을 자라는 시간을 오롯하게 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