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0
우리의 나아갈 길은 대륙이다
대마도를 정벌하라
황해도 감사의 급보가 태종에게 전해졌다.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사검이 만호 이덕생과 함께 병선 5척으로 해주(海州)의 연평곶(延平串)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데, 적선 38척이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배를 에워싸고 공격했습니다."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가 서해를 북상하여 연평도 앞바다에 나타난 것이다.
서해 5도는 예나 지금이나 안보의 촉각이 작동하는 최전선이었다.
그동안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이 전라도에서 나라의 공선(貢船) 9척을 약탈하고
충청도 안흥량에 상륙했다.
당시 현지 수장(守將)이었던 충청좌도 도만호 김성길(金成吉)은 이미 전날 전라도 감사(監司)로 부터 왜구가
영광 앞바다를 지나 북상하고 있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김성길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계를 소홀히 한채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성길은 그의 아들 김윤(金倫)과 더불어 남아있는 배를 수습하여
반격하였으나 왜구의 창에 맞아 전사하고 아들 김윤도 왜구를 사살하다가 부친의 전사를 알고는 바다에
투신 자결해 버렸다.
이에 태종은 방비를 허술히 한 책임을 물어 죽은 충청좌도 도만호(左道都萬戶) 김성길을 역적에 올렸다.
근무태만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한수 이북 황해도 앞바다에 출몰했다. 이는 일선 방위 책임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였다.
"이 쥐새끼 같은 왜놈들, 손을 좀 봐줘? 말어?"
태종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군사를 일으켜 왜구를 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치면 이기고 원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왜구를 정복할 자신도 있었다.
당시 일본은 무로마찌(室町) 전기 시대로 조직적인 국가의 기틀을 갖추지 못한 시대였다.
반면에 조선의 군사력은 사병을 혁파하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상당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태종의 발목을 잡는 것은 명나라였다. 대륙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명나라는 넘치는 힘을 서역 정벌에
쏟아붓고 있었다.
군사강국 명나라에게 주변국을 정벌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선의 이미지는 국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선이 더 커지기 전에 명나라에서 조선을 손봐주려고 나설 수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준비된 조선의 군사력은 실은 왜국을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길러온 군대가 아니라 요동을 포함한
북방 영토를 염두에 두고 훈련된 군대였다.
태종은 함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혈관에는 대륙을 잃고 반도에 갇혀 신음하는 고구려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는 태종 사후 김종서 장군을 보내어 4군과 6진을 확보한 것으로 현실화 되었다.
우리의 나아갈 길은 대륙이다
조선의 선군(船軍)은 5년 전 거북선을 만들었다.
임진강에서 시험 운행한 결과 문제점이 발견되어 보완 중에 있다.
개선되면 실전에 배치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또한 명나라에서 건조술을 들여와 개량한 삼판선(三板船)은 성공작이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선수(船首)를 뾰족하게 좁히고 8개의 노를 더 장착한 삼판선을 양화진에서 시험 운행한
결과 놀라운 속도를 보여주었다.
삼판선은 전함에 적재하고 있다가, 전투가 벌어지는 해역에 내려놓아 적 전함을 공격하는 쾌속 돌격선이다.
남아시아를 넘어 아라비아반도까지 원정하는 명나라 정화함대(鄭和艦隊)가 등주에서 선수를 동으로
돌렸을 때 맞서기 위한 대비책은 속도였다.
정화함대의 기함 '보선'의 길이는 150m였다.
콜럼버스 함대의 100배 규모이며 시기도 90년을 앞섰다.
오늘날 대형 순양함급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전함을 보유한 명나라와 거함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국력이 받쳐주지도 못했다. 속도가 둔한 거함에 바짝 붙어 치고 나올 수 있는 전술의 핵심은 속도였다.
조선의 군사력이 이만큼 성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군사강국 명나라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머리를 조아리며 사대하고 있지만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오면 목숨을 바쳐 국토를
보존하기 위하여 준비된 군사력이었다. 강한 이웃 때문에 생존을 위하여 강해진 결과였다.
태종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조선이 나아갈 길은 북방이다. 언젠가는 대륙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륙이 우리의 살 길이다.
허나 대륙에서 승승장구하던 고구려가 후방을 소홀히 하여 신라에게 덜미가 잡혔듯이 남방을 허술히 해두고
대륙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참에 왜국을 쳐야 한다. 암, 치고 말고... 이번에 왜국을 눌러놓으면 100년은 끄떡없겠지.'
"왜국을 치자."
태종은 결단을 내렸다. 일본과의 전쟁 결심을 누구와도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혼자 결정해 버렸다.
태종 스타일대로 전격적이다.
전쟁을 결심한 태종에게 목에 가시처럼 따라붙는 것이 명나라였다.
"왜국을 정복하면 조선에게는 승전보이지만 명나라에게는 위험신호이겠지? 이것을 돌파할 묘안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태종이 무릎을 쳤다.
"그래 맞아. 왜국을 쳐서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릴 일이 아니라 대마도를 치는 거야. 대마도 정도는 명나라에서
가벼이 보아 줄 것이고, 왜놈들에게는 숨통을 조일 수 있다는 겁을 주는 거야.
이게 바로 화살 하나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는 것이거든..."
상쾌한 웃음을 머금은 태종이 즉시 측근 신하들을 소집했다. 때 아닌 심야 궁중회의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예조판서 허조가 입궁했다.
임금 세종도 당연히 참석했다.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對馬島)를 치는 것이 좋을까 한다."
왜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할까? 말까? 를 묻는 것이 아니다.
왜국의 혼슈(本州)를 공격할까?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할까? 토론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대마도 공격을 기정사실화하고 전술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궁정회의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회의였다.
"허술한 틈을 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고 적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서 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예판 허조의 의견이다. 허조는 전략통이 아니었다.
"허술한 틈을 타서 쳐야 합니다."
역시 군사통답게 병판 조말생이 기습 공격을 찬성했다.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 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어라. 대마도를 공격하고 우리 군사는 거제도에 물러 있다가 돌아가는 적선을 요격하여 불사르고
배에 있는 자는 모두 구류하라. 명(命)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려라.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후일의 환(患)을 다함에 있다."
전쟁은 허세와 오판과 광기에서 출발한다.
태종의 대일전에서 광기를 찾아내는 것은 사가(史家)들의 몫이다. 못 찾으면 선전(善戰)인 것이다.
다음. 201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