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제도의 허실
이 무렵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제정 공포된 국민의료법(1951. 9. 25)에 따라 1952년 1월
한의사 국가 시험령이 마련되었고 같은 달 30일 한의사 국가시험 응시 자격 검정시험 규정
이 갖추어져 자칫 존립의 법적 근거를 잃을 뻔했던 한의사 제도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당초 국회에 제출된 국민의료법안은 한의사 제도를 제외시킨 양의(洋醫) 단일법안이었으
나 김영훈 방주혁 박호풍 박성수 조헌영 등 수 많은 한의 계 인사들의 줄기찬 노력으로 이
원(二元)재 국민의료법안이 마련돼 확정된 것이었다.
이때 주로 보건부 등에서 요직을 점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양의 측이었다. 따라서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므로 의료법에 한의제도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양의 측 인사
들로부터 강력히 대두되고 있었으므로 민족의 혈맥 속에 면면이 흘러온 한의학의 전통이 단
절될 위기에 처했었던 것이다. 정부수립 직후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미 군정청
(美軍政廳)으로부터 보건업부를 인계 받아 우리의 독자적 의술로써 국민보건에 기여하는 것
이 바람직하다는 포부를 펼친 바 있었던 운룡으로서는 국민의료법의 한의사제도 시행이 여
간 반갑지 않았다.
더구나 일송(一松) 박성수 선생과는 일제 때 묘향산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할 적부터 왕래
가 있어 잘 알고 지낸 사이이고 송운(松雲) 방주혁 선생은 광복 직후부터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김영훈 박호풍 선생과도 각별한 사이였으므로 우리나라 의학의 미래에 관해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이들은 모두 운룡과는 10∼30년의 나이 차가 있었으나 광복 직후부터 의학적 명성을 떨쳤
던 운룡에게 한의학 발전에 기여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한 터였다. 이때만 해도 벌
써 한의 계에 비해 양의 계에는 입법부는 물론 행정부인 보건부 요직을 두루 차지할 정도로
월등히 많은 인물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의학은 일제의 전통의학 말살정책에 의하여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고 신생 대한
민국 정부에서조차 제도적 보호를 외면하려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한의 계의 대동단결을 촉
진시켰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인재의 양성이 시급함
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방주혁 박호풍 등은 운룡이 이명룡 선생의 인도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민족의학인 한
방의학 장기발전계획을 개진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한방 양방의 상호 수용
발전을 전제로 한 한·양방 종합병원의 설립과 한 의과 대학 설립을 제창하였다는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김영훈 등은 새로 발효되는 국민의료법의 한의사제도 규정에 따라 운룡에게 신규 한의사
자격증을 발급해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운룡은 수령을 거부했다. 이때 김영훈을 비롯 방주
혁 박호풍 박성수 등 한의 계의 뜻 있는 인사들은 질적, 숫적 열세에 놓여 있는 한방의학의
조속한 부흥을 위하여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면 새로 면허증을 발급하였으므로 이때 많은
한의사들이 개업할 수 있었다.
운룡은 선배들의 처사가 한의 계의 부흥을 위하는 선의(善意)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 한의학 백년대계의 기초를 다지는 초창기의 이 같은 처사는 뒷날 한의사들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좋지 못한 결과를 부르게 된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우선 급하다고 해서
인간 됨됨이라든지 교육 수준, 질병치료 능력을 입체적으로 면밀하게 파악하지 않고 자격증
을 줄 경우 후일 전체 한의사의 질적 수준 저하는 물론 그로 인해 한의에 대한 국민 일반과
국가의 불신마저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송운은 운룡의 재주가 아깝다며 거듭 한방의학의 발전에 기여해 주기를 당부하였다. 나이
차이가 많았지만 송운은 언제나 운룡에게 김 선생이라는 호칭을 써서 존중의 뜻을 표하였
다.
"김 선생 같은 천하의 재주가 이 나라 한방의학의 발전에 노력한다면 한의학의 미래는 아
무 걱정이 없을 게요. 다른 이들과 의논하여 김 선생께도 한의사 자격증을 드리도록 할
터이니 너무 냉정하게 거절하지 마시오. 작고(作故)하신 나의 백부께서 김 선생이 이 나라
의 국운(國運)을 새롭게 열어 놓을 비범한 인물이라는 예언을 한 바 있었습니다. 부디 한
방의학 발전에 노력해 주시오."
"송운 선생님, 저는 선배님들의 처사는 이 나라 한의학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그리 바람직
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하고도 철저한 심사를 통해 "참 인재"들을 대거 선발해
야만 한의학의 밝은 미래가 보장될 것입니다. 저는 우선 한의사이 수를 늘리고 보자는 방
식의 처사에 동의할 수도 없고 또 제 자신 지구촌의 "쓰레기"의학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새로
운 의학, 간이(簡易)한 건강법을 제시하려고 온 사람으로서 면허증을 얻어 걱정 없이 밥벌
이나 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오."
운룡은 기존의 의서들에 기초하여 공부해 온 한의사들과 그들에 의하여 새롭게 자격증을
받은 한의사, 앞으로 배출되는 한의사들에 대하여 별다른 희망을 걸지 않았다. 세상은 무섭
게 변화하고 있는데 지나간 시절의 경험방이 요즘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이며 또 천
하에 뛰어난 학자가 아닌 담에야 어떻게 그 많은 의서(醫書)를 제대로 공부하여 의사 노릇
을 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공해(公害)가 극심하게 되는 시절에는 기존의 거의 모든 의학 이론과 의서들은 한
낱 서가 속의 골동품에 불과하게 된다는 사실을 운룡은 잘 알고 있었다. 오늘과 미래세상을
위한 새로운 의방(醫方)과 건강법을 제시하려고 형극의 삶을 마다 않고 살아온 자신에게 대
한민국 한의사자격증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선배들이 호의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선배들이 운룡의 흉중에 있는 심원하고 웅대한 뜻
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는 어려운 것이다.
영원한 후세를 위하여 이해하기 쉽고 이용하기 간편한 건강법과 의료방법을 재창조하여
세상에 전해줄 인물이, 어떻게 현실과 거리 먼, 옛 의서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나름의 경
험을 쌓아온 의료인들로부터 "자격인정"을 청원하여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어쨌든 한의사자격증을 받아놓고 그것을 활용하여 구세제민(救世濟民)의 성업
(聖業)을 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격이라는 것은 수련과 공부를 통
해 일정 수준에 도달하였을 때 다수를 대표하는 인물들에 의한 시험을 거친 뒤에 주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일곱 살부터 생득적 의료지혜와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못 고칠 병이라고 알려
진 제반 불치병들은 고쳐주면서 40이 넘도록 경험을 쌓아온 사람에게 옛 의서나 들여다보며
가까스로 밥벌이나 하는 용렬한 의료인들과 다름없는 취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석가모니에게 불교학 박사학위를 수여하고 예수에게 신학 박사학위를 수여한다면 도대체
학위 심사를 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창조적 인물에게 보편적 수준의 반열에 설 것을 권고
하는 것이 호의(好意)인가, 무지(無知)인가.
임진년(1952), 국민의료법의 발효로 시행되기 시작한 한의사제도는 초석을 다지는 단계에
서부터 인간 됨됨이와 의료능력에 대한 엄정한 심사 없이 인물들을 선발함으로써 의학 사에
오명을 씻을 길이 없게 되었다.
가장 존귀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의 선발에 있어서 인간 됨됨이와 의료사고를 일
으키고 면허증을 대여하는 망국(亡國)의 폐단까지 부르는 계기가 될 것임을 선배들은 미리
예견하지 못한 것 같다. 당시 시험은 열 개 과목으로서 한 과목에 10점이었는데 60점 이상
이면 합격시킨다는 것이었고 전쟁후의 혼란과 법제도의 미비를 틈타 당시 과목당 2만원씩
20만 원의 금액을 출연할 경우 면허증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하였다.
어쨌든 운룡은 한방의학의 주체적 발전을 기초로 하여 양 의학의 좋은 점을 수용, 이 시
대의 새로운 한국적 의학을 창조해야만 이를 통해 잎으로 닥쳐오게 될 온갖 괴질·난치병으
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고, 나아가 인류 건강에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으나 정작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운룡은 지혜로운 이에게 난국 타개책을
묻지 않는 위정자들을 찾아다니며 자진해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없
었으려니와 또 그렇게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운룡은 인술(仁術)을 이용한 돈벌이보다는 "아는 것"을 실제 경험하면서 우주의
비밀을 인간의 질병 치료와 건강 장수에 활용할 수 있도록 만고 불변의 이정표를 제시하기
로 마음먹고 오로지 의약실험에만 전념하였다. 이를 모두 모아서 뒷날 《신약본초》(神藥本
草)를 저술하여 자신의 별세(別世) 후의 인류에게 건강 장수를 위한 꺼지지 않는 등대(燈臺)
가 되도록 할 결심인 것이었다.
삼가 일생대오(여백)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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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야기(22) 한의사 제도의 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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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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