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현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감독이다. 그는 또한 괴짜감독으로도 유명한데, '롤키Ⅴ'같은 단편영화를 보면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거인같은 몸집의 러시아 권투선수 이고르와 멸치처럼 삐쩍 마른 미국 권투선수 록키가 맞붙어 싸운다. 할리우드의 흥행작 '록키Ⅳ'의 결말과는 정반대로, 록키는 이고르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하다가 처참하게 KO패 당한다. 소련과 미국, 소련 공산주의와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풍자와 냉소는 1989년 영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에서 계속된다.
북극의 황량한 툰드라 지대에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밴드(그룹 슬리피 슬리피즈)가 연주를 한다. 그들은 앞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헤어스타일과 앞머리만큼이나 끝이 뾰죡한 검은 구두를 신고 있는 기묘한 모습이다. 그들의 매니져 블라디미르(마티 페넬로파)는 미국에서는 '모든 것을 팔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밴드는 뉴욕에 도착하고, 프로모터 앞에서 연주솜씨를 뽐낸다. 프로모터는 인기를 얻을 확률이 전혀 없는 밴드라고 판단하고, 멕시코에 가서 사촌의 결혼식 축하연주나 해달라고 부탁한다. 밴드는 테네시의 멤피스,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갈베스톤, 델지오의 플라자 라운지, 텍사스의 랭트리와 휴스톤을 거치면서 미국의 대중음악(로큰롤, 컨트리 뮤직, 하드록)을 열심히 배우고 멕시코까지 간다.
얼어붙은 툰드라, 러시아식 이름의 블라디미르와 레닌그라드, 컨트리 곡을 연주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집단농장'이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러시아풍의 노래를 부르는 밴드, 밴드가 공산주의 체제 소련과 관련이 있다는 추측은 별로 어렵지 않다. 밴드의 헤어스타일과 옷과 신발과 무표정한 얼굴은 모두 똑같다. 불라디미르는 혼자만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독재자처럼 밴드를 속이고 착취한다.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고 마시면서(심지어 먹다 남은 고기를 개에게 주기까지 한다), 밴드에게는 목숨을 연명할 정도의 음식만 주고, 밴드가 연주하여 번 돈을 혼자 독차지한다. 굶주려서 안색이 창백해진 밴드에게 그는 일광욕을 안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엉뚱한 이유를 갖다붙인다. 블라디미르의 거짓말과 독선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밴드는 그를 감금해버리지만, '민주주의의 부활'이라는 아이러니한 자막과 함께 돌아온 그는 다시 밴드를 지배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획일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풍자하고, 소련의 정치지도자를 마음껏 비꼰다.
그리고 동시에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비웃으며, 아메리칸 드림은 공허한 약속일 뿐이라고 말하낟. 밴드는 미국의 유명한 군수산업 기지가 있는 지역만 골라서 지나쳐가는데, 미국은 물질적인 풍요가 넘치는 부자나라가 아니라, 첫 장면의 툰드라 지역만큼이나 황량하게 보인다. 모든 것을 팔 수 있다는 미국에서 팔 것이 없는 밴드는 음식으로 가득찬 수퍼마켓 옆에서 굶주림에 지쳐 있다. 대화가 거의 없는 영화(밴드는 영화를 못한다)는 무성영화처럼 조용하고, 밴드가 연주하는 장면을 빼면, 화면은 정지화면처럼 거의 움직임이 없다. 인물들은 무표정하고, 동작 또한 절제되어 있다. 덕분에 미국은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어둡고 침울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밴드가 멕시코에 도착하면 화면은 갑자기 할기를 띠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모두 결혼식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즐거워하고, 밴드는 마음껏 연주실력을 발휘한다. 마침내 기타연습을 하다가 북극의 추위에 얼어붙었던 단원 하나까지 더운 기운에 녹아서 깨어나면, 미국이 아닌 멕시코가 생명과 부활을 가져다주는 패러다이스가 된다. 패러다이스에서 독재자 블라디미르는 발쿤일 곳이 없어지고, 그가 떠나버린 멕시코에서 밴드는 결국 성공을 거둔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종횡무진으로 비판하면서도, 결코 심각하게 무게를 잡지 않는다. 그저 우스갯소리로 농담이나 한마디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