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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디자인의 변화는 총괄 수석 디자이너에 의해 결정된다. 패밀리룩을 대중 브랜드까지 트렌드로 추구하는 작금의 시대에서 총괄 수석 디자이너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패밀리룩은 디자인을 랭귀지라 비유할 때, 관용구에 해당된다. 캐릭터를 형성하는 디자인 모티브가 모든 세그먼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총괄 수석 디자이너는 이런 관용구를 창조하는 역할이다. 디자인을 개인의 취향이라고 폄하하는 시야를 잠깐 빌리자면, 총괄 수석 디자이너의 취향에 따라 관용구는 취사선택되고, 이에 따라 디자인도 변한다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을 미적인 것으로만 한정 짓는다면 취향은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디자인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총괄 수석 디자이너는 관용구를 창조해내기 위해 브랜드의 헤리티지와 컨템포러리 트렌드, 그리고 거시적인 비전을 갖춘 세련된 감각을 필요로 한다. 이런 요소를 잘 버무렸을 때, 디자인 평가는 개인의 취향으로 몰고 갈 수 없다.
세련되어진 엠블럼
볼보 VOLVO는 아이덴티티가 매우 확실한 브랜드이다. 그 아이덴티티는 바로 안전이다. 1944년 이중 접합 래미네이트 안전유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된 안전 중심주의 철학은 세계 최초 저속 충돌 방지 시스템인 시티 세이프티(City Safety)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볼보는 브랜드 창립 초기부터 스칸디나비아의 거친 기후에도 적응할 수 있는 안전하고 튼튼한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점을 본격적으로 마케팅에 내세운 것이 1956년 미국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대량생산, 대량판매를 통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대부분인 환경에서 볼보는 자신만의 색채가 두드러졌다.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144와 164 모델이 미국의 교통안전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면서 볼보는 안전과 직결된 브랜드 철학을 확고히 해갔다.
P1800ES
볼보 디자인 헤리티지 풀(heritage pool)에서 당대 트렌드를 리드할 만한 모델, 혹은 볼보의 아이덴티티를 독창적으로 표현해낸 모델을 꼽으라면 P1800을 제외하곤 힘들다. P1800은 볼보 최초의 스포츠 쿠페이자, 볼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모델로 꼽힌다. 이 모델은 특이하게 요트 디자이너이자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Pietro Frua 소속의 Pelle Petterson의 손을 거쳤다. 하지만, 좀 더 유럽적인 취향에 어울리고, 디자인적 가치가 높은 모델은 P1800ES라 할 수 있다. P1800ES는 테일게이트가 전부 유리된 슈팅 브레이크 모델이다. 이런 독특함은 V480, C30 등 향후 볼보 미래 디자이너들의 작품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아울러 현 볼보의 디자인을 이끌고 있는 Thomas Ingenlath는 P1800ES의 디자인적 가치를 부활시켜 201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Volvo Estate Concept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740
P1800ES를 논할 때, 볼보 수석 디자이너 Jan Wilsgaard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50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40년간 볼보에 머물며 P1800ES를 비롯 740 / 760 / 780 / 850 등, 볼보의 상징적인 모델을 완성해왔다. 볼보 760은 1982년 미국 시장 개척 이후 최초로 100만 대 수출을 돌파한 직 후, 등장한 볼보의 아이덴티티 모델이다. 1980년대는 Giorgetto Giugiaro가 창조해낸 쐐기형 디자인이 트렌드로 불었었다. 생산효율이 좋을 뿐 아니라 미래지향적이었다. 쐐기형은 각진 직선으로 이뤄진 디자인이다. 운송기기에서 직선을 사용하는 대표 사례는 강인한 힘과 튼튼함을 자랑해야만 하는 SUV나 군용차량들이었다. 곡선의 볼륨에 현혹된 소비자의 눈에 직선은 신선해서 미래지향적으로 보였지만, 각진 직선으로 이뤄진 디자인은 미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단단함에서 오는 믿음직스러움이 먼저였다. 안전을 아이덴티티로 삼는 볼보에게는 아주 제격이었다.
850
볼보의 수석 디자이너 Jan Wilsgaard는 직선의 고정관념을 더욱더 부각시켰다. 다부지고 강력한 직선으로 이뤄진 볼보 760 디자인은 볼보는 안전을 중시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부여했다. 이후 등장한 850은 직선 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연비와 무게에 강점을 지닌 직렬 5기통 엔진으로 파워트레인을 업그레이드하였다. 그 결과 출시되자마자 볼보의 가장 큰 시장인 북미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1999년 볼보그룹은 자동차 부분을 포드로 매각한다. 그 원인을 진부한 디자인에 찾는 이들도 있다. 강력한 직선의 디자인이 높은 안전의 이미지 창출에 뛰어난 업적을 냈지만, 소비자들에겐 볼보 디자인 = 각진 직선이라는 고정관념을 새겼다는 것이다. 그 화살은 Jan Wilsgaard의 뒤를 이어 수석 디자이너에 오른 Peter Horbury에게 향한다. 1991년도부터 볼보 디자인을 총괄한 Peter Horbury에게 시간은 촉박했다. 발 빠른 브랜드들은 이미 직선을 유행 지난 디자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생산효율성보다는 에어로 다이내믹과 미니멀리즘을 미적 기준으로 삼는 새로운 트렌드가 불었다. Peter Horbury는 볼보 아이덴티티가 너무 강하게 자리 잡은 디자인 랭귀지에 새로운 트렌드를 접목시켜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박스형 디자인이 진부해졌지만, 그것이 볼보의 전부였다.
1995년 Peter Horbury의 입김이 들어간 S40과 V40이 출시됐다. 헤드라이트와 그릴에 날렵한 비율을 대입하여 투박함을 지웠으며, 선과 선이 맞닿는 접점들은 모두 둥글게 굴렸다. 트렁크 패널과 리어 램프 그리고 휠 아치는 종전에선 느낄 수 없는 부드러운 곡선들이 볼륨을 생성했다. 지극히 트렌드를 반영한 디자인이었다. 변화는 생소함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소비자들의 인식에 아이덴티티가 고정관념으로 박힌 볼보는 더했다. Peter Horbury의 디자인 랭귀지는 트렌드를 적극 반영했지만, 볼보의 아이덴티티를 뒤흔들만한 획기적인 변화는 이끌지 못 했다. 각진 디자인만을 탈피했을 뿐, 판에 박힌 볼보 이미지를 벗기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이는 판매량으로도 증명된다. 91년부터 96년까지 총 716,903대를 팔아 치운 850에 비해, Peter Horbury 시대의 첫 결과물인 S40의 판매량은 훨씬 낮았다.
XC90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회사인 포드는 자금의 유동성 위기를 겪다, 2010년 중국의 지리 자동차에 볼보를 매각했다. 볼보의 대표 SUV인 XC90은 무려 11년간 모델 체인지 없이 생산됐으며, 1998년 등장한 S80은 2006년에 새로운 디자인을 입혔지만, 그로부터 10년이나 변함없이 팔리고 있다. Peter Horbury의 디자인 변화는 소극적이었으며, 변화 주기마저도 길었다. 볼보의 디자인은 소비자의 인식에 진부함을 각인시킨 것도 문제였지만, 그마저도 바꿀 수 없는 변변치 못한 재정의 브랜드로 낙인찍힌 게 더 문제였다.
Thomas Ingenlath
2008년 포드가 손을 떼기 전, 2년가량 생산과 연구개발이 완전 중단 상태에 빠졌던 볼보에 중국의 지리 그룹(吉利集團)의 27억 달러의 수혈은 단비였다. 여기에 독일 Pforzheim대학에서 트랜스포테이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영국 RCA대학에서 트랜스포테이션 디자인 마스터 학위를 취득한 Thomas Ingenlath 디자이너 영입이 이뤄졌다. 1964년 독일 태생인 그는 약 20년이 넘는 자동차 디자인 경력을 폴크스바겐 그룹 내에서 보냈었다. 91 – 94년까지 첫 직장으로 아우디의 선택을 받았으며, 6년간 Skoda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볼보로 오기 전까지 독일 포츠담에 있는 폴크스바겐 디자인센터장으로 근무를 했다. 현재 폴크스바겐 그룹은 강한 직선을 디자인 랭귀지로 채택하고 있다. 지금은 물러났지만, 폴크스바겐 총괄 수석 디자이너였던 Walter de Silva는 이탈리아인으로서 마치, 자국의 위대한 디자이너로 칭송받는 Giorgetto Giugiaro 풍의 디자인을 부활시키려는 의도로 직선을 그룹 전체 브랜드에 대입시켰다. 직선의 스타일링을 추종하는 그룹에서 경력을 쌓고, 선행 디자인을 선도했던 Thomas Ingenlath에게 직선은 매우 몸에 익은 스타일이었다.
S90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Coupe Concept
자사의 전설적인 모델인 P1800의 부활을 예견한 Coupe Concept(2013)는 곧 시판될 S90 디자인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다. ‘ㄷ’자로 꺾인 리어 램프가 강인한 볼보의 안전성을 표현한다. P1800ES를 재해석한 Estate Concept(2014)는 왜건 모델에 특화된 볼보만의 스타일을 거시적인 시각으로 확립했다. 직선이 주로 쓰였지만, 투박함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2015년 콘셉트 없이 바로 양산형으로 선보인 XC 90의 등장은 전 세계의 소비자들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디자인이었다.
Estate Concept
볼보가 첨단 안전 기술 외에 디자인만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Thomas Ingenlath만의 뛰어난 업적은 볼보만의 관용구를 창사 이래에 처음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등장하는 천둥의 신(神) 토르의 망치라는 이름이 붙은 데이타임 러닝 라이트가 그 대표이다.
전 세계 수많은 브랜드가 각양각색의 디자인으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시점에서 자국의 색깔이 짙게 묻어나는 디자인은 상품성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볼보는 스웨덴 태생이다. 나무의 천연 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영롱한 크리스털이 빛을 발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은 스칸디나비아 스타일로 대변되는 인간 중심의 색깔이 짙다. 쉬이 질리지 않는 간결함이 뛰어난 만듦새를 구성하고 있다. 1959년 세계 최초로 3점 식 안전벨트를 고안해내고도 인류의 안전을 위해 로열티 없이 특허를 공유하는 범 인류애를 안전벨트 클립에 새겨 넣는 디자인 역시도 스웨덴스럽다.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Thomas Ingenlath의 이러한 시야와 감각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는 볼보만의 아이덴티티를 제대로 확립시키고 있다.
형태는 어떠한가? 직선을 선호하는 스타일을 지녔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을 Jan Wilsgaard 식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그건 보수는 혁신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헤드라이트, 리어램프, 에어 인테이크, C 필러 등,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에 직선을 사용했다. Peter Horbury 식 곡선의 현대적 에어로 다이내믹한 볼륨이 패널과 실루엣을 구성하고 있지만 적당히 절제를 시켜서 직선의 요소와 조화를 이룬다. 디자인에서 조화는 중요하다. 21세기 자동차 디자인에서 안전은 형태를 제약하는 가장 큰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안전이 형태와 조화롭지 못하고 제약함으로써 손해 보는 요소 중 하나는 세련됨이다. 특히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볼보에게 세련된 리어램프를 요구하는 것은 죄악이었다. 볼보의 왜건과 SUV의 리어램프는 수직적 형태가 루프까지 확장되어 가독성을 높이는 디자인을 추구했다. 크고 넓어야 발광 능력이 좋기 때문이다. 큼직큼직한 투박함으로 조형적 심플함을 메꾼 이전 모델들에 비해 Thomas Ingenlath의 리어램프는 섬세해졌고, 밀도가 높아졌다. 보는 이들에게 세련되어졌다는 인상을 심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LED라는 기술의 발전은 형태가 기능을 따라야 하는 강박을 버리게도 했다. 세밀하고 조밀해짐으로 인해 생성되는 여백들은 에지와 크롬 가니쉬 같은 장식들로 치장됐다. 이것이 현재 트렌드이고, 총괄 수석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40.1 Concept
트렌드를 잘 따르는 것에 머물지 않고,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변화시키는데 열정을 기울인 Thomas Ingenlath의 노력은 프리미엄화로 귀결된다. 제일 먼저 XC90, S90, V90의 리노베이션을 마친 그는 최근 40.1과 40.2라는 이름의 콘셉트를 발표했다. 시장에서 볼륨이 큰 C 세그먼트의 변화를 예측케하는 모델들이다. 새롭게 변화된 디자인을 플래그십에 입히고, 하위 세그먼트에 관용적으로 반영하는 방법은 패밀리룩을 프리미엄 전략으로 밀기에 상당히 효율적이다. 40.1과 40.2의 디자인은 플래그십의 맥락을 잇고 있다. 그러면서도 변화를 추구한다. 한 마디로 평을 하자면, '직선이 강화됐다.'이다. 단단해졌고, 다부져 보인다. 이는 마치 볼보만의 아이덴티티가 극대화되었던 Jan Wilsgaard 시대의 부활로 보인다. 최고의 매출액을 올렸고, 가장 볼보 답다는 이미지를 뇌리에 심어 놓은 디자인 말이다.
40.2 Concept
복고를 가져왔지만, 훨씬 세련됐다. 직선만으로 구성된 형태의 최대 단점은 단조롭다는 것이다. 단조로움은 감각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Thomas Ingenlath 시대의 새로운 콘셉트들은 직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각적 입체를 반영했다. 40.2는 세단 + SUV라는 볼보가 특화 시킨 크로스오버 장르이다. 세그먼트 자체도 독특하지만, 직선으로 패널이 면 분할된 조형은 더욱 독특하다. 간결하고 심플하지만, 3D 조형적으로는 복잡하다. 트렌드세터의 면모로서 손색이 없는 디자인이다. 이는 정측면에서 바라본 프런트 형태를 통해 인지할 수 있다. 아우디가 창조해낸 싱글 프레임으로 대변되는 트렌드는 보행자 충돌 시 충격을 최대한 완화하기 위해 돌출된 범퍼를 없애버린 디자인이다. 안전을 위시했지만 싹둑 잘린듯한 프런트 디자인은 밋밋했었다. 하지만, 새로운 볼보의 콘셉트에선 그런 아쉬움 들은 찾아볼 수 없다. 입체적 커팅은 직선의 단조로움을 해체해버리고 있으며, 측면 이미지에 다채로움을 더하고 있다. 그렇다고 보행자 충돌 안전이 소홀해졌을까? 볼보에게 안전은 브랜드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형태가 기능을 따르는 시대도 지났으며, 기술 또는 소재의 발전은 이 둘의 하모니에 힘을 더하고 있다.
현재 예테보리 토슬란다 공장은 24시간 풀가동해도 주문량이 3~6개월치가 밀려있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안전 신기술로 무장하고 있다 해도, 상품성의 향상은 총괄 수석 디자이너 한 명의 뛰어난 감각에 비하면 부질없어 보인다. 그것이 바로 디자인의 힘이고, 능력이다. Thomas Ingenlath가 볼보 디자인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상 볼보의 성장은 눈부실 것이 자명하다. 기술과 디자인의 세련된 하모니를 현재 볼보가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볼보 시그니처이고, 디자인 평가에 취향을 거론할 수 없다.
첫댓글 볼보도 정말 매력이 있는 브렌드 같아요~
이제서야 안전과 기술위에 디자인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네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마케팅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