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대하여 설명해 주신다.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면서 항구한 자세로 청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청하는 그 이상의 것,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든 이로운 것을 주려고 합니다.
하물며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청하는 것을 거절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 청을 들어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청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집요한 친구의 비유에서처럼,
무엇을 청할 때 끈기 있게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곧, 어떤 사람이 벗에게 먹을 빵이 없다며 줄기차게 졸라 대면
마침내 그 벗은 밤중이라도 일어나서 먹을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자신의 여생이 좀 더 편하고
경제적으로도 고달프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부탁드린 것은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십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복권 당첨을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고 또 바쳤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고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참다못한 그가 마침내 좌절과 절망 속에 고함을 질렀습니다.
“하느님, 제발 저 좀 봐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 좀 봐주라. 제발 복권 좀 사거라.”
사람이 문 앞에서 오래도록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누군가 깨어나게 됩니다.
하느님께 기도로 청함과 동시에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감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감은 입 안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간청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에야 주님께 청하는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에게는 다섯 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 단계가 의식주와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생리적 욕구’입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면 두 번째 단계는
신체적 감정적 위험에서 보호받고 안전하기를 바라는 욕구가 생기고,
이것이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데,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 단계처럼 기도에도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기초 단계는 기복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는 자신의 건강이나 재산을 지켜 주고
지금보다 현세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고 성숙해질수록 기도의 내용도 바뀌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게 되며,
나아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알폰소 성인이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청하는 은총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현세적 욕구와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청하는 것은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는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처럼
눈앞의 욕구만 채우려는 것보다 영원성에 가 닿는 단계로 성숙해야 합니다.
인간 욕구의 단계가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갔듯이,
우리의 기도도 기복적인 것에서 영성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10)
하늘나라의 문은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의
기도 앞에서는
활짝 열리지만
게으르고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없는 이들 앞에서는
굳게 닫혀버린다네.
성령의 열쇠는
그분의 의로움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이들의
성실한 손에 쥐어진다네.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