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7-20 예수께서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장사지낸지 나흘이 지난 뒤였고 예수께서는 사람을 보내 자신의 도착을 몰래 알리셨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대적인 예루살렘의 유대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믿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께서 유대지방에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한다고 하시며 그에게 가자고 했는데 도마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죽으러 가신다고 생각하고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다. 이어지는 장면은 예수께서 이미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나 지난 뒤 나사로의 집에 도착한 장면이다.
17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16절과 연결된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는 말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개역개정은 “와서 보시니” 라고 했고 새번역은 “가서 보시니” 라고 했는데 둘 다 잘 못 번역했다. 본다는 말은 실제 눈으로 보았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발견했다’ 또는 ‘알았다’ 라는 뜻이다. 원문은 “예수께서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셨다” 라는 뜻이다. 직접 가서 보고 아신 것이 아니다. 마을 주변에 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듣고 알게 되셨다는 뜻이다. 앞에서 소경도 어두움 가운데 있었는데 나사로도 역시 어두운 무덤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다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피해 요단강 건너편 외딴 곳으로 가셨다가 아무도 모르게 다시 유대지방으로 잠입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18절에서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가 조금 넘는다” 라고 한 것이다. 이는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1.7마일 정도 떨어져 있다. 요한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적들의 본거지가 불과 2마일도 안되는 거리에 있다며 긴장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19절은 이러한 긴장감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많은 유대 사람들이 그 오리버니의 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려 와 있었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유대사람이란 1.7마일 떨어진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이다. 앞에서는 유대사람들이 주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교 지도자들이라 했다.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가족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주로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 같은 이스라엘의 엘리트 층들이 살았었다.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조문하러 왔다는 것은 이들은 마르다 마리아와 친척들이라는 뜻이다. 당시 장례식은 가까운 친척들 뿐 아니라 먼 친척들까지 모였다. 특히 재력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면 더 많은 조문객들이 모였었다. 오늘날 신분이 높은 사람의 장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과도 같다.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의 대적인 바리새파를 가리킨다. 이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안에 상당히 명망있는 가문임을 나타낸다. 12:5절의 마리아가 노동자 1년 품삯인 300데나리온이 넘는 향유를 깨뜨린 것도 마르다의 집안이 대단한 집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예루살렘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는 것은 긴장감을 더욱 높여준다.
첩보영화 같은 긴장감은 20절에서도 계속된다. 원어에서 20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연결된다. 수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라는 뜻이다. 20절은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라고 했다. 이 구절이 왜 첩보영화 같은 장면인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본래 상주는 집에 앉아서 조문객들을 맞이해야 하는 법이다. 예수께서 몰래 제자들을 보내 소식을 알렸을 것이다. 그런데 집에 수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르다는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혼자 몰래 예수님을 맞으러 나간 것이다. 마리아에게는 계속 자리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이하라고 말하고 혼자서 몰래 나갔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마르다 혼자 마중을 나가고 마리아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무런 눈치도 못했을 것이다. 마리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문객들은 마르다가 아마도 화장실에 갔나보다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 바로 예수님께서 베다니 근처에 도착한 때의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