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7:11-19,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해도, 13.3.10, 박홍섭 목사
게임기 중에 닌텐도 위라는 게임기가 있습니다. 이 게임기는 지금까지 게임기와는 차원이 다른 게임기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하는 게임이 아니라 눈에 안경이나 고글 같은 도구를 쓰고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직접 자기 몸을 움직여 복싱도 하고 볼링도 치고 춤도 추고 전쟁도 하는데 이때 게임하는 사람은 실제로 자기가 그 경기를 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혁신적인 게임기입니다. 이 새로운 게임기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제프리 쇼라는 사람인데 현존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중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21세기 이후를 예측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21세기 이후 인류는 pataphysics, 혹은 파타피지컬 species가될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파타피직스는 파타포와 피직스의 합성어입니다. 과학과 파타포가 뒤섞인 상태라는 뜻이죠. 파타포도 원래부터 있는 단어가 아니라 은유라는 뜻의 메타포의 패러디어입니다. 장기가 전쟁을 은유로 만든 게임이라면 파타포는 장기를 머리로 두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몸으로 해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21세기는 과학과 은유가 뒤섞이고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상태가 될 것이며, 그 속에서 사람들은 뻔히 가짜인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진짜로 믿는 듯이 행동하는 파타피지컬한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나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나우콤이 운영하는 아프리카 방송이라는 실시간 인터넷방송이 있는데 2006년도에 방송을 시작한 이후 매년 100%이상 이용자 수가 증가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방송입니다. 여기에는 매일 실시간 4000개 이상의 방송채널이 생성되고 몇 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그 방송을 봅니다. 그런데 그중의 반이 게임방송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게임하는 것을 중계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도 매일 2000개 이상의 게임방송이 생성되고 있고 거기에 몇 십만 명이 매일 함께 보면서 즐기고 열광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즘 젊은이들이 게임을 많이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고 있는 게임이 무엇입니까? 실제 세상이 아닙니다. 가상현실입니다. 왜 이렇게 젊은이들이 게임에 열광할까요? 많은 젊은이들이 취직도 안 되고 미래가 불투명한 자신의 현실을 보면 열광할 것이 없고 몰두할 것이 없다고 자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에 들어오면 몰두하고 열광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몰두합니다. 몰두할 동안 그런 자신이 실제이고 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게임 속에서 그렇게 열광하고 즐기던 것을 정작 현실세계에서는 별로 좋아하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렇게 열을 내면서 자동차 경주게임을 하면서도 진짜 운전대를 잡고 장거리 운전을 하라고 하면 피곤하다고 싫어합니다. 게임 속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총을 쏘고 전쟁을 하고 군인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막상 자기가 군대를 가야 하는 영장이 나오면 그렇게 가기 싫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상현실과 진짜 현실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짜 현실은 게임속의 가상현실과 다르게 운전대를 잡고 군대를 가야 하는 힘들고 어렵고 버거운 현실입니다. 어쩌면 현실이 힘들고 버겁기 때문에 더 가상의 현실 속으로 도피하여 거기서 나름대로 만족을 찾고 의미도 부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왜 오늘 서론을 이렇게 시작하는가 하면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내어야 할 현실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늘 피곤하게 운전을 해야 하며 군대를 가야하고 생각이 다르고 가치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직장생활과 삶의 고단한 무게들을 견뎌내어야 합니다. 인생자체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현실을 온 몸으로 부딪치면서 믿음으로 살아내어야 하는데 이게 잘못되면 기독교가 하나의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복합현실처럼 그 속으로 숨게 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추억은 아름답다고 합니다. 각자 간직하고 있는 추억과 그리움은 전부 실제의 현실보다 더 미화되거나 과장스럽게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추억과 달리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답지 않고 고달프고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과거의 기억들을 미화하거나 과장해서라도 저장해놓고 순간순간 돌아보면서 위로받고 오늘의 현실을 극복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힘든 현실과 버거운 오늘을 극복하는 해법을 이런 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과장되고 미화된 우리의 첫사랑의 추억정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힘든 현실을 이기기 위해 있지도 않는 천국과 지옥을 가상현실로 만들어 그 속으로 숨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가상현실도 아니고 턱을 고이고 추억을 곱씹으면서 앉아 탁상공론하거나 선문답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힘겹고 어려운 삶의 현장 속에서 이리 찢기고 저리 상한체로 하나님께 나아와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저주와 사망의 파편 아래 있는 현실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믿음을 구하여 내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실제로 있는 천국을 소망하면서 한걸음씩 나아가는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인데 그와 같은 기독교의 진리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살아야 할 세상이 만만하지 않는 곳임을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먹고 살기에만 만만치 않는 것이 아니라 제자이기 때문에 추가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십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제자들의 현실은 먹고 사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미워하는 문제도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예수 믿으면 결코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어물쩡하게 넘어가거나 믿음이 있으면 다 잘 될 거라는 막연하고도 신델렐라적인 환상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분명히 어렵고 만만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11절, 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치열하고 힘든 세상 한 복판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그 믿음을 지키면서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하게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 유명해지고 출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죄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악인데 어떻게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으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은 오토메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으로 지키십니다. 우리 안에는 죄의 본성이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향을 받고 마음이 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주셔서 그 말씀으로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게 하고 거룩하게 보전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보전하는 방법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보전하는 방편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진면목을 보게 하는 빛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 초년생일 때 미팅을 나가면 남학생들이 늘 했던 말이 있습니다. “다시보자 조명 빨, 속지말지 화장 빨” 그때는 왜 그렇게 카페나 다방들이 컴컴했는지 모릅니다. 컴컴한데 불그스무레한 조명이 켜져 있으면 여자들이 다 예뻐 보입니다. 그래서 예쁜 파트너 만났다고 좋아하다가 밖에 나와 밝은 태양 빛 아래 보면 그녀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그녀에게 투자했던 커피 값과 밦 값이 아깝죠. 다음부터는 절대로 조명 아래 여자의 얼굴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매력적인 모습으로 치장한 세상의 많은 것들의 진면목을 드러내주는 빛입니다. 말씀의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 많은 것들이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냥 좋아서 다 받으면 안 됩니다. “다시보자 조명 빨, 속지말자 화장 빨” 외우셔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봐야 합니다.
그것이 이 힘든 세상에서 믿음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보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보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롬12:21절을 찾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도망가지 말고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믿음으로 부딪쳐 거룩하게 자신을 보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다. 여기 선은 토브라는 히브리 단어를 번역한 단어인데 토브는 창1장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때 좋다는 단어입니다. 선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선입니다.(아가도스) 악은 ‘카코스’라는 단어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한 것을 자기가 보기에 좋도록 자기기준으로 바꾼 것이 악입니다.
지금 나의 생각, 내가 하는 일이 내가 보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좋을 것 같아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그것이 빛 된 말씀으로 세상을 보고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살 때 악에게 지지 않고 세상에 함몰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말씀으로 우리를 비추어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 기준으로 살아가 자신을 거룩하게 보전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한우리 식구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