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0528.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수요일. - 참사람.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50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7:32 추가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람>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사람이
듣다
참도 들리고
거짓도 들리나
그 사람
참만을 듣다
사람이
품다
참도 안기도
거짓도 안기나
그 사람
참만을 품다
사람이
말하다
참도 외치고
거짓도 외치나
그 사람
참만을 말하다
참만을 듣고
참만을 품고
참만을 말하니
그 사람
참으로 사람이다
그 사람
참사람이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5.28 04:41
- 나의 진리들, 하나의 성령들인 우리
요한복음에 많이 등장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진리입니다.
다른 복음에는 진리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
요한복음에는 25번이나 진리라는 말이 나오고
1장, 3장, 4장, 5장, 8장, 14장, 15장, 17장 18장에서 두루 나오며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오늘 이 말씀은 16장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하느님을 얘기할 때 요한복음은 주로 그리스도 예수를 지칭하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으로 그것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오늘은 성령께서도 진리의 영이시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도 진리이시지만 오늘 말씀을 놓고 볼 때
성령은 진리이신 주님께로 우리를 이끄시는 진리십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이끄시는 진리시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진리의 한 부분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한 부분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도 일리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흔히 ‘네 말에 일리가 있어!’라고 얘기하지요.
그런데 일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가
기분 좋을 일 없고 우쭐할 일은 더욱 없습니다.
많은 진리 또는 모든 진리 가운데 하나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
사실 우리가 지닌 진리는 아주아주 보잘것없는 진리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진리를 다 알고
내가 하는 말이 모든 진리인 양 생각한다면
내가 알고 지닌 하나의 진리로 모든 진리를 가리는 엄청난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교만이라면
내게는 하나의 진리밖에 없다고 겸손하게 인정할 때
우리는 모든 진리에 열려 있고 모든 진리를 향할 것이며,
이때 진리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존재와 말이 겸손한 진리일 때 우리도
성령처럼 사람들을 모든 진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비유하듯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은 경부선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있는 곳에서 경부선까지 가는 데도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경부선까지 인도하는 수많은 길이 바로 성인들이고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진리의 길과 생명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시고,
우리를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로 이끄시는 분이 성령이신데
이 성령을 모실 때 성인들과 우리도 주님의 성령들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나도 모든 진리이신 주님께로 가고,
그럼으로써 이웃도 주님께로 이끄는 하나의 진리들이 되고,
주님의 성령들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는 우리 그림자를 보고 놀라게 됩니다.
하느님의 숨
2025.05.27. 16:58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5월 27일 화요일 - 스물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그림자를 끌어안기
우리는 종종 우리 그림자를 보고 놀라게 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영성 전문 저술가인 루스 헤일리 바튼(Ruth Haley Barton)은 히브리 집안에서 태어나 이집트 파라오의 딸에 의해 자라난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그림자 작업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탈출 2,1-15 참조).
자기 민족 사이에서나 자신을 길러 준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외부인이었던 [모세]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를 가지고 매일 고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자라난 환경에 적응하고 거기에 정해진 길을 따라야 했을까요? 아니면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 규정들에 따라 살아가야 했을까요?....
우리는 모세가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듯 자기 상황에서 오는 고통을 다루는 데 필요한 꽤 훌륭한 대처 기제를 개발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적응하고 안전을 유지하는 방법을 개발합니다....
모세가 사용하던 방어 기재 중 하나는 분노를 표출할 곳이 없었기에 분노를 억누르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랫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해 폭발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어떤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그는 그 이집트인을 죽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그 시체를 모래 속에 묻고는 자기 죄를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통제 불능의 반사적인 반응은 그가 홀로 되기 전의 그의 리더십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바튼은 우리가 반사적인 패턴에 갇히게 될 때 어떻게 해서 침묵이 우리에게 최선의 반응을 하게 해 주는지에 대해 숙고하라고 초대합니다:
그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정제되지 않은 리더십의 파괴적인 힘을 알아차리고는 너무 놀라서 홀로 있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나의 이러한 부분을 그대로 두면 이것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그렇습니다. 그는 파라오가 무서워서 도망갔던 것이지만, 그를 도망가게 한 것은 발각될 것 같은 두려움, 혹은 발각되었던 두려운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늘 우리 존재 저 밑에서 우리에게 경고해 주는 그 어떤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우리를 자기-발견의 길에 들어서게 해 주고 (희망컨대) 우리에게 나쁘게 행동하도록 부추겼던 어둠의 세력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기 위해 필요한 일을 어떻게든 하도록 해 줍니다....
해결되지 않고, 통제할 수 없으며, 파괴적인 어떤 행동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문제를 안고 혼자 있어야 하겠어!" 우리는 그것을 그런 대로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대로 잘 대처하거나 적어도 그 파괴적인 본질을 비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드러나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었고, 뭔가 선한 것을 달성하고자 했던 우리의 시도를 파괴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순간을 맞이할 때 우리는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처럼 그런 순간이 일찌감치 온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에게처럼 그것이 뒤늦게 온다면 또한 이것도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면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더 위대한 자유를 향해 우리를 이끌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이 지상의 삶이 연옥이라는 생각을 품어 본 사람은 저뿐일까요? 저는 이 땅이 생명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한시적인 장소요, 희망과 사랑, 기쁨과 슬픔의 그늘 아래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드리워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은 사랑이 가능하다는 지혜와 진리가 깊이 배어 있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변화와 고난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오직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신적인 경험을 엿볼 수 있습니다.
— Michael W.
References
Ruth Haley Barton, Strengthening the Soul of Your Leadership: Seeking God in the Crucible of Ministry, exp. ed. (IVP Formatio, 2018), 37–4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Flavie Martin,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조심스러운 호흡을 통해 희미한 빛을 받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지닌 선물에 이끌려 거기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명명할 수 있는 명확성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
숨영성 묵상글
엄마, 성령 하느님!
하느님의 숨
2025.05.28. 05:36
예전에 읽었던 [The Shack](오두막)이라는 소설에 성령이 여성으로, 즉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우리가 다 경험했듯이 받을 때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가 나중에,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깊이 깨우치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바로 그러하신 분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전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것을 훤하게 밝혀주시고 깨달음에 이르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깨달음이란 우리가 지금은 잘 헤아리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하느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더라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염려는 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그렇게 진리,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께로 이끌어 주시고 계시다는 참된 진리를 마음에 품고는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그 진리로 이끌어가시는 것은 어머니와 같으신 성령의 역할입니다. 그분은 인내로우신 우리 내면의 선생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래로 계속해서 한결같이, 그러나 천천히, 차근차근하게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시면서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우리 엄마들일 겁니다. 엄마의 사랑은 서서히 깨닫게 되는 사랑이니까요. 지금 금방 이 사랑을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의미를 충만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고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이 말씀마저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시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자 그들은 마음이 열려 그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 사랑을 위해 자기들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우리도 아직은 그 사랑을 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 사랑이 언젠가는 우리 마음을 훤하게 밝혀 줄 것이고, 우리 마음을 열어 우리를 그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어 그 사랑과 하나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꼭 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엄마의 사랑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우리를 그 끝으로, 즉 우리 삶의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참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우리는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올해는 성령강림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묵묵히 우리를 하느님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어머니 같은 성령님을 조금 더 깊이 마음에 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사랑을 마음에 품고자 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거기에 이르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려 하기보다는 우리를 엄마로서 당신 사랑으로 이끌어가시는 분, 성령 하느님께 우리를 맡기어 드리는 수양을 해야 합니다. 이번 성령강림 대축일은 더 특별히 내 힘을 빼고 우리 존재 전체를 그분께서 이끌어가시도록 우리 존재 전체를 성령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시간이기를,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특히 인생의 후반기를 사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이 인내하는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수양, 연습,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려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논리와 계산과 판단으로 하는 잡다한 생각에 빠지기보다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과 같으신 엄마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도록 합시다!
어떤 영성 전통이든, 진정으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내가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여기로 이끌어주었구나!"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전적 정의로 ‘여러 사람이 모여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 또는 모임’인 회식이지만, 단합과 친목, 사기, 결속력 고양을 위해 회식을 합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사를 외치지요. 저도 종종 건배사를 해달라는 청을 받는데, 그때마다 갈등입니다. 어떤 건배사가 좋을지를 도대체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6살 먹은 딸과 아빠의 대화 내용을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아빠와 딸이 근처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단체 손님 중의 한 명이 건배사를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
이 말을 들은 6살 먹은 딸이 “아빠, 저 아저씨들이 마시는 게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어른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거야.”라고 대답하자, 딸이 곧바로 말합니다.
“그럼, 술 마시면 건강해져?”
건강을 위해 술을 끊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한다면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어린 딸의 눈으로는 정말 이상한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면서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죄와 더 가까운 삶을 살면 어떤가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어떨까요? 이 모습이 정말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이상한 사람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보다 세상의 것을 더 먼저 바라보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보다 순간의 만족을 먼저 챙기는 비정상적인 삶을 선택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부족과 나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정상으로 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서 비정상적인 삶이 아닌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이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모두 내어 맡기면서 정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상의 삶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순간의 만족도 세속적인 풍요도 없지만, 진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잘못으로부터 뭔가를 배워라.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빌 게이츠).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로,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로,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르 1,10). 또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고 표현됩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루카 24,49)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4,16-17).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말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14,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15,26).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16,8).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16,13-1)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ㄴ)
이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0-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12세기의 카르투시오회의 귀고는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에서,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lectio untionis)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쓰나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2004년 태국 푸껫에서 있었던 쓰나미, 그리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쓰나미를 기억합니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고,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휩쓸려갔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자연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푸껫도 후쿠시마도 다시 일어섰습니다. 무너졌지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마음의 쓰나미’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관계가 깨어지고, 예상치 못한 고난이 덮쳐올 때, 우리는 너무나도 약하고 흔들리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속 욥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하느님을 잘 믿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재산도, 자녀도, 건강도 모두 잃었습니다. 말 그대로 인생의 쓰나미를 맞은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 감사했다면, 나쁜 것을 주실 때도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고,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하루에 두 번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한 분은 결혼한 지 53년 된 형제님입니다. 이미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고, 자매님은 이른 새벽 저를 찾았습니다. 눈물이 맺힌 자매님의 얼굴을 보며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을 위해 울지 마시고, 함께 기도합시다. 형제님이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시도록,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또 한 분은 결혼 27년 된 자매님이었습니다. 아이들도 잘 자라고, 이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치료 도중에는 허리와 심장까지 이상이 생겼습니다. 몸보다 더 힘든 건 마음이었습니다. 불면증과 불안, 체중 감소가 있었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몸도 치료해야겠지만, 마음이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매님의 마음에 평화를 주시기를, 성령께서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부활을 전합니다.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다음에 듣겠다”라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바오로 편에 서서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의 디오니시오와 다마리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외면해도,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오시면, 쓰나미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하시고,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비추어 주십니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한 마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만이 모든 것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믿음을 지켰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병상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쓰나미 같은 고통을 겪는 우리 모두도, 이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껴질 때, 바로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만나는 고난은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고, 벗어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바오로처럼,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볼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도 그 시작을 믿음으로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20년 전쯤 저는 라섹 수술을 했습니다. 학창 시절 항상 안경을 끼고 살았던 제게 라섹 수술은 안경을 벗을 수 있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했던 제게 안경은 늘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특히 땀을 많이 흘리는 제게는 정말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술을 했습니다.
며칠간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합니다. 수술 후 첫날에는 아주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둘째 날도 별반 차이는 없었습니다. 셋째 날에는 조금 더 또렷이 보였고 사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째 날에 제대에 섰는데 의자와 사람을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미사 경문도 가까이서 봐야 했습니다. 다섯째 날이 되었습니다. 제대 앞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미사 경문도 깨끗하게 보였습니다.
신비한 경험이었습니다. 점차 눈이 맑아지는 경험이었으니까요. 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진리의 영 즉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주실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나중에 진리의 영이 그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똑같은 모습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들었을 때, 강론 및 영적 서적을 읽었을 때 성령께서는 그것을 우리 삶 안에서 풀어내어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활동하시어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열어 성령과 함께 살아갑시다.
⭐꽃이 필까?
예수성심상 근처에 백일홍을 심었습니다.
6월에서 10월까지 꽃이 피는 백일홍~
이제 막 심은 나무여서
올해는 꽃을 기대하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도 내심 기대합니다.
꽃이 피지 않을까?
폈으면 좋겠다.
하느님도 늘 우리를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시지 않을까요?
오늘은 꽃이 피겠지?
오늘은 돌아오겠지?
오늘은 진한 향기 전할 수 있겠지?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의 성령
“성령은 교회의 살아 있는 기억이자 사랑의 멘토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강조하고 싶은 성령입니다.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인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에 따라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옛 현자의 충고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침묵보다 더 힘든 것이 말 잘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말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사람들 사이를 해친다. 허물을 지적하는 말은 나의 잘못을 고백하듯 조심스럽게 해야 겨우 상대에게 닿는다.”<다산>
“임금에게 자주 간언하면 치욕을 당하고, 친구에게 자주 충고하면 사이가 멀어진다.”<논어>
이런 말 잘하는 분별의 지혜도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성령께 귀기울이는 삶이 참 절실합니다.
레오14세 교황의 인품도 대하면 대할수록 매력적입니다. 경청과 겸손,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 레오 교황입니다. 지난 5월23일 유럽주교단을 접견했을 때 어느 주교의 감탄과 더불어 교황님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레오 교황과의 접견은 실로 놀라운 선물이자 영감이었다. 교황은 말하기 보다 듣기를 즐겨하셨다.”
교황님이 대화에 앞서 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많은 대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한분 한분의 말에 주의를 다하여 경청했습니다.
성모성월 5월, 성가 244장도 아름답지만 245장도 아름답습니다. 어제 미사후 퇴장성가중 245장 1절이 참 감미로웠습니다.
“맑은 하늘 오월은 성모님의 달,
촛불들고 모여와서 찬미드리세.
마리아 우리 어머니 이 맑고 푸른 계절에,
하늘같은 주의 사랑 우리에게 주소서.”
성령의 사람,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일수록 성모신심을 깊이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5월25일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묻힌 성모경당 지하묘소를 찾았던 레오 교황의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신심을 새로이 합시다.”라는 강론중 프란치스코 교황의 무덤 앞에서 그분께 감사하는 고백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여기 계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오후 이 경당에 올 수 있음에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녁 우리 로마 교구 신자들과 함께 우리는 새 주교의 현존을 축하했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와 함께 저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마음 깊이에서’(from the bottom of my heart)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의 복음 말씀도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새삼 성령에 귀기울이며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 하시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 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무리하지 않고 하루하루 날마다 성령에 따라 겸손히 경청하며 순종하는 삶이 절실하다 생각됩니다. 진리의 영, 성령께서 깨우쳐 주실 때 점차 무지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지혜로워지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성령의 은총에 의한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성령의 인도 따라 계속될 진리탐구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날로 진리자체이신 주님을 깊이 깨달아 가면서 알아 갈 수 있음도 성령의 은총이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날로 깊어가는 일치도 다리 역할을 하는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사람은 경청과 겸손, 기도와 순종의 사람이요 그 빛나는 모범이 성모님이요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 바오로이고 신임 레오 교황도 많이 닮았다 싶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사도 바오로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여기 머무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행함은 없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만 찾는 것은 바로 무지의 소치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이 없이 영적 목마름이나 굶주림을 해소할 길은 요원합니다. 바오로의 심금을 울리는 성령충만한 강론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살아 존재한다는 자체가 하느님 증명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이런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 무지에 대한 첩경의 지름길이요 회개의 깨달음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회개가 없이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파스카 신비는 물론 무지의 완고함에서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싶습니다. 바로 아테네 시민이 그러했습니다.
비단 종교뿐만이 아닙니다. 요즘 국내 상황을 보면 좌우의 대립이 정말 극단적이요 심리적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너무나 굳어있고 적대적이고 완고합니다. 종교인들까지 예외가 아닙니다. 좌우의 대립이기 보다는 상식과 비상식, 정의와 불의, 진리와 거짓, 공정과 불공정,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보고 싶습니다. 성령에 따라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로 상식과 정의, 진리와 빛의 편이 되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레오 교황은 신자들에게 믿음과 기도는 소금과 같아 삶의 맛을 낸다 했습니다. 참으로 성령에 따른 믿음과 기도의 삶이 절실하다 싶습니다. 결국 아테네에서의 선교는 실패로 끝났고 바오로는 코린토에 갑니다. 이 또한 성령의 탓이기 보다는 하느님 섭리요, 아테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고린토요, 코린토에서는 바오로의 선교활동도 참 왕성했습니다. 바로 코린토서간에서 바오로의 다음 고백은 그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1,22-25)
깨달음의 절정에, 진리의 절정에 있는 성령 충만한 성령의 사람, 바오로의 고백이 참 고맙고 반갑고 귀합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가면서 비로소 무지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섬김의 삶에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에 따른 진리탐구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거룩한 신비들
말씀께서는 그들이 지금은 감당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감당할 수 있게 되고 분명히 밝혀지게 될 것들이 있다고 넌지시 비추셨습니다. 말씀의 선구자요 진리의 위대한 목소리인 요한은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요한 21,25 )고 하였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9
버림의 열매는 지혜와 불타는 사랑이지 억압이 아니다
얘야, 일어나거라(루카 8,54).
“온통 순결로 가득 찬” 것이야말로 “태초의 순결”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원초적인 근원이다. 우리의 근원 중의 근원은 하느님 안에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과거와 접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거기에서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본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엑카르트 형제여, 그대는 언제 집 밖으로 나왔는가?’” 라고 물었다고 합시다. 그가 그런 물움을 던진 이유는, 내가 집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근원보다 앞서 있는 이 근원을 가리켜 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만물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만물의 참된 근원이 무인 것은 이 때문이다. 버리고 그대로 두고 무로 가라앉는 것은 우리의 근원으로 가라앉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의지가 삽시간에 자기에게서 나와서 자기의 처음 근원으로 되돌아갈 때, 의지는 제자리를 찾아 자유로워질 것이다. 우리의 원초적인 자유로 되돌아가는 것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396)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3절: 르네상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15세기에 교회는 두 가지 큰 과제를 해결해야 하였다. 그것은 교회의 내적인 개혁, 그리고 이슬람과 생존 투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 교회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일이 다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제 17차 공의회는 바젤(1431∼1437)에서 페라라(1438)로, 마침내는 피렌체(1439∼1442)로 옮겨졌다. 그 주요 과제는 동방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스 황제 요한 팔레올로고스(1425∼1448)는 직접 700명의 사절단과 함께 1438년 3월 페라라에 나타났다. 그중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니체아의 수도 대주교인 베사리온이 있었다. 교황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리스인들이 서구교회와의 일치를 원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점점 저항하기 어렵게 전진해 오는 터키인들에 대한 도움을 얻으려는 열망이 있었다. 강력한 십자군만이 비잔탄을 멸망에서 지킬 수가 있었다. 오래고도 어려운 협상 끝에 교회의 일치가 실제로 성립되었다. 그리스인들과 교황은 「레텐투르 첼리」Laetentur coeli(1439.7.6) 라는 일치교령에 서명하였다. 로마 교회의 수위권과 ‘필리오퀘” 문제까지도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황제가 동방으로 돌아간 후, 서방교회에 대한 그의 양보가 거의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어 기대하였던 군사적 원조도 오지 않자 일치는 유지될 수 없었다.
서구에는 이미 일치가 없었다. 십자군은 민족국가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립되지 못하였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1448∼1453)는 다시 로마에 도움을 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터키군의 포위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으로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용감하게 방어하였지만 터키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콘스탄티누스는 전사하였다. 정복자들이 저지른 무서운 학살과 수천 명의 시민들이 노예로 끌려간 사실은 확실히 서구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일치는 1472년에 정식으로 철회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유산은 모스크바가 1459년에 계승하였고, 모스크바는 후에 “제3의 로마”로 불리게 되었다.(267)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진리인 성령의 체험은 단순함에서 /
박윤식 [big-llight] 2025-05-27 ㅣNo.182484
흔히들 기독교를 보편적 종교라나.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영혼에 심겨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신에 대한 사랑은 대화의 출발점이다. 불교에서는 올바르게 판단하는 지혜를 ‘정견’(正見)이란다. 더하지도 말고 덜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자는 것일 게다.
그래서 조계종 성철 스님은 취임한 뒤 백일법문에서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 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겼다. 득도하여 돌아왔지만 여전히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었다는 말이리라. 바뀐 것은 산천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것일까! 그렇지만 오늘날은 우상의 시대라나. 재물, 명예, 권력이든 실체 없는 허상들이 삶 중심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한단다. 이것들이 삶을 휘두르면 늘 혼란스러워질 게다. 정직하게 산다는 게 되레 어려울 수도. 그래서 결국은 삶이 허황되고 허구만 쫓으리라. 모두가 우상에게 매달린 꼴이다.
어쩌면 인구에 회자하는 진리는 정말 단순하다. 성령께서 주시기에 복잡할 리 없다. 우리가 계산하고 조건을 달아 더 복잡하게 만든다. 거저 받아들이면 산천초목부터 달리 보인다. “성령께서 오시면 모두 진리 안으로 이끌리라.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신 것과 또 앞으로 올 것만을 알려 주신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자신이 아는 것만을 공유하려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께서 아시는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신다. 세상 헛된 것에 물들수록, 불안한 미래에 혼란한 삶을 살수록, 진리를 알리시려는 당신 마음은 더 안타깝고 간절해졌으리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말씀만을, 오직 진리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기에 창조주이신 그분께서 구세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듯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심을 받아들이자. 그게 성령의 진리 아닐까!
이렇게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도 체험할 게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우리 삶은 처음 그대로마냥 진짜 단순할 수도. 그러면 각자 주님 사랑으로 가득 차 이기심과 욕심이 사라져 새로운 질서를 포옹하게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약속해 주시고, 그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느님 사랑을 온전히 깨닫기에는 우리 인간의 이성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예수님 말씀을 잘 묵상하고 실천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양심을 일으켜 주신다. 그러면 우리를 치유와 화해의 장으로 초대하리라. 거듭 이야기하거니와 진리는 정말 단순하다. 우리가 조건을 달고 괜스레 까탈을 부린다. 앞뒤 순서를 따지면서 복잡하게 만든다.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주변은 늘 새롭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언제나 달리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의 말재주로는 복음을 전하는데 한계가 있을 게다. 자신을 내어주는 어리석은 사랑의 길,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에 안긴 복음만이 인간을 지성이 아닌 근원, 곧 마음으로부터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이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 또 그 사랑으로 나아가게 해 주시는 분은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보내 주시고자 하는 성령이시다. 이처럼 단순함만이 성령 체험의 첫걸음이다. 그러니 더더욱 단순해지자. 그리하면 성령이 늘 함께 할게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을 전합니다.
바오로는 먼저 아테네 시민을 대단한 종교심을 지닌 이들로 치켜세우며 그들의 예배소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사도 17,23)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미지의 신, 그러나 숭배받아 마땅한 그분께서 하느님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니, 바오로의 이 설교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코린토 1서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자신을 보내셨지만, 그 일은 인간의 말재주가 아닌 ‘십자가의 복음’으로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믿는 이들을 구원하셨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2-24).
말재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을 내주는 어리석은 사랑의 길, 십자가의 복음만이 인간을 지성이 아닌 근원 곧 마음에서부터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 또 그 사랑으로 나아가게 해 주시는 분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보내 주시고자 하는 성령이십니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30)
==========================================================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비움으로 충만해 지는 길
서하 [nansimba] 250528. 08:59 ㅣNo.182494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요한 16,13)
성령은 복음을 ‘외우게 하는’ 분이 아니라,
성령은 복음을 시대와 사람에 맞게 살아 있게 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령께 여쭙니다.
지금 이 시대에 오늘 복음은 어떻게 살아 움직입니까?
진리의 영께서는 비움으로 충만해지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말해야 인정받는 세상,
학벌과 지식, 부와 명예,
유명 브랜드의 옷과 가방, 자동차가
존재 가치를 대신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분은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신다.” 는 말씀이 제 마음에 담겼습니다.
성령은 주장하거나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들으시고, 들은 것만 말씀하시고, 기다리시고, 존재를 알아보는 분.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 안에 오시고,
우리를 참된 존재의 자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철학과 종교적 감수성을 존중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정답을 강요하는 교사가 아니라,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 고민 하나로 어테네 사람들 안에 이미 깃든 신앙의 씨앗을 찾아냈습니다.
그 모습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봅니다.
성령은 우리를 정답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대신,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사랑 안에 존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저도 한때, 사울처럼
확신에 차 있었고,
규칙과 지침을 따르며
상황을 통제하고 불안을 잠재우려 애썼습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성령께서 제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면
저는 힘을 빼고,
사랑으로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주변이 보입니다.
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를 돕기 위해 나는 어떻게 곁에 있어야 하는지…
조금씩 알아차리게 됩니다.
내가 지금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들은 것만 이야기하고 있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지내는 매일.
잠시 멈춰 이런 질문으로 던져보아야겠습니다.
“나는 정답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으로 곁에 머무르고 있는가?”
이 물음 안에서
성령은 오늘도 조용히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비움으로 충만해지는 길』
‘비움’을 단순한 상실이 아닌, 성령의 불이 지나간 자리에 ‘타인을 담을 수 있는 공간’으로 여깁니다.
말과 계획을 내려놓고 침묵과 기다림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 신비롭고 조용한 변화를 시로 담담히 표현해 보았습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끄실 것이며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것들은 원래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성령께 주신 것은 원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즉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것은 원래
아버지의 것인데
예수님께 전해지고
다시 성령께 전해져서
이제는 제자들이 알게 됩니다.
같은 것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의 일치가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일치를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갖고 계신 것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왔고
이제는 그것을 아버지께 돌려 드린다고 표현합니다.
함께 소유한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 16장에서는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
삼위의 일치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삼위의 일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삼위가 서로 공유하는 것을 이제
제자들이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은
제자들도 그 일치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것을 받으면서
성령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그 일치가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알려 주실 것을
직접 말씀하고 싶어하시지만
제자들이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성령께 그 역할을 넘기십니다.
즉 우리가 성령께 받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부터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일치하는 것을 원하시는데
우리의 사정을 고려하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일치는 서로 동등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동등함은 서로의 사정을 고려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배려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또한 우리 각자의 상황도 생각하면서
우리도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급하지 않게
하지만 너무 무심하지도 않게
그 관계를 맺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적대자들이 가득한 언덕 위에 외로이 홀로 서서...
성 바오로 수도회와 가톨릭평화방송 TV가 공동으로 기획한 프로그램 아레오파고스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팬데믹 시대, 청중이라고는 프로그램 종사자들 빼고는 거의 없이, 카메라만 응시하며 성모님에 대해서 총 10번이나 강의를 녹화했었는데,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적대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바오로 사도가 생각났습니다.
때로 군중으로부터 욕설이나 비난도 날아오고, 때로 돌맹이도 날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쁘게 복음을 선포했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아레오파고스라는 단어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일종의 지명입니다.
고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낮은 언덕을 말합니다.
초창기 아테네 귀족 회의가 열리던 장소였는데, 나중에는 아레오파고스라는 말의 개념이 확장되어 회의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 회원들은 왕의 자문위원회 역할을 수행했고, 행정, 종교, 교육 분야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이토록 대단한 장소 아레오파고스 한가운데 섰습니다.
당대 난다긴다하던 석학들과 당시 사회를 주름잡던 세력가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여러 첨예한 주제에 대한 토론과 비판의 전문가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자칫 엉뚱한 말이나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할 경우, 그 자리에서 고발당하고, 매질 당하고,
투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무엇에도 거칠 것이 없이 당당하고 의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아테네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의 심기를 사정없이 긁는 표현들이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 상이나 은 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적을 감안할 때, 당시 아테네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나 잡신에 깊이 빠져 살았습니다.
이미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기 힘든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복수심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던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오로 사도는 목슴을 걸고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놀랍도록 담대하게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그토록 담대하고 의연한 바오로 사도의 모습, 그 배경에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진리의 영, 협조자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6장 13절)
오늘 우리 안에도 항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하시길 청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바오로 사도처럼 목숨을 불사하고 진리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선포하길 바랍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누가 참 말씀의 전달자가 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감당할 능력을 만들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는 이유는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기 때문입니다. 들으시는 것만 그대로 이야기하시는데 어떻게 말씀하시는 분을 감당하게 할까요?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서 합니다.
배 위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러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베드로와 같은 존재가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는 행동과 말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내가 더 옳다고 여기면 그대로 따라서 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 당신에게 받아 그대로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받은 것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전해주시듯,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받은 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이해시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의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받아서 전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완전히 죽지 않는다면 그대로 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완전한 겸손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욥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께 분명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엔 분명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분명 잘못된 해석과 전달입니다.
욥은 죄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냥 세상에 욥의 의로움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런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성경을 옳게 해석해서 전해준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틀렸던 것입니다.
욥 친구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의 수준처럼 되지 못했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민수기 13-14장)에 관한 내용을 살펴봅시다.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가나안 땅의 거주민들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여 보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보다 눈앞의 어려움에 압도되어 백성들을 낙담시켰고, 이는 결국 40년간의 광야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하느님을 믿고 쳐들어가자고 했습니다.
그 둘만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신교는 인간이 하느님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여깁니다.
특별히 성체성사의 능력이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도 포기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제한함으로써 성경해석도 제한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해석해봐야 그 틀이 완전한 성령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의 정답이 아닌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한 성당에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프레스코화 ‘에체 호모’를 아마추어 복원가가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작의 모습을 심하게 훼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작자의 의도와 작품을 '그대로'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겸손함 없이 임의로 해석하고 개입하여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능력이 없는데도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었던 성모 마리아처럼 되어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12-15: 진리의 성령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절) 성령 안에 살 때,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참된 삶이 무엇인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성령 안에서, 즉,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13절)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신다.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이다. 아들도 성령께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성령께서는 아들이 가르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 말씀들은 아들의 말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 미리 앞당겨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기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하느님 안에 살 때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14절)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와 가르침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아들에게서 받지만,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아들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신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 즉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영원한 파스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지만 이미 천국으로 건너간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리고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2-15).”
1) ‘성령의 작용’을 실제 신앙생활에서 실감하거나 체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들을 통해서, ‘성령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때가 많았는데, ‘나중에’,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또는 성령을 받고 나서, 그 말씀들과 일들을 기억했고, 그 의미를 깨달았고, 모든 것을 이해했고,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2) 제자들의 머리가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일들을 그들이 ‘공부’하거나 ‘연구’한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의 기억, 깨달음, 이해, 확신은, 그들의 능력(이해력)을 뛰어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힘’이 작용한 것이었는데, 그 힘이 곧 성령이고, 제자들을 도와준 것이 곧 ‘성령의 작용’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들과 일들을 기억하고,
깨닫고, 이해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그런 체험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체험, 또는 오랫동안 이해가 안 되던 성경 말씀의 뜻이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의 의미가 ‘갑자기’ 생생하게 이해되면서 ‘큰 기쁨’을 얻게 되는 체험 등...
바로 그것이 성령의 작용, 또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꾸준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또 평소에 충실하게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3)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새로운 가르침’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보충 설명’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 쪽에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제자들 자신들이 겪게 될 박해와 순교에 대한 말씀은, 아직은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모두 이해하게 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되고, 믿게 되고,
‘온 삶’을 바치게 되고, 목숨까지도 바치게 됩니다.
물론 제자들 쪽에서도 믿으려고 노력했고, 믿는 대로 ‘온 삶으로’ 실행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라는 말씀은, 성령이 내린다고 해도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신앙인들이 더욱 잘 알아듣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공적 계시’는 예수님에게서 모두 끝났고, 새로운 계시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거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들을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것은 모두 ‘이단’입니다.>
4)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실행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확정되어 있어서 아무도 바꾸지 못하는 미래가 아니라, ‘조건부 미래’입니다.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예언은 회개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6,12-15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 그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시인이 쓴 "지금 알고 있는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입니다. 철 없던 시절에는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누가 가르쳐주면, 자신이 그것을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그런 일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나중으로 미루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나면 그렇게 미루거나 그냥 넘어간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때 이렇게 할걸'하고 후회해보아도 때는 이미 늦지요.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보다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일찍 깨달을 수 있다면, 그만큼 나중에 후회하는 일도 적을 것이고, 쓸데 없는 일들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류시화 시인의 이 시는 이러한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납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마음 속이 '나 자신'으로 가득하여 성령을 받아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을 모시고 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참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인지, 어떤 일들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러했지요.
다행히도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사도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을 살펴 보았고,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충분히 배웠습니다. 또한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배워 알고 있는 것들을 충실히 실천하기만 한다면,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지금 알고 있는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사도 바오로가 방문한 아테네는 예술, 학문, 철학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철학자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등의
쟁쟁한 위인들이 이 도시를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을 펼쳤던 것입니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문화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서깊은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는 아테네를 방문합니다.
그들은 그곳의 시민들에게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사도 17,22)라며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숭배하는 그들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그의 명쾌한 구약지식을 바탕으로 논증을 폅니다.
먼저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에 대해 존중하며 그들이 미처 몰랐던 이 세상 자연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립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24-25절)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손수 지으신 아담을 통하여 온 인류가
땅에서 살게 하시고 계절을 만드시고 각자 살아갈 경계를 정해주신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다 자녀가 되어 살고 있는 것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시어 모든 이에게 증명해 주신 사실을
이어서 설명합니다.
군중 중에 몇 사람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거부하거나 비웃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서 말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하느님께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부활시키신 사실을 그들에게 이해시킨다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를 받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곳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갑니다.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설령 그가 한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는 이해할 수 있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성령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시는 모습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생소하고 새로운 분으로 오시지만 주님께서는 성령을 믿으시고
사랑하셔서 망설임 없이 제자들에게 바로 소개하며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헤여져야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이 마감되는 것은 아니고 또 설명도
더 필요하지만 주님께서는 성령께 맡기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주님께서 설명하시는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실 것이며 또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게 대해서도 미리 알려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일치와 활동을 드러내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5절)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죽음으로 일으키시고 그에게 모든 전권을 맡기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일치를 바탕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또한 아버지를 신뢰하며 맡기십니다.
성령께서는 협조자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모든 사명의 말씀과 행동을
더욱 확실하게 제자들에게 설명하시고 진리로 이끌러 주시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이별과 수난을 앞두고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이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제자들 뿐 아니라 사도 바오로도 주님의 부활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거리낌이 없고 또 자유로운 분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에게 보내주신 성령의 은혜를 받아 때로 정리되지 않는 듯한 신앙의
말씀들이 하나하나 삶으로 우러나오고 이 지상에서 소신을 갖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부르심과 이끄심에 우리는 감사드릴 뿐입니다.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의 영 안에서 깨달아가는 삶
살다보면 찾아지는 것과 주어지는 것들이 있다. 사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찾아내고 깨닫게 된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창조주이시며 지혜이신 하느님 앞에서야 제아무리 대단한 진리라 하여도 한낱 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창조적 깨달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겸손하게 자기중심적이며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진리의 영께서 친히 이끌어주시는 깨달음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완전한 진리는 계시 자체이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 이런 완전하고 통합적이며 총체적인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이 절대적인 요건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지, 참 삶이 무엇인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신다. 따라서 참 인간됨의 길, 참 신앙의 길은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동화되려는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보호자 성령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심판을 확신시켜 준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행을 할 때 두려움에 쫓기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이의 마음에 심판을 선고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평화가 주어짐을 깨닫게 해주신다.
진리의 영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말씀을 모두 되새기도록 해주신다(14,25-26). 뿐만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해주고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으나,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 하고 깨닫게 된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게 된다(사도 9,1-9). 이 모두가 성령의 작용이었다.
따라서 성령의 활동 안에 머물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진리와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자비를 건네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한꺼번에 하느님의 진리를 다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자들에게 주실 수는 없었고, 다음으로 성령께서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복음적인 계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왔으나, 그분의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살아계셔서 항상 진리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는, 영적인 진리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 예술 등 모든 진리에 대해서 밝혀주신다. 신학자와 설교자들만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새로운 진리를 알아듣고 밝히는 것은 아니다.
헨델은 그의 작품, ‘메시아’ 중의 알렐루야 코러스를 어떻게 작곡했느냐고 묻자, “하늘이 열리고, 희고도 장엄하신 하느님께서 그 어좌에 앉아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답변하였다.
한 물리학자는 자연 안에 숨어 있는 물리학의 원리를 발견하는 신비로움 속에서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때때로 사람들은 어떤 생각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에 부딪친다. 바로 그 순간, 그 문제의 해답이 주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인간의 사고가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온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진리를 점차적으로 밝혀주시고 함께해 주신다.
우리도 주님께 기도하자! 주님, 저에게 당신의 진리를 풍부히 드러내시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도구가 되게 해주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소서.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5052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오직 복음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
<2025.5.28> 아침을 여는 묵상 (빌 3:1~11절)
❝오직 복음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
❚ 성도가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오직 복음뿐이며, 그래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복음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복음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3절).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교회 내에서도 분열의 조짐 또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기뻐하라’고 한 것은 주 안에서 그들이 기뻐함으로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갈등의 요소들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 바울 자신에게는 번거롭지 않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빌립보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교사들의 공격에서 그들이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1~2절). 바울은 특별히 ‘개들, 행악자들, 몸을 상해하는 이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라고 당부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을 ‘개’라고 칭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마 7: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본질을 왜곡하여 거짓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전통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족과 소망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는 의식과 자랑을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자들이 진정한 할례파라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어려운 문제 앞에 직면하게 될 때, 사람의 방법과 사람의 감정이 앞서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면 이겨내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환난 그 자체도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승화시켜 담대하게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삶이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만 나의 자랑을 삼으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기뻐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4~9절).
바울은 스스로가 말합니다. ‘나는 육신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보다 더욱 그러합니다...’(4절,새번역). 바울이야 말로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굉장히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7절, 새번역).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그가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그가 배설물로 여긴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었다(8절)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행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었고,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의 소원은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 사는 삶이었습니다(9절).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 때문에 무엇을 버려야 하며, 그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나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된다면, 아무리 세상이 알아주는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해로 여길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말입니다. 바울은 높은 학문과 고급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안 것이 가장 탁월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가장 뛰어난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말입니다. 헛된 마음, 헛된 목표를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삶과 목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기에 사람 냄새보다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먹고 살아가는 일에 삶의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예수님과 더욱 친밀한 삶에 목적을 두어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게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직 복음만을 증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복음을 확신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0~11절).
바울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10절, 새번역)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다(11절)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옛 습관과 옛 생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의 권능을 통해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힘든 상황과 현실에 직면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기쁨이 있는 것은 부활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처한 현실만 바라보다가 더 나은 보화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다가올 영원한 삶을 잘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만 향하며, 복음 안에서 부활을 확신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오직 복음 안에서 참된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십자가의 그 크고도 놀라운 은혜만을 힘써 자랑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만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빌 3: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