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26
2월6일[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연중 제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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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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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ZQ1_LN5ong
[의정부교구 이원희 사도 요한(국내연학)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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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떠오르는 해와 함께 일용할 양식도 들어올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그야말로 혜성같은 존재로 사람들 앞에 등장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신선한 예수님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들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그분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슴을 후벼파는 명쾌한 가르침에 박수를 치고 환호했습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말과 행동이 완벽히 일치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만만한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요구를 하시는지,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떠나기 직전, 몇가지 주의사항을 말씀하시는데, 참으로 특별합니다. 적어도 일주일 남짓 되는 장거리 일정일텐데도 불구하고,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참으로 난감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가 너무 지나쳤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문전걸식을 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팡이는 왜 지닐 수 있게 하셨을까요? 산짐승이나 전갈, 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서 지팡이와 신발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명씩 파견하지 않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혼자 가면 외롭고 쓸쓸하고, 얻어먹을 때도 부끄럽고 난감할 텐데, 둘이 함께 하면 용기도 생기고 의지도 되고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서로 지탱해주고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큰 선심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당부하신 강조점은 단순하고 검소한 정신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라는 엄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행함에 있어 안락한 것에 대한 포기는 가장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오로지 복음 선포에 지니고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게 하기 위한 포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한 순례자가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더니, 건장한 남자들이 묵직한 햄머 하나씩을 들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무엇하는 사람들인가요?”
“저희 수도원 수사들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수사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지금 수도원을 허물고 있는 중이랍니다.”
“아니, 멋진 수도원인데, 대체 왜요?”
“저 건물을 허물면 새벽에 동이 트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더 큰 포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쉽지만 낡은 나를 허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 새로운 시야가 활짝 열립니다. 아깝지만 어제의 나를 포기하면 새로운 세상, 새 아침이 밝아옵니다.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그대는 길을 떠날 때 전대도 지니지 말고, 여벌 옷을 생각하며 걷지도 마십시오.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떠오르는 해와 함께 일용할 양식도 들어올 것입니다. 어떤 새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하느님 섭리로 먹이를 얻으리라 근심없이 희망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합니까?”(프루텐티우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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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욕구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욕구가 안 보인다>
제가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에 ‘유태인의 상술’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여성의 주머니를 노려라, 현금을 가지고 있어라, 장기적인 투자가 이긴다 등의 소제목이 기억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빵을 좋아하면 빵장사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빵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것을 좋아할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사가 안 되면 ‘내가 먹으면 이렇게 맛있는데 사람들은 왜 안 사지?’ 라고 생각하며 개선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 빵장사를 하면 빵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파는 것을 바라보기에 이렇게 저렇게 개선하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팔아야 더욱 사려고 하는 사람의 욕구를 더 잘 알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내 욕구에 집중하면 상대의 욕구에 무관심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얻으려면 내 욕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려면 내 욕구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신학생들에게 신자들이 가장 원하는 사제상에 대해 물었더니, “강론 잘 하는 신부”,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사제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1위가 ‘겸손한 신부’, 2위가 ‘기도하는 신부’였습니다.
신학생들조차도 자신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혼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더 큰 힘이 발휘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저는 외국에 있으면서 둘이 여행 나와서 싸우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실 마르코와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 복음을 전하다가 헤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둘이 서로 의지가 되라는 뜻도 있겠지만 관계를 잘 맺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아무래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제의 강론의 힘이 떨어질 것입니다. 본당 사제와 본당 수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보기에 우선 서로 관계를 잘 맺는 사목자들이 되고 그 이후에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옷도, 전대에 돈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에 대한 욕구,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욕구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 욕구가 눈을 가려 신자들의 욕구를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미래에 대한 걱정, 돈에 대한 걱정, 명예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남의 진맥을 보려면 먼저 자신의 진맥부터 가라앉혀야 합니다. 잔잔한 물이 되어야 상대의 모습이 비춰져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들에게 신자들이 보기에 세상 재물에 애착이 없는 복음전파자가 되라는 뜻 같습니다. 또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받아주는 집에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사람과 친하다가 또 저 사람이 좋으니 저 사람과 친해지는 사람은 선교를 위함이 아닌 자신과 어울릴 사람을 얻기 위한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욕구도 선교를 하는데 매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의 애정이나 인정을 바라는 사람들 역시 복음을 순수하게 전해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본당의 신자들이 갈라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정에서도 자유로운 복음전파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무언가 부족하여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힌다면 이는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명목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자신 안에 복음이신 하느님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시는 사람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기름을 바르면 병이 치유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전해주는 것에서 충분한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편안해하는 아기 얼굴을 보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내 욕구에 가장 덜 집중하는 사람이 복음전파를 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이라야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전파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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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로라도에서 달라스 오는 길에 문자를 받았습니다. 며칠 전에 병자성사를 드린 형제님이 위독하다는 문자였습니다. 저는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환자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하고, 가족이 돌볼 수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면 보험에서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형제님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습니다. 가족이 돌 볼 수 있는 상황도 안 되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형제님은 의식은 없었지만,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였고, 형제님을 위해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형제님을 위해서 병자성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대전에는 단일 제과점으로 매출 100억 원이 넘는 제과점이 있습니다. 제과점 이름은 ‘성심당’입니다. 성심당은 대전의 작은 찐빵 가게로 시작해 현재는 지역을 대표하는 빵집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의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안식처가 되듯, 적은 노력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큰 결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심당은 지역 사회와의 연대를 강조하며 나눔을 실천해 왔습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빵을 나누고,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섬김의 모범을 따라갔습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성심당은 한결같은 품질과 정직한 경영으로 신뢰를 얻었습니다. 정직함과 꾸준함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이며,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심당의 이야기는 일상의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를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버렸고, 배를 버렸고, 가족들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능, 지혜, 기적,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돈이 없어도, 지팡이가 없어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였습니다. 마귀를 쫓아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면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직책과 직분은 거룩함의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교구 인사이동이 있습니다. 사제들이 새로운 곳으로 떠날 것입니다. 정들었던 곳을 떠나는 것은 아쉬움입니다.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것은 긴장과 설렘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입니다. 사제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시대의 징표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영적으로 강해야 합니다. 영적인 힘은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사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선포한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것을 충실하게 실행한다면 사제가 있는 자리는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물질 만능주의, 자본 만능주의, 개인 만능주의라는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모두가 그곳을 향해서 가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가난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다. 2000년 교회를 이끌어 온 것은 화려한 성전과 법이 아닙니다. 가난을 실천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영성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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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위하여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빵, 여행 보따리, 돈을 가져가지 말며,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의 여행에서는 꼭 필요한 것들을 금지하시는 것은 은총의 섭리에 온전히 맡기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옷을 두 벌 껴입는 것이 이중적 처신을 뜻한다고 보아 예수님의 이 명령을 단순한 마음을 지니라는 요구로 풀이합니다. 허용된 단 두 가지는 길을 걷는 데 필요한 지팡이와 신발뿐입니다. 최소한의 것으로 지내는 노력이 선교 사명에서 요구되지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엄격함은 무슨 의미일까요? 본질에 대한 집중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선교 사명에서 본질적인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살피기보다 파견하시는 분의 섭리에 믿고 내맡기며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행하는 일입니다.
비록 중요하고 필요하더라도 본질이 아닌 보조 수단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그때그때 주어지는 수단들을 활용하면서,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본질에 집중함으로써 제자들은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낫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상 기후로 말미암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기후 문제에 대응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단순함과 섭리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삶의 본질을 추구하고 집중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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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7-13: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배를 채울 양식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복된 삶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복된 삶이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나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태어나시도록 하는 삶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주님께 의탁하며 순간을 살아내며, 이웃을 통하여 우리의 본 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가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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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물질적으로는 ‘빈손’,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1)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실 때,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바로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적인 복을 얻으려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으려고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빈손’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세상에 오실 때의 당신의 그 모습 그대로 사람들에게 가라는 명령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들 자신들의 ‘삶’으로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2) ‘빈손’으로 가라는 명령은,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복음만’ 가지고 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면서 가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3)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빵도 없었을 것이고, 여행 보따리도 없었을 것이고, 돈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껴입을 여벌옷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대 같은 것은 아예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것들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을까? 예수님의 명령은,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또 그런 것들을 구하려고 하지 말라는, 즉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4) 복음을 전해 듣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은 ‘복음만’ 청해서 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것만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것만 사람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또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 ‘구원과 생명만’ 청해서 얻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것들이나 세속적인 것들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하면, 아무리 간절하게 청해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기복신앙이고, 미신입니다.
5) 사도행전에 있는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옆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사도 3,1-8) 여기서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파견되었을 때만 ‘빈손’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그렇게 생활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능과 권한,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 받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자선을 청하는 이에게 줄 돈은 없었지만, 그들은 ‘돈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것을 장애자에게 주었습니다. 만일에 그 장애자가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면, 또 예수님의 사도들을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을 청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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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열두 제자의 기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지파에서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열둘이라는 숫자로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땅’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산이요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선포하신 것은 ‘땅’이 아닌,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촌각을 다투면서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아 내는 우리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은 아직도 먼 미래의 이야기, 현실감 없는 이야기, 성당에 나와야 가끔 듣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차근차근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리고 그 말씀은 제자들을 통하여 다시금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땅’, ‘돈’, ‘명예’, ‘성공’을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열렬히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우리의 지상 순례의 여정에서, 영원한 생명은 아직은 너무 먼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선포하고 교회가 계승한 ‘회개’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내가 아닌 하느님께 향하게 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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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기념하는 '바오로 미키' 성인은 일본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0대 소년이었을 때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교육 기관에 들어가 22세 되던 해(1585년)에 수사가 되었고, 이후 선교사를 도우며 오사카 인근을 무대로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1587년 일본의 실세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박해를 공식화했지만, 선교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596년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9명과 몇몇 교우들이 체포됩니다. 바오로 미키 수사 역시 이때 붙잡힙니다.
이듬해 정월, 그들은 죄수의 몸이 되어 나가사키까지 끌려갑니다. 혹한 속에서 한 달 가까이 걸어야 하는 혹독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골목에는 사람들이 나와 구경하도록 했는데, 기독교를 신봉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가사키의 바닷가 언덕에서 장렬하게 순교합니다. 1597년 2월 6일이었습니다.
바오로 미키 순교자의 말 중에 늘 기억하려 노력하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이 이렇게 들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 간직하여라. 주님께서 걸으신 길이 구원의 길이며 하늘로 나아가는 길임을 늘 기억하여라.’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신앙을 다시 한번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들이 걸었던 그리스도인의 길을 우리도 걷고 있음을 주님께 보여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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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에서 변호사를 하며 한계를 느낀 경험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계를 재판에서 이겼지만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 때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입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되었습니다. 사고를 낸 차주는 돈을 물어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판에서 이겨 돈을 물어주게 했습니다. 그런데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판에서 이겼다고 다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없어진 다리 때문에 가고 싶은 곳에 마음껏 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재판에 이겼어도 삶의 변화가 없다는 사실에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종종 돈으로 모두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봅니다. 억울한 희생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원하며 시위하는 유가족을 향해 돈 더 받으려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보상을 받는다 해도 목숨을 잃는 사람이 되돌아올까요? 그 사람이 만든 역사가 사라졌는데, 이를 돈으로 지울 수가 있을까요?
돈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도 ‘돈! 돈! 돈!’을 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돈이 필요할까요? 하느님 나라에 돈이 전혀 의미 없기에, 우리는 죽음 뒤에 10원짜리 동전 하나 가져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이 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물질적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여기에 조금 거리를 두면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자기 삶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물질적인 것을 늘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도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그만큼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안의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세속적인 것들을 멀리하면서 오로지 주님의 뜻에 맞게 그래서 주님께 의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에 정답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사랑의 말과 행동으로 나의 이웃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때 너무나도 부족한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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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파견>
마르코 6,7-13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파견>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보내시는 분
계시어
보내지는 이
있으니
보내시는 분
가리지 않게
보내지는 이
가벼이 떠나고
보내시는 분
스미시도록
보내지는 이
오롯이 머물고
보내시는 분
몸소 하시듯
보내지는 이
기꺼이 나누니
보내지는 이
있기에
보내시는 분
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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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능력에만 의지하라>
여행을 위해 짐을 챙길 때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다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 하고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해야 안심이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 6,8-9)고 이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말고 목적에 집중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그럴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도구요, 연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7,31)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최선을 다하고 하느님의 처분을 기다리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도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처음 할 때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여행을 자주 하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할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기쁨을 누리길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물질에서, 나 자신에게서 자유를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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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코 6,7-8)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선교 지침을 알려 주십니다.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치유하며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떠나는 제자들은 삶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단순한 소유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현실에 집착하거나 얽메이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무소유로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수도자들에게 필요한 전유물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본 덕목입니다.
수도자들이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은 가난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기 위한 자발적 선택입니다. 그래서 교회나 수도자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부유하게 되면 주님께 의존하여 따르기가 힘들게 됩니다. 부유해지는 만큼 교회나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치유와 회개를 위한 은총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이 적을수록, 내 안에 주님의 공간은 넖어집니다. 물질적 욕망, 지적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심지어 인간 관계에 대한 욕망마저도 크면 클수록 주님께서 주신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유의 방은 작게 됩니다.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데 과도하게 지니거나 불필요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는 가난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선교 사명에 충실했기에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치유와 회개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삶의 본질을 잊고, 선교의 여정에서 편리함의 함정에 빠져 내 영적 여정을 걷는데 필요 이상의 소유로 나의 영적 가방이 점점 더 무거위짐을 느낍니다.
선교 여정을 걷는 자신을 가난하게 비우는만큼 천상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필요한 치유와 회개의 은총이 우리 안에 채위집니다. 그때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그 치유와 회개의 은총을 사람들과 나눌수 있습니다. (김종오신부,M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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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7-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복음선포의 사명을 맡겨 파견하시면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를 누려야만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재물을 포함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탐욕을 지니고 있으면 자꾸 그것들에 연연하느라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없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집착하면 그들 눈치를 보고 그들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느라 정작 ‘하느님의 일’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신발, 그리고 지팡이처럼 필수적인 것들 말고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자기에게 더 잘해주는 이들을 찾아다니지도, 자기 말을 잘 안들어주는 이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말라고 하시지요. 오늘은 그 중 인간관계의 문제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첫째,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 하나로 나를 기꺼이 받아들여주고 환대해주는 이가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호의를 받아들여 그 집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머무르는 동안 혹여 불편하거나 힘든 부분이 있다고 해서 금방 그 집에서 나오거나, 여건이나 대우가 더 좋은 다른 집을 찾아다닌다면, 그건 내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런 나 때문에 나에게 호의를 베푼 그 은인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될 것입니다. 둘째, 내가 주님 뜻에 맞는 일을 하는데도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고, 내 말을 무시하며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야고보나 요한이 그랬듯 그들을 원망하거나 분노를 쏟아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스승이신 예수님도 냉대와 배척을 받으셨는데 내가 뭐라고 무조건 인정받고 내 뜻이 수용되기를 바라는지요? 정작 나 자신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지 않으면서 왜 다른 사람들이 내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화를 내는지요? 그런 마음에 휘둘리면 내 뜻만 신경쓰느라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되니 그러지 않도록 항상 겸손과 순명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과 반대의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나를 받아들여줘야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인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하다는 핑계로 무조건 나를 받아들여주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는 제 기분과 기호에 따라 이것 저것 요구하며 상대방에게 민폐를 끼치지요. 그런 나의 무례함과 경우없음에 상대방이 지치고 힘들어 나를 밀어내면,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며 오히려 그를 원망하고 모든 것을 그의 탓으로 돌립니다. 내가 그런 모습으로 사는데 다른 이들이 나를 통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요? ‘천주교 신자라는 사람이 왜 저래?’라는 실망감으로 인해 오히려 그분과 멀어지게 되지 않겠는지요? 그러면 나는 스스로가 하느님 뜻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대한 책임과 그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책임 모두와 관련하여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니 사람에 한 눈 팔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내 이웃 형제 자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가 되질하는 그 되로 고스란히 돌려받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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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십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복음 선포의 길’이 본질적으로 ‘함께 가는 길이요 여정’(시노달리따스, sinodalitas)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결국, ‘함께 가는 길’로의 초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견 받은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며, 동시에 하느님과 함께 가는 길이며, 하느님께 함께 가는 길입니다. 복음으로 빛으로 함께 가는 길이며, 그분 영의 동행으로 함께 가는 길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들의 삶 자체, 그들이 살아가는 길 자체가 증거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가는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이는 오로지 당신께 의탁하고 당신께 신뢰를 두고 가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1코린 1,23)로 말입니다.
또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처신에 따르게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가 할 일이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는”(6,12-13) 것이며, 그 일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제자임과 동시에 파견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파견하신 그분께 매여 있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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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코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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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기본적 자질>
-“희망과 사랑, 이탈의 자유와 섬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은 분명합니다. 당시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이자 사명입니다. 이런 정체성이 또렷해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우리의 신원확립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의심의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국 의심하는 나 자신이다. 의심하는 나를 극복하지 못하면 평생을 의심 속에 살아야 한다.”<다산>
“도끼를 잃어버리니 이웃집 아이가 의심스러웠다. 도끼를 찾은 다음 이웃집 아이를 보니 도끼를 훔친 아이 같지 않아 보였다.”<열자>
사람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로서의 정체성이 또렷해 질수록 방황하지 않고, 참나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는 자아초월(自我超越)로 겸손하고 온유하며 지혜로운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가 되는 길뿐이겠습니다.
어제 읽은 내용도 믿는 이들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9까지 습관입니다. 1000명이 넘는 암말기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어느 호스피스 전문의가 가르쳐준 삶의 지혜입니다.
1.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하라.
2.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
3.집착하지 마라.
4.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5.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라.
6.가까이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하라.
7.삶과 죽음에 의연하라.
8.삶의 의미를 찾아라.
9.거짓 희망을 버리고 진짜 꿈을 꾸어라.
이 모두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로서의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며, 우리 삶의 희망이자 꿈입니다. 이런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 저절로 이탈의 자유요 진정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미키(1564-1597)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하에서 선교하다 체포된 사람들은 작은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 일본인 신자 15명으로 24명에 후에 자진하여 체포된 2명의 일본인 신자 2명, 도합 26분입니다.
체포된 이들은 1597년 1월3일 교토를 출발하여 처형지인 나가사키 근처 해안까지 걸어 이동했습니다. 교토에서 나가사키의 850km 순교의 길은 세계 역사 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멀고도 먼 길입니다. 미키 성인도 이들과 함께 겨울추위가 절정인 1월 내내 걷고 또 걸어 2월6일 바로 오늘 나가사키의 골고타’라고 불리는 나가사키 해안 근처 니시자카(西板) 언덕에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합니다. 33살 일본 청년 미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감동입니다.
“나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지만, 단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죽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며,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저를 박해한 이들을 용서합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박해하는 이들을 가엾게 여기십니다.”
미키 성인은 사제품을 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순교할 수 있음을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동료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중의 한명으로 시성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의 사랑과 믿음이 이런 이탈의 자유와 기쁨속에 순교를 가능하게 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무소유의 복음 선포가 가능했던 것도 순전히 주님 사랑에 기인한 초연한 이탈의 자유에 있음을 봅니다. 물론 이들의 파견활동이 가능했음은 도처에서 믿는 이들의 ‘환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음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 향한 이탈의 사랑이 ‘소유가 아닌 존재’인 주님이자 스승인 예수님만을 따르게 했고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써 본질적 사명 수행에 충실하게 했음을 봅니다. 제자들이자 사도로써 자유는 전적으로 섬김의 자유임이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
참으로 파견받은 사도로써 주님을 닮아 본질적 섬김의 사명 수행에 전력을 다했던 주님의 제자들이었고 바로 우리의 본질적 사명 역시 섬김의 사랑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지칠줄 모르는 선교열정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바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궁극의 희망이자 꿈을 상징하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그분의 피가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오늘 지금 여기가 시온 산이요 천상 예루살렘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천상 예루살렘의 꿈과 희망을 앞당겨 살 때 지칠줄 모르는 열정에 샘솟는 섬김의 선교활동입니다. 결코 속화되어 오염되거나 부패 변질됨이 없이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써 본질적 사명 수행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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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자유롭고 조화로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을 뜯어보면 상반된 동작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파견하심과 우리의 머묾-떠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기도 하고 파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합니다.
이 동작들은 상반되기는 하지만 조화를 이뤄야 할 것이고, 하나만 있으면 불완전하고 둘 다 있어야만 완전한 것이며, 주님을 중심으로 이 동작들이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파견되기 전에 부르심을 받아야 하고,
부르실 때는 다가가고 파견하실 때는 떠나가야 합니다. 부르시는데도 꿈쩍 않고 파견하시는데도 꿈쩍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또 주님과 함께 머물 때가 있고 주님을 떠나 이웃에게 갈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과 함께 머물 때가 있으면 떠날 때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이고, 주님을 떠나있었다면 주님께로 돌아가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주님께도 가고 이웃에게도 가는, 주님과도 있고 이웃과도 있는 두 행위가 같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웃에게 갔을 때도 두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 머물 때가 있다면 떠날 때가 있어야 하고, 머묾과 떠남이 자유롭기도 하고 조화롭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은 행복하지만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은 불쌍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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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무 것도 없고 주님도 없지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오늘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지금껏 늘 데리고 다니던 제자들을 이제 파견하시는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고 주님도 없이 둘씩 떠나는 겁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왜 극구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실까? 주님께서는 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실까?
그것은 아무것도 지니지 말아야지, 필요하다고 하나씩 챙기기 시작하면 짐이 점점 늘어 여행이 불가능케 될까 봐 아예 싹둑 자르는 걸 겁니다.
코로나 때문에 요즘은 못가지만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출발할 때 짐을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걷다 보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거추장스럽기만 하여 하나씩 하나씩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서 저는 백분 동감합니다. 저도 관구장 임기를 끝내고 쇄신 기간이 주어졌을 때 한 달 순례를 떠나면서 침낭을 들고 떠난 적이 있습니다.
아직 5월이라 노숙을 할 때 침낭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며칠 못가 그 침낭이 너무도 짐스러워 그만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런 실용적인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 곧 영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복음선포를 할 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치 않게 하려는 겁니다.
또 다른 경우 무전 순례를 떠나면서 만원을 갖고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때 생각으로는 비상금으로 그야말로 급할 때 쓰자는 돈이었는데 그런데 그 만원이 내내 저에게 유혹이 되고 분심꺼리였습니다. 먹을 것을 구걸하다가 실패하여 몇 끼를 굶게 되면 하느님 안배에 맡기기보다 그 돈으로 해결하고픈 유혹이 자꾸 저를 괴롭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아예 다른 데 써버리고 나니 비로소 마음에 자유가 오고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케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것이기에 주님과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북한 선교를 할 때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식량이나 약품이나 농자재 지원 같은 인도적인 사랑 차원에서 그러하기도했지만 그런 지원이 없을 때 아예 들어갈 수 없으니 그러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오늘 주님 말씀이나 프란치스코의 예를 보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고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부끄럽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진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군대도 없이 이슬람 술탄에게 갔고, 어떤 목표나 성과를 욕심내지 않고 갔으며 그래서 술탄은 오히려 그런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게 되었지요. 이제 마지막으로 볼 것은 왜 둘씩 짝지어 보냈느냐는 점입니다. 당신이 함께 가지 않으니 당신 대신 서로 의지하라고?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그 짝이 바로 주님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한 짝이 되었다면 베드로에게 요한이 주님이 되고, 요한에게 베드로가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둘이나 셋이 있는 곳에 당신이 함께 계시겠다는 뜻과도 일치합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도 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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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
<성찰해 보자!>
오늘 복음(마르6,7-13)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를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가르침을 배우던 제자들이, 이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고 세상 안으로 파견된 '사도들'이 됩니다.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께만 의탁하라는 의미이고, 필요한 것들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서 채워주신다는 의미가 아닐까?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파견된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를 선포하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줍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인 일본 나가사키의 위대한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때 붙잡혀 모진 박해를 받고, 나가사키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신 분들입니다.
이들 중 '성 바오로 미키'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를 '가장 영예로운 강론대'라고 말하면서, 주위에 모여든 이들에게 '자기는 일본인이자 예수회 회원이라고 밝히고, 자기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다.'고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성무일도서 고유독서 中)
왜, 하느님을 믿고, 왜, 성당엘 다니고 있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기쁘게 순교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쓰신 나가사키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이 물음 앞에서 잠시만이라도 성찰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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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 7)
복음의 기쁨은
제자들의
파견으로 다시
뜨거워집니다.
파견의 체험은
성장하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파견으로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하는지를
깨닫습니다.
파견은 진리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파견은
둘씩 짝지어
보내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파견은 가장
직접적인
주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파견은 봉헌으로
이어집니다.
일상을 향하는
파견의 본질입니다.
파견은 날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파견의 소명에
충실한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파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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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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