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부의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라는 부분이 가장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다. 영지주의적 해석은 육체가 죄를 짓게 하므로 육체의 죽음으로 죄 짓는 본성에서 떠나게 된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문맥적 이해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을 배우시고, 대속적 죽음을 택하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부터 같은 자세를 가짐으로써 더 이상 죄를 지향하는 경향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뜻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 구절은 대속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가 무엇인지 알려 준다. 우리의 죄를 사면받으려는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현재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 놓으려는 정신을 가짐으로써 구원의 높은 경지가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자기 중심으로 끌어들이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향해, 주고자 하는 역 방향으로 선회시키는 것이 가장 높은 경지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일관되다. 높이 오르고자 하는 사람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며, 받으려 하는자는 주어야 하며,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신이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에게 남기신 가장 큰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이다. 먹고 입고 자지 않으면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현재의 나'와 '장차 이루어야 할 나' 사이에 긴장이 생긴다. 이 둘 사이를 완화시키는 최적의 방법은 무엇인가? 현재의 나를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보편적 방식은 더 많은 소유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많은 이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를 탐욕으로 이끌고 탐욕이 죄를 발생하게 하여 결국 자기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죽게 만든다. 이 때문에 최소한으로 만족하는 정신, 항상 기쁨을 가지는 방식, 늘 감사하는 정신을 가져야만 '미래의 나' 가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원리로 작용하며 '현재의 나'를 '미래의 나'로 연결시키는 다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연결하는 최고의 비결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의 소유의 비교를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활동을 통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소유나 재능의 비교를 통하여,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비교를 자기 발전을 위한 모범적 기준으로 전환 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를 모범으로 삼으려고 해야 하는 것이며, 안일한 방식으로 현실의 고난을 피하려는 것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의 다리를 파괴시키는 행위가 된다. 그것은 결국 나를 낮은 곳으로 떨어뜨려 둘째 사망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삶에서 신체적, 정신적 고난이 언제든지 찾아 올 수 있지만 그 고난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할 때 '미래의 나'가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셨듯이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의 의미를 배운 자는 죄를 지으려는 생각을 갖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