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선종실록(2)
2. 선종의 가족들
선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4남 3녀를 얻었다, 정신현비를 비롯 그이 세 부인은 모두 인주(경원)이씨 집안에서 배출되
었는데, 제1비 정신현비가 1녀, 제2비 사숙왕후가 헌종을 비롯 1남 2녀. 제3비 원신궁주가 3남을 얻었다. 이들 가족
중 세왕비의 삶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한다. 헌종과 왕윤 형제들의 삶은 ‘헌종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인주이씨는 고려의 명족이지만, ‘이자의의 난’과 ‘이자겸의 난’ 그리고 ‘무신의 난’에 의해서 세력이 약해졌다.
오히려 이자연의 계통보다는 그나마 그의 동생인 이자상의 직계후손들이 대를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고려 문벌귀족의 핵심인 왕씨를 멸족시키고, 또한 인주이씨들을 좋게 볼 수가 없었지 않은가.
인주이씨의 집성촌은 대구광역시와 전라남도 장흥군 보성군, 충청북도 영동군 보은군, 충청남도 청양군,
경상남도 함안군,합천군 등이다.
*.이성계가 인주이씨의 족보를 베낀 의혹이 있는데, 20대 이한과 19대 이자연이 그것이다. 이한과 이자연은 고려 초기
인주이씨이지 않나요. 20대 이한이 신라사공 벼슬로써 태종무열왕의 후손과 혼인했다고 한다던가, 19대 신라시중을 지
낸 이자연, 신라복야를 지낸 이천상, 이광희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최고 관직인 아찬을 지냈다고 한다.
정신현비 이씨 (생몰연대 미상)
정신현비 이씨는 인주 사람으로 평장사 이예의 딸이다. 그녀는 선종이 국원공으로 있을 때 결혼했다가 남편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었다. 소생으로는 딸을 하나 낳았으나, 그녀가 예종의 왕비 경화왕후이다.
생몰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또 선종이 등국하기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사망 후에 선종 묘정에
합사되지 못했다.
사숙왕후 이씨 (생몰년 미상)
사숙왕후 이씨는 인주 사람으로 공부상서를 지낸 이석의 딸이다. 그녀 역시 정신현비와 마찬가지로 선종이 국원공으
로 있을 때, 시집 왔으며, 선종이 왕위에 오르자 책봉되었다.
그녀는 연화중에 머물렀으므로 연화궁비라고 불리다가 아들 헌종이 죽위한 후에 섭정을 하게 되면서 궁전 이름을 중화전으로 바꿨다.
섭정을 실시하게 된 그녀는 중화전에 영녕부를 실시하고 군사와 행정을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처결하게 되었다. 하
지만 그녀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이 어린 탓으로 다섯 명의 왕숙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가운데 이자의가
한산후 왕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고, 이를 알아챈 왕숙 계림공이 이자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왕위
마저 차지하게 되어 태후 역시 1년여만에 섭정을 중지하게 되었다.
소생으로는 헌종과 수안택주, 그 밖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공주가 있으며, 사망 후 예종 2년(1107년)에 왕의 명에
의해 선종 사당에 합사되었다.
원신궁주 이씨 (생몰년 미상)
원신궁주 이씨는 인주 사람으로 평장사 이정의 딸이다. 선종 즉위 후 입궁하였으며, 칭호는 원희궁비라고 하였다. 소
생으로는 한산후 윤을 포함한 3남이 있었다. 그런데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의 오빠 이자의가 왕윤을 왕으로 세우
려는 음모를 꾸미다 실패하고(이자의 난), 이 바람에 원신궁주와 왕윤을 비롯한 세 아들은 유배되어 귀양지 생활을 하
게 된다.
3. 국경문제와 관련한 고려의 항의서한과 거란의 답신.
1088년(선종 5년) 9월 선종은 태복소경(궁중의 승여(임금이 타는 수레),마필,목장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태복시의
종4품 관직) 김선석을 요나라에 파견하여 그들의 각장(국경 시장) 설치계획 폐기를 요구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다.
‘문제를 재삼 재기하는 것이 비록 예절에 어긋나는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나 지난 번 보낸 글월에서 우리나라 전체
백성들의 의사를 이미 밝혔고, 여러 번 보낸 사절을 통해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염원을 묵살하니 어찌 다시 말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다행히 당신처럼 공정한 임금을 만나 다시 한 번 우리의 심정을 말하노니, 삼가 돌이켜 보건대 승천황태후가
집정했을 때에 책명을 보내 관직을 주었으므로 황태후의 성덕을 칭송하고 공물을 보냈더니 우리의 성의를 표창하기 위
하여 특전을 베풀어주었다.
그리하여 요동성 서부는 거란에 붙이고 개사수(압록강 동북지방에 있는 작은 강)동부는 우리의 영토로 확정했던 것이
다. 또한 귀국 성종의 통화 12년(994년)에 예방사절을 보냈을 때에 정위 고량이 다음과 같은 천보 황제의 조서를 가지
고 돌아왔다.
<고려국왕 왕치에게 이 글을 보낸다. 동경 유수 손녕의 보고에 의하면 당신이 9월 초에 장정들을 동원하여 성책을
수축하려 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10월 상순에 벌써 준공하였다고 하니 당신은 특출한 재능으로 모든 사물에 정통하여
우방에 대한 태도가 성실하다는 것을 알겠다. 이에 멀리 공물을 보낸다. 금번에 농한기를 이용하여 먼 지방에 있는 장
정들을 모아 중요한 나룻터에 성책을 쌓음으로써 광막한 들판에 침입하는 도적들을 방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며, 현 정세에 매우 적절한 조치다. 더군다나 저 여진이 제때에 황화를 입음으로써(거란을
섬김으로써) 나의 위신에 눌려 감히 딴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 성책 수축 공사를 빨리 끝내도록 노력하여
양국의 영원한 안전을 기할 것이다.>
이 조서의 간곡한 내용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우리의 대신 서희가 국경문제를 담당하고 있었므
며, 귀국의 동경 유수 손녕이 명령을 받들고 와서 상의함으로써 각각 양쪽 경계를 맡아서 모든 성들을 구축하였다. 이
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공진을 압록강 구당사(나루를 관리하는 직무 또는 그러한 사람)로 안문에 파견하여 낮에는 동쪽
강변을 감사하고, 밤이 되면 내성에 들어가 자면서 귀국의 힘을 입어 점차 좀도둑이 제거되고, 그 후부터 경비를 하지
않아도 변방 정세가 더욱 좋아졌다.
아직 성종의 조서에 먹도 마르지 않았고, 황태후의 자상한 말씀이 어젯일 같은데 갑인년(1014년)에는 하천에 선박을
비치하여 통로를 열었고, 을묘년(1015년)에는 우리 고을 성내에 들어와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을미(1055년)에는
궁구란자(교각)을 설치하고 정자를 만들었다가 병신년(1056년)에 우리의 요구에 따라 철거하고 우리에게 보낸 조서에는
<기타 세세한 문제도 일정한 약속을 지키게 하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또 임인년(1062년)에는 의주, 선주 남쪽
에 매매원(일종의 세관)을 설치하려고 하였을 때 우리가 여러 차례에 걸쳐 문제를 제기한즉 기존 시설을 보수하고 새로
설치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갑인년(1074년)에 또 다시 정융성(의주)북쪽에 새로 탐수암을 설치하니 우리가 이
것의 철훼를 요구하였다. 이에 시설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가 대대로 귀국을 성의껏 대접하였고, 해마다 사절과 공납을 보냈으며, 몇 번이나 사신을 시켜 글월을 보냈
는데 아직까지 탐수암, 성책,다리 등 일체 시설을 철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 새로운 시장을 설치하려
고 하니, 이는 귀국 선대 임금들의 유지에 어긋나는 것이며 우리의 간곡한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천리
길을 우리 사신이 계속 오가며 90년 동안 가져다 준 공납도 보람없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분개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새로 조상의 뒤을 이은 이래 우방으로서의 임무를 삼가 지키면서 나의 성의를 다하려는 이때, 어찌 사소
한 잇속을 도모하기 위해 그 같은 시설을 경영하고 있는가? 영토가 귀국과 연결되어 있어 선린정책을 쓰려고 약속하였
지만 이 좁은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란 말인가. 그런 까닭에 글월을 빈번이 띄웠는데도 당신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위로는 하늘이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부끄러운 따름이다.
바라건대 당신은 지방 관리들의 잘못된 의견을 물리치고 우방의 중대한 관심사를 고려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들
판에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어 자기 생업에 안착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백성들을 경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호의를
잊지 않겠다.’
이 편지를 받은 거란은 김신석에게 답신을 주어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 회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장 설치를 정지하라는 항의서한을 여러 번 받았다. 이 같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여러 말을 할 까닭이 있는지 모
르겠다. 가까운 시일에 적당하게 처리하려고 한다. 더군다나 이직 설치할 기일도 정하지 않았으니 부디 안심하고 성의
를 다할 것이며, 심각한 의구심을 풀고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기 바란다.
거란은 이 편지를 보낸 후 고려 조정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양2천 마리, 수레23대, 말 3필을 보내왔다.
*. 선종시대의 세계약사
선종시대 11년 동안 중국은 여전히 서하, 요, 송 세나라가 서로 세력을 견제한다. 송에서는 철종이 집권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서하와는 화해 관계를 지속시키고 고려와의 유대를 강화시켜 북진의 가능성을 엿보고, 거란에서
는 도종이 40년간의 통치를 지속시키며 사회 기강을 확립한다.
이 시기에 유럽은 로마교황과 신성로마황제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진다. 그 바람에 하인리히4세가 크레멘스3세를 교
황으로 옹립하고 교황 그레고리7세와 그의 동조세력들을 죽이게 된다. 이때 영국에서는 런던탑이 세워지고, 켄터베리
상인 길드가 형성된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롤랑의 노래>가 완성되고, 이탈리아에서는 볼로냐 대학이 창립된다.
첫댓글
추일슬풍님
이제 조석으론 제법 시원해졌습니다
가을바람 냄새가 슬슬 풍겨오거든요
어떠한 일을 시작하면 중도에
그만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기보다 안하는게 더욱 어렵거든요
고려사를 다시 시작했네요
읽기는 저녁이나 되어야 정독을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ㅎ
인주 인씨의 계보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전 인간이 태여나서부터
힘 으로 다스리다보니 남과 여의
차별화가 확실하게 되었네요
일부일처를 절대할 수 없는 남자들의
본능이 힘을 가진자의 권력과 함께
다처를 거느리는 사회로 발전하다보니
수 많은 왕족들의 처첩들 간의 전쟁이
무고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보내기도 하고 ..
쓰다보니 웃기네요 ~ㅎ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수고했어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