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기행문/ 그곳에가고싶다
운재
해안을 따라 달리는 길 왼쪽으로 파밭이 보리밭처럼
푸르게 펼쳐져 있다.
겨우내 칠면초를 피워 냈던 바닷가에는 갯바위를 덮은 파래로 또 푸르르다.
곧 만조가 될 바다는 달빛을 받아 더욱 풍성하게 일렁일 것이다.
나는 그 밤,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서 있는거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감동인가.환희인가.
보성 녹차밭을 따라 난 길가에는
시음을 시켜 준다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특히 나처럼 어눌한..) 불러 들이는 가게들이 있다.
멋모르고 기분에 취해,분위기에 취해
따라 들어간 그곳에는 보기에 맛깔스럽고 멋진 것들로 채워져 있다.
잘 빚어진 머그잔에 눈이 간다.
일인용 머그인데 아주 맘에 든다.
거금 이만원을 주고 한 개를 산다.
남모르게 나 혼자서 뿌듯하다.
이 찻잔에 녹차를 우려내서 마실 일이 벌써부터 꿈만 같다...
나중 일은 알지 못한체.....(나중에 사용하다가 보니 유약이 흘러 내려
녹차 맛이 이상해지고 만다..이거 정말 억울하다,다른 것도 아닌
음식 담는 그릇인데...)
보성에서 강진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막 물먹은 듯한 보리밭으로 역시나 푸르르다.
푸르름은 정말 어디서나, 언제 보아도 무한정 좋다.
물어물어 찾아 간 길 따라..차를 세워 두고 조금은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른다.
다산초당에 들기 위해서다.
길가엔 온갖 야생화가 서로 제 얼굴을 내밀고 향기를 풍기며 웃고 있다.
아기자기 어여쁜 꽃들이고 어여쁜 풍경들이다.
다산초당(언뜻 다강산방과 혼동할 뻔 했다) 한 켠에 서서 내려다 본 풍경...
그 풍경에 실려 오는 바닷바람이 나를 환장하게 하는 것 같다.
그 바람에 나를 맡기고 그냥 그대로 어디로든 끝없이
흘러가버리고만 싶다.
작은 연못에 물이 괴어 있다.
지난 봄에 왔을 때는 왠일인지 말라 있어 마음이 텁텁하더니
지금은 앙증맞게 어리연 초록잎새도 그 물위에 떠 있어 좋다.
방명록이라는 책자에 어설프게 몇 자를 적어 본다.
"나, 오늘 여기에 왔노라 보았노라,그리고 느꼈노라"고.
산행을 할 때면 오를 때 보다는 내려올 때가 더 힘든것은
순전히 나의 무릎때문이다. 조금 걱정이 된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그때는 아마 한의원을 찾아 다니지
않을까 미리 그림이 그려지는 내 무릎!
마음은 한없이 걷고만 싶은데 그저 역시 마음뿐이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가야지.그곳에 꼭 가야지..
영랑생가를 찾아 가는 발걸음이 급하다.
완전히 내 남편을 닮은 듯한 영랑선생의 모습이
방 가운데 앉아 묘한 시선으로 날 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 뭐하러 왔니?" 이런 생각? 아니다.
그런 대가께서 사소하게 나더러 뭐하러 왔느냐고
물을 일도 없을 터, 아마도 뒤 곁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백꽃송이들의 서늘한 영혼의 울림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나도 따라 뒤안으로 돌아가 본다.
아,,,,,동백,동백,동백.....온통 동백꽃이 만발이다.
뚝뚝 떨어져 내린 꽃송이들이 땅을 다 덮었다.
가만히 저 꽃위에 눕고 싶다.
그러고 있으면 절로 동백꽃처럼 뚝뚝 시 한편이라도
내게 떨어져 내려와 안길것만 같다.
거기 그대로 머물러 앉아 살수는 없을까?
나는 가끔 이렇게 어딘가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헛꿈을 꾸곤 한다.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늘 버리지 못하는 꿈.
어느 곳을 가든지 꼭 먹어 보아야 할 별미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강진은 한식이 유명하고 대합탕이 특히 유명하다.
일인분에 삼만삼천원 하는 한식상을 받고 보니
그사람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어젯밤 홀로 자작했던 술 끝에 오늘 대합탕은
끝내주는 궁합이다.혼자면 어떠리........
한껏 여유를 부리며 식사를 한다.
오감칠정을 집중시킨채로...모름지기 식사는 이렇게
집중해서 해야 한다.그게 음식에 대한 예의이고,
음식 준비한 손길에 대한 예의이고,내 위장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니까.
멀리 해남 완도 진도까지 나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살포시 길을 돌아선다.
보성율포 녹차당에 들어 다시 한 밤을 지새고 싶지만
마음이 이미 먼저 달려간 곳이 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
송창식이 불러 주던 선운사 노래 때문에 빠져 버린 곳,
고창 선운사가 오늘 나를 부른다.아으아~~~~~~~~!
천연기념물이라는 이름으로 선운사 동백숲이
어느샌가 사람들의 출입이 막혀 있다.
다산초당이나 영랑생가의 동백꽃 보다는
선운사 동백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과 헤어져 견디기 힘든 가슴을 안고
찾아 들어 동백꽃 처럼 눈물 뚝뚝 흘려 내던 곳,
오래된 일이지만, 그 때 그 자리에 서 본다.
놀랍게도 가슴이 아릿할 만큼 선명하게 그 느낌이
살아난다.아...나, 아직 살아 있었구나.이렇게 살아 있었구나.
마음이 다 말라 버려 이제는 아무도,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줄만
알았는데,,,나도 아직 살아 있었구나...이 영혼의 울림이
아직 나에게 있었구나...너무 소중해서 눈물이 난다.
혼자라서 참 다행이다.지금.
미당의 시비가 사찰 입구에서 무한한 언어를 품고 있다.
친일이니 뭐니..다 떠나서 그저 시 자체로만 바라보고 싶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조금 무리해서 내친 김에 내소사까지 달리며
아...나는 그곳에서의 몇 밤을 작정하고 만다.
나는 그곳에서 새벽 범종 소리와 만나리라...
새벽 숲의 향기를 흠향하리라...
그 사각거리는 소리 내 안에 모조리 스미게 하리라...
사찰에서의 몇 밤을 꿈꾸는 길이 가슴 시리게 좋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
내소사, 너 오늘 딱 걸렸다......
벌써 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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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꼬리글 잔치가 과연 엽기적이네요.^^ 실시간 카페 채팅이 꼬리글로도 가능하군요. 아주 모범적인 꼬리글 달기 우리 손잡고 가요 카페 회원들도 본 받아야겠습니다. 이런 필력을 가지신 운재님이 조용하시니 카페가 적막할 수 밖에요. ㅠ.ㅠ 참 끝말잇기방에 운재님이 지명됐던데 아시는지요? 빨리 쓰세요!
우리도 좀 본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