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빵'은' 하나님이 늘 주시는 일용할 빵'의 줄임말입니다.
🔔 '엑스트라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하날새'에서' 하늘빵'을 드립니다.
저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TV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는다하면 과장이겠지만, 거의 시청을 하지 않습니다만 어쩌다가 보게될 때, 주인공 뒤편에서 연기하는 엑스트라들에 대하여 관심있게 살펴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카페에 앉아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 뒤편 좌석에는 엑스트라들이 카페의 또 다른 손님처럼 보이도록 앉아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에 카페 안에 주인공들만 덩그러니 앉아 있다면 그 드라마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싱겁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많은 엑스트라들이 동원됩니다. 단 몇 마디의 대사라도 하게되고 화면에 그의 얼굴이 단 몇초라도 보여진다면, 그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조연이 됩니다. 그러나 엑스트라들은 이름 없이 말소리 한번 내지 않고 몇 번 보이다가 사라지는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엑스트라들이 텔레비전 드라마가 실제같은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엑스트라에게 누구 한 사람도 관심이 없습니다. 어느 드라마에서 어떤 엑스트라들이 어떤 장면에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 영화같은 경우에는 수천명이 넘는 엑스트라가 동원되지만 수천명 중에 단 한사람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스트라들은 극의 배경을 실제처럼 만들기 위하여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때 인기 드라마였던 KBS의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사극이기 때문에 상소문을 쓰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상소문을 붓글씨로 써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상소문을 쓰게되는 역할을 맡은 탈렌트가 명필이 아닌 이상 상소문을 직접 쓸수는 없습니다.
특히 '용의 눈물'에서는 살생부..., 즉 제거해야 할 명단을 작성하게되는데, 이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갈 한 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한문으로 쓰여질때마다 시청자들은 숨을 죽이고 살생부에 쓰여지는 이름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름이 하나 하나 쓰여지지만 정작 글씨를 쓰는 사람의 손만 보일뿐입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상소문이 몇 번이나 등장하는데, 그럴때에 아무한자나 쓰는 것이 아니라 실록에 나온 내용 그대로를 옮겨 씁니다. 비록 붓글씨를 쓰는 사람의 손만 보이지만, 그가 쓰는 글자 하나 하나가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를 실감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손만 보이고 글을 쓰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붓글씨만 쓰는 엑스트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우두머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두머리만 존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독별나기를 다툰다면 우리 사회는 혹은 그 단체는 침몰하기 십상입니다.
모두가 주인공이면 좋겠지만 비록 엑스트라에 머문다 할지라도,내 맡은 일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진실한 마음으로 충성할 때 하나님의 눈에는 그도 주인공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주인공으로 세워야 할 필요 적절한 때에 주인공의 자리에 세워 주실 것입니다. 엑스트라만 수십년 하다가 조연에 발탁이 되었고, 조연으로 오랫동안 있다가 뒤늦게 유명하게 된 연기자도 많습니다.
요셉은 친위대장 집에 종을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종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죄를 뒤집어 쓰고 죄수가되었습니다. 요셉은 전혀 주목받는 인물이 어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디에서나 하나님 앞에 충성하였습니다. 보디발이라는 애굽의 친위대장에서 충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옥중에서는 간수장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누구가 되었건.., 자신이 처한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상관 없이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의 주가 되심을 믿고 하나님께 충성하였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어도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믿었기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였던 요셉이었기에 후일 애굽의 총리가 되어 만인이 우러러보는 주목받는 자리에 하나님이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는 엑스트라같이 이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나자신이 엑스트라 같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나를 하나님 앞에서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3절 말씀에 말씀한 것처럼, 소위 행세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라고 대접하면서도 가난하여 엑스트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적선도 아까워하는 이런 악한 차별성을 심중에서 몰아내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십이장 말씀에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일 세수를 하고 화장하까지 하여 예쁘게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왜 얼굴에 이토록 정성을 기울입니까? 얼굴은 보이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 생명을 유지함에 더욱 중요한 부분들은 얼굴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우리 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름 있는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들도 국익에 공헌하는 분들이지만 이들보다 수적으로 더 많으면서, 이름 없이 공헌하는 사람들도 매우 중요합니다. 운동선수도 중요하지만 관중도 중요합니다. 관중이 한 사람도 없는 경기장에서 그것도 중계방송하는 것도 아니라면, 운동선수들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그들고 무슨 멋으로 경기를 하겠습니까?
이름 없이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정에서, 도시에서, 어촌에서, 농촌에서, 산촌에서 묵묵히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이런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도 누구 못지 않는 귀중한 실체임을 알아 주는 국가가 복지국가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부유한 교인, 지식층 교인, 헌금생활 잘 하는 교인, 기관 봉사 잘 하는 교인들도 귀하지만 그렇지 못한 교인들도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비록 결석이 잦고, 설교 시간에 종종 졸며, 형편이 어려워 십일조는 커녕 감사헌금 한 번 못 하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귀한 영혼들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엑스트라입니다.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름 없이, 소리 없이..., 인간 역사의 주인이시며 우주의 주재이시며 교회의 머리되시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살다가 가는 액스트라입니다.
나는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드러내고, 나의 주가되시는 예수님을 빛내드리며,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역할을 맡은 주님 나라의 조연이며 또한 엑스트라입니다.
찬송가 595장을 부르면서 주님만 높여드리는 삶을 살기를 다짐해보겠습니다.
나맡은 본분은 구주를 높이고 뭇 영혼 구원얻도록 잘 인도함이라
부르심받들어 내형제 섬기며 구주의 뜻을 따라서 내 정성 다하리
주앞에 모든 일 잘 행케 하시고 이후에 주님 뵈올때 상 받게 하소서
나 항상 깨어서 늘 기도드리며 내 믿음 변치 않도록 날 도와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