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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마태복음 20:17-28
사람은 누구나 훌륭해지고 싶어합니다. 훌륭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기와 영광을 한몸에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탈렌트나 가수가 되고자 수백만원을 들여서라도 성형을 하기도 합니다. 유명연예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 자신의 입지와 가치를 높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인기와 영광은 어느날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립니다. 인기연예인이 음주운전을 하여 구속되기도 하고 성적인 비리로 망신을 당하고 퇴출되거나 마약을 하다가 한번의 실수로 어렵게 쌓은 명성이 하루아침 무너져 내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가장 훌륭한 자란 어떤 자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본문 말씀통하여 올 한해 우리모두 섬김의 종들이 되어 섬기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참으로 훌륭한 사람은 고난의 잔(희생)을 마시는 자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보다는 영광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은 고난을 기꺼이 자청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인류구속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18,19절을 보시면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계시하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특히 마19장28에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는 말씀 때문에 몹시 흥분하였습니다.
그때에 20절을 보시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조용히 쇠고기한근 사들고 와서 예수님께 큰 절을 올리며 자리청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그녀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베드로에게 가장 높은 자리가 갈 것 같다는 염려를 했던가 봅니다. 특히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후 예수님의 가장 신임받는 제자가 되어있었기에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치사하긴 하지만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 싶어서 어머니를 동원하여 선수를 쳤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고난의 자리보다는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주의 우편자리와 좌편 자리는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떤 자가 참으로 훌륭한 인물인가, 어떤 자가 참으로 일인자 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고자 합니다. 큰 자가 되어 높은 자리에 앉아 존경과 영광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주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자가 되려면 고난의 쓴 잔을 마셔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잔을 마심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시고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큰 자란 고난의 길, 희생의 길을 자청하여 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윤대통령도 오늘 구속되었는데 그 역시도 모세와 같이 나라가 어찌되더라도 가만히 있었으면 영광의 자리에 앉아있었겠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던져 고난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고난받을수록 강해지고 지지율은 더 올라갑니다.
둘째로, 종이요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불러다가 세상의 위대함과 영적인 위대함의 차이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5절을 보면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빌라도 같은 자들은 군대의 힘으로 마음대로 다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힘이 곧 법이었습니다. 권력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므로 권력자들은 백성들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어진 권세로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지시하고 부려먹습니다. 요즘 민주당의 폭주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190석을 가지고 임의대로 탄핵하고 심지어는 대통령도 불법으로 체포하고 공문서를 위조하여 관저 출입문을 열었습니다. 군대에서는 별이 되면 별의별 권세가 주어집니다. 많은 부하 장병들이 한마디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직위에 따라서 차와 집도 달라지고, 부인과 자녀들에 대한 대우도 달라집니다. 직장이나 학교 어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장은 교사들과 같이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이사들은 아름답게 꾸며진 사무실에서 비서들의 섬김을 받으며 편안하게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맛에 승진을 하고자 하고 이런 맛에 한 번 권력을 잡으면 놓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을 보면 어이없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멋있게 보이고 나도 한번 권력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싶어집니다.
26,27절을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는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몸만 교회를 왔다 갔다 한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합니까?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 받기를 원하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낮은 자리에 앉아서 섬기고자 해야 합니다. <섬기는 자>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 (servant)로서 주로 천한 일을 시중드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단어는 너무 서두르기 때문에 먼지를 일으키는 자란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섬기는 자>는 시중을 들기 위해서 먼지를 날릴 정도로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slave)로서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어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헌신하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세상에서는 타이틀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야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큰 사람들은 차도 크고 멋있는 중형차를 타고 다닙니다. 자리에 앉을 때도 중앙 상석에 앉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대함은 타이틀이나 지위나 연령에 있지 않고 변화된 인격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 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내면성이 변화되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내면성으로 변화된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관심은 늘 자기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바뀝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이 변화되어 성도들을 생각하고 다음세대들을 생각하고 이 시대를 생각합니다. 자기 속회뿐만 아니라 다른 속회도 관심을 갖습니다. 위대성의 척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는가? 내면성의 깊이와 넓이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부인과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몸부림칠 때 우리 믿는 자들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먼저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잘 알고 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또한 섬긴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남을 섬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거나 맛있는 것을 사주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무지 가운데 있는 사람은 깨우쳐주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책망을 하고 죄와 싸워서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2:3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은혜와 진리의 말씀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서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목적과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섬기는 일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자기를 비하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자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사람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섬길 때 섬기는 생활이 기쁨이 됩니다. 사람들은 크고 광나는 일은 좋아하지만 작고 빛이 나지 않은 일은 싫어합니다. 누가 자신이 열심히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면 신이 나지만 알아주지 않으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아니하든 섬기는 일은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섬기는 인생 속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 목적은 자기 자신의 행복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집을 가꾸고 여행을 합니다. 젊은 청춘남녀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얽매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독신으로 지내고자 합니다. 부모세대들은 부부갈등이 있어도 자식들을 위해서 참고 살았는데, 이제는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식들을 생각치않고 이혼을 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BOBOS입니다. BOBOS란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로서, 야망과 세속적인 성공을 이룬 부르주아의 삶과 낭만을 추구하는 보헤미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꿈꾸는 인생은 지적이면서 부유하고 낭만적이면서 편한 삶입니다. 세상의 영광도 얻고 인생도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이들은 멋있는 커피숍을 이용하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고 목가적인 가구들을 사용하여 집안을 아름답게 꾸밉니다. 몸매를 가꾸기 위해서 헬스클럽에 다니고 마음을 가꾸기 위해서 예술관을 드나듭니다. 아마 이런 삶은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인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삶을 살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 때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물을 받아들이고 내보내기 때문에 늘 푸르고 맑고 생명력이 풍부하여서 많은 물고기들이 삽니다. 그러나 사해는 받아들이기만 하고 밖으로 물을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아무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은 호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섬기고 주는 삶을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섬기는 생활은 가장 오래가는 즐거움의 샘물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며 섬기는 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엡2:10)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자기의 행복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option이 아니라 의무요 특권입니다. 섬기는 삶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인정받고 높임 받고 섬김 받으면서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면 창조목적대로 섬기는 생활을 사모하며 기쁨으로 섬길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말만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시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인생들로부터 섬김과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셨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인생을 살려면 먼저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이해받고 사랑받고 높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런 자기 부인 없이는 결코 섬기는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섬기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악된 인생들을 섬기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섬기는 종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정욕으로 만신창이가 된 사마리아 여인을 끝까지 대화하시면서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무기력하게 된 중풍병자도 섬기시고, 이기심으로 병든 세리도 섬기시고, 반발심으로 병든 거라사인도 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죄인들을 섬기시다가 마침내는 고귀한 목숨까지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섬김과 희생 없이는 결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어버리시기까지 섬기심으로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훌륭한 신앙인이 되려면 먼저 섬김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공주님처럼 떠받쳐 주기를 바라지 말고, 왕자님처럼 띄어주기를 바라지 말고 교회에 와서 머슴처럼 섬기고자만 하시기 바랍니다. 섬김받고자하는 곳에는 미움과 분열이 있습니다. 그러나 낮아져 섬기고자 하는 곳에 평화와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성도님들은 섬김의 종의 삶을 사신 예수님을 본받아 늘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종의 일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안알아주더라도 종과 노예의 삶을 기쁘게 감당함으로서 섬김의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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