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문학 국제심포지움 현장을 가다
-정지용 시비건립을 위한 오양호 교수의 7년간의 열정과 집념
지난 09.12.1-12.3,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는 정지용 시인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하고 시비(詩碑) 건립 4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심포지움이 열렸다.
교토 도시샤대학은 정지용 시인의 출신교이며, 특히 교정에 윤동주 시인과 함께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도시샤대학은 일본이 자랑하는 대표적 대학중의 하나이며, 1875년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기독교주의 학교이다. 정문에 들어서니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 건물이 이 대학의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는 듯 하다. 교정에는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인다. 정문에 들어서자 마자 정지용문학 국제심포지움을 소개하는 포스터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이 심포지움은 정지용 시인의 고향인 충북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주최하고 정지용기념사업회(회장 오양호, 인천대명예교수)가 주관했다.
한국측에서는 4년전 정지용 시비건립 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정지용문학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온 오양호 기념사업회 회장을 비롯, 양왕용 부산대 교수, 김중위 전 환경부장관(수필가), 강인섭 전 국회의원(시인), 김유조 전 건국대부총장(소설가), 강정화 우봉문예장학회장(시인), 이혜선 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한분순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정종명 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 허정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대구지역 회장, 정남순 부산시 연제구의회 기획행정위원장, 이병석 시인, 조헌호 시인, 서상만 시인, 연규봉 시인, 김종희 시인, 한미령 시인, 김월준 시인, 현미정 시인, 오정순 수필가, 박부경 시인, 김보화 시인, 최하눈 소설가, 임윤식 시인 등 총 24명이 참석했으며, 일본측에서는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교토대 교수를 비롯, 다수의 일본인들과 한국유학생들이 참석했다. 또 충북 옥천군측에서도 심대보 옥천문화원장을 비롯, 20여명의 옥천군민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심포지움은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교정 지성관에서 개최됐다. 지성관은 정지용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바로 옆 건물이다.
공원 모양의 아담한 교정에는 정지용 시비와 윤동주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주위 곳곳에 벤취가 있어 학생들이나 방문객들이 잠시 쉬면서 한국의 대표적 시인 두분의 시심(詩心)에 함께 젖어 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우리에게 '향수'라는 시로 잘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시비는 2005년 12월 18일에 세졌다.
육이오전쟁시 자진월북하였다는 오해로 한동안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정지용은 1988년 그 오해가 풀리면서 해금되어 문단에서 재조명되었고 그의 시 '향수'를 노래한 성악가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 서울 휘문고보를 거쳐 1923년 일본교토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29년 영문학과를 졸업하기까지 약 6년동안 도시샤대학 캠퍼스를 무대로 주옥같은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30년대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문단의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을 간행하여 현대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1945년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와 경향신문 주간을 역임하였고, '지용시선'을 비롯한 산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33년 '카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 이상(李箱)의 시를 실어 그를 시단에 등장시켰으며, 1939년 '문장(文章)'을 통해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의 청록파(靑鹿派)를 등장시켰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지용과 함께 1930년대 우리 문단을 풍미한 김기림은 지용이 “조선 신시사상(新詩史上)에 새로운 시기를 그으려한 선구자이며,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김소월과 정지용은 동갑이지만, 그들의 시를 보면 100년의 차이가 난다”고 유종호는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김소월이 한국적 한(恨)의 정서를 바탕으로 정통적이고 잠재적인 모국어를 구사했다면, 정지용은 시적 대상의 적확한 묘사력과 언어조탁, 시적 기법의 혁신으로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최초의 모더니스트요 탁월한 이미지스트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 시의 성좌(星座) 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샤대학 교정에 세워진 정지용 시비에는 1924년에 쓴 '압천(鴨川)'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압천은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교정 근처에 있는 가모가와 강의 한자표기이다.

정지용 시비 바로 옆에는 이보다 10년전인 1995년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가 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재학중인 1934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에 손을 댄 것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부터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도일하여 도시샤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시샤대학에 재학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그는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향년 28세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후쿠오카형무소는 큐슈대학 의학부의 생체실험과도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있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설도 유력하게 퍼져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모든 것이 비밀리에 처리되었기 때문에 그 진상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도 교토시절의 윤동주의 작품과 유물은 아무것도 발견된 것이 없다고 한다.
해방 후 윤동주 는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국어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실리게 되었고 최근에는 일본의 교과서에도 그의 시가 실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샤대학 출신 한국동문들과 양식있는 일본인들로부터 시비건립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하였다.
도시샤대학 교정에 세워진 시비는 도시샤교우회 코리아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6일건립, 제막되었다. 시비에 쓰여진 시는 그의 대표작 '서시' 자필원고 그대로이다.

심포지움은 '한국지식인의 일본체험과 그 반향-도시샤대학 출신의 문인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개최되었다.
우선 정지용과 윤동주 시비에 헌화한 후 두시인의 작품 낭송 및 주제발표와 토론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정지용 시인의 시는 김중위 수필가(전 환경부장관)가 '구성동', 김월준 시인이 ''고향', 박부경 시인이
'향수'를 낭송했으며, 윤동주 시인의 시는 이혜선 시인이 '십자가'를 낭송했다.
뒤이어 심포지움에서는 교토대 미즈노 나오키 교수가 '식민지 조선문인의 일본체험', 부산대 양왕용 교수는 '정지용, 도시샤 출신의 문인', 인천대 오양호 명예교수(정지용기념사업회 회장)는 '디아스포라의 혼, 윤동주'라는 제목으로 각각 주제발표를 하고, 강정화 시인, 조헌호 시인, 정남순 시인 등의 토론이 이어졌다.

심포지움 장면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오양호 인천대 명예교수(정지용기념사업회장

역시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양왕용 부산대 교수
양왕용교수는 1988년 정지용 시인이 한국문단과 학계에서 월북작가의 오명으로부터 완전히 해금되던 2월에 '정지용시 연구'로 경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정지용 시 연구 전문가 중 한분이다.

2002년 오양호 인천대 명예교수를 중심으로 심원섭, 임륭, 佐野正人 등 4인이 일본어판으로 번역, 출간한 정지용 시선집
이 일어판 정지용시선집은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시전문출판사인 花神社에서 출간되었으며, 최초, 유일한 일어판 정지용시집이다.

교토 시내를 흐르는 도시샤대학 인근의 '압천(가모가와 강)'
정지용 시비에는 이강을 노래한 시 '압천'이 새겨져 있다. 양왕용 교수의 논문을 보면 정지용 시인은 유학시절 압천 강변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당시 압천은 여름철에 역구풀이 붉게 우거지고 밤에는 뜸부기가 울었다고 한다. 정지용은 이 냇가를 거닐면서 부질없이 돌팔매질을 하고 달도 보고 생각도 하고 학기말 시험 때에는 노트를 들고 나와 누워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지용 시인은 이곳에서 고향의 실개천을 그리워하고 조국을 잃은 설움을 삭히며 시심(詩心)을 키웠으리라.
*정지용 시비 어떻게 건립됐나?
-시비건립을 위한 오양호 교수의 7년간의 열정과 집념

2009년 12월 1일, 정지용문학 국제심포지움에 참가하기로 마음먹고 오사카행 비행기를 탑승하면서, 그리고 행사장인 도시샤대학 교정에 들어서면서 필자는 “어떻게 한국도 아닌 일본 대학의 교정에 한국시인의 시비가, 그것도 하나도 아닌 두분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질 수 있는가”하고 내내 의아하고 궁금해 했다.
그런데 심포지움 주제발표 및 그후 취재과정에서 그 의문이 하나 하나 풀려나갔다. 그것은 우연히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어느 선각자적인 대학교수에 의해 7년여에 걸친 피나는 노력 끝에 이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주인공이 바로 오양호 인천대 명예교수이다.
1998년 4월부터 오양호 교수는 일한교류기금의 지원을 받아 교토대학의 객원교수로 1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도시샤대학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보다 헐씬 먼저 도시샤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시절 주옥같은 시들을 발표하는 등 ‘한국현대시의 아버지’라도 불리워지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정지용 시비건립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오 교수는 1998년 12월 18일, 교토대학 국제교류센터 아파트 앞 교토은행 슈카쿠인 지점에 '정지용기념사업회 대표 오양호'라는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 1만 엔을 입금하고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시련없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는 법. 시비건립 문제 역시 수없는 난관에 부딛쳤다. 당시 도시샤대학과 관련이 있는 어느 민간단체의 반대가 거셌다. 그들은 2005년 10월 경 도시샤 대학 당국에 정지용 시비 건립을 정식으로 반대하는 문건을 보내고, 이런 반대의사를 오사카 대한민국 총영사에게까지 보냈다고 한다. 어쨋든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오양호 교수가 정지용기념사업회 명의의 통장을 개설한지 정확히 7년 후인 2005년 12월 18일 정지용 시비가 제막됐다.
그 무렵 상황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 중 하나인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심원섭 객원교수는 당시의 일들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정지용, 윤동주 두 사람은 사실상 사제의 관계인데 사제의 시비가 나란히 한 대학의 캠퍼스 내에, 그것도 외국 유명대학의 캠퍼스 속에 선 예는 아직 들은 적이 없다. 어쩌면 세계사에서도 드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도시샤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 공개하기 민망한 문제들을 비롯한 장애가 적지않았던 것을 필자는 목격자의 한 사람으로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 장애들을 극복하는 데에는 물로 도시샤대학의 요시노리 마이즈야마 총장, 에이지 하타 학장, 전 일본 국회도서관 부관장이자 현 도시샤대학 교수인 우지고 츠요시 교수 등 일본측 인사들의 직간접적인 노력의 힘이 매우 컸다. 그러나 이런저런 문제들의 이면에, 아니 이 시비 건립사업 깊은 곳 속에 이 전체를 움직이는 강력한 정신적 파워가 있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은 전적으로 오양호 교수님의 의지와 실천의 힘이었다고 단언한다.
시비건립사업의 진행수순은 정지용기념사업회의 결성, 정지용 시집의 번역 및 일본에서의 출판, 옥천군과의 협의, 인천대학교와 도시샤대학에서의 정지용 관련 국제심포지움, 교토시와의 이런 저런 협의, 그리고 도시샤대학과의 협의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당시로서는 여러 행사들이 중첩되며 연잇는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정지용의 시비건립이라는 목표를 향한, 아주 치밀하고 순차성을 지닌 10년 동안의 대역사여서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것은 한 특별한 학자, 바로 오양호 교수의 강력한 신념과 그를 위한 전적인 투신이 창조해 낸 하나의 절정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시인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사람들이 1만명 이상에 이른다고 하는데 어째서 문학평론가이며 수필가인 오양호 교수에 의해 한국현대시의 대부 정지용 시비가 일본 모교에 세워졌을까? 이것은 하나의 미스테리같지만 사실은 정지용을 향한 국문학자 오양호 교수의 문학적 열정과 학문적 집념의 귀중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오양호 교수는 시비건립에 대해 "정지용시인의 시비를 그의 출신교인 도시샤대학에 세웠다는 것은 우리나라 대표적 문인의 발자취를 일본 모교에 남겨 오랫도록 추모할 수 있다는 점 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의 우수성을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알리고 전파시킨다는 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대담 및 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