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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1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마태오 18,21─19,1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는다.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말하길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진행자였던 이상용 씨는 두말하지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는데, 수술비가 1,800만 원이라는 말에 그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당시 열 평짜리 아파트값이 1,000만 원이었고, 이상용 씨는 650만 원짜리 전세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전셋값 세 배에 해당하는 수술비를 대겠다고 했으니 기절할 뻔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 생사를 넘나들었기에 그 아이의 비극이 남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지 관리상 야간업소 출연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를 위해 야간업소 세 군데를 다니고 바자를 하고 돈도 빌려 결국 수술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수술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감격해 방송에서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자기 아들을 무료로 수술해주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자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 부모들이 우리 아이도 수술시켜 달라며 이상용의 집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아이를 돕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한국 어린이 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해주기로 합니다.
그렇게 그는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주었습니다.
하지만 1996년 11월 4일 한 시사 프로에서 뽀빠이 이상용 씨의 충격적인 사건이 폭로됩니다.
뽀빠이 이상용 씨가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빌미로 국민의 성금을 가로채 벤츠를 타며 40억 호화주택에 산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심장병 어린이를 돕던 의인에서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희대의 파렴치범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이미지가 좋았을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무조건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체질적으로 정치를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교황님과도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터였습니다.
교황님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사흘 동안 이상용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검은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정치인이 그에게 고향 대전에서 출마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상용은 단번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치인들이 이상용에게 보복한 것입니다.
어느 날 우정의 무대 녹화를 끝내고 돌아오니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사실 1996년 당시 이상용은 20년 된 지프차를 타고 사는 집은 융자금이 막 상환된 상태였고
당시까지 수술받은 567명의 수술비는 거의 이상용 씨의 돈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이상용 씨는 집 밖을 못 나갔고 우정의 무대는 폐지되었으며 수술을 기다리던 어린이들은 수술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전역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사망하였고 이상용 씨는 왼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당시 권력 기관들이 총동원되어 ‘심장병 어린이 재단’을 탈탈 털었지만 이상용의 공금횡령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문제는 이 무혐의 처분에 대해 보도한 언론사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뽀빠이 이상용이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나왔기 때문에 활동을 못 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후에 이상용 씨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언대로 수중에 남은 돈 20만 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관광 가이드를 하며 딸을 시집보내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당시 그의 일당은 3만 원이었고 가장으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CD를 만들고는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직접 팔았으며 즉석 공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춘천 MBC 사장 유수열 씨가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안다”라며 ‘강원 매거진’을 통해 이상용은 방송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철처: ‘뽀빠이 이상용 거짓 인성 논란?’, 유튜브 채널, ‘트롯 뉴스’]
미움은 죽은 놈이 산 사람을 때리며 자신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려는 행위입니다.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습니다.
이상용 씨가 그렇게 맞은 것은 살았기 때문입니다.
산 사람을 때려서 자신도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기에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라면 용서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상용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은 20명,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용서받았다는 믿음으로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것인지 용서하지 않을 것인지는 내 힘으로 살 건지 다른 누군가의 덕으로 살 것인지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려고 하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준 임금 덕분으로 산다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그러니 임금도 더는 그 사람에게 자신 덕분으로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느님 덕분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강론하다가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순간 성당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한 원로 신자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신부님은 “여러분, 저분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라고 하며 박수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이를 용서하실 수 있으셨죠?”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어, 원래 미운 인간들이 있었는데 먼저 다 죽었어….”
죽음이란 것을 통해 이 신자분은 미운 인간을 묻어버리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어떤 신자분이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미워 죽겠어요. 시집올 때부터 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셨어요.”
사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용서하시겠지?’라는 생각으로 그 자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 자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 두 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분은 미운 사람을 죽음이라는 것으로 묻어버렸고, 한 사람은 죽음으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산다면 이미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덕분으로 부활합니다.
이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탕감해 준 1만 탈렌트입니다.
이 1만 탈렌트에 100데나리온을 묻어버릴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1만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말은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1만 탈렌트로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습니다.
1만 탈렌트는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산 사람이 되게 합니다.
같이 구원받은 사람은 나에게 잘못하지 않을 것이니 미워할 이유가 없고,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죽은 개에 불과하니 굳이 걷어찰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말은 아직 1만 탈렌트를 탕감받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1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
죽음 연습을 통한 용서 연습
용서를 주제로 강론 중이던 신부님께서 좀 더 생동감 있게 강론 좀 해보시려고 신자들에게 질문을 한 가지 던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 미워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신 분, 한번 손 들어보세요!”
적어도 두세 명은 있겠지, 했었는데 단 한명도 손드는 신자가 없었습니다.
당황스러웠던 신부님께서 절박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습니까? 옆 사람 눈치 보지 마시고 소신껏 손 한번 들어보세요.”
그래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적막감과 난감함만이 맴돌던 어느 순간,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님 한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신부님은 할아버님을 앞으로 모셨습니다.
“어르신, 정말 훌륭하십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으면, 또 얼마나 열심히 용서의 삶을 실천하셨으면 단 한명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십니까?
우리 신자들을 위해서 그 비결을 좀 말씀해주십시오.”
그 순간 할아버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 한 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훌륭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올해 제 나이가 90입니다.
원래 저도 미워하던 사람들 엄청 많았는데, 오래 살다보니 그 사람들 다 죽어버렸습니다.
용서를 하려해도 용서할 사람이 있어야지요.”
보십시오.
그렇게 어려운 용서이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집니다.
오랜 세월 주고받았던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어 버립니다.
자동으로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용서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살아있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죽음의 길’이 있습니다.
마음 한번 크게 먹고, 크게 한번 뒤로 물러서면 그게 바로 죽는 길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예수님의 자기낮춤, 어처구니없이 바보 같은 사랑을 한번 실천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연습’을 통해 죽기보다 힘든 용서지만 조금씩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만이 우리의 살 길
누군가가 가슴에 찌르고 간 비수 같은 한 마디 말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해 새벽녘까지 밤잠을 설친 적이 있으십니까?
내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연 많고 풍파 많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몇 번씩 그런 체험을 하게 되지요.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순간,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순간, 분노로 치가 떨리는 순간,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은 사실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순간’입니다.
끝까지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사실 지옥은 누군가가 우리를 보내서 가게 되는 그런 장소이기보다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장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랑이 미움 앞에서 무력하게 사라지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그 상처를 안고 숨죽여 울 수밖에 없는 순간, 우리 스스로 그 죽음과도 같은 증오의 감정을 안고 끝도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 세상은 온통 회색빛입니다.
분노가 지속되는 만큼 건강도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명치가 답답해져옵니다.
속에 큰 돌덩어리가 하나 들어앉은 기분입니다.
‘그 인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확확 달아오릅니다.
어렵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 수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정말 힘겨운 일이겠지만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있는 ‘그 인간’을 한시라도 빨리 내 속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비워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용서만이 살길이니 밥 먹듯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말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할까 말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순간부터 특별한 한 가지 현상이 우리의 신심을 뒤흔듭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삶 안에 끼어들어와 내 삶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삶이 부담스럽고 피곤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하느님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가 살길이며 용서만이 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장 21-35절).
용서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
많은 신자분들께서 제게 묻습니다.
“용서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이 혹시 없을까요?”
한 영적 스승의 가르침을 한번 귀담아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처니, 아픔이니, 용서니 하는 말이 더 이상 우리 안에 문제되지 않게 원천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길 바랍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잘 갈고 닦아 미움이나 분노, 실망과 좌절 같은 감정들에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무장하길 바랍니다.
우리 내면이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나 모욕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쉽게 넘길 수 있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으며 결국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활짝 열립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쁘게 용서하십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하느님 사랑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는 그 곳에서 새로운 차원의 영적 삶이 재개됩니다.
마음이 담긴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용서의 길을 걷기 바랍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란 감옥에서 나와 이웃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탈출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나와 이웃의 손에 미래란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여 주는 일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떨치고 용감하게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
2022. 08. 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마태오 18,21–19,1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할 수 없어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
해야 하지만
하기 싫습니다
사람이기에
하기 싫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