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교회사] (11) 역사를 바꾼 전투
313년, 종교의 자유가 찾아오다
역사를 즐기려면 몇 가지 ‘해’(年度)는 반드시 외울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해가 몇몇 되는데, 특히 313년은 반드시 외워야 한다. 사실 가톨릭교회는 313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3년은 고구려 미천왕이 한반도에 남은 마지막 한사군인 낙랑을 멸망시켜 중국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한 해다. 호동왕자를 사랑했던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던 그 해, 유럽에선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 문이 열린다. 가톨릭에 대해 단단히 문단속 하던 로마가 드디어 빗장을 푼 것이다.
이 해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소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교 자유를 선언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전환점은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313년의 종교 자유가 어떻게 찾아왔는지 그 배경을 추적해 보자.
로마는 3세기에 들어서면서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군인 황제가 잇달아 나오는 등 내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 내란을 종식시킨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2?)다. 로마 방위를 위해 4두 정치체제를 도입한 이 황제는 동시에 가톨릭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가했다. 마지막이자 가장 피해가 컸던 박해였다. 그는 칙령을 발표하고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모든 가톨릭 신앙 모임을 불허한다고 공포했다. 또 가톨릭 신앙인은 고발 없이 추적하여 고문할 수 있도록 했고, 모든 사람이 로마신의 제의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노역에 처했다.
그랬던 그가 은퇴한 후 로마는 강력한 리더십을 잃었고, 더욱 큰 혼란에 빠진다. 각지에서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고, 이는 로마 전체를 권력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로마 동방과 서방에서 각기 토너먼트가 벌어졌고, 로마 서쪽 토너먼트 결승에선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I, 280?~337)와 막센티우스(Maxentius, ?~312)가 맞붙었다.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 세력을 넓히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마지막 결전을 위해 막센티우스가 있는 로마로 진군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병력에 있어서 절대 열세였다. 게다가 막센티우스는 로마 성벽이라는 든든한 방어벽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막센티우스는 결정적 실수를 한다. 수성(守城) 작전을 편 것이 아니라 병력을 이끌고 성을 나와 콘스탄티누스와 정면대결을 펼친 것이다. 아마 로마를 전쟁터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보다 2배 정도 많은 병력의 우위를 믿었을지도 모른다. 막센티우스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로마를 나서 약 10km 진군한 다음 진을 내렸다. 7km 뒤에는 테베레 강이 있었다. 말하자면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후퇴할 경우 강에는 건널 수 있는 다리는 딱 하나였다.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다. 로마에 방문했을 때 관심이 있어서 직접 찾아가 봤는데 의외로 다리 규모가 컸다. 폭이 약 8m이고 길이는 130여m다.
전투가 시작됐다. 콘스탄티누스 병사들은 야영생활에 익숙했고, 게르만족들과의 치열한 전투 경험이 있었다. 반면 막센티우스 병사들은 오랜기간 로마의 편안한 생활에 젖어 있었다. 게다가 막센티우스 병사들은 후퇴하면 돌아갈, 안전한 로마가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 병사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혼전이 벌어지자 먼저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막센티우스 병사들이었다. 후퇴하는 군대엔 질서를 찾아 볼 수 없는 법이다. 막센티우스 패잔병들은 한꺼번에 밀비우스 다리로 몰려들었고, 여기서 수많은 이들이 압사했다. 다리에 올라서지 못한 병사들은 맨몸으로 강에 뛰어들었지만 무거운 갑옷 때문에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대승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당시 교부이자 교회사를 집필했던 에우세비우스(Eusebius, 263~339)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황제는 석양이 질 무렵,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 문양을 보았다.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승리하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던 그는 잠이 들었고 그때 그리스도가 찾아왔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문양을 그에게 건네며 적과 싸울 때 사용하라고 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이 십자가 상징을 깃발에 새긴 후 전투에 나섰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이 문양이 십자가 문양이었는지, 또는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키로 문양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 역사를 즐기려면 몇 가지 ‘해’(年度)는 반드시 외울 필요가 있다. 특히 313년은 반드시 외워야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환시를 통해 본 십자가 상징을 앞세워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했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종교 자유를 선언했다. 그림은 바티칸 폰티피치 궁에 있는 ‘십자가의 환시’를 묘사한 라파엘로의 작품.
어쨌든, 밀비우스 다리 전투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서방 토너먼트의 최후 승자가 된다. 이때 로마 동방 토너먼트에서 승리한 사람은 리키니우스(Licinius, 270?~325)였다. 각 리그에서 우승한 두 사람이 이듬해 밀라노에서 만났다. 그리고 회담을 통해 공동으로 칙령을 발표한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밀라노 칙령이다.
“오늘부터 가톨릭교회든 다른 어떤 종교든 누구나 원하는 종교를 믿을 완전한 자유를 인정받는다. …지금까지 발령된 모든 그리스도교 관계 법령은 오늘부터 모두 무효가 된다.”
313년, 완전한 종교 자유가 획득됐다. 물론 가톨릭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신앙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가 이후 내놓은 각종 정책은 가톨릭 육성책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과연 신앙에 몰입했는지, 혹은 정치적으로 신앙을 이용했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지만 그로 인해 가톨릭교회의 부흥이 찾아온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국가나 개인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교회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반환토록 했다. 경매를 통해 교회 재산을 사들인 이에게는 국가가 직접 배상했다. 이 칙령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장려하고,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각종 특권을 주었다. 교회 설립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밀라노 회담 이후 잠잠하던 양대 리그 챔피언들의 몸이 다시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로마 서방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는 월드 챔피언 자리를 놓고 마지막 격돌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