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 리금호 시인의 불국의 성산 - 구화산 여행기(下)
신라국의 왕자로 중국에 와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김지장 보살의 도장(道場) 구화산은 중국 민중의 마음에 오연히 솟아 있다. 김지장의 이름은 구화산과 함께 영세불멸하리라!
글/리금호 시인(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본문은 중국 심양 리문호 시인이 '신라의 왕자 출신 승려' '등신불'로 유명한 김교각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쓴 글입니다
구화산에서는 김교각을 구화산 차도(茶道)의 시조(始祖)라 한다. 역사적 기록의 시를 보면 구화산의 차는 김지장께서 동도의 신라국에서 가져 왔다, 혹은 서역에서 가져 왔다 한다. 학자들의 견해는 한국에는 아직 원생차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신라때 중국에서 가져간 것이라 한다. 그리고 김지장이 서역에 간 적은 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가져오고 간에 김지장이 구화산 차나무를 재배한 것은 공인하는 사실이며 구화산 차도의 시조라는 것도 공인하는 사실이다.
비록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둘 수 있었으나 승도가 많아져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승려들은 종종 굶었으며 관음토를 캐여다 허기를 달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아들이 이렇게 고생한다는 소식을 접한 모친은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왔다고 한다. 전설에 불과하지 사실인지는 어떠한 문헌에도 고증할수 없다. 어머니는 3주야를 울어 눈이 멀어졌다. 김교각은 효심이 지극하여 우물의 물을 떠다가 3년을 닦아 주어 드디어 눈이 밝아졌다. 훗날 사람들은 그 우물의 이름을 <명안천(明眼泉)>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우물 위에 탑을 세워 '낭낭탑(娘娘塔)'이라 명명하였다. 이 탑은 아직 있다.
781년 당지의 태수 장암(張岩)은 몹씨 김교각을 숭상하였다. 장암은 당나라 조정에 상서를 올려 정황을 반영하였다. 조정에서는 김교각의 수행에 감동되어 화성사 자리에 사원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그 사원은 어느 병란에 소각되여 존재하지 않고 지금의 화성사는 명조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김제장의 부친 성덕왕이 재위한 후 성정왕후는 아들을 데려 오라하며 신라의 대신 외삼촌 소우(昭佑)와 소보(昭普)를 구화산으로 보내였다. 김교각은 외삼촌을 만나 무척 반가웠을 것이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 또한 얼마나 간절했으랴. 그러나 이미 굳게 다진 철석같은 마음을 외삼촌으로서는 다잡을 수 없었다. 결국 조카의 결심에 감복한 외삼촌도 구화산에 남아 수행하기로 하였다. 아마 김교각을 남겨 놓고 간다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신라국에 김교각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갈 면목이 없어 가지 않은 지도 모른다. 비록 외삼촌은 구화산에 남아 수행한다고 하지만 김교각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오계(五戒)>를 위반하며 경상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기에 하는 수 없이 하산시켜 속세로 돌아가게 하였다.
두 외삼촌은 지금의 구화산 이성촌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후 당지 사람들은 이 두 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성전(二聖殿)>을 지어 기념한다. 이성전 전당에는 관복을 입은 문관과 무사복을 입은 무관 성상이 있는데 바로 김교각의 외삼촌이다. 매년 음력 7월 30일은 김지장의 성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장법회>를 성대히 진행한다. 이튼날 8월 1일에는 이성전에서 <이성회>를 진행한다. 제사상에는 술과 고기도 놓였다. 제사가 끝나면 모인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한다. 이는 대체로 한국의 제사와 비슷한 것으로 구화산에서는 특수한 종교 풍속이라 한다. 이때면 산상의 일부 중들도 슬그머니 찾아와 행사에 참가한다는 핑계를 대고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고 간다고 한다.
794년 99세 되는 해 김교각은 중도들을 불러 고별을 고하며 앉은 자세로 무병 원적(圓寂)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돌연 산이 진동하고 새들이 울고 화광이 치솟았다 한다. 김지장의 육신을 석관에 넣어 모셨는데 3년 후에 열어보니 하나도 부식됨이 없이 얼굴이 태연하였으며 손가락 관절에서는 금고리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지장왕이 응화(應化)된 육신이라 인정되어 삼층석탑을 지어 지금의 영광령(靈光嶺)에 모셔져 있다. 영광령이란 산 이름도 김지장 왕을 모실때 산에서 영광이 비껴 나왔다하여 지은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구화산에서는 육신을 신봉하는 습관이 있다. 소위 말하는 미이라는 기후가 건조한 사막이나 내륙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구화산에서는 남방의 습윤한 지구로서 불가사의한 일이다. 구화산에서는 이미 14구의(그 중 하나는 녀승) 육신이 발견되였는데 의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육신 사리라 한다. 극 소수의 스님만이 이런 현상을 가진다. 스님이 죽으면 커다란 옹이에 모셔 놓는데 3년이 되어 부식하지 않으면 유약을 칠 하였다가 다시 3년이 되어 금박을 씌운다. 그러면 몇 천년을 보관할 수 있다. 백세궁(百世宮)은 청나라때 126살에 세상 뜬 명정스님의 육신사리가 있는 곳이다. 약 1.2m 높이의 물독은 명정스님의 육신을 모셨던 독이다. 그 독은 이상하게 한국의 뚜껑이 있는 옹이와 비슷하다. 이런 양식의 독은 신라의 기술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학자들이 연구할 바이다.
화성사와 백세궁을 구경하고 나니 벌써 오후 5시 반이다. 나는 하산하여 호텔에서 주숙하고 이튿 날인 4일 7시 반에 또 다시 버스를 타고 구화산에 올랐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하지만 향불과 홍촉을 태우는 사람들은 사원마다 붐빈다.
오늘 내가 중점으로 볼 것은 김지장의 육신사리가 보존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영광령으로 오르려면 500계단의 층대를 올라야 한다. 층대는 세 개의 전당으로 나뉘였는데 첫 전당은 여래보살을 모신 전당, 두 번째는 대원 지장보살을 모신 전당, 정상에는 육신보전이다. 이 층대의 첫 입구에는 약 30m 높은 대문이 있다. 대문에는 행원무진(行願無盡) 이란 금박 글이 가로 새겨져 있으며 기둥 마다에는 금박의 글들이 수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 <지옥미공, 서불성불(地獄未空, 誓不成佛)>란 금박글이 있다. 김지장은 생전에 <아불입지옥, 수입지옥(我不入地獄, 誰入地獄)>라 하였으며, <지옥미공, 서불지옥>한다고 호언을 하였다. 즉 지옥에서 모든 중생을 구원하기 전에는 결코 보살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는 종신 분투하였다.
첫 전당을 보고 나는 다시 층대를 오른다, 두번째 전당으로 오르는 층대는 장랑이기에 우산이 필요치 않았다. 오르고 오르면 웅장하게 세워진 <지장선사(地藏禪寺)>이다. 안에는 김지장의 성상과 양쪽에는 민량공과 도명법사가 시위하여 있다.
<지장선사>를 지나 계속 오르면 마지막으로 99개(김지장의 수명을 상징)의 층대가 60도 각으로 가파르게 나 있다. 해설원이 말하기를 가운데 연꽃을 밟고 오르면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요, 왼쪽의 돈을 밟고 오르면 재운을 기원하는 것이요, 오른쪽의 무엇을 밟고 오르면 관(官)운을 기원하는 것이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올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헐떡이며 단숨에 가운데의 연꽃, 평안을 밟고 올랐다. 숨이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것일까?
<육신보전>은 2층의 단청색 웅장한 대궐이다. 1층 정문 위에는 <동남제일산(東南第一山)>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2층에는 <호국월선보탑(護國月身寶塔)>란 편액이 걸려있다.
797년 최초의 건축은 김지장의 육신사리를 모신 3층의 석탑이였다. 송나라 때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탑전(塔殿)>을 지었는데 바로 지금의 건축이다. 그후 청나라 때는 석탑에 7층 17m 의 목탑을 건축하여 씌웠다. 목탑의 내벽에는 적금(赤金)으로 쓴 <지장본원경>이 적혀있다. 석탑속에는 지금도 김지장의 육신사리가 보존되어 있다. 탑 앞에 앉아 있는 도금의 김지장육신 성상은 모조일 뿐이다.
산의 정상이라 하지만 <육신보전>앞 마당은 광장과 같이 넓었다. 약 8m 높이의 청동탑이 4개 세워지고 양쪽에는 3층 4각형의 커다란 루각(樓閣)이 날듯이 허공에 추녀를 치켜들고 있다. 촉대(燭臺)에서는 수백개의 홍촉이 타고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청동탑과 향로들이 장관을 이룬다. 수많은 사람들이 향불을 붙여들고 동서남북으로 기도를 올린다. 그러고는 전당에 들어가 김지장 보살왕에게 절을 하며 무엇을 소원한다. 대비대원(大悲大願)의 김지장보살에게 중국의 민중은 이렇게 1천2백년을 기도하며 향불을 지폈으리라.
필자는 이전에 한국의 불국사나 암자들을 구경한 적이 있다. 한국 사당의 특점은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울려 있다. 산과 암자들의 호흡이 조화롭고 오붓해서 아늑한 감을 준다. 그러나 구화산의 전당들은 산의 정기를 압도하여 위엄스런 감을 준다. 백세궁이나 육신보전은 산 마루에 웅장하게 지어져 산의 기세를 억눌러 놓은 감을 준다. 필자는 왜서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중국의 불교는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런 것 같다.
한국에서도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원은 웅장하다. 예를 들어 익산 미륵사 유적지가 실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의 사원은 산마루에 지은 것을 보지 못했다.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이에 연구를 해본 적이 없기에 원인을 모른다. 하여간 구화산의 전당은 모두 장엄하게 지어져 산의 기세를 압도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산을 내려와 몇 개의 사원을 더 보고 나서 나는 오후 3시 버스로 귀로에 올랐다. 몇 일 어간에 1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였으니 여행사에서도 기차표를 살 수 없어 부득불 버스를 타고 상해로 간다. 버스에서 바라본 구화산은 장엄하고 수려했다.
천 이백년의 역사에는 얼마나 많은 동란이 있었던가? 841~846년간에는 이염이 도교를 성행하고 불교를 탄압하는데서 구화산의 사원 10여개가 소각당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불교 보호 정책 하에 사원이 40여개로 늘었는데 12개는 조정에서 지은 것이다. 원나라 조정은 라마교를 숭상하였지만 구화산의 사원은 여전히 보전되였다.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승려의 출신으로 불교를 지지하여 구화산의 사원은 100여개로 늘어났고, 그때로부터 산서의 오대산, 사천의 아미산, 절강의 보타산과 함께 중국 4대 불교 성지가 되였다.
청나라 제왕은 라마교를 추앙하지만 한족 지구의 불교에 대하여도 중시하였다. 1853~1863년 구화산 주위에서 청군과 태평군간에 결전이 있었다. 태평군의 반불 행위로 인해 많은 사원들이 파괴되였다. 청나라 말기까지 조정의 자금 조달과 특히는 상인, 신도들의 헌납하에 사원들이 재건되였으며 사원과 암자가 150개에 도달하였고 승려는 무려 3~4천명 이였다. 신해혁명후 5.4운동때 <공가점을 타도하자>란 일부 급진 지식분자의 구호아래 불교도 탄압을 받았지만 구화산은 도시와 떨어진 편벽한 곳이라 큰 손실은 없었다. 국민당의 상층에서도 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하여 그런대로 구화산의 사원은 여전히 150개였다 그 후 일본 침략군의 몇 차례 소탕을 겪으면서 일부는 파괴되였다.
신 중국이 성립된 당시 구화산의 사묘는 90개였으며 승려 200명이 있었다고 한다. 토지개혁을 할 때는 승려들에게 땅도 분배해 주었다. 노동과 수련을 결합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극좌 사조로 인해 사원과 암자, 문물들이 미증유의 훼손을 보았다. 승려들은 핍박에 못 이겨 환속하거나 멀리 떠났으며 그때부터 천년의 향불은 꺼지고 말았다.
개혁개방 이 후 점차 종교신앙에 대한 정책이 낙실되면서 다시 사원의 문이 열리고 향불을 지폈으며 사원들을 수건하고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1998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1.5억 위안(그중 정부의 재정 조달은 98만 위안이고 그 외는 민자와 헌금)의 자금이 투입되였다. 물론 1998년 후로 계속 건설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규모가 형성되였다. 특히 한국정부와 한국 불교계의 자금을 조달한 구체 금액은 모르지만 적지않을 것으로 해설원의 말에서 추측된다. 지금 구화산에는 78개의 사원과 암자가 있으며 400여명의 승려가 있다고 한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귀로에 오르며 운무에 잠겨 비가 내리는 구화산을 우러러 본다. 천 이백년 역사의 수난을 겪은, 또한 그 속에서 멸하지 않고 발양된 구화산 - 불국의 성산은 장엄하고 수려하다. 경제발전의 급물살과 관광업의 발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낙후했던 구화산의 주변에도 천지개벽의 발전상이 안겨 온다. 도처에 굴삭기와 기중기가 작업하고 건축물이 일어선다. 커다란 기차역과 버스터미널도 금방 운영에 투입되였다. 그것은 구화산을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극부상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신라국의 왕자로 중국에 와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김지장 보살의 도장(道場) 구화산은 중국 민중의 마음에 오연히 솟아 있다. 김지장의 이름은 구화산과 함께 영세불멸하리라!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38호 2015년 6월 5일 발행 동포세계신문 제338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