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27
2월7일[연중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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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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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6Uaz89HpqE
[예수회 정준민 다니엘(국내연학)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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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토록 참혹한 야만의 시대, 흔들림없이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의인들>
안타깝게도 우리네 인류 역사 안에 참혹한 사건들은 거듭 반복됩니다. 폭력적이고 교활한 악인의 등장과 승승장구,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의인들과 선인들의 등장과 무고한 죽음이 그렇습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하시는 공평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그리 끔찍한 현실을 -의인의 고통과 죽음- 허락하시는지, 정말이지 이해가 안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저토록 무례하고, 저토록 사악한 악의 무리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작당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데, 정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어찌 이리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지, 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냐고 따지고 싶은 요즘입니다.
오늘 복음을 장식하는 세례자 요한 케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평생 주님의 길을 미리 닦는 선구자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대변자로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구원의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최종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무고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 묘하게도 한 사악한 여인의 모략과 간계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감추고 싶은 과거의 비리와 악행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공연하게 경고한 세례자 요한에 대해 강한 앙심을 품고 있었던 헤로디아의 증오와 복수심이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찌 이리도 오늘 우리의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지 오싹한 느낌마저 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토록 참혹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희망해야 마땅합니다. 지금은 비록 악이 활개를 치고 악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느님의 선은 언젠가 반드시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진리를 증언하다가 박해를 받고 무고하게 고통받고 죽어간 의인들의 생애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오랜 인류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이토록 참혹한 야만의 시대, 단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적으로 진리를 증언하고 계시는 의인들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항상 그분들 고난의 여정에 끝까지 동반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루빨리 짙은 안개가 활짝 걷혀 세상만물의 형체가 제 빛깔을 발하듯이, 어서 빨리 진위가 가려져,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날뛰는 무리들이 무대 뒤로 조속히 사라지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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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죄는 핑계 대지 않는다>
AP연합 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 노인은 아무에게라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대로 지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의 한 은행에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횡령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재판부에 회부되자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제가 40년 동안 이 죄의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아왔으나 최근 들어 나를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진술을 다 들은 재판장은 말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이미 공소시효가 많이 지났기 때문에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죄책감은 그것을 죄로 고백하고 합당한 보속을 하여 공적인 용서를 받을 때 사라집니다. 우리에게는 죄책감을 없앨 수 있는 ‘고해성사’란 큰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보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겸손하게 고백하고 보속을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서 행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를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자 다른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와 같은 예언자라고도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헤로데는 그 다양한 예수님을 향한 시각들 가운데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러 오셨음까지 믿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한 번 죽였던 요한을 두 번 못 죽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핑계’를 대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듯, 세상에 어떠한 죄도 핑계 없이 짓는 죄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그것은 죄야!”라고 말해주는 양심이 있기에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항상 적당한 핑계를 먼저 찾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어.”,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애들이 속을 썩여서.”, “상대가 먼저 잘못한 거야.”,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랬겠어?”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이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핑계 대는 것을 좋아하다보면 헤로데처럼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해성사 때도 부쩍 ‘상담’을 하러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사제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것은 이해하겠으나, 그러다가는 고해성사까지도 죄의 합리화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헤로데와 같은 상황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구원을 받으려면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니다.”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죄는 핑계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죄는 죄라고 깨끗이 인정하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고해성사로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시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해지고 그 눈으로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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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걸 느낍니다. 병자성사를 받은 형제님이 다음 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보통 장례미사는 선종 후 3일 후에 하게 됩니다. 장례미사가 예정된 날은 제가 몇 달 전에 약속한 날이었습니다. 약속을 변경하려고 생각했습니다. 항공권도 예약했고, 숙소도 정했지만, 장례미사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족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고인의 가족이 한국에서 오기 때문에 장례미사를 늦추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미안하지 않도록 일정을 조정해 주셨습니다. 약속도 지킬 수 있었고, 장례미사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원하는 걸 채우려고 하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법으로 거두어 가십니다. 아합왕은 힘과 권력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합왕의 잘못을 심판하셨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었던 노인들이 수산나를 욕보이려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보내셔서 노인들의 욕망을 심판하셨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옳은 말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사람의 방법으로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헤로데는 체면 때문에 의로운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울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2024년 12월에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국방부 장관은 군을 동원했습니다. 장관들에게는 비상계엄에 해야 할 임무를 주었습니다. 치밀한 작전과 대통령의 권한으로 비상계엄은 성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법으로 비상계엄을 해제하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국회로 달려온 국회의원들이 있었습니다. 맨몸으로 총을 든 군인들을 막아선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를 결의하였고, 비상계엄은 5시간 만에 해제되었습니다.
공수처와 검찰은 헌법을 위반하고, 국헌을 문란하게 한 군인들을 수사했습니다. 법원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에 대해서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공수처의 소환 조사에 대통령이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영장 집행은 경호처의 반발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직무가 정지되었지만,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법원은 2차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이번에는 경호처의 직원들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대통령은 체포되었습니다.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법 앞에는 평등하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예상되는 길이 있습니다. 국회에서 탄핵당한 대통령에 대해서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면 대통령은 파면되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하면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할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법과 원칙에 따라서 결정하리라 믿습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건강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환난의 날, 그분은 나를 당신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 천막 은밀한 곳에 감추시며,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세우시리라.” 오늘은 서울대교구의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새 사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엊그제 같은데 저도 벌써 사제가 된 지 34년이 지났습니다. 지나온 발걸음을 보면 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저를 지금까지 사제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사제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제는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험한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와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있다면, 다윗처럼 자기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친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제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힘을 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새 사제들이 주님을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주님!
새 사제들이 겸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성실함을 주소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제가 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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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강직한 올곧음과 헤로데 임금의 비열한 나약함 사이의 대조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과 권력과 탐욕과 향락을 따라 사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 자신보다는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모든 정의를 외면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 두려움 없이 권력자의 죄악을 고발하는 사람의 결연한 외침과 순간의 기분대로 경솔한 맹세를 남발하면서 체면이나 원한에 이끌려 의인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입니다.
모든 이에게 회개를 요구하던 요한은 임금에게 맞선 결과가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올지 따지지 않고 그를 꾸짖습니다. 우리는 자주 불의를 고발하고 바로잡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으면 ‘나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외면합니다. 그런데 사실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자매들인 우리는 서로의 일에 상관없는 사이가 아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우리가 마귀하고만 아무 상관이 없을 뿐 모든 인류와 상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타박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부당한 것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도우면서 그 상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언자들입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요한의 혀를 영원히 침묵시켰다고 믿었지만 그 혀는 오늘날까지도 교회 안에서 “옳지 않습니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폭군은 요한의 머리를 베었지만 지금도 하느님의 예언자들 안에서 되울리는 그의 소리는 베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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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4-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하였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절)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참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 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절)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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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마르 6,17-19)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1-23)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7-29)
1)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선포하였고, ‘모든 사람’을 꾸짖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이 꾸짖은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하나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싫어한 사람이 헤로데와 헤로디아뿐이었을까?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모두 요한의 회개 선포를 싫어했을 것입니다.
또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한 사람이 헤로데와 헤로디아뿐이었을까? 그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은 대부분 요한을 죽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행동으로 실행할 용기는 없었겠지만, 마음속으로는......>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을 때, 당시의 여론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헤로데가 한 짓에 동조한 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헤로데를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요한을 죽인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실상 살인죄의 공범이 된 것입니다.>
2) 헤로데와 헤로디아와 동조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7-21)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자들’이고, ‘어둠으로 빛을 덮으려고 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덮으려고 더 큰 죄를 지었는데,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한 죄이고,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한 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받기도 전에 자기들이 스스로 심판을 향해서 간 것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는 모습이 곧 ‘이미 심판을 받은’ 모습입니다.
<지옥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하는 자들만 있는 곳입니다. 무슨 형벌을 얼마나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형벌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심판이 아니라 사람들을 심판에서 구하기 위한 일입니다.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일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그가 순교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듣지 않았고, 회개하기를 거부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지 않았고, 구원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런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필연’은 아니고,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요한은 자신이 맡은 사명을 ‘죽음’으로 완수한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임무 수행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구원 사업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데,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의 회개와 구원이 아직도 미완성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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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세상의 사람 “헤로데”의 이름이 일곱 번, 하느님의 사람 “요한”의 이름이 일곱 번 거듭됩니다. 이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두 이름을 일곱 번씩 드러냄으로써 두 삶을 철저히 대조하고 서로 맞서게 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이 가운데 어떤 삶을 살지를 곱씹어 보라는 것 같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는 체포, 감옥, 구금, 처형, 죽음, 무덤과 같은 표현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표하듯 등장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라는 말씀대로 세례자 요한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길을 걸어간 선구자였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서부터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을 반기며 기뻐하던 요한은(루카 1,44 참조), 예수님에 앞서 광야에 나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처럼, 그리고 그분에 앞서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이사야 예언서 53장 참조)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느끼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코 1,3)인 요한의 외침과 선구자다운 증언의 삶을 우리 삶에서 재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례자 요한이 외친 회개의 삶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를 씻고 악습을 끊어 내는 회개의 삶, 헛된 욕망을 정화하는 기도와 절제의 모범을 배울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진리를 상대화하고 복음의 가치를 희석시키며 세상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이 세상에(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참조) 대하여 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증언하는 그의 용기와 정의를 위한 희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참된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늘 좋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고 그분께 희망이 되어 주었을 테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코 1,7)라고 말하며 늘 스스로 낮추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기 위하여 먼저 요한에게서 배웁시다. 그러고 나서 요한의 정신과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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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구약의 구원 역사를 마무리하며, 신약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루카 16,16)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헤로데라는 권력자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참수를 당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의 삶과 비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는 이사야의 선포를 수용합니다.(마르 1,2-4 참조)
그 옛날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이사야와 세례자 요한은 삶의 마지막 모습도 닮았습니다. 이사야는 므나쎄 임금의 폭정을 거슬러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참수를 당하였고,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임금에게 참수를 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외침은 참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약한 사람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기에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렇게 약한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예언자적 삶을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언자적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요? 그 음성과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나를 변화시켜 봅시다.
나만을 위하고 나만을 향하였던 마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외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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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가 자신의 죄 때문에 두려워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요한은 인간의 욕망과 교만 때문에 죽었습니다. 성경은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라고 말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소리였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소리를 사람의 교만이 죽인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소리가 우리 안에 들려오지만, 우리의 욕심과 욕망과 교만은 그런 하느님의 소리를 모른척하기 때문입니다. 모른척하지만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소리인지 말입니다. 어느 방향이 하느님 쪽인지 말입니다.
헤로데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주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모습이 자신이 죽인 요한의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욕심과 교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죽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그 모습을 달리할 뿐 다시금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을 때일 뿐 그전까지 그 말씀은 늘 우리에게 들려올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어둠이 그 말씀을 모른척 할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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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연인이 데이트 중이었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우리 파스타 먹으러 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자 친구는 “나는 파스타 정말 싫어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가 싫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싫은 것을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란 묘해서 자기가 이야기한 것을 상대방이 싫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싫어지는 법입니다. 저 역시 싫은 것은 곧바로 말하는 스타일임을 반성합니다.
사실 더 잘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남자 친구의 경우를 볼 때, “우리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갈까?”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일식은 어때?”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 감정이 담긴 말을 쓰게 되면서,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부정적 감정은 전투할 때의 감정이라 에너지 소비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서 긍정적 감정은 평화로울 때의 감정이라 에너지 소비도 거의 들지 않고 부담도 없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해서도 부정적 감정을 내려놓고 긍정적 감정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싫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자기를 싫어할 사람을 불러들이는 사람이고, 좋아’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자기를 좋아할 사람을 불러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과 행동이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또 자기가 보고 싶은 행동만을 원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말과 행동을 너무 쉽게 합니다.
이 결과는 상대로부터 똑같이 부정적인 감정과 담긴 말과 행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힘든 삶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수용할 수 있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겸손의 마음이 긍정적 감정을 만들어 행복의 삶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본부인과 이혼하고,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합니다. 그 결과는 본부인의 아버지인 나바태아 임금이 분노하여 전쟁이 일어납니다. 유다 전 지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 한 사람의 잘못이 많은 이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서 혼인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줍니다. 헤로디아 딸의 춤은 보고 싶었던 것이고, 세례자 요한의 말은 듣기 싫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나바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임금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과 보고 싶은 행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긍정적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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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마르코 6,14-2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선한 한걸음이
선한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악한 한걸음이
악한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참된 한걸음이
참된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헛된 한걸음이
헛된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의로운 한걸음이
의로운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불의한 한걸음이
불의한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푸르른 한걸음이
푸르른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빛바랜 한걸음이
빛바랜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떳떳한 한걸음이
떳떳한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부끄러운 한걸음이
부끄러운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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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 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고,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 6,25) 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런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을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 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장구만 치는 간사한 사람으로 있었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그 모두가 잘못된 것에 대해 침묵을 지켰고, 자신에게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인의 죽음이라도 대수롭지 않기 마련입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야고 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 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기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없애야 하겠습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2-13)
어떤 처지나 여건에서도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꿋꿋하길 바랍니다. 주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 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입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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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마르코.6,14,16)
의로운 사람 요한 세례자른 죽인 헤로데 임금이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소문으로 듣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양심을 다시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기에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다 좋은 양심은 아닙니다. 빛과 어두움을 식별하며 선한 양심으로 다듬어져야 합니다. 식별과 부단한 성찰을 통하여 좋은 양심을 길러야 우리의 삶을 맑게 비추어 줍니다.
잘 발달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른 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양심이 선한 만큼 잘못된 일도 민감하게 느낍니다. 작은 잘못이라도 양심의 일러주는 소리를 무시하면 우리의 양심은 더럽혀집니다.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둔감해지고 불의를 과감히 저지릅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양심이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기에’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양심을 찌르는 괴로움을 느꼈지만 그 소리를 외면하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현실에 젖어 생존의 상황을 넘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수록 현실의 욕망에 물들지만, 양심에 귀를 기울일수록 우리는 주님께 젖어듭니다.
잘 닦지 않아 때 묻은 거울과 같은 흐린 양심은 우리를 왜곡시켜 비춥니다. 그리고 자신과 이웃과 세상의 모습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진리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계엄 선포 후유증으로 나라가 아직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어수선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고 진리와 양심을 외면하고 그릇된 판단을 하여 요한 세례자를 죽인 어리석은 임금 헤로데같은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히브리서(13.7)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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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르 6,14-29)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소문을 전해듣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누구는 ‘엘리야’의 현신이라 하고, 다른 이는 모세가 예언한 ‘그 예언자’라고 하자,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추측해 본 것이지요. 하지만 헤로데의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일으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르단강으로 자기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종말과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뿐이지요.
그것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이라고 단정지은 것은 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툭 하면 입바른 소리를 하여 마음이 불편하게 만든 요한을 자기 손에 피 안묻히고 제거하기 위해 양녀인 살로메를 교묘히 이용했고, 무죄한 의인인 요한의 목숨을 뺏는 것이 옳지 않은 일임을 잘 알면서도 임금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했던 말을 번복하면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구차한 핑계로 살인을 저질렀으니 그 죄책감이 두고 두고 헤로데를 괴롭혔던 겁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죄책감을 품고 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후회와 절망이라는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혀 과거 안에 갇히게 될 뿐이지요.
그러니 헤로데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하느님께 큰 죄를 지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받아들이며, 그 모든 것을 바로잡아 선으로 되돌리실 수 있는 분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분 말씀과 가르침에 비추어 자기 삶을 돌아보며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방향이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입만 나불거리며 거짓으로 자기 잘못을 덮으려고만 했기에 회개할 때를 놓치고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산다면 언제든 헤로데처럼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님의 뜻과 가르침에 비추어 ‘예’할 것은 ‘예’하며 따르고, ‘아니오’할 것은 단호하게 배격하는게 중요합니다. 하느님 뜻을 따라야 구원받는데 그 과정에서 내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내 체면이 좀 깎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부족하고 약한 인간이기에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죄를 지은 이후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이지요. 죄악과 거짓으로 쌓아올린 욕망의 바벨탑을 부수기 아깝다고 그대로 놓아둔 채로는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참된 성전을 지을 수 없습니다. 잘못 지은 건물은 완전히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짓는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철저한 성찰과 통회로 내가 저지른 죄악을 완전히 부수고 주님 뜻을 철저히 따르는 순명으로 한 층 한 층 단단하게 다시 쌓아올려야만,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고 나도 주님 안에 머무르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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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박혀서도 있어도 침묵으로 외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이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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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코 6,18)
주님!
뼈 속에 새겨져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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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섬김의 삶>
-“자녀답게, 제자답게”-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흰눈덮인 산야를 보니 저절로 솟아나는 자작 애송 고백시입니다.
오늘 읽는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일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일을 맡아도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다.”<다산>
“공자는 곡식 창고 관리가 되어서는 ‘회계를 정확하게 했을뿐이다’라고 하시고, 가축을 기르는 관리가 되어서는 ‘소와 양이 잘 자라게 했을 뿐이다’라고 하셨다.”<맹자>
분명, 다산 정약용의 삶이, 맹자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도, 주님의 제자다운 삶도 이러할 것입니다. 메르켈의 회고록이나 김대중 육성 회고록중 평생 어느 자리에 있던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삶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말그대로 한결같이 끝까지 노력하는 천재의 삶이었습니다. 70대 넘어 읽는 책 대부분이 위인들의 평전이나 자서전, 회고록입니다.
지난 월요일 2월3일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었습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입춘을 맞이하여 큰 길운이 있기를 바란다)”, 또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을 맞이하여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라는 카톡문자를 받기도 했습니다. 모두 한 해의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는 조상들의 지혜와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는 글귀입니다. 어제 내린 눈으로 온세상이 새하얗습니다.
예전 써놓은 '나 이런 일을 알고 있다'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 님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내린
하얀길 마냥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입춘이 지나 흰눈덮인 산야를 보니 흡사 봄속에 겨울이 들어온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를 연상케 합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의중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또한 주님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한다 싶습니다. ‘열두 제자를 파견하다’와 ‘오천명을 먹이시다’ 주님의 맹활약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세례자 요한의 죽음’이란 실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침 생명의 봄안에 죽음의 겨울이 포위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어둡고 춥습니다. 헤로데의 우유부단과 경거망동을 보면 그가 삶의 줏대가 없는 중심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봅니다. 헤로디아의 부추김에 넘어가 의롭고 거룩한, 무죄한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후, 예수님 소식에 세례자 요한이 환생한듯 전전긍긍 불안해 합니다. 어찌보면 빛과 진리, 정의를 상징하는 세례자 요한과 어둠과 거짓, 불의를 상징하는 거악의 일당인 헤로데와 헤로디아와 그의 딸과의 대결같지만, 하느님과 악과의 싸움입니다.
악의 승리인 듯 하지만, 빛속의 어둠이자 생명의 봄속의 죽음의 겨울과 같아 결코 어둠이 빛을, 죽음이 생명을 이길수 없습니다. 빛에 저절로 사라지는 어둠이요, 오는 봄앞에 저절로 물러나는 겨울입니다.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은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튼 터치하듯 그 뒤를 이어 맹활약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면면히 계승되는 바튼 터치는 오늘의 천주교 신자들인 우리에게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면면히 흐르는 장강(長江)과도 같은 하느님 구원섭리의 강물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최선을 다하는 응답속에 펼쳐져가는 하느님 구원섭리의 손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우리나라의 역사를 봐야할 것입니다. 얼마동안 험난하겠지만 현재의 과도기적 상황을 통과하면서 민주공화국으로, 문화강국으로 우뚝서리라 믿습니다. 재작년 2023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앞으로도 계속될 예수님의 십자가와 태극기앞에 취침전, 기상후 바치는 만세칠창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오늘 히브리서가 참 고맙게도 우리의 더불어 삶에 좋은 지침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참된 공동체 안에 몸담고 하느님의 자녀다운, 주님의 제자다운 섬김의 삶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는 참 좋은 삶의 지침을 줍니다.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히브리서를 통해 주시는 삶의 지침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응답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에서 우리의 실천적 노력의 협조가 필수입니다.
“1.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2.손님 환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3.감옥에 갇힌 이들을, 학대받는 이들을 자신이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4.혼인을 존중하고, 부부의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고, 불륜이나 간음을 금하십시오.
5.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무엇보다 마지막 다음 대목이 중요합니다.
6.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눈만 열리면 온통 보고 배울 믿음의 성인들이자 믿음의 지도자들이요 믿음의 이웃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하느님을 기쁘게, 감동하게 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좋은 믿음으로 자녀답게, 제자답게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시편271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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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은?>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무상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나뭇잎이 늘 푸르지 않듯이 인생은 늘 똑같지 않고 변한다는 말이고, 인간도 늘 똑같지 않고 심하게 얘기하면 조변석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을 수 없지요. 그리고 그렇기에 하느님을 믿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영원히 같은 분이시라는 것이 어떤 뜻일까요?
늙지 않고 영원히 청춘이라는 뜻일까요? 힘이 빠지지 않고 늘 힘세신 분이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제게는 사랑이 똑같으신 하느님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아비보다 어미를 더 그리워하는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어머니의 사랑이 언제나 그리고 늘 똑같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의 문제이고 어미의 이런 사랑을 우린 믿는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어떠냐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라고 오늘 히브리서는 말하는데 어미의 사랑을 믿듯이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믿느냐, 영원히 같은 사랑임을 믿을 뿐 아니라, 영원히 같이 계심도 믿느냐 그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인간에게 기대거나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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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6,16)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6,14-2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라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 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 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헤로데 임금에게도 들어가자, 헤로데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합니다.
'죄 짓고는 못 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죄를 지으면 불안과 가책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말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이미 지은 죄는 뉘우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불의를 지적하면서 정의를 외치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요즘도 헤로데 임금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이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처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불의를 지적하고 정의를 외쳐야 하고, 특히 성직자들은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13,5)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돈과 권력과 명예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이거나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죽음 저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덤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공정과 정의가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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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의
아시타비(我是他非)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착각을
무너뜨리는
요한 세례자의
죽음입니다.
헤로데의
뻔뻔함이 아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있는 다윗이
되어야 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는
생명들이 아닙니다.
진정한 반성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교만에 갇힌
짐승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만이 아프게
서로를 찌릅니다.
헤로데는
소중한
세례자
요한의 일상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살고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몽상과
망상에서
깨어나
소중한
하루하루를
만나야 합니다.
요한 세례자의
목숨이
일상의 부활을
엽니다.
평범한
아침 식탁이
다시 행복하고
다시 소중하길
기도드립니다.
요한 세례자도
예수 그리스도도
가리키는 것은
망상이 아닌
일상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우울이 아닌
진정한
행복으로
되살아나길
간절히
기도드리는
요즈음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소중한
일상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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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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